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59

김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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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1]
金元龍 | Kim Won Yong[2]
'''
파일:김원용.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삼불(三佛)
본관 의성 김씨
출생 1922년 8월 24일
평안북도 태천군
사망 1993년 11월 14일 (향년 71세)
학력 영변보통학교 (전학)
혜화심상소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동양사학전공 / 문학사)
뉴욕 대학교 대학원 (미술사전공 / Ph.D.)

1. 개요2. 생애3. 평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고고학자로,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고고학과 미술사학 및 박물관과 문화재 관련 업무의 대한민국 초창기 중요 인사이다. 당시 얼마없던 한국 고고학계 인물들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자 국제통이었으며, 지표조사는 물론, 발굴까지 진행하며 고고학의 행정과 교육 두 분야에서 공헌하였다.

중요 발굴 유적은 1952년 경주 노서동 쌍상총, 1959년 감은사지, 1961년 양주 수석리, 1963년 광주 신창동, 1967년 서울 암사동, 1969년 부산 동삼동, 1971년 공주 무령왕릉, 1972년 화순 대곡리, 1973년 여주 흔암리, 1973년 경주 천마총, 1974년 경주 황남대총, 1975년 부여 송국리, 1976년 경주 안압지, 1979년 연천 전곡리, 1981년 양양 오산리, 1983년 서울 석촌동 고분, 1984년 춘천 중도, 1985년 서울 몽촌토성 등이다.

한국사에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학계는 이병도가 제시한 태고내(태조왕, 고이왕, 내물왕) 이후로는 기록을 믿을 수 있다는 기준에 따라 그 이전은 믿기 힘들다는 '초기기록 불신론'을 펼쳐왔고, 이에 따라 1세기에 백제나 신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 당시의 기록들은 거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1967년 발표한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에서 당시의 고고학적 조사를 근거로 1세기에도 백제와 신라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여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에 따라 1980년대까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긍정하는 '초기기록 긍정론'이 대세가 된다. 그러다 80년대부터 긍정론에도 문제가 발견되어 이기백 등을 중심으로 사건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되 기년을 조정하자는 '초기기록 수정론'이 등장하여 현재도 정설로 자리잡았다.

다만 김원룡 본인은 차후 고고학 자료가 더 발굴됨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3세기로 파악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2. 생애

1922년 8월 24일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출생했다. 1929년 평북 영변보통학교에 입학, 1931년 경성 혜화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 후 193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진학, 1940년 경기중학교(1938년 경성제일고보에서 개칭)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7회, 문과을류)에 입학했다.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로 반년 빠른 1942년 9월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동양사를 전공했다. 학부 역시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로 반년 빠른 1945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동양사학전공)를 졸업하여 문학사를 취득했다.

해방 후 1947~1961년 국립박물관(舊 조선총독부 박물관, 現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 연구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김재원(독일 뮌헨대학 졸업) 박물관장과 개성 삼재라 불리던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및 이홍직, 윤무병, 김정기 등과 함께 박물관을 이끌었다. 그러다 국립박물관이 한국전쟁 직후 1954년 당시 열악한 인력 사정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전문 박물관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김원용을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미술사 전공)에 유학시켰고, 이를 통해 김원용은 1954~1957년 뉴욕에서 유학하며 알프레드 살모니(Alfred Salmony) 지도하에 『신라토기의 연구』(1960)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유럽의 고고학 유적을 둘러보고 1968년에는 영국 런던 대학으로 단기 유학을 가서 전문 고고학을 배웠다.

1947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고,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며 교수로 부임하여 사실상 홀로 학과를 만들었고( 링크) 이듬해인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였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8년부터 1992년까지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있었다. 1970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종신)이 되었다. 1971~1974년 한국고고학연구회장, 1976~1977년 고고학회장, 1979~1980년 역사학회장, 1985~198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1976년 8월 28일 오후2시에 한국고고학회를 창설했다.

퇴임 후 198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1990~1993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에 사망하였고,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되었다. 묘소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유적인 전곡리 선사유적지이며, 유언에 따라 무덤 없이 화장 후 유적지 내에 산골하였다[3].

3. 평가

도유호가 북한에서 고고학을 이끌었다면, 김원용은 남한의 고고학을 이끌었다. 도유호와 마찬가지로[4] 처음부터 고고학 전공이었던 게 아니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사학자였기 때문에 1954년 미국에 유학가서 고고학을 공부해야 했다. 당시 학문적 기반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한국 고고학의 여건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최대한의 발전을 일궈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 고고학의 기반은 사실상 김원용이 혼자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한반도의 고고학적 조사를 해왔기 때문에 당시 남한 내에는 고고학적 기반이라고 부를 만한게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해방 이후에도 일본인 학자를 불러서 고고학적 조사를 해야 했을 정도였으나 50년대가 지나서 김원용이 한국 고고학계의 기틀을 잡자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자체적인 고고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원용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는 참고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성과가 극히 적었던데다 그런 오류는 제자들이 차후 수정해 주고 있다. 당시 너무나 적은 자료로 많은 것을 해석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구석기부터 통일신라까지 몇 명 되지 않는 학자들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며 다뤄야 하니 오류가 나오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뿌려둔 씨앗은 싹이 트는 법으로, 고고학계의 논쟁거리 몇 가지는 여기서 발현되었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무령왕릉[5] 발굴에 대해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 분야씩 논문을 쓰도록 명했고 이 당시 제자들이 쓴 논문은[6] 지금까지 거의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정설로 자리잡았다. 물론 자신이 쓴 논문들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긴 하다. 김원용의 발굴 중 유명한 것은 무령왕릉 발굴과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이 있으며, 이외 업적으로는 한국 고고학 개설 3판에서 한국의 시대 구분을 정립한 것도 포함된다.[7]

