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0:22:25

치외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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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근현대사의 치외법권
2.1. 치외법권 옹호론2.2. 치외법권 비판론
3. 치외법권 지역으로 오해받는 지역4. 판례5. 같이보기

1. 개요

extraterritoriality

국제 관계에서 다른 나라의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할 권리.

치외법권은 최혜국 대우와 같이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피지배국가에 거주하는 강대국의 국민들이 영토국가의 법질서에 복종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체류국가 영토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허구적인 굴복체제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평등한 주권 자결적 관계로 발전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개념이다. 간단히 말하면 21세기 현재 전세계 어디에도 치외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사관 등의 일부 구역에서는 한정적으로 치외법권이 적용되기도 했다. 국제관습법상 대사관 내부는 대사를 보낸 국가의 영토의 일부로 취급됐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공관에는 파견국의 동의 없이 소재지 국가의 관헌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치외법권이 인정받는다고 오해받기도 한다. 범죄자가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면 그 범죄자를 잡으려고 대사관으로 못 들어 간다. 그런 경우라도 범죄인 인도조약이 있으므로 결국엔 경찰 당국에 인계되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난민이나 정치범은 송환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외국 대사관을 통한 망명이 시도된다. 사실 외교공관이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외교공관에 관한 잘못된 상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자세한 내용은 외교공관의 2.1 참조. 오늘날 외교관 외교공관 등에 대하여 형사면책 등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은 치외법권이라는 초법적 권리가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비엔나 협약(1961) 등의 조인국들이 면책 조항에 대해 협의했기 때문이다. 비엔나 협약에는 접수국의 법령을 준수할 의무도 명시되어 있다. 다만, 대중적으로는 아직 이러한 외교관 면책 특권에 대하여 치외법권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는 한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대사관은 치외법권이 아니다.

2. 근현대사의 치외법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질리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 때의 치외법권은 외국인이 체류국 안에서 얽힌 사건에 대해 체류국의 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외국인의 국가의 체류국 영사에게서 재판을 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이라고도 한다.

조선 강화도 조약 때 치외법권을 내주고, 그 후로 서양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마다 이 조약이 끼어 들어와 버렸다. 덕분에 개항장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물론 살인 같은 중범죄를 저질렀으면 해당 국가에서도 당연히 처벌을 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은근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래서 이 치외법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불평등 조약을 구별하기도 했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청나라, 중화민국)도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불평등 조약이 맺어졌으며, 일본조차도 초기에는 서양과 불평등 조약을 했다. 이 두 나라는 개화에 나서면서 불평등 조약 및 치외법권 철폐를 국가의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청일전쟁 등을 통해 근대화 노력과 국력을 인정받아 1890년대에 치외법권을 하나둘 철폐했으며, 1911년에 완전한 관세 자주권을 인정받았다. 중국은 1940년대 국민정부 시절에 중일전쟁을 통해 연합국과 협상하면서 불평등 조약 대부분을 갈아치웠다. 장제스는 1940년대에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치외법권을 철폐하자 '내 생애에서 유일하게 기쁜 순간'이라고 하면서 이를 강조할 정도였다.

2.1. 치외법권 옹호론

치외법권은 외국에서 일어난 자국민의 범죄 용의에 대해 공정한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며 비인도적 처벌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단이다. 치외법권을 절대악으로만 인식하는 시각은 결국 일부 국가의 인권침해적인 신체형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주권절대주의이므로 인간의 자연권을 보장하는 국제연합 헌장에 위배될 수 있는 주장이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치외법권이 일부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라지게 된 것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인도주의적 형벌이 폐지과정을 거치게 되면서일 뿐이다. 일본과 중국이 치외법권을 폐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국력이 강해진 것도 있지만 근대적 법제를 전면 도입하고 비인도적인 형벌을 완전히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말한다면, 근대적 법제 체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비인도적 형벌이 아직 존재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옹호논리는 주로 서구와 일본 등 근대 제국주의 국가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와 치외법권 조약을 맺기 위해 주장했던 논리이기도 하다.

