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3:57:53

러시아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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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주의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иализм | Russian 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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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иализм, Русский империализм
영어: Russian imperialism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지배했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던 동유럽, 중부유럽, 중앙아시아, 캅카스 동아시아, 알래스카 등지에서 펼친 패권주의적이거나 제국주의적인 정책.

러시아는 과거 해양 진출을 통해서 식민지를 건설한 서유럽 식민제국과는 달리 지정학적으로 해양 진출이 어려웠다. 대신 육지를 통해서 국경을 마주한 동유럽, 캅카스, 중앙아시아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처럼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피지배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바다를 건너야 하는 기타 식민제국과는 달리 세력 투사가 매우 쉬운 편이었고, 실제로도 패권행사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의 이런 행보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건국된 뒤 혁명을 명분으로 내세워 제국주의를 배격한다면서 변화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영향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소련 제국주의가 지속됨으로써 그 근본은 동일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 정치권에서 추구하는 방식은 소련 시대의 공산주의 대신 슬라브 민족주의와 러시아 국수주의로 그 수단이 회귀하였을 뿐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상술했듯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자국의 영향력 투사를 위해 무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으며, 해양국가 특성이 강했던 영국, 미국 등과 달리 대륙국가라는 특성상 이런 무력투사가 매우 용이했다. 그래서 폴란드에 대한 카틴 학살, 우크라이나에 대한 홀로도모르, 부차 학살 같이 강압적인 탄압과 학살이 여러 차례 자행되었다.

2. 역사

2.1. 러시아 제국

러시아는 루스 차르국 이래 꾸준히 시베리아 캅카스,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동유럽에 위치한 루스인의 민족국가로부터 벗어나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여러 다민족이 거주하는 제국이 되었다.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피지배민족들에게 러시아의 문화에 강제 동화되는 루스화(Russification) 과정을 강요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러시아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적 전통을 가진 민족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력을 동원해 자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민족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 피지배민족의 독자문화를 금지시키고,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를 주입시키도록 했다.

2.2. 소련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소비에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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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라며 비난하면서(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1]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수렁에 빠져있던 러시아 공화국 10월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쟁과 내분으로 피폐해진 러시아의 당시 상태로는 더는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때 이미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불만이 잔뜩 쌓여 있었던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했고, 발트 3국, 벨라루스, 폴란드, 캅카스, 핀란드같은 지역도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제국은 러시아를 약화하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 시대에도 불리했지만 혁명 이후의 혼란으로 더욱 약체화되어 번번히 패했다. 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현재의 발트 3국,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캅카스, 핀란드 지역을 포기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소련 러시아 제국과 비슷한 패권주의 강대국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은 건국 초창기 민족 국적을 탈피하고자 한 국제주의 영향으로 국제적이면서도 탈민족주의적인 국가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종종 '대국적 쇼비니즘(Великодержавный шовинизм)'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할 정도로 러시아 제국주의에 비판적이었다. 레닌은 논설을 통해 러시아어 대신 각 민족 고유 언어를 교육시킬 것을 주장했으며,[2][3]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정교회로 개종을 강요당했던 중앙아시아, 캅카스, 시베리아 등의 비기독교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자치를 보장했다.

레닌이 집권하던 시절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 및 옛 러시아 제국 내 비러시아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토착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을 시행하면서 각 공화국, 자치공화국 또는 자치주, 자치구별로 민족어를 교육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 시기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아랍 문자 등 외래 문자로 표기되던 현지어들을 라틴 문자로 재정리하고 보급해 문맹률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4]

아울러 러시아 제국이 보유하던 영토 주권에 '비교적' 덜 집착해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핀란드와 발트 국가,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했다.다시 잡아먹을 기회만 노렸지만 1921년에는 카라한 선언을 통해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했다. 또한 일본 제국 사할린[5]을 할양할 것을 타전하는 등 여러모로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말이 있었지만 출처가 확인되지는 않았고, 되려 북사할린(사가렌)을 시베리아 출병의 일환으로 점령한 일본이 영원히 집어삼킬까봐 우려되었는지 1925년에 일본에 최혜국대우 해주는 대신 군대를 빼달라고 요청하였다. 즉 일본에 사가렌을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 일소기본조약또한 레프 카라한이 체결하였기에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소련이 보인 이러한 모습은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을 추구하던 민족주의 지식인들[7]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이후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설립되고 국민당마저 친소 노선을 잠시 걸었다. 허나 이는 다시 소련이 준다고 했던 만주의 철도 반환을 거부하면서 말을바꿔서 틀어지게 되었고 역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는 사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레닌 시기에도 무조건 탈민족주의적, 반패권적 면모만 있지는 않았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볼셰비키 내부 및 반대파로부터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이에 대해 레프 트로츠키가 독일 제국은 곧 패망하며, 국제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독일 제국에 할양한 영토를 곧 돌려받을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러시아 제국주의 경향은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이 망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지만 적군의 저조했던 전투력과 미비한 지휘체계 및 열악한 보급, 그리고 서방의 백군 반공세력 지원이 겹쳐 조약으로 내준 영역 중 대부분을 되찾지 못했다. 그나마 러시아 내전을 통해 캅카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부는 되찾을 수 있었고, 여기에 중앙아시아에 수립한 괴뢰국인 부하라와 호라즘까지 총 6개국을 구성국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하였다.

