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3:20

투르크메니스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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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
2.1. 헬레니즘화2.2. 불교화2.3. 조로아스터교의 부흥과 마니교
3. 이슬람화4. 튀르크화
4.1. 수피즘의 번영
5. 근세6. 근현대
6.1. 트란스카스피아 주6.2.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7. 현대8. 참고 문헌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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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자 동서교역의 중심지 호라산의 역사와 투르크멘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이 지역은 고대부터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중세에는 튀르크계 국가들이 건국되었다. 호라산 지역은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와 함께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이 지역에는 아바스 왕조를 비롯한 여러 제국이 발흥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우즈베키스탄 외에도 카스피 해 너머 캅카스 동부의 아제르바이잔과도 역사를 많이 공유하는 편이다. 원래는 메디아의 일부로 간주될 정도로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았던 지역이지만 투르크메니스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튀르크화되었다.

2. 고대

파일:old-nisa5.jpg
아슈가바트 인근, 옛 파르티아 수도였던 니사 유적

기원전 8000년경부터 농경이 이어져 왔다. 청동기 시대에는 이른바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문화라고 불리는 아리아계 정주 농경민들의 문화권이 번성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에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다하이 인들이 살았으며, 이후 기마 유목민인 스키타이족과 마사게타이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오늘날 투르크멘 지역에 위치했던 해당 유목집단을 통틀어 다헤(Dahae)라고 부른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시절에는 박트리아 속주에 속했으며, 이 지역은 인구가 적어서 많은 세금을 기대할 수 없었으나 페르시아군에게 막강한 기병 전력을 제공했다 한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 반도 리디아 왕국을 정복하면서 금속으로 된 화폐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이 화폐 제도는 페르시아 동부 호라산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다른 한편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이 지역을 반란자들을 유배시키는 지역으로 활용하였던 듯 하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는 리비아 해안지대의 바르카(Barca)라는 도시에서 주민들이 반페르시아 폭동을 일으키자 도시 주민 전체를 멀리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오니아의 해안지대의 그리스인들의 폴리스 밀레투스가 봉기하자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인들은 봉기를 진압하고 주민 상당수를 노예로 만든 후 박트리아 각지로 이주시켰다. 스트라본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약 150년 후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박트리아에 도착했을 당시 주민 상당수는 그리스어와 박트리아 현지어가 혼합된 기이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당시 이 지역의 마사게타이족 기병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상당히 애를 먹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중무장 기병으로 마사게타이 기마궁수들을 제압한 이후 이 지역의 오아시스에 '알렉산드리아 마르기아나'라는 도시를 세우는데, 이 도시는 나중에 메르브의 기원이 된다.

2.1. 헬레니즘화

파일:SeleucidMap.jpg

알렉산드로스 사후 휘하 장군들간의 권력 다툼과 내분이 일어나며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장군과 그 후손들이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페르시아 영토에 정착한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페르시아 귀족 여성들과 혼인하고 이 지역에 그리스인 이민이 들어오나, 향수병에 걸린 그리스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이 지역의 서부이란어군계열의 파르티아인들이 남하하여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아우르는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니사는 파르티아 제국 초창기의 수도 역할을 맡았는데, 당시 파르티아인들은 니사에 위치한 궁전을 헬레니즘 양식으로 꾸미고 그리스식 조각상들로 장식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가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친 이유로, 파르티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앙을 장악하자 셀레우코스 제국 동부의 그리스인들은 고립되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그리고 인도 그리스 왕국을 세우고 그리스식 주화를 주조하며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간다라 미술로 대표되는 핼레니즘 문화를 뿌리내리게 된다.

