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南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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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玄逸
1627년 1월 11일 ~ 1704년 10월 3일 (향년 77세)
1. 소개
조선시대 중기, 현종, 숙종시대의 도학자이자 문신, 경세가이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오늘날에는 어머니의 명성이 갈암 본인의 명성을 넘어섰기 때문에 '여중군자 장계향이 키운 뛰어난 아들'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장계향이 받은 정부인 칭호 자체가 3남[1]인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그 어머니 자격으로 숙종으로부터 정부인 품계를 받았기 때문인 만큼 갈암 역시 당대의 명망높은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갈암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보면 대단히 씁쓸하다. 평생은 물론 사후에까지 명의를 지킨 인물로 그 지역에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대학자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은 산림의 영수인 명망높은 도학자가 경세제민의 뜻을 품고 출사해 그 포부를 미쳐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군주에게 인륜의 도리를 설파했다가 도리어 이를 빌미로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혀 사후 200여년간 간적, 역적으로서 취급받으며 그 문집을 간행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지역 수령이 파직을 당하고 스승을 신원하려던 제자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유배를 가 죽는 등 철저하게 외면받고 탄압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갈암의 사후, 갈암의 이름은 중앙정계에선 역적에 준하는 이름으로 정인홍이나 이이첨에 비견되었을 정도이다.
거의 강압적으로 청나라에 항복하는 삼전도비 표문을 썼다가 절의를 잃었다며 디스를 당한 한세대 전 이경석보다도 더 심한 취급을 받았던 셈. 이경석은 그나마 집권당 서인이었고 평생 그 일로 괴로워했으나, 그래도 말년까지 신하로서 명예로운 생애를 살았다. 반면 갈암은 정권을 잃은 남인 출신으로 말년에 외지에 유배 다니다가 간신히 고향에 돌아왔으나, 선비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다.
갈암이 이렇게 된 사연은 당시의 임금 숙종의 탓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갈암은 인현왕후의 역적으로 단죄되어 끊임없이 죄인 취급받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갈암이야말로 폐서인 된 인현왕후를 신경 써준 몇 안 되는 인물인데도 오히려 역적으로 취급받았다는 것이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출사 이전
1627년 1월 11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인량리(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아버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유명한 어머니 안동 장씨 장계향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갈암은 도학적 경세가로서 퇴계의 적전(嫡傳)이다. 그리고 그는 400여 명의 제자를 둔 학파의 중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태생부터가 이황의 학문을 가학으로 베울 수 있었다. 소년 시절 그는 부친 석계 이시명과 모친인 장계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8살 많은 형인 존재 이휘일로부터 기초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다. 9세 때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어려서 외할아버지 장흥효[2]에게 수학하였는데, 갈암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이 경당 장흥효의 제자며 모친 장계향이 경당의 무남독녀 외딸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 장흥효는 퇴계 이황의 고제자인 류성룡, 김성일 두 사람 모두에게서 수학한 학자로 이를 통해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을 거쳐 경당 장흥효로 이어진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정맥(正脈)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 정부인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의 저자인데, 음식 솜씨가 소문을 타고 영남 사대부가 부인 중 저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장계향은 영남 남인들 사이에서 덕망높은 어머니의 전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후일 이현일은 "내가 평소 노둔한데도 남에게 야비한 말과 비열한 행동과 버릇없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어머니의 덕택"이라 하였다.
어릴적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했다. 9세 때 중형인 존재 이휘일이 일찍이 그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원수(元帥)가 되어 오랑캐들을 소탕해 버리고 요동(遼東)을 수복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청나라가 요동과 심양(瀋陽)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니, 존재가 크게 탄복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이후 13세 때 논어를 배웠고 독서하는 여가에 한편으로는 《손오병법(孫吳兵法)》, 《무경(武經)》, 《장감(將鑑)》 같은 병법책들을 구해 보아 두루 달통하였다. 어릴 적 전쟁놀이를 할때는 팔진도를 펴서 아이들의 대장이 되어 지휘했다고 한다.
청년 때에는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전란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으나 나중에 마음을 돌려 육경(六經)을 비롯한 용학논맹(庸學論孟)과 정주(程朱)의 학설을 깊이 탐구하여 학문에 정진하였고 1646년( 인조 24)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고 내려와 향리에 칩거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형인 이휘일의 저서 홍범연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송논쟁 당시엔 영남 남인들을 대표해 서인들의 기년복 예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요점인 즉슨 서인들은 감히 왕가와 사대부를 동일한 존재로 보느냐는 것. 이에 대한 각 당파의 자세한 주장은 예송논쟁 문서에 있으니 부연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이현일의 비판은 여기서 끝난게 아니라 이후 같은 남인 계통인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도 부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행보는 결국 같은 남인들에게도 배척받는 원인이 된다.
2.2. 조정의 천거를 받아 출사하다
그는 과거를 한번 보았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과거를 보지 않았는데 51세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출사하게 되었다. 권대운(權大運)과 허목(許穆) 등 남인의 영수들이 그의 학문을 높게 보아 추천했고 남인들의 지도자인 용주(龍洲) 조경(趙絅)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갈암의 부친과 본래 파주에 살고 있던 용주 조경과 친분이 두터웠고 갈암이 42세 때(1668) 부친의 명으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용주를 만나 인연이 생겼던 것이다.1677년(숙종 2년) 선무랑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같은 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어 비로소 중앙정계에 나아갔다. 그가 현명하고 학덕높은 지사로 천거되어 출사하자 인조반정 이후 소외된 영남 남인들은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1678년에 공조정랑,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당시의 세 외척 가문(三戚家)의 용사의 부당함과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또한 부패 관료의 척결과 외척의 권력 농단을 규탄하였고, 실력에 따른 바른 인재 등용을 상주하는 등 당대의 시폐를 해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당대 조정의 남인 중에서도 경기남인에 밀려 주류 세력은 되지 못했고 퇴계학파의 정통 인사로서 청남이나 탁남과는 또 다른 정파인 영남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후 칩거하면서 1688년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지었는데 갈암은 이황 원리론자라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적극 지지하고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대차게 까버렸다. 이로서 그는 서인들의 종사인 이이를 비판한 인물로 요주의 대상이 된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을 보면 이현일의 학식이 일천하다는 식으로 까는 기사들이 많은데 아마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다.
이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부름을 받아 경세의 포부를 펼치려 했다. 당시는 미수 허목과 백호 윤휴가 세상을 떠난터라 갈암은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으로 추앙되어 존경을 받았다. 63세(숙종 15년) 때 봉열대부(정사품) 성균관 사업(司業)에 제수된 이후 사헌부 장령, 이조참의, 성균관 좨주,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로 빠르게 승진 후 64세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인의 견제는 물론 집권 남인들로부터도 경연에 전념해 달라는 요구로 실권에서 배제되는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
갈암은 향촌사회를 반듯하게 하려는 강한 포부를 보였고 전국적으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는 정책을 세워 건의했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따라서 갈암이 꿈꾸었던 도학적 경세제민의 포부는 이룰 수 없었고 갈암은 남인이 집권하던 이 시기에도 사직과 낙향 후 다시 관직을 제수받는 것을 반복한다.
이때 갈암이 숙종의 경연에 참가한 행적인 경연연의를 보면 숙종에게 제갈량의 예를 들어 사면을 함부로 하지 말것을 권유하거나 서북방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책을 제시하고 영남 지역에 돈을 유통시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고 주장하는 등 나름대로 많은 건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헌부 대사헌에 있을땐 학문, 덕행, 문예를 주로 한 정자학교(程子學校)의 제도를 따를 것을 주장하여 과거 제도에 개혁을 가하였다. 또한 과거 시험이 일부 특권층 자제들끼리 학연과 인맥 등 매관매직과 연줄로 합격자를 결정하고, 대신 사람을 보내서 과거를 보게 하는 등의 과거 부정이 공공연한 것을 들어 감독을 강화하고 이를 적극 시정, 개혁할 것을 건의하였다.
