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17:31:08

미요시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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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好長慶

1522년 3월 10일, 음력 2월 13일 ~ 1564년 8월 10일, 음력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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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아버지의 사망과 당주 취임2.2. 호소카와의 가신2.3. 막부를 깨부수다2.4. 막부와의 화친과 세력 확장2.5. 이른 죽음
3. 평가
3.1. 정치
4. 기타
4.1. 나가요시 정신병설
5. 대중 매체에서6. 미요시 요절 징크스

1. 소개

아와 천하인. 또는 오다 노부나가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일본 센고쿠 다이묘.

미요시 모토나가의 적남. 아명은 센쿠마마루(千熊丸)이며 가명은 마고지로(孫次郎, 孫二郎). 모토나가가 내분으로 인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10대의 나이로 미요시 가문의 대표를 맡아 정치를 진행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중앙 권력자였던 셋츠 호소카와 가문(摂津細川家)과 아시카가 쇼군가(足利将軍家)를 토벌하여 무로마치 바쿠후를 한 번 뒤엎었던 인물이다.

2000년대까지는 시바 료타로의 '가도를 가다'에서 평가되듯 '큰 뜻도 야망도 없이, 부하의 전횡을 허락한 범용한 다이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세간의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학계에서는 20세기 후반에들어 나가에 쇼이치(長江正一) 씨의 활동으로 "힘없는 효웅"으로 화자되던 그의 이미지를 "유능한 교양인"으로 일전시켰으며, 2000년대 들어와 야마다 야스히로(山田康弘),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 씨로 대표되는 인물들로 인해 "미요시 정권"과 " 사카이 막부"라는 개념들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됐으며, 이를 시작으로 아와(阿波) - 키나이(畿内) 일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한다.[1][2] 이윽고 2010년대에는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씨 등의 학자들이 나가요시에 관한 쌓여있던 연구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적을 통해 풀어내기 시작해, 지금에 와선 일반인들도 "왠지 대단했던 사람" 정도의 인식을 가지게 하는데에 달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비슷한 길을 따라 재평가 바람이 불고 있는 와중이며, 나무 위키의 본 항목도 이러한 재평가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높게 평가하는 쪽은 키나이 일대를 수중에 넣어 호족들과 함께 폭넓은 문화의 교류를 가졌고 사카이를 통한 무역과 키나이의 발전, 키리시탄의 포교 허락과 세례 주최, 철포의 도입과 고이시가키를 이용한 의 축성등을 통해 근세로 넘어가는 발판과 시행 착오를 마련해준 근세 키나이의 시조로도 근근히 평가받고 있으니. 옛날의 평가를 돌이켜보면 참 격세지감인 일.

2. 생애

2.1. 아버지의 사망과 당주 취임

그의 아버지 미요시 모토나가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지원하며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高国)와 격렬히 대립해 그를 자살로 몰아넣은 다음 하루모토와 결탁하여 아시카가 요시츠나를 옹립, 새로운 무가 정권의 체제를 다졌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 문제로 인해 하루모토와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아 결국 1532년, 하루모토 세력의 공격으로 모토나가는 자결하게 되었다.

나가요시는 아버지와 같이 사카이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공격받자 아와로 하향하게 되었다. 1533년이 되자 모토나가를 공격하는데 동원된 잇키 세력은 하루모토와도 반목하게 되었고 곧 하루모토와 이시야마 혼간지 세력과의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나가요시는 키나이로 복귀하여 미요시 가문의 당주로서 이 두 세력을 중재시켰다. 나가요시의 나이 12세 때의 일이다.

2.2. 호소카와의 가신

9월 23일, 나가요시는 셋츠로 출병, 코시미즈 성(越水城)의 타카쿠니의 잔당 카와라바야시(瓦林) 씨를 공략하여 코시미즈 성을 떨어뜨렸다.이후로도 나가요시는 하루모토를 따랐으며 그를 연회에 초대하기도 하는 등 관계를 쌓아나갔다.

1539년, 나가요시는 병사를 이끌고 상락하여 하루모토에게 막부의 고료쇼(御料所)[3] 카와치 17개소(河内十七個所) 대관직을 요구해 왔다.[4] 물론 하루모토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쇼군 가문의 가신이 나가요시를 대관직에 추천하게 되어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나가요시는 하루모토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7월 14일에 아버지의 7회기를 혼간지에 개최하여 혼간지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21일에 코시미즈 성을 낙성시키는 기세를 보여주었다. 두명의 갈등이 무력 사태로까지 이어지자 요시하루는 오미의 슈고다이 롯카쿠 사다요리를 통하여 중재에 나섰고 나가요시는 중재에 응하여 철군 하였다.[5] 8월 14일에는 자신의 거성을 셋츠 코시미즈 성(越水城)으로 옮겼다. 나가요시 18세 때의 일이다.

