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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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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왕정복고 이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스페인 국왕[1]
王政復古 | Restoration of the Monarchy
1. 개요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2.3. 논의는 있으나 실행되지 않은 사례
3. 왕정복고의 조건4. 창작물

1. 개요

외국군에 의한 침략 혹은 나라에서 벌어진 쿠데타 시민 혁명 등으로 합법적인 군주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주정이 강제로 종료된 나라에서 폐지되었던 군주제를 부활시키는 일.

반드시 옛날에는 군주정이었던 나라가 군주정이 폐지되어 공화정이 된 상태에서 군주정으로 회귀하는 경우에만 왕정복고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기존의 왕가가 다른 가문에게 왕위를 뺏길 경우에는 찬탈이라고 하는데, 기존 왕위를 찬탈한 신왕가를 무너뜨리고 다시 구(舊)왕가를 복고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복벽(復辟)이라고 표현[2]해야만 하는데, 복벽은 왕정복고라는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현대에는 왕정복고와 복벽이란 단어를 딱히 구분해서 쓰지 않는다.

전근대 시대에는 군주정이 기본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군주들이 혁명[3]이나 외국 군대에 의하여 퇴위[4]당하였고 냉전이 시작된 시절부터는 공화정이 주류가 되었다.[5] 하지만 원래 정당한 군주가 없는 경우[6]를 제외하고 군주를 쫓아내고 군주정을 폐지 했으나, 군주가 쫓겨난 빈권좌를 두고 각 세력이 서로 싸우는 경우나[7], 혹은 공화정부가 너무 극악으로 일을 못하거나[8], 공화정부가 외세에 너무 휘둘리는 경우[9] 등으로 기나긴 내전이나 내분으로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파탄되는 파국이 지속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래도 기본은 해줬던 옛날의 왕정 체제로 회귀를 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나라 중에서는 실제로 군주정이 복고된 나라들이 있는데, 프랑코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군주제를 복원한 스페인이나 크메르 루주 킬링필드로 개판된 캄보디아에서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쫓겨났었던 시아누크 전 국왕을 다시 옹립한 경우가 있다. 그 밖에도 아프가니스탄이나 리비아 같이 군주제였다가 군주제가 폐지된 이후 독재와 내전, 내분 등으로 개판이 된 나라들 중에서도 군주제 복원 얘기가 나오고 있다. 각 나라별로 군주제 복원 이야기가 나오는 동기에 대해선 공화국의 군주주의 복벽주의 참고.

20세기 중반 들어 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치이념인 만큼 복고를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공화국을 입헌군주제로 복고하려는 것이지, 전제군주제로 복고하자는 주장은 거의 없다.

