1. 개요
조선 선조 31년(1598) 명나라 간신 정응태(丁應泰)가 명 황제 만력제에게 조선을 무고한 사건으로 류성룡이 실각하고 북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다.[1]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하였는데 조선은 양호와 가까웠기 때문에 양호를 옹호하였다. 그러자 정응태가 화를 내어 조선을 무고한 것이다. 조선이 해명함으로서 일이 해결되었고 정응태는 파직되고 쫒겨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2. 내용
이보다 앞서 찬획 주사(賛畫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양호와 사이가 나빠 주문을 올려 탄핵하니, 우리 나라에서는 연달아 최천건(崔天健)과 이원익(李元翼) 등을 보내 주문을 올려 변호하고, 그대로 머물러 일을 주관하게 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응태가 이를 서운하게 여겨 마침내 치주(馳奏)하기를, "신(臣)이 협강(夾江)의 섬에 가서 콩과 기장이 무성하게 잘 자란 것을 보고는 길가던 요동(遼東) 사람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곳은 땅이 기름져 수확이 서토(西土)보다 몇 배나 된다. 지난해에 조선(朝鮮)과 요동(遼東) 사람이 다투어 송사하였는데 도사(都事)가 여러 차례 단안(斷案)하여 조선(朝鮮) 사람들이 불평하였다. 그래서 만력(萬曆)[2] 20년(선조 25년[1592])에 마침내 그들 나라에 세거(世居)하고 있던 왜호(倭戶)로 하여금 여러 섬의 왜노(倭奴)를 불러들여 군사를 일으켜 함께 중국을 침범하여 요하(遼河) 이동 지방을 탈취해 고구려(高句麗) 옛 강토를 회복하여 하였다.' 하여 신은 놀라고 괴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는데 신의 부하가 몇 자의 베로 조선 사람이 음식물을 싸서 파는 구서(舊書)를 바꾸었는데 책 이름이 《 해동기략(海東紀略)》이었으며, 바로 조선과 왜가 우호적으로 교제한 사실을 적은 책이었습니다. 병술년부터 수린(壽藺)에게 서신과 예단을 갖추어 일본의 살마(薩摩) 제주(諸州) 및 대마도(對馬島) 제군(諸郡)·제포(諸浦)에 보냈고 혹 도서(圖書)를 받기도 하였으며, 해마다 왜선(倭船)과 통하여 무역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고, 혹은 조선의 미두(米豆)를 받기도 했으며 명주베 1천 필과 쌀 1백 석(石)을 이세수(伊勢守)에게 바쳐 일본에 전달(轉達)한 것 등이 모두 헌납(獻納)하고 무역한 실적(實迹)이었습니다. 또 국왕(國王)과 제추(諸酋)간의 왕래한 사신 선박에 일정한 숫자가 있고, 여러 사신을 접대하는 데 일정한 예(例)가 있으며 왜관(倭館)과 사신선(使臣船)의 대소와 선부(船夫)의 일정한 정원이 있고, 도서를 주는 데 직장(職掌)이 있으며, 맞아들이고 연회를 베푸는 데 정해진 의식(儀式)이 있습니다. 또 그들의 천황세계(天皇世系)와 국왕세계(國王世系), 정령(政令)과 풍속이 손바닥을 보듯 자세하고, 일본의 사신을 빌어 유구(琉球)와도 통하였습니다. 또 그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면 웅천(熊川)·동래(東萊)·울산(蔚山)에는 항상 왜호(倭戶) 2천 남짓이 살고 있으며, 전산전(畠山殿) 부관(副官)의 서계(書契)에는 국왕과 화친하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명주와 쌀을 바쳤다는 설이 근거가 있고, 왜인을 불러들여 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관백(關白)이 걸출한 우두머리인 줄을 모르고서 조선이 불러들이자 피폐한 것을 틈타 마침내 단번에 조선을 습격해 격파했으니, 이는 조선의 군신이 자초한 화입니다. 조선에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삼경(三經)》을 배워 이미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알 것이니 삼가 천조(天朝)의 정삭(正朔)을 받들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또 일본의 강정(康正)·관정(寬正)·문명(文明) 등의 연호를 따라 크게 쓰고, 또 작은 글씨로 영락(永樂)·선덕(宣德)·경태(景泰)·성화(成化)의 기년(紀年)을 일본 기년 아래에 나누어 썼겠습니까. 이는 일본을 높이 받드는 것이 천조보다 월등히 더한 것입니다. 또 참람하게 태조(太祖)·세조(世祖)·열조(列祖)·성상(聖上)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감히 천조에서 조(祖)를 칭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저들이 2백 년 동안 공순한 뜻이 무엇입니까. 