이후 나가요시는 하타노 히데타다(波多野秀忠)의 딸과 결혼하여 1542년에 적남을 보게 되었으며 가화에 참여하는 등 문화 활동도 계속해 나갔다. 3월에는 카와치 이이모리야마 성(飯盛山城)의 키자와 나가마사(木沢長政)를 타이헤이지 전투(太平寺の戦い)에서 전사시켰으며 1543년 8월에는 타카쿠니의 의지를 이어 이즈미에서 거병한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氏綱)와 사카이에서 격돌하였다. 1545년 5월 25일에는 하루모토와 그의 가신 미요시 소산과 함께 다시 한 번 우지츠나와 싸웠으며 7월 27일에는 소산과 함께 탄바로 출진했다.

1546년이 되자 사카이에서 우지츠나와 카와치 슈고다이(守護代) 유사 나가노리(遊佐長教)에게 포위되었으나 사카이의 에고슈(会合衆)의 중재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도 고전이 계속되자 나가요시는 시코쿠에 있는 자신의 동생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10월 21일이 되자 미요시 짓큐가 사카이로 건너와 우지츠나 세력을 격파하였다. 12월에는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요시하루는 우지츠나 세력과 내통하여 반 하루모토 세력에 가담하였는데 1547년 2월 부터 하루모토의 세력이 셋츠의 성을 하나둘씩 떨어뜨리자 사태의 불리함을 느끼고 7월에 오미로 도망갔다. 그리고 하루모토가 샤리지 전투(舎利寺の戦い)에서 우지츠나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우지츠나 세력은 그 위세가 한층 수그러지게 되었다.

1548년이 되자 나가요시는 나가노리의 딸을 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4월, 나가요시는 롯카쿠 사다요리의 중재로 우지츠나 세력과 환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루모토는 키나이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이번에는 나가요시와 소산이 서로를 증오하게 되어 하루모토는 소산의 편에 서 이들을 중재하려 하였다. 나가요시는 하루모토의 태도에 당연히 분노하였고 적대 세력이었던 유사 나가노리를 끌어들여 우지츠나를 새로운 칸레이로 옹립하였다. 10월부터 나가요시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1549년 6월, 에구치 성(江口城)에서 나가요시가 소산을 전사시킴에 따라 하루모토의 주력은 붕괴하였으며 하루모토는 야마시로로, 요시테루 부자는 다시 한 번 오미로 달아났다. 이로써 칸레이의 임무는 우지츠나가 맡게 되었으며 쇼군 또한 야마시로에서 달아났기 때문에 키나이를 제압한 나가요시의 미요시 정권이 세워지게 되었다.[6]

2.3. 막부를 깨부수다

1551년에는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단을 미요시 세력에 파견하였다. 나가요시는 이 습격을 받았지만 경상으로 그쳤으나 장인인 유사 나가노리는 암살단에게 살해당하였다.

1552년 1월, 이번에는 롯카쿠 사다요리의 후계자인 롯카쿠 요시카타 쇼군 요시테루와의 화친을 요청해왔다. 나가요시는 이번에도 쇼군과의 화친에 응했으며 요시테루는 쿄토로 돌아왔다. 반면 하루모토는 가독을 우지츠나에게 넘겨준 뒤에 와카사로 달아나 계속해서 나가요시에게 전쟁을 걸었지만 번번히 격퇴당하였으며 미요시 정권은 쇼군을 등에 업으면서 날로 강성해져 갔다.

이에 요시테루는 하루모토와 연락을 취하여 나가요시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은 다시 한 번 갈라졌고 1553년, 쿄토 료젠성 전투(霊山城合戦)에서 나가요시가 승리하게 되어 요시테루는 또다시 오미로 도망쳤으며 막부의 가신들도 요시테루와 그 행선지를 같이하게 되었다. 나가요시는 쇼군과 적대하며 쇼군 가문을 물리쳐 키나이를 정복하였지만 새로이 쇼군을 추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하였다.[7][8] 이후 나가요시는 거성을 코시미즈 성에서 셋츠 아쿠타가와야마 성(芥川山城)으로 옮겼다.