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

  • 영국
    1642년 영국 내전으로 올리버 크롬웰이 1649년 찰스 1세 국왕을 처형하고 왕정이 폐지되면서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하는 잉글랜드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크롬웰의 독재 체제였고 연극금지, 찬송가 외 노래 금지등 왕정시대보다 빡빡한 사회통제로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며 그나마 통제가 적었던 왕정을 그리워 하게 되었다. 크롬웰이 죽자 사후 그의 아들이었던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으나 리처드는 아버지와 달리 별 다른 정치력이 없었고 영국 국민들 역시 오랜 크롬웰의 통치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에 주둔 중이었던 조지 멍크 장군은 군부내 추종자들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리처드와 정권내 나머지 크롬웰파 세력들을 제거하고, 런던에 들어와 임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유럽에 망명 중이었던 찰스 1세의 차남[11] 찰스 2세가 1660년 왕위에 오르면서 왕정이 다시 복고되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는 오늘날 엄밀한 기준의 공화주의 세력 자체가 없었고, 크롬웰 정권은 부자세습을 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왕정과 차이가 없었다. 찰스 1세의 폐위는 과거 휘그 사관에서 독재적 국왕과 민주적 의회 세력의 투쟁 결과로 미화됐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관점이 부정되고 두 세력 간의 투쟁을 보다 중립적으로 평가한다.
  •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었다가 혼란 끝에 왕정으로 복고된 나라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노로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국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내전과 학살, 베트남군 침공으로 혼란을 거듭했고 1993년 UN의 개입 아래 총선이 치러져 같은 해 제정된 신헌법에 의해 쫓겨났던 시아누크 전 국왕을 다시 국왕에 앉히면서 왕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 쿠웨이트
    1990년 이라크가 침공한 뒤 잠시 이라크의 괴뢰공화국이 세워졌다가 합병되고 걸프전 이후 다시 독립해 왕정으로 돌아갔으나 당시 쿠웨이트 공화국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권은 아닌지라 일반적으로 왕정복고로 여겨지진 않는다.
  • 네덜란드
    왕정복고로 보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1815년 네덜란드는 나폴레옹에게서 독립한 후에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왕으로 옹립하여 공화국에서 왕국으로 전환된 적이 있다. 다만 공화국 시절에도 오라녜나사우 가문이 독립전쟁을 이끈 공로로 세습 '국가원수'직을 맡은 사실상 입헌군주정과 다름 없어 이견의 여지가 있다. 복고란 말은 돌아왔다는 뜻인데 네덜란드는 기존 왕국이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왕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 '세습 국가원수가 있는' 공화국에서 정식으로 왕국이 선포된 사례다.
  • 일본
    일본에서는 1868년 에도 막부를 없애고 천황이 국가의 중심으로 다시 대두된 것을 왕정복고라 표현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대정봉환 항목 참조.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천황과 조정이 형식상으로나마 존재하였고 물러났던 왕실을 복고시킨 것이 아니라 실권을 잡고 있던 무사 정권을 타도한 것이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엄밀한 의미의 왕정복고와는 차이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천황은 여타 입헌군주국들과 마찬가지로 권한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회귀하였다.

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

  •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여러 차례의 왕정복고가 있었다. 루이 17세가 탕플 감옥에서 외로이 죽어간 이후 망명 간 루이 18세에 의해 여러 차례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12] 대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정을 펼쳤다. 나폴레옹이 쫓겨난 이후 부르봉 왕조가 돌아왔다가 다시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의 자유 제정이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 샤를 10세 시절까지 이어졌다. 이후 다시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로 교체되었고, 이 또한 1848년 혁명으로 루이필리프 1세가 퇴위함으로 다시 공화국이 된다. 그런데 첫 대통령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2년에 제정을 선포함에 따라 제정이 복고되었다. 이후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해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다시 제정은 폐지된다.

    이후로도 공화정이 유지되었지만 오랫동안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지지를 받았다.[13] 그리고 프랑스 국내 정치 사정도 적절하게 흘러가서 부르봉 왕조의 계승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가 왕위를 되찾을 가능성도 충분했으나 본인이 사절했다. 그 이유는 샹보르 백작 본인에게 자식이 없어 그의 사후 왕위가 오를레앙파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부르봉의 배신자이자 '입헌왕정'파인 오를레앙파가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고 싶었던 샹보르 백작은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우회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국 샹보르 백작의 반대로 모든 복고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프랑스는 왕정복고가 되지 않은 채 공화정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멕시코
    멕시코는 1823년 아구스틴 1세가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에 1864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괴뢰국이 되면서 멕시코 제국이 되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황자를 데려와 막시밀리아노 1세로 제위에 앉혀 공화정이 제정으로 전환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외세가 세운 황제라는 이유로 3년만에 반란군에게 포위되었고, 프랑스의 외면 속에서 막시밀리아노도 총살되면서 사실상 왕정복고로 쳐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20년에도 미국이 나폴레옹의 형으로서 미국에서 살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멕시코 황제를 제의하였으나 허수아비 왕 노릇은 지긋지긋하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다. 멕시코 내부에서는 괴뢰 제국을 부인하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을 정당한 집권자로 여기고 있다.
  • 그리스
    1924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바뀌었으나 1936년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에 왕정을 복고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67년 군사 쿠데타로 왕이 쫓겨나고 1973년에 군사정권 주도하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974년 군사 정권 퇴진 후 국민투표에 의해 민주 공화정으로 개헌이 확정되면서 공화정 국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헝가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 벨라 쿤에 의해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었으나 루마니아 왕국군과 연합한 호르티 미클로시의 공격으로 공화정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런데 호르티 미클로시는 왕정은 복고했지만 국왕을 옹립하지 않았다. 자신은 섭정 자리에 앉아 함대 없는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을 통치하는 기묘한 체제를 수립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호르티의 집권 전제조건이 공화정이 아닌 왕정을 채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르티가 자신의 충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스위스에서 비밀리에 헝가리로 귀국했지만 호르티는 오히려 카를 1세를 체포해서 추방해 버렸다. 호르티가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호르티 개인의 권력욕 때문이라기보다 당시의 현실적인 상황 때문이다.[14] 어찌보면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15] 섭정 호르티는 독일군의 개입으로 권좌에서 내려왔고, 이후로 헝가리는 소련에게 점령당해 이름뿐인 왕국은 멸망했다. 만약 호르티가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스페인처럼 새로운 왕을 옹립했을지, 아니면 그리스처럼 왕조를 폐지했을지 아니면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지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2.3. 논의는 있으나 실행되지 않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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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정복고의 조건