2.3. 명의죄인으로 낙인 찍히다
갈암의 이런 정치적 노력은 갑술환국으로 완전히 끝장나고 만다. 다른 남인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는데 그 연유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인현왕후를 보호하려는 상소에서 나온 단어인 자절우천(自絶于天) 이 4글자 때문이었다.당초 갈암은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던 인물 중 하나로 공조참의를 사양하고 올린 상소에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다. 그는 과거 광무제와 송인종의 예를 들어 국모를 함부로 폐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아예 반려되어 윤허되지 않았다. 윤선도를 복권시키는 문제와 더불어 이현일은 이로서 주류 남인과 계속 척을 지게 된다.
또 숙종의 형식적 기대를 받았던 이현일은 누구도 말하기 꺼리는 문제를 끄집어냈다. 그는 경신환국에 관련된 복평군 등 일부 왕족의 신원을 허락받았고,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사망한 오두인의 자손에 대한 처벌 완화도 받아냈다. 후자는 당시 미묘한 영역이었다. 남인은 인현왕후의 폐출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해 명분상의 부담을 느꼈으나, 당시 숙종은 "폐비를 언급하면 역률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였는데, 과거 처벌받은 인물들에 대한 신원활동을 펼친 이현일 덕택에 숙종의 양보를 얻어내 그나마 체면을 차리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인현왕후를 극혐하면서 폐비를 극렬히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고를 내서 여러 사람을 죽였는데, 박태보나 오두인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현일은 경기도 근교에 이르러 "곤궁(坤宮, 중전)이 불안한 상황이고, 감히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논죄하겠다"는 교지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현일은 이때 이를 반대하는 소를 광주(廣州)에 올렸는데, 유수(留守) 이항(李沆)이 감히 올려보내지 못하였고 이에 승정원에 곧장 제출했는데 입직하던 승지 김해일(金海一)이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어 끝내 숙종에게 올려지지 못하였다. 대놓고 인현왕후는 죄인이라면서 인현왕후의 물건들을 태우고 난리를 치던 숙종이었으니 이런 상소가 숙종에게 올려졌다가는 이현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이현일이 올린 상소의 내용인 즉슨 다음과 같다.
(중략)신이 방금 경기 고을에 도착하여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마침 주상의 마음이 편치 않음으로 인하여 중궁을 동요시킬 뜻이 있어 대소 신료들이 간언 때문에 죄를 얻은 자가 많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신이 평소에 전하께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닙니다. 신은 듣건대, 배필의 관계는 인륜의 시작이며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처음을 신중히 하고 마침을 공경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불행히 인륜의 변고에 처하게 되더라도 도리를 힘써 다하고 은혜와 의리를 곡진하고 온전히 해야 하는 것이고, 갑자기 엄한 결단을 내려 거조가 합당함을 잃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앞에서 행하였다가 어진 황제의 허물이 됨을 면치 못하였고[3],
송나라 인종(仁宗)이 뒤에서 행하였다가 끝내 백옥(白玉)에 티가 되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고 경계하십시오. 신이 또 듣기로 근래에 지시하신 것 중에 ‘기휘(忌諱)하는 바에 관계되는 말을 하면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이 비방목(誹謗木)을 세우고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하여 중론을 참작하고 천근(淺近)한 말조차도 자세히 살펴서 나쁜 점은 숨겨 주고 좋은 점은 드러내어 주던 뜻이 아닌 듯합니다. 어서 명을 도로 거두시어 언로(言路)를 넓혀 주소서.”(하략)“
이후 이현일은 결국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자 다시금 상소를 올렸는데 폐서인 된 것은 어쩔수 없으나 여염집에 두어선 안되고 10여년간 임금을 모셨으니 별궁에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이때 인현왕후가 사제(私第)에 거처한 뒤로 조정에서는 엄한 유지(有旨)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다시 언급하지 못하였는데 이현일이 나서서 그녀의 처지를 돌봐 주어야 한다고 주청한 것이다.
"
폐비(廢妃) 민씨(閔氏)는 중궁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自絶于天) 전하께서 처우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마땅히 도리를 힘써 다하여 은의(恩義)를 두루 온전히 한 뒤에야 여망(輿望)을 위로하고 뭇사람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씨는 중궁으로 정해져 지존을 받든 지 거의 10년이 되는데, 지금 비록 죄가 있어 폐출(廢黜)되기는 했지만 여항(閭巷)의 사가(私家)에 두고서 그 늠료(廩料)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관대하게 돌봐 주는 뜻이 없다면 마땅함을 지나쳐 중도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한나라
광무제와
송나라 인종이 진 황후(陳皇后)와 곽 황후(郭皇后)를 대우한 고사를 따라 이궁(離宮)의 별관에 거처하게 하고 방위(防衛)를 설치하여 규금(糾禁)을 근엄하게 하고 늠료를 헤아려 대 주어서 의지할 바가 있게 하소서. 그리하신다면 전하께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 거의 곡진하여 여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 인현왕후가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은 죄가 있다'라는 이 문구 때문에 이현일은 감히 인현성모를 모욕했다는 만고의 흉적으로 낙인 찍혀버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인현왕후를 만고의 죄인으로 만든게 숙종 자신이고 이현일이라고 여기서 숙종의 뜻을 거슬러 인현왕후가 죄가 없다고 할 순 없는 판인 것이다. 맥락상으로 따지면 갈암의 주장은 '그래도 10년을 같이 살았는데 옛 정을 살펴 사람된 도리로 옛 아내를 챙겨주는게 옛 성군들의 도리 아니겠느냐, 최대한 그녀의 생활은 보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인데 이때 그녀가 죄가 있다고 말한 댓가로 정권이 바뀌고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마자 순식간에 국모를 모욕한 죄인이 되어 버린것이다.
폐비 문서에도 나오지만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사실상 죽은 것만도 못한 사람 취급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폐비는 중죄인 취급이라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기는 커녕 밖을 나다니는 일조차 조심해야 했으며, 궐에서 간혹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은 폐서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을 다들 꺼렸음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암이 최대한 이렇게 말할것만으로도 임금의 심기를 거슬러 역률로 다스려질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장 이때 숙종의 반응만 봐도 처음에는 '사의(事宜)가 고금(古今)이 다르니 결단코 가벼이 논의하기 어렵다'고 비답을 내리고 별궁을 수리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곧 또 숙종 특유의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격노한 바가 있어서 중지되었다.
결국 갈암이 폐비를 보호해야 한다고 할때는 폐비를 옹호한다고 숙종이 지랄(...)을 부려놓고선, 복위되었을때는 한때 숙종 본인이 누누히 주장한대로 그녀에게 죄가 있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만고의 죄인 취급을 받았으니 인현왕후 폐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긍휼히 여겨 인륜의 도리를 역설하던 것이 결국엔 갈암 본인의 화를 부른격이 되고야 만 것이다.(...)
만약 갈암이 이이를 비판하지 않고, 당파가 서인이었다면 아마도 이런일은 그냥 잊혀진채 인현왕후를 끝까지 보위하려한 충신 취급을 받았을것이다.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죄를 계속 청하는 짓을 했으니 이래저래 정치보복은 피하지 못했겠지만, 결국 그런 연유같은건 다 잊혀지고 이후 200년간 갈암은 인현왕후 성역화와 함께 인현성모를 모욕한 만고의 죄인이자 흉적이라는 낙인만이 찍혀서 조선조가 망할때까지 경시되고야 말았다.