막부를 사실상 멸망시킨 이후에도 아시카가 가문과의 물리적 충돌과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나가요시는 천황과 관계를 만들어 자신의 무력 정권을 인정하게 만듬과 동시에 연호를 개창하여 무로마치 막부 자체를 지우려는 과격한 수단을 보였다. 요시테루도 이에 지지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미요시 정권과 계속해서 대립해 나갔다.[9]

1555년 정월 13일, 나가요시는 미요시 짓큐가 주둔하는 타이산지(太山寺)로 진군해 셋츠에 남아있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세력을 압박하였다. 이에 아카시 성(明石城)의 코자이(香西) 세력은 나가요시에게 항복하였다. 또한 자신의 지지 세력과 대립하는 미키(三木) 가문이 회담을 요청해 오자 이를 받아들여 셋츠의 정세를 정비한 다음 귀성하였다.

1558년이 되자 오미로 도망친 요시테루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마사카츠와 코자이 모토나리(香西元成)와 연합하여 상락을 개시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의 군세를 요격하기로 하였고 곧 야마시로는 대대적인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최후의 전투인 시라카와구치 전투(白川口の戦い)에서는 나가요시의 중신인 미요시 나가야스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참여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7월에는 미요시 야스나가가, 8월에는 짓큐가 효고에 상륙하여 아마가사키로 진군하는 등 시코쿠 세력 또한 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런 격렬한 전쟁 속에 나가요시가 실행한 최후의 수단은 공격이 아니라 화친이었다. 새로운 무가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 나가요시는 자신의 정권을 포기하고 요시테루와 화친하였으며 요시테루를 쇼군직에 복귀시키고 쿄토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대부분의 정치 기능은 미요시 가문이 장악하게 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기능이 정지한지 단 5년 만에 부활에 성공하게 되었다.

2.4. 막부와의 화친과 세력 확장

쇼군 가문과 화친한 나가요시는 동문의 사용을 허락 받았으며 자신은 고반슈에 취임하였고 그의 적자이자 후계자인 미요시 요시오키와 중신인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토모슈에 취임하게 되어 미요시 가문의 막부 내 영향력은 더욱더 늘어갔다.

한편 카와치에서는 슈고다이인 야스미 나오마사(安見直政)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키이로 달아난 슈고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高政)의 지원을 명분으로 카와치에 출진하였다. 나가요시는 1559년 8월 1일, 셋츠 하리마의 호족들을 이끌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본거인 타카야 성(高屋城)을 함락시켰으며 4일에는 이이모리야마 성 또한 함락시킨 다음 나오마사를 야마토로 쫓아내고 타카마사를 타카야 성으로 입성시키는 것으로 카와치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마사 자신이 나오마사의 후임으로 임명한 슈고다이 유카와 나오미츠(湯川直光)와 대립하게 되어 나가요시의 허락없이 나오마사를 슈고다이로 복직시켰다.

이에 나가요시는 분노하여 1560년, 미요시 짓큐에게 시코쿠 세력의 지원을 요청, 짓큐는 이를 받아들여 양자는 카와치로 진군하였다. 시코쿠 세는 7월 3일, 타카마사 세력을 격파하였고 순식간에 카와치에서 진형을 갖추었다. 이렇게 카와치 세력이 열세에 놓이자 나오마사는 이이모리야마 성에서 출진하였으나 그 또한 시코쿠 세력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그리고 카와치 세를 후원하던 코자이 모토나리는 마츠나가 나가요리에게 격파당하고 네고로슈(根来衆)는 10월 15일에 타카야 성외에서 궤멸당하여 결국 10월 24일, 타카마사와 나오마사는 타카야 성과 이이모리야마 성을 개성하고 사카이로 달아났다. 11월 13일에는 짓큐가 타카야 성으로 입성하였고, 나가요시는 지금까지의 거성이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을 적자인 미요시 요시오키에게 내주고 미요시 나가야스를 보좌로 붙여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표시켰으며 자신은 이이모리야마 성을 거성으로 삼게 되어 카와치는 완전히 미요시 가문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듯 나가요시는 스스로가 만든 무력 정권을 버렸음에도 미요시 가문의 세력을 늘리며 호조를 맞이, 하리마, 셋츠, 이즈미, 카와치, 탄바, 야마시로, 야마토, 아와지, 아와, 사누키, 이요 키나이를 중심으로 10개국에 가까운 영지에 영향력을 뻗히게 되었다. 이로써 미요시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가문 내에 손쓸 수 없는 불행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하였다.

