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9:35:56

팔기군

팔기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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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10721.22022204801i1.jpg
팔기의 종류.
왼쪽부터 양황기, 양람기, 양백기, 양홍기, 정람기, 정황기, 정홍기, 정백기이다.

1. 개요2. 어형3. 구성4. 연혁
4.1. 초중기4.2. 쇠퇴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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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기군(), 만주어자쿤 구사(ᠵᠠᡴᡡᠨ ᡤᡡᠰᠠ, jakūn gūsa)는 청나라의 군사 편제로, 반유목민과 연맹을 맺은 반농반목 수렵채집민족이었던 만주족의 특성상 그 제도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팔기제(八旗制)라고도 한다. 고려대학교에서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이훈 교수는 '팔기제'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라고 해설했는데, 팔기가 군사적 기능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정치 각 분야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즉 '팔기군'이라는 용어는 팔기제의 군사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

2. 어형

파일:20100215191529_1.jpg

'자쿤 구사'에서 자쿤은 숫자 8을, 구사깃발을 뜻했다. 즉, 팔기이다. 숫자 8은 청나라의 중앙군이었던 8개의 집단을 지칭했으며, 이들을 깃발의 색깔로 구분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정착되었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1]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다. 모든 구분은 깃발로 이루어졌고 깃발이 곧 부대가 되었다.[2] 기본적으로 정이 양보다 서열이 높지만 예외로 황기는 양황기가 정황기보다 높은데, 이는 황제 본인이 양황기 소속이기 때문이다.

만주어로 구루(Gulu), 쿠부허(Kubuhe)라고 했고, 황•백•홍•남의 4색은 각각 솨얀(Suwayan), 샹얀(Šanggiyan), 풀갼(Fulgiyan), 라문(Lamun)이라 했으며, (旗)는 구사(Gūsa)라고 불렀다. 즉 '정황기'는 '구루 솨얀 구사'(Gulu Suwayan Gūsa), '양백기'는 '쿠부허 샹얀 구사'(Kubuhe Šanggiyan Gūsa)가 된다.

3. 구성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팔기 제도가 사회 계층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를 반드시 군단으로만 볼 수는 없게 되었다. 전시에는 기 단위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실제 각 기에 속하는 기인들은 훨씬 외연이 넓었다. 또한, 제2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치세부터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오리지널 팔기 외에도 몽골인들로 구성한 팔기몽고[3]가 더해졌고, 홍타이지 말년에는 그간 '우전 초오하', 한역하자면 중화기를 다루는 '중군'으로 불리며 한족들이 주로 담당했던 포병대 수군을 팔기한군으로 증편하여, 입관 이후 순치 연간에 팔기마다의 배속이 완료되었다.

다만 세간의 잘못된 개념과 달리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이 제각기 8기씩 편성되어 모두 24기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8개 깃발마다 보통 황족인 기주[4]의 휘하에서 만, 몽, 한 서열로 모두 배속되어 군단별로 움직였다.

또한, 팔기 휘하에는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귀족, 특권층)인 기분 니루 외에도 보오이(포의)라는 노복 신분이 따로 있었다. 원래 만주족의 가노 신분에서 유래했는데, 입관 후에는 이들이 최상위 귀족보다는 낮지만 기외의 민인보다는 훨씬 우월한 중산층 꼭대기(?) 수준의 계층으로 굳어졌고, 기인 사회에서 주로 상공업 및 제조업에 종사했다. 이들 보오이 출신 가문의 딸들은 나이가 차면 황궁이나 왕부의 수녀 선발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적이었으며, 그 중 궁녀로 뽑히고 그 중에서도 황제 및 황족의 눈에 들어 적복진이나 측복진이 되면 그야말로 일족이 인생역전되었다.[5]

