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55:46

한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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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중국사
2.1. 당2.2. 송2.3. 명·청

1. 개요

한림원(翰林院)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국가 학술기관의 명칭으로, 한국사에서는 고려 때 있었다. 국왕 명의로 된 공문서 작성과 서적 출판 등의 업무를 맡았다. 조선의 예문관(藝文館), 홍문관에 해당한다. 기관장은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및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이다.

여기에서 유래해서 한국에서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한국차세대과학기술한림원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국가 학술기관을 ‘한림원’이라 부른다.

더불어 노벨상을 수여하는 기관인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스웨덴 아카데미(스웨덴 한림원)을 한림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중국사

당나라 이래 중앙 관청이었다. 국가 문서를 생산, 관리하며 유교 경전 연구를 담당했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으며 경연관을 맡았다.

2.1.

당나라 초기 문사(文詞), 경학에 뛰어난 사인(士人)을 별원에 두고 연현(宴見 한가로울 때의 알현)에 대비하게 하고 때로 궁 안에 불려가 제고(制誥)를 초안하였다.[1] 정해진 명칭이 없다가 고종 때 북문학사, 현종 때 한림학사라 불렸으나 정관(正官)은 아니고 품계도 없었다.

원래 올라오는 표소(表疏)를 관리하고 답신이나 장상의 제명(制命)을 지을 뿐이나 중서성이 유명무실해지며 중서사인이 하던 조칙의 초안과 관리를 맡게 되었다. 황제와 한림학사가 긴밀해지며 권력이 재상에 견주게 되고, 재상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환관 세력이 강해지자 한림학사는 환관과 결탁해야 재상이 될 수 있었다.

2.2.

북송 연간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임시직 수준이던 한림학사가 정식으로 한림학사원이라는 기구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황제의 명령이 재상에 의해 간접적으로 기초되는 것을 외제(外制), 황제가 직접 기초하는 것을 내제(內制)라고 부르는데, 내제는 당대에 이어서 한림학사가 작성하고 외제는 중서사인이 아닌 한림원 소속의 지제고가 맡았다.[2]

한림원에는 한림학사와 지제고 같은 황제의 서기관도 있지만 유교 경서를 황제에게 강의하는 강관(한림시독학사, 한림시강학사)도 설치되었다.
한림학사원은 황성 내의 선휘원 북쪽에 위치하였다. 한림학사는 조칙을 내린 황제의 지시가 부당하다면 논박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다. 지제고 아래로 직학사, 한림권직, 학사원권직 등이 있고, 지제고에서 한림학사로 승진한다.

송대에 전시를 황제가 주관하여 황제권이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전시 역시 실질적으로는 한림학사와 지제고가 담당하였다. 과거에서 감독관의 경우 과거합격자가 제자, 즉 문생이 되고 감독관은 스승, 지공고가 되며 평생 유대관계가 생겨 자연스레 한림학사는 사대부 계층의 대표자가 되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한림학사는 황제가 황태자 시절부터 교육을 담당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로서도 권력에 위협이 되는 종친이나 외척보다는 한림학사를 신뢰하게 되었다. 한림학사는 사대부 계층의 대표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재상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황제와 재상 사이에 완충 역할이 가능했고 황제도 원활한 정치를 위해서 한림학사를 우대하였다.

2.3. 명·청

명청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한 후 일정기간 수습기간을 지내다가 우수한 자는 한림원에 입직하게 된다. 과거에서 장원은 종6품 한림원 수찬을, 2등인 방안, 3등인 탐화는 정7품 한림원 편수 관직이 내려졌다.

명나라 중기 이후 백관의 으뜸이 되는 내각대학사는 대체로 한림원 출신에서 나왔다. 한림원에서 배출되는 인원은 고관이 될 확률이 높았다. 다만 명청대에는 경연이 유명무실화되었기 때문에 송대에 비하면 한림학사원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내각대학사가 한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명 후기 이전까지 내각이 조정의 각 관청에 무언가를 보낼 때는 '한림원'이라고 썼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는 황제의 취미 활동이나 유교경전에 대한 질의를 명목으로 남서방(南書房)이 만들어지고 한림원 학사들을 들였다. 남서방은 실제로는 황제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자문하여 정치에 참여하였다.

옹정 연간에 들어서면 황궁 내에 황자들을 모아 교육하는 상서방이 만들어지는데, 상서방에서 황자들을 교육하는 관리가 한림원 소속이다.
[1] 출처: 부낙성 저, 신승하 역, 《중국통사》, 지영사, p.534. 참고로 국내에서는 이 책의 저자명이 '전낙성'으로 잘못 알려졌다. 따라서 도서관이나 중고 서점에서 찾으려면 '전낙성', '부낙성'을 모두 검색하거나, 저자명 대신 역자명으로 검색해야 한다. 이 책에 관한 정보는 중국사 관련 정보 문서의 '관련 문헌' 문단 참고. [2] 신종 때 원풍관제로 관제개혁이 있은 이후로 외제는 다시 중서사인이 관장하게 되었다. 신채식, <송대 황제권 연구>,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