나가요시가 쇼군을 등에 업고 키나이를 호령하자 오미의 롯카쿠 요시카타와 키이로 도망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가 반 미요시 세력을 구상하여 나가요시와 대립하였다. 나가요시가 이에 대항하려하자 1561년, 셋째 동생이자 키나이의 주요 사령관인 소고 카즈마사가 약 30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사누키와 키나이의 호족을 이끄는 소고 가문의 당주 카즈마사의 죽음은 당연히 미요시 세력에 크나큰 구멍을 가져왔으며 7월 28일이 되자 요시카타가 야마시로로 출진하였고 이에 반응하여 타카마사가 이즈미로 출진하였다. 나가요시는 후계자 미요시 요시오키와 그의 동료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야마시로의 방어를 맡겼고 시코쿠의 총대장인 카와치 타카야 성주 미요시 짓큐에게 이즈미의 방어를 맡겼다. 이윽고 전쟁은 발발해 짓큐는 이즈미 쿠메다에서 하타케야마의 세력과 싸워나갔으나( 쿠메다 전투) 네고로슈의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6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총대장의 부재로 미요시 세력은 쿠메다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짓큐가 이끌던 시코쿠세는 각자가 군사를 수습하여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 압도적이던 미요시 세력에 승리한 하타케야마 세력은 이 기세를 몰아 북상하여 나가요시의 거성을 포위하였다. 한편 시코쿠로 물러났던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군세를 재편성해 효고를 경유하여 이즈미에 재진입하였고 롯카쿠 세력에 밀리던 요시오키가 분투하며 나가요시가 포위되어있는 카와치로 군사를 진군시켜 5월 20일, 쿄코지에서 하타케야마 세력을 격파하여 카와치를 구원하였다( 쿄코지 전투). 타카야 성에는 짓큐를 대신하여 야스나가가 입성하였으며 짓큐의 적자 미요시 나가하루를 새로운 시코쿠의 총대장으로 지지하며 아와의 호족들과 함께 11월 29일에 아와의 세력은 나가하루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임을 표명하는 연판장(連判狀)을 작성하였다. 한편 하타케야마 세력의 패퇴 소식을 들은 롯카쿠 요시카타는 나가요시와 화친한 다음 오미로 물러났다. 이렇게 나가요시는 미요시 정권의 위기를 버텨내는 것에 겨우 성공하였다.[10]

2.5. 이른 죽음

소고 카즈마사 미요시 짓큐의 죽음으로 쇠퇴의 기로에 놓인 미요시 정권이었지만 짓큐의 공백은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야스나가가, 카즈마사의 공백은 미요시 요시오키 미요시 나가야스가 잘 메워주며 미요시 정권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잠시, 1563년 8월에 아쿠타가와야마 성에서 반 미요시 연합 격퇴의 공신이자 나가요시의 후계자인 요시오키가 2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로써 나가요시의 병은 악화되었으며 미요시 정권은 기껏 메꿔놓은 인재풀이 뚫리게 되면서 상당한 전력 누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얼마 뒤 후계자가 없어진 나가요시는 동생 카즈마사와 칸파쿠 쿠죠 가문의 양녀 사이에서 태어난 미요시 요시츠구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이후 나가요시는 1564년 5월, 자신의 거성에서 미요시 가문의 73명의 무사들이 키리시탄에 입신하도록 해주었으며 5월에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를 살해하였다.[11] 이후 나가요시는 7월, 자신의 거성인 이이모리야마 성에서 향년 43세로 병사하였다. 그의 후계자는 예정대로 미요시 요시츠구가 잇게 되었다.

3. 평가

3.1. 정치

나가요시는 자기 자신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처럼 나가요시는 마을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중시했으며, 대표적으로 셋츠에서 용수 문제로 관한 논쟁이 발생했을 때 직접 지도를 지참시킨 사자를 보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판결을 허가한 사례가 있었다.

도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특히 불교 세력에 눈을 돌려 많은 유력자들이 몸을 담은 법화종과 교류를 나눴으며 법화종 사원을 지원해주며 사카이 등의 여러 항구 마을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정토진종의 코쇼지(興正寺)파와 교류를 가져 지나이마치(寺内町)의 성장에 진력, 오사카 혼간지와도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세토내해에 진출한 니치류몬류(日隆門流)와도 협력해 수군을 조직하는 등 불교 세력과의 협력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다.