이들 중에는 만주족이 대부분이었지만 입관 이후 한족도 일부 포함되었고, 심지어 양차 호란에서 조선인이 끌려가 정착하며 보오이(포의) 신분이 되기도 했다. 한족 보오이의 가장 유명한 예로는 정백기 포의 출신인 조설근이나, 정황기 포의 출신인 가경제의 생모 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가 있었으며, 조선족 보오이의 유명한 예로는 김신다리와 김산다리 형제의 후손으로서 정황기 포의 출신이었던 숙가황귀비 긴기야씨와 건륭 연간의 권신이었던 김간 남매가 있었다. 조설근의 경우 포의 출신으로 몰락했지만 《 홍루몽》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위씨나 김씨 집안은 아이신기오로 황족의 외척이 된 덕에 일족 전체가 상3기의 기분 니루로 편입되어 만주족의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이런 황족 및 외척 가문도 정원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개의 가문들은 황제의 가문으로부터 방계로 멀어질수록 선대에 임명받은 작위는 물론 양황기나 정황기로 승격된 기적 역시 하5기로 강등되곤 했다. 예를 들어 동치 연간에 의정왕을 지낸 도광제의 6황자 아이신기오로 이힌(공친왕)은 권력과는 별개로 함풍제 동치제의 직계 가족이 아니었으므로 친왕으로 임명된 후 하5기인 양람기에 속했고, 순친왕 가문 역시 황제가 둘이나 나온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적상으로는 상3기가 아닌 양백기에 속했다.

4. 연혁

4.1. 초중기

팔기군은 청나라의 시조가 된 건주부 여진족인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 17세기 초에 설립했다고 전하며[6]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때 팔기군 중에서 상위 3개 깃발군 즉 양황기, 정황기, 정백기[7][8] 황제의 직속부대였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9]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여부는 청나라의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10],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인 세종 옹정제 시기 군기처가 설치되고, 철모자왕들 중 황제 직속이 아니었던 하5기의 기주를 당연직으로 세습한 숙친왕(호오거계, 양백기), 예친왕(다이샨계, 정홍기), 극근군왕(요토계, 양홍기), 예친왕(도도계, 정람기)[11], 정친왕(지르갈랑계, 양람기)[12]들의 권한을 분산시켜 보오이(포의)들에 대한 직접 관할권만 남긴채 좌령, 참령, 도통 등에 대한 임명권은 모두 황제가 통제하는 팔기도통아문으로 넘겨, 사실상 팔기 전체가 황제의 1인 영도하에 종속되었다. 또한, 기인들은 소속 니루를 소유한 속주에 대한 의무가 폐지되었다.

팔기군은 1601년 태조 누르하치가 여진족 각 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했다. 이후 만주족이 내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바요트 등의 내몽골 거주 할하계 부족들,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 등 내몽골 몽골인 부족들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요동을 함락하면서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족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 몽골인팔기몽고, 한족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13]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대전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의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었다.[14] 심지어 성조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코사크 병사들 중 일부가 상3기인 양황기에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몽골 오이라트계인 준가르를 갈아엎으며 외몽골, 칭하이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쓰촨성 서부 등 서부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튀르크계 부족들이나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원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지배 집단으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팔기몽고[15], 팔기한군 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한군과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그리고 팔기한군 중엔 명나라나 조선에서 성씨를 얻은 여진족이 상당수 있었다.[16]

팔기만주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팔기몽고가 그 다음, 그리고 팔기한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 인원은 입관 당시인 1644년을 기준으로 팔기만주가 40~45%가량을 차지했고, 팔기몽고 22%, 나머지가 팔기한군이었다.[17]

이후에 팔기군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팔기한군은 고종 건륭제 치세에 대거 출기 조치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에는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팔기한군이 몽골이나 만주 출신에 비해 평화로운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 쟤네는 어쩔 수 없다."
는 핑계로 한족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팔기한군 기인들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이고,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18][19]

