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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ron_ungern.ruem.jpg
이름 로만 표도로비치 폰운게른시테른베르크
(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생몰년도 1886년 1월 22일 ~ 1921년 9월 15일
재위기간 1921년
“나의 이름은 지독한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그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그 누구도 분간하지 못하리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 1921년 폴란드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안토니 오센도프스키에게[1]

20세기 외몽골을 통치했던, 몽골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유럽인 통치자이다.

통칭 미친 남작(Mad baron)
1. 성씨와 가계2. 생애
2.1. 유년기2.2. 청년기2.3. 1차대전기2.4. 러시아 내전기 2.5. 몽골의 지배자2.6. 몰락
3. 운게른 도시전설의 허와 실4.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미친 남작

1. 성씨와 가계

풀네임 독일어로는 로만 니콜라이 막시밀리안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Nickolai Maximilian von Ungern-Sternberg), 러시아어로는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시테른베르크(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현대 몽골어로는 운게른 폰 슈테른베르크 남작(Барон Унгерн фон Штернберг).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이 "운게른 폰 슈테른베르크"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성씨가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고 이름은 로만이다.[2] 족보가 꽤나 복잡한 편으로, 출생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 조국은 러시아, 가계는 독일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헝가리인 혈통도 섞여있었다 하며, 이를 근거로 본인 스스로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 칸의 후손이라 주장한 적이 있다.[3]

본래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가문은 독일, 러시아 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발트해 주변을 무대로 삼던 귀족 가문인데, 가문 자체는 지금도 존재한다. 독일어 위키피디아 문서에 해당 가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2. 생애

2.1. 유년기

상술했듯 로베르트(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는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이었고, 1888년 로베르트 가족은 가문의 본거지인 에스토니아 레발(오늘날의 탈린)으로 이주했다. 당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제국 땅이었고,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일가도 자신들을 러시아 제국 신민으로 여겼다.

1891년 부모가 이혼했고 로베르트는 모친을 따라갔다. 모친은 호이닝겐호이네 남작가의 귀족과 재혼했고 로베르트는 레발 시내에서 40여 마일 떨어진 숲속의 호이닝겐호이네 저택에서 자라며 여름에는 발트해 히우마섬의 별장에서 지냈다. 히우마섬은 200년 넘게 호이닝겐호이네가의 영지였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자신의 귀족 혈통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어지간한 귀족들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농노제가 유지되던 러시아 제국의 변방 숲속 봉건지주였던 로베르트는 시대적 변화와 격리되어 중세인으로 자라났다.

로베르트는 흉악할 정도의 불량소년이었다. 다른 불량배들도 그를 두려워해 건드리지 않았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그와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동물을 고문하기를 즐겼고, 사촌의 애완올빼미를 아무 이유없이 교살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싹수가 보인 셈이다. 로베르트는 1900년경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나 제 버릇 개 못 주고 비행을 저질렀다. 결국 교장이 계부와 모친에게 제발 학교를 그만둬 달라고 사정을 해서 권고자퇴를 한다. 그래서 학교를 때려친 로베르트는 군에 입대해서 러일전쟁에 종군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태운 수송열차가 극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서 제대로 종군하지는 않았다.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이 터졌다. 에스토니아의 농민들도 독일계 귀족 상전들에게 민란을 일으켰다. 가혹한 통치로 원한이 많이 쌓였던 농민들은 귀족들을 린치하고 그들으 대저택에 불을 질렀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호이닝겐호이네 저택도 잿더미가 되었다. 이것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정신적 중세인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어째서 감히 무지렁이 농민들이 이따위 짓을 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평민들이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증오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 상종할 수 없다는 천룡인적 사고방식을 굳혔다. 이 가치관은 평생 그를 지배했다.

2.2. 청년기

1906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육군사관생도로 입학했다. 장교로 임관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동시베리아에 배치되었고 여기서 몽골인, 부랴트인 등 유목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생활방식에 심취했다. 근대라는 이세계에 내던져진 중세인으로서 전근대적 생활방식을 영위한 그들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 같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기승 실력이 뛰어난 기병으로서 유목민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것과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비롯된 고약한 성질머리는 여전했고, 결투를 일삼다 얼굴에 큰 흉터가 생겼다. 이때 뇌손상이 생겼다는 속설이 있는데 연구 결과 그런 증거는 없다고 한다.

