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0:52:11

킬 군항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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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독일 해군의 마지막 저항4. 반란이 벌어지다5. 결과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의 계기가 된 사건. 수병의 반란으로도 불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2. 원인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하고 100일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 제국 협상국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이때 즈음 사실상 협상국의 맹주격으로 떠오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독일에게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중지하며 민주 정부가 아니면 협상하지 않는다."는 협상조건을 내걸면서 독일을 압박했다. 사실 독일의 상황은 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독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쟁을 위해 물자를 더더욱 쥐어짰고 독일 국민들의 생활은 더더욱 피폐해졌다. 이러고도 독일이 무너져내리지 않은 건 연합군에게 포위되면서 독일 국민들이 독이 올랐기 때문이며 정말 엄청나게 정교할 정도로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거의 직전엔 독일 내 생필품 등 주요 물자 재고가 몇주분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1][2]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일선 장병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매우 극심했는데 독일 국민들은 언제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같이 독일의 전쟁은 신속하게 적의 허를 찔러 적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아직 20세기식 총력전 참호전의 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방에 있는 이들에게는 무능한 군부가 전쟁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주제에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쥐어짜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군부의 위치가 높은 독일 제국임에도 군부에 대한 신뢰와 경외는 날로 추락했다. 반면 현장에서 직접 참호전의 지옥을 헤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무능하다는 매도를 들었으니 상호간의 불화와 갈등은 임계치에 달하고 있었다. 정말 전쟁을 조금만 더 끌었더라면 독일 제국은 물자의 부족과 내부의 갈등으로 내부로부터 완전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불기 시작한 공산주의 열풍과 전장의 악화, 그리고 무능한 제국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불가리아 왕국은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협상군에게 항복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고급 장교들이나 제국 각료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들이 제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18년 10월 4일 독일 제국 의회는 이미 입헌 혁명을 선언하고 기존의 제국의회를 해산한 후 입헌군주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미 독일의 상황은 그 정도로는 호전될 가망이 없었으며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이유에는 황제 빌헬름 2세의 책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패전의 책임을 민주화된 정부에 떠넘김으로써 카이저 본인의 책임을 면해 보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정도만으로 수습될 상황이 아니었다.

3. 독일 해군의 마지막 저항

1918년 10월 24일 해군 명령 문서 참조. 그야말로 자살특공이나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4. 반란이 벌어지다

이미 전세는 연합군의 편이였고 대양함대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연합군 해군 이길 리가 없는 상황에서[3] 이런 명령은 결국 자살특공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수병들도 바보가 아니라 불리한 전황과 출항 명령으로 인하여 수병들 사이에서는 상부가 이미 진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본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이는 대대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반란의 시작을 끊은 건 빌헬름스하펜이었다. 출항 예정 전날이었던 10월 29일 밤 빌헬름스하펜에서는 도합 300명에 이르는 폰 데어 탄 함과 데어플링어 함의 수병들과 승조원들이 일제히 내륙으로 도주, 탈영한 것을 시작으로 제3전대 소속의 함선 3척에서 수병들이 닻을 올리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전함 튀링겐과 헬골란트 함에서는 수병들에 의한 사보타주가 일어났다. 당일 밤에만 총 7척의 순양전함과 전함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심지어 작전의 기함이었던 바덴 함에서마저도 수병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등[4] 곳곳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고 독일 제국 해군은 이들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 다만 이는 전함이나 순양전함 등 대형함에만 국한된 것이었고 잠수함, 어뢰정, 소해정 같은 소형함들에서는 여전히 수병들이 충성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5]