파일:QingEmpire.jpg
주방팔기(駐防八旗)의 분포도()
청나라는 기존의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활용하여 주방팔기를 배치했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했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 내성에 거주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와 각 지역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시켰다. 이는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 있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기 자체가 만주족에 대한 일종의 군사-행정체계이자 예비군 동원 체제였으며, 만주족의 정체성이었다. 모든 만주족을 팔기에 소속시킴은 물론 일부 몽골인들과 한족 또한 팔기에 소속시켜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생겼다. 심지어 19세기에도 팔기한군, 팔기몽고 소속 기인들은 민인들은 잘 모르는 만주어를 구사하는 등 의식주 전반에 걸쳐 한인, 몽골인보다는 만주인에 가까운 특징을 보였다. 이들은 각지의 대도시에 존재했던 특수 행정구역이자 전용 주거지역인 팔기주방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고, 함부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으며, 만주인은 원칙적으론 정실 부인은 만주인 여자로 두어야 했으나 첩으로는 무한대로 자유롭게 한인 여자를 취할 수 있었다. 반대로 한군팔기 소속이 아닌 한족은 만주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의 원래 본거지인 동북의 만주에서조차도 한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는 만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한족으로의 동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만주족만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충돌과 한족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방팔기는 각 지방의 치안 유지 역시 맡았으며, 반청복명 운동 등 불순한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삼번의 난 진압도 푸젠성, 광둥성의 주방팔기 몫이었으며 대만 원정 때도 푸젠과 저장 지방의 한군팔기들이 대거 참여해 결국 정씨 왕국( 동녕 왕국)을 3대만에 간판 내리도록 했다. 이후 광동의 주방팔기는 팔기한군의 대거 방출로 전력이 약화된 가운데, 1841년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그 후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이나 염군의 난 등도 제대로 진압 못하고 소모전이 돼 치명적인 무능함을 천하에 노출시켰다. 이때문에 한족 관료들인 증국번 이홍장 등이 모은 상승군으로 대란을 진압해야 했다.

사실 만주족의 주축이 된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을 겸한 민족으로 순수 유목 기마민족과는 좀 달랐다. 그래서 사냥을 다닐 때 각 깃발별로 제대를 편성하던 습관이 팔기의 원조가 된 것이었다. 물론 모든 만주족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북만주와 연해주의 야인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기마민족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지역들은 농사가 가능했던 건주부의 영역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었다.[20] 원래 퉁구스족 자체가 돼지 순록을 방목하던 사람들이었다가 남하하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게 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건주여진은 일찍이 중국이나 한반도를 통해 문명화된 지 오래였다.

4.2. 쇠퇴

파일:묘족 반란군을 격퇴하는 팔기군.jpg

준가르 원정이나, 18세기 말 구르카들이 티베트의 라싸를 약탈했을 때 팔기군들이 구르카들을 추격해서 명목상의 항복을 받아낸 사례에서 보듯, 인구 밀도가 희박하고 원정 거리가 긴 지역에서는 팔기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청나라가 명나라에 비해서 국토가 압도적으로 방대해진 이유 역시 팔기군의 기동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남방에서 벌어진 삼번의 난 때만 하더라도 팔기군은 초반 반란의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삼번의 중심지인 남방 열대우림 지대에서 팔기군 같은 기병이 온전히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다. 청나라와 버마 사이의 전쟁에서는 약소국 버마를 상대로 압도적인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뷰신의 버마군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21] 문제는 청나라 국부의 핵심이 중앙아시아 영토가 아니라 바로 장강 유역과 그 이남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19세기 청나라 영토의 노른자땅에서 차례차례 일어나는 여러 반란들 앞에서 팔기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팔기군은 형편없는 전투력에 유지비만 많이 들어가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팔기군은 만성(滿城)에 거주하며 기인(旗人)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에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려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기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했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몽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며 조정에 보고했다.
" 만주족 몽골인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며 나태하고,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22]
그러나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폐지할 수가 없었다.[23]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24]이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했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25]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청나라는 한족과 동화됨을 막기 위해서 팔기군 병력에게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유명무실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 이어진 전란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연패를 거듭했다. 아편전쟁 때는 몽골 호르친부 출신의 친왕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이끄는 팔기몽고군이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영불연합군의 발전한 군사기술과 교리 등을 이기지 못하고 전투 대열에 거의 다가가지도 못하고 제압되었다. 이때 영불연합군은 포탄이 터져서 사방으로 폭압과 파편을 날리는 작렬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만몽팔기는 영불연합군의 근처에 거의 다가가지도 못한 채 전멸해버렸다.[26]

청불전쟁 때 역시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육상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으로 남았던 팔기몽고는 근대화된 프랑스군 기관총과 대포 사격에 분쇄되었다.[27] 청일전쟁 때는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팔기몽고 부대가 약탈을 벌여 조선인의 분노를 사고, 약탈에만 정신이 팔려있다가 그때를 놓치지 않은 일본군에게 사격과 포격을 당하기도 했다.[28]

