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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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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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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윤경(한글학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김일파(金一波)
한결
본관 경주 김씨[1] #
출생 1894년 6월 9일[2]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고잠리
(현 경기도 광주시 고산동 고잠동)[3]
사망 1969년 2월 3일 (향년 76세)
부산시 동구 범일동 제일병원
(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묘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윤경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고잠리(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고잠동)에서 아버지 김정민(金正民)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누하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249번지에 본적을 두고 있었고, 1950년[4]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5] 101-4번지에 거주했다. 1955년[6]~1956년[7]에는 서대문구 신촌동 101번지에 거주했고, 1967년[8]에는 서대문구 창천동 13-26번지에 거주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4세 때 상경하여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입학, 졸업했다. 이때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국어 연구에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후 4년여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하였고 1917년 다시 상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전인 1921년 이병기 등과 함께 창립위원으로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국문 연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수양동우회의 전신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2년여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을 맡았다가 1926년 일본 릿쿄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돌아가 계속 근무하는 한편 한글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1931년 이후에는 여름방학이 되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습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일:김윤경(수양동우회).png
1937년 8월 23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고, 곧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1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인 1938년 7월 29일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다시 투옥되었으나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1심에서는 무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의 공소가 이유 있음으로 받아들여져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2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여 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사실 심리가 이뤄졌고, 그해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한 2심 판결이 파훼되고 결국 무죄 선고되어 출옥했다.

그러나 투옥된 경력으로 인해 5년간 실직하여 1938년 1월 <조선문자급어학사>를 출판하는 등 조용히 국문 연구에만 매진하였고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의 교사로 가까스로 복귀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홍원경찰서에 검거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사직을 맡았고, 1945년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를 역임하였다.

1949년 그의 저작인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 명저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국사편찬위원, 6.25 전쟁으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4년 7월 28일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2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기독교공로상·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한양대학교의 강사를 지냈고, 학술문화발전 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학과 교수로 부임하고,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내는 등 평생을 한글 연구 및 후진 양성에 바쳤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69년 1월 28일 부산· 울산지방 산업단지 교수시찰단의 일원으로 부산시로 여행을 갔다가 2월 2일 과로로 졸도하여 부산제일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하루 뒤인 2월 3일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 #

사후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3. 여담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慕華丸)에 중독된 가짜 명나라인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김윤경, 조선문자급어학사,(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생전에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를 사대주의자로 극딜한 바 있다. 그가 이 글을 쓴 시기는 식민지기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을 정립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였으니,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민족 의식의 주요 구성요소인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그에게 반민족행위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만리를 부패한 저능아라고 평한 것은 다소 지나치며 인신공격에 가깝다. 때문에 최만리의 후손인 해주 최씨 종가에서는 김윤경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김윤경의 호를 딴 '한결 하우스'라는 건물이 있다.


[1] 계림군파 20세 경(經) 식(植) 항렬. 아버지 김정민(金正民)은 19세 정(正) 항렬. [2] 1937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생년이 1894년 5월 28일로 기재되어 있다. [3]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 [4] 1950년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 참조 [5] 1975년 중구에 편입되었다. [6] 1955년 간행된 대한연감 4288 참조 [7] 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 참조 [8] 1967년 간행된 대한민국인물연감 제1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