2.2. 불교화

파일:KushanCities.png

쿠샨 왕조 마우리아 왕조의 뒤를 이어 북인도와 중앙아시아 남부를 장악한 뒤, 동서무역과 교통의 요지인 이 지역을 자주 침공하면서 파르티아와 쿠샨 왕조는 잦은 전쟁을 벌였다. 불교는 마우리아 왕국 시대부터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해,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그리스인 사이에도 전파되었다. 농촌 중심의 브라만교와 다르게 불교는 도시 상인들의 권리를 대변해주었으며, 인도 상인들의 적극적인 불교 전파에 힘입어 중앙아시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쿠샨 왕조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진흥하였고, 고대 중앙아시아의 주류 종교로 부상한 불교는 호라산을 포함한 파르티아 왕국 동부 전역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고고학적 연과 결과 오늘날의 페르시아 만 연안의 많은 동굴에서 파르티아 왕조 시절 불교 사원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메르브는 불교의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다. 호라산 지역은 쿠샨 왕조로부터 불교 이외에도 인도의 선진 관개 기술도 도입하였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중력이나 풍력을 이용하는 약 9가지 수차가 도입되었는데, 이 수차들은 건조한 중앙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되어 토양의 염화[1]로 인한 사막화를 방지하였다.

2.3. 조로아스터교의 부흥과 마니교

파일:THE-HEPHTHALITES.jpg

파르티아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지상주의에 입각하여 페르시아의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문화를 억압하였다. 이들은 전임자 파르티아인들이 종교와 민족에 관용을 베푼 것을 방종이라고 비판하면서 많은 불교 사원과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사원들을 폐쇄시키고 그리스인들을 강제로 동화시키며 조로아스터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강력한 권위를 누리게 되었으며, 사산 왕조의 권위를 등에 업고 급속히 교세를 팽창시켰다.

파르티아가 사산 왕조에 멸망당하던 해 크테시폰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니는 자신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불교의 진리를 아우르는 성인이라 주장하면서 서기 3세기 마니교를 창제했다. 마니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기독교 영지주의를 차용하고 호라산의 불교와 자이나교로부터는 사원에서 '독신 수행 생활을 하는 출가자'와 '가족을 부양하고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재가자'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호라산 지역의 주민들은 마니교를 받아들인 소그드인들의 지속적인 교역 활동으로 학문과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발흐 근교에 위치한 불교 순례지 나우바하르가 부유한 무역상이던 순례객들의 보시로 인해 시설이 개선되며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의 발흐에 해당하는 자리아스파에 있다고 주장하며 샤한샤에게 호라산 동쪽의 영토를 병합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고 사산 왕조는 호라산 동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중부까지 영역을 팽창하려 시도하게 되었다. 샤푸르 1세는 이에 사산 제국 서쪽에서 사로잡은 로마인 포로들을 당시 사산 제국의 동부 요충지로 이동시켜 니샤푸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샤푸르는 니샤푸르를 건설함으로써 로마군 포로들의 탈주 의지도 꺾어버리고, 로마군의 토목 기술을 이용하여 신도시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 등 이 중의 효과를 얻었다. 서기 5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지정하자 상당수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동쪽의 이웃한 사산조 페르시아로 이민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로마인-그리스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니샤푸르로 이주하였다. 고대 알렉산드로스의 군인들이 정착한 지 수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이 지역에 그리스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정착하였다. 서기 540년 메르브의 대주교로 임명된 테오도르(Theodor)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였다.[2]

한편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이주한 흉노족들이 세운 고대 말 에프탈 왕국은 소그드인들은 교역을 장려하고 도시를 관리하며 세력을 키운 뒤 호라산 지역으로 확장을 노렸다. 에프탈족은 머리가 장두형에 피부색은 인도인이나 흉노족보다 하얗다고 하며 앞머리와 옆머리는 짧게 깎는 대신에 뒷머리를 길게 길렀다. 이들은 소그드인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성문법을 만들었으며, 이는 곧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 국가들로 전파되었다.

에프탈족은 사산 왕조가 로마 제국과 싸우고 아르메니아를 침략할 때 지원군을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로즈 1세는 황위에 올리기도 하고 전사시키기도 했다. 페로즈 1세의 아들 카바드 1세는 아버지 페로즈가 전사한 전투에서 에프탈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으며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농간[3]으로 황위에 폐위된 이후에는 에프탈족의 도움을 받아 황위를 되찾는 등 에프탈족은 사산 왕조의 적이자 혈맹이었다. 에프탈족은 과거 자신들이 사산 왕조를 도와 침략했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지휘하는 사산 왕조 군대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고 이후 서돌궐족이 이들을 합병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상실한다. 에프탈족의 잔당들은 신드와 카슈미르 인근으로 이주한 후 인도인과 동화되었다.