1924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당시 소련이 표방했던 국제주의적 성향은 점차 일국사회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인 사회주의로 대체되었다. 레닌 사후 자신을 중심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하려던 스탈린 입장에서 볼 때 소련의 국제적인 성향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레프 트로츠키가 중심적으로 주장하던 논리였다. 스탈린은 대숙청 등을 통해 당시 다양한 조류를 이루고 있던 트로츠키 등의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국제사회주의 역시 금기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해석을 사실상 코민테른으로 대표되는 소련 공산당 통제 아래 두었다.

특히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국(Отечество, Родина)[8]으로 대표되는 애국주의적인 이념[9]을 강화했으며, 이후 1945년 소련이 독소전쟁 승리를 통해 패권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 혁명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세계 사회주의의 조국이 아닌 또다른 러시아 제국으로써 패권주의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너지 임레, 알렉산데르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해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옛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고, 특히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을 유지하고자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소련의 패권주의적 모습은 냉전 당시 좌파 및 사회주의 진영에 분열을 일으킨 중요 원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했을 때, 서유럽에서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였던 영국 공산당에서는 많은 당원들이 헝가리 혁명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에 실망하여 탈당했을 정도였다.[10] 이후 프라하의 봄으로 소련의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재확인한 서구 좌파 정치세력은 소련에 충성하던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과 사회민주주의,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 제3의 길 등 기존 소련 중심적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탈피하는 노선으로 분화하였다.

하지만 전후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미국과 경쟁하려 하면서 촉발된 군비경쟁은 소련 경제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지출을 강요했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사고 등 문제로 재정적으로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등으로 언론이 자유화되자, 그동안 소련 내부에서 억눌려온 민족 갈등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이후 소련은 급속도로 힘을 잃기 시작해 1991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2.3. 소련 붕괴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 정치, 경제적으로 큰 후폭풍을 겪었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에 비해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경제, 정치 등 모든 면에서 약화되었다. 소련 시절 3억에 육박했고 세계 3위이던 인구는 현재 절반밖에 안 되고,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소련 시절 GDP의 5분의 1 이하로 줄었다.

1990년대 러시아가 정치, 경제적인 위기로 혼란을 겪는 동안, 냉전 시절 바르샤바 조약 기구, 코메콘에 소속되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과 러시아가 행사하던 영향력으로부터 탈피함과 더불어 동시에 서구권 시장 진출을 위해 서방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기구 가입을 서둘렀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과거 사회주의권에 소속되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유럽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적극적으로 가입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After coming to power in Russia in 2000, Vladimir Putin promoted great power-imperial nationalism that integrated Soviet, Tsarist and Eurasian symbolism.
2000년 러시아에서 집권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소비에트, 차르, 유라시아 상징주의를 아우르는 강대국-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추진했다.
Taras Kuzio (2010), Nationalism, identity and civil society in Ukraine: Understanding the Orange Revolution, Communist and Post-Communist Studies 43: 287
1990년대 후반 정국 혼란과 더불어 친인척 부패 논란, 건강 악화로 인해 초대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1999년 12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옐친의 후계자로 지명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푸틴은 임기 초기에는 엉망이 된 자국의 경제와 군사력을 재건해야 했기에 북미- 서유럽 친서방 동구권 국가들과의 정면 대립은 피했다.[11]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자, 정치적으로 러시아의 위상을 소련 혹은 러시아 제국 시절 수준으로 되돌리고자 옛 소련 공화국들을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러시아는 친러 독재정권이 들어선 벨라루스를 비롯해 비교적 친러 성향에 가까운 구 소련 구성국들을 유라시아 연합으로 재통합하거나 천연가스, 석유같은 자원외교를 통해 러시아와 밀접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도록 유도하였다.

2.4. 남오세티야 전쟁

그러던 중 2008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등과 분쟁을 겪고 있던 조지아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당시에는 자국 영토였던) 남오세티야를 공격했다.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는 조지아 독립 후인 1991년부터 자치권을 두고 조지아 정부와 분쟁 중이었고[12], 1995년 러시아군이 분쟁에 개입하면서 대강 수습된 이후에도 관할권을 두고 자잘한 분쟁이 있었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헤일 사카슈빌리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미국과 가까워진 외교관계, 강화된 군사협력 등을 바탕으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무력으로 제압해 러시아의 반발을 무력화하고 이들 분쟁지역을 조지아 정부 통제 아래 두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조지아군이 공격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는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러시아는 이를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최종적으로 조지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사건으로 주변국에 경고를 주려 했지만,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서방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구소련권에서 벌이는 확장정책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기 시작해 오바마 집권 이후 MD 계획을 철회하고 관계 개선 메시지를 보내는 등, 러시아에 더이상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방 국가들은 이후 구소련권에서 영향력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llary_Clinton_and_Sergei_Lavrov_with_reset_button.jpg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에게 '리셋' 버튼을 선물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당시 회동을 다룬 AP통신 뉴스.

