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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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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承疇 / Hong Chengchou
1593년 ~ 1665년

1. 개요2. 생애
2.1. 관직에 몸담다.2.2. 농민 반란을 진압하다.2.3. 투항2.4. 청조의 신하로
3. 여담4. 매체에서

1. 개요

명나라 말기의 장군[1], 계료총독[2], 병부 상서[3], 자는 언연(彥演), 호는 형구(亨九).

명말청초의 인물로,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서 농민 반란 진압과 북방의 만주 군대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송산-금주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힌 이후[4] 청나라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여생을 보내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원숭환이 죽은 이후 양사창, 조문조, 노상승, 손전정 등과 더불어 명나라의 명장으로 활약하였다.[5] 청나라에 귀순후에는 범문정과 함께 문관으로 활약, 청나라의 대륙 지배를 확고히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두 왕조를 섬겼기 때문에 명의 충신들이나 청나라 시절의 원리주의적인 유학자들로부터는 욕을 먹었으나, 어쨌든 자신의 재주를 양쪽에서 다 써보고 천수를 누린 행운의 인물이다.

2. 생애

2.1. 관직에 몸담다.

1593년( 만력 21) 복건성 천주부(泉州府) 남안현(南安縣)[6]에서 태어났다.

만력 43년(1615년), 23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회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형부강서청리사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원외랑, 낭중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형부에서 6년의 세월을 몸담았고 천계 2년에는 절강 제학 첨사로 임명되었다. 뛰어난 식견으로 여러 인재를 발굴하였고 조정에서 많은 칭찬을 들었다. 이후에도 양절승선포정좌참의로 승진하였고, 더해서 섬서도독참의가 되었다.

2.2. 농민 반란을 진압하다.

당시 명나라 암군의 연속적인 등장과 환관의 전횡 등으로 정치 상황은 문란하였을 뿐 아니라 이갑제의 붕괴에 더해 유례없는 대기근으로 명나라 곳곳의 백성들에게는 지옥도가 펼쳐졌으며 섬서와 산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등,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최악의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섬서포정사[7]참의[8]가 되었던 1627년( 천계 7년)에는 혼란한 정치 상황과 파탄난 농촌 경제가 원인이 되어 각지에서는 농민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홍승주가 부임한 섬서 지방은 본디 가난한 지역이었으며, 연이은 재해 등으로 흉년이 들고 쌀값이 폭등하여 더욱더 상황이 암울하였다.

급기야 1628년( 숭정 원년) 7월에는 왕가윤, 양륙을 비롯하여 여러 도적의 무리들이 일어나자, 섬서의 전 지방이 이에 호응하였다. 1628년 ~ 1630년에는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 등이 앞다투어 준동하였으며, 기타 여러 우두머리들의 세력까지 합한다면 섬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은 두 자리 수를 넘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암울한 상황의 영향을 받고 적지않은 관군들도 이들 농민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반란군의 핵심 전력이 되어 명나라를 내부에서 붕괴시키고 있었다.

1629년, 왕좌괘를 위시한 반군이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아직 참정의 벼슬에 있던 홍승주는 구원군으로 참가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백의 농민군을 죽이며 한성을 지켜내어 능력을 보이게 된다.

1630년, 연수순무로 부임하며 양학[9]의 수하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반군에 대한 명나라의 대전략은 양학이 제시한 초무 정책이었다고 한다. 초무(招撫). 불러서 어루만지다. 즉, 저항하였던 반란군에게 자비와 선처를 베풀어 용서하는 일종의 유화책이었는데, 홍승주는 이 초무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토벌하고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항복한 자들까지 모조리 죽여야한다고 아뢰었다.[10]

1631년에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묻고 총독 양학이 파직되었는데, 그 공석을 메우기 위하여 조정은 홍승주를 총독으로 임명한다. 총독이 된 홍승주는 양학이 세웠던 '자비를 베풂으로써, 만방에 자비를 보여 반란군을 회유한다'는 대전략을 버리고, '철저하게 반란군을 짓밟음으로써, 군대의 위엄과 강력함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감히 반란을 저지를 생각을 하지못하게 한다', '토벌한 연후에, 잔당들을 회유한다'라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세운 전략에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 당시 반군의 온상이었던 섬서 지역을 공격하였다.

