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00:40:48

아구스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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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1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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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 align=right><tablewidth=500><table bordercolor=#004f35><colbgcolor=#006847><colcolor=#ffffff> 멕시코 제1제국 초대 황제
아구스틴 1세
Agustín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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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gustin_I_of_Mexico.jpg
이름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1]
(Agustín Cosme Damián de Iturbide y Arámburu)
출생 1783년 9월 27일
미초아칸 바야돌리드
사망 1824년 7월 19일 (향년 40세)
타마울리파스 파디야
장례식 1838년 10월 26일
멕시코 시티 성당
재위 멕시코 섭정평의회 의장
1821년 9월 28일 ~ 1822년 5월 18일
멕시코 제1제국의 황제
1822년 5월 19일 ~ 1823년 3월 19일
배우자 아나 마리아 호세파 라모나 데우아르테 이 무니스 (1805년 결혼)
자녀 아구스틴 헤로니모, 사비나, 후아나 데디오스 마리아, 호세파, 앙헬, 마리아 데헤수스, 돌로레스, 살바도르 마리아, 펠리페 안드레스, 아구스틴 코스메
아버지 호세 호아킨 데이투르비데 이 아레기
어머니 마리아 호세파 데아람부루 이 카리요 데피게로아
형제 마리아 니콜라사, 호세 프란시스코, 호세, 마리아 이그나시아, 마리아 호세파, 프란시스코 마누엘, 마리아 아나, 마리아노
서명 파일:아구스틴 1세 서명.svg

1. 개요2. 일생
2.1. 어린 시절2.2. 스페인군 군인으로서2.3. 멕시코 독립운동가로의 전향2.4. 멕시코 황제2.5. 최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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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 제1제국 황제. 본명은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Agustín Cosme Damián de Iturbide y Arámburu), 줄여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이다.

멕시코 독립의 영웅이지만 독립 후 황제가 되어 독재를 벌이다 쿠데타로 강제퇴위를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 일생

2.1. 어린 시절

1783년 당시 멕시코(당시 스페인의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모렐리아(당시 바야돌리드)에서 호세 호아킨 데 이투르비데와 마리아 호세파 데 아람부루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멕시코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스페인에서 넘어왔고 어머니는 멕시코 태생이지만 스페인계 혈통이었으므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말하자면 크리오요였다. 그의 가계는 모렐리아 안에서는 꽤 지체 높은 가문으로 대규모의 농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 세속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에 등록되어 있었으나 성적은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부모가 보유하던 대농장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말을 잘 다룬 것으로 평판이 높았다고 한다.

2.2. 스페인군 군인으로서

말을 잘 다루는 재능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1805년 스페인군에 입대했으며, 그 때 즈음 모렐리아의 명문 상인 가문의 딸이었던 아나 마리아 우아르테(Ana María Huarte)와 결혼한다. 부부는 우아르테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토지 구매에 사용하여 과나후아토 지역의 대농장주가 되었다.

1810년 그는 중위가 되었다. 이 때 스페인 본국은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깽판이 벌어져 있었고 이를 계기로 멕시코 크리오요들 사이에서는 독립하자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다.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미겔 이달고 이코스티야) 신부가 돌로레스라는 마을에 위치한 그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부른 뒤 스페인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킬 것을 부르짖었고(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 이후 그를 중심으로 1810년대 독립 운동이 진행된다.

이트루비데는 유능한 군인이자 강렬한 근왕주의자로서 멕시코 독립군을 토벌했다. 이달고 신부는 1811년 스페인 군대와 크리오요들에게 패배했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독립 운동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가 이어받아 4년간 항쟁을 계속하나, 그 역시 1815년 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그 공을 인정받아 1816년에는 북부 멕시코 지역의 스페인군을 통솔하는 자리에 올랐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활약으로 멕시코 독립운동은 크게 잦아들었지만 독립군이 완전히 토벌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독립군은 잔존하여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2.3. 멕시코 독립운동가로의 전향

그렇게 유능한 군인이자 뿌리깊은 근왕주의자, 스페인 충성파였던 이투르비데의 성향은 1820년을 전후하여 달라지게 된다.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입헌군주제에 입각해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해나간 것이 그 계기였다. 스페인 왕실에 의해 권력을 누리던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본국의 자유주의 물결에 크게 당황하고, 이에 따라 독립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신봉했던 이투르비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당시 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비센테 게레로와 타협을 시도했다. 공화주의자였던 게레로는 이투르비데와 타협하여 멕시코를 군주국으로 독립시키기로 하고, 이에 따라 독립군과 멕시코 주둔 스페인군이 연합하여 에헤르시토 트리가란테(Ejército Trigarante)라는 동맹군이 형성된다. 이투르비데는 이 동맹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1821년 게레로와 함께 멕시코 독립 계획인 이괄라 강령(Plan de Iguala)을 발표했다.

이에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이괄라 강령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새로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으로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ú)를 파견한다. 그러나 이미 군권을 쥔 아구스틴이 독립군 편으로 넘어간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결국 1821년 8월 24일에 코르도바 조약(Tratados de Córdoba)을 맺어야 했다. 이는 멕시코를 멕시코 제국으로 독립시키고 스페인 왕국 동군연합이 되어 페르난도 7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하는 내용의 조약이다. 이 조약을 근거로 9월 24일에 이투르비데는 독립을 선포한다.