팔기군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팔기군의 무장이나 전술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지 않았던 청나라 조정의 책임도 컸다. 비슷한 시기 서유럽의 창기병들이 총알이나 총검을 막기 위해 철판으로 된 흉갑을 착용하고, 권총을 사용했던 것과는 반대로 팔기군은 기존의 재래식 갑옷과 활을 그대로 사용했다.[29] 비교하자면 18, 19세기 청나라 남방의 화전을 일구고 사는 소수민족들이 종종 한족 농민들과 시비가 붙어서 반란을 일으킬 때가 많았는데, 이때 진압하러 출동한 팔기군이 사용하는 활이 묘족이 입은 갑옷을 뚫지 못하면서[30] 오히려 청나라의 귀족 팔기군이 일개 화전민 나부랭이들의 총이나 활, 석궁에 역으로 당하는 일이 많았다.[31]

청나라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기술적, 문화적인 발전을 거의 이뤄내지 않았다. 유럽 문명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터지며 급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던 반면 청나라는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32]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승마 궁술에 대한 집착 혹은 한족의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33], 궁기병이 아직도 군사력의 척도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팔기군의 기마궁사는 화승총을 쏘는 준가르나 신장 지역 위구르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준가르 정복 전쟁화에서 보듯이 청군도 다수의 포병과 화승총병을 운영했으며, 단지 기병들이 총을 쏘지 않고 활을 쏜 것 뿐이다. 특히 현대식 소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상에서는 활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34]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35]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전술적 활용 역시 문제였다. 전열보병이 등장한 이후, 기병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군의 포병/보병을 치러 들어오는 적 기병에 대한 요격이 주가 되었는데 팔기군을 활용해야 하는 청나라의 보수적인 장군들은 팔기군이 청군의 핵심이라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매달릴 때가 많았고, 상술했던 것처럼 태평천국 운동 당시 태평천국군의 전열보병에게 팔기군을 돌격시켰다가 역으로 대패를 당하는 추태를 보였다[36].

사실 따지고 보면 팔기군의 쇠퇴는 유목민 정복왕조라면 으레 다 겪는 것이었다. 특히 도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군사력 유지를 하려면 대규모 수렵 훈련을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들의 고향인 만주와 달리 중원에는 이렇다 할 수렵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건륭제까지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무란위장이라는 군사 훈련 목적의 수렵장을 설치하는 식으로 군사력을 유지했다. 또한 만주족 전통 유희 겸 훈련인 빙희 시합도 주기적으로 열었다. 게다가 건륭제까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실전능력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18세기에도 많은 훈련량이 필요한 궁기병을 운용했다는 건 그들이 얼마나 팔기군의 군사력 유지에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건륭제 이후부터는 실전에서의 전투 능력을 잃고 그나마 조정에서 억지로 시키던 군사훈련도 지지부진해져 팔기군은 전투력을 급속도로 잃게 된다. 신분은 군인인데, 그냥 한족보다 지위가 더 높은 공무원에 불과했던 셈. 즉, 청나라의 군사력 쇠퇴는 당시의 모든 후진적 전제군주제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에 유목민 정복왕조의 문제점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륭제가 물러나고 즉위한 가경제 시기부터 청나라는 갈수록 기울어만 갔다. 특히 건륭제 시기부터 쌓여온 부정부패로 인해 농민들에 대한 세금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참다못한 농민들은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37] 게다가 서서히 서양 세력들이 중국 내부에 아편 등 마약들을 수출하며 재정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했고, 만주족과 한족 가릴 것 없이 무능과 타락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경제도 나름 반란을 진압하고, 개혁을 실시하려 들었으나 이미 뿌리가 썩은 청나라에 이는 너무 미약한 시도였을 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땜빵은 서양인과 한족으로 구성된 상승군이 맡아야 했다. 왜냐면 아편전쟁이야 상대가 세계 최강의 영국군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천국은 자국의 반란군 무리인데도 이들과 전면전 상태에 돌입하면 달아나기 바빴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팔기군이 형편없었다. 심지어는 태평천국군과의 교전을 두려워하며 일부러 천천히 추격하거나 진군로를 수정해서 빙 돌아갈 정도로 시간을 끌며 전투를 피하는 등, 한심하고 덜떨어진 모습까지 보였다.