4. 기타

한동안 이어졌던 저평가의 영향탓인지 인지도는 물론이고 그의 이름을 빌려 개최하는 이벤트 또한 보기 힘들다. 그의 출신지인 토쿠시마 현에선 그의 고향이나 본거지였던 쇼즈이에서 소규모 행사가 개최될 뿐이고,[12] 본성으로 사용했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은 문화재 등록조차 안되어있으며 이이모리야마 성은 미요시에 관련된 설명이나 구조물은 없고 남북조시대 인물인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낮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영지를 다스릴 때 죠카마치를 활성화하기보다 자신의 거성에 재판소같은 정치 기관들을 설치하여 운용하는 방식을 보였다. 이는 그가 통치하는 영지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데, 최대의 항구 도시 사카이가 근처에 있고 산맥이 많으면서도 강을 이용하여 키나이 교통의 요지로 평가받는 카와치를 지신의 영지로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이 상업 도시를 활성화시키기 보단 재판 같은 고위층의 임무를 수행하여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을 키나이에 보이는 것을 우선시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당대의 문서 아사쿠라 소테키 와키(朝倉宗滴話記)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 모리 모토나리 등과 함께 정치와 인재 등용같은 성과를 칭찬하며 당대의 견본으로 평가하였고 코요군칸(甲陽軍艦)에서는 이요, 토사에 얽매이지않고 상락하여 천하(키나이)를 거머쥔 무장이라 평가받는 등 당대의 인사들에게 극찬받은 다이묘 중 한 명이다.

네덜란드에서 1718년 부터 간행된 역사지도장의 일본의 통치자의 변천에서 미요시도노(MIOXINDONO)로 소개되었다. 이 책의 나가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쿠보, 히데요리, 토쿠가와 사마 같은 역대 일본의 통치자와 같이 언급되며 당시 에도 막부에서 네덜란드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는 데지마로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나가요시가 일본의 역대 통치자 중의 한 명이자 일본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서 다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의 정치 모토인 이세안민(理世安民)은 태평기 1권의 구절을 전거로 한다고 한다. 이세안민의 근원은 관자의 패언(覇言), 한서의 식화지(食貨志), 촉지 장완전의 구절이라 생각된다고.

아버지는 자신이 11살 때 동료에게 살해당했고 자신의 동생들 또한 오래 살지 못하였으며 유일한 아들은 22세라는 나이로 절명하는 등 항상 친족의 죽음에 시달렸다. 타케다 신겐이나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도 자신이 아끼던 촉망받는 친족들이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나가요시 처럼 저렇게 우수수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이렇듯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난 환경에서 일생을 보냈기에 나가요시의 병과 이른 죽음을 정신병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모토나가, 나가요시, 요시츠구 키나이 미요시 3대 당주는 하나같이 무로마치 막부에 적대적이었다. 이 셋 중에서 그나마 유했던 사람이 모토나가로 단순히 괴뢰 정권을 세웠던 모토나가와는 다르게 나가요시는 막부를 두 번씩이나 때려 부쉈으며 요시츠구는 아예 쇼군을 살해하면서까지 막부를 전복시키려 하였다.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것에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신겐보다 1년 늦게 태어난 반면에 죽는건 9년을 앞서서 죽었다. 또한 천하인으로 평가받는 오우치 요시오키가 53세에, 오다 노부나가가 49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62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74세에 죽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가요시는 정말 정말 젊을 때 사망한 것이다.

렌가와 와카에 통달하여 극찬받는 어구를 많이 남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다도에 관해서 남아있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을 쵸케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하지만 현지 학자 대부분은 나가요시로 읽는다.

수준 차이가 조금 나긴하지만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공통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한 지역은 제패했다던가, 말년을 좋게 끝내지 못했다던가, 능력있던 장남이 20대 초반에 덜컥 죽어버렸다던가...