1632년에는 홍승주 이하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된 반란군의 일부가 공세를 피해 경양 지방으로 도망쳤는데, 홍승주는 끈질기게 쫓아와 경양에서도 전투를 지휘하였다. 명군과 반군은 서오 지역에서 수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반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우두머리인 두삼, 양노시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전투로 홍승주는 조정에 크나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전투에 대해 말하기를 '서오 대첩'이라 칭하였다.

숭정 7년, 1634년 숭정제는 홍승주를 섬서 삼변 총독으로 임명하며 태자태보, 병부상서를 겸직토록 하였을뿐 아니라 섬서, 산서, 호광, 사천, 하남 등 다섯 개 성의 병권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홍승주는 명나라 농민 반란군 토벌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곧 군대를 지휘하여 섬서 지역의 반란군을 포위, 압박하였다. 당시 섬서 지역의 반란군은 틈왕 고영상과 그 부하였던 이자성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그 수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홍승주는 휘하 장군들인 총병대장 하인룡, 좌광선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공격하였고, 반란군은 이들에게 패하여 동쪽으로 도주, 하남 지역의 영보, 사수 등으로 이동했다.

1635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동관에서 출진하여 하남의 신양에서 병력을 소집하여 농민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반란군은 3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섬서 지역으로 되돌아 진입하였고, 한 갈래는 북으로 진군하여 산서 지역으로 진입했으며, 나머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봉양을 공격하고 황릉을 불태우는 등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홍승주의 군대가 하남으로 집결하는데에는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틈을 타 반란군은 대부분 섬서 지역으로 이동한 뒤였다. 홍승주는 회군하여 섬서로 되돌아갔는데, 이자성은 이미 영주, 진녕의 관군을 격파하고 함양을 함락시켰으며, 그 기세로 서안을 위협하였다. 고영상과 장헌충은 지역의 관군을 견제하기위해 3갈래로 나누어 하남으로 이동했는데, 명 조정에서는 반란군이 유동적으로 연계하며 활동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대규모의 전면적인 포위를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각 지역별로 작전을 전개하여 각개격파하는 방침을 세웠다.

명 조정은 1635년 8월, 노상승을 오성 총독으로 임명하여 중원 지역을 담당토록 하였고, 홍승주로 하여금 서북 지역의 반군 토벌을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조정은 섬서 지역의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한중의 고영상과 장헌충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홍승주는 섬서 북부 지역의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홍승주는 이자성을 또 다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고 이자성은 총산 지역에 갇혀 3개월 동안의 처절한 세월을 보내며 와신상담해야 했다. 이 무렵 고영상은 반란군을 데리고 한중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섬서 순무 손전정의 매복을 만나 큰 손실을 입고 도주하던 끝에, 섬서 주지 지방에서 홍승주가 이끄는 군대에 잡혀 포로가 되었고 경사로 압송되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고, 그의 잔존 병력은 이자성과 합류하여 이자성을 새로운 틈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1636년 7월의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내몽골 지방을 아우르고 있던 청나라 군대가 북경 인근을 침탈하여 16개 성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중원 지방의 관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던 노상승으로 하여금 구원, 방어토록 하여 중원 지역의 반란군 진압이 느슨해졌는데 장헌충 등은 이 틈을 타서 다시금 준동하여 라여재 등과 합세해 20만 이상의 군세를 이루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기주, 곽산 일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10월, 숭정제는 웅문찬을 오성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때 이자성이 사천으로 진격하여 10개 성을 함락하고, 감숙의 영주, 강주를 무너뜨리고 1638년에 섬서로 다시 돌아왔는데, 홍승주는 조하 지방에서 이자성을 박살내었고 이자성은 민주로 도망갔다. 비슷한 시기에 장헌충은 남양에서 좌량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상을 입고 곡성으로 달아났다. 오성 총독 웅문찬은 토벌을 멈추고 회유하는 작전을 펼치자 장헌충, 라여재 등이 차례로 항복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자성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천섬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물러났다.

