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Туркестано-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뚜르께스따노-시비르스까야 마기스트랄), 약칭 Турксиб(뚜르크십)
카자흐어: Түрксіб
영어: Turkestan-Siberia railway
소련의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잇기 위해 제1차 5개년 계획 도중에 만든 철도 노선. 줄여서 투르크십이라고도 한다.
1. 개요
러시아 광궤로 건설된 소련의 철도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와 러시아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를 잇는 약 2,500km의 노선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력한 산업화 계획인 제1차 5개년 계획은 드네프르 댐,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등 여러 개의 전시용 초대형 사업들을 굴렸는데, 이 철도도 그 중 하나였고 가장 첫번째로 건설된 놈이었다. 건설 당시에는 소련이라는 한 나라의 국내를 잇는 철도였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중앙아시아 각 지역이 독립하면서 국제선이 되었다. 지금도 국제열차가 활발하게 운행하고 있다.아래의 글은 대부분 Matthew J. Payne의 Stalin's Railroad라는 책을 참고한 것이다.
2. 건설 배경
기본적인 개념은 예전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있던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카자흐스탄 북부의 세미팔라틴스크까지 철도는 이미 알타이 노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에서는 타슈켄트와 프룬제(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를 잇는 세미레치예 철도가 비록 중단되기는 했어도 개념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해도 이미 2,500km 중 1,000km였다.소련에서 이 두 지역을 철도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역시 경제였다. 하나는 시베리아 철도의 개통으로 서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에 수백만의 러시아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는 점이었다. 이 새로운 정착민들은 정부의 지원, 관대한 이율의 대출, 그리고 드넓은 개척지의 분배로 러시아의 새로운 곡창지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곡물을 팔 시장이 너무나 부족했다. 둘째는 1895년 트란스카스피 철도의 개통으로 이 지역의 목화가 러시아 시장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 지역은 이제 러시아 제국의 목화 생산을 상당부분 담당하기를 기대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이 지역은 대농장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정복자들이 수행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조그만 소농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피지배 민족의 반란을 우려한 결과였다. 거기에, 목화는 환금작물로서 지역 주민들에게 부의 기회를 주기도 하였지만 경작 가능한 농지가 밀과 수수 대신 목화를 생산하게 되는 것은 이 지역의 식량 사정에 큰 불안정성을 초래하였다. 실제로 교통 사정이 막장이 된 러시아 내전 당시 이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사망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지역에서 목화생산을 촉진할 유일한 인센티브는 저가의 곡물 공급이었다.
스탈린의 가혹한 집단화는 이 지역을 다시 목화 생산의 기지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시베리아 정착민들의 곡물이 투르케스탄을 먹여살렸다. 그러나 이는 막대한 운송비를 요구하였다. 내륙으로 운송되는 시베리아산 곡물 343,000톤 중에서 투르크십은 327,000톤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는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대체하여 3,500만 루블을 절약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북캅카스산 곡물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 푸드(어림잡아 16.38kg) 당 수송비는 2.5 루블에서 1.5 루블로 거의 반을 줄일 수 있다면, 남는 경작지는 목화 생산에 더욱 투자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이 임팩트가 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 눈에 그 성과물이 들어오는 댐이나 공장, 제철소와 달리 철도 자체가 좀 애매모호한 사업이기도 할 뿐더러 이 지역이 러시아 정치 내에서 발언권이 없다시피한 최고의 후진지역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후진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예산은 엄청 먹어대는 사업이었다. 카자흐스탄 동부는 우랄 동쪽에서 가장 험난한 지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건조한 사막의 관목들이 늘어서 있고, 알마아타 밖의 자일리스키 알타우에서는 갑자기 불변의 스텝이 솟아올라 성벽같이 서있었고, 이르티쉬 강의 넓은 둑은 발하쉬 호수 동편의 물 없는 사구로 이어졌다. 기후는 더욱 끔찍했는데, 여름에는 스텝의 불지옥 더위가 이어졌으며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미친듯한 바람이 이곳을 지배했다. 건조할 때는 건조해서 가혹했고, 가끔 봄이 되어 산 꼭대기의 눈이 녹아내릴 때는 갑작스러운 홍수를 선사해줘 엿을 먹였다. 인구밀도는 매우 낮았고, 철도 건설을 지원해줄 지역 사회라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쟁 전 노선의 건설비는 1억 5,900만 루블로 짐작되었으나 막상 사업을 시작해보니 매년 150만 루블의 추가 경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이 노선의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굉장히 장엄하고 용감한 사업"이나 "별로 실용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지적은 매우 적확한 것이었다.
실제로 남쪽과 북쪽의 짓기 쉽고 인구 밀집지역과 가까운 지역은 거의 다 완공된 상태나 다름 없었다. 1928년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점에서 이제 남은 것은 투르크십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인 가운데 1,400km였다. 이 곳은 낙타 상인들이 70일을 거쳐서 가야할만큼 혹독한 곳이었다. 투르크십이 건설되면 70일은 36시간으로 줄게 될 것이었다. 막대한 비용은, 우선 정치적 거물이었던 당시 교통인민위원장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지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충당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제르진스키의 구호인 "외국 목화로부터의 해방"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1926년 제르진스키가 회의 중 죽어버렸다(...). 새로 인민경제최고회의 의장이 된, 발레리 쿠이비셰프는 투르크십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의 의장 알렉세이 릐코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만약 우리가 단 하나의 프로젝트만 지원할 수 있다면 그건 투르크십이 되어야 하오."라고 말했다. 릐코프는 목화 생산비용 절감으로 얻는 이익이 그 비용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했다. 릐코프는 소브나르콤의 수장으로서 모든 인민위원회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투르크십 프로젝트에 돈을 안 데주려고 했던 재무인민위원회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NEP 기조에도 적합한 것이었다. 직물산업 같은 경공업과 농촌의 발전을 도시에 확산시킨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으로 1억 3천 400만 루블이 매년 절약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목화 수입을 대체해서 8천만 루블을, 중앙아시아로의 운송비를 절감해서 2,200만 루블을, 그리고 여유 곡물을 수출해서 3,200만 루블을 절약하겠다는 것이었다.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즉각적인 이윤이나 기대하는 결정권자들의 관점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가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소련 체제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약소민족을 해방하고 전근대 사회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를 창조하겠다는 그들의 야심찬 목표는 매력적이었다. 특히 1926년 트로츠키 파벌의 잔당이 산업화를 요구하는 후진지역의 요구를 모아 스탈린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했을 때, 스탈린은 이를 역이용하여 선수를 쳐버린다. 민족해방의 레토릭을 이용해서 러시아 바깥의 투르크십과 드네프르 댐의 건설을 기습적으로 승인해버린 것이었다. 결국 스탈린의 달래주기로 지역 지도자들의 불만은 시들해졌고 스탈린은 승리했으며 여하간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투르크십의 건설은 드디어 승인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7년, 그 상징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러시아 소브나르콤은 "쇼크 프로젝트"로서 투르크십의 건설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거기에, 중앙과 지방을 접목시키는 것처럼 여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제시되었다. 첫째, 시베리아의 곡물, 목재와 중앙아시아의 목화를 연결하는 것. 둘째, 철도가 지나는 곳의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의 시작과 함께 건설이 착수되었고 3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30년 4월, 공식적으로 제1차 5개년 계획의 첫번째 자식인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