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9 02:10:27

바르키야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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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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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제5대 술탄
바르키야루크
برکیارق
파일:a-BarkiyaruqPainting.jpg
본명 루큰 알 딘 아부 알 무자파르 바르키야루크 이븐 말리크샤
ابو المظفر رکن الدین برکیارق بن ملکشاه
출생 1079년/ 1080년
페르시아 이스파한
사망 1105년 (향년 25 ~ 26세)
페르시아 보루제르드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094년 ~ 11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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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부모 아버지 말리크샤 1세
어머니 주바이다 카툰
아들 말리크샤 2세 }}}}}}}}}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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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5대 술탄. 본명은 루큰 알딘 아부 알 무자파르 바르키야루크 빈 말리크샤다. 중간의 바르키야루크란 튀르크어 베르키아루크(Berkyaruk)를 아랍어로 적은 것인데, 그 의미는 '강렬하게 빛나는 이'다. 1092년부터 1105년까지 셀주크 제국의 술탄을 역임했으나 수많은 반란에 시달려 정상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다.

2. 생애

1079년 또는 1080년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에서 셀주크 3대 술탄 말리크샤 1세와 말리크샤 1세의 사촌인 주바이다 카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말리크샤 1세가 생전에 낳은 자식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기에 재상 니잠 알 물크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말리크샤 1세가 후처로 맞이한 튀르켄 카툰이 자신이 낳은 자식을 차기 술탄으로 옹립하고자 남편을 설득하면서 상황이 뒤바뀌었다. 말리크샤 1세는 아내의 설득에 따라 가장 사랑하는 아들 다우드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이에 니잠 알 물크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어린 아이를 술탄으로 세운다면 여자의 잘못된 조언과 환관의 속삭임에 휘둘릴 공산이 크며, 제국의 안위가 위태로워진다고 직언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다우드가 1082년에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 6년 후에 마흐무드가 태어나자, 말리크샤 1세는 즉시 마흐무드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니잠 알 물크는 이번에도 반대했지만, 말리크샤 1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투르켄 카툰은 그런 니잠을 정적으로 인식하고 말리크샤에게 수시로 니잠을 헐뜯었다. 그러던 1092년 10월 14일, 니잠 알 물크가 암살당했다. 암살자는 니잠을 살해한 직후 경비병에게 사살되었기에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세간에서는 튀르켄 카툰이 눈엣가시같았던 그를 암살하라고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해 11월 말리크샤 1세가 바그다드에 방문하여 칼리파 알 무크타디를 폐위시키려 했다가 돌연 암살당했다.

튀르켄 카툰은 남편의 죽음을 잠시 숨긴 뒤 에미르들을 매수한 후 아들 마흐무드 1세를 새 술탄으로 옹립했다. 그 후 튀르켄 카툰은 군대에게 막대한 하사금을 내려서 충성심을 확보한 뒤 에미르 카르부가에게 이스파한에 있는 바르키야루크를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니잠 알 물크의 추종자들과 이란을 다스리던 관료들은 말리크샤 1세의 장남인 바르키야루크야말로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카르부가를 막아낸 뒤 레이에서 당시 13세였던 바르키야루크를 새 술탄에 옹립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1093년 1월 이스파한과 카라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르키야루크의 군대가 승리한 뒤 마흐무드 1세의 지지자 중 다수가 바르키야루크에게 넘어가면서 급격히 기울었다.

튀르켄은 바르키야루크를 술탄으로 인정할 테니 마흐무드가 이크타(Iqta: 봉토)를 얻고 그곳의 수입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바르키야루크 측이 협상에 응하면서 내전이 끝나는 듯했지만, 튀르켄은 적의 공세가 중단된 틈을 타 아제르바이잔의 통치자이자 비르키야루크의 삼촌인 쿠트비우딘 이스마일 이븐 야쿠티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그와 결혼할 것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술탄으로 세우겠다고 제안했다. 쿠트비우딘은 이를 받아들여 바르키야루크 측을 공격했지만 1094년 카라지 인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비르키야루크 측 인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쿠트비우딘은 여동생 주바이다를 통해 비르키야루크에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비르키야루크는 삼촌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튀르켄은 추격병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뒤 또다른 셀주크 왕자이며 아르군과 다마스쿠스의 지배자인 투투쉬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1094년 9월 사와이에서 사망했다. 한편 마흐무드는 아스파한에서 바르키야루크 측 병사들에게 연금되어 있다가 그 해 10월 19일에 사망했다. 천연두로 사망했다는 설과 바르키야루크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는 설이 병립하나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그리하여 술탄으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만, 얼마 안가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서부 이란 일대를 장악하고 레이 시를 공략한 삼촌 투투쉬의 위협에 직면했다. 양측은 수년간 격전을 벌이다 1095년 2월 25일 투투쉬가 레이 시 인근에서 바르키야루크의 군대에 살해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투투쉬를 꺾으면서 서부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권위를 돈독히 하고 아바스 왕조 칼리파 알 무스타지르에게 인정받았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수많은 군웅이 술탄의 권위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말리크샤 1세의 동생 아르슬란 아르군이 니샤푸르 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라산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국을 세우려 하자, 바르키야루크는 1095년 삼촌 보리 바르스 이븐 알프 아르슬란에게 군대를 맡겨 아르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보리 바르스는 참패를 면치 못하고 체포된 후 살해당했다. 1097년, 바르키야루크는 이복형제 아흐마드 산자르를 호라산에 재차 파견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아르군이 신하들을 잔혹하게 다루다가 한 신하에게 살해당한 후 세력이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5년에 걸친 술탄위 투쟁을 마무리한 뒤,바르키야루크는 영지를 다시 분배했다. 산자르를 호라산의 대리 통치자로 삼고 군대 지휘관과 재상을 제공했다. 또한 호라산에는 아흐마드 산자르를 보냈고, 무함마드 타파르를 간자 지방 영주로 임명했다. 시리아에는 투투쉬의 아들들이 지배하게 놔두었고, 아나톨리아에서 룸 술탄국을 세우고 독자적인 행보를 밟고 있는 클르츠 아르슬란 1세를 특별히 내버려뒀다. 그리고 카라한 칸국의 술라이만 텡그리와 마흐무드 탱그리를 트란스옥시아나의 대리 통치자로 인정했으며, 호라즘의 통치자로 쿠트 아드딘 무함마드를 선임했다. 그러나 그가 동방에 세운 통치자들은 그가 서쪽으로 돌아가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니샤푸르 시에서 주조된 동전에는 그의 이름이 제외되었다.