1639년 10월, 홍승주는 총병대장 마과, 좌광선에게 명하여, 최후의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의 군대를 분쇄토록 하였다. 이자성이 동쪽으로 도주하자, 홍승주는 일단의 군대를 휘하 장수 조변교가 이끌도록 하고 동관에 매복시켜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이자성은 대패하여, 18명만을 데리고 상낙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홍승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명나라를 휩쓸던 농민 반란군을 이로써 대략 평정하여[11] 이름과 능력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며, 그가 이끄는 군대를 홍군이라 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홍승주는 숭정제에게 상주를 올려 은 20만냥을 요구하였는데, 일신의 영광이나 사욕을 위해서가 아닌 관군의 군량과,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사용 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2.3. 투항

자세한 경과는 송산-금주 전투 참조.

홍승주는 청과의 결전에서 갖은 방법으로 분투하였으나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게 되자 송산성의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부하들을 묵인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홍승주의 부장인 하승덕이 몰래 성문을 열어 청군을 들이면서 패한 것이지만, 그 항복을 주관한 하승덕이 홍승주의 심복인 부장이었다는 점과, 성문을 몰래 여는 배신행위를 꾸미면서도 대장인 홍승주를 죽이거나 하지 않은 점, 홍승주 본인도 성문이 열린 후 끝까지 저항해 전사하거나 자결하지 않은 점을 보면 홍승주가 자신의 부장을 시켜 항복의 모양새를 낸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홍승주는 한동안 포로로 연금되어 있었고, 한동안 곡기를 끊고 단식했다고 한다. 청나라 측은 홍승주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보물과 미녀를 보내 달랬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오랜 단식으로 홍승주가 병석에 들자 청태종의 후궁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까지 인삼탕약을 들고 찾아와 홍승주를 설득했다고 한다.[12] 청태종은 홍승주가 추위를 탈까봐 자신이 입던 담비옷까지 보낼 정도였다. 이렇게 청나라 측이 홍승주를 극진히 대접하자 홍승주도 곡기를 끊고 단식으로 자살하려던 마음을 바꿔 청나라에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청나라의 신하가 된다.

2.4. 청조의 신하로

숭정제는 홍승주가 패했다는 것을 알고 전사했다고 생각, 그를 추모하는 단을 쌓았으나, 나중에 그가 청나라에 귀순했다는 것을 알고 단을 허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자성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가 자살한 후, 청나라는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와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입관했다. 오삼계가 청조에 항복한 데는 홍승주가 청나라에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이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홍승주는 청나라에 귀순한 뒤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기보다는 주로 청조의 대륙장악의 전략가로 활약했다. 청조가 북경을 장악하자, 어린 순치제 대신 실권을 잡은 섭정왕 도르곤에게 제안하여 남명정권 격멸보다 농민반란을 진압함이 우선이라고 계책을 냈다. 그리고 군율을 엄정히하여 병사들의 약탈이나 행패를 절대 엄금해야한다고 주청했다. 그리하여 청나라군대는 일단 남명보다는 우선적으로 패주하는 이자성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한편, 순식간에 화북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하북, 산서, 산동에서 단시간에 질서를 잡았다. 또한 홍승주는 청조가 명나라의 통치질서를 복원할 것을 제의하여, 명나라의 여러 행정조직이나 정부기관이 그대로 청나라에 이어지게 되었다. 즉, 청나라는 새로 행정조직을 만든 게 아니라 북경에 있던 명나라의 조직을 그대로 접수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단시일 안에 청나라가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청조의 황제들이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삼자, 홍승주는 이를 경계하여 티베트 불교에 치중하지 않고 유교를 신봉해야 한다고 간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티베트 불교를 광신하다가 멸망한 원나라나 반대로 숭유억불만 고집한 조선과 달리 유불의 균형을 잃지 않고 민간에 널리 퍼진 도교나 훗날 위구르를 정복하며 인구 비중이 급증하는 회교까지 제법 관대하게[13] 아우르는 종교 체제를 확립했다.

