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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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 (東沃沮) | |
▲옥저와 주변국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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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2세기/260년?(기원후 3세기)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남도 |
군주 | 군장 (읍군, 삼로) |
종족 | 예맥[1] |
언어 | 고대 한국어 |
사건 |
위만에 의해 복속 한사군 편입 |
성립 이전 | 부족국가 |
멸망 이후 | ?[2] |
현재 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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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옥저는 개마산 동쪽에 있었던 한국의 옛 나라다. 서기 56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2. 역사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3]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가 있고 남으로 예맥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성이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병전을 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장사는 큰 목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이에 들어간다. 나무에 '生'자를 새기어 죽은 자의 수를 헤아렸다.
기원전 5년, 동옥저 사신이 신라에 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따르면 고구려는 "4년(서기 56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략 함경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고 보이는데 강원도와 함경남도 해안에 위치한 것으로 보면 남옥저와 같은 집단을 가리킨 게 되고, 분포도가 고려시대 5도 양계의 동계 지역을 약간 확대한 버전이 된다. 동옥저 기록에서만 흙이 비옥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땅이 좋았던 듯. 또한 상당한 전투민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60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애당초 이들은 단일국가가 아닌 느슨한 소국연맹체였기 때문에 소국 하나 혹은 여럿의 멸망을 연맹체 전체의 멸망인 것처럼 소급해서 기록하기도 해서 확실한 것은 아니다.
[1]
위치상
말갈도 섞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
[2]
고구려로 다수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성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