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2:33:18

야요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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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기3. 특징4. 야요이인

1. 개요

[ruby(弥生, ruby=やよい)][ruby(時, ruby=じ)][ruby(代, ruby=だい)]

일본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기가 유입되지 않았다가 이 시기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되었다.

2. 시기

야요이 시대의 시작 연대는 2000년대까지는 기원전 4세기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었다. 야요이 시대를 3기로 나누어 전기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기는 기원전 1세기 경부터, 후기는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청동기와 철제 무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등장하면서 이 때를 야요이 조기로 보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토기 1점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기원전 10세기경으로 나오면서 이를 야요이시대로 볼것인가의 학설이 대립하였다. 반대 측은 유물 1점의 출토를 토대로 당대 문화가 보편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보는 시각이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인들의 도래로 시작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었고, 만약 야요이 시대의 개시기가 기원전 10세기로 올라가버리면 한반도 송국리 문화와 연대가 맞지 않게 되버린다. 또한 기원전 3세기부터 발견되는 청동기와 철기 유물을 야요이 시대로 보았는데 이러면 야요이 시대와 청동기 철기 유입 시대를 따로 분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리자 일본 고고학계는 방사성탄소연대인 기원전 10세기를 지지하는 파와 기존의 연구 성과와 방사성탄소연대를 절충한 기원전 7세기를 지지하는 파로 나뉘게 된다. 2020년대에 와서는 절충파의 연대인 기원전 7세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절충파의 연대를 수용하는 경우가 다수다. 다만 한국에서 송국리 문화의 시작 연대가 기원전 10세기로 상향조정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추후에는 야요이 시대의 개시 연대도 기원전 10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아직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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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을 짓기 시작하고 청동제 무기[1], 제구가 출현했으며 안정적인 수경경작이 가능해지는 등 이전 시대였던 조몬 시대에 비해 급격하게 문명이 발전했다.

야요이 시대 동안 일본 열도에 금속과 농업이 널리 퍼지고 소국들이 생겼으며 이후 고훈 시대로 이어졌다.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이 시대에 활동했다.

1884년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가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토기가 처음 발굴된 곳에는 야요이 토기 발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주변에는 네즈역 도쿄대학 혼고 캠퍼스가 있다. 때문에 이 토기를 연구한 도쿄대학 인류학과에서 야요이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몬시대와 마찬가지로 토기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 셈. 한반도처럼 이 시기의 야요이 토기는 민무늬 토기가 보편적이다.

야요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들로는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 시즈오카현 도로 유적, 시마네현 고진다니, 가모이와쿠라 유적 등등이 있는데, 경작이 시작되어 농업 관련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다. 환호취락이 발달했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흔히 보이는 유적이다. 매장 문화는 조몬 시대와 많이 바뀌어 지석묘, 방형주구묘[2] 옹관, 석관, 목관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 야요이인

야요이 시대를 연 야요이인은 고대 한반도에서 금속 문화와 농경 문화를 보유한 높은 조몬인 유전자를 지닌 집단으로 추정이 된다.[3][4]

특히 주거지, 토기, 묘제 등 고고학적 지표로 보면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형 중 하나인 송국리 문화 및 이후의 세형동검 문화와 여러가지 문화요소들을 공유한다. 그래서 한반도 주민들 중 일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으로 이주하여 토착 죠몬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야요이문화 조기의 성립은 직접적인 이주보다는 송국리 문화의 간접적인 전파 혹은 파급의 결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에 송국리 문화 및 후속하는 세형동검문화 등 다양한 지역 및 계통의 한반도 문화가 여러차례 규슈 일대에 전파 혹은 직접적인 이주로 확산된 결과로 야요이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5][6]

