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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9b9b9><colcolor=#222> 이븐 시나(아비세나) Ibn Sina | Avicenna | ابن سین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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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أبُو عَلِي الحُسَينْ بِنْ عَبْدْ الله بِنْ الحَسَّنْ بِنْ عَلِي بِنْ سِينَا |
출생 | 980년 |
사만 토후국 트란스옥시아나 아프샤나 | |
사망 | 1037년 12월 22일 |
카쿠이 토후국 하마단 | |
직업 | 철학자, 의학자, 약사, 시인, 외교관 |
분야 | 의학, 아로마테라피, 철학, 논리, 신학, 과학, 문학 |
성향 |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종교 | 이슬람 ( 시아파 이스마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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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저명한 페르시아인 철학자이자 의학자, 약사, 시인, 외교관. 풀네임은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푸르 시나(پور سینا)'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 '아비켄나스(Αβικέννας)', 라틴어로 '아비켄나(Avicenna, 또는 아비센나)'라고 한다.후술할 업적들로 인해 지금도 그의 주 활동무대였던 이란에서는 학자의 대명사로 남아있으며[1] 중세사에 한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대학자로 평가된다.[2]
2. 생애
트란스옥시아나의 타지크계 순니파 왕조인 사만 왕조 땅에서 태어나 그 영역인 부하라와 구르간즈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사만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데일람계 시아파 왕조인 부와이 왕조 치하의 이란 서부로 이주하여 하메단, 레이, 에스파한 등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11세에 이미 쿠란 정본과 아랍 고전을 섭렵했으며, 그 이후에는 법학, 철학, 자연과학, 논리학, 기하학, 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어려움을 느낀 유일한 학문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었는데, 결국 20세가 되기 전에 40회나 정독했다고 한다.[3] 우연히 어느 오후에 책 장터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책을 팔려고 하기에 안 사려고 하던 찰나, 그 사람이 "이 책 주인이 돈이 당장 필요하고 단돈 3 디르함[4]에 팔 테니 사라"고 하여 샀다고 한다.[5] 하필 그 책이 당대의 철학자 알 파라비(al-Farabi)의 각주가 달린 책이었는데,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책에 대한 것임을 알고 기뻐하며 집에 가서 순식간에 읽고 나서 형이상학을 이해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자 너무 기뻐 거리에 나가서 춤을 췄다는 일화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주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어렸을 적부터 천재로 유명했는데 사람들이 10살 때 이븐 시나를 셰이크(장로)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통 이슬람권에서 셰이크는 못해도 40대가 넘은 사람에게 붙는 존칭인데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대를 받았는지 알만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성공한 학자가 되었지만 대신 성격이 매우 거만했다고 한다.
흠이라면 거만한 성격 외에도 학구열 역시 엄청나서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매진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다가 일찍 죽은 것은 아니다. 이븐 시나가 이란의 시아파 부와이 왕조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정착해서 잘 먹고 잘 사려는 찰나 술탄 마흐무드의 가즈니 왕조 군대가 부와이 왕조의 영토 각지를 침공해서 박살내기 시작했고, 이븐 시나는 자신이 이스마일파 신도이기 때문에 가즈니 왕조 군대에게 사로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이곳저곳 피난을 다녀야 했다. 그는 계속 피난을 다니는 와중에도 공무와 학문활동을 동시에 수행하였고, 공무가 끝나면 제자들과 함께 논문을 쓰다가 결국 과로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븐 시나에 대해 논평한 서구 학자들은 이븐 시나의 생애 말 그가 부와이 왕들의 눈치를 보고 마흐무드를 피해 피난을 다니면서 20여 편의 논문과 주요 저서들(《치유의 서》, 《구원의 서》, 《지시의 충고의 서》)을 저술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3. 업적
그의 업적 중 하나는 당대 의학 지식과 교육 방법을 총망라한 "의학전범(The Canon of Medicine)[7]" 의 편찬이며 이를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명료하게 저술했다. 비교하자면 그의 선배 알 라지는 20권에 달하는 의서를 남겼으나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웠다 보니 알 라지의 책 중에서 홍역과 천연두를 다룬 책만 널리 보급되고 나머지는 제대로 해석이 되지 못했는데, 이븐 시나가 이를 참고한 듯 하다.의학전범은 출간 직후부터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아랍어로 쓰인 원문은 얼마 안 가 페르시아어 등등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서기 12세기에는 인도의 힌두교도들도 이 책을 읽게 되었으며 1180년에는 라틴어로도 번역되어 유럽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기 14세기 중국의 원나라 때에는 한문으로도 편찬됐다. 이후 유럽 쪽 연금술사이자 철학자이자 의사인 파라켈수스(1494~1541)는 이 책을 칭송하면서 5백 년 전 무슬림 페르시아인[8]이 쓴 이 책에 대해 이교도라며 까면서도 유럽 기독교인은 500년이나 지났는데도 왜 아직 이슬람 의사들의 지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거냐면서 한탄했다. 이 외에도 외과 의사로서의 능력도 상당했으며 정신의학에도 매우 용했다고 한다. 어느 왕자가 상사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엄격한 아버지인 술탄에게 차마 말하지도 못한 걸 단지 말만 듣고도 간파하여 술탄에게 건의하여 살린 적도 있다.