1913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인들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돕겠답시고 자원해서 예비역으로 전역했다. 하지만 러시아 관리들은 이런 미친 소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대신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의 러시아 영사관에 주재무관으로 배치되었다.

2.3. 1차대전기

1914년 7월,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국경의 34카자크연대에 배치되며 현역에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시작이었던 동프로이센 침공작전에 종군했다. 동부전선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매우 용맹한, 하지만 지나치게 용맹해서 무모한 장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기병대 돌격 같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를 할 때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성 게오르기 4등장, 성 블라디미르 4등장, 성 안나 3-4등장, 성 스타니슬라프 3등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공을 세우고도 개떡같은 성질머리를 못 버려서 1916년 만취한채 다른 장교를 두들겨 패서 영창 2개월에 처해졌다.

1917년 1월 석방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선인 캅카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2월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황가가 몰락했다. 이것은 정신적 중세인이자 골수 왕권신수론자인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종말적 사건이었다. 그는 혁명을 러시아의 천명이 다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한편 캅카스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평생의 단짝 그리고리 세묘노프를 처음 만났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소수민족들을 인종청소해서 수천 명의 소수민족들이 러시아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들은 상부에 이 난민들을 부대로 조직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혁명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군에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지휘 하에 아시리아인 부대는 소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체 전황에 보탬은 되지 못했다. 세묘노프는 아시리아인들로 했던 경험을 시베리아의 부랴트인을 대상으로 시도해 보자는 발상을 떠올렸고, 케렌스키 정부는 그 계획을 승인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는 부랴트인 연대를 모집하러 동쪽으로 떠났다.

2.4. 러시아 내전기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세묘노프와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로마노프가 복위를 위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1917년 말 중러국경의 동청철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세묘노프와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고, 백군에 참여한 다른 군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둘은 백군 내부에서도 기괴한 이질분자였다. 상술했듯 이미 시대가 시대이기에 귀족들 역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예컨대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백군이 승리하면 볼셰비키의 쿠데타로 해산당한 의회를 다시 열고 의회에서 제정복고 여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들 빅토리아 2 하고 있을 때 혼자 크루세이더 킹즈 2를 하고 있던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세묘노프는 세묘노프대로 유목민들을 규합해 칭기즈 칸의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또라이였다. 세묘노프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본과 결탁했는데, 콜차크와 안톤 데니킨은 이것을 외환죄라고 규정했다.

아무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1905년 이전으로 러시아를 되돌려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일으킨 1918년이 아니라,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던 1905년이다. 이참에 입헌 따위 개소리 집어치우고 전제군주권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크킹적 사고방식(...)이었다.

다우리아 일대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세묘노프는 지멋대로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소장 계급을 주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다우리아에서 "아시아 기마사단"이라는 의용사단을 편성했다. 이 부대는 러시아인, 부랴트인,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몽골인, 중국인, 만주인, 폴란드인, 일본인, 조신인까지 포함된 잡탕 부대였다. 러시아어로 아시아(Азиатская)라는 말에 "야만"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영어권 문헌에서는 이 사단명을 "야만사단"이라고 오역하는 경우가 많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부대는 다른 백군 군벌들이 그렇듯 약탈로 보급을 충당했다. 다우리아와 만주를 지나는 모든 열차를 세워서 약탈했다. 하지만 콜차크에게 보내지는 보급품은 건드리지 못했다.

1919년, 러시아가 내전으로 난장판이 된 틈을 타 중국 안휘군벌이 외몽골을 강점했다( 쉬수정 외몽골 출병). 이것은 외몽골의 자치를 보장하고 영사관 수비병력을 제외한 중국군의 외몽골 주둔을 금지한다는 1915년 캬흐타 협정의 정면 위반이었다. 그러다 안직전쟁으로 몽골에 주둔한 주력병력이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가 소멸했으며 안휘파는 실각했고, 몽골에 잔류한 안휘파 병사들은 그냥 버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만몽 지역으로 왔다. 그는 세묘노프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장쭤린을 알현했고, 하얼빈에서 만주 귀족 지씨와 정교회식 결혼식을 올렸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스스로 부처의 환생임을 주장했다는 속설이 퍼져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뼈대 있는 독일 귀족으로서 그는 독실한 루터교도였고 죽을 때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켰다. 티베트와 불교 문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것은 그저 오컬트 취미일 뿐이었다.