1097년 십자군이 시리아에 도래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를 수개월간 포위 공략한 끝에 공략하고 마라트 알 누만을 파괴했다. 당시 반란을 수습하기에도 바빴던 바르키야루크는 십자군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고 독립해버린 토후들을 돕기 위해 달려올 생각도 없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형제이자 간자의 영주인 무함마드 타파르의 반란이었다. 1098년 또는 1099년, 지난날 투투쉬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 무아위드 알 물크는 바르키야루크에게 해임된 뒤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귀순한 뒤 재상에 선임되었다. 무함마드는 무야위드 알 물크의 설득을 받아들여 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호라산의 아흐마드 산자르도 호응하면서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al-Sulṭān al-Mu'aẓẓam(우월한 술탄)라는 칭호를 바쳤다. 또한 자지라와 이라크의 공국들도 타파르에게 귀순했으며, 바그다드는 바르키야루크와 무함마드 1세 지지자들간의 투쟁으로 인해 8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이 떨어졌던 무함마드 타파르는 다수의 신하들이 배신한 상황에서도 이란에서 분전하는 바르키야루크에게 연이어 패배했고 전세는 바르키야루크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그러나 바르키야루크 역시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한 뒤 병사들의 경작지로 사용해 그들의 원성을 샀으며, 오랜 세월 배척당하던 시아파를 군대에 배속시켰다가 시아파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1104년, 전쟁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던 바르키야루크는 무함마드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와 타협했다. 무함마드 타파르는 디야르바키르, 아제르바이잔, 알 자지라 지역에서 술탄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릴수 있게 되었으며, 아흐마드 산자르는 호라산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바르키야루크는 이스파한을 포함한 이란 일대와 바그다드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1105년, 바르키야루크는 이스파한으로 가던 중 보루제르드에서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 이스파한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루제르드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후 어린 아들 말리크샤 2세가 계승했지만, 얼마 안가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제거되고 그의 영토는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넘어갔다.

3. 평가

당대의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대다수는 그가 경험 없는 지도자인데다 알코올 중독자라고 적었다. 게다가 시아파라는 음해까지 당했다. 시아파라는 공격은 그와 인연이 특히 깊다. 테르켄 하툰과 싸울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이 공격은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칼리프도 이에 대해 비난을 보냈다.

이 비난은 그가 재정 문제로 인해 이스마일파를 군대에 편입시킨 뒤에 더 늘었다. 다만 그의 재상도 그런 오해를 받은 점을 보면 아무래도 당대의 주요한 공격 수단[1]이였던 듯 싶다. 어쨋든 실제로 그가 시아파였다거나, 시아파에 동정적이였다는 증거는 없다.

또, 그는 평생 아버지와 비교당했다. 모두가 그를 아버지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 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도 나올만 한게, 바르키야루크의 지배 영역은 이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토는 사실상 할아버지인 알프 아르슬란 시절의 영토다.

다만 말리크샤 1세 역시 17살에 술탄이 되었으나, 35살이 돼서야 우리가 아는 셀주크 제국의 영토 대부분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았음을 생각하면 이 평가도 너무 박한듯 하다. 죽기 직전에 그는 무함마드 타파르보다 일단은 유리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는 25년간의 생애 중 절반을 전쟁으로 보냈다. 그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렸고, 몇 번인가는 암살자들에 의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고, 결국 병마가 그를 삼켜버렸다.

[1] 예) 너 좌빨이지?! or 너 수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