물론 당시에도 갈암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 정상참착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소론인 영의정 남구만이었다. 남구만은 분명 이현일이 말을 잘못한 죄는 있지만 본심은 인현왕후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며 그를 옹호하였다. 당시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희빈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기에 예전에 갈암이 인현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주장을 남구만이 옹호하였던 것이다.
"이현일이 있어서는 그의 사람됨을 보면 참으로 우소(迂疎)하여 쓸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사람들이 이 사람을 성상께 천문(薦聞)하여 대총재(大冢宰)의 자리에 두게 하였으니, 그들의 죄가 또한 무겁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시골 구석의 소식이나 옛 이야기는 매우 생소한 것이어서 비록 화를 만들어내려는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결코 왕자(王子)에 관한 일로 입고(入告)하게 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말은 진실로 누구나가 보통 하는 말인 것입니다. 과연 김인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이는 민암과 이의징에게 팔려 그런 것이고, 이현일이 흉모(兇謀)에 함께 참여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가 이미 그런 말을 탑전(榻前)에서 하였으니, 진정(眞情)이 없었는지 있었는지를 어떻게 억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신은 이현일의 일에 자취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지만 실정은 혹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의징과 이현일은 걸린 죄는 지극히 무거운데 그들의 실정과 자취는 이처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은 죄가 또 있습니다. 중궁(中宮)께서 사제(私第)에 계실 때 올린 상소에 한 번은 ‘스스로 하늘과 끊었다[自絶于天]'고 했고, 한 번은 감히 ‘피자(彼字)'를 중궁께 쓰기도 한 것입니다. 접때 사람들은 인륜이 끊어지고 의리에 캄캄하여, 엄외(嚴畏)하고 존경(尊敬)하는 뜻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여 방자하게 패만(悖慢)한 말을 했으니, 이는 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의 죄는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본뜻은 딴 궁(宮)에 옮겨 모시고 늠료(廩料)를 후하게 마련하며 시위(侍衛)를 두어 예우(禮遇)하는 방도를 만들게 하려고 지척(指斥)하는 말을 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처럼 된 것이니, 이 또한 자취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정은 침해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니, 침해한 사람들과 죄를 같게 한다면 혹 원통하다고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20년(1694년) 7월 4일자 기사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은 죄가 또 있습니다. 중궁(中宮)께서 사제(私第)에 계실 때 올린 상소에 한 번은 ‘스스로 하늘과 끊었다[自絶于天]'고 했고, 한 번은 감히 ‘피자(彼字)'를 중궁께 쓰기도 한 것입니다. 접때 사람들은 인륜이 끊어지고 의리에 캄캄하여, 엄외(嚴畏)하고 존경(尊敬)하는 뜻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여 방자하게 패만(悖慢)한 말을 했으니, 이는 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의 죄는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본뜻은 딴 궁(宮)에 옮겨 모시고 늠료(廩料)를 후하게 마련하며 시위(侍衛)를 두어 예우(禮遇)하는 방도를 만들게 하려고 지척(指斥)하는 말을 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처럼 된 것이니, 이 또한 자취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정은 침해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니, 침해한 사람들과 죄를 같게 한다면 혹 원통하다고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20년(1694년) 7월 4일자 기사
덕분에 이현일은 목숨은 부지 할 수 있었으나, 그의 정치적 생명은 이것으로 그냥 끝장났다. 이후 소론이 남인과 같이 몰락하면서 갈암에 대한 이런 옹호조차 조선조가 망할때까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서인 노론계열 유생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권을 심심치 않게 행하니 그가 그만큼 영남 유림에서 차지한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으리라.
2.4. 만년
이현일은 곧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지가 편하다는 이유로 사간원, 사헌부로부터 계속 탄핵당하여 결국 종성군에 이배되었으며 곧 위리안치(圍籬安置)당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학동과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지었다. 1697년에 고령을 이유로 감형되어 그해 5월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이곳에서 갈암은 53일간의 육로와 뱃길을 통해 7월 15일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왔고, 1698년 3월 섬진강변 영해군 갈은리(葛隱里)로 이배되었으며[4], 이곳에서 다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99년 2월에 방귀전리(放歸田里)[5]의 명이 내려저 풀려나 향리로 돌아갔다. 1700년 4월에는 경상북도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문인들을 받아들여 제생(諸生)을 강학하였다.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돈전수어(惇典粹語)》, 《존주록(尊周錄)》등의 저서를 남겼고 그 뒤 향리에서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704년에 영해군 인덕리(仁德里)로 이주하였다가 안동군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요양하다. 1704년 10월 안동군 임하면 금소리 금양재사(錦陽齋舍)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소는 영해군 금양에 마련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77세였다.
서인들은 숙종실록 등에 '이현일은 춘추도 제대로 몰라 숙종임금이 춘추 한질을 하사했다.' 선비의 이름을 칭탁하여 아름다운 벼슬을 차지하고 부름이 있으면 곧 행하였다', '강연에서는 시론에 영합하여 그릇된 말이 많았다.'라는 식으로 그를 비방하였다. 명백한 사관의 악의가 섞인 곡필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대학자 이이의 학설을 반박하고 숙종앞에서 춘추곡량전을 강한적도 있는 갈암이었다, 애시당초 당대의 유학자들 가운데 춘추를 익히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물며 퇴계학파의 영수이자 종장이였던 갈암이다.
노론 사관들은 사평으로 갈암을 폄하함으로서 자신들의 종사 이이를 철저히 부정한 그의 존재를 완전히 히스테릭하게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영남 문인들은 계속 그의 학맥을 이어가며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그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퇴계학은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를 거쳐 외증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어졌으며 이상정의 문인인 정재 유치명 등을 거쳐 다시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서산 김흥락 등으로 학통이 계속 이어졌다.
2.5. 사후
갈암은 사후에도 곡절이 심했다. 1710년(숙종 36)에 갈암의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720년(경종 즉위년) 다시 복권되었다가 1728년(영조 5년)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과 남인이 거세당하면서 추탈당했다. 갈암의 손녀사위이자 영남유림의 유력한 학자인 병곡 권구[6]가 이에 엮여서 난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지목돼 서울로 압송됐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가 특지(特旨)를 내려 석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이 때문에 영조 때는 그의 신원을 청하는 문인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당시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있던 상황이니 더더욱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737년, 갈암의 사면, 복권운동에 적극 나선 제자 김성탁[7]은 ' 인현왕후를 모해한 흉적을 옹호한다'는 죄로 유배를 당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김성탁 역시 후세에 이현일을 옹호한 죄인으로 낙인찍혔다.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가 정조 사후 1801년(순조 즉위년) 노론에 의해 다시 추탈되었다.
1810년경에 그의 문집인 갈암집이 처음으로 간행되었으나 당쟁의 희생자로 명의죄인(名義罪人)이 되어 있었던 터라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갈암집은 분서 훼판(焚書毁板)당했고 그의 문집을 간행한 해당 지역의 수령은 파직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저술 역시 금서(禁書)를 넘어 흉서(凶書)로 간주돼 간행하거나 보는 이 모두를 동일한 죄인으로 취급한 것이 사후 200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니 재야에 있었던 제자나 후손들의 고초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이 초간본은 현재 전존되고 있는 것을 찾을 길이 없어 그 체제며 분량을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있는 목록 1권, 본집 19권, 별집 2권, 부록 2권으로 되어 있는 필사본 《갈암집》이 초간본의 저본(底本)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초간본에 대한 분서 훼판의 수난을 겪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계축추보》까지의 현행 《갈암집》은 그 원고들이 비교적 잘 전존, 인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갈암의 생전에서부터 부친의 원고를 잘 수습하고 정리해 왔고, 또 그 후손들이 그것을 비교적 잘 보존해 온 결과였다.
