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3:52:29

감합무역

1. 개요2. 상세3. 명·일본 무역4. 명·조선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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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당시 조공국들과 명나라 사이에서 행해졌던 공무역(조공무역)[1]의 형태 중 하나를 뜻한다. 외교적 의례와 결합되었다. 조선· 여진 등과도 유사한 형태로 행해졌지만 보통 감합무역이라고 하면 명·일( 무로마치 막부) 간의 무역만을 의미한다. 감합무역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역 그 자체에서의 이익 추구라기보다는, 중국 측에서 교류가 굉장히 드문 편이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외교적 목적과 당시 해금 정책으로 성행하던 밀무역의 단속을 위해 정규 조공 사절단에게만 발급한 무역 허가증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 상세

본래 감합(勘合)은 '합해서 조사한다'라는 말이다. 당시 조공국의 사신이 명나라에 입항할 때 관리가 나와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확인했는데, 여기서 감합이라는 말이 나왔다. 감합은 상세 사항이 적힌 표찰로, 이를 반으로 쪼개 정해진 양만큼 조공국에 나누어 준 뒤 일일이 맞추어 확인함으로서 사용했다.

조공무역은 실질적인 종속의 의미보다는 중국의 부를 뿌리고 과시함으로서 주변국의 침략할 생각을 없애는 것이 주 목적에 가까웠다. 상인들은 물론 해적들까지도 이 막대한 이익과 흘러넘치는 경제적 이권에 눈이 돌아 조공 사절로 위장, 또는 사칭하여 몰려드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이런 문서를 통한 확인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감합은 조공을 바치는 각 나라마다 배부량이 정해져 있었고, 감합을 가져온 이들만 공식적인 사행에 참여해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갈 수 있었으며, 진위를 확인하여 상인이나 해적들의 조공 사칭을 방지할 수 있었다.

기록상 최초로 감합이 사용된 사례는 1383년 샴국(현 타이)에 발급한 것이다. 원래는 금속·상아·목재 등의 재료로 만든 표찰에 글씨를 새긴 뒤 양분하여 한쪽은 보관하고 한쪽은 상대방에 발급하는 형태였지만, 이후 문서화하여 세로 약 80cm, 가로 약 100cm의 원장이라는 책에 등록하고 계인과 일련 번호를 매긴 뒤 도장이 찍힌 부분을 절반으로 갈라 발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또, 연호나 황제가 바뀔 때마다 주변국에 새 감합을 보내고 옛 감합은 회수 또는 무효 처리를 하였다. 감합은 조공 횟수와 국가, 선박의 수 등을 고려하여 발부되었는데, 여기에는 선박·인원·화물의 수와 내왕기간·입항지·조공로 등이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3. 명·일본 무역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가장 유명한 감합무역의 사례로, 1401년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면서 명과의 교류를 시작한 아시카가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에게 계속 청원하여 1404년, 감합 무역을 허가 받는다. 그러나 전성기였던 요시미츠 시대의 종결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닝보의 난(1523)이 터지고야 말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혼란한 센고쿠 시대를 바탕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고, 대신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감합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 두 세력이 닝보에 입항한 뒤 서로의 배에 불을 지르는 등 싸우다가 결국 대규모 난으로 발전한 닝보의 난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건 와중 애꿎은 명나라 백성들과 관리들까지 살해당하면서 감합 무역에 치명타를 안긴다. 여기에다 명나라 황제의 인장까지 위조해 가면서 가짜 서류가 남발되었고, 결국 감합무역은 쇠퇴하다 16세기 중반 오우치 가문의 감합선이 1547년 파견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 무역의 맛을 본 일본인들은 가만있지 않았고, 마침 같은 불만을 가졌던 유목 민족 국가들과의 콜라보로 북로남왜라 불리는 혼란이 시작되었다. 북에는 오랑캐(15세기에는 오이라트 (토목보의 변), 16세기에는 알탄 칸을 위시로 한 몽골. 참고로 알탄 칸의 경우 1550년 베이징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른바 경술(庚戌)의 변. 일본 상인들과 해적들은 중국 해적들&해적으로 위장한 중국 상인들과 밀무역을 했고, 이 당시 유명했던 중국인 해적으로 쌍서도의 왕직이 있다.

이후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의 패권을 쥐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게 감합 무역을 재개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나, 다른 무리한 요구들 탓에 결렬되며 정유재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도요토미를 무너뜨리고 설립된 에도 막부 측에서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산킨코타이 제도와 함께 슈인선 등의 공식적인 해외 무역을 철저히 금지하였고,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도 명나라의 부활을 외치며 일어선 정씨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천계령을 선포하며 공식적인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은 완전히 끝을 맺는다.[2]

만약 동아시아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 감합무역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출제된다. 15의 법칙을 외우는 게 좋다. 15의 약수인 1, 3, 5, 15세기에만 일본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법칙.
세기 내용
1세기(57년) 일본 나노쿠니(奴国: 노국)가 후한 무제에 조공을 바치고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적힌 도장을 받아옴.
3세기(239년)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위(魏)나라에 조공을 바침.
5세기 왜5왕(倭五王)이 중국에 조공을 바침.<-여긴 시험 출제 안 된다. 굳이 외울 필요 없음.
15세기 무로마치 막부가 중국과 감합 무역을 함.

4. 명·조선 무역

조선의 경우는 사행이나 무역 과정에서 감합을 발급하지 않았다. 대신 일반 외교 문서만 서로 주고받았다.[3] 조선에서도 통신부(通信符)라는 이름의 감합과 유사한 역할의 문서가 일시적으로 발급되기는 했으나, 보통은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공식 사신의 확인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진 명•조선 무역은 흔히 공무역(조공 무역)이라고 불린다.

또한 조선이 일본이나 여진족에 대해 허용한 무역도 감합무역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 교육과정에서는 이런 무역을 감합무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4] 조선은 무역을 외교의 부수 행위로 간주하고, 기타 사무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5] 조선의 교역 상대는 일본의 막부[6]는 물론, 거추(巨酋) 또는 다이묘라 불리는 각 지방의 영주들과 대마도주 등의 일본인들과 당시 북방에 존재하던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었다.

감합과는 약간 결이 다르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무역 재개 과정에서 슈인장(주인장)이라 하여 붉은 도장이 찍힌 허가증을 일본 상인에게 발급해 슈인선을 타고 해외로 나가 무역할 수 있게 한 경우도 있다,

[1]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따라 주변국들이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 무역. [2] 이후 천계령이 완화되며 일본 측으로 청나라 상인들이 드나들며 무역하긴 했지만 공식적인 무역 관계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은 유출의 폐해가 심해 감합과 유사한 역할의 신패를 발급해 통제하긴 했다. [3] 당시 일본은 비주기적으로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이들이 진짜 조공 사절인지 아니면 사칭범들인지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가 존재했지만, 조선은 1년에 몇 번씩 오가는 데다 국가에서도 엄격히 통제하고 관리했던 만큼 굳이 발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1년에 한 번 조공을 바치던 류큐도 같은 이유로 감합 없이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갈 수 있었다., [4] 감합이라는 제도의 명칭은 당시 공식적으로 명나라에서만 사용했다. [5] 다만 무역을 위해 움직이는 역관들의 일부 사무역은 허락했다. [6] 쇼군이 새로 즉위할 때 통신사를 보내 교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