4.1. 나가요시 정신병설

위에서도 잠깐 언급된, 미요시 나가요시의 죽음과 행동을 정신병과 연관지어 해석한 설. 말년의 나가요시는 치매에 가까운 증상을 앓았고 이로인해 후유야스를 죽여버렸다는 내용이 후세의 책으로 쓰여질 정도로 꽤 유명한 설이다. 최근에는 미요시 나가요시회의 일원이자 현역 의사가 우울증을 중심으로하여 본격적인 논문을 쓴것으로 유명하다. 이 학설은 나가요시가 혈족들의 잇따른 죽음과 선대 미요시 당주들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생긴 죽음의 공포와, 목적이던 천하인의 자리에 도달한 뒤의 상실감으로 인해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1561년 이래 나가요시의 움직임이 줄어든 것 같은 것들이 그 근거가 된다. 하지만 나가요시는 죽기 직전까지 예전과 다르지않게 재판을 직접 진행하였으며 정신 이상의 결과물이라 알려진 후유야스 살해도 기형적인 후계자인 요시츠구를 중심으로 재검토가 진행되고 있기에 정말 나가요시가 말년에 정신병을 앓게 되어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직 검증이 요구되고 있다.

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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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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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A급 다이묘로 등장. 미요시 나가요시 자신의 능력치가 준수한 편이다. 시리즈 전통적으로 정치와 지모가 높아서 대개 80 ~ 90대고 통솔도 60대 중간[13]이라 전투에서 아주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다. 캐릭터 자체의 성능은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미요시 최강을 겨룬다.

그러나 미요시 나가요시 세력 자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미요시 나가요시의 통솔이 60대 중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요시 나가요시가 최강이라는 건 전투에 능한 가신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소리다. 미요시 나가요시의 세력 자체는 매우 넓으므로 가신단도 꽤 많으나 그 많은 가신 중에 정작 싸움터에서 쓸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미요시 나가요시와 비슷한 수준인 형제들이 그나마 받쳐주는 수준. 그 때문에 초반에 앞서는 전력을 바탕으로 확장해서 전투에 능한 가신을 얻지 못하면 미래가 밝지 못했다. 열풍전부터는 전투력만은 소고 카즈마사급인 시치조 가네나카가 추가되었으나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러던 것이 혁신으로 넘어오면서 쓸 놈이 없어서 억지로 쓰는 수준이던 미요시 나가요시· 요시카타[14]· 소고 카즈마사·시치조 가네나카 넷의 전투력이 엄청나게 개선되었다. 나가요시 자신은 시리즈 역대 최고 통솔인 91을 찍었고, 요시카타와 가즈마사도 매우 좋아졌다. 시치조 가네나카는 역대 최하의 통솔을 찍었으나 대신 역대 최고의 무용을 얻었다.

창조 PK에서는 동생 소고 카즈마사와 함깨 새로운 일러스트를 받았고 전반적인 능력치 버프도 함께 하였다. 그의 정치 모토인 이세안민이 가문 정책으로 채용되었으며 가문 정책 효과는 그럭저럭 쓸만한 편. 나가요시가 살아있는 시점은 아직 오다 노부나가, 타케다 신켄, 모리 모토나리 등의 거물들이 크게 흥성하기 전이고 미요시는 거진 막부를 갈아치울 역량이 있는 수준의 기나이 최대 가문 상태인지라 사실상 전국 최강이나 다름없다.

미요시 가문 보유 지역들이 중앙에 가까운 기나이 일대와 아와 지방이라 인구 밀도도 좋고 발전이 많이 되어 있어 플레이어가 잡으면 아주 쉽게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는 초심자용 세력이지만 AI의 경우 특이하게 군단성향이 전수방어로 설정되어 있어[15] 지지부진하게 멍 때리다가 사방팔방에서 성장해서 확장하는 주변 세력들에게 다구리 맞고 점차 무너지는 그림이 거진 십중팔구 벌어진다. 유저들 사이에서의 추측으로는 코에이에서 약간의 현실 고증을 좀 하려고 초반부 국력 최강자인 미요시 가문과 나가요시가 너무 비역사적으로 막 나가며 중앙 제패를 하는 짓을 못하게 하려고 이런 설정을 해놓은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일단 미요시 나가요시를 중심으로 하는 미요시 가문은 플레이어가 잡을 시, 큐슈의 오토모 소린, 토카이도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플레이와 함께 초반부 시나리오에서 초심자들이 무난하게 내정, 세력 확장, 외교를 배우며 천하 통일을 하기에 손쉽기 그지 없는 강력한 세력이 분명하다. 인구 수도 보통 오우치 내지 이마가와와 1위, 2위를 다투는 수준에 인구 밀도 높은 본성들도 다수 확보 중에 인재풀도 나름 나쁘지는 않고 주변에는 다 고만고만한 영주들 밖에 없고 이렇다할 강적이 없는지라 설령 다구리를 맞는다쳐도 몇 번의 외교 공작과 각개격파로 기나이[16] 제패는 거진 누워서 떡 먹기 수준. 워낙 빠르게 기나이 제패가 가능한지라 초반부 미요시 나가요시 플레이로 기나이 제패를 한 시점에서 이미 게임 클리어 확정 수준이라 숙련자 입장에선 노잼이라면 노잼이라 할 수도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전국 시대 당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권위를 위해 음독 이름을 썼다는 연구 사실에 기반하여 이름인 나가요시(長慶)를 음독으로 읽어서 미요시 쵸케이라고 읽는 매체도 늘어나고 있다. SFC 북미판 무장풍운록에선 Miyoshi Chokei 로 나왔으며, 한국에 정발된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와 장성록에서도 그의 이름은 '미요시 조케이'라고 표기되었다.