5~7세기의 메르브, 헤라트, 발흐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공존하고, 소그드인 무역 상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중개무역하는 부유한 국제 도시였으며,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를 잇는 호라산은 동서 문물 교류의 중심지였다.

3. 이슬람화

7세기 경에 이슬람 정통 칼리파 시대의 3대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의 재위 기간에 아랍 무슬림에게 정복되었으며, 아랍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호라산 지역에 정착한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동화되었으며, 아랍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차별받던 호라산의 페르시아인 무슬림들과 동조했다. 호라산을 근거지로 한 압바스 가문은 747년 거병하여 748년 메르브를 함락하여 거점으로 삼고 750년 우마이야 가문를 무너트린다. 세계사적 대사건인 압바스 칼리프조의 건국에는 호라산 지역의 소그드인들이 거병 자금을 대며 긴밀하게 관여했다고 추정된다.[4]

압바스 왕조는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 치세에 메르브에서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쿠파로 천도하였다가 이후 과거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의 폐허 근처의 바그다드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수도로 삼았다. 압바스 왕조의 구성원들은 국제 교류의 중심지였던 자신들의 출신지 호라산의 문화를 잊지 않았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 시절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페르시아인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으며, 중앙아시아 무역 도시들의 사회 시스템을 이슬람 사회에 적극 차용하였다.

압바스 칼리프조 시대 이슬람 학문의 발전은 주로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라산 출신 페르시아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중앙아시아인들과 함께 압바스 칼리프조의 학문 발전을 주도하였다. 9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니샤푸르 출신 페르시아인 마왈리의 후손 이븐 알 핫자즈는 부하라의 학자 무함마드 알 부하리의 영향을 받아, 신뢰성 높은 하디스 편집본으로 유명한 사힛 무슬림을 편찬했다. 이븐 알 핫자즈가 편찬한 사힛 무슬림은 부하라 출신 학자가 수집한 사힛 알 부하리 하디스와 함께 순니 이슬람 양대 하디스 편집본으로 인정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메르브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알리 빈 사흘 알 타바리(Ali bin Sahl al Tabari)는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을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최초로 번역하고 뒤이어 고대 그리스의 의학서 상당수를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호라즘 출신 수학자 알콰리즈미는 메르브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인도 수학을 아랍 세계에 도입하고 대수학을 구체적으로 체계화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 수학의 음수 개념이 니샤푸르 출신 수학자에 의해 보급되는 등 니샤푸르는 호라산과 트란속시아나, 인도의 과학과 학문이 중동으로 보급되는 거점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의 제위기 동안 이 지역에서 타히르 왕조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사만 왕조같은 타지크계 군벌 정권들이 마냥 독립 국가처럼 운영되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왕국의 왕이나 다름 없었다. 사만 왕조는 나중에 튀르크계 카라한 칸국에 정복되는데 이를 계기로 호라산 동부 중앙아시아 튀르크인들은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4. 튀르크화

하자르 칸국 키예프 루스의 침략으로 몰락하자 하자르 칸국 궁정의 신하였던 셀주크가 하자르족 난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 강 삼각주의 오우즈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을 이루었다. 이들은 사만 왕조 카라한 칸국, 가즈나 왕조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혼란에 빠져있던 호라산 지방으로 쳐들어가 영역을 넓혔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 지방은 셀주크 제국 치하에서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선정에 힘입어 번영을 누렸으며, 셀주크 제국의 동서 분열 이후에도 산자르의 지배 하에 번영을 누렸다. 고대 말 돌궐 제국이 괵튀르크 유목민들과 소그드인 상인들의 상호 협력 하에 발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방에서 온 튀르크인들은 내정, 제정 문제를 페르시아인들에게 맡기는 형식의 분업을 택하였던 것이다.