황상께서 시험삼아 이로써 조선을 문책하면 저들 임금과 신하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글을 함부로 휘둘러 써서 중국의 선대(先代) 제왕(帝王)을 모욕한 것이 이 책머리 한 장 서문에서 볼 수 있으니 대개 조선의 군신들이 중국을 경시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왜를 불러들여 흔단을 구성하여 스스로 전쟁의 화를 열어놓고서도 강분(剛憤)하여 원조를 구하면서 걸핏하면 사절(死節)을 일컬으니, 우리 황상(皇上)께서 은혜를 부지런히 베풀어 소국을 돌보아 내탕(內帑)을 보내고 군사를 파견하여 이미 국경 전부를 회복해주었습니다. 이에 또 예문(禮文)을 다투어 재차 황상께서 동쪽을 돌아보는 염려를 하시게 하고, 또 자신들은 안일(安逸)에 빠져 있으면서 중국에 화를 떠넘기니, 앞으로 어디까지에 이를지 모를 일입니다. 대체로 방군(邦君)이 무도하면 육사(六師)[3]를 출동하는 것이 삼대(三代)의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조선 국왕은 【성 휘(姓諱).】 백성들에게 포학하고 주색에 빠져 감히 왜를 유인하여 침범해 오게 함으로써 천조를 우롱하고, 다시 양호(楊鎬)와 당을 맺어 천자를 속이는데, 우리 황상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하시어 차마 서둘러 주토(誅討)를 가하지 못하지만, 하늘과 조종(祖宗)의 영령은 반드시 그 혼을 빼앗고, 그 후손을 참(斬)하고 말 것입니다. 독신(督臣) 형개(邢玠), 안신(按臣) 진효(陳效)와 제독(提督) 마귀(麻貴)에서 사도(司道)·장령(將領) 등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어찌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한 소(疏)를 계획하여 함께 부추겨 기망(欺罔)하고, 그 다음 사람을 시켜 보류하게 하여 사를 따르고 그릇되이 비호하는 것입니까. 이미 몰래 국왕을 꾀어 시켜 배신(陪臣) 이원익(李元翼)을 차송하여 보류할 것을 상소하여 양호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게 하였습니다. 매우 교활한 허국위(許國威)는 풍지(風旨)[4]를 받들어 함부로 붓을 들어 억지로 여러 장수들의 연명(連名)을 받아 주소(奏疏)하여 양호를 칭송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진무(鎭撫)에게 명하여 당적(黨賊) 허국위와 팽우덕(彭友德) 및 배신(陪臣) 이원익 등을 율에 의하여 국문(鞫問)하여 그 분명한 내력을 끝까지 추궁하소서. 그러면 여러 간사한 자들이 나라의 권병(權柄)을 농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지금 조선에 있으면서 간기(奸欺)를 적발했으니, 여러 간사한 자들이 또 조선의 군신을 유혹하여, 산에 오르고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갖고 있는 벼슬과 땅, 대대로 지키던 나라를 차마 버리고 망명(亡命)의 길을 밟는다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것에 지혜 있는 자는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이 주문과 함께 바친 《해동기략》을 정신(廷臣)에게 내려 공정하게 평의(評議)하게 하소서. 그러면 조선 군신들이 왜(倭)와 끊었다면서 천조(天朝)를 우롱했는지 안 했는지, 형개(邢玠)·진효·마귀 등이 사정(私情)에 따라 부동(扶同)하고 기망했는지 안 했는지, 사를 따라 그릇되이 비호했는지 안 했는지, 제당(諸黨)의 간사한 모의가 자연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리고 공론에서 도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황제(皇帝)가 답하기를, "여기에 아뢴 조선에서 은폐(隱蔽)한 사정은 차출되어 가는 과신(科臣)에게 부쳐 긴히 아울러 조사하여 올리라고 전에 여러 차례 엄지(嚴旨)가 있었다. 동쪽의 일은 마감하고 돌아오는 날에 공과 죄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니, 정응태는 재차 번거롭게 아뢸 것이 없다. 그 주문 가운데 왜의 일에 대한 옳고 그름과 진위(眞僞)는 일체 전수 기의(戰守機宜)이니, 형개·진효·정응태·서관란(徐觀瀾) 등에게 혐의(嫌疑)를 모두 버리고 허심(虛心)하게 회의하고 거행하여 국사(國事)를 중하게 하고, 피차가 이처럼 어긋나게 하지 말라. 지금은 추방(秋防)[5]이 긴급하여, 부칙(部飭)이 번중(繁重)하니, 소대형(蕭大亨)은 안심하고 공직(供職)할 것이며, 모두 분분하게 말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는 인하여 만세덕(萬世德)을 독촉하여 일정(日程)을 배로 단축하여 가서 경리(經理)하게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9월 1일 첫번째 기사 |
