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0:20:38

미하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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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28d00><colcolor=#fff>
파일:Michael-I-Romanov-Wedekind.jpg
출생 1596년 7월 22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645년 7월 23일 (향년 49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묘소 대천사 성당
재위기간 루스 차르
1613년 2월 21일 ~ 1645년 7월 23일
서명
파일:미하일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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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28d00><colcolor=#fff> 가문 로마노프 가문
이름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아버지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어머니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셰스토바
형제자매 타티아나
배우자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돌고루코바 (1624년 결혼 / 1625년 사망)
예브도키야 루캬노바 스트레시네바 (1626년 결혼)
자녀 이리나, 펠라기아, 알렉세이, 안나, 마르파, 이반, 소피아, 타티아나, 예브도키야, 바실리
종교 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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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스 차르국 차르.

러시아 제국까지 이어지는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로, 표트르 대제의 할아버지이다. 현재 러시아 영토의 80%정도를 완성시킨 차르이며 아들 손자도 영토확장을 많이 했다.

2. 생애

이반 4세 사후 동란 시대를 거쳐 젬스키 소보르(전국 회의)에서 루스 차르국의 새 차르를 선출했는데, 그는 공포의 이반 4세의 첫 번째 황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의 오빠인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였다.

겨우 16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때 수녀되기를 강요당했던 어머니를 따라 수도원에 살았던지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주변 친척들이 대부분 정치를 담당했다. 시작 배경이 이러다 보니 손자, 표트르 1세의 시절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들은 대 보야르, 정교회의 집중 견제를 받아 왕권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즉위 초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정전 협정을 맺었으나 그 대가로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잉그리아를 할양했으며 덤으로 카렐리야 일부 지역까지 할양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와도 데울리노 휴전협정을 맺어 스몰렌스크 등을 양도했다.

1619년부터는 정교회 수도자였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잡혀갔던 그의 부친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가 귀국하여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고 동시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33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 다시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패배하고 농노제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지그문트 3세가 죽자 즉위 초 빼앗겼던 스몰렌스크를 되찾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으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에게 탈탈 털리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넘어간 영토 할양을 최종 인정하고 루스 차르국의 무능함만 드러내는 치욕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