니잠 알 물크는 사마르칸드 - 부하라 - 메르브 - 니샤푸르를 잇는 도로망을 개선하고 숙박 시설을 설치하며 경찰을 주둔시켜 세금 수입을 증대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전의 사만 왕조의 조폐국을 성공적으로 재건하고 통제하여 물가를 안정시키는 임무도 맡았다. 페르시아계 명재상 니잠 알 물크가 내치를 책임지고 셀주크 왕들은 전쟁을 전담하다시피하는 이러한 구조는, 소그드인들은 도시에서 장사하고 튀르크인들은 도시 성벽과 무역상들을 보호하며 약탈한 물건을 소그드인에게 처분하던 과거 서돌궐 제국의 시스템을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니잠 알 물크는 재정 지출과 국방 안전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이크타 제도(Iqta; 군인과 관료들에게 토지 수조권을 주는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국경 지대에는 세금을 무겁게 하되 셀주크 제국 중심부의 세금은 최대한 가볍게 조정하였다. 그 결과 메르브와 니샤푸르는 세금 부담이 경감하면서 도시 인구가 다시 증가하였고[5] 다른 한편으로 중앙에서 국경지대로 보내는 세금 부담이 감소하였다. 니사라는 도시에서는 짝퉁 중국산 도자기가 제조되었는데 이 도자기는 중국산 도자기보다 운송비가 저렴했던 덕택에 곧 진품 중국산 도자기들을 밀어내고 중동 시장을 장악하였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메르브의 용광로에서는 중세 당시 이미 합금 기술이 개발되었다.

4.1. 수피즘의 번영

고대 페르시아 역사에 심취했던 니잠 알 물크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시행했던 그리고 근자에 멸망한 가즈나 왕조가 시행했던 첩보원 체제를 도입하려 시도하였으나 이는 생각만큼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첩보원들이 외국의 동태나 내부의 반란 위협은 물론 관리들이 역참에 배급될 건초를 떼먹지 못하게 감시하는 일까지 꼼꼼하게 감독하길 원하였으나 중세 당시에는 현대 공산주의 국가 수준의 첩보망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제국의 대학을 신축하거나 시설을 개선하는데도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새로 증축된 이슬람 대학들은 니잠의 이름을 따서 “니자미야”라고 불렸다. 발흐 헤라트의 유서깊은 대학들이 니잠의 지원 하에 규모가 더 커졌으며, 특히 바그다드의 니자미야와 호라산 서부 니샤푸르의 니자미야가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니잠 알 물크가 니자미야를 각지에 건립한 이유는 과학 진흥보다는 파티마 왕조의 알 아즈하르 대학의 이스마일파 신학자들 그리고 시아 12이맘파의 유명 신학자로 명성을 떨친 무함마드 투시[6]로부터 셀주크 제국이 보호하는 칼리파와 순니파 신학자들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파티마 왕조의 건국세력은 시아파 이스마일파였고 이들의 신학은 신플라톤주의 사변철학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미 셀주크 제국 동부에는 이스마일파 잔당들을 포함해서 무타질라 학파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적잖이 남아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시아파 12이맘파 학자 무함마드 투시가 시아파 하디스 편집본들을 완성하여 시아파 부흥을 주도하였다.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제국 그리고 압바스 칼리프조가 우마이야 칼리프조처럼 교리 분열로 멸망하는게 아닌게 우려하는게 당연했다. 니잠 알 물크의 니자미야를 대표하는 교수로 임용된 알 가잘리는 알 아즈하르 대학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슬람 신학에 그리스 사변철학을 도입하는 것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의 부조리>라는 저서를 남겼다.[7]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저술한 이후 알 가잘리는 슬럼프에 빠지고 이후 수피즘에 빠져들었다. 10년간의 수피 고행자 생활 이후 다시 교수로 복직한 그는 이슬람 순니파 입장에서 수피즘을 해석하고 공인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다시 말해서 알 가잘리는 과거 자신부터가 철학자인 상황에서 후원자들의 요청으로 다른 철학자들을 공격하며 철학을 이단시했던 자기 모순을 수피즘을 통해 극복하였다. 신앙과 이성의 양립 문제에서 그는 신비주의를 포용함으로서 정반합적 입장을 택했던 것이다.