2.5.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는 동구권 및 구 소련 구성국을 상대로 자국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해나갔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 특히 동유럽의 구 공산권 국가와 발트 3국역사적 PTSD라고 부를 만한 공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이러한 대립이 무력을 동반한 큰 충돌로 터진 곳은 러시아와 역사적 접점이 많은 우크라이나였다. 1991년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는 서북부를 중심으로 한 반러 세력 및 친서방 세력과 동남부를 중심으로 한 친러 세력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따라서 정권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외교 정책도 친서방과 친러를 오가는 유동적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중 2014년 친러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가 구상하던 유라시아 연합의 일원으로 관세동맹에 관련된 경제지원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부패와 무능으로 인기가 떨어진 야누코비치 정권에게 품은 불만이 터지는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파면되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중 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큰 위협을 느꼈다. 우크라이나가 다른 국가들처럼 러시아와 심하게 대립하진 않았고[13] 러시아 또한 무조건적으로 타국의 민주화 시위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2010년 키르기스스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당시 대통령 아키예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몰아내도록 방조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가 물러난 우크라이나는 반러 친서방 국가가 될 것이 뻔했는데, 푸틴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너무 가까웠고, 무엇보다 과거 2011년 러시아 총선 사태 당시와 같이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돌리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인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장래 우크라이나에 반러 친서방 정부가 등장할 것이라고 판단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러시아계의 국민감정을 자극해 크림반도를 군사적으로 병합했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우크라이나 분리주의 반란을 조장하여 군사적으로 개입하였다. 돈바스 전쟁 문서 참조. 군사적으로 막대한 가치가 있는 크림반도를 병합함으로써 푸틴은 소련 해체 이후 처음으로 옛 영토의 일부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국내 정치에서 기존에 협력관계이던 엘리트들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절대적 지위를 얻었다.

이때부터 서방도 가만 있지 않았다.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경제제재를 걸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웠다.

러시아가 선제공격을 가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대놓고 대립각을 세웠다. 돈바스 지역의 '독립', 즉 ' 돈바스 전쟁'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내 친러 세력은 이탈하거나 몰락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일부 지역의 러시아어 공용어 정책을 완전히 폐기하고 자국에 남은 러시아어 유래 지명을 갈아치우는 정책을 취하며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을 강화해나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해 NATO에 가입하고자 했고, 이를 구실로 러시아는 2022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22년 우크라이나를 향한 선전포고문에서 우크라이나는 나라로서 성립한 적이 없고, 소련의 임의적인 연방 구성국 국경 설정은 이상주의적이고 무책임했다며 강도 높게 비판함으로써 러시아 패권주의적 인식을 드러냈다.

3. 관련 사례

3.1. 몰도바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트란스니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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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도바는 역사적으로 이웃나라인 루마니아의 한 지방이었다. 루마니아는 역사적으로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로 나뉘어 있었다. 트란실바니아는 본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로 오스만 제국 침공의 여파로 에르데이 공국으로 분리되었다가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에서 에르데이 대공국으로 재편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대타협으로 다시 헝가리 영토가 되었던 반면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은 그대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카를로비츠 조약 이후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면서 몰다비아 북부의 부코비나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도중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여파로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베사라비아로 알려진 프루트강 동쪽의 몰다비아 영토가 러시아 제국 영토로 귀속되었다.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으나, 1940년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 후 루마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협박하여 부코비나 북부와 베사라비아를 강탈했다. 1941년 루마니아 왕국은 추축국에 가담한 이후 소련에게 빼앗긴 실지를 다시 탈환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다시 소련 영토로 편입되어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들어섰다.[14]

1991년 소련 해체를 계기로 몰도바의 독립 당시 몰도바는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루마니아와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소련 시절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은 몰도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15]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분쟁을 지원하지 않았지만, 소련 해체 이후 해당 지역에 주둔해있던 자국군 소속 제14근위군 병력이 몰도바군과 교전하도록 허가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원했다.[16][17] 결국 1992년 몰도바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휴전협상을 맺으면서 분단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은 몰도바 정치계에 중요한 여파를 남겼다. 몰도바 정계는 전쟁 이후에 정치적 의제로써 루마니아와의 통일이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후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이용해 몰도바가 루마니아, 유럽연합과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정치적 인질로써 이용했다. 그 결과 몰도바는 지금까지 러시아군의 주둔 아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3.2. 몽골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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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외몽골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에게 점령당하여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통치를 받았다가 적군에 의해 재점령되어 몽골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몽골 지도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숙청을 기획했다. 1937년 소련은 일본과 국경분쟁을 이유로 NKVD 위원이었던 미하일 프리놉스키를 파견, 소련식 대숙청의 요소를 몽골에 도입하면서 대숙청을 계획했다. 몽골 내 대숙청은 1937년 9월 10일 몽골 정부 고위직 65명의 체포를 시작으로 1939년까지 진행되었다. 처이발상과 소련이 기획한 대숙청으로 인하여 몽골 지식인 사회는 사실상 몰살되었다.[18]

이 시기 몽골에서는 전통 종교였던 티베트 불교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대숙청 시기 몽골에서는 약 18,000명 가량의 수도승이 사형을 선고받고 수천여명 가량이 강제로 환속되거나 몽골군에 징병당해야 했다. 대숙청을 계기로 처이발상은 몽골에서 독보적인 권력을 확보했다.[19]

처이발상이 사망하고 탈스탈린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소련은 몽골 정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몽골 인민 공화국은 1991년 민주화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전반적인 분야에서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종속되어야 했다.

3.3. 발트 3국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발트 3국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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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라는 동유럽의 군사 강국이었으나 독일 기사단을 막아내기 위해 폴란드 왕국과 연합했다가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되었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지배를 받았다가[20] 에스토니아 북부는 스웨덴,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스웨덴-폴란드 전쟁으로 1629년부터는 라트비아 북부에서 리가에 이르는 비제메(Vidzeme) 지역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웨덴은 대북방전쟁으로 몰락하면서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러시아 제국에게 내주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도 폴란드 분할 끝에 지도상에서 사라지며 1795년부터는 발트 3국 전역이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해 발트 3국 지역이 독일 제국에게 할양되자, 발트 3국에는 발트 연합 공국이라는 독일 제국의 괴뢰국이 잠시 설치되었다가 1차 대전 이후 리가 조약을 거치면서 완전한 주권국으로써 독립하였다.