2.5. 몽골의 지배자

콜차크가 패배하고, 시베리아의 일본군도 철수하기로 하면서 세묘노프는 적군을 피해 만주로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1920년 8월 7일 세묘노프를 배신했다. 그리고 사단을 이끌고 외몽골의 수도 우르가(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도시를 점령한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 10월 26일에서 11월 4일간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 동부 케룰렌강 상류로 후퇴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한 몽골인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협조했고, 특히 복드 칸은 밀서를 보내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해가 바뀌어 1921년 1월 3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부대는 우르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아시아 기마사단 병력은 1,460명. 우르가에 주둔한 중국군은 7,000 여명이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 다민족 혼성부대가 유폐된 복드 칸을 구출했다. 2월 4일 마침내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우르가를 함락시켰다. 중국측 장교들과 공무원들은 이미 2월 3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한편 적군 지지 성향 러시아인들도 중국군을 따라 도망갔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500 여명,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은 60여명 사망했다.

전투 이후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부대는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고 유대인을을 학살했다. 약탈이 끝난 뒤 레오니트 시파일로(Leonid Sipailo) 대령이 비밀경찰을 조직해 "빨갱이"들을 수색해 죽였다. 그 뒤 다른 지역의 중국군들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공격해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 버렸다.

1921년 2월 2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몽골귀족들은 복드 칸을 우르가로 모셔왔다. 중국군을몰아내준 보답으로 복드 칸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다르칸 호쇼이 친왕" 작위를 수여했다. 한편 세묘노프는 우르가 점령의 공을 사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계급을 중장으로 높여 주었다.

1921년 2월 22일, 복드 칸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외몽골의 독립군주국임을 선언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몽골인들에 관한 복드 칸의 주권을 존중했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가혹하게 대했다. 현실에서 크킹 플레이를 하던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는 러시아인 빨갱이들보다 몽골인 왕공족들이 더 동족에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적백내전기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명령으로 인해 러시아와 몽골에서 살해된 사람은 총 846명이었다.[4]

2.6. 몰락

1921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극동 공화국의 적군들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군 군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토벌하기 위해 몽골 침공을 시작했다. 그 중 담딘 수흐바타르의 몽골인 적군도 있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적군을 시베리아에서 영격하고 시베리아에서 반공 반란군을 일으키기 위해 원정대를 조직했다. 전쟁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 적군이 수효와 장비 양면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자신이 몽골의 해방자로서 현지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고 딱히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레닌 신경제정책을 입안해 경제통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면서 볼셰비키에 대한 민심이반이 완화되었고, 그래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시베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가담한 병력은 거의 없었다.

6월 11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트로이츠코삽스크(오늘날의 캬흐타)에서 장갑차, 비행기를 동원한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패퇴했다. 적군은 1921년 7월 6일 운게른이 원정대를 이끌고 나가 버리는 바람에 텅 빈 우르가를 싱겁게 점령했다. 하지만 적군은 수도만 점령했을 뿐 아직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병력을 전멸시킨 것은 아니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뒤늦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세묘노프와 일본이 자신을 도우러 올 것이니 합류하라고 현지인들에게 구라를 치고 다녔다. 7월 18일,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은 우르가 탈환을 시도하지 않고 무작정 북쪽으로 진군하여 몽러 국경을 넘었다. 파멸이 목전에 닥치자 무계획적 자살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탄누투바를 거쳐 티베트 쪽으로 가 티베트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겠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미친 남작을 저승까지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병사들은 동쪽으로 후퇴해서 만주와 연해주의 백계 난민들과 합류하고 싶어했는데, 미치광이가 뜬금없이 서유기를 찍자고 하니 폭발했다. 8월 17일, 반란이 일어나 운게른슈테른베르크군의 2인자 보리스 레주킨이 살해당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부상만 입고 홀몸으로 도망가다가 8월 20일 표트르 슈체틴킨의 유격대에포로로 잡혔다. 9월 15일,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재판이 6시간 진행된 끝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형은 그날 밤 즉시 집행되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복드 칸은 몽골 전역의 사찰들에 추모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3. 운게른 도시전설의 허와 실