알 가잘리가 셀주크 제국의 신학과 철학을 대표했다면 오마르 하이얌은 셀주크 제국의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오마르 하이얌은 3차방정식을 연구한 수학자로서도 명성을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시인으로 더 유명하다. 알 가잘리의 부친도 투스에서 양털을 가공하는 장인이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마르 하이얌 역시 천막장이 가문 출신이었다. 중세 당시 호라산은 흙수저 출신이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명망 높은 학자가 될 수 있는 열려있는 그리고 번영하던 사회였다. 니잠 알 물크가 사망한 이후에는 셀주크 지도자 아흐마드 산자르가 선정을 펼쳤다. 산자르 치세 사락스에서 출생하여 메르브에서 활동하던 안와리는 유명한 시인이자 천문학자로 다른 어용시인들과 다르게 통치자에게 아첨하는 시 대신에 자신의 천문학 실력을 자랑하는 시를 지으며, 다른 사람들을 바보라고 놀리고 다녔다. 1185년 안와리는 자신이 별자리를 분석한 결과 메르브에 대지진과 대화재가 날 것이라 예측하였고 그가 재난을 예보한 날짜가 되자 메르브 주민들은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안와리의 확신과 다르게 사건 당일 지진도 화재도 나지 않았고 결국 안와리는 메르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안와리가 셀주크 제국의 동쪽 발흐로 피신했을 무렵, 발흐 시를 불한당과 난봉꾼으로 가득한 곳으로 지역드립하던 <당나귀의 책>이라는 유머집이 셀주크 제국 각지에서 유행하고 있었는데, 발흐 시민들은 안와리를 당나귀의 책 저자로 오인하고 두들겨 팼다고 한다. 안와리는 여장을 하고 도망쳐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두들겨 맞고 여장하고 도망친 일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존심이 강하던 안와리가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게 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118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은 진짜로 보인다. 이런저런 일화에서 보듯 호라산은 중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로 기능했다.

그러나 번영도 잠시 투르크멘이 전공에 따른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인지 반란을 일으켜서 산자르를 납치하고 메르브와 그 인근을 황폐화시켰다. 그 이후 호라산 지역은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하필 호라즘 제국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호라산 지역은 관개시설들이 파괴되고 농민들이 학살당하고 도시가 불타면서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난세가 지속되면서 호라산 지역의 생존자들 특히 지식인들도 알 가잘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둘씩 수피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향수 상인 출신 수피였던 파리드 앗 딘 아타르(Farid al-din Attar)는 페르시아의 신화를 인도의 범신론을 바탕으로 해석한 엮은 <새들의 회의>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다. 세상의 모든 새들은 자신들의 왕으로 알려진 시무르그를 찾기 위해 7개의 계곡을 넘는 모험에 나선다. 힘든 여정 끝에 단 서른 마리의 새만이 7개의 계곡을 통과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이 시무르그의 궁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찾던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새인) 시무르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즉 서른 마리의 새(페르시아어로 Si Murgh)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서른 마리의 새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목표가 자신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의 형태로 내면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타르는 잘랄루딘 루미의 스승이기도 했다.

몽골 제국의 군대가 메르브를 완전히 파괴하고 호라산 전역의 관개시설과 저수지를 파괴한 것을 계기로 호라산 일대의 주요 거주민은 페르시아-타지크계 대신 투르크멘족으로 대체되었다. 다행히 일 칸국 위구르인 다루가치였던 쿠르구즈가 선정을 베푼 덕분에 호라산의 경제가 그나마 단기간에 복구될 수 있었다 한다. 1235년 부임한 쿠르구즈는 재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여 세금 징수에서의 부패를 일소하였고, 역참의 관리들이 제멋대로 역참의 자원을 남용하는 행태를 근절하여 우편 체계를 개선시켰다. 그가 재임한 기간동안 토착 유력자들은 지하 관개 수로를 다시 복구하고 도시 상공업 경제와 무역을 다시 부흥시킬 여력을 얻게 되었다. 쿠르구즈 본인은 기독교도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읜 후 불교 신자로 자랐고, 이후 일 칸국에서 무슬림 박해를 막아주면서 자신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을 사막화로부터 구하고 선정을 펼쳤던 다루가치 쿠르구즈는 몽골 제국 왕족들간의 음모에 휘말려 1242년 일 칸국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입에 돌을 가득 넣은 후 참수당하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5. 근세