하지만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면서 소련에게 동유럽 분할 점령을 제안하자, 소련은 이에 응하여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조약에서 규정한 비밀 의정서에 따라 1940년 소련은 발트 3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 자국으로 병합하였다. 소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발트 3국 전역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사람을 시베리아로 강제이주시켰고, 이후 1944년 발트 3국을 다시 점령하자 비밀경찰과 군대를 앞세워 독립 의지를 눌렀다. 당시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의 점령에 맞서 일명 "숲의 형제들"이라 불리는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무장독립투쟁을 이어갔다. 발트 3국에서 반소 게릴라전은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소련 시기 발트 3국은 소련 중앙정부의 요구에 따라 필요한 공업, 광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으며, 산업에 부족한 인력을 매꾸기 위해 수많은 러시아인을 이주시켰다. 이렇게 발트3국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인구는 페레스트로이카로 독립이 임박하자,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친정부시위를 조직하거나 독립 후 분리투표를 여는 등[21]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독립을 위협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은 "발트 3국은 역사적 거스름돈"이라는 망언을 남긴 바 있었는데, 13세기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14~15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사실상 키예프 루스의 후신 역할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폭 발언이나 다름없다. 왜 리투아니아가 키예프 루스의 후신이냐면, 당시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키예프 루스가 박살나자 서부 루테니아 지역 대공국들은 폴란드에 의해 멸망하고 동부 러시아계 대공국들은 몽골의 반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리투아니아가 가져간 벨라루스 지역은 되려 리투아니아의 문화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리투아니아가 오히려 루스의 문화를 잘 보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3.4. 아프가니스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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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20세기에 들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은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통치 아래 서서히 근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아프가니스탄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1973년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은 왕이 해외순방을 간 틈을 타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했다. 그러나 다우드 칸은 독재정치로 아프간 민심을 빠르게 잃었다. 이틈을 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은 1978년 쿠데타를 통해 다우드 칸 정권을 전복하고 집권했으며 급진 공산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러한 정책은 중세 이후 이슬람교의 영향이 강했던 토착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와 무장봉기가 발발했고, 정치 상황은 하피줄라 아민이 대통령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대통령이 되어 사태를 진화시키려 했음에도 빠르게 악화되었다.

이에 소련은 더이상 아민 정권을 놔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소련군은 1979년 대통령궁을 급습해 아민을 사살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로 대통령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슬람 반군이 일어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1979년부터 1989년 철수하기까지 소련은 약 10여년 가량 아프가니스탄에서 게릴라들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벌였다. 소련군의 게릴라 토벌 과정에서 아프간 민간인 학살, 강간하고 해당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약 5백만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해야 했다. 전쟁 전 근대화를 겨우 시작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산업기반은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해당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아프가니스탄의 행정공백이 무자헤딘의 군벌화를 초래하였다. 이 때에 만들어진 군벌 중 하나가 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지금의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탈레반이다.

3.5. 우크라이나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반우크라이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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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키예프 공국으로서 뿌리를 공유하였으나, 키예프 루스 이후 서부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편입되고 동부는 러시아로 발전하면서 점차 독립국가로 분화되었다. 이후 폴란드가 쇠퇴하고 러시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 제국으로 병합되었다. 이 무렵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도 형성되었으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1876년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한 엠스 포고령(Ems Ukaz) 등이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은 막대한 전비부담과 전황 부진, 경기침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다. 1917년 11월 러시아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세워진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상대로 사실상 패전에 가까운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때 우크라이나에는 독일의 괴뢰국이 세워졌다. 이후 독일 제국이 패망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치하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소련에게 멸망하고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폴란드에게 멸망했다.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연방 구성국으로 편입시켰다.

1932년에서 1933년 국토 대부분이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터져 약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아사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소련 정부는 국가적으로 추진하던 농업 집단화 정책과 더불어,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건설에 적대적이라고 간주한 자영농 계층을 뿌리뽑으려 하면서 사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에서 반소 여론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긴 소련은 우크라이나인이 대다수 거주하는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다. 소련은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러시아 제국 시절과 별 다를 바 없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강하게 탄압했으나,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로 인해 소련이 설정한 경계 그대로 독립하였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같은 동슬라브계 민족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간섭을 일삼았으며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속국, 속령 정도로 취급하였다.[22] 특히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친러 정권이 붕괴되자 크림반도 합병하고 돈바스 분리주의자들을 사주하여 돈바스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제국주의적 성격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러시아는 결국 2022년에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침공하였다.

3.6. 조지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남오세티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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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7일 러시아 SFSR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폴란드 제2공화국과 치르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23] 1921년 2월 12일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일으켜 멸망시키고 소련을 구성하는 일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전락시켰다.[24] 이때 향도 노릇을 한 오세트인에게 보답으로 세워준 것이 그루지야 SSR 산하 자치주인 남오세티야 AO이다.

독립 후 조지아는 자국 영토 내 자치지역이었던 남오세티야 압하지야와 자치권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2008년 러시아에 편입되려는 남오세티야 지역에 군대를 파병하여 무력으로 남오세티야를 진압하려 하였다. 그렇게 터진 전쟁이 남오세티야 전쟁이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사살된 것을 빌미 삼아 전쟁에 개입하여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조지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조지아 본토까지 초토화시키면서 조지아는 러시아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멸망만 간신히 면했다. 이 사건은 조지아의 반러감정을 크게 심어주었고, 조지아의 외교노선을 반러, 친서방으로 완전히 전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아는 이 때에 독립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인정하지 않고 자국령으로 주장 중이며 지속적으로 수복을 시도중이다.