발굴 외에도 다방면의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고고학 개설, 한국고고학 연보 등 고고학 연구자들의 필독서를 남겼으며, 한국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미술사 연구, 한국미의 탐구, 한국문화의 기원 등의 한국의 미술사 관련 서적도 저술하였다. 서울대에서 고고학과가 고고미술사학과로 개편된 이유는 바로 김원용의 고고학과 미술사 전방위에 걸친 탁월한 박학함과 더불어 박물관에 종사할 전문 인력은 고고학 뿐 아니라 미술사도 익혀야 된다는 그만의 신조 때문이다.

김원용의 작문 능력은 학술서 뿐만 아니라, 수필에서도 발휘되었다. 40대와 50대, 60대 인생 여정을 엮은 '삼불암수상록', '노학생의 향수', '하루하루와의 만남'과 같은 수필집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각각 출판했다. 40대 당시는 사회 비판과 여러 지역 돌아다닌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50대는 영국 유학가서 고생한 것과 몸이 힘들어서 고생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60대는 인생에 있어 후회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수필을 보면 결국 자기가 하고 싶었던 즐문토기(빗살무늬 토기)편년도 하지 못했고, 자신이 만든 신라토기 편년의 오류는 결국 수정도 못했다.(물론 이쪽은 이후 신경철 등 영남지역 학자들이 많이 손 봤다. 다만 최병현 등이 와질토기론에 대해 반발한다.)

이외에 문인화 등의 그림을 잘 그렸고, 개인전도 2회나 개최한 중견 화가 수준이다.

본인 스스로 "....뭐 사람 인생이 자기 하고 싶은거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것만 하다 끝내는 게 인생이라지만" 하며 아쉬워했지만, 김원용은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거 못하고 어찌어찌 끌려다녀서 큰 실수도 몇 번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도 않는 선택도 여러번 했다. 일례로 모어와 샘플에게 석장리 발굴을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사실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입장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것을 본인은 싫어하였지만 중동처럼 한국 고고학도 외국인들에게 끌려다니는 사태가 발생할까봐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발굴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약간 후회하는 듯한 말을 자신의 수필에 남기기도 했다. 발굴을 전혀 해 본 적 없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된 고고학을 연마한 외국인이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식이다.[8]

김원용의 선구자로서의 한계는 너무 넓은 범주에서 고고학을 다룬 것 이라고 한다. 논문을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선사부터 역사시대까지 거의 건드리지 않은 시기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오류도 상당하다. 물론 그러한 넓은 저변의 연구가 한국 고고학계의 큰 발전으로 이어진건 사실이다.

2021년 6월 13일에 방영된 KBS TV쇼 진품명품에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지금은 안산시가 구매한 이 작품을 미국인 페터슨이 구입할 때 그가 써준 보증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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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룡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본인이 스스로 '김원용'이라고 칭하고 '룡'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일일이 교정해줬으며, 서명을 할 때도 "Kim Won Yong"으로 표기했다. [2] 서명 [3] 지금은 사적 지정된 곳에서 어떠한 장례 의식이나 굴착 행위도 불법이지만 당시는 가능했던 시절이다. [4] 도유호는 경성고등상업학교(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출범 당시 서울대 상과대학의 모체)에서 상학을 전공하고 일본과 중국을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사회사상사를 전공하다가 2차대전 발발 후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옮겼다. [5]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에서도 매우 드물게 피장자의 신원이 명시되어 있는 왕릉급 무덤이다. [6] 대표적으로, 임효재('61)의 중서부 지역 즐문토기, 최몽룡의 지석묘와 동과('64), 이백규('65)의 무문토기, 이인숙('67)의 고대 유리, 이강승('67)의 청동기, 윤덕향('69)의 마제석검, 배기동('71)의 전곡리 구석기, 최성락('72)의 마제석촉, 이희준('72)의 순서배열법, 이청규('73)의 세형동검, 김재열('73)의 조선백자, 권학수('74)의 가야고분, 노혁진('74)의 유구석부, 이남규('75)의 철기, 한상인('75)의 점토대토기, 임영진('75)의 석촌동 고분, 이선복('75)의 지질고고학, 이영훈('75)의 낙랑유물, 박순발('77)의 백제토기 연구는 당시 기준에 한국 고고학계의 주류학설을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서울대 고고학 학파를 이끌어냈다. (괄호 안은 해당 학자들의 학번) [7] 고고학계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원삼국-삼국시대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원삼국이라는 용어의 경우 사학계에서 인정을 하지 않는다. 한국 고고학 자료 상 청동기시대 용어에 문제가 있어 청동기 대신 무문토기 시대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8] 실제로 이렇게 석장리의 외국인 발굴을 금지시키고, 더 나아가 당시 빈포드가 주도했던 신고고학 또는 과정주의 고고학에 대한 비판 때문에 미국에서는 김원용이 보수적인 문화사고고학의 수호자 같은 이미지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동삼동 패총 발굴로 박사 학위를 받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르치던 샘플은 이후 세계 고고학 학술대회에서 한국 고고학을 먼지가 되도록 깠다. 그래도 나름대로 한국 고고학의 기초를 세웠으니, 어찌보면 어느 분야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