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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양맥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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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양맥 전투
第二次 梁貊 戰鬪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259년 (중천왕 12년) 12월
장소 고구려, 양맥[1]
원인 위나라의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고구려
(공격)

(방어)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중천왕 (고구려 국왕)
지휘관

[[위(삼국시대)|
]] 울지해
병력 고구려군: 5,000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8,000여 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1. 개요2. 전개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구려-위 전쟁 중 양맥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로 중천왕 대인 259년 12월에 일어났다.

2. 전개

12년(서기 259년) 겨울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2]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000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十二年 冬十二月 魏將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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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중천왕}}}

비류수 전투로부터 약 13년 후, 위나라의 울지해가 다시금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강역에 쳐들어왔다. 이에 중천왕이 친히 정예기병 5,000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맞붙어 적군 8,000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10년 전 아버지 동천왕이 당했던 치욕적인 패배를 단단히 복수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을 《삼국사기》는 철기(鐵騎)라고 명기했지만, 중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은 정예기병(精騎)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참패를 복기하고 위나라가 방진으로 나올 때의 대비책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방진이 고구려의 중장 철기병을 막는 데는 효율적이지만,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먼저 경기병이 위나라의 방진을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장 철기병이 정면으로 돌격해서 방진을 격파하고 궤멸시키는 전술을 쓴 듯하다. 이런 복합 기병들이라 경기병이나 철기병이 아닌 정예기병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3. 대중매체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울지해가 소흠, 장굉, 허달 등의 장수들을 이끌며 고구려를 침공했고, 음우가 중천왕에게 적들이 멀리서 와 지쳤을 거라며 양맥곡에 군사를 숨겨두고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고구려의 군사는 양맥곡에 매복했다.

다우가 먼저 5,000명의 군사를 이끌며 양맥곡으로 갔고, 중천왕은 음우 및 명림홀도와 함께 중군으로 출전했다. 위나라 장수 울지해가 양맥곡을 지나다가 통나무가 길을 막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때 장굉이 수십 개의 통나무가 길 위에 널브러진 것을 보고 복병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순간 고구려의 군사가 계곡에서 화살을 쏘았고 위나라의 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장굉이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막아내면서 울지해에게 빠져나가야 된다고 해서 울지해는 퇴각을 명령했다.

장굉의 호위를 받아 울지해가 달아나자, 다우가 고구려군을 이끌고 추격했다. 이후 울지해를 호위한 장굉은 전사했고, 다우는 위나라의 군사가 협곡을 빠져나가자 고구려군을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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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요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요녕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2] 고려 인종 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