2.4. 멕시코 황제

멕시코 사람들 모두가 독립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계속해서 바랐던 근왕주의자들도 있었다. 대체로 페닌술라르들은 스페인의 지배를 바라는 편이었고 실제로 이들은 멕시코 독립 이후 추방되었다. 원주민 중에서도 틀락스칼텍인들은 멕시코의 전신인 아즈텍 제국의 약탈과 인신공양으로 엄청나게 고통을 받다가 스페인의 도움으로 아즈텍 제국에 복수했을 뿐더러 스페인 치하에서 전형적인 식민지가 아니라 자치령으로 지내면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멕시코의 독립으로 제2의 아즈텍 제국이 탄생할 것을 우려하여 멕시코의 독립에 강하게 반대했다.

코르도바 조약은 이 때문에 탄생한 정치적 술수이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제국 섭정에 올랐고, 코르도바 조약의 내용대로 당시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에게 멕시코 제국 황제 자리를 제안했다. 물론 페르난도 7세는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그러자 이투르비데는 다시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인물을 멕시코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지만 페르난도 7세는 그 어느 유럽의 왕실도 멕시코 황제로 추대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페르난도 7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었고, 마치 '어쩔 수 없이 독립하는 것처럼' 위장해 멕시코 독립을 이뤄낸다. 물론 스페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독립 전부터 멕시코의 군권을 이투르비데가 쥐고 있었으니 그가 전향한 이상 2류 국가가 된 스페인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페인군이 독립운동 진압에 투입되기는 했는데 중요한 항구인 베라크루스에서 산타 안나가 격퇴했다.

그리고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의회의 추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방해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되었다. 제왕병자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적임자가 간택되기 전까지의 임시 황제'라는 명목이었지만 그런 적임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이때 멕시코는 현재 미국 서남부 지역인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파나마 지협 이북의 중앙아메리카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는 아구스틴 1세의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아구스틴 1세는 건국 직후 광속으로 인기를 잃어갔다. 부정부패와 독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1822년에 군주제 전복 기도가 발각되어 의원 16명이 체포되었는데 이 전복 기도라는 것이 아구스틴 1세의 조작이라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고, 이를 토대로 의회가 반발하자 아구스틴 1세는 의회를 해산한다.

이 때 몇몇 군 지도자들은 이투르비데를 실각시키기 위한 계획을 짰고 이것이 12월에 완성된 카사 마타 계획(Plan of Casa Mata)이었다. 그 주요 골자는 멕시코의 군주제 철폐 및 공화국 성립이었다. 이에 따라 12월부터 멕시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구스틴 1세 역시 군권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지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이 계획에 참여한 산타 안나의 반란군만큼은 진압되지 않았다. 산타 안나가 진압군 사령관을 설득해 배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1823년에 들어서면 몇몇 멕시코 독립운동가들도 카사 마타 계획에 동의했고, 멕시코 거의 대부분의 주도 카사 마타 계획에 동의해 아구스틴 1세는 고립에 빠졌다.

결국 아구스틴 1세는 1823년에 스스로 퇴위하고자 했으나,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대신에 1822년에 아구스틴 1세를 황제로 추대하는 결정을 취소하고, 멕시코의 군주제를 규정한 이괄라 강령과 코르도바 조약을 무효화했다. 아구스틴 1세는 이렇게 폐위되었고, 황후 및 자녀, 그리고 일부 하인과 함께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 리보르노로 추방당했다.

2.5. 최후

이탈리아로 추방된 아구스틴 1세는 리보르노에서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고 회고록을 출간했다. 아구스틴 1세를 쫓아낸 멕시코 임시정부는 그가 뇌물을 받았네 어쨌대는 등 그를 폄하했지만 뇌물 의혹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런던에서 재정적으로 곤궁하게 살았다.

멕시코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멕시코의 정치 상황은 안정되지 못했으며, 그 때까지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스페인은 다시 멕시코를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멕시코의 보수파들은 이투르비데의 복위를 강력히 희망했으며, 보수파의 뽐뿌질에 그는 멕시코 귀국을 시도한다. 1824년 7월 14일 멕시코의 항구도시 소토 라 마리나(Soto la Marina)에 상륙했으나 현지 군 사령관 펠리페 데라가르사(Felipe de la Garza)에게 체포되었고, 그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지역 의회는 약식 재판을 벌여 그를 총살형에 처했다.

이후 1838년에 보수주의적이었던 멕시코(당시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대통령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그를 독립운동가, 해방자(El Liberator)로 재평가하고 정식으로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그의 유해는 멕시코시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기타

자녀 중 첫째인 아구스틴 헤로니모 데이트루비데 이 우아르테(1807~1866)는 명목상 아구스틴 2세로 멕시코 황위를 주장했다. 또한 아구스틴 1세의 또 다른 아들의 아들이 후임 작위 요구자(즉 아구스틴 헤로니모의 조카)가 후임 왕위요구자가 되었고 1925년 그가 사망하자 당조카(아구스틴 1세의 증손)인마리아 요세파가 작위요구자가 되었고 사후 외손자가 작위요구자가 되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그의 아들, 즉 아구스틴 1세의 손자인 아구스틴, 살바도르는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막시밀리아노가 몰락하면서 그들도 유럽으로 도망갔으나 아구스틴은 자손이 없어, 살바도르의 외동딸을 통해 헝가리의 귀족 폰 괴첸 가문으로 계승권이 이어져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이(e, y, i)'는 띄어 쓰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