문서 상단에 있는,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폴란드인 탐험가에게 한 말은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운게른이라는 이름은 온갖 도시전설에 휩싸여 있지만 그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불분명하다.
  • 초급장교일 때 결투를 하다 뇌손상을 입어 광증의 원인이 되었다
    • 연구 결과 아니라고 판명났다.[5]
  • 자신을 칭기즈 칸 또는 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
    •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평생 독실한 루터교도였다. 운게른의 광기에 가까운 용맹과 기마실력을 본 몽골인들이 알아서 그렇게 떠받들여 준 것이지, 스스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6]
  • 위 속설의 연장으로, 칭기즈 칸의 제국을 부활시키겠다고 주장했다
    •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절친 세묘노프 쪽이다. 세묘노프는 몽골 뿐 아니라 오이라트가 지배했던 지역까지 통일하여 내외몽골, 신장, 자바이칼, 탄누투바, 티베트를 단일 국가로 통일시키겠다는 큰 꿈을 가졌다.
  • 자신이 관심법을 한다고 주장했다
    • 그 자신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촌 헤르만 폰 카이저링 백작이라는 자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7]
  • 복드 칸을 핍박하고 자신이 칸이라고 자칭했다
    •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왕권신수론자로, 몽골의 군주인 복드 칸에게 천룡인적 동질감을 느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복드 칸의 관계는 일본의 쇼군과 천황의 관계 같았으며, 그나마도 몽골인에 대해서는 복드 칸의 주권을 존중했다.
  •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했다
    •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러시아 내전기에 죽인 사람은 846명에 불과(?)하다. 몽골의 쇼군으로 군림하던 5개월로 한정해 보면 그 수는 300명을 넘지 못한다.[8]

운게른은 분명히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그 광기는 싸이코패스나 사이비종교의 광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근대라는 이세계에 내던져진 중세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유럽은 아시아를 괴물로 만들면서 인간이 되었다"고 말했듯, 동시에 유럽은 자기 조상들을 원시인으로 만들면서 근대인이 되었다. 운게른은 그 원시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 책임능력이 조각되는 광기(insanity)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근현대에 뚝 떨어져 근현대의 규범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시인을 "미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천룡인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더러운 신민들을 깔아보는 시선을 멀쩡한 정신으로 명징하게 사고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근대라는 이세계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사고방식을 관철하다 쓰러졌(?)다.

현대에 떨어진 원시인은 동물원에 가든가 사살당하든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고, 원시인 운게른은 사살되었다.

4.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미친 남작

이탈리아 만화 코르토 말테제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1920년대 주인공 코르토와 만난다. 공작 부인 마리나 세미노바와 코르토의 대화에 첫 등장. 시베리아 어딘가에서 샤먼에게 점을 보는데 샤먼이 2년 내에 죽을 것이고 많은 피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쏴 죽인다. 제대로 미친 놈으로서 운게른 못지 않게 또라이인 타타르의 도살자 세르게이 세메노프도 완벽히 미쳤다고 평가한다. 나중에 코르토 말테제와 라스푸틴,[9] 상하이리를 포로로 잡는데 라스푸틴이 이름뿐만이 아니라 생김새까지 라스푸틴같다고 기분이 나빠진 데다가 코르토의 여순 드립에 처형을 유보한다. 그리고 코르토는 그의 부대 내에 보관 중이던 세메노프의 크고 아름다운 대포 열차를 박살낸다. 코르토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불러서 서로 랭보의 시를 읆고는 같이 샤먼에게 점을 본다. 이 샤먼도 운게른을 보고 얼마 못 산다고 예언한다. 그리고 코르토에게는 허리 꺾인 검은 용을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운게른에게 코르토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그 다음날 운게른은 코르토 일행을 석방하고 부하 마케이비치까지 붙여준다. 대인배? 나중에 운게른은 적군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적에게 넘겨져 처형되고 코르토가 운게른의 무덤에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허구다.