다만, 이븐 시나의 의학적 업적은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히포크라테스의 4액체설에 근거하여 피를 뽑아 채액의 균형을 맞추는 방혈 치료 같은 비과학적인 치료법을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여겼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했기에, 모두 당연한 듯이 믿고 있는 진이나 이프리트, 마리드 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시아파, 그중에서도 이스마일파 같은 과격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늘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좀 심각한 천재였던 탓에 법학, 철학, 자연과학, 논리학, 기하학, 의학, 형이상학, 천문학에 통달했고[9], 잡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의 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스콜라 학파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에서도 괴물 같은 천재로 유명했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으로 오길 권하는 유럽인 지인까지 있었다.
의학, 철학, 신학, 기하학, 천문학 등에 관한 21개의 정본과 24개의 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아랍에선 지금도 천재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영혼과 신체가 별개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철학자 치고는 특이한 것이다.
단테의 《 신곡》 지옥편 중 림보에서 키케로, 프톨레마이오스, 히포크라테스 같은 사람들과 함께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븐 시나를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들에게서 떨어져 외로이 있는 살라딘도 있다. 그래도, 신곡에 나온 비기독교인들이 가는 지옥 묘사에서는 이교도라고 해도 공로가 너무나도 훌륭해 고통스러운 지옥에 가지 않은 셈이다.
다만 이븐 시나가 서술한 276종의 서적 가운데 대다수는 여러 전란을 걸쳐 소실되었고 현재는 68종이 남아있다고 한다.
4. 여담
타지키스탄에서 이븐 시나를 자국의 위인으로 널리 홍보하고 있는데, 원래 이란인과 타지키스탄인은 언어민족적으로 동질적이지만 근현대에 구분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많은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자국의 고산인 레닌 봉을 이븐 시나 봉으로 개명했으며, 20소모니 지폐에도 도안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이븐 시나를 자국의 위인으로 간주하는것은 매한가지이기는 하다.
[1]
이란에서는 부모가 아이들 공부에 관해 이야기할때 이븐 시나를 언급할 정도고 대학입시같은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에는 이븐시나의 초상화나 관련 조형물에 기도를 하는 모습이 있을정도다.
[2]
실제로 이븐 시나의 성향은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하는데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 계승자라 봐도 무방하다.
[3]
이 말은 이븐 시나가 형이상학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제일철학 또는 '신학'이라고 불렸는데 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종교적 관심에서 읽은 것이었다. 즉 이븐 시나가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책에 가진 선입관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4]
당시 화폐로 1 디르함은 대략 순은 3g에 해당되었다. 오늘날 국제 은 시세로 봐도 5천 원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다.
[5]
다만, 이 당시의
은은 현대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으므로, 진짜 5천 원에 사왔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디르함의 어원인 아테네의
드라크마화가 순은 4.3그램 정도로 일꾼의 1~2일치 임금이었음을 생각한다면 3 디르함은 대충 일꾼의 이삼 일치 임금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정확하게 현대의 구매력으로 환산하기는 힘들고, 대강 느낌만 잡아 본다면 '단돈 10만 원에 넘겨줄 테니 사라!' 정도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따지면 당시의 책은 굉장한 고가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테니... 현대인 기준으로 보면 명품 시계나 중고 자동차 같은 걸 '주인이 너무 돈이 급해서 그러니, 딱 10만 원만 주고 가져가라!'고 한 것이라고 보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그때 갑자기 돈이 급했던 걸까
[6]
요셉 피퍼Josef Pieper, 김진태 옮김,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 150-154쪽
[7]
한국에서는 의학규범이나 의학전서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책은 1273년에 의경(醫經)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그 처방 가운데 일부가 다시 '회회약방(回回藥方)'이라는 제목으로 편집되기도 했다.
[8]
이란인들을 '
아랍인'이라 칭하는 것은 이란인들에겐 큰 실례 중의 하나다. 현대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믿지만 아랍인이 아닌
페르시아인이다.
[9]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18세에 이미 당대의 학문을 모두 통달했다고 자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