흔히 도래인 하면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로 얘기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케이스가 대다수로, 야요이의 묘제들인 지석묘와 주구묘들이 중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나 도끼와 농경기구 등 여러 고고학적 유물들이 한반도에서만 동일한 것들이 발견된다는 것, 규슈 북부에서 발견되는 야요이인의 유골과 현대 한국인의 DNA 유사성 등도 이런 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당시 항해 기술상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는 것은 가능했으나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바로 건너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 교과서에서도 야요이인들은 고고학적 유물과 묘제를 증거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만 2007년 전후 무렵쯤 역사학자가 아닌 몇몇 일본 학자들이 쌀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쌀 품종들이였지만 그 중에 중국 장강(양쯔강) 지역에서 건너온 쌀 품종도 매우 적은 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7] 또 최초로 일본과 장강 문명을 관련있다고 한 사키타니 미츠루(崎谷満) 이후 호오가 토시오(宝賀寿男), 야스모토 히덴(安本美典)이라는 학자들이 장강기원설 그리고 이들이 산둥반도를 지나서 일본에 건너갔다는 근거없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호오가 토시오는 제대로 된 역사학자도 아니며 사키타니 미츠루 또한 고고학이나 역사학과는 거리가 먼 의학자이다. 야마모토 히덴 또한 심리학자.[8]

허나 민족주의적 성향의 발로인지 2007년 이후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대만계, 중국계 일본인들로 추정되는(?) 일부 네티즌들이 야요이 시대의 한반도 관련 내용을 지우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소수 넷우익들도 이것에 동조해 상기된 쌀 드립 등을 내세우며 야요이인들이 장강 지역에서 건너왔다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하지만 야요이 시대의 묘제들이 중국 장강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지석묘와 방형주구묘들이며, O1b2가 중국 장강 지역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9] 점을 들어 야요이인이 장강에서 기원했다는 설은 비판받고 있다.[10]

고대 일본어, 한국어 연구의 권위자였던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살아생전 반도 일본어설을 제시하며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서 쓰였고 고일본어족 화자들이 남하하는 부여어족 계통의 집단에게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각각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에 따르면 야요이인의 언어는 한국어 계통이 아닌 일본어 계통이 주류였고, 일본 열도로 가지 않은 야요이인의 조상들은 한민족에 일원되었거나 혹은 사멸되었다고 본다. 또한 고대 한반도의 일본어 계통 인구와 한국어 계통 인구는 서로 이웃 민족 정도로 유전적 거리도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어 계통 사용자도 일본 열도에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반도 일본어설을 참조.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한반도의 이민자에 의해 야요이 시대가 열렸다고 봤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요이 일본은 한국에서 수백만의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이들 이민자들은 야요이 전환기 무렵에 7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압도했을 것이다.
총, 균, 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

한편 로비츠는 요동 기원설을 주장했는데, 그는 그 시대에 장거리 이동이 어렵다는 점에서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기원했으며 부여어족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지명을 예로 들었다. Alexander Vovin(2014) Out of Southern China? 다만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되는 한반도의 방형 주구묘는 요동으로 갈수록 수가 적어지기에, 요동에서 야요이가 기원한 것이 아니라 요동은 한반도인들이 진출한 곳이라는 반박도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방형 주구묘가 일본에 건너가 지배적인 묘제가 되는 것을 보면 야요이인들은 요동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보는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季刊考古学 弥生墓制の地域的展開 2005.6.1)

야요이 시대의 유물은 한반도의 유물과 비슷하여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형태, 석재가 한반도의 것과 동일했으며, 철기 및 청동기 역시 거의 동일한 모습을 띄었다. 또 한반도에서 가까운 북 규슈과 서남쪽 혼슈 지방을 중심으로 야요이 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런 점을 들어 야마구치현 사가현 등지의 간몬(關門) 지역 일대에 한반도로부터 도래인 집단이 정착하여 야요이 문화를 시작했다고 한다.(천선행, <무문토기시대 한일간 지역관계변천>, p.3)