이들이 너무 무능한 데다가 남방 한족의 녹영도 질이 형편없을 정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태평천국군의 진압은 서구 열강들의 원조군과 향촌 민병집단인 단련(團練)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특히 난징에 주둔한 핵심 병력이 태평천국군에게 패배하여 난징을 빼앗기면서 청나라는 사실상 군사력이 전무한 상태임을 드러냈고, 연이어서 8개국 서방 연합군이 텐진을 지나 베이징까지 함락하여 들어오면서 청나라의 중앙군은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 이때, 후난 성의 한족 선비들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이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했고, 이후로 이홍장이 실권을 잡으면서 의용군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이 만들어졌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도 혁명군에 제대로 맞서 싸운 쪽은 대부분 북양군벌 세력들이었고, 팔기군은 거의 국민당 혁명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양군벌이 혁명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혁명군에 맞서 싸울 제대로 된 군대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고, 허무하게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팔기군의 약화와 추태는 의외로 청나라 멸망 이후로도 큰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한 스노볼링 악재까지 초래했으니, 바로 중국 군벌 시대의 난립이었다. 팔기군이 제 기능을 했으면 애초에 청나라가 그리 망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청나라 자체는 망해도 위안스카이 우페이푸 장쭤린이든간에 중앙 군사력을 장악했으면 나라 전체를 석권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팔기군의 쇠퇴로 인하여 애초에 청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중국 전체에서 군사력은 베이징 중앙을 벗어나 지방의 군벌 세력들을 향해 기울어진 오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국의 통일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청은 과거의 권위를 되찾겠답시고 삽질하다가 철도 국유화라는 폭탄을 내던져 신해혁명으로 일어난 신군에게 무너졌고, 그 신군도 권력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위안스카이에게 칼자루를 쥐어줬다가 온갖 부정부패와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국가 건설 이념을 뒤집어 버리는 미친 짓으로 휘청이기 바빴으며, 간신히 다시 세운 중화민국 정부도 각지에 난립한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같은 지방 군벌 세력을 때려잡는 데 기나긴 시간과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야 했다.

이렇게 팔기군의 약화로 인해 생긴 중국 전체의 군사적인 권력 공백[38]은 결국 청나라가 망하고도 반세기가 지난 중공이 집권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셈이다.

5. 기타

현대에는 팔기군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부 깃발들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시린궈러맹의 서남부에 양황기, 남부에 정람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각각 경기도 정도의 면적이다. 이 지역들의 최고행정책임자는 기장(旗长)이라고 불린다.

