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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괄

1. 개요2. 생애
2.1. 인생 초기2.2. 출사2.3. 왕안석의 신법 시기2.4. 요나라로 출사2.5. 탄핵 폄하2.6. 서하 방어2.7. 영락성에서의 패배2.8. 낙향과 죽음
3. 사후4. 기타
4.1. 인간성 문제4.2. 남편으로서의 심괄
5. 기여한 분야6. 주요 작품

1. 개요

沈括, 1031년 ~ 1095년
북송 시기 과학자로, 항주 전당(錢塘) 사람이며 자는 존중(存中)이고, 호는 몽계옹(夢溪翁)이다. 심구의 종제[1]이며 왕안석의 신법파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 몽계필담》이 있다. 영국학자인 니담(Needam, 중국명 이약슬(李約瑟))에 의해 중국과학사상의 좌표, 중국과학사상의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굉장한 팔방미인이다.

2. 생애

2.1. 인생 초기

항주 전당 항주 심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14세에 집안의 장서를 완독할 정도였다. 아버지를 따라 변경 등지를 다녀 사회를 접하고 식견을 넓혀 대자연에 대한 강한 관심과 예리한 관찰력을 보였다고 한다.

심괄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약을 달고 살아 약재를 많이 접했기에, 훗날 의약을 수집하면서 의학을 연구해 의약학에서 상당한 업적을 세웠다.

1050년, 소주의 모택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외삼촌 허동의 저서와 장서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으면서 군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2.2. 출사

1051년 아버지 심주가 사망하였고, 3년 뒤 음서로 벼슬에 들어가 해주 수양현 주부를 맡았으며, 수수를 다스리고 농토를 개발하여 치적을 쌓았다. 공사가 끝난 뒤 사직하고 형 심피가 재임 중인 영국 현으로 건너가 과거 시험을 준비했다.

1061년 심피는 무호에 저수지를 쌓는 일을 계획하였고 심괄은 치수 경험이 있어 계책을 제시하고 상세한 기록을 작성하였다.

가우 8년(1063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상위 6위 안에 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거를 지켰다. 이듬해 선거 기간이 만료되어 양주 사리의 참군이 되었고 일주의 형옥을 담당한다.

1065년, 회남로 환적사 장광의 추천으로 경사로 전근되어 소문관 서적을 편교하고 혼천의의 상세한 정정에 참여하였으며, 여가 시간에 천문역법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1068년 관각교감으로 승진하여 황실의 장서를 접하고 자신의 학식을 더욱 충실히 할 기회를 가졌다. 8월,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심괄은 관을 전당으로 호송했다.

2.3. 왕안석의 신법 시기

1071년 상을 마치고 상경하여 송 신종 왕안석의 기중을 받아 검정중 서형방공사에 임명된다.

1072년 변하 준설 공사를 주관하였고, 7월에는 사관 검토를 강화하였는데, 심괄은 남교대례의 역사적 연혁을 고찰하여 《남교식》을 짓고 교사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임명되었다.심괄은 새로운 의례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고, 절약한 비용은 수만 명에 달하여 신종은 매우 만족하였다.

8월, 회남 지역의 기근으로 인해 심괄이 이를 보고 상평창고 전곡을 지급하고, 수로를 소통시키고, 황무지를 정비하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집현교리로 승진하여 양저농지 수리를 순찰한다. 그는 양자강 치수 계획 규모가 엄청나서 돈을 내서 굶주린 사람들을 고용하여 수자원 관리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여 신종의 동의를 얻었다.

9월에 심괄은 태자 중윤으로 승진하여 사천감을 추대하였다. 당시의 일반 관리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천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에 그는 기구를 개혁하고, 기구를 개선하며, 위박에게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전국에서 천체 현상을 관찰할 책을 모집했다.

11월에 조정은 민간 차량을 등록했고 시 이사는 사천 지역에서 우물 소금을 밀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인 우물을 봉인할 계획이었고 민의가 분분했다.[2] 신종은 다음날 이 두 가지 일을 중지하고 심괄을 지제고, 겸관통진, 은태사로 승진시켰다.

1074년 8월, 심괄은 하북서로찰방사(河北西路访使使)로 자리를 옮겨 하북서로 의용과 보갑의 공무를 추대하였다. 하북서로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취임한 후 군정을 개혁하고 국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075년 2월 귀경한 후 상소하여 31개의 시정 의견을 제출하였고, 대부분이 신종에 의해 승인되고 채택되었다. 그 해 9월, 심괄은 판군기감을 겸임하여 병기의 주조와 비축을 담당하였다. 그는 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활에는 육선이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신완 활'을 대량으로 제조할 것을 제안했다. 이듬해 5월 군기감이 조정에 보고했을 때 병기 생산량이 10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명을 받아 9군전법을 변주진법으로 개정한 뒤 성루, 군영 등 건축물의 조성 법식을 편찬했다.