[1] 동모, 동과 등. 이러한 청동제 무기들은 훗날 제구(제사 도구)로 용도가 바뀐다. [2] 방형주구묘는 이후 일본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한다. [3] 이는 일본 열도의 야요이 시대인들의 고인골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몬인 성분이 20%~60%씩 검출이 되는데 이는 현대 기준 조몬인 유전자가 가장 높은 아이누인들에 버금가는 수치이다. 빙하기 이전만 해도 일본 열도는 한반도에 붙어 있었으며 고조선과 삼한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조몬인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거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신석기 시기의 한반도 중남부 고인골들과 금관 가야국의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기득권층과 피지배층 가리지 않고 높은 조몬인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4] 조몬 시대 중기에 1만명, 즉 전체 인구 2.7%에 불과했던 서일본 인구가 야요이 시대에 17% 수준으로 크게 증가한 후, 수백 년이 지난 7세기즈음에는 무려 100만이 넘게 되었는데, 소수가 이주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많은 수치이다. 야요이, 혹은 고훈 시대에 도래했다고 알려진 하타씨가 120을 이끌고 도래했다는 기록도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렇게 대규모로 이주한 집단이 발전된 농경, 양잠, 관개, 토목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교토를 중심으로 저수지, 제방, 관개 시설부터 쫙 깔아 기반을 마련한 뒤 야마토국의 국가 산업을 도맡았다고 하니, 당시 일본 인구 폭증의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기원전 - 기원후 당시 일본 인구를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기원전에는 100년당 몇 만씩 증가하던 게 기원후 3 ~ 5세기를 기점으로 수백 년간 몇 배 단위로 폭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 이홍종, 야요이토기와 무문토기의 실연대 / 이정은, 규슈지역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문화변동 / 조진선, 전근대의 한일항로와 세형동검문화의 파급 경로 등 [6] 다만 흔히 말해지는 '송국리 문화가 북방에서 이주한 점토대토기문화인들에게 축출당해 이주한 것이 야요이문화다'라는 주장은 별로 마땅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계에서는 주로 한반도 점토대토기문화의 성립은 직접적인 정가와자 계통 문화권 주민들의 이주의 결과로 보기보다는 재래의 토착민들의 자발적인 문화수용 혹은 소수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교류 및 동화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오히려 후기의 송국리 문화에서는 종전에 '점토대토기문화'라고 분류했던 여러 문화요소를 이미 공반하고 있었고, 이들이 주체적으로 외래 문화를 지속적으로 흡수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애당초 '송국리 유적'과 '진주 대평리 유적'을 비교해도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송국리문화는 전파 및 파급된 지역별 문화적 변용이 심하고 토착 문화요소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는 편이어서, 그 원향이라 할 수 있는 송국리 및 관창리 일대와 이것이 전파된 다른 지역 간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차이점이 있어서 '송국리 문화'를 특정한 인종 내지 종족적 집단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송국리 문화는 일부 지역에서는 재래의 묘제인 지석묘를 지속해서 조영하기도 했지만, 사실 지석묘는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묘제가 아니며, 원향에서 직접적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취락일수록 지석묘를 묘제로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7] 물론 이 장강의 쌀 품종이 정확히 야요이 시대에서 건너간 것인지 아니면 백제의 무역이나 송나라 시절 무역으로 장강 지역 쌀이 건너간 것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뭣보다 그 수 또한 매우 적어 기존 학설의 전제를 뒤집을 수준은 아니다. [8]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기조가 일본 학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기원의 다양한 갈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도래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거나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 정도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역사학자도 아닌 사키타니 미츠루(崎谷満), 호오가 토시오(宝賀寿男), 야마모토 히덴(安本美典)도 도래인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산둥반도를 지나 바로 건너왔다고 보기도 한다는데, 어떻게든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고자 하는 주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 일본 학계가 한일 간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혈연 관계는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또 세키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9] 만약 O1B2가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것이라면 적어도 중국 남부에 어느정도 O1B2의 인구가 존재해야 한다. [10] 사실 O1B2 드립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와의 연관성이라면 일단 부정부터 하고 싶은 일본 극우 세력의 콜라보네이션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좌우합작?, 요지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한국인, 일본인의 중국 남부 기원설을 지지하는 해외 학자가 있는 경우 투자를 하였는데, 2003년과 2006년 경부터 이런 설을 지지하는 일본 학자들이 나타났고, 이 일본 학자들이 고대에서 일본으로 왔는지 송나라 때 무역으로 일본에 왔는지 모르는 오래된 일부 벼 쌀알들을 가지고 야요이인들이 중국 남부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