실제로 중국은 법체계를 근대적으로 뜯어고치고 국가 체제도 바꾼 1917년 이후에야 치외법권 조항의 폐지를 요구할 수 있었고, 일본 역시 오쓰 사건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공정한 판결 등을 통해 신뢰를 얻고 나서야 치외법권 조항을 폐지할 수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 역시 SOFA 개정에 있어 민주화를 통해 국내 사법부의 독립 및 공정한 판결을 위한 노력이 자리잡았기에 가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근세 이전까지는 서양의 형벌이라고 해서 공정하며 인도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잔혹한 형벌은 유럽에도 있었다. 교수척장분지형[1], 화형, 그리고 당시 유럽은 근세까지 마녀사냥을 벌여 애꿎은 여성 6만 명을 죽였다. 보통 중세시대 마녀사냥이라고는 하는데 사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근세다. 중세식 종교재판만 생각하기 쉽지만 세속재판도 오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살해된 자의 시신이 발견도 안 됐고 기타 증거도 없는데 재판부가 단지 간접증거만 갖고 일가족을 살인자로 단정하여 사형에 처한 사건이 영국에서 벌어진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살해된 자가 멀쩡히 나타나면서 무죄가 증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로 유럽은 규문주의에서 탈피하여 탄핵주의 국가 소추주의 형사소송 원칙을 세우고 재판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확보해나갔다. 또한 18세기 말 인권운동이 확산되며 비인도적 형벌 및 고문이 폐지되었고, 형벌의 종류는 '신체형'에서 '구금형'과 '벌금형'으로 대부분 변화하였다. 치외법권이 문제가 되는 19세기 말엽에는 이미 빅토르 위고가 '고문은 그 존재를 멈췄다'라고까지 말한 바가 있다. 다만 비인도적 고문행위는 얼마 못 가 1, 2차 세계 대전에서 다시 부활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비서양의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소위 원님재판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대부분의 비서양권에서 재판은 군사력을 가진 자 혹은 군사력을 위임받은 자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형벌의 내용도 태형(한국,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절단형 투석형(이슬람), 죽을 때까지 몸을 난도질하는 형벌(중국), 삶아 죽이거나 T자 형틀에 묶어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목만 내놓은 뒤 톱으로 참수형을 집행하는 형벌(일본) 등 극도로 비인도적이었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미국 등에도 육체적 사법처벌(JCP)은 존재했으나, 18세기 무렵 법으로 금지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각국의 정부가 아무리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자국민에게 매를 얻어맞게 하고, 손이 잘리게 하고, 돌에 얻어맞아 죽게 하고, 온몸을 칼로 난도질당해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나마도 중앙정부의 통제권 밖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의 조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며 조선을 방문했던 잭 런던은, 비서양인은 갈등을 법에 의하기보다는 린치를 통해 해결하는 야만적인 습속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잭 런던의 주장은 서구중심주의 백인우월주의적인 관점이 담겨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백인의 의무를 주장하였는데 제국주의 시절 열강 식민지 수탈과 폭력 뒤에는 한편으로 정의, 바른 양심, 삶에 대한 책임감, 동정심, 우정, 인간의 정 등이 있는데, 이는 서구만의 것이며, 수학이나 발사술처럼 동양인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아예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치외법권은 주권국가가 비인도적 형벌을 집행하는 다른 국가와 수교할 때 자국민 보호를 위해 당연히 요구해야 하는 조건일 수 있다. 아니면 그런 법 자체를 뜯어 고치라고 요구하든가. 북한 내 법률에 의한 인권 탄압 행위를 합법적인 일이라며 정당화하거나 북한의 주권사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건을 봐도, 외국인이라고 해서 형벌이 달리 집행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흥선 대원군 시절의 병인박해(1866) 때는, 무려 9명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배교 및 추방을 거부한 뒤 새남터 갈매못에서 공개 참수형을 당하고 목이 내걸렸을 정도. 같은 시기 유럽에도 참형 거열형이 존재하였지만 총살형이거나 교수형으로 바뀌거나 비공개로 집행하는 추세였다. 9명의 프랑스인들은 모두 가톨릭 주교들과 신부들로[2], 이로 인해 같은 해에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현지인들과의 일방적인 마찰로 화를 자초하는 외국인도 분명 있었지만 현지인들의 이해 부족으로 억울한 판결을 통보받는 외국인도 결코 적지 않았다. 당장 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아다니던 것이 개항 시기 중국 대륙의 현실이었고, 기본적으로 청은 원님재판을 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성이 없어서 서양인들이 무고한 줄 알아도 주민들의 요구로 부당한 판결을 내리는 일도 흔했다.