3. 해명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정응태(丁應泰)의 참주(參奏)를 보니, 대개 우리 나라에서 직언으로 주문을 올려 힘써 경리를 구한 것으로 인하여 이처럼 분을 낸 것인데, 나는 처음부터 그럴 줄을 알았다. 무릇 사람이 천지(天地) 사이에 살면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요, 외부로부터 오는 횡역(橫逆) 따위야 애초부터 생각한 바가 아니므로 길흉(吉凶)·화복(禍福)을 순순히 받을 뿐이니, 응태의 상소는 내 머리칼 하나도 다치지 못한다. 내가 중국의 동쪽 번방(藩邦)의 신하로서 처음 적추(賊酋)의 협박을 받았으나 의리에 의해 배척하여 거절하였고, 국가가 망하게 되어 허둥지둥 유리(流離)하였으나 신하의 절의를 지켜 마치 물이 백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각오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함부로 날뛰어 충량(忠良)한 자들이 무함을 받아 끝내는 천하의 대계(大計)를 그르치게 됨을 보고 진정하여 힘써 변명하여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귀역(鬼蜮)의 속셈을 훤히 알도록 하였으니, 나는 양 경리(楊經理)를 위해 죽더라도 그것을 영광으로 여겨 지하에서 웃을 것이다. 예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평소 조금 이름이 있는 사람도 소인(小人)이 그 임금을 가리워 그릇되이 충량을 해치고 국가를 무너뜨림에 미쳐서는 그 기세에 겁먹고 그들의 독을 맞을까 두려워하여, 아부하는 데 급급하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목을 움츠리고 간신(姦臣)의 지시대로 따라 자기가 평생 지켜온 것을 모조리 잃게 되는 것을 나는 개나 돼지만도 못하게 보아왔으니 나는 그런 태도는 차마 하지 못한다. 설사 중국에서 정응태의 말대로 육사(六師)를 출동한다 하더라도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환영할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후회하겠는가. 아, 고질병이 있는 못나고 어두운 신(臣)임을 스스로 이미 밝게 알고 있어 전후에 여러 차례 물러나게 해줄 것을 빌었으나 불행하게도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경들에게 유한(遺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성지(聖旨)가 내리지 않아 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어찌 감히 번왕(藩王)으로 자처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평일과 다름없이 있겠는가. 더구나 온갖 병이 몰려드니, 어찌 오래 가겠으며, 역시 무슨 면목으로 중국 장수를 접대하겠는가. 지금부터 모든 국사를 세자가 처결하고, 접대하는 등의 일도 세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부터 상이 문을 닫고 조회를 보지 않으니,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뜻밖의 변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참소하는 사람들이 서로 얽어 흑백(黑白)을 변란시키는 것은 예로부터 그랬던 것이지만 그러나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황상께서 이미 과도관(科道官)으로 하여금 아울러 살펴서 결정하게 하였으니, 지금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통함을 호소하여 급사 아문(給事衙門)과 군문 어사(軍門御史)에게 진달하여 그의 간사한 정상을 분명히 밝히고, 사신을 보내 진변(陳辨)하기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처치는 반드시 급급히 품재(稟裁)하셔야 하는데, 성교(聖敎)가 이러하시니, 신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국가 일은 지극히 중대한데 어찌 일개 간사한 사람을 인하여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더욱 수습할 수 없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인데, 군신의 의리도 그중 하나이다. 만약 여기에 죄를 얻으면 금수일 뿐이다. 