태합입지전에서도 본인 자체는 매우 훌륭하나 나머지가 문제. 미요시 3인중은 그냥저냥 B급 장수이면서 성주인 마사야스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어디 쓸데도 없는 쓰레기급이면서 직급은 가로라 봉록은 꼬박꼬박 처먹는다. 국주인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능력치는 출중하나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지라 재수없게 독립이라도 하면 땅 2개가 고스란히 적의 손에... 그래도 일단 본인이 다이묘로 등장하는 2개의 시나리오에선 초기 세력자체는 제일 크니 다케다와 동맹 맺고 코사카 마사노부한테 풍림화산을 배운다음 주변의 군소 세력들을 빠르게 병합하면 매우 쉬운 다이묘 중 하나이다.

센고쿠히메 시리즈에서는 2부터 히로인으로 등장. 이름은 꾸준히 미요시 쵸케이로 읽는다. 미요시 가문 루트는 3에서 가장 비중이 크나 사실상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루트인지라 안습... 대신 능력치는 높은 통솔과 최고급 지략 정치를 보유한데다 쇼군가에게 하사받았다는 도검 다이한냐나가미츠(大般若長光)를 아이템으로 기본 소지하고 있어서 통솔 보정을 받으므로 사실상 만능캐. 센고쿠히메 7에선 자식인 요시오키만 나와 짤렸다.

토탈워 쇼군2에서는 쵸소카베 모토치카로 플레이하는 전투 튜토리얼 삼단계 중 심화 전투 튜토리얼에서 적장으로 나온다. 이름은 미요시 쵸케이로 나온다.

2020년 NHK 대하드라마 기린이 온다에서는 성우로 유명한 야마지 카즈히로가 역할을 맡았다.

