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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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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파일:마라게 이란 천문대.jpg
일 칸국 시기의 천문대와 당시 유구를 보존하기 위한 돔

1. 개요2. 역사
2.1. 중세
2.1.1. 아흐마딜 (아타베그) 왕조2.1.2. 일 칸국의 수도
2.2. 근대
3. 기타4. 갤러리

1. 개요

페르시아어 مراغه
아제리어 ماراغا
영어 Maragheh

이란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 주의 도시. 마라가, 마라그 등으로도 표기된다. 타브리즈에서 남쪽으로 60km, 미나도압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우르미아호 동안의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8만명으로, 대부분 아제리인이다. 남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로, 13세기 일 칸국의 수도로써 번영하였다. 특히 당시 서쪽 언덕 위에 세워진 나시룻딘 앗투시의 천문대 유적이 유명하다. 수피강의 동안에 형성된 구도심에는 셀주크 제국 ~ 일칸국 시기 유적이 즐비하며, 일칸국 박물관도 있다. 구도심의 옛 건물 중에는 곤바데 소르크, 곤바데 카부드, 가파리예 돔 등의 기념 구조물과 옛 하맘, 모스크, 바자르, 저택 등의 대형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마라게는 이란 제2의 카펫 생산지이고, 전통 기법으로 제작하는 마라게 비누 역시 특산물이다. 농업 역시 발달하여 매년 건포도를 대표로 하는 24만 톤의 과일을 생산한다.

중세 시기 학문의 중심이었던 전통이 이어진 마라게는 현재까지도 인구 규모에 걸맞지 않게 대학이 많다. 시가지 동쪽에는 마라게 대학교, 동남쪽 외곽에는 마라게 의대 및 파야메누르 대학교 마라게 캠퍼스, 서남쪽 외곽에는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마라게 캠퍼스가 있다. 그외에 남쪽 5km 지점의 바하비에는 미트라교 사원 유적이 있고, 그보다 더 남쪽에는 산업단지가 있으며 서남쪽 7km 지점에는 사한드 공항이 있다. 도시 북쪽에 솟아 있는 해발 3707m의 사한드 산은 마라게의 영산으로, 공항 이름도 그에서 따온 것이다. 국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사한드 산의 기슭에는 (간혹 염분이 포함된) 광천수가 솟아나는 온천이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들 덕분에 마라게는 이란 내륙에서는 드물게 기후가 습한 편이고, 토양이 비옥하다. 도시 자체도 해발 15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겨울에는 영하 15도까지 떨어진다. 다만 분지라 여름에는 35도를 넘긴다.

2. 역사

고대 아트로파테네 왕국의 겨울 수도인 프라사 (프라타)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수차례 전장이 되었던 곳으로, 사산 제국기 지명인 아프라-루드 혹은 아프라자-루드 역시 그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된다. 642년 이슬람 정복 시기 일대는 다른 아제르바이잔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부 압둘라 알-무기라에 의해 정복되었다. 8세기 들어 지명은 마라게로 변하였는데, 그에 대한 설은 여럿 있다. 기병 중심 군대의 숙영지로 쓰여 아랍어로 '뒹굴다'는 의미인 마라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사산 제국기에 수용된 네스토리우스파의 주교 마라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인근 우르미아 호의 라틴식 지명인 마르키아나가 와전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다만 확실한 점은 지속적으로 도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2.1. 중세

우마이야 왕조 말엽인 740년, 당시 아르메니아 총독이던 마르완 2세가 무간[1] 길란에 대한 원정에 나서며 마라게에 주둔하였다. 당시 일부 건축이 이루어지며 본격적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어진 8세기 중반, 아즈드[2]계 아랍 부족인 바누 라와드가 타브리즈와 마라게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후 반세기 간의 통혼으로 현지 쿠르드인들과 동화된 라와드 부족은 명목상으로는 압바스 왕조의 아제르바이잔 총독 휘하에 있었지만, 완전한 자치를 누리며 일대를 지배하였다. 804년경 당시 타브리즈 태수이던 와즈나 빈 라와드의 반란을 진압한 아제르바이잔 총독 쿠자이마 빈 카짐은 마라게에 성벽을 두르고 수비대를 배치하여 라와드 부족을 견제할 거점으로 삼았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중앙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마라게를 자신의 딸들에게 하사하였다. 하룬의 왕비 주베이다 역시 타브리즈를 재건하는 등 왕가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얼마후 마라게는 파괴를 겪었으나, 817년 호람딘 반란 때에 인근 주민들이 피신해오자 칼리파 알 마문은 그들을 정착시키고 성벽을 재건하였다. 호람딘의 난은 20년 이상 이어졌고, 마라게는 아르다빌과 함께 진압군 사령관 하이다르 알-아프신의 월동지로 활용되었다. 9세기 중엽부터 마라게는 아제르바이잔 주의 치소로 기능하였다. 9세기 말엽 아제르바이잔 총독이던 무함마드 이븐 아빌사즈가 자립하자, 함단 왕조의 친척인 압둘라 빈 하산이 마라게를 장악하고 그에 맞섰다. 893년 무함마드는 압둘라에게 안전을 약속하며 항복을 종용하였고, 이에 그가 응하자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후 마라게는 무함마드가 세운 사즈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다만 무함마드 본인은 주로 무간 지역의 베르데에 머물렀다. 901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들 데바드가 계승하였는데, 불과 5달 후 숙부인 유수프 이븐 아빌사즈가 거병하여 조카를 폐위하고 에미르에 올랐다.