이후 1853년(철종 4)에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873년 복권 여론이 나오자 노론의 강경파인 화서학파 최익현, 김평묵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수없이 복권과 환수를 반복하던 갈암은 1909년(융희 3년)에서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갈암집이 다시 재간행 된 것도 이 시기였다.
3. 퇴계 학파내에서 갈암의 위상
갈암의 학파적 위치는 학봉 학통적 위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통을 초월하는 위상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다.첫째, 갈암은 퇴계 이후 퇴계의 학문, 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정련하고 발전시켜 같은 학파 선배들이 일찍이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이룩한 최초의 학자였다. 사실 갈암이 출현하기 이전과 이후 퇴계학파의 학파적 실질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학문적 생산성과 학파적 정체성에 있어 이전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면 갈암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사실 퇴계학파는 갈암의 업적과 활동에 힘입어 그 학파적 고유성이 확고하게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가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을 역시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과 사칠분대(四七分對)의 논리틀에 입각하여 그 강화의 명제를 철저히 관철시킨 결과에 주로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퇴계 계승의 업적은 심성론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경세비전도 변화된 시대 여건에 대응한, 퇴계의 그것으로부터의 넓게 변한, 발전의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퇴계학파 내에서의 그의 인적(人的) 관계의 전체적 회합성이다. 퇴계학파도 그 제 1대 제자들 사이에 이미 간극이 발생한 경우가 있었지만 그 재전, 삼전 제자 세대로 내려가면서 분화가 보다 확실해지고 계파간의 우위 경쟁도 진행되어 갔다. 그래서 갈암의 시대에 이르러 이미 후일 병호시비(屛虎是非)로 발전될 조짐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암은 계파를 넘어 학파의 사림을 광범위하게 결집하여 학파의 구심점이 되고 영수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의 외조 경당 장흥효가 학봉뿐 아니라 서애, 한강과도 일정한 사제 관계였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없지는 않았으나, 한강, 여헌 계열의 김응조, 서애 계열의 홍여하 등과의 관계를 미루어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역시 그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다. 그의 이 학파적 위치의 성립에는 그 자신의 문도 또한 300~400여 명의 매우 성대한 규모였다는 사실도 물론 무관할 수 없다.
3.1. 갈암의 역사적 위치
남인 산림으로 따지면 갈암은 17세기 산림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 향촌의 장악력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명예와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이 때 성장한 대표적인 세력이 이황을 위시한 영남 사족 세력이었다. 여기에 인조반정 이후 수많은 지방의 산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해 조정에 영향을 끼쳤는데 서인의 경우, 송시열, 송준길 등이 있었고 남인에는 갈암 등이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파를 정계의 주류로 만든것에 반해 갈암은 중앙 경기남인과 학문적, 노선적으로 갈렸기에 일종의 얼굴마담 격 역할만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남인정권이 숙종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면서 영남 남인들은 더 이상 중앙정계에 깊숙히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조선 후기 중앙사족의 힘이 강해져 이들의 정계장악 현상이 더욱 강화되었기에 발생한 문제기도 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과거에 온갖 부정이 발생하고 인사 임용의 폭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는 등 편중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조선 후기 들어 과거 제도는 정기 시험보다 특별 시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과거를 위해 서울에 찾아가는 것 자체가 지방 양반 개개인에게는 가산을 털어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담이었다는 만큼 서울 양반 세력에게 우위가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17세기 후반부터 경향 분기( 서울과 지방의 풍조가 나뉨) 현상이 나타나고, 경화 세족이라는 이름의 서울 양반 세력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안동 김씨의 장동 김문이었고, 반대로 지방 양반 세력은 그나마 이름이 있다던 영남 양반 세력도 은근한 무시를 당해야 했다. 갈암 이현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8]
이런 경향은 영조 시대에 더욱 심해져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이 반역향이 되면서 확인 사살되어 18세기 이후부터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심지어 영남 출신 의병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서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되어 고립된 학풍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후 그나마 정계에서 활약하는 남인 세력은 상당수가 기호 남인들이었다.
오늘날 이 지역 유림세력이 아직도 다른 지역에 비해 강고하게 남아 있는 것도 이 과정에서 고립되어 지역내 가문들끼리 통혼하여 학문적으로 퇴계를 중심으로 예전의 학문을 계속 계승하는 독자적인 구도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2. 갈암 학문의 특징
갈암은 일차적으로는 도학자다. 그러므로 그의 문집 내용 중에서 비중이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도학 관련 문자일 수밖에 없다. 특히 퇴계의 주리적(主理的)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理氣),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이론을 퇴계의 논리틀에 입각하여 강화, 심화시킨 것이 핵심적 내용 및 성향이다. 그의 주리 논리는 도학적 문제에 관한 직접적 내용에 대해서만 운용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예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 등에 관한 문제의 논의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퇴계의 주리론에 이미 그러한 성향이 함축되어 있었거니와 이(理)의 능동성이 강화된 갈암에게서의 주리론은 세계에 대한 인식 논리(認識論理)로서의 성격이 감퇴되는 반면에 세계에 대응하는 신념 논리(信念論理)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즉 천리(天理)라는 도덕 원리가 변화하지 않는 절대의 진실로서 고요하고 괴괴하게 초월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즉시 현실적으로 모든 현상에 능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신념이다.
그러니까 갈암은 당시 체제의 동요, 이완 현상,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근원의 성격을 갖는, 청나라의 군림과 그 아래에서의 지배계급 내부의 쟁투, 부조리 등의 역사 상황을 원천적으로 도덕 원리의 무력화로 인한 소치로 인식하고, 이(理) 능동성 강화에 기초하여 현실에서의 도덕 원리의 실제적 작동을 진작시킴으로써 당시의 역사 상황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으로 인해 자연히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 이(理) 를 무력한 피동적 존재로 인식하여 도덕 원리의 무력화를 조장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 배척하게 된 것이다.
이에 못지않는 비중으로 갈암은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정체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인 《갈암집》의 내용 중에는 소(疏), 차(箚), 경연강의(經筵講義), 설(說) 등의 형식을 통해 경세 방략이나 시무책(時務策) 등을 피력해 놓은 것이 많다.
경세가로서의 갈암은 분명히 도학적 경세가다. 그래서 그의 경세론 중에는 임금의 한 마음이 만화(萬化)의 근원이라는 등 전통적인 도학적 경세 논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학적 경세 논리의 중심 주제인 도덕적 이상주의의 실현 비전이 보다 더 즉각적인 현실화의 지평으로 나아간 자취가 뚜렷하다. 이것은 흔히 주리론이 비현실적 성향을 갖는다는 종래의 통념과는 다르다.