치파오(旗袍)의 뜻은 팔기 사람이 입는 옷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팔기제도가 존재했을 때는 치파오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팔기 여성들이 입었던 옷은 치푸(旗服), 치좡(旗装)이라고 부른다.
[1] 홍색 기는 백색 테. [2] 여담이지만 이처럼 색깔로 부족이나 집단을 구별하는 것은 유라시아 북방 유목민들에게 상당히 흔히 보이는 특징 중 하나이다. 한국사에서는 통일신라의 9서당이 유사한데 부대별로 여기서는 깃발이 아닌 옷깃의 색깔로 부대의 계통( 고구려 직계/ 보덕국계/ 말갈계 등)을 구분했다. 예를 들어 신라의 말갈인 부대 흑금서당(黑衿誓幢)은 옷깃의 색깔이 흑적(黑赤)색 옷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도 봉건제가 자리잡으면서 각 다이묘별로 다이묘 본인 및 거느리는 하급 사무라이들과 아시가루들의 갑옷 색깔에 차이가 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3] 초기에는 바요트 등 일부 할하 부족들이나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 등 내몽골 부족들이 주축이었고, 이후로 서몽골의 준가르 원정 과정에서 외몽골의 할하와 오이라트가 추가되었다. [4] 청나라의 철모자왕들 중 극근군왕(요토계), 예친왕(다이샨계), 숙친왕(호오거계), 정친왕(지르가랑계), 예친왕(도도계)이 하5기의 기주를 세습했다. 한편 상3기의 기주는 황제였다. [5] 단,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바로 복진으로 봉해지기는 어려웠고, 격격이나 시첩으로 들어갔다가 진봉되는 경우는 있었다. 혜현황귀비 고가씨가 이런 경우로, 보친왕(고종 건륭제)의 격격으로 들어갔다가 측복진으로 진봉되었고, 귀비에 봉해졌다. [6] 원래 청나라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형제가 거의 공동으로 통치하던 체제에서 시작된 나라였다. 이후 슈르하치를 제거한 누르하치는 동생의 부락을 반으로 나눠서 조카였던 아민에게 반만 세습시켜 주고, 자신의 몫을 2남 다이샨, 5남 망구르타이, 8남 홍타이지에게 분할 세습하니, 이들이 4대 버일러들이었다.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키면서 사촌인 아민과 형인 망구르타이를 제거했는데, 아민이 가진 세력을 다시 반으로 나눠서 반은 자신이 통제하고, 남은 것을 아민의 동생이었던 지르가랑에게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팔기회의에서 나온 구도로 두 황기는 홍타이지가 거느리고, 두 홍기는 다이샨이(다이샨이 두 홍기의 기주를 담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다이샨과 그의 아들이 기주가 되었다.), 두 백기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과 도도 형제가, 정람기는 장남인 호오거, 양람기는 지르가랑이 통솔하는 형태가 되었다. [7] 통틀어 상3기(上三旗)라고 칭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민 제거 이후로 정람기가 황제의 직속이었으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섭정이 되면서 정백기와 위치가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황제 직속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황색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보니 상3기 중에서는 정백기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옹정 연간에 명나라 주씨 황실의 후예들을 연은후로 봉하면서 황제 직속 상3기로 편입시켜 신분을 보장할 때도 명나라 황족을 정황기나 양황기에 올릴 수는 없다고 하여 정백기 한군으로 편입시킨 것이나, 황후 및 황태후의 친가는 만주 정•양황기에 속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후궁 출신 황후 및 황태후의 일가를 편입하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황제들은 황기 명문가 출신 대신을 측근으로 두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기인의 출세에 있어서 기의 색깔은 중요하지 않았고, 200개가 조금 안 되는 팔기명문세가 출신이냐 아니냐가 중요했다. [8]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타타라 잉굴다이가 정백기 출신이었다. [9] 통틀어 하5기(下五旗)라고 칭한다. 이 하5기 중 정람기는 본래 상3기에 속했지만 순치 연간에 정람기주 호오거의 옥사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었으며, 정백기가 황부섭정왕 도르곤의 지휘를 받는 상3기로 승격되면서 자리를 바꿔야 했다. 이후 이 정백기는 도르곤의 추탈 이후에 황제 직속으로 편성되었다. [10] 실제로 청나라 초창기의 황족 권력자들은 '어떤 기 출신'이라는 후대 인물들 같은 신분 표시가 무의미했다. 익숙해질만 하면 자기 소속이 바뀌고 동료의 소속이 바뀌고 깃발이 바뀌니 그냥 누르하치나 홍타이지가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야지... 심지어 단순히 황제 등극을 위해 '황기'를 다 자기가 가져야겠다며 색깔론(?)을 주장하여 군단의 구성원은 그대로 냅두고 색깔만 바꾼 경우도 있었다. 홍타이지 시절 도르곤 3형제가 앞서 누르하치한테 물려받았던 양황기 대신 홍타이지가 배정받았던 백기를 받는 교환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사람 빼고 깃발만 바뀐 격이었다. 물론 이 백기도 도르곤과 도도의 양백기, 정백기 교환을 거쳐 훗날 도르곤 추탈 이후 황제 직속으로 편입되기는 한다. [11] 도르곤 숙청과 호오거의 복권 과정에서 기주 직위 교통정리가 다시 이뤄지며 호오거의 가문이 양백기를 세습하고, 도도의 가문이 정람기를 세습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39] [12] 이쪽 가문은 기상정변 때 탈탈 털렸다. 