정변 도중 유수프는 전임자의 거점이던 마라게의 성벽을 파괴하고 아르다빌을 수도로 삼았다. 다만 이후로도 마라게는 주요 도시로 남았고, 디르함 은화 주조소가 있었다. 928년 유수프의 사후 즉위한 조카 아불 무사피르 알-파스는 이듬해 마라게에서 피살당하며 사즈 왕조는 멸망하였고, 재차 칼리파의 직접 지배가 회복되었지만 압바스 왕조 역시 곧 급격히 쇠퇴하자 938년 쿠르드계 장군 다이산 빈 이브라힘이 아제르바이잔을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그 또한 942년 다일람계인 살라르 왕조의 마르주반 빈 무함마드에게 축출되었고, 948년에는 부와이 왕조가 점령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950년경 살라르 조가 일대를 회복한 후에야 안정이 회복되었으나 983년 이브라힘 빈 마르주반이 사망한 후, 본래 살라르 조에 복속해 있던 라와드 부족이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석권하였다. 반세기 가량 이어진 라와드 왕조 하에서 마라게는 타브리즈와 함께 그 양대 수도 중 하나였다.

라와드 왕조의 지배 하에서 마라게는 반세기 가량 안정을 누렸다. 하지만 1030년대 가즈나 제국 셀주크 제국에서 축출된 이라키야를 위시로 한 오우즈 튀르크 부족들이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1039년 마라게를 함락, 모스크가 파괴되고 많은 주민들을 살상하였다. 비록 에미르 아부 만수르 바수단이 결국 이라키야를 격퇴해내긴 했지만, 이미 국력이 약화된 라와드 왕조는 1054년 셀주크 제국에 복속하였고 1071년에는 결국 그에 병합되었다. 1104년 셀주크 술탄위를 두고 내전을 벌이던 바르키야루크 무함마드 타파르 형제는 마라게에서 모여 평화 협정을 맺었다. 다만 이듬해 바르키야루크가 요절하자 무함마드는 형과의 협정 장소인 마라게를 찾아 한동안 머무른 후 단독 술탄에 올랐다. 한편 바수단의 손자 아흐마딜은 1111년 모술 태수 마우두드의 시리아 원정에 참가, 투르베셀 (텔 바시르) 포위와 샤이자르 전투에 종군하였다.[3]

2.1.1. 아흐마딜 (아타베그) 왕조

셀주크 조에 대한 헌신의 대가로 1112년 아흐마딜은 가문의 고토인 마라게의 영주로 봉해졌다. 1116년 5월 아흐마딜이 사망하자 그의 노예 출신 장군 아크 순쿠르가 계승하였고, 비록 1122년 셀주크 왕공 토그릴 빈 무함마드의 반란을 도왔다가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해임되었으나 이듬해 마라게의 에미르로 재임명되었다. 이로써 마라게의 '아타베그' 정권은 사실상 자립하였고, 아크 순쿠르부터 세습된 마라게의 에미르들은 비록 아흐마딜의 혈통은 아니었지만 정통성 측면에서 그를 기리며 아흐마딜리라 불린다. 1150년 술탄 마수드는 아크 순쿠르의 후계자인 아르슬란 아바와 다른 호족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마라게를 포위했으나 곧 협상이 타결되어 철수하였다. 1174년에는 셀주크 제국의 섭정인 엘디귀즈 왕조의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이, 1205년에는 그의 아들인 누스라트 앗딘 아부 바크르가 마라게를 포위했으나 역시 함락하지 못하고 휴전을 맺었다.