그의 경세론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42세경, 당시 심각한 민생고를 목격하고 그 해결 방략을 제시한 정설(政說)에 특히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8가지 방략(治道八事)중 3가지만 남아 전하지만, 사창제(社倉制) 강화를 주내용으로 한 실혜론(實惠論), 전부부정(田賦不正)을 해결하기 위한 균전론(均田論), 군제(軍制)의 불합리를 개혁하기 위한 군제론을 통해 보건대 그의 경세론은 바로 우리가 흔히 논의하는 실학파의 경세치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이 경세론이 같은 시기 학자인 유형원의 《 반계수록》과 같은 시기에 제시된 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갈암은 일찍히 반계수록에 주목한 당대의 학자로서 이 책을 읽어 보고는 탁월하게 여겨, 유형원이 매번 그것을 조금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반계의 아들 유하(柳昰)가 그 서문을 써 주기를 청했을때 그러한 뜻을 미루어 서문을 쓰기도 했다. 갈암이 조선조 내내 폄하된 것과 달리 반계는 후일 시대의 현자 취급을 받게 된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실제로 갈암이 선배 문인인 배송유와 김계상에게 반계수록을 받았을때 갈암은 답서에서 반계수록을 읽고서 이렇게 답하였다.
유장(柳丈,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전에 도성에 있을 때 보여 주셨지만 객지 생활에 바빠 그 시종(始終)을 연구해 볼 잠시의 짬도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늘 잊히지 않아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뜻하지 않게 봉함하여 이 먼 곳까지 보내 주시니 지극하신 뜻에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책은 규모가 매우 크고 증거가 지극히 넓어 언뜻 보면 눈이 어지러워 쉽게 엿볼 수 없으나, 그 세상을 경륜하고 사물을 다스리는 의론을 보면 실로 옛날을 끌어다가 오늘날에 적용시키는 사의(事宜)에 합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삼대(三代)를 회복하고 싶은 뜻을 두게 하니 매우매우 성대합니다.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 정치를 하였다면 그 사업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주상께서 보아서 주상의 마음에 맞게 된다면 도움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원대한 경륜을 품고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여 지사(志士)들에게 무궁한 한을 남겼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배성유에게 보내는 편지 중[9]
배성유에게 보내는 편지 중[9]
유장(柳丈)의 《반계수록》과 배공근(裵公瑾, 배성유)의 편지를 보내 주시어 매우 감사합니다. 13책(冊)을 절반도 읽지 못하여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세상에 이런 위대한 사나이가 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김계상에게 보내는 편지 중
김계상에게 보내는 편지 중
호란(胡亂)을 당한 지 오래지 않은 시기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암이 그의 경세관에서 무(武)를 문(文)과 대등하게 인식하고, 그 시무책에서는 국방 문제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는 점도 당장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소, 차 중에 피력된 경세의 방략 또는 방안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도학적 입장의 일반적 논리를 보이지만 당시의 현실 문맥이 행간에 은근히 내포되어 있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王法)을 바로 세우라는 명제 같은 경우 도학 경세의 일반론이면서 실은 당시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매우 강한 현실성을 함축하고 있다. 즉 수도의 훈척, 유력 벌열 가문의 농단으로 권력 체제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던 정치 세력들의 입장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기타
갈암이라는 그의 호는 제갈량을 사모하는 의미로 지은 것이었으니 그의 글인 갈암기에 그 내력이 나온다.영해(寧海)의 북쪽 땅은 관동(關東)과 경계가 잇닿아 있는데 그 속현(屬縣) 영양(英陽)은 부(府)와의 거리가 서쪽으로 80리이다. 이 영양에서 동북쪽으로 40리 거리에 마을이 있으니 수비(首比)이다. 산봉우리들이 밖을 에워쌌으며 지형은 평평하면서도 안쪽이 드넓어 사방으로부터 이 마을로 들어오자면 모두 매우 험하고 가파른 산을 넘어서 가파른 길을 수십 리 지나야 하지만 이 마을에 막상 이르면 시야가 후련히 툭 트이고 드넓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상쾌하도록 한다.
토질은 뽕과 삼, 오곡이 잘 자라며 벼랑과 골짜기를 따라서 나무는 더욱 늙었고 바위는 더욱 기이하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맑고 얕아서 사랑스럽다. 그러나 지세가 높아서 매서운 바람과 나는 구름이 많은 탓에 구름과 서리가 비교적 일찍 내려 겨울이 오기도 전에 날씨가 추우니, 평소 산림에 은둔할 뜻이 있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살아도 편안할 수 없다.
계사년(1653, 효종 4년), 내가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은거하면서 초당을 짓고 ‘갈암(葛庵)'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에 객(客)이 혹 내게 묻기를, “그대가 사는 곳은 오른쪽은 산이요 왼쪽은 물이라 골짜기는 빼어나고 산은 빛나서 아침저녁으로 풍광이 다르게 바뀌며, 소용돌이쳐서 고이고 휘돌아 물살이 일어서 물의 흐름과 울리는 소리가 공교한 운치가 있다. 나무로는 단풍ㆍ삼(杉)ㆍ가래ㆍ옻 등이 풍요로이 있고, 풀로는 지초(芝草)ㆍ복령(茯苓)ㆍ삼(蔘)ㆍ백출(白朮) 등 기이한 것들이 있으며, 심지어 시렁과 벽에는 볼 만한 도서(圖書)들로 가득하여 모두 빼어난 경치를 잘 표현하고 호(號)를 빛낼 수 있을 터이거늘 그대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칡〔葛〕'을 취하였으니 칡의 의의는 어디 있는가?” 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이는 진실로 그만한 까닭이 있다. 나는 세상에서 자기가 사는 곳에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문식(文飾)으로써 하고 그 실상으로써 하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왔다. 지금 나는 사실 자체를 놓고 그 실상대로 이름을 붙였다. 칡이란 물건을 보면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에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에도 좋아 《시경》에서 읊었고 《예기(禮記)》에 실렸으며 기타 옛 전적들에서 곳곳마다 보이니, 사람에게 쓰인 지가 오래이다.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써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그리고 기타 짜고 엮고 동여매고 묶어 매는 도구도 모두 이 칡으로 만들 수 있으니, 무릇 칡이 하는 일이 매우 많다 하겠다. 이에 나의 사용(私用)을 넉넉히 하고 나의 분수에 맡겨 둘 뿐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순진하고 소박한 천성을 지니고서 그럭저럭 자족한 삶을 살 뿐이니, 이러한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거의 갈천씨(葛天氏)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집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제쳐 놓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옛날 주 부자(朱夫子)께서 여산(廬山)의 폭포 아래에서 와룡담(臥龍潭)을 발견하고 그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란 초가집을 짓고는 그 집 이름의 뜻으로 인하여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모셨으니, 이름에 따라 의의를 담는 것은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터이다. 이에 집 이름을 갈암(葛庵)이라 했으니 어찌 무후(武侯)의 유상(遺像)을 구해서 벽에 그려 둠으로써 그대의 아득한 고인(古人)에 대한 회포를 부쳐 보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감사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근거를 상고할 수 없었다. 이에 그대가 말해 주니 나의 마음에 썩 부합된다. 삼가 받들어 실행해 보리라.” 하였다. 객이 떠나고 이어 이상의 대화를 서술하여 기(記)로 삼노라.
무술년(1658, 효종9) 맹추(孟秋)에 안릉(安陵) 이현일(李玄逸)은 기(記)를 쓰노라.
토질은 뽕과 삼, 오곡이 잘 자라며 벼랑과 골짜기를 따라서 나무는 더욱 늙었고 바위는 더욱 기이하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맑고 얕아서 사랑스럽다. 그러나 지세가 높아서 매서운 바람과 나는 구름이 많은 탓에 구름과 서리가 비교적 일찍 내려 겨울이 오기도 전에 날씨가 추우니, 평소 산림에 은둔할 뜻이 있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살아도 편안할 수 없다.