또한 치외법권 조약은 외국에서 죄를 지은 자국민을 벌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자국에서 자국법에 따라 재판하고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지만, 치외법권이 인정됐다고 서양인들이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을 마구 죽이거나 강간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물론 전쟁 중에 간혹 난장판이 벌어진 일은 있지만 최소한 법과 질서가 유지되던 시기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즉 치외법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집행 방법에 문제가 있다.

2.2. 치외법권 비판론

치외법권은 제국주의 열강이 피지배국의 수탈을 위해 악용해 온, 사법권, 재판권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약의 핵심이다. 필요 시에도 제한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다.

19세기 근대화 무렵 중국에서 외국인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경우는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현지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제국주의적이었다는 비판이 많은데, 이들은 서양 우월주의에 깊이 사로잡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현지 문화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현지인의 사당을 마음대로 허물거나 고압적이고 교조적인 자세로 신앙을 강요하였으며, 더러는 선교 대신 재산을 불리는 데나 열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인도의 동인도 주식회사와 중국의 아편전쟁마저도 미개한 문명을 개척하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미화하며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정당화시키고 서구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주었다. 이로 인해 일어난 현지인들과의 마찰이 재판으로 이어졌을 때 그 판결이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국주의 국가의 선교사나 상인들이 사실상 타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것이 치외법권 조항이다. 따라서 치외법권 조항은 근대적 사법체계가 발달하지 못한 국가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만 갖추고 있었을 뿐, 실상은 그저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민을 감싸고, 식민지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기본적으로 제도는 제도적 정당성 뿐만 아니라, 그 제도가 정당한 절차로 수행될 것이라는 최소한의 보장과 그를 위한 규제적 장치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치외법권은 식민지 국가 내의 공정한 사법권 확립이라는 명분과 비교해 보면, 그 절차는 매우 부당하게 흘러갈 것이 명백했다. 가령 당시 중국인과 영국인이 충돌하는 재판을 영국인 법관이나 영사가 재판한다고 했을 때, 그 재판이 공정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다. 이는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식과 당시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에 비추어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국민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 치외법권 제도를 만들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치외법권이 악용될 소지는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정작 이를 규제하기 위한 당국의 사법적 제도는 사실상 전혀 없었다는 것은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자국민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공정한 재판 따위는 안중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자국의 법관이나 영사가 '외국인'과 '자국민' 사이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양심이 유일한 규제 수단인 이상 오히려 절차가 부당하게 흘러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따라서 치외법권의 제도적 정당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자체가 절차적 정당성을 담보하기는 커녕 오히려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에게 부당한 절차를 강요하게 될 것이 명백한 이상 치외법권은 이미 제도 그 자체로 결함을 안고 있다.

사법권은 국가의 주권이고, 그 국가의 영토 안에 있는 한은 항상 그 나라 법을 지키는 것이 그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 국가의 법률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총과 대포를 앞세워서 치외법권을 강제로 체결하게 만드는 게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치외법권이 생긴 이유는 단순히 서양인의 편의를 위해 신설된 제도이기 때문에 치외법권이 합리화되는 근거는 절대 되지 못한다. 당시의 제국주의에서 국제법은 강자가 곧 법이었고, 상대적으로 약자에 해당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권을 무시하고 열강 기준으로 법을 강요했을 뿐이다.