지금 내가 적을 이끌어 들여 임금을 반(叛)하였다는 죄명을 얻었다. 신하로서 이런 죄악을 지고 무슨 면목으로 천지 사이에 살겠는가. 경들은 이런 정세를 여러 아문에 읍소(泣訴)하고, 또 급히 사신을 보내 번왕의 자리를 사직하기를 청하라. 이밖에 도리가 없으니, 경들은 다른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대신이 복합(伏閤)하여 재계(再啓)하였으나 상은 따르지 않고 내의원(內醫院)에 하교하기를, "내 병은 백약이 효험이 없는데, 사람들이 '온천수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평산(平山)에 가서 목욕(沐浴)하고 고치고자 한다." 하니, 유성룡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들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의 뜻은 병을 치료하는 데 있지 않고 다만 간인(奸人)의 일로 격노(激怒)하시어 이처럼 당치 않고 이치에 맞지 않은 전교를 하신 것입니다. 지난번 진 어사(陳御史)의 주문에 이미 '산으로 오르고 바라를 건넌다.'는 말이 있었고, 정응태가 또 그 말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 역시 모함하기 위한 함정인데 이때에 어찌 이런 전교가 계시어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몸을 가벼이 여기고 나라를 버린다.'는 모함을 하게 하려 하십니까. 임금의 한 마디 말은 매우 중하니, 전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답하기를, "경들의 말은 우습다. 경들은 마땅히 여기에 있으면서 중국 장수를 접대하고, 나는 사직을 버리고 나갔다는 뜻을 중국 조정과 중국 장수에게 알리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다. 종실과 대신, 삼사·예문관이 모두 힘써 간하자, 한참 후에야 비로소 일을 보았다. 마침내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을 진주사(陳奏使)로, 이정구(李廷龜)를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그 주문의 대략에, "일전에 찬획(賛畫) 정응태(丁應泰)가 성을 쌓는 일을 가지고서 신을 불측(不測)한 말로 모함하여, 신은 두렵고 몹시 절박하여 이미 주본(奏本)을 갖추어 애원하고, 지금 서쪽을 향해 눈물를 뿌리며,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 본관(本官)의 세 번째 소(疏)를 보니, 소방(小邦)을 모함한 말이 너무나 많아 다 읽기도 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신이 이미 이런 누명을 썼으니, 진실로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 수 없고 오직 일찍이 왕법(王法)에 죽어 천하에 사죄하여야 합니다. 다만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감수하겠으나 신의 사정을 털끝만큼이라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살아서는 역신(逆臣)이 되고 죽어서는 역귀(逆鬼)가 되어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소(疏) 가운데 논한 말은, 말하자면 입이 더러워져 참으로 입에 담아 진변하고 싶지 않지만, 군부(君父)의 옆은 본디 망언(妄言)할 자리가 아니며, 시비(是非)와 허실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기가 어렵고, 유죄 무죄는 위에서 황상이 살피시니, 신은 한 조목씩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일본은 고려(高麗) 말기와 저희 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함부로 날뛰며 침략하여 해마다 변방의 근심이 되어 동남 연해(沿海) 수천 리 땅이 버려져 황폐하였습니다.