계사년(1653, 효종 4년), 내가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은거하면서 초당을 짓고 ‘갈암(葛庵)'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에 객(客)이 혹 내게 묻기를, “그대가 사는 곳은 오른쪽은 산이요 왼쪽은 물이라 골짜기는 빼어나고 산은 빛나서 아침저녁으로 풍광이 다르게 바뀌며, 소용돌이쳐서 고이고 휘돌아 물살이 일어서 물의 흐름과 울리는 소리가 공교한 운치가 있다. 나무로는 단풍ㆍ삼(杉)ㆍ가래ㆍ옻 등이 풍요로이 있고, 풀로는 지초(芝草)ㆍ복령(茯苓)ㆍ삼(蔘)ㆍ백출(白朮) 등 기이한 것들이 있으며, 심지어 시렁과 벽에는 볼 만한 도서(圖書)들로 가득하여 모두 빼어난 경치를 잘 표현하고 호(號)를 빛낼 수 있을 터이거늘 그대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칡〔葛〕'을 취하였으니 칡의 의의는 어디 있는가?” 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이는 진실로 그만한 까닭이 있다. 나는 세상에서 자기가 사는 곳에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문식(文飾)으로써 하고 그 실상으로써 하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왔다. 지금 나는 사실 자체를 놓고 그 실상대로 이름을 붙였다. 칡이란 물건을 보면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에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에도 좋아 《시경》에서 읊었고 《예기(禮記)》에 실렸으며 기타 옛 전적들에서 곳곳마다 보이니, 사람에게 쓰인 지가 오래이다.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써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그리고 기타 짜고 엮고 동여매고 묶어 매는 도구도 모두 이 칡으로 만들 수 있으니, 무릇 칡이 하는 일이 매우 많다 하겠다. 이에 나의 사용(私用)을 넉넉히 하고 나의 분수에 맡겨 둘 뿐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순진하고 소박한 천성을 지니고서 그럭저럭 자족한 삶을 살 뿐이니, 이러한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거의 갈천씨(葛天氏)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집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제쳐 놓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옛날 주 부자(朱夫子)께서 여산(廬山)의 폭포 아래에서 와룡담(臥龍潭)을 발견하고 그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란 초가집을 짓고는 그 집 이름의 뜻으로 인하여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모셨으니, 이름에 따라 의의를 담는 것은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터이다. 이에 집 이름을 갈암(葛庵)이라 했으니 어찌 무후(武侯)의 유상(遺像)을 구해서 벽에 그려 둠으로써 그대의 아득한 고인(古人)에 대한 회포를 부쳐 보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감사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근거를 상고할 수 없었다. 이에 그대가 말해 주니 나의 마음에 썩 부합된다. 삼가 받들어 실행해 보리라.” 하였다. 객이 떠나고 이어 이상의 대화를 서술하여 기(記)로 삼노라.
무술년(1658, 효종9) 맹추(孟秋)에 안릉(安陵) 이현일(李玄逸)은 기(記)를 쓰노라.
또 갈암은 일찍이 전해지는 팔진도라는 것들이 거짓이라고 역서 스스로 고증하여 제갈량의 유법을 참고한 팔진도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동방(東方)의 변고(變故)가 있은 뒤로는 더욱 항분(抗憤)하여 불평(不平)스러운 뜻이 있었다. 병법(兵法)이나 군율(軍律)의 요체, 군영(軍營)을 구축하고 진(陣)을 치는 방법, 금고(金鼓)와 정기(旌旗)의 용법 등 모두 그 운용(運用)의 묘(妙)와 변화(變化)의 기회(機會)를 알았다. 일찍이 세상에서 팔진(八陣)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여겨 간간이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유법(遺法)을 참고하고 주자(朱子)와 채서산(蔡西山 채원정(蔡元定))의 설을 보태는 등, 추연(推衍)하여 〈신편팔진도(新編八陣圖)〉를 만들었다.
선부군(先府君) 가전(家傳), 갈암의 아들 이재(李栽)가 씀
선부군(先府君) 가전(家傳), 갈암의 아들 이재(李栽)가 씀
갈암은 제갈량에 대한 시도 종종 쓰곤 했는데 자신의 처지를 보고 감히 제갈량을 희구하려 했다고는 것을 생각하며 스스로 자조하는 시를 짓기도 했고 제갈공명이 왕업을 이루었다면 삼대[10]가 사대가 되었을리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갈암(葛庵)이란 호 자체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을 지향하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니와 갈암의 시에는 제갈량을 흠모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여러 번 보인다.
하늘이 총명을 고르게 내려 주어 가난하지 않건만 / 聰明勻錫不爲貧
아, 부질없이 동해 가에 태어났네 / 嗟爾徒生東海濱
임금 그리워하는 마음 언제나 잊지 못하고 / 耿耿心懸雙日月
허둥대던 몸 이제 허리 굽은 늙은이가 되었도다 / 棲棲身作一弓人
갈옹은 초년에 양보음(梁甫吟)을 읊었고[11]/ 葛翁初歲吟梁甫
도로는 노년에 유춘을 읊었네[12] / 陶老頹年詠柳春
세숙은 삼오의 원을 알지 못했으나 / 世叔未諧三五願
끝내 황극을 부지하였으니 또한 천민이로세 / 終扶皇極亦天民
혼자서 지내며 기해년(1659, 효종10)
아, 부질없이 동해 가에 태어났네 / 嗟爾徒生東海濱
임금 그리워하는 마음 언제나 잊지 못하고 / 耿耿心懸雙日月
허둥대던 몸 이제 허리 굽은 늙은이가 되었도다 / 棲棲身作一弓人
갈옹은 초년에 양보음(梁甫吟)을 읊었고[11]/ 葛翁初歲吟梁甫
도로는 노년에 유춘을 읊었네[12] / 陶老頹年詠柳春
세숙은 삼오의 원을 알지 못했으나 / 世叔未諧三五願
끝내 황극을 부지하였으니 또한 천민이로세 / 終扶皇極亦天民
혼자서 지내며 기해년(1659, 효종10)
만 그루 솔숲 산길을 시내 따라 가노니 / 萬松山路戛溪行
콸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맑게 귀에 들려라 / 決決流泉入耳淸
흐늘대는 촌락의 연기는 비와 섞여 가늘고 / 冉冉村煙和雨細
쓸쓸한 찬 잎새는 가지에 붙어서 우는구나 / 蕭蕭寒葉著枝鳴
본래 원량[13]처럼 그윽한 곳 찾으렸더니 / 尋幽本擬追元亮
외려 공명을 닮은 듯 포슬음을 읊조린다[14] / 抱膝還如學孔明
홀로 늦가을 만나 마음이 유연하니 / 獨際衰荒心賞遠
만나는 곳마다 이내 삶 즐겨 본들 어떠리 / 不妨隨遇樂吾生
신천(新川)으로 가는 도중에 중씨의 시에 차운하다.
콸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맑게 귀에 들려라 / 決決流泉入耳淸
흐늘대는 촌락의 연기는 비와 섞여 가늘고 / 冉冉村煙和雨細
쓸쓸한 찬 잎새는 가지에 붙어서 우는구나 / 蕭蕭寒葉著枝鳴
본래 원량[13]처럼 그윽한 곳 찾으렸더니 / 尋幽本擬追元亮
외려 공명을 닮은 듯 포슬음을 읊조린다[14] / 抱膝還如學孔明
홀로 늦가을 만나 마음이 유연하니 / 獨際衰荒心賞遠
만나는 곳마다 이내 삶 즐겨 본들 어떠리 / 不妨隨遇樂吾生
신천(新川)으로 가는 도중에 중씨의 시에 차운하다.