3.7. 중국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러시아령 다롄
, 봉소전쟁
, 성스차이
, 소련 점령하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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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제정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청나라를 침탈하기 시작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헤이룽강 이북을 강탈했으며,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전체가 러시아령이 되었다.[25]

또한 러시아는 코칸트 칸국 출신 야쿱 벡의 회민 봉기를 틈타 위구르의 제티수 지역을 점령했다. 청나라는 봉기 진압 이후 반환을 요구했으나, 결국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병합을 승인하게 된다.

러시아는 1890년대 다롄을 조차하고 동청 철도를 놓으면서 만주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1901년,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러시아는 만주 전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결과로 만주에서 철수했고 장춘 이남의 동청 철도를 일본 제국에게 넘겨주게 되지만, 장춘 이북의 동청 철도는 여전히 러시아가 소유했다.

러시아는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1914년 투바를 점령했다. 또한 당시 중화민국의 영토였던 몽골도 점령했는데, 이는 몽골 문단에서 서술한다.

1929년 중동 철도[26] 봉천군벌이 회수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소련은 이에 반발하여 만주를 침공하여 봉천군벌을 굴복시키고 중동 철도를 재회수하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들은 중동 철도가 중국을 약탈하는 야만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했으나, 말바꾸기를 한 것이다. # 웃긴 것은 소련은 1935년 중동 철도를 만주국에게 팔아넘겼다. 자칭 ' 반제국주의' 국가가 제국주의자 하수인에게 철도를 팔아넘긴 것.

1930년대에는 군벌 성스차이를 통해 신강을 사실상 지배하였다. 소련은 성스차이의 동의를 얻어 광물 채굴권을 획득하고 지역 특산품들을 수탈했다. 성스차이가 실각하자, 1944년 소련은 반국민당 위구르인들을 조종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세웠으며, 이들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했다.

1945년 소련은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만주를 대대적으로 침공, 점령했다. 소련은 점령 기간 동안 전범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과 더불어 죄없는 중국인들까지 학살했다. 산업 시설은 해체하여 소련으로 가져갔으며, 이로 인해 만주의 경제는 한동안 정체되었다. 또한 만주를 통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했는데, 이는 1945년 중화민국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위반한 것이다. 1946년 소련군은 철수하긴 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장춘 이남까지 포함한 중동 철도를 다시 장악했고, 1952년 반환했다. 또한 뤼순 지역은 1955년까지 소련이 해군기지로 이용했다.

한편 1949년 이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여타 공산국가들처럼 초기엔 친소였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3.8. 중앙아시아

러시아 제국은 19세기부터 카자흐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트 칸국을 정복하며 이들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인의 중앙아시아 이주를 장려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러시아인 정착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원주민으로부터 가축을 강제로 대량 징발했으며, 1916년에는 중앙아시아 주민들을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하자 중앙아시아인들은 바스마치 운동을 벌여 1934년까지 러시아 제국 및 소련에 저항했다. 소련이 성립된 이후 독립되고 자치적인 공화국의 연합을 표방하면서 중앙아시아에 공화국들을 설립시켰지만, 실상은 여전히 중앙아시아를 대상으로 내부 식민주의를 추구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 시절에는 중앙아시아가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 발카르인, 고려인 등의 민족들이 강제이주되는 유배지가 된 적도 있다.

3.9. 체코슬로바키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 프라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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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소련군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켰으며, 런던에 망명 중이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귀국하자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을 후원했다. 그러나 1948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예상 외로 지지부진하자, 소련은 소련군의 지원 아래 경찰, 군과 같은 보안기관을 장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으로 하여금 내각을 해산시켜 비공산당 계열 각료를 추방하고 내각을 장악하는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사회주의 국가로써 오랫동안 소련의 위성국으로 지냈지만, 1968년 신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자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자유화 조치를 펼치자, 장차 사회주의권 전역으로 퍼질 것을 우려하여 프라하의 봄을 군대로 짓밟았다.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일명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해 사회주의 개별국가는 전체의 이익을 제한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발표했다. 이는 수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소련에 실망하여 서구 공산주의자의 경우 유럽공산주의와 같은 독자적 이념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수많은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조국을 떠나야 했다. 둡체크 이후 정권을 장악한 구스타우 후사크는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개혁의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동유럽 혁명 이전까지 공산당 통치를 감내해야 했다.