국민들이 왕정복고를 열렬히 지지한다 하더라도 해당 국가의 실권자들이 원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16]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지간한 근왕주의자가 아니라면 국민들 여론이야 어떻든 자기들이 돌아가며 국가원수 해먹을 수 있는데 미쳤다고 왕정을 복구하겠는가? 캄보디아만 해도 실세인 훈센 총리가 왕정복고를 지지했고, 스페인도 프랑코 총통이 직접 왕정복고를 결정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 정권이 세워지거나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던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등의 나라들은 20세기 중후반기 공산당 정권, 군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다당제 공화정을 선호하고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17] 한국에서도 해방 이후 실권을 잡은 이승만이 대한 황실을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고 적개심을 표출하여 과도한 견제를 하면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8]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선정을 펼쳤던 왕가에 대한 향수가 대단하여 왕정복고가 인기가 높고 전 대통령으로 10년을 집권한 카르자이도 원래 왕정복고파였지만 권력을 잡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왕정복고를 이행하지 않았다.[19]

왕정복고를 하려면 왕실로 옹립하기에 걸맞은 자격을 가진 가문이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피아스트 왕가나 아센 왕가 등의 가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수백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아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왕실의 맥이 끊겨, 토착 왕가란 개념이 사라져버렸다. 이 때문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아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할 당시 국체를 공화정과 군주정, 어느 쪽으로 할지 논의 없이 곧바로 공화국을 선포했다. 다만 발칸반도 일대의 그리스나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에서도 현지 토착 왕가의 혈통이 이미 끊어진 상태였기는 하지만, 왕국으로 독립하였는데 이는 열강들의 간섭 하에 독일이나 덴마크 등지의 다른 나라 왕가나 귀족 가문의 사람을 모셔와 옹립한 것이다. 이들 신생 왕국들의 사례를 진정한 의미의 왕정복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해당 국가들의 사학자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계 왕조가 통치하던 왕정체제를 폐지함으로써 제대로 된 민족주의 정체성을 되찾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는 일단 국민들이 "군주를 다시 모시자"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나라의 정세가 좋지 않아야 한다. 현 공화정 체제에서 실책을 거듭해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과거의 왕정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의미에서 복벽운동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는 이전의 왕실에 대한 국민 다수의 지지가 있어야지 가능하다. 만약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나라의 국민들은 왕정복고 이전에 민주화 또는 정치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왕정복고는 현재 당사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복벽운동을 표방하는 정당도 없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웃나라, 해당 국가에 큰 영향력이 있는 배후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군주에게 주권이 있는 군주국의 존재는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오스트리아에서도, 심지어 근왕파가 내전에서 승리한 헝가리에서도 복고되지 못한 것은 만약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고되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주변국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티 미클로시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들이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를 외면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도 탈레반 정권의 1차 붕괴 이후 열린 부족회의에서는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왕정복고의 의견이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탈레반을 박살내고 아프가니스탄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던 미국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신공화국 수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중국의 홍헌제제 장훈복벽의 경우에도 주변국이 모두 반대했다.