좋이 왕관을 향해서 골짜기에서 달려가 / 好向王官谷裏奔
초객으로 하여금 속절없이 초혼하지 않게 하오 / 休敎楚客謾招魂
일찍이 희갈[15]했던 것을 지금에 스스로 웃노니 / 如今自笑曾希葛
옛날에 학손했다는 것을 그 뉘라서 알리오 / 疇昔誰知暗學孫
절벽에서 쏟아지는 찬 물줄기 밤중에 울리고 / 瀉壁寒泉當夜響
숲 가득 맑은 달빛은 높은 산 위서 뒤집히네 / 滿林華月聳岑翻
띳집 처마 아래 묵묵히 앉았으매 온갖 상념들 / 茅簷默坐紛千慮
어찌하면 자네와 함께 한 동이 술을 기울일꼬 / 安得同君倒一樽
경희(景羲)가 안기장(安奇丈)에게 준 시를 부쳐 보냈는데 어의(語意)가 서글퍼서 처량 소삭(凄涼蕭索)한 태도가 있기에 이제 희롱 삼아 씩씩한 말로 시를 지어 그 뜻을 뒤집었으니, 한 번 웃을 만하리라.
초객으로 하여금 속절없이 초혼하지 않게 하오 / 休敎楚客謾招魂
일찍이 희갈[15]했던 것을 지금에 스스로 웃노니 / 如今自笑曾希葛
옛날에 학손했다는 것을 그 뉘라서 알리오 / 疇昔誰知暗學孫
절벽에서 쏟아지는 찬 물줄기 밤중에 울리고 / 瀉壁寒泉當夜響
숲 가득 맑은 달빛은 높은 산 위서 뒤집히네 / 滿林華月聳岑翻
띳집 처마 아래 묵묵히 앉았으매 온갖 상념들 / 茅簷默坐紛千慮
어찌하면 자네와 함께 한 동이 술을 기울일꼬 / 安得同君倒一樽
경희(景羲)가 안기장(安奇丈)에게 준 시를 부쳐 보냈는데 어의(語意)가 서글퍼서 처량 소삭(凄涼蕭索)한 태도가 있기에 이제 희롱 삼아 씩씩한 말로 시를 지어 그 뜻을 뒤집었으니, 한 번 웃을 만하리라.
이미 세운 훈업 이려[16]에 짝할 만하니 / 已將勳業配伊呂
천년토록 우주에 높은 공 독차지했어라 / 宇宙千年獨擅高
돌무더기[17]는 지금도 협곡에 웅장하건만 / 石蕝如今猶壯峽
역루에서 당시 몇 번이나 붓을 적셨더뇨[18] / 驛樓當日幾濡毛
치세가 이뤄졌으면 절로 사삼대가 됐으련[19] / 治成自足四三代
사세가 결정됨에 십배조[20]는 말할 것 없었지 / 事定無論十倍曹
우스워라 저 설능은 무슨 식견이런고 / 可笑薛能底見識
공공연히 당시의 출사를 조롱하다니[21] / 公然調戲出師勞
두보(杜甫)의 무후묘(武侯廟) 시에 차운하다.
천년토록 우주에 높은 공 독차지했어라 / 宇宙千年獨擅高
돌무더기[17]는 지금도 협곡에 웅장하건만 / 石蕝如今猶壯峽
역루에서 당시 몇 번이나 붓을 적셨더뇨[18] / 驛樓當日幾濡毛
치세가 이뤄졌으면 절로 사삼대가 됐으련[19] / 治成自足四三代
사세가 결정됨에 십배조[20]는 말할 것 없었지 / 事定無論十倍曹
우스워라 저 설능은 무슨 식견이런고 / 可笑薛能底見識
공공연히 당시의 출사를 조롱하다니[21] / 公然調戲出師勞
두보(杜甫)의 무후묘(武侯廟) 시에 차운하다.
병자호란 후에는 매번 신주(神州
명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때때로 커다란 변고가 들릴 때마다 문득 감개하여 마지않았다. 평생토록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그 유문(遺文)과 후대의 유자(儒者)들의 의론을 모아 도정절(陶靖節 도잠(陶潛,
도연명))의 유사(遺事)와 합하여 《충절록(忠節錄)》을 지었다.
만년에 또 흥을 읊고 일을 논한 작품들과 군주에게 올린 글들 중에서 황조(皇朝)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편차하여 《존주록(尊周錄)》을 지었다. 때로 붕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문득 무후의 〈출사표(出師表)〉를 읊고 간간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을 읊었다. 음절이 맑고 통창(通暢)하였으며 의기(意氣)가 격앙(激昂)되니 사람들이 모두 송연(悚然)하게 들었다. 평소에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소요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유연히 자득(自得)하는 흥취가 있었다
행장(行狀) (권두인(權斗寅)
만년에 또 흥을 읊고 일을 논한 작품들과 군주에게 올린 글들 중에서 황조(皇朝)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편차하여 《존주록(尊周錄)》을 지었다. 때로 붕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문득 무후의 〈출사표(出師表)〉를 읊고 간간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을 읊었다. 음절이 맑고 통창(通暢)하였으며 의기(意氣)가 격앙(激昂)되니 사람들이 모두 송연(悚然)하게 들었다. 평소에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소요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유연히 자득(自得)하는 흥취가 있었다
행장(行狀) (권두인(權斗寅)
이렇게 갈암은 평생토록 촉한의 재상 제갈공명의 풍모를 사모하여 그의 사업을 본받고자 했다. 만년의 갈암은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는 제갈량의 출사표, 사천 성도에 있는 소열제와 제갈무후의 사당을 읊은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백행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한평생 공명을 본받아 경제제민을 꿈꾸었던 갈암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된 말년에 스스로의 좌절감을 담아 읊은 시라고 하겠다.