이란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일 칸국과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이 붕괴된 이후 티무르 제국이 호라산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니샤푸르와 메르브, 발흐 같은 중세 번영하던 도시들은 몰락하고 대신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헤라트가 부흥하였다. 호라산 서부 지역은 백양 왕조의 차지가 되었다.

5.1. 사파비 왕조의 팽창 실패

티무르 제국이 멸망할 무렵 시아 이슬람을 광신[8]하는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흥기하여 순니파 백양 왕조를 멸망시켰다. 백양 왕조 시기까지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순니파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백양 왕조를 전복한 사파비 왕조가 순니파 무슬림들을 강제 개종, 학살, 추방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역에서 순니파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아제리인 키질바시들은 아제르바이잔 인근 조지아, 아르메니아, 체르케스, 다게스탄 일대의 기독교인들을 납치해 시아 12이맘파로 강제 개종시킨 후 맘루크로 만들어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순니파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인 순니 무슬림 상당수가 이웃한 오스만 제국 부하라 칸국 등으로 탈주하였으며 이로서 이란은 시아파 다수 지역이 되었다. 이후 사파비 제국과 우즈베크족의 부하라 칸국이 호라산 지역을 두고 격전을 벌였다. 사파비 왕조는 정복한 지역의 순니파들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 와중에 호라산 지역 전체가 시아파 지역에 될 수도 있었다. 우즈베크 칸국과 사파비 왕조는 특히 호라산 동부의 교역 중심지 헤라트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가 이 지역의 투르크멘족들을 통일하는데 실패하면서 호라산 서부 일부 지역만 시아 이슬람 지역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사파비 왕조 몰락 이후에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한 때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나디르 샤는 순니파였다. 호라산 북부 지역은 샤이바니 왕조에 이어 히바 칸국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전통적인 페르시아 문화권이었던 호라산 지역은 사파비 왕조의 팽창 실패로 투르크 문화권으로 남게 되었다.

5.2. 히바 칸국

파일:Khivankhanate.png
1511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우즈베크인들과 튀르크멘인들의 국가인 히바 칸국에 튀르크메니스탄과 카라칼파크스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서부 일대에 들어서 통치했다. 히바 칸국은 부하라 칸국과 마찬가지로 무굴 제국에 말이나 말린 찻잎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히바 칸국 경제는 농업보다는 목축업의 비중이 강한 편이었고, 이 지역의 인구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와 학살 이래 과거 수준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정체된 수준이었다.[9] 1740년부터 1746년동안 잠시 나디르 샤에 의해 잠시 정복당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무굴 제국이 마라타 동맹의 공격과 시크교도들의 분리 독립, 영국의 침략으로 약체화되고 기술 변화로 말의 수요가 급감하자 히바 칸국은 줄어든 세입을 대체하기 위해서 코칸트 칸국이 청나라 신장 지역을 약탈해서 한족들을 노예 시장에 파는 것을 모방하여 이웃 지역을 약탈을 시도했다. 종종 이 지역에 정찰을 나온 러시아 군인들이 통째로 증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튀르크멘족에게 습격당해 납치되어 노예로 매매된 경우였다.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후반기에 군대를 보내 히바 칸국을 정복했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튀르크멘족들이 약탈하던 카자르 왕조 동북부 지방 일부 역시 접수해버렸다.

6. 근현대

6.1. 트란스카스피아 주

러시아 제국 정복 이후에도 히바 칸국의 명목상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대신 히바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령 투르케스탄 총독부 예하 트란스카스피아 주에 소속되었다. 카스피해 동부에 위치해있던 이 트란스카스피아 주가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신이 된다.

