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3:52:49

고구려-신 전쟁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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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신 전쟁
高句麗-新 戰爭
고신전쟁 | 高新戰爭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1차: 12년 (유리명왕 31년)
2차: 14년 (유리명왕 33년) 8월
장소 고구려, 양맥, 현도군 고구려현
원인 신나라에 의해 징발된 고구려계 병력의 저항
요서대윤 전담(田譚)의 사망
교전국 <rowcolor=black> 고구려
(공세)
신나라
(수세)
고구려현-양맥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유리명왕
파일:고구려 군기.svg 연비
파일:고구려 군기.svg 구려후 추
파일:고구려 군기.svg 오이
파일:고구려 군기.svg 마리
지휘관

[[신나라|
]] 왕망
[[신나라|
]] 전담 †
[[신나라|
]] 장우
지휘관

지휘관 불명
병력 1차 전쟁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2차 전쟁
병력 규모 불명 약 20,000명 병력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영향 고구려의 고구려현 양맥 차지

1. 개요2. 상황3. 1차 전쟁 (A.D. 12년)
3.1. 추측
4. 2차 전쟁 (A.D. 14년 8월)5. 관련 자료6.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clearfix]

1. 개요

고구려 중국 신(新)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 신나라는 전한과 후한 사이에서 잠깐 활약하던 단명 제국(A.D. 8~23)으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는 역대 제국에 포함되지 않지만 기록상 12년과 14년에 분명히 존재하는 전쟁이 있었다.

2. 상황

이때 중국은 왕망(王莽)의 신나라였다. 그가 교묘한 권모술수로 황위를 찬탈하여 새로운 왕조 국가 건국에는 성공하지만 그가 펼치려고 했던 정치는 현실과 괴리감이 컸고, 개국 초부터 왕망이 죽을 때까지 내전 및 군사반란, 대규모 흉노 원정,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당시 고구려는 2대 군주 유리명왕이 재위하고 있던 개국초창기였고, 부여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고구려와 신나라간에 외교 관계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지금까지 남은 역사서 내용을 그대로 써도 그 양이 부족하다. 전쟁 규모도 국지전 규모가 아니라 현(縣)급 규모로 보인다. 후에 발발하게 되는 역대급 규모의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 1차 전쟁 (A.D. 12년)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31년(12)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1]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반란을 일으키면]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 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31년
왕망이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병력을 내놓으라고 이야기 하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결국 병력을 강제 징발해서 보냈다. 하지만 징발된 고구려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적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 현도군(玄菟郡)의 변경을 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고구려인 도적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신나라의 요서대윤인 전담이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자, 이에 분노한 신의 황제 왕망은 장우(莊尤)[2]에게 병력을 주어 고구려를 치게 한다. 이 명령에 장우는 "아직은 시기상조다."라고 반대했으나 결국 황제가 빡빡 우기자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전투 상황은 상세히 묘사되지 않았으나 장우가 이끄는 신나라 군은 맞서 싸우러 온 연비(延丕)가 이끄는 고구려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고구려군이 신나라 군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연비가 전사하며 참패하게 되어 신이 승리를 했고, 장우는 전사한 연비의 머리를 잘라 수도로 보냈다. 왕망은 이 정보에 몹시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후(下句麗)로 포고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깎아내렸다. 본인의 정치도 어려운데 주변국 관계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왕망이 오래갈 리 없었다. 23년 신나라는 멸망하고 왕망도 피살되었으며, 왕조도 16년만에 다시 (후)한 왕조로 교체가 되었다. 그 후 32년 12월 후한 광무제 유수가 고구려의 왕호를 원래대로 회복하였다.[3]

3.1. 추측

인물에 대한 추론을 하면 연비(延丕)는 연타발(延陀勃)과 성씨가 같아 소서노 일파로 보는 추측이 있으며, 구려후 추 추모, 구추, 혹은 유리명왕일거라 보는 견해도 있다. 추(騶)라는 이름은 한서 왕망전에 의거한 것인데, 중국측 역사서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도(騊)'라 하였다.[4] 기타 자세한 내용은 구려후 추 문서 참고.

이 부분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역사서를 만들 때 중국계 역사서의 기사와 국내 역사서를 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서 왕망전을, 인물 이름은 현대에는 전해지지 않는 국내 역사서를 참고한듯 보인다. 연비라는 이름은 중국계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4. 2차 전쟁 (A.D. 14년 8월)

秋八月, 王命鳥校勘 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현은 현도군에 속한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33년
이 기사에서 오이 마리 주몽을 같이 따라왔던 개국공신 오이, 마리가 맞다. 개국공신이 50년이 지나 유리명왕 시절까지 활약한걸 미뤄보면 당시엔 이미 원로대신 중에서도 원로대신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도 총력전을 펼친 셈.

양맥(梁貊)은 중국과 관련된 건 아니고 고구려와 비슷한 맥족으로 보이며 그 위치는 사학자마다 다르게 보고 있다.[5] 군대를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단편적인 기록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현은 현도군의 영현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5. 관련 자료

6.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1] 태수의 신나라 이름. [2] 위의 엄우(嚴尤)는 후한 명제의 휘인 장(莊)을 쓰기를 꺼려( 피휘) 글자를 바꾼 것이다. [3] 고구려와 후한이 외교 관계를 다시 맺으면서 왕호도 되돌려놨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4] 騶, 騊, 鄒 다양한 글자가 보인다. [5] 이후 양맥이라는 곳은 고구려와 위나라 전투의 무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