<아이언 스톰>이라는 2002년작 대체역사 FPS 게임[10]에서 운게른을 모티브로 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유젠버그 남작[11]이 나온다. 아이언 스톰의 세계는 1921년에 남작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출발하여 "패배하지 않은 남작이 다른 백군 부대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여 러시아와 중국을 병합한 뒤, '러시아·몽골 제국'을 세우고 일본과 만주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는다. 그 후 남작은 유럽을 침공하고, 1964년 유럽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서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Western Europe; USWE)'으로 재편성되어 남작의 러시아·몽골 제국과 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맞선다."라는 정신 나간 내용이라고 한다. 이쪽 세계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 구도가 남작의 러시아·몽골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운게른을 모티브로 한 것답게 행적은 운게른과 거의 일치한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936년 시작 시점까지 몽골의 수장으로 남아 있다. 붉은 군대가 와서 엉덩이를 걷어차야 하지만 그 붉은 군대가 없고 러시아도 내부 상황이 개판이라 그냥 놔둔 듯. 싸이코 기질은 어디 안 가서 같은 불교 국가인 티베트와 동맹을 맺고 서북삼마를 합병한다. 그냥 여기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동맹을 풀고 티베트까지 침공한 뒤 몽골 제국 재건을 선포하며 칭기즈 칸 2세를 참칭하는 미친 짓을 벌이며 몽골 고토 회복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후에는 상청천국이나 청나라를 공격하며 중국 본토를 유린하지만 플레이어가 맡지 않고 이 시기를 넘어가면 공기화되거나 러시아나 일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렇게 멸망한 운게른은 대부분 효수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모드에서 플레이 난이도는 높다. 서북삼마군, 티베트, 상청천국을 병합하면 디시전으로 점령지를 초토화시키고 자원을 얻을 수 있으며, 몽골 제국 재건까지는 쉽지만 청나라나 일본이 잠재적 적국이며 러시아가 안정화되면[12] 공업력과 물량에서 몽골이 밀리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최대한 늦게 안정되길 빌면서 일본을 몰아내고 중국과 조선을 점령해서 공업력과 병력을 최대한 늘리고 러시아와 결전을 벌여 이기면 된다. 게임에서 운게른은 국가 원수 및 육군 참모총장, 장군으로 등장하며 국가 원수 운게른은 기병 및 자원 생산량 버프를 준다.


[1] Ossendowski, Ferdinand. “Chapter XXXVI. A son of Crusaders and Privateers”. Beasts, Men and Gods. 191쪽. "My name is surrounded with such hate and fear that no one can judge what is the truth and what is false, what is history and what myth." [2] 단, 몽골어 위키백과에는 공식적으로 운게른 폰 슈테른베르크 남작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 [3] Romein, Jan (1962). The Asian Century: A History of Modern Nationalism in Asia. Translated by Clark, R. T. Allen & Unwin. p. 128. [4] 이 중 한국 독립운동가 이태준도 있다. 이태준은 좌익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자금책이었다. [5] Smith, Canfield (1980). “The Ungernovščina – How and Why?”. Jahrbücher für Geschichte Osteuropas 28 (4): 590–595. [6] Kuzmin, S.L., Oyuunchimeg, J. and Bayar, B. The battle at Ulaankhad, one of the main events in the fight for independence of Mongolia., Studia Historica Instituti Historiae Academiae Scientiarum Mongoli, 2011–12, vol. 41–42, no 14, pp. 182–217 [7] Palmer, James (2008). The Bloody White Baron: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Russian Nobleman Who Became the Last Khan of Mongolia. New York: Basic Books. ISBN 9780571230242. [8] 위의 Kuzmin, 2011 [9] 실제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아니라 코르토의 친구인 가상의 동명이인. [10]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B급 FPS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런 주제에 위키가 있다? GOG.com, 스팀에서도 판매 중. [11] 아이언 스톰 위키에서는 모티브만 따온 인물이라고 한다. [12] 특히 브랑겔이 집권한 러시아는 버프를 받아 사단 추가속도가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