1209년 마라게에서는 아르슬란 아바 2세의 딸인 술라파 하툰이 집권하였다. 그녀는 엘디귀즈 조의 무자파르 앗딘 우즈베크[4]와 결혼하였다는데, 1220년 말엽 제베 수부타이 몽골 제국군이 캅카스를 침공하자 우즈베크는 나흐츠반으로 도주하였다. 1221년 봄, 마라게를 포위한 몽골군은 4월 30일 함락한 후 도시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살상하였다. 다만 술라파 하툰이 농성하던 인근 루인디즈 성채를 함락하지 못한 몽골군은 곧 철수하였다. 우즈베크는 몽골에 이어 몽골에 깨진 호라즘 제국에 연속으로 복속하는 추태를 보였다. 1225년 5월, 호라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조지아 왕국에 시달리던 마라게 주민들의 요청으로 도시를 장악하였다. 우즈베크는 간자로 도주하였고, 잘랄 웃딘은 위증 자료로 술라파 하툰을 이혼시킨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비록 아흐마딜 왕조는 멸망했지만 잘랄 웃딘은 새 아내에게 코이, 살마스, 우르미아 우르미아 호 서안 일대를 영지로 내어주었다.[5]

2.1.2. 일 칸국의 수도

아흐마딜 왕조를 멸한 호라즘 제국 역시 몽골의 압박을 받던 상태라 오래가지 못하였다. 잘랄 웃딘은 마라게의 번영을 되살리려 했으나 1230년 야스체멘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듬해 초르마간의 몽골군이 다가오자 도주 중 피살되었다. 이후 디야르바크르와 아제르바이잔의 도시들이 전부 항복하며 마라게는 몽골령이 되었다.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한 훌라구 칸은 아제르바이잔으로 회군하며 마라게에 궁정을 두었고, 마라게는 점차 형성되어 가던 일 칸국의 수도가 되었다.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던 훌라구 칸은 당대의 석학 나시룻딘 투시에게 천문대 건립을 명하였다. 몽골 황실의 후원 하에 마라게에는 여러 학자와 서적들이 모여들었고, 한때 마라게 천문대 부속 도서관에는 무려 40만권의 과학서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1265년 훌라구 칸이 사망한 후 수도는 타브리즈로 이전되었으나 마라게 천문대는 와크프 (종교 재단)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고, 1304년 올제이투 칸은 나시룻딘 투시의 아들을 천문대의 새 관장으로 봉하였다. 1312년 올제이투 칸은 맘루크 왕조령 알레포의 지휘관을 지내다 망명한 카라 순쿠르를 마라게 총독으로 봉하였고, 그는 1328년 사망시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1306년에는 수피 시인 아우하디 마라가이가 도시에 정착하여 1338년 4월 사망시까지 머물렀다. 1328년 마라게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도시의 번영에 감탄하여 '작은 다마스쿠스'라 묘사하였다. 수도 지위를 잃은 후에도 마라게는 투만 (몽골의 주) 중 하나의 치소로써 번영하였다. 잘라이르 왕조 티무르 제국의 궁정 음악가로 활동한 압델카디르 마라기 역시 이곳 출신이다. 다만 일칸국의 멸망 후 도래한 혼란기를 거치며 마라게는 점차 쇠퇴하였고, 상징적인 천문대 역시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2.2. 근대

17세기 초엽 사파비 제국 아바스 1세는 마라게 천문대의 복원을 명하였다. 다만 이는 얼마후 샤가 사망하며 무산되었다. 한편 14세기까지만 해도 마라게의 주민들은 대부분 '아랍식' 팔레비어를 구사하였고, 17세기 도시를 방문한 오스만 제국의 여행가 에울리야 첼레비는 역시 대부분 페르시아어를 구사한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18-19세기 아제리 튀르크계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달라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다르 튀르크어를 구사한다. 카자르 왕조기 마라게는 캅카스 출신의 모캇담 가문이 5대에 이어 통치하였고, 중앙 정부로부터 자치를 유지하였다.

19세기 후반 마라게에는 이란의 첫 근대적인 무기 공장이 세워졌고, 1921년 정식으로 도시가 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22년,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쿠르드 군벌 쉬모 시카크가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축출되었다. 그리고 1925년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샤 팔라비 1세는 중앙집권화의 일환으로 모캇담 가문을 축출하였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등지에 남아있다.

3. 기타

마라게 출신 인물의 호칭은 '마라게이'이다.

4.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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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스강 하류 지역.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핵심 지역이었으나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아닌 이란 서북부를 지칭하는 지명이었음 [2] 본래 마리브 일대에 거주하던 남부 아랍인 [3] 투르베셀 포위 도중 (크게 의욕이 없던) 아흐마딜은 성주 조슬랭과 비밀 동맹을 맞고 에데사 대신 알레포 공격을 주장하여 마우두드는 결국 포위를 풀고 샤이자르로 남하하였다 [4] 아부 바크르의 동생이 [5] 이 소식을 들은 우즈베크는 충격을 받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