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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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이 畿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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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도 東山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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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도 山陰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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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요도 山陽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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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무츠국에서 이와키국(磐城国), 이와시로국(岩代国), 리쿠젠국(陸前国), 리쿠추국(陸中国), 리쿠오국(陸奥国)이 추가로 분리 신설되었다. | }}}}}}}}} |
[ruby(山城,ruby=やましろ)](산성)
오늘날 교토 남부 지역이며 고키시치도 구분에 의하면 키나이(畿內, 기내)[1]에 속한다. 보통은 조슈(城州)라고 불렸으나 산슈(山州)라고도 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요슈(雍州)라고도 불렸다.[2]
야마시로를 이르는 한자 단어로 원래는 '山 代'를 썼고, 7세기경에는 '山 背'란 표기로 번국이 설치되어 두 단어 모두 사용되었으나 헤이안 시대인 784년 간무 천황이 수도를 헤이조쿄(平城京, 평성경)에서 오늘날의 교토에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헤이안쿄(平安京, 평안경)'라 지으면서 산과 강이 겹겹이 에워싼 것이 마치 천연의 성과 해자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 山 城'으로 개칭했다. 이후 이것은 원래는 '조(ジョウ)' 또는 '키(き)'로 읽는 '城' 자를 '시로( し ろ)'로도 읽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JR 서일본 관할 나라선 야마시로타가역, 야마시로아오다니역에 이 명칭이 남아있다.
2. 후소급 전함 2번함 야마시로
후소급 전함 2번함으로 네임쉽 후소와 똑같이 구조상의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3] 전함으로서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고, 결국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전함, 순양함들이 발사한 포탄과 구축함들이 발사한 어뢰 4발에 피격되며 격침되었다. 이때의 포격전은 해전사에 있어 전함 간의 마지막 포격전이었고, 야마시로는 전함 간 포격전에 의해 격침된 마지막 전함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0년대에 함내에 이질이 돌았는데 그 이유가 외출금지 당하기 싫어서 수병들이 분변검사를 가라로 했기 때문이다.[4] 결국 이질이 순식간에 함내에 전파되었고 함장 이하 전원이 이질 보균자가 되어서 단체로 입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일은 야마시로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고 아카기와 카가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3. 사람 이름
3.1. 실존 인물
3.2. 가상 인물
- 나루토 - 야마시로 아오바
- 도사의 무녀 - 야마시로 유이
- 동방 프로젝트 - 야마시로 타카네
- 마도정병의 슬레이브 - 야마시로 렌
- 마브러브 얼터너티브 토탈 이클립스 - 야마시로 카즈사
- 벽람항로 - 야마시로(벽람항로) - 위 항목의 전함을 의인화했다. 특이사항으로 실제로는 된 적이 없는 항공전함 개장을 실제 개장된 적 있는 이세급 항공전함들을 제치고 최초로 달고 나왔다.
- 아코와 밤비 - 야마시로 아코
- 여름의 폭풍! - 야마시로 다케시
- 유희왕 ARC-V - 야마시로 타츠야
- 전함소녀 - 야마시로(전함소녀) - 위 항목의 전함을 의인화했다.
- 함대 컬렉션 - 야마시로(함대 컬렉션) - 위 항목의 전함을 의인화했다.
[1]
오늘날
간사이(關西, 관서) 또는 긴키(近畿, 근기)라 불린다.
[2]
유래는 고대 중국의 수도인
장안과 그 수도권을 이르던 옹주를 일본 역시 수도인
교토를
낙양,
장안에 비유하면서 옹주 역시 가져와 부르게 된 것.
[3]
그나마 야마시로는 후소처럼 함교의 뒷부분을 파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소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태의 함교를 갖고있긴 했다. 물론 이 정도 차이점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었기에 눈에 띄게 나은 점은 없었다.
[4]
1918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이질은 법정전염병이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법정전염병으로 보균 혹은 감염 사실이 확인되면 관리대상자가 되어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외출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