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7:26

혁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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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사의 시대 구분의 일종으로,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혁명은 자유민주주의, 시민 내셔널리즘[2], 입헌주의, 반군주주의적 공화주의에 기반한 신생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역사

영국이 당시 식민지 주민들이 즐겨마시던 차에 세금을 붙이려고 하자 1773년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이 동인도 회사 소유의 차를 바다에 집어던지는 사태가 터졌다. 당시 영국에서는 동양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동인도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있었는데, 만일 동인도 회사가 파산하게 될 경우 주주들은 물론 잉글랜드 은행, 나아가 영국 정부에 막대한 손해를 주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동인도 회사가 남아 돌아가는 차를 아메리카에 독점적으로 팔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었다. 1773년 12월 보스턴 시민들은 이들 배를 영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지사에게 요구했으며, 그 날 밤 자유의 아들들(Son of Liberty)에 속한 150명의 급진파들은 모호크족으로 가장하고 배에 올라 차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당연히 이에 분노한 영국은 매사추세츠 식민지 자치정부를 폐지하고 보스턴 항을 보스턴 항구법을 제정하면서 폐쇄하는 등 초강경 자세로 나간다. 이에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대륙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는데 [3] 이미 뉴잉글랜드 일대에서는 현지 민병대의 소요 사태를 억누르기 위해 주둔한 영국군과 자위권을 주장하며 무장한 민병대 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서 민병대가 덜컥 영국군을 상대로 이겨버리자 화가 난 영국은 말 안 듣는 식민지 놈들한테 혼쭐을 내주기 위해 약 4만여 명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또한 1775년 6월 영국군은 찰스타운 반도의 벙커힐에서 매사추세츠 민병대를 공격했다. 벙커힐 전투는 1775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약 2일간 지속되었는데,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미국 민병대쪽보다 더 많이 전사했는데, 미국 민병대측은 100명이 전사한 반면에 영국군은 220명이 전사했다. 즉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사상자 측면에서는 미국측 보다 피해가 더 컸다. 그러나 민병대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에게 애국심을 자극하기에는 성공적이었다.

결국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식민지의 주된 여론은 ' 국왕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우리들의 권리를 지키자'는 수준에서 머물고 아예 영국과 관계를 끊고 독립하자는 여론은 주류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게 되었다.[4] 결국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오합지졸 민병대를 박박 긁어모은 대륙군으로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이 식민지를 응징하기 위해 각잡고 파견한 정예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여기에 여러 실책까지 겹쳐 대륙군은 연전연패하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으나 행운의 여신의 도움[5]과 끝장에 몰린 워싱턴의 도박수가 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진다. 이에 프랑스, 스페인와 네덜란드 등이 영국군에 맞서 제법 선전하는 대륙군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가능성 있는 게임이라고 판단하여 대륙군 편을 들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결국 지지부지해진 전황에 막대한 전비 부담까지 가해지던 와중에 새러토가에서 대륙군이 대승리를 거두자 영국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자'는 기존의 전략에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전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 뜯어낼 수 있는건 최대한 뜯어내자'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1780년 5월 콘월리스 경이 지휘하는 영국군 대부대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요충지인 찰스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합중국군 5천 명이 고스란히 영국군 포로가 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합중국군이 입은 최대의 피해였다. 이어 8월에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합중국 원정대를 캠던에서 대파하고 샬럿, 윈스버로를 거쳐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나마 나다니엘 그린 장군이 이끄는 민병대의 눈부신 활약으로 영국군의 진격이 조금이나마 지체되었다. 아무튼 영국군은 1781년 8월 1일 체사피크 만 입구의 요크타운을 점령하여 이곳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곳만 지키고 있으면 강력한 영국 해군이 체사피크 만을 마음놓고 드나들면서 합중국의 심장부를 제압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마저 1781년 요크타운 전투의 패배로 실패하면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며 합중국을 건국하게 된다.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 있는 이유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을 구성한 주체가 바로 이 13개 식민지이기 때문. 참고로 최초로 미국 헌법을 승인하고 연방에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주로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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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는 Common Sense. [2] 다만 시대적 한계로 완전한 시민 내셔널리즘이 아닌 백인 자유민에 국한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 대륙회의에 참석한 뉴욕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같은 경우 '보스턴 놈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에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까지 휘말려야 함?'이러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 식민지들은 서로를 하나의 국가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존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Common Sense)'이 큰 역할을 했다. [5] 특히 워싱턴의 뉴욕 공략이 실패하고 오히려 영국군에게 쫓겨 롱아일랜드에 고립되었을 때 여러가지 행운이 기가 막히게 겹치면서 가까스로 본토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과장해서 신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담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