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6]이 힘써 싸워 섬멸해 겨우 해결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그들이 몰래 침략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대마도(對馬島)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데 그 사람들이 우리와 무역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남쪽 변방에 와서 복종하니 그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여 왕래를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에 일본 여러 섬의 왜(倭)도 그를 인연하여 화호(和好)를 청하였는데, 소방에서는 금수와 같이 보고 사훼(蛇虺)처럼 대하면서 생령(生靈)을 위한 계책으로 마침내 관시(關市)를 허락하여 그들의 욕구를 들어주고 혹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들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館)을 두어 왜노(倭奴)를 대우하는 예가 되었으니, 이세수(伊勢守)가 돌아갈 때 명주와 쌀을 주었고 수린승(壽藺僧)이 돌아갈 때 유시하는 글을 부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통(正統)[7] 연간에 그들이 사신을 요구하므로, 배신(陪臣)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통유(通諭)하고 오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저들 나라의 실정과 성쇠(盛衰)·강약(强弱)을 살피고 적정(賊情)을 탐지해 천조(天朝)에 보고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소유한 이로서 면치 못하는 바이고 천조에서도 이미 아는 바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통 계해년(세종 25년[1443])에 왜적이 상국(上國)을 노략질하고 인하여 소방의 제주(濟州)를 노략질하다가 소방의 변신(邊臣)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나머지 적은 대마도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소방에서는 사람을 보내 도주(島主)에게 유시하여 잡아 보내도록 해서 마침내 천조(天朝)에 바쳤었습니다. 가정(嘉靖)[8] 계미년(중종 18년[1523])에는 왜노가 영파부(寧波府)에서 난을 일으켜 변장(邊將)을 죽이고 달아났는데, 그 무리 등원(藤原)·중림(中林)이 소방에 붙잡혀서 즉시 포로와 수급, 그리고 포로가 되었던 중국 사람을 바쳤습니다. 또 가정(嘉靖) 계축년(명종 8년[1553])과 병진년(명종 11년[1556])에는 침범한 왜인을 모두 잡아 절차에 따라 바쳐서 여러 번 조정의 장상(奬賞)을 받았으니, 이는 소방이 천조을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한편으로는 방비하여 그 예봉(銳鋒)을 막고, 한편으로는 어루만져 그 흔단을 막아 추악한 무리로 하여금 외복(畏服)하여 감히 침범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함으로써 변경의 화를 방비하고 번병(藩屛)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또 대마도의 왜가 처음 제포(薺浦)·부산포(釜山浦)·염포(鹽浦) 등지에 와서 살면서 무역하고 고기를 잡는 터전으로 삼게 해주기를 청하므로, 소방에서는 그들이 와서 살도록 하여 왜적의 소식을 탐지하여 살피게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포왜호(三浦倭戶)의 설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거와 통행은 모두 일정한 제한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인연하여 막(幕)을 치거나 장사를 하며 몰래 거주하는 자와 일이 끝났는데도 일부러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금지 하였으니, 이는 《해동기(海東記)》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어 소방에서 단속한 뜻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후에 점차 번성해져 정덕(正德)[9] 경오년(중종 5년[1510])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 제포 첨사(薺浦僉使) 이우증(李友曾)을 죽였으므로, 소방은 마침내 장수를 보내 토멸해 삼포에는 왜호(倭戶)가 없게 된 지 지금 이미 89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 '소방에서 세거(世居)하는 왜호로 하여금 여러 왜를 불러다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침범하였다.'고 하였으니,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 《해동기략(海東記略)》은 바로 배신(陪臣) 신숙주(申叔舟)가, 왜인이 그들의 풍속(風俗)·세계(世系)·지도(地圖)를 기록한 것을 얻어서 그 본고(本稿)에다 소방의 관(館)에서 왜노 대접하는 사례를 덧붙여 기록해 한 책을 만들어 이름을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라고 한 것입니다. 