카스피해와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고 러시아가 이 지역을 너머 아프가니스탄을 노리면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3년 이후인 1920년 히바 칸국은 최종적으로 폐지, 멸망하고 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러시아 제정의 붕괴 이후 소련이 성립되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투르케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투르크멘 주(자카스피 주)에 속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우즈베키스탄과 인접한 히바 칸국과 부하라 토후국 지역에도 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6.2.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르케스탄이 분할되면서 투르크멘 주는 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의 투르크멘 자치주[10]와 합쳐져, 1925년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편되었고 이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신이 된다. 1925년 당시 투르크멘 SSR. 스탈린 시기에 문자가 두 차례에 걸쳐서 바뀌는 등의 변화를 겪었고, 농업 집산화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되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잠잠해졌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독립하였다.

7. 현대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하였으나 독립 이후 2006년까지는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독재를 자행했고, 니야조프가 사망한 2006년부터 2022년까지는 니야조프 정권의 2인자였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독재를 이어나갔는데, 둘 다 독재자로서 온갖 우스꽝스러운 기행들을 저지르며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다[11].

2022년 3월 19일 구르반굴리의 아들인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만 40세라는 어린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12] 대통령직의 부자 세습이 이뤄졌다.

8. 참고 문헌

  •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 타밈 안사리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르네 그루세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 The Cambridge History of India / E.J. Rapson (고대사 부분)
  •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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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하수로 계속 농사를 짓다보면 지하수에 섞여있는 소금이 계속 밭 표면에 눌러붙는데, 건조지대에서는 하늘에서 비가 안 내려서 염류가 안 씻겨내려가는 바람에 결국 수백수천년 농사를 짓다보면 토양이 염전 비슷하게 변해서 농사를 못 짓는 척박한 땅이 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2] 사료의 부족 때문에 확실한 증거 정황은 남지 않았지만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은 수백년 이후 등장한 무슬림 철학자들인 알 파라비 이븐 시나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3] 급진적인 공산주의와 성개방 사상을 가지고 있던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 마즈다크교를 용인하고 마즈다크교로 개종했다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한테 찍혔었다. [4] 하룬 알 라시드 시대까지 대대로 압바스 칼리프조의 재상을 배출했던 바르마크 가문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이전 아프가니스탄 발흐의 불교 가문으로 소그드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5] 일전의 술탄 마흐무드의 약탈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던 상태였다. [6] 아부 자파르라고도 불리며 시아파 신도들은 특별히 셰이크 투시라고도 부른다. [7] 이 때문에 알 가잘리를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의 시조로 보는 경우도 있긴 한데, 알 가잘리는 지역사회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고, 정작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알 가잘리가 수피즘에 심취했었다는 이유로 그를 고의로 무시하는 편이다. [8] 이스마일 1세를 비롯한 사파비 왕족들은 자신들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직계 후손으로서 일리와 후세인의 복수를 위해 모든 순니파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사파비 왕조의 왕족들은 정기적으로 이슬람 초창기 4명의 칼리파 중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이븐 아판)을 참칭자라며 저주하는 예배를 근행했으며, 키질바시들은 활쏘기를 연습할 때 “이 화살이 우마르의 심장에 꽂히기를”이라는 말을 구호로 외쳤다 한다. [9] 1902년 히바 칸국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 인구 조사 결과 인구가 겨우 70만여 명 수준으로 나왔다. [10] 오늘날의 다쇼구즈(Daşoguz, 당시 러시아어로 타샤우스·Ташауз)와 튀르크메나바트(Türkmenabat, 당시 러시아어로 차르주이·Чарджуй)가 위치하는 투르크멘 자치주( 1· 2)이다. [11] 특히 니야조프는 북한과 맞먹는 수준으로 자신을 우상화하며 '루흐나마'라는 경전을 손수 집필하고는(심지어 2007년에는 아예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기까지 했다.) 이를 전국민들에게 필수 과목으로 강요한 것으로 유명하다. [12] 참고로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이 만 39세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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