결국 이런 사태에 놀란 히퍼 제독은 10월 30일 작전을 취소했지만 수병들의 반란은 도저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급기야 11월 3일 에서 대대적인 반란과 파업이 일어났다. 게다가 작전 취소로 빌헬름스파헨에서 모항 킬로 귀항한 제3전대 소속 일부 함선들의 수병들이 킬 군항의 수병들의 반란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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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스하펜 군항에서 파업 중인 수병들
독일 제국 육군이 아닌 해군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해군 기지들이 육군 기준으로 후방이자 도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민간과의 접촉이 잦았고 출항하지 않은 동안은 많은 수병들과 부사관들이 선상 혹은 육상 병영이나 영외 거주자들의 주택에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후방의 피폐한 사정을 더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었고 종전과 관련된 정보의 유통도 원활했던 터라 용이하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반면 정보 통제가 성공적이었던 독일 육군은 이런 반란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모략에 놀아나는 것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제국 육군도 연합군 공세 최후반기에는 전의를 상실하고 스스로 붕괴되었다. 이 불씨는 곧 독일 전역으로 번져 전국의 노동자들도 파업을 선언하였고 11월 7일 뮌헨에서는 바이에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국의회에서도 공화국이 선언되었고 빌헬름 2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11월 9일에 결국 카이저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패권주의적 세계 정책을 위해 길러낸 카이저의 야망이나 다름 없는 독일 제국 해군이 결국 본인의 몰락의 신호탄이 된 것이었다. 킬 군항의 반란이 11월 3일에 벌어졌으니 이 반란 이후 독일 제국은 1주일도 가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5. 결과

독일 혁명정부는 러시아 혁명처럼 공산주의 세력과 기존 기득권 세력이 공존하는 기묘한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독일 공화정부는 제국 시절부터 라이히스탁에서 제1당으로서 정치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러시아 임시정부보다 지지 기반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을 뿐더러 독일 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도리어 공산당은 배후중상설에서 독일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리면서 장기적으로는 지지를 잃었다. 결국 혁명정부는 공산세력과 군부 우익 세력의 도전에서 승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수립된 독일 혁명정부는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합군이 독일로 들어오기 전 정전 협정을 제의하였다. 연합군 역시 전쟁에 지친 건 마찬가지라 요구를 받아들였고 11월 11일 독일과 연합군의 정전 조약이 체결되었고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혁명과 종전 처리가 너무 엉성했기 때문에 독일은 독일대로, 협상국은 협상국대로 찜찜하게 전쟁이 마무리되어 버렸다. 독일 내부에서는 가혹한 평화협정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군 내부의 적 때문에 독일이 무너졌다는 음모론이 사회전반에 퍼졌고 결국 이를 이용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수병들의 반란으로 자살 특공대가 되는 신세를 면한 함대는, 종전 후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소멸한다. 그나마 자살 특공이었으면 수많은 해군 장병들이 배와 함께 죽었겠으나, 계획적 자침이었던 덕에 이를 저지하려던 영국 해군의 발포로 사망한 9명만 희생되고 끝났다.

[1] 즉 다 굶어죽기 전에 전쟁을 끝냈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혹한 조건을 강요한 것도 이런 독일의 상황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2] 다르게 보면 당시 독일의 행정력이 굉장히 뛰어났다고 할수 있다. 국가라는 초대형 조직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행정적 착오로 인해 동원되지 않는 물자나 인력 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구멍이 없이 국가의 모든 자원이 완전히 동이 날 정도로 효율적으로 물자를 동원했다는 뜻이다. [3] 이미 이 전투에서 대양함대의 환상은 깨진 지 오래였다. "죄수가 창살 뚫고 나와 간수를 두들겨패고 창살 안으로 돌아갔다"는 비유도 있지만 대양함대의 피해 역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창 수리를 마치고 다시 출격하려고 하면 이미 영국 왕립해군 대함대가 수리를 마친 뒤였다. [4] 군기가 제일 잘 잡혀 있어야 하는 기함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이 얼마나 난장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5] 소형함들은 인원수가 적었던 만큼 수병들과 부사관, 장교들 사이의 소통이 더 활발했고 유대감이 끈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고로 이렇게 대형함들보다 인원수가 적은 소형함들에서 수병들이 더 높은 충성심과 전투의지를 보이는 현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나 일본 제국 해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