만주족을 경계하고 농민반란에 위협을 느끼던 명나라의 지배계층인 향신은 이런 청나라의 정책을 보고 질서를 잡아준 만주족의 청나라를 점차 지지하게 된다. 이렇게 화북이 안정화 되자 곧 남명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화북을 장악한 청나라군에게 여러가지로 분열이 심했던 남명정권은 변변히 저항도 못해보고 1662년까지는 모두 소탕된다.

이런 공으로, 태자태보[14], 병부상서 겸 명청시대의 사헌부 격인 도찰원의 우도어사를 역임하면서 청나라에서도 고위직을 점유, 청나라의 지배를 공고히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순치제가 죽고 강희제가 즉위하자 은퇴를 하여 경차도위 급의 '3등아달하하번'이란 세습작위를 받았다. 4년 뒤인 1665년에 향년 72세로 사망하니 이 정도면 명청교체기라는 천하대란의 시기에 명나라와 청나라 양쪽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무탈한 말년을 보내며 살 만큼 살고 죽은 셈. 숭정제 휘하에서 장군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제명에 못산 걸 보면,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고 굴곡 없이 산 참 운 좋은 인생이다.

3. 여담

이렇게 홍승주는 청나라에서도 대대로 높이 평가되었고, 멸만흥한을 내세운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조차도 나중에는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홍승주를 높이 평가했다. 그 이유는 어찌되었든지간에 대륙의 질서를 잡아서 백성들의 고통을 빨리 해소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청나라가 빠른 시간동안 대륙을 장악해 거의 300년간 대륙을 지배한 것은 홍승주를 비롯한 명나라 출신 항장이나 항신들 활약 탓인데, 이는 만주족 지배층들이 대륙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대륙을 통치해 본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겨루어 항복을 받은 청태종 홍타이지는 혹시나 또 배신할까 하는 경계심은 보였어도 꽤 후대한 편인데, 홍승주가 죽고 100년 뒤인 건륭제에 이르면 1775년에 다른 항복한 명나라 신하들과 함께 <이신전>[15]에 이름 올리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청의 중원지배가 공고해진 터라 항장을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랬겠지만. 다만 건륭제는 홍승주를 이신전의 갑(甲) 편에 넣으면서 "왕조를 섬기지 않고 나라를 섬겼다"며 그나마 옹호해준 편이다. 을(乙) 편에 속한 자들은 부귀영달을 위해 편을 바꾼 쓰레기들로 간주된 자들이었다.

송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가 청나라 편 든 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후 조선에 대해 악감정을 품은 듯하다. # 또한 투항 직후 청나라에 조선과 명의 밀통 사실을 말했으나 청측은 오히려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

죽은 후에는 북경에 묻혔고 묘지가 조성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박살났다.

4. 매체에서

  • 강산풍우정에서는 포국안[16]이 맡아 열연했다. 배우의 외모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 초상과 상당히 싱크로가 높다.
  • 대청풍운에서는 캐릭터가 둘로 분리되어 범호민과 범호정이라는 형제로 나뉘어 등장한다. 범호민은 도르곤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어 홍타이지의 회유를 받지만, 차마 명을 배신할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허나 홍타이지에게 남긴 유서에서 명나라의 부정부패에 질려버린 동생이 출사를 포기하고 은거하고 있으니 써보라 권하는데, 범호정은 처음엔 형의 장례만 치르러 청으로 갔다가 명이 형제의 일가족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는 비보를 전해듣고는 귀순을 결심한다. 또한 범호정은 섭정왕에 오른 도르곤이 자금성을 정복하고 스스로 중원의 수명천자에 오를 욕심을 품고 있음을 알고는 대놓고 사랑하는 연인을 배신할 생각이냐며 일침을 놓아 도르곤이 야망을 누그러뜨리고 순정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범호정은 범문정에서도 모티브를 얻었다.
  • 게임 왕이되는자에서는 '홍진처'라는 이름의 문객으로 등장한다.[17] 주 대사는 "한자를 배우면 중국어를 안다"(...).