6. 미요시 요절 징크스

오나라의 요절징크스를 능가하는 미요시 요절 징크스의 희생자다. 아버지, 자기 자신을 비롯해 네 동생과 아들과 조카들이 거의 대부분 제명을 못 살고 죽었다.
  • 미요시 모토나가 - 32세(1501년 ~ 1532년). 자신이 보좌하던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함께 사카이 막부를 만들어 또다른 무력 정권을 구상했으나 하루모토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모토와 화친과 반목을 반복하였으나 이 둘의 사이는 가신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치닫았다. 결국 하루모토는 모토나가와 완전히 반목. 잇코잇키의 힘을 빌어 모토나가를 공격했으며 이에 모토나가는 열세에 몰려 자결했다.
  • 미요시 유키토라 - 36세(1527년 ~ 1562년) 혹은 37세(1526년 ~ 1562년). 쿠메다 전투에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 세력의 네고로슈의 기습에 전사했다.
  • 아타기 후유야스 - 37세?(1528년? ~ 1564년). 미요시 5형제 중 마지막까지 남아 형을 보좌해주었지만 알수없는 이유로 형에게 살해당했다
  • 소고 카즈마사 - 30세?(1532년? ~ 1561년).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구축 후 남부에 해당되는 이즈미의 전선을 담당했으나 급작스럽게 병사했다.
  • 노구치 후유나가 - ?세(? ~ 1553년). 모토나가의 오남. 미요시 5형제의 막내. 후유야스처럼 아와지를 근거로하는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형들을 보좌해 주었으나 짓큐가 일으킨 쇼즈이 소동(勝瑞騒動) 이후의 내전에서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 미요시 요시오키 - 22세(1542년 ~ 1563년). 나가요시의 외동 아들.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오토모슈를 역임할 정도로 미요시 가문과 막부 양측에서 신뢰를 받았으나 병으로 급사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키나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17]
  • 미요시 요시츠구 - 23세(1551년 ~ 1573년). 나가요시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나가요시 사후 당주가 된 이후로 무로마치 막부를 부정하는 성격의 정치를 펼쳤으나 이내 자신의 기반 세력과의 마찰로 그들에게서 빠져나와 미요시 가문을 대대적인 내전 속으로 빠뜨렸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편에 서게되나 퇴출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호해주었다는 명목으로 침공한 오다의 군세와 싸우다 자결했다.
  • 미요시 나가하루 - 25세(1553년 ~ 1577년). 미요시 짓큐의 장남. 아버지 사후엔 미요시 야스나가 외 6명의 가신의 지지를 받아 시노하라 나가후사와 함께 아와 미요시 가문의 일을 처리하였고, 요시츠구 사후엔 미요시 가문 전체를 이끌었다. 노부나가와의 전쟁을 회의적으로 여겨 오다 세력과 화친하려고 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명목상 상관인 호소카와 사네유키와 관계가 틀어져 그의 공격을 받아 자결했다.
  • 미요시 요시카타 - 33세(1554년 ~ 1586년). 짓큐의 차남. 본래 키나이에 거처중이었으나 나가하루가 사망하자 미요시 가문의 당주가 되어 시코쿠로 귀환. 쵸소카베 모토치카에 항전하여 어찌어찌 사누키의 영지 일부만 보존할 수 있었지만 얼마 가지않아 큐슈 정벌에서 총대장의 오판으로 전사했다.
  • 미요시 센마츠마루 - 15세(1575년 ~ 1589년). 마사야스의 영지를 이어받은 이코마 치카마사에게 양육되었으나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치카마사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1] 阿波三好氏 p.8 [2] 이쪽 지역의 자료가 부실해서 선행 연구 자체가 없었다고 이마타니 아키라가 평했을 정도라는 듯 - 三好長慶(宮帯) [3] 간단히 말하면 장원쯤 된다. [4] 이미 나가요시는 혼간지 세력이 경영하고 있는 카와치 17개소의 영지에서 대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5] 아버지가 17개소에 인접한 키타노샤령 8개소(北野社領八個所)의 대관직을 맡았던 것이 나가요시가 장원의 대관직을 원한 이유로 생각된다. [6] 아버지 모토나가가 사카이 막부를 세운 1527년에서 22년이 지난 일이며 아와의 호족들이 세운 두번째 정권이 된다. [7] 자신이 하루모토를 공격할 때는 숙적이었던 우지츠나와 연합(옹립)하는 전영적인 하극상 & 괴뢰 정부 성립의 포지션을 보여주었으나 요시테루를 공격할 때는 그런거없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의 나가요시가 막부를 괴뢰화 할 생각 따윈 가지지않았고 막부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 신념을 가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8] 1553년엔 아와에서도 미요시 짓큐가 호소카와 산슈 가문 당주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당주 자리에 앉히는 일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보아 나가요시의 쇼군 추방과 연결되어 있을거라는 의견이 많으며 쇼군 + 칸레이를 밀쳐버리겠다는 미요시 가문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9] 이 쇼군과 다이묘의 대립 구도는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의 대립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10] 당시에 남겨진 문서들을 살펴보면 요시오키와 히사히데, 미요시 나가야스의 이름은 보이는데 나가요시 본인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에이로쿠 연간의 나가요시는 이미 상당한 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11] 쿠게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는 나가요시가 후유야스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살해하였다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통설로는 히사히데의 참언으로 인해 나가요시가 살해한 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히 부정당하고 있다. 당장 당시의 군키모노에서도 히사히데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저 "누군가(人)"로만 기록되어있다. [12] 더군다나 나가요시 본인은 아와에서 직접적인 활약을 한적이 없기에 나가요시 행사의 테마를 정하기도 상당히 난감하다. [13] 창천록에선 80대까지 찍었다. 통솔과 무용이 통합된 시리즈였기에 보정을 넣은 것 같다. [14] 이름이 짓큐로 제대로 나오는 건 최신작인 대지에서고 이때에는 요시카타로 등장한다. [15] 암우나 자멸과는 달리 내정 자체는 다른 AI들에 비해 꿀리지는 않는데, 일정 이상 세력확대를 전혀 안 한다. [16] 일본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지대. [17] 요시오키의 사망으로 인해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된 나가요시가 1564년 사망. 요시오키 대신 나가요시를 계승한 미요시 요시츠구에 의한 쇼군 요시테루 살해. 이로 인한 노부나가의 상락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