3.10. 폴란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폴란드 분할
, 독소 폴란드 점령
, 카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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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 시절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27], 혼란 시대, 대홍수 등 숱하게 치고받은 러시아의 숙적인 폴란드이니만큼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폴란드를 멸망시키고 폴란드인을 러시아화하려 했다. 1795년 폴란드 장교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려던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은 코시치우슈코 봉기를 진압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남은 영토마저 분할시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지원해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는 한편,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에도 1830년과 1863년에 걸쳐 두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인들의 독립시도를 철저히 탄압했다. 러시아는 두 차례 봉기를 진압한 후 수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다. 또한 농노제 폐지를 명목으로 폴란드의 전통귀족 계층이었던 슐라흐타 계급을 몰락시켰다.[28] 러시아 제국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폴란드 입헌왕국과 헌법마저 폐지시키고 자국령인 프리비슬린스키로 합병시켰다. 또한 폴란드어 표기를 로마자에서 키릴 문자로 바꾸었다가 폴란드어 사용을 금지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한편, 가톨릭 성당을 폐쇄시키거나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시키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이런 탄압조치에 반발하여 투옥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면서, 폴란드는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1939년 소련은 당시 영토 확장을 원하던 나치 독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협공했다. 소련은 폴란드를 점령한 후 폴란드 동부 영토를 자국으로 합병시켰으며, 이후 폴란드군 포로 및 폴란드 지식인들을 소련 각지에서 학살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한편, 자국령으로 흡수된 영토 내 폴란드인들을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체포하거나 35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을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이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나치의 마수에서 폴란드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상당한 규모로 대독항쟁을 펼쳤던 제2공화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자국에 종속시킬 요령으로 폴란드 내의 선거를 조작하여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29] 또한 폴란드 침공 때 얻은 커즌 선 이동의 영토를 전후 비아위스토크 지역을 제외하고 폴란드에 반환하지 않았고, 해당 영토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을 당시 폴란드 인민 공화국, 특히 새로 폴란드에 귀속된 구 독일령[30]으로 추방했다.

3.11. 핀란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핀란드화
,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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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나폴레옹 전쟁 도중인 1808~1809년 핀란드 전쟁으로 스웨덴이 러시아 제국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러시아로 흡수되었다. 핀란드를 정복한 알렉산드르 1세를 필두로 알렉산드르 2세까지만 하더라도 핀란드 대공국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종교의 자유도 보장하였으나 알렉산드르 3세부터는 동유럽 영토 전반적인 러시아화 정책과 더불어 핀란드 언론의 검열을 강화함과 동시에 니콜라이 2세 재위 시절 1898년~ 1899년부로 핀란드의 자치권을 사실상 박탈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가 독립하자 소련은 레닌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를 구실로 영토를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핀란드를 침공한다. 소련은 이때 핀란드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점령지에 괴뢰정권 핀란드 민주 공화국을 세웠고, 핀란드 민주 공화국을 핀란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핀란드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소련은 핀란드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지만, 핀란드는 겨울전쟁 계속전쟁의 대가로 소련에 당시 핀란드 제2의 도시였던 비푸리(현 러시아 비보르크)와 북극해에 접하는 항구였던 페차모(현 러시아 페첸가)를 비롯한 상당한 영토를 강탈당했으며, 전후 소련은 핀란드에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요구했다. 냉전 시기 내내 핀란드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정치, 경제적으로 소련의 눈치를 계속 봐야 하는 고통스러운 신세를 감내해야만 했다.

3.12. 한반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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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개화기 무렵 일제에 맞서 조선/ 대한제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광산 채굴권, 삼림벌채권 등의 권리를 앗아가고 재정고문과 기기창 고문을 파견하고 대한제국 재정에 간섭했다. 평안도 용암포나 부산 절영도와 같은 영토 조차를 요구하기도 했다. 출처

1945년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 북부에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이때 약탈과 강간이 만연했다고 한다. 일부 주민들은 반공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소련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함흥반공학생사건). 뿐만 아니라 반공적인 인사들은 체포하여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소련군은 일제가 설치한 산업시설도 반출해갔으며, 북한 주민들의 생필품도 공출해갔다. 소련군정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조선인의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폭언을 하기도 했으며,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조선인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소련은 스탈린의 입맛에 맞았던 김일성을 임의로 내세워 북한 정권을 세워 한국을 분단시키고 만다. 또한 1950년,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가, 지원함으로서 6.25 전쟁을 유발하였다.[31] 그 결과 수많은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현재까지 분단이 지속되고 있다. 1956년까지 북한은 소련의 다른 위성국들마냥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은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고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3.13. 헝가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1848년 헝가리 혁명
, 1956년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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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헝가리의 악연은 1848년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헝가리인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1세는 20만명의 러시아 제국군을 앞세워 헝가리 독립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렬히 맞서던 헝가리 독립군은 러시아군의 개입에 급격히 불리해졌다. 결국 헝가리 독립군은 러시아군에 항복하며 헝가리의 독립은 좌절되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헝가리는 추축국 진영에 가담하여 싸웠고,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공산당은 1949년 의회 총선에서 승리한 후 헝가리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에 헝가리 국민들은 당시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라코시 마차시의 스탈린주의적 통치에 질려 있었다. 헝가리 총리로 임명된 너지 임레는 개혁을 내세우며 헝가리 국민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라코시는 너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너지를 해임시켰다. 헝가리인들은 반발하여 시위를 벌였고, 너지는 복직되어 중립을 선포하며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했다. 이에 소련은 헝가리가 자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자 군대를 앞세워 헝가리를 함락시키고 너지를 비롯한 헝가리 내 개혁파 인사들을 처형시켰다. 당시 소련군의 유혈진압 과정에서 대략 3,000여명 가량의 헝가리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13,00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은 유혈진압 이후에 스탈린주의 성향이 강했던 라코시 마차시 대신 카다르 야노시가 지도자가 되도록 지원했다. 카다르 정부는 이전 라코시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헝가리는 1989년 동유럽 혁명 전까지 소련의 위성국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4. 비판