古柏行(늙은 측백나무)
孔明廟前有老柏(공명묘전유로백)
제갈공명의 사당 앞에 오래된 측백나무
柯如靑銅根如石(가여청동근여석) :
가시는 청동같고 뿌리는 돌같구나
霜皮溜雨四十圍(상피류우사십위) :
서리 견딘 껍질에 흘러내린 물방울, 둘레는 사십 아름이라
黛色參天二千尺(대색참천이천척) :
검푸른 잎새는 하늘로 이천 척이나 솟아있구나
君臣已與時際會(군신이여시제회) :
군신이 이미 시국에 따라 함께 모였으니
樹木猶爲人愛惜(수목유위인애석) :
사당 앞의 나무도 사람의 아낌을 받고 있구나
雲來氣椄巫峽長(운래기접무협장) :
구름 몰려오면 그 기운 길게 무협으로 이어지고
月出寒通雪山白(월출한통설산백) :
달 떠오르면 그 찬기운 설산의 흰 눈과 통하는구나
億昨路繞錦亭東(억작로요금정동) :
지난 날을 생각하노라, 길 따라 금정 동쪽을 도니
先主武侯同閟宮(선주무후동비궁) :
선주 유비와 무후 제갈공명이 같은 사당에 모셔있었다
崔嵬枝幹郊原古(최외지간교원고) :
나무 줄기는 크고 높았고 교외의 들판도 오래되어
窈窕丹靑戶牖空(요조단청호유공) :
단청은 으슥했으나 창문 안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었다
落落盤踞雖得地(락락반거수득지) :
측백나무는 가지 늘어뜨리고 서리어 땅을 얻고 있으나
冥冥孤高多烈風(명명고고다열풍) :
어둑하도록 높이 자라 사나운 바람 많이 받는구나
扶持自是神明力(부지자시신명력) :
자신을 부지한 것은 곧 신명의 힘이요
正直元因造化功(정직원인조화공) :
바르고 곧게 자란 것은 조물주의 공덕일 것이다
大廈如傾要梁棟(대하여경요량동) :
만약 큰 집이 기울어져 대들보나 기둥감이 필요하여도
萬牛回首丘山重(만우회수구산중) :
나무가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도 고개 돌려 외면할 것이다
不露文章世已驚(불로문장세이경) :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사람들 이미 놀라
未辭剪伐誰能送(미사전벌수능송) :
베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해도 누가 능히 운반해 갈 수 있으리
苦心未免容螻蟻(고심미면용루의) :
개미에게 당하는 마음 속 괴로움 면하지 못하고
香葉終經宿鸞鳳(향엽종경숙란봉) :
향기로운 나무 잎새는 난새나 봉황새의 잠자리도 되었을 것이다
志士幽人莫怨嗟(지사유인막원차) :
뜻 있는 선비나 숨어사는 사람들은 원망하고 한탄하지 말아라
古來材大難爲用(고래재대난위용) :
예부터 인재가 크면 쓰이기가 어려웠노라
孔明廟前有老柏(공명묘전유로백)
제갈공명의 사당 앞에 오래된 측백나무
柯如靑銅根如石(가여청동근여석) :
가시는 청동같고 뿌리는 돌같구나
霜皮溜雨四十圍(상피류우사십위) :
서리 견딘 껍질에 흘러내린 물방울, 둘레는 사십 아름이라
黛色參天二千尺(대색참천이천척) :
검푸른 잎새는 하늘로 이천 척이나 솟아있구나
君臣已與時際會(군신이여시제회) :
군신이 이미 시국에 따라 함께 모였으니
樹木猶爲人愛惜(수목유위인애석) :
사당 앞의 나무도 사람의 아낌을 받고 있구나
雲來氣椄巫峽長(운래기접무협장) :
구름 몰려오면 그 기운 길게 무협으로 이어지고
月出寒通雪山白(월출한통설산백) :
달 떠오르면 그 찬기운 설산의 흰 눈과 통하는구나
億昨路繞錦亭東(억작로요금정동) :
지난 날을 생각하노라, 길 따라 금정 동쪽을 도니
先主武侯同閟宮(선주무후동비궁) :
선주 유비와 무후 제갈공명이 같은 사당에 모셔있었다
崔嵬枝幹郊原古(최외지간교원고) :
나무 줄기는 크고 높았고 교외의 들판도 오래되어
窈窕丹靑戶牖空(요조단청호유공) :
단청은 으슥했으나 창문 안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었다
落落盤踞雖得地(락락반거수득지) :
측백나무는 가지 늘어뜨리고 서리어 땅을 얻고 있으나
冥冥孤高多烈風(명명고고다열풍) :
어둑하도록 높이 자라 사나운 바람 많이 받는구나
扶持自是神明力(부지자시신명력) :
자신을 부지한 것은 곧 신명의 힘이요
正直元因造化功(정직원인조화공) :
바르고 곧게 자란 것은 조물주의 공덕일 것이다
大廈如傾要梁棟(대하여경요량동) :
만약 큰 집이 기울어져 대들보나 기둥감이 필요하여도
萬牛回首丘山重(만우회수구산중) :
나무가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도 고개 돌려 외면할 것이다
不露文章世已驚(불로문장세이경) :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사람들 이미 놀라
未辭剪伐誰能送(미사전벌수능송) :
베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해도 누가 능히 운반해 갈 수 있으리
苦心未免容螻蟻(고심미면용루의) :
개미에게 당하는 마음 속 괴로움 면하지 못하고
香葉終經宿鸞鳳(향엽종경숙란봉) :
향기로운 나무 잎새는 난새나 봉황새의 잠자리도 되었을 것이다
志士幽人莫怨嗟(지사유인막원차) :
뜻 있는 선비나 숨어사는 사람들은 원망하고 한탄하지 말아라
古來材大難爲用(고래재대난위용) :
예부터 인재가 크면 쓰이기가 어려웠노라
참고로 그의 후손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소설가인 이문열이다. 그의 소설 변경에 나오는 여암 할배는 갈암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본인을 투영한 이인철과 집안 노인의 대화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또다른 유명한 후손으로는 이명박 정부 시기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특임장관,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5선 의원 등을 역임한 이재오 현 국민의힘 상임고문이 있다.
[1]
장계향은 이시명의 첫 아내 광산 김씨가 1남 1녀를 낳고 죽은 후 새로 들어온 후처였으므로,
장계향의 친아들로서만 따지면 차남.
[2]
경당일기의 저자
[3]
광무제가 이전 황후를 폐위하고 음려화로 황후를 교체한 일을 뜻한다.
[4]
이현일의 호가 갈암이었으니 이현일 스스로도 어떤 운명같은 것을 느끼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5]
유배보다 한 단계 낮은 형으로 죄인이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하는 형벌.
[6]
1672 ~ 1749, 갈암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가 살던 향리
안동 족적동에서 사창(社倉)을 열어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서애 류성룡의 증손녀였는데 이 덕분에 서애와 처조부이자 스승인 갈암 이현일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보냈으나 학문과 인격이 뛰어나 안동 권문을 중흥시켰다.
[7]
이인좌의 난 때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발송하였던 인물로 역적 취급받을 인물은 아니었다.
[8]
정약용의 "중국의 문명이나 풍속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이나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데 방해받을 일이 없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서울 문밖으로 몇십리만 떨어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다. 하물며 멀고 먼 외딴 집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발언도 여기서 나온 것.
서울공화국 문서의 역사적 기원 참고.
[9]
배상유(裵尙瑜, 1610~1686)로, 자는 공근(公瑾)이고, 호는 만학당(晩學堂)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현감 배명전(裵命全)의 아들로, 유심(柳淰)의 문인이다. 1671년(현종12)에 추천을 받아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677년(숙종3)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유형원(柳亨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탐독하고 그 취지에 의거하여 임금의 도리, 정치의 규모, 전제(田制)에 관한 소신을 상소하여 숙종의 가납(嘉納)을 받았다. 낙향 후에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 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갈암보다 17세 연상이다.
[10]
하상주 시대를 말한다,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보던 과거의 시대를 뜻하는 말
[11]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을 때에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읊은것을 뜻한다.
[12]
도연명(陶淵明)이 노년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은 일을 가리킨다.
[13]
원량(元亮)은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도연명이 현령(縣令)의 자리를 박차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한적한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자신의 현재 상황을 비겨 본 것이다.
[14]
포슬(抱膝)은 무릎을 감싸 안는다는 뜻이다. 포슬음은 고인(高人)과 지사(志士)의 시를 뜻한다. 갈암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로서 알 수 있다.
[15]
제갈량(諸葛亮)처럼 되기를 희구(希求)한다는 뜻으로, 갈암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다.
[16]
은나라의 재상
이윤과,
주나라의 재상
여상을 뜻한다.
[17]
팔진도를 뜻한다.
[18]
출사표를 지음을 뜻한다.
[19]
삼대(三代)를 사대(四代)로 만든다는 뜻으로, 제갈량이 뜻한 바대로 한실(漢室)을 부흥하였으면 선치(善治)를 베풀어 하(夏),은(殷),주(周) 삼대에 1대(代)를 보태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20]
공명의 재주가 조비의 열배는 되리라는 유비의 유언, 그 재능이 사세가 결정됨에 따라 쓰이지 못했음을 말한다.
[21]
공명의 출사를 비웃은 당나라의 설능의 식견을 비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