대개 소방과 일본은 거리가 멀고 왕래가 없었는데 단지 오면 거절하지 않고 대략 기미(覊縻)의 계책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신숙주가 왕래한 후에 이르러서야 그 나라의 사적(事迹)을 조금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1편(編)을 베껴 이국(異國)의 기문(奇聞)으로 삼았었는데, 이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한 조각 종이의 내용을 가지고서 사람을 모함하는 기화(奇貨)로 삼고, 뜬소문을 주워모아 없는 말을 만들어 냈으니 너무도 심하다 하겠습니다. 또 거기에 이른바 연호(年號)를 크게 쓰고 두 줄로 쓴 일은 더욱 변명할 것이 못 됩니다. 대개 이 책은 단지 그 나라에서 기록한 것에다 주(註)를 첨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참칭(僭稱)한 연호 아래에다 천조와 연호를 두 줄로 주(註)하여 '일본이 참칭한 어느 해가 천조의 건원(建元) 몇 년'이라고 표시한 것이니, 이를테면 '가길(嘉吉) 원년은 즉 정통(正統) 6년이다.' 한 것입니다. 크게 쓴 것은 본기(本紀)이고, 두 줄로 쓴 것은 첨가한 주인데 '즉(卽)'이란 말을 첨가한 것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 《춘추(春秋)》는 노(魯)나라 역사를 인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에 노의 원년(元年)을 크게 쓰고 아래에 두 줄로 '주 평왕(周平王) 몇 년'이라 주하였는데, 역시 이를 가지고 주나라를 높이는 뜻을 의심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나라 왕(王)과 관백(關白)에 대해 모두 '사(死)'라 썼으니, 존봉(尊奉)하는 자가 과연 그러하겠습니까. 또 글 가운데 '와서 조회하였다.[來朝]'라고 썼는데도 이제 '피차 서로 조회하였다.[彼此相朝]'라 하였고, 또 '쌀을 하사하였다.[賜米]'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조선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鮮人納貢]'라고 하면서 스스로 억지말을 만들어 그 사실을 엄폐하여 죄를 씌우려 하니, 할 말이 없겠습니까. 만약 소방이 일본의 연호를 받들었다면 서문(序文) 끝에 천조의 성화(成化) 기년(紀年)을 썼겠습니까. 또 서문은 신숙주가 단지 그들의 책을 인하여 범연하게 옛날 오랑캐를 대우하던 도리를 논한 것으로, 이는 일개 문인(文人)이 말을 잘못 만든데 불과하고, 또 그 일이 1백 년 전에 있었던 아주 미세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제 이것을 꼬집어 죄안(罪案)으로 삼아 중국을 가볍게 여겼다고 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글 가운데 '진위(眞僞)를 속이고 변사(變詐)를 백 가지로 부리며, 욕심이 끝이 없고, 조금만 그 뜻을 거슬리면 문득 분노하는 말을 하며 땅이 멀고 바다가 가로막혀 실정을 살피기가 어렵다.'라는 등의 말을 보더라도 소방이 왜를 대한 실정을 대략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祖)라고 일컬은 일에 있어서는, 소방이 바다 밖 먼 곳에 있어 삼국 시대(三國時代)로부터 예의(禮儀)·명호(名號)는 중국을 본받아 비슷한 것이 많았는데, 우리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께서 무릇 잘못된 것은 일체 바로잡아 미세한 절목(節目)에까지도 삼가지 않음이 없어 상하의 명분을 분명하게 만들어 자손에게 전해주어서 금석(金石)처럼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그 칭호만은 신라(新羅)·고려(高麗) 때부터 이처럼 잘못되어 왔는데, 대개 신민(臣民)들이 잘못된 옛것을 이어받아 외람되게 존칭(尊稱)을 붙여 서로 이어오면서 고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무지하여 함부로 한 죄이니 이 때문에 죄를 받는다면 신은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참으로 할 말이 없으나 참람하다고 하는 것은 실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소방이 선신 이래로 혈심(血心)으로 상을 섬기어 예(禮)와 성(誠)을 다하여, 율(律)은 대명률(大明律)을 쓰고 역(曆)은 대통력(大統曆)을 썼으며, 복색(服色)과 예의(禮儀)를 모두 숭상하지 않음이 없었고, 천사(天使)가 올 때는 영조의(迎詔儀)가 있으며, 배신(陪臣)이 갈 때는 배표례(拜表禮)가 있고, 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에는 망궐례(望闕禮)가 있어 모두 경건하고 정백(精白)하며 엄숙하고 공경하게 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위(天威)를 대하듯 하였습니다. 