[1] 시작은 문관이었지만 군인과 관료, 정치인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이 당시 명나라 병부 상서들은 대부분 문관출신이지만 청나라군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러 직접 병력을 이끌고 야전에 나갔다. [2] 홍승주가 투항하기전 최종적으로 올랐던 직책으로, 허베이성 북부 지역과 요동 전역의 행정, 군정을 총괄하는 직책, 그러니까 명나라의 대청 전쟁에서 홍승주는 총사령관에 해당되었다. [3] 명청 시대의 관직들을 보면 관례적, 비상시국으로 겸직 사례가 참 많다. 병부상서도 또한, 지방의 광역 행정 / 군사 수뇌였던 총독의 겸직 벼슬(+ 도찰원 우도어사 = 검찰청 검찰 부총장 / 감사원 부원장)로도 보직됐던 것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보통은 비상시국에 겸직된다. 겸직 목적은 해당 인물의 권위에 황제가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그의 권한 행사에 일종의 전권을 부여한 것과 같다. 물론 기존의 비겸직자는 그대로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되 겸직자의 영역에선 관련된 하급자들이 전적으로 겸직자를 따른다고 볼수있다. [4] 어떻게 보면 원숭환 이상으로 대단했던 인물이 투항해서 숭정제를 위시한 명나라의 잔존 지도층은 한동안 멘붕에 빠졌다. 숭정제는 처음엔 그가 전사한 줄 알고 그를 위한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후 사실을 알고 슬그머니 중지했다. [5] 조문조, 손정전은 이자성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노상승은 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양사창은 숭정제의 분노가 자기에게 향할것을 두려워 해 자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청나라에서 시호를 내렸다. [6] 중화인민공화국 푸젠성 취안저우시 난안시(南安市). [7] 포정사는 조선의 관찰사와 비슷한 관직으로 1개 성의 민정을 총괄책임진다. 사법과 군정은 각각 안찰사와 도지휘사가 담당했다. [8] 오늘날로 따지면 광역자치단체 산하 주요 부서의 부국장급 공무원 [9] 당시 섬서총독이었다. [10] 당시 농민 반란군들은 사세가 위급하면 우선 조정 관군에 투항하였다가 그들을 타이르기위해 내렸던 식량을 모으고 세를 보아 다시금 준동하기를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 항복도 판을 쳤을 뿐 아니라, 명나라 말기에는 대기근의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반란군들에게 양곡을 베풀수 없었기에 양곡의 지원이 끊기면 이들은 곧장 다시금 반란을 일으켰다. [11] 그러나 이자성은 결국 명청 전쟁 도중 나라가 어려워지자 틈을 타 후에 다시금 준동한다. [12] 여기에 살을 붙여서 청태종의 명을 받은 효문장황후가 홍승주에게 몸을 바쳐 설득했다는 야사도 있다.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더구나 만주족은 유목민족도 아니라서 접대의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다. [13] 튀르크계가 아닌 한족 혈통의 회족들은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만주식 변발을 강제받는등 억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슬림들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를 너무 방관하다보니(화북과 강남 지역에서 반란과 외침이 끊이지 않아 어수선했다는 요인은 있지만) 서북 방면에서 국가의 통치력이 약해질 지경이었는데, 좌종당이 이 야쿱 벡의 난을 평정하고는 중국화를 한답시고 유교를 가르치는 바람에 민심이 더욱 동요했다. [14] 태자의 스승이다. 즉 강희제의 스승이었다. 물론 청나라에서는 황태자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사례가 드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여러 황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15] 이신(貳臣): 두 왕조를 섬긴 신하. 즉 명나라를 배신한 자들이란 뜻이다. [16] 84부작 삼국지에서 조조를 연기한 분이다. [17] 일본어판에서는 홍승주라는 본명으로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