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6:24:12

페이시스트라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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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시스트라토스의 당쟁 승리, 정권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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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Πεισίστρατος | Peisistratos
파일: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jpg
페이시스트라토스
Πεισίστρατος | Peisistratos
출생 기원전 600년경
사망 기원전 527년
재위기간 아테네의 참주
1차 기원전 561년
2차 기원전 546년 ~ 527년

1. 개요2. 상세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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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Πεισίστρατος(Peisistratus)[1]
기원전 600년(추정) ~ 기원전 527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로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치(tyranny)를 논할 때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된다. 유능하고 인기 좋은 독재자의 원형 격인 인물로, 예나 지금이나 평가가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고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당시 아테네가 당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사병을 통해 최상위 결정 기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여 아테네의 초대 참주로 등극했다. 이후 자기가 실각시킨 당들의 연합 공격으로 1차례 추방당했으나 에우보이아 섬의 금은광 채굴장에서 10년간 부를 축적한 뒤 사병을 거느리고 아테네에 입성한 그는 참주로 복위해 종신 독재를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테네에서는 510년까지 2대에 걸쳐 참주정치가 실시되었다.

2. 상세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의 부친인 히포크라테스[2]는 아테네의 귀족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역시 귀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565년경 아테네가 근처의 도시국가인 메가라를 공격했을 때인데, 이 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군의 장군으로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정치에 본격 뛰어들었다.

이 당시 아테네는 솔론의 개혁법안이 실험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으며 솔론은 해외여행 중이었다(솔론 항목 참조). 솔론의 부재중에 아테네에서는 세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귀족과 부유층을 대표하는 평야파(Pediakoi)로 리쿠르고스가 이끌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신흥 상공인과 무역업자들을 대표하는 알크메오니다스(알크메온) 가문[3]의 해안파(Paralioi)로 이 가문의 수장인 메가클레스가 이끌고 있었다.[4] 나머지 한 세력은 평민과 서민층을 대표하는 산악파(Hyperakrioi)였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의 아버지가 발견한 광산의 수입으로 산악파에 속한 인물들을 회유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기원전 561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산악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참주에 올랐다. 결국 무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찬탈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헤로도토스가 서술하기를 페이시스트라토스 본인이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민회에 나가서 자신을 호위해줄 사병들을 거느릴 수 있게 허용해달라고 읍소했다고 한다. 당시 귀국해 있던 팔순의 솔론은 사병허용안건에 대해 토의하는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그 위험성을 역설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50명의 몽둥이로 무장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과연 솔론의 우려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병들은 무력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정권을 찬탈했다.[5]

정치공작을 통해 참주에 오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농업정책을 펼쳐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절치부심하고 있던 리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 세력이 힘을 합쳐서 5년만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쫓아냈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해외로 망명한다.

하지만 리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정권을 잡자 두 세력간에 다시 싸움이 벌어진다. 결국 메가클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조건으로 협력을 제안했으며, 이를 받아들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클레스의 도움으로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이 때 메가클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로 돌아올 명분을 만들기 위해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 갑주를 입히고 마차에 태워 아테네 여신으로 위장시킨 후 아테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이 아테네 여신의 마차 주변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 여신과 함께 돌아왔으니 그의 복귀를 환영하라고 외치게 한 후, 아테네 여신의 도움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메가클레스가 실제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6] 확실한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큰 저항 없이 아테네로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귀후에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처한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메가클레스는 결혼 후에도 자신의 딸을 멀리하면서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결국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벌어졌다. 메가클레스 세력에 위협을 느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인 히피아스 히파르쿠스와 함께 다시 에레트리아로 망명한다.

이후 10년간 아테네로 다시 입성하기 위해 아테네의 인근 폴리스인 에레트리아에서 와신상담하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두 아들은 에레트리아에서 군사적 기반을 확보한 후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의 아르고스 두 도시를 설득한 끝에 자금과 군사를 빌릴 수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용병부대를 마라톤 평원에 집결시킨 후 드디어 아테네로 진군한다.

뒤늦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된 아테네는 군대를 소집해서 막아보지만 아테네군은 페이시스트라토스군에게 참패하고 흩어져 버린다. 결국 기원전 546년, 당시 아테네를 장악하고 있던 메가클레스의 알크메오니다스 가문은 해외로 망명하였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가 된지 15년만에 완전히 아테네를 장악한다.

저항세력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과는 다른 형태의 개혁을 실시한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시키는 정치개혁을 실시했고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여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하였으며 올림픽과 디오니소스 제전 같은 문화정책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나는 아테네인이라는 동질감과 자부심을 갖도록 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대중을 현혹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건물 축조와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그의 시기에 아테네에는 각종 신전이 세워졌으며 수도 공사도 실시됐다. 이로써 아테네는 문화적 번영을 누렸으며,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를 '크로노스의 황금시대'에 비유하며 굉장히 유능했음을 인정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아테네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에 자신대에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히피아스[7]는 폭정으로 지지를 잃고 기원전 510년에 추방당하면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구축한 참주정은 2대만에 멸망하고 만다.

3. 여담

농민들에게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십일조를 시행하였다. 그러다 히메토스 지역을 방문하던 중 어느 농부가 돌밭에서 힘겹게 쟁기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 땅을 갈아서 얻는 게 뭐냐"라고 묻자, 농부는 그를 몰라보고 "고통과 아픔밖에 얻는 게 없죠. 페이시스트라토스 그 인간이 이 고통과 아픔이나 십분지 일을 가져가준다면 좀 좋으련만."이라고 푸념을 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말을 듣고 웃었고 그에게 면세권을 부여했다. 이후 그 농부의 땅은 '면세 농장'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 영문으로 이름을 쓸 때는 Pisistratus, Peisistratus, Peisistratos 등 다양한 철자로 쓴다. [2] 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이다. [3] 이 가문은 대대로 고대 아테네의 최고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나중에 2대 참주 히피아스를 내쫓은 것도 알크메오니다스 가문이었으며 페리클레스의 외가도 알크메오니다스 가문이다. [4] 나중의 아테네제국 시절처럼 상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모든 파벌들을 압도하는 때는 아니었다. 아테네가 해상강국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전쟁 직전 테미스토클레스의 파격적인 해군팽창정책으로 인한 제해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아테네는 같은 아티카 지방에 있는 메가라와 아웅다웅하는 수준이었다. 제해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상무역은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해안파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다. [5] 이 사건으로 인해 아테네의 정치상황에 크게 실망한 솔론은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6]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이런 엉터리 수작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인지 몰랐다고 한탄을 하고 있다. [7] 아우 히파르쿠스 공치제였으나 히파르쿠스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