당시 기상정변의 주역인 이혁보국군왕 숙순과 숙순의 형인 정친왕 단화, 세종 옹정제의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인샹의 후손이었던 이혁이친왕 재원이 서태후와 공친왕에게 숙청당해 재원과 단화는 자결을 명령받았고, 숙순은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친왕과 이친왕의 작위 역시 먼 친척 동생들에게 넘어갔다. [13]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 몽골인· 한족이지만, 조선의 성씨도 43개나 포함되어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86901.html [14]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호이(玉回) 마을에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세기 말 후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썬 출신 3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팔기군 200,000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이른바 '조선팔기'의 병사들 중 일부가 떠이썬군의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 그 외에도 청나라 황제의 비빈들의 목록을 보면 조선의 성씨+기야(佳)를 붙인 여성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들 중 일부는 만주팔기의 솔호 니루 출신 여성들이었다. 이들 가문에서는 예부상서 김상명 같은 네임드도 있었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드나드는 조선 사신들과 교류하며 혈연정치로 서로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15] 나중에 만주 팔기의 군마 부족이 심각해질 때, 팔기몽고 기병대가 실질적인 청나라의 주력 기병부대가 되었다. [16] 나중에 이들은 만주팔기로 기적을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계속 한군기에 남기도 했다. [17]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18] 사실, 기인들은 여러가지 혜택과 대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대다수의 팔기한군들은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가 나빴기에 강등되는 것이 가족의 생계에 유리했지만, 팔기한군 중 한군삼십삼가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황제 및 만주족 왕•공들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세종 옹정제 초년 준가르 정벌군의 총수였던 연갱요나 성조 강희제의 외척이었던 동씨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원래 한화한 여진족 가문이었으나 명청교체기에 후금에 귀부하여 개국에 공을 세운 덕에 무늬만 한군이지 사실상 만주족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강희제 즉위 후에는 효강장황후와 가까운 일족들이 양황기 만주로 편입되고 퉁기야씨로 사성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일반 한족으로 강등된 팔기한군 출신 한족들의 후손들 중 일부가 자기 조상이 팔기군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만주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 사실 만주인들은 한인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도 업신여기곤 했다. 강희 연간에 같은 사행길에 올라 여정을 소화한 학자와 군인이 제각기 작성한 김창업(정사 김창집의 동생)의 《노가재연행일기》와 최덕중(부사 윤지인의 수행군관)의 《연행록》에 따르면, 비록 정확히 어떤 가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청나라의 종실 여성이 친정에 왔다가 남편인 몽골 왕에게 돌아가는 행렬을 보고, 황족 여성이 더러운 몽골인들한테 시집간 것을 만주인들이 아깝게 여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런 팔기몽고의 왕공들은 내몽골의 초원이나 사막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빚어진 만•한 갈등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20] 이 동네가 농사가 가능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부터다. [21] 물론 이건 변호할 거리는 있다. 일단 당시 버마, 그러니까 꼰바웅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전성기가 딱 이때였다. 반면 청나라는 전성기의 끝물 수준이었다. 또한 원래 중원 국가는 동남아시아 상대로 실적이 영 좋지 않았다. 역대 중국 왕조들은 동남아시아 전체도 아닌 일부를 차지한 베트남을 두고도 정복에 실패하는 일이 잦았고 팔기군이 중앙아시아에서는 잘 싸웠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도 전대 왕조인 명나라나 정신적 계승국인 금나라에 비하면 양호한 것으로 명나라나 금나라는 티벳이나 몽골을 지배하지 못했고 둘 다 몽골계 세력에게 존속기간 내내 신경을 쏟아야 했기 때문. 즉 동남아시아에서 죽을 쑤는 건 중원 왕조 대부분이 그랬고 반대로 중앙아시아에서 날아다닌 중원 왕조는 많지 않았는데 성공을 거둔 예시가 청나라다. 그래서 버마 하나 못 잡았다고 까이는 건 억울하다. 버마라고 홈 버프가 없던 것도 아니었고. [22] 이미 옹정제 시기인 준가르 정벌 때부터 녹영이 청나라의 주력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건륭 연간에도 준가르 복속에 있어서 팔기와 녹영을 섞은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운용했다. 