2.4. 요나라로 출사

1075년 3월, 송나라와 요나라의 경계가 충돌하여 요나라가 황외산을 경계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송나라 조정은 동의하지 않았다. 요 사신 소희는 변경에 가서 북송 조정의 협상이 불성실하다고 비난하고, 결단을 미루고, 관사에 남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심괄은 추밀원에 가서 이전의 문서 문서를 찾아본 결과, 송과 요가 과거에 합의한 협의는 고대 장성을 경계로 하고, 황외산은 고대 장성 남쪽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위 표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신종은 심괄에게 백금 천 냥을 하사하여 회사사로 요나라에 출사하게 하였다.

4월 중순, 변경을 출발할 때 관련 서신 파일 수십 개를 미리 찾아내 막료와 이원을 암기하게 했다. 요의 재상 양익계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심괄은 부하 관리들에게 문서 조문을 열거하도록 했다. 6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양익계는 대답할 말이 없자 두 나라의 이익을 헤아리는 것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위협했다. 심괄은 나라의 도의와 백성의 근본을 이유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심괄 일행의 노력으로 요 정권은 결국 어느 정도 물러났고, 긴장된 송과 요 관계는 잠시 완화되었다.

7월 귀국하여 연도의 지리 정세와 풍속 민정에 근거하여[3] 《사거단도초》를 편찬하여 조정에 헌정하였고 이듬해 10월, 한림학사가 되었다.

2.5. 탄핵 폄하

1076년 10월, 왕안석이 재상에서 물러나고 오충이 중서문하 평장사를 이어받았다. 심괄은 승상부에 가서 정무를 보고하고, 오충은 병역면제법을 묻고, 심괄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역비를 감면해 줄 것을 건의하고, 오충은 찬성하여 신종에게 상소하였다.

11월 심괄은 다시 상신하여 하호역비를 감면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조정에 기존의 차역법과 현행 면역법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차출고용병행'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심괄의 이 같은 견해는 왕안석이 파기한 뒤에야 나온 것으로 면역법에 대한 태도가 앞뒤로 미묘한 변화를 보여 반대론자들에게 구실을 제공했다.

1077년, 시어사 채확의 탄핵을 받아 7월 삼사사, 한림학사에서 물러나고 기거사인, 집현원학사, 지선주로 좌천되었다.

1078년, 신종이 심괄을 지제고·지담주로 기용하려 하자 채확의 반대로 철회되었다.

1079년 7월, 용도각 미제, 지심관원으로 복직하였다.

2.6. 서하 방어

1080년, 지연주로 고치고, 노연로경략안무사를 겸하여 서하를 막았다.연주에 도착하자 심괄은 조정에서 준 돈으로 술을 사고 변방의 자제들을 모아 기마 활쏘기 활동을 벌이며 우승자에게 직접 술을 권하며 축하했고 국경의 백성들은 열광했다.심괄은 1년 동안 정예들을 선발해 변방부대에 충실하게 활동했고, 연주군의 위상은 다른 주부를 압도했다.

1081년 10월, 번부 수만 명이 변방의 요새인 순녕채로 진격하자, 심괄은 소장 경사의와 굴리를 보내 3천 병마를 이끌고 번군을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선봉 이달령에게 군사 천 명을 이끌고 10만 명의 군량을 휴대하게 하여 배연로의 총수 심괄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독전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병사들은 허실을 모르고 군심이 흐트러져 있었는데, 송군은 여세를 몰아 마애채를 공격하여 남녀 만 명, 소와 양 삼만을 얻었다.

11월, 서토의 하동병 12장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연장을 거쳐 심괄이 기회를 포착하여 수덕성에서 무력을 과시하고 송정이 이미 심괄과 하동12장의 병력을 임명하였다고 주장하여, 불일 즉흥적으로 서토하였다. 주둔하고 있는 서하군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데, 과연 심괄의 군대가 군사를 모아 기세가 드높은 것을 보고,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밤새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로써 심괄은 피도 흘리지 않고 부도, 오보, 의합을 손에 넣었다.

1082년 2월, 용도각 학사로 승진하였다. 4월에 서하는 금탕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염연을 공격하려 했다. 이에 성동격서 전술을 구사하여 부총관 곡진을 보내 2만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갈로를 공격하고 서하 병력을 끌어들여 수비를 하고 그 틈을 타 금탕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같은 전략으로 갈로를 공략했다.