4.1.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

케냐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제국의 종말과 함께 탄생했습니다. 우리의 국경은 우리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며, 영국·프랑스·포르투갈 같은 머나먼 식민지 국가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만약 독립 당시 우리가 민족·인종·종교적 동질성에 기반해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려받은 국경을 유지하기로 합의했고, 위험한 향수를 품고 과거로 뒷걸음질 치기보다 이전의 어떤 나라나 국민도 보지 못한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의 국경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평화 구축이라는 더 위대한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2022년 2월 21일, 마틴 키마니 주 유엔 케냐 대사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한 연설
러시아는 식민제국 시절은 물론, 20세기와 21세기에도 자국의 이익에 반할 경우 군사력을 통한 무력 개입이나 타국의 내정 간섭, 정권 교체 등 적극적인 패권행사를 활용했다. 이처럼 러시아는 19세기 시절 제국주의적 행태를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주변 민족 및 이웃 국가들을 대상으로 펼쳐온 패권주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오늘날 러시아가 동유럽, 서유럽,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주변 이웃 국가들과 분쟁과 반목을 겪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또한 러시아의 이웃 국가들로 하여금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반러,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정치적 횡포로 인해 러시아를 증오하게 만드는 혐러 감정을 낳은 러시아의 역사적 업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방 국가와 가장 큰 차이점으로, 서방 국가도 식민 제국 시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최소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적인 탈식민화 정책의 영향으로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거나 웨스트민스터 헌장과 같이 점진적으로 식민본국과 식민지 사이 평등한 관계와 상호존중 및 발전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식민제국에서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서방 국가들은 옛날 식민제국이 행사하던 영향력이 남아있더라도 과거와 같이 식민 피지배국의 주권을 침해할 만큼 노골적인 패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며, 과거사 분쟁이나 배상 문제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적인 반감이 실제 정치적,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다.[32]오히려 영연방과 같이 과거 식민지들이 서로 교역하거나 교류하는 정치공동체로 전환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러시아도 집단 안보 조약기구 가입국이 구 러시아령이었던 나라들 중심으로 뭉쳐있고 소속국 대부분이 친러이기는 하지만 이들도 완전히 러시아가 좋아서 러시아의 동맹으로 남아있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다 침략 후 괴뢰국을 만들고, 조작된 국민투표를 통해 자국령으로 합병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은 친러 국가들도 러시아를 무작정 지지할 수는 없게 만들고 있다. 왜냐면 자국 내의 소수민족들에게 독립할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러시아의 동남부 우크라이나 병합은 세르비아나 중국도 유엔 표결에서 대놓고 반대는 못 하더라도 기권을 표하고 있다.

결국엔 세르비아마저도 크림반도와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영토라고 선언했다. 이란도 러시아와의 우호관계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의 러시아 편입은 결단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4.2. 러시아 주변국의 반러 감정 확산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키기 위한 완충 지대 확보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면서 대외 무력 투사를 해왔지만, 오히려 그것을 부르짖고 이행할수록 동유럽의 잠재적 완충국들마저도 나토의 편으로 넘어가 버리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제정 러시아만 해도 서쪽 끝이 폴란드에 이르러 충분한 종심이 확보되었고, 소련 시절엔 폴란드와 핀란드는 독립국으로 놔줘야 했지만 동독까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포함시키고 동유럽 국가들을 식민지처럼 부려서 종심을 길게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중유럽, 동유럽 국가들은 재빠르게 NATO에 가입했고, 슬금슬금 NATO와 러시아 간 거리가 가까워지더니 발트 3국이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는 점점 더 위험을 느끼게 된다.