각종의 문서와 공사간의 간독(簡牘)에도 모두 연호를 받들어 쓰는 것이 항식(恒式)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변함없는 공통된 의리와 우주(宇宙)의 진리로서 내외(內外)에 차이가 없고, 어리석거나 슬기롭거나를 막론하고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구구한 하나의 호(號) 때문에 스스로 참람한 죄에 빠지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에 천조가 소방을 한집안처럼 보아서 국승(國乘)과 패설(稗說) 등 소방의 서적(書籍)이 중국에 많이 들어갔으니, 소방의 사적(事迹)을 환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7년 사이에 대소 아문(衙門) 및 각영(各營)의 장관(將官)과 왕래하는 군병(軍兵), 그리고 매매하는 장사치들이 앞뒤로 잇따라 안팎에 차이가 없어서 소방이 하는 일은 하찮은 것이라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이른바 협강(夾江) 가운데 섬이란 곳은, 소방의 의주(義州)와 단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얼음이 얼어붙은 후에는 평지가 되어 피차의 백성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매매를 합니다. 때문에 사단(事端)을 야기시킬까 염려하여 가정(嘉靖) 연간에는 도사(都司)에게 이자(移咨)하고 혹은 조정에 주문하여, 함부로 경작하는 곳을 모두 황무지로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금약(禁約)까지 하였으니, 일의 전말이 이러함에 불과합니다. 소방에는 나누어 받은 땅이 있고, 천조 역시 정해진 제도가 있어, 강토에 대한 일은 소방에서 진실로 삼가 지키고 한결같이 처분을 들을 뿐인데, 어찌 피차의 경계를 가지고 서로 차지하려고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거주하면서 농사 짓는 것을 금하여 뒤섞여 살면서 사단을 일으키는 근심을 막고자 했을 뿐입니다. 소방에서는 일찍이 요동 백성과 쟁송한 일이 없는데 '쟁송하였다.' 하고, 도사(都司)가 일찍이 이 일로 단안(斷案)한 일이 없는데도 '단안하였다.'고 하니, 어찌 이토록 망극한 말이 있단 말입니까. 가장 원통한 것은 신묘년(선조 24년[1591]) 봄에 적추(賊酋) 수길(秀吉)이 제 임금을 찬탈하고 악을 쌓아 몰래 엉뚱한 마음을 품고는 사신을 파견해 글을 보내 허실(虛實)을 정탐하고 함께 반역하자고 협박하며 길을 빌자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대의(大義)로써 그 사신을 배척하여 거절하고 즉시 주문을 갖추어 치문(馳聞)한 사실이 환하니, 지금 번거롭게 다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 적을 안으로 끌어 들여 제 나라를 전복시키고 군부(君父)의 나라와 땅을 다투려 했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미쳐서 본심을 잃지 않았으니, 이치로 따져보아 그렇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황상(皇上)께서는 무엇 때문에 10만 군사를 내어 상국을 범한 속국을 구원하였으며, 소방은 무엇 때문에 7년 동안 힘을 다해가며 스스로 불러들인 왜적과 싸웠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찬획(賛畫)에게 이런 무함을 받게 된 데는 역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신이 지난번 양호(楊鎬)가 돌아갈 때 보류하기를 아뢰어 논의가 서로 다르자 격노하여 이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단지 양호가 오랫동안 소방에 있으면서 일심으로 적을 토벌하였으므로, 소방 사람들이 그에 의지하여 공을 이루려 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죄를 입어 변방의 기틀이 장차 잘못되고 큰일이 점차 차질이 생겨, 혹 다른 의논이 틈을 탈까 염려하여 전임(專任)시켜 천토(天討)를 마치도록 해주기를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다. 