하지만 백련교도의 난, 그리고 태평천국 운동 시기엔 녹영마저도 무력해서 향신 계급이 만든 의병인 향용으로 대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23] 그리고 이전에 북위가 자신들의 통치기반과 유리되었다가 급속도로 망한 일이 있었다, [24] 더 정확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비군의 성격이 강해짐. [25] 백련교도 반란군과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지역에서 모집한 향용 자원병들을 서양의 군사교관이 훈련시켜 군대로 발족한 상승군이나 상첩군으로 진압해야만 했다. 또한, 팔기군은 태생적으로 기병이어야 하는데 군마가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말을 소홀히 관리하거나 향락에 빠진 나머지 빚을 많이 져서 군마를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팔기몽고를 제외한 다른 팔기군은 보병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청나라 초기, 만주족이 기름지고 따뜻한 중원으로 이주한 것과 달리, 몽골족은 만주족 남성과 결혼한 몽골족 여성들을 제외하면 거의 척박하고 추운 오르도스나 후룬부이르 등 내몽골 초원지대에서만 살다시피 했으나, 얄궂게도 그 덕분에 청나라 치하의 몽골족은 강력한 기병력을 만주족보다 더욱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몽골족도 만주족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전투력이 퇴보하여, 결국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허무하게 참패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사실 애초에 몽골족도 청나라가 안정되자, 오랜 평화에 젖어 자꾸만 베이징 등으로 내려오고 한족과 동화되기 일쑤였다. 그나마 유목민스러운 문화를 아직 많이 유지했던 외몽골 왕공들도 오랜 평화에 젖어 있었다. [26] 사실 이때, 셍게린첸이 이끌던 팔기군 부대는 기병대 중심이긴 하지만 의외로 포병까지 제법 데리고 다니는 등 구성상으로 갖춰야 할 것은 얼추 갖췄다. 그러나 문제는 성조 강희제 시절에나 쓰던 200년 된 대포를 쓰던 포병대의 저질 화력이었다. 이 부분 때문에 팔리교 전투에서는 공성 전차에게 녹아내리는 저글링 신세가 되었다. [27] 황당하게도 패주하는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현지인들을 상대로 약탈과 강간을 일삼아서 원성을 샀다고 한다. [28] 다만 청일전쟁 무렵 조선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약탈은 일본군이 저질렀다. 청일전쟁 무렵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24만 명이 조선의 양곡을 300만 석이나 약탈해서 조선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다. # [29] 다만 서유럽의 총기병들은 이미 16세기부터 불씨 관리가 필요없는 치륜식 총기를 들고 다녔음을 상기하자. 중국이라는 당대 초강대국 아래에서 유럽처럼 전쟁이 자주 벌어지지 않았던 중근세 동아시아는 기술 및 전술의 발전이 비교적 더뎠고, 수발식 총기는 실험적으로 만들어보거나 수입하는 정도로 그쳤으며 19세기까지 화승총이 주력이라 기병이 사용하기 매우 귀찮았기에 활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30] 박제가의 《 북학의》에서도 만주족들이 사용하는 활의 성능이 시원찮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다만 만주족 활이 조선의 활과는 달리 비가 오고 습한 날에도 접착제로 쓴 아교가 녹아서 못 쓰게 되는 일이 없고, 제작에 있어서 재료 취득 루트가 조선의 활보다 다양하고 폭넓다는 점에 주목했다. [31] 물론 이 시절 중국 남방 농민, 특히 묘족들이 많이 사는 귀주성 같은 오지는 일상 생활상이 많이 전투적이었고, 농민들도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자. 화전민 나부랭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카리스마 있는 반란 지도자들 아래 모이면 바로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 같은 청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든 거대 반란들의 주역이 되었다. [32]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준가르 정복 당시에 서양식 화포를 쓰긴 썼다. [33] 그런데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아주 어이없는 일로 보이진 않을 수도 있었다. 청조 황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가 이전 왕조인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이렇게 이룬 대외적 확장 과정에서 팔기군을 비롯한 궁기병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4] 사실 청 황실에서 피정복민족의 반란 위협을 차단하고자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들도 있었는데 정작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 [35] 만주족과 여진족 모두 사냥이나 군공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나 지주로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서 만주족 팔기군과 맹안모극의 구성원들은 전투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36] 과거 건륭제 시절에 네팔의 용감한 구르카족을 물리친 일도 많았고 백병전에 능한 것으로 알려진 흑룡강 기병은 태평군의 공격을 받아 해체될 만큼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태평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37] 이때 가장 거대했던 것이 바로 백련교도의 난이었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38] 군사력 자체가 약했다기보다는, 전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 권력의 부재로 반세기 내내 군웅할거시대를 겪어야 했다는 점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