드문 사례로 해당 국가의 실권자 스스로가 왕위에 올라 복고된 사례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 위안스카이, 조구 1세 등이 여기에 속하며, 거의 대부분 공화정이 아직 완전히 대세로 자리잡지 않았고, 왕정이 아직 유력한 정치체제로 남아 있던 상황에서 결정된 것이다. 공화정이 시대의 흐름이 된 현재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4. 창작물


[1] 중간에 각각 부인 소피아 왕태후와 아들 펠리페 6세 현 스페인 국왕, 딸 엘레나 공주와 크리스티나 공주도 있다. [2] 복벽'옛 왕조를 다시 세운다.'는 뜻이고 왕정복고는 '왕(군주)의 통치를 복구한다.'는 뜻이라서 엄밀하게 둘은 구분된다. [3] 공산주의 혁명으로 군주정이 무너진 러시아 제국이나 킬 군항의 반란으로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무너진 독일 제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4]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오헝제국이 공중분해되어 군주위를 상실한 합스부르크 왕가 붉은 군대에 왕실이 강제로 축출당한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이 여기에 해당한다. [5] 이는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된 나라들 상당수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 국가를 출범시킨 것 때문도 존재한다. [6] 신생 독립국 중에는 정당한 왕가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이러했다. [7] 유능한 군주정 정부를 몰아내고 인민공화정을 세웠다가 나라가 파슈툰, 타지크, 하자라, 우즈베크 등 각 민족별로 분열되어 개판난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경우로 왕정복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8] 대표적으로 캄보디아에서는 공화정부가 사람을 너무 죽여서 자신들 손으로 쫓아낸 국왕을 다시 데려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9] 조지아는 러시아의 침략이나 내정간섭 등으로 국정이 불안해지자 복벽주의가 강세된 바가 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10] 실제론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11] 장남은 태어난 다음날 죽어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 [12]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엔 나폴레옹에게도 접촉했지만 거부당했다. [13] 프랑스 국내 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내부에서도 해리 폰 아르님 주불 독일 대사를 비롯한 보나파르트 제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남아 있어야 프랑스를 포위하는 군주국들간의 대불 동맹이 성립되기 쉽다고 하여 이를 거부했다. [14] 가장 가시적인 이유로는 당시 소 협상국이라 불리며 연합한 이웃나라들인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를 1세가 부다페스트로 진군하면서 왕위 복귀 직전에 이르렀을 때 체코와 유고에서는 아예 자국군을 헝가리 국경으로 배치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침공하겠다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카를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이를 통해 주변국의 반발을 꺾겠다는 논리를 폈지만 프랑스 정부가 부인하면서 무산되었다. 실제로 다소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얽혀있었지만 서방 강대국들도 대체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다. [15] 프랑코 역시 1947년 이후부터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 스페인을 통치했고 사후에 후계자로 키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해두었다. [16] 다른 모든 조건은 거의 갖춰졌는데 이 조건 하나만 충족이 안 돼서 왕정복고를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이다. 21세기인 2000년대 기준으로도 명망이 매우 높아서 지지율이 높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라지만 1차 세계대전의 특성과 발발 원인으로 인해 왕정복고를 요구할 정당성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실세인 오스트리아 공화국 정권이 재산을 몰수하고 황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오스트리아로 돌아올수 있게 하는 등의 여러 가혹한 조치를 취하면서 황후인 지타,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17] 특히 루마니아는 국민 대다수가 군주에게 실권을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왕실 복구를 강하게 지지하지만,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복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8] 다만 꼭 이승만 때문이 아니더라도 미군정의 의향도 있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일제 지배에 협력했던 데다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복벽사상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탓에 설령 이승만이 아니었다고 해도 대한제국 황실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구황족 스스로도 복고를 원하지 않았다. [19] 끝임없는 내전이 발생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사실상 군주제가 되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추세가 공화제인 점과 쿠데타로 국가붕괴를 겪은 것이 치명타가 되어 왕당파들이 왕정복고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때 왕당파들의 선택이 오히려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평가가 있다. 민족과 종교가 하나로 묶이지를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군주가 없어 국민을 단합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내전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