러시아가 발트 3국은 어쩔 수 없더라도 인접한 구 소련권 나라들은 자발적인 친러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국가 전략을 수정해야 했으나, 푸틴의 러시아는 오히려 더 강압적인 패권 확보에 나섰다. 구 소련권 국가들엔 러시아계 혹은 친러 민족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이용해 그들을 선동하여 독립 분위기를 만들고, 해당 국가가 당연히 그들을 진압하려 하면 친러계를 보호하려 한다는 명목으로 침공하여 괴뢰국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조지아가 첫 타자로 당했고, 그 다음 타자를 우크라이나로 찍고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한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도망치기는커녕 키이우에 남아 항전하고, 우크라이나인들도 단결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함에 따라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명목상 중립국으로 남아있던 스웨덴과 핀란드도 이번 전쟁으로 NATO에 가입 신청을 냈다. 아직 튀르키예의 인준 절차가 남아있어 대기 상태였지만 결국 2023년 4월 4일 핀란드가 정식으로 NATO 회원국이 되었으며 유보되었던 스웨덴도 2024년에 NATO 회원국이 되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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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레닌은 조지아에서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이 강압적으로 내세운 소수민족 정책을 비판하며, 스탈린이 자신의 후계자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 스탈린이 펼칠 강압적인 소수민족 정책과 이로 인해 패권주의에 물든 소련의 미래를 내다본 셈이 되었다. 실제로도 스탈린의 치세를 거치면서 소련은 이론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역할보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패권을 위하는 소비에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더 강하게 보였다. [2] 공용어는 필요한가? (러시아어) [3]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초창기에 인공어 에스페란토가 소련에서 잠깐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4] 이러한 문자 개혁에는 문맹률 해소 및 언어 보급률을 높이려는 시도 외에도 당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하던 바스마치 운동 등 중앙아시아가 전통적으로 문화적 접점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튀르크계 내셔널리즘 운동과 유대감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튀르키예에서 아타튀르크가 추진한 세속화, 아랍 문자를 라틴 문자로 바꾼 튀르키예어 개혁 등이 있다. [5] 일본령 가라후토(남사할린)을 제외한 소련령 북사할린(사가렌). [6] 여담이지만 소련 내에서 다른 지역을 대하던 방식은 '민족개념도 없지 않지만 상위 개념으로 볼수 있는 같은 소련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자유로웠다. 소련은 명목상 자치적인 여러 공화국, 자치공화국, 자치주로 이루어졌지만, 어차피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해당 지역의 주민자치권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련 내 수많은 공화국들에 존재하던 자치공화국(ASSR)과 자치주(AO)에서는 소속이 바뀌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1936년 러시아 공화국에 소속되어 있던 중앙아시아 영토를 5개 연방 공화국(SSR)으로 별도 설립시키고 카라칼파크스탄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이양한것이나, 1954년 러시아 공화국 소속이었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계로 볼수 있는 흐루시초프가 원래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편입시킨 것 역시 이러한 인식의 일부였다. 물론 각 공화국들이 주권국가로 독립해버린 오늘날에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다. [7] 대표적으로 쑨원, 호찌민 등. [8] 이러한 단어들은 독소전과 그 이후 소련에서는 거의 밥 먹듯이 쓰였지만,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련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9] 오늘날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기존 서구권의 전통적인 좌파 정치세력과는 달리 보수적이며 애국적인 성향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10] 이 때 소련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당원을 두고 오늘날 서구권에서 극좌 공산주의자를 일컫는 멸칭인 탱키(Tankie)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11] 지금보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집권 초기 푸틴은 서방으로부터 친서방적이라고 평가되었다. [12] 1993년에는 한국에서도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던 적이 있다. [13] 물론 잠가라 밸브와 같이 경제적 이권을 두고 다툼이 꾸준히 있었지만, 대놓고 NATO에 가입한 발트 3국이나 미국 무기로 재무장한 조지아에 비하면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잘 지내는 편이었다. [14] 이와중에 민족구성이 복잡했던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어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주에 남아있다. [15] 러시아인 관리나 군인들만 온 것이 아니라 고의식파 신도들 일부도 이주하였다. [16] 이때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러시아 정치계에 진출한 인물이 1996년 러시아 대선에서 보리스 옐친과 겨뤘던 알렉산드르 레베디였다. [17] De La Pedraja, René (2018). The Russian Military Resurgence: Post-Soviet Decline and Rebuilding, 1992–2018. McFarland. pp. 93–94. ISBN 9781476634494. [18] Christie, Kenneth; Cribb, Robert (29 August 2003). Historical Injustice and Democratic Transition in Eastern Asia and Northern Europe: Ghosts at the Table of Democracy. Routledge. p. 156. ISBN 9781135789688. [19] Sandag, Shagdariin; Kendall, Harry (9 December 1999). Poisoned Arrows: The Stalin-choibalsan Mongolian Massacres, 1921-1941. Westview Press. pp. 154. ISBN 9780813337104. [20] 엄밀히 말하면 에스토니아 북부는 덴마크가 개척하긴 했는데 국왕 에리크 6세의 막장 통치를 거치며 공중분해된 덴마크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데마르 4세가 돈먹는 하마였던 에스토니아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 매각했다. [21] Batt, Judy; Wolczuk, Kataryna, eds. (2002). Region, state and identity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London, Portland: Frank Cass Publishers. p. 222. ISBN 0-7146-5243-1. Retrieved 12 November 2009. [22]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우크라이나/국호 문서의 전치사 논쟁 문단 참조. [23] 해당 전쟁의 종전일은 리가 조약이 체결된 1921년 3월 18일이다. [24] 오늘날 조지아가 NATO 가입에 목을 매는 이유다. 조지아는 아직까지도 중립을 댓가로 독립을 보장한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25] 이는 훗날 중국-소련 국경분쟁을 야기하게 된다. [26] 장춘 이북의 동청 철도. [27]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지그문트 1세 대에 벌어진 전쟁으로 두 나라가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연합하기 전 동군연합 단계에 머무르던 시절 벌어진 전쟁이다. [28] 이 때문에 몰락한 귀족계급 중에는 러시아를 증오하여 독립투쟁이나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아버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소련 비밀경찰의 창시자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있다. [29] 이에 당시 폴란드 임시정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괴뢰정부로 간주하여 폴란드로 귀국하지 않고 영국에 남았으며, 레흐 바웬사가 집권한 후에야 비로소 법통을 인정하며 헌법 전문 및 대통령 관련 물품을 기증하고 해산했다. [30] 당시 폴란드가 가져간 독일령 지역은 포메른, 슐레지엔, 프로이센 지역으로, 이 지역은 폴란드인의 근연민족인 실레시아인이나 카슈브인이 다수 거주 중이었다. [31] 스탈린이 6.25 전쟁에 회의적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 이전의 일이다. 북한이 유엔군에 밀려 38도선 이북으로 쫓겨났을 때, 북중연합사령부 구성과 38도선 이남 재진격에 스탈린이 관여했고, 6.25 전쟁의 정전에 반대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그래서 스탈린 사후에 정전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출처1), (출처2) [32] 당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조우 연대의 존재 때문에 침공을 결정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방 세계에 직접적인 테러를 가하는 존재들은 개똥철학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교리를 들먹거리면서 정작 그를 위해선 모두가 마땅히 희생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서방 전체가 파멸할 때까지 자신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을 무한히 희생시키면서도 그게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없는 절대악의 단체들이지 멀쩡한 군대가 있는 정부의 경우에는 그냥 배상 및 사과만 바라지 그런 짓까지 저지르지는 않는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아예 러시아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러시아도 그걸 문제 삼을 만큼 사이가 매우 험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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