2.7. 영락성에서의 패배

1082년 5월 부사 충악[4]과 함께 조서를 받들어 횡산에 성을 쌓아 서하를 지리적으로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주장을 펼쳤고, 송 조정은 서희를 배연로로 보내 군사를 절제하고 공동신의를 하였다.7월, 심괄이 석보 축성을 건의했고, 충악은 은주에 성을 쌓을 것을 제안했으며, 서희는 영락성 축조를 주장하자 영락성을 축성하기로 정해졌다.[5] 8월, 신종은 서희로 하여금 성을 쌓는 일을 명하고, 심괄에게는 군용 물자와 구원을 위해 국경으로 옮기라고 명령했고, 영락성이 14일 후에 지어지자 서희는 경사의로 하여금 4천 명을 이끌고 미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9월 9일, 서하가 30만 명을 출병시켜 영락성을 공격하자 곡진은 급히 서희에게 알렸고, 서희는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원하여 심괄에게 미지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력 차이로 송군은 패배했고, 서하군은 승승장구하여 수원을 끊었고, 영락성은 위태로웠다. 심괄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지원하러 갔다가 서하군에 의해 영정강 기슭에 가로막혔고[6], 또 강병 8만 명이 수덕을 공격하자, 심괄은 이해득실을 따져 영락성을 방치하고 수덕을 지켰고 충악은 연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출병을 거절하였다.[7] 9월 20일, 영락성이 함락되고, 서희, 이직, 고영능, 이순거 등이 난전 중 전사하였고( 영락성 전투), 횡산을 노리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2.8. 낙향과 죽음

1082년 영락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균주단련부사로 좌천되었고 수주로 건너가 법운선사에 머물렀다.

1085년 송 신종이 죽고 송 철종이 즉위하자 수주단 훈련부사로 자리를 옮겼고, 심괄은 퇴폐에서 벗어나 학문에 전념하여 희녕 9년 봉지(旨编)가 편찬한 《천하군국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088년 8월, 심괄은 《천하군국도》를 편찬하여 변경으로 출정하도록 허가받았다. 철종은 견사 백 필을 하사하여 심괄이 수주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089년 9월 조산랑(朝散郞)·수광록소경·분사남경(分司南京)으로 자리를 옮겨 외주에 거주할 수 있다는 조서를 받자 심괄은 일찌감치 윤주에 매입한 몽계원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면서 《 몽계필담》을 지었다.

1095년 6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3. 사후

심괄 사후 아무도 그의 비석을 세워주지 않았고, 《송사》에도 별도의 열전이 없다. 서양에서는 엄청나게 인정받는 것과는 매우 대조된다. 당장 영어 위키백과를 가서 맨 밑의 분류를 보면 정말 많다.

4. 기타

파일:심괄호.png
  • 중국의 해양과학선 중 하나인 심괄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1. 인간성 문제

심괄은 북송 시기 유명한 과학자였지만,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
  • 소식과는 동료 관계였다.[8] 심괄은 왕안석의 신법당 일원인 반면 소식은 사마광의 구법당 일원이었다. 1073년에 심괄은 양절 지역의 농경지 수리를 순찰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때 소식은 항주 통판을 지냈다. 심괄은 항주에 가서 소식과 옛정을 이야기하고, 그 신작을 한 부 베꼈다. 심괄이 변경으로 돌아오자 비방이라고 생각되는 시구의 상세한 '주석'을 부전으로 황제에게 건네고, 소식을 '조정을 우롱한다'거나 '군신의 의가 없다'고 모함했다. 1079년 하정신과 이정이 소식을 탄핵하자 오대시안이 터졌다. 이듬해 소식은 황주로 좌천되었고 친우 30여 명이 연루되었으며 소식은 100여 편의 시와 사를 짓는다.[9][10]
  • 왕안석이 실각하자, 심괄은 왕안석을 공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변법파와 구법파 모두의 미움을 받았다.[11]
  • 심괄이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저버리는 짓을 하자, 송 신종은 그를 절대 기용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4.2. 남편으로서의 심괄

심괄의 두번째 부인 장씨는 그를 욕하고 때렸는데, 장씨 부인이 죽자 그도 몽롱한 상태였고 장강에 빠져 자살하려고 하나, 실패한다.

5. 기여한 분야

지구가 자성을 띠고 있고 자석 성분이 포함된 자침이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나침반의 원리를 처음 발견하여 나침반을 발명하였다.

< 동방견문록>을 저술한 마르코폴로는 나중에 중국에 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유럽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 나중에 대항해시대를 여는데 일조한다.

6. 주요 작품


[1] 사촌동생을 의미 [2] 심괄은 민간은 모두 태평차로 기동전투에 불리하고 작은 소금 우물이 많아서 개인 우물을 봉인하는 것은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3] 귀국 도중 어느 고장을 지날 때마다 그 고장의 산과 강, 관문과 도로 등을 자세히 지도에 그려 넣었으며 그곳의 풍속과 세태 등도 상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동경에 돌아온 뒤에 그 자료들을 정리해서 신종에게 바쳤다. [4] 청간성을 축조하여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이다. [5] 여기서 충악은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으나 무시당하였다. [6] 난주를 지키던 이헌의 군대도 서하 군대에 의해 가로막힌다. [7] 충악은 이 과정에서 병사한다. [8] 심괄이 소식보다 5살 많았다. [9] 그러나 심괄이 소식을 모함한 이래, 소식은 뼈속까지 그를 경멸하게 된다. [10] 왕안석도 심괄이 소인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11] 왕안석의 신법을 비난하나, 오히려 재상 오충에게 비난을 받는다. [12] 이 책은 나중에 영국의 유명한 과학사가인 리덤에 의해 중국과학사상의 좌표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