이는 신의 구구한 생각으로써 전혀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신은 직책을 잘못 지키고 은혜를 저버린 죄로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어찌 감히 당을 맺고 군상을 속여 신의 죄를 무겁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찬획이 동쪽에 온 것도 황제의 명을 받아서인데, 재소(再疏) 삼소(三疏)에서 계획한 일이 무엇입니까? 독무(督撫)와 안진(按鎭)을 거의 모조리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전심으로 싸우기를 주장하는 동정(東征)한 장사(將士)들은 모두 훼방과 배척을 당하였고, 또 동쪽 일이 다행히 완성될 것을 두려워하여 힘써 여러 사람의 성적(成績)을 무너뜨려 군사들의 마음을 저상시키고 여러 장수들을 맥이 풀리도록 하였으니, 그의 주된 뜻의 소재를 대개 알 만합니다. 그렇게 되면 소방이 멸망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가 천하의 큰일이 이로써 틀려지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은 동번(東藩)의 외신(外臣)이어서 조정에 들어가지 못하니, 털끝만한 후원도 없고 믿는 것은 우리 임금뿐인데, 신이 이에 이르렀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동쪽 땅 수천 리를 금수의 구역으로 빠지게 하였으니, 이는 신이 성명께 죄를 얻었을 뿐이 아닙니다. 또 윤기(綸紀)에 죄를 얻어 만세(萬世)의 죄인이 되었고, 조선(祖先)에게 죄를 지어 한 집안의 죄인이 되었고, 백성들에게 죄를 지어 한 나라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원수의 적을 모조리 멸망시키고 강토를 모두 회복하더라도 악명(惡名)은 그대로 몸에 남게 되었으니, 이런 죄를 지니고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아뢴 것을 특별히 조정에 내려 별도로 조사하여 분별해서 일이 과연 사실이면 빨리 신의 죄를 밝혀 왕법(王法)을 엄숙하게 하고, 만일 억울한 데 관계되면 빨리 밝게 씻어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천지 사이에 살 수 있게 해주시면 신은 비록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사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참지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것이다.】 상이 보고는 훌륭하게 여겨 드디어 공조 참판으로 탁배(擢拜)하여 부사(副使)로 삼았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9월 1일 두번째 기사 |
4. 해결
진주사 이항복(李恒福) 등이 중국에서 돌아왔는데, 예부(禮部)에서 회자(回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지를 받들었는데 '국체(國體)와 군정(軍情)은 모두 조정의 큰일이니 짐이 어찌 한 소신(小臣)이 사사로이 분노하고 망령되이 참소한 것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노고한 장사(將士)들과 속국 군민(君民)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고정(苦情)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정응태(丁應泰)는 거동이 잘못되고 어긋나 위협으로 조사함으로써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우선 그의 직(職)을 파하고 평민으로 만들어 본적에 돌려 보내어 벌을 받도록 했다는 것을 너희 예부(禮部)에서는 조선왕(朝鮮王)에게 이자(移咨)하여 위유(慰諭)해 짐이 시종 보살펴 준 덕의(德意)를 알게 하고 아울러 국인(國人)을 훈계하여 공순한 절의를 더욱 굳게 지키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이자(移咨)하는 것이니, 공손히 명지(明旨)를 지키어 안심하여 걱정을 풀고 힘써 뒷일을 잘 처리하기를 도모하여 왕업(王業)을 빛내 우러러 황제의 인자하심에 부응하고, 신민에게 효유하여 모두에게 성명(聖明)께서 멀리 살피시어 이미 처분이 계신 것을 알도록 함으로써 각기 직업에 충실하여 영원히 충성을 맹세하고 쓸데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덕의를 저버리지 말게 하십시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2년(1599) 윤4월 1일 첫번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