국가주권이 더욱 명확해지고 상호주의가 기본인 현대에서는 속인주의와 속지주의가 맞물려 치외법권을 주장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입국 과정에서 외국인은 이미 방문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이를 거부하겠다면 해당 국가는 당사자의 입국을 금지시킬 수 있으며, 이 경우 당사자는 입국 게이트를 통과 못하고 그대로 자국으로 돌아가야한다. 이것이 부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국제법에서는 자국민의 귀국만 거부할 수 없으며,[3] 외국인의 입국은 합당한 이유가 없더라도 거부할 수 있다.

3. 치외법권 지역으로 오해받는 지역

  •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Corporation)
    전통적인 런던 중심가 지역으로,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자치권을 지켜온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한다. 로이드 금융그룹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융회사들의 본사가 이곳에 많이 있는데, 런던광역행정청(Greater London Authority)은 물론이고 영국 중앙정부조차 이곳에 본사를 둔 금융회사들에 대해 세무조사나 압수수색 등을 할 수 없어서 치외법권 지역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일단 '다른 나라의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국제법에서의 권리' 라는 정의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시티 오브 런던이 중앙정부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것은 영국의 역사와 법적 관행에서 유래한 영국 내부의 문제이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국제법적으로 영국의 주권이 제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외교공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빈 조약에 의한 특권 및 면제를 향유하는 지역으로서, 주재국의 행정력과 경찰력이 파견국 대사관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현지 경찰은 대사관의 외곽 경비만 맡을 수 있으며 대사관의 협조 요청이 없는 한 진입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외교적 특권이 있는 대사관 특성 상 일부 망명자들이 현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대사관 담을 뛰어넘어 망명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 현지 정부는 대사관에 망명자를 빼내 올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원칙적으로 대사관은 망명자를 내쫓을 수 없고 망명자에 대한 보호의무를 지니며 제네바 협약에 의해 난민 심사 절차를 밟아야 한다.
  • UN기념공원
    결론부터 말하면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UN기념공원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소재한 세계 유일의 UN군 묘지이며,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UN군의 유해를 안장한 묘지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 당곡리 토지를 UN에 무상 기증하면서 '재한국 국제연합기념묘지의 설치 및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 간의 협정' 을 체결함에 따라 조성되게 되었다. UN 소유지이기 때문에, 국립묘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이곳에 전사자가 안장된 11개국[4]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치외법권지는 아니다. 위의 협정 제4조 제(2)항 (a)호[5]에도 묘지의 토지는 불가침이되 치외법권은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4. 판례

5. 같이보기



[1] 잉글랜드 지방에서 반역자를 처벌할 때 썼던 형벌이다. 거열형 + 교수형 + 능지형, 대충 이리 보면 된다. 18세기 말쯤에 교수형으로 대체를 했다. [2]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3] 극악무도의 범죄자가 해외도피를 했다가 귀국했더라도 입국 거부는 못하고 공항해서 귀국 절차를 마치고 체포한 다음 연행해간다. [4]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영국, 터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리고 의료지원국인 노르웨이가 있다. [5] "기념묘지에 대하여 치외법권은 적용되지 아니하나, 이 묘지의 토지는 불가침이다. 한국의 중앙 및 지방공무원은, 행정, 사법, 군 또는 경찰을 막론하고, 국제연합 관리관의 요청에 의거하거나 또는 허가를 얻지 아니하고는 공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기념묘지 내에 들어갈 수 없다. 단,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거나 범죄 수사를 위하여, 한국의 권한 있는 당국( 경찰공무원)이 기념묘지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였을 때에는 국제연합 관리관은, 정당한 거절 이유( 허위신고, 장난전화 등)가 없다면 공권력의 출입을 무조건 허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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