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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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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50505><colcolor=#fff>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Алекса́ндр Глазуно́в | Alexander Glazunov
파일:AlexanderGlazunov.jpg
본명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글라주노프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Глазуно́в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65년 8월 10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36년 3월 21일 (향년 70세)
프랑스 제3공화국 뇌이쉬르센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음악교육가
사조 후기 낭만주의
1. 개요2. 생애3. 음악 성향4. 주요 작품5. 기타
5.1. 스트라빈스키와의 악연5.2. 다른 후배들과의 관계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음악교육가. 어린 시절에는 모차르트의 재림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음악 신동으로 각광받았으며 16살에 첫 교향곡을 작곡할 정도로 조숙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성장한 이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재능을 제대로 꽂피우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음악적 격변기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작풍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인 음악성향에의 천착으로 보는 이가 많으며, 코스모폴리탄이라 보는 이도 있다. 그 때문인지 현재 그의 음악은 교향곡5번 op.55, 교향곡7번 op.77, 발레곡 사계 op.67, 바이올린 협주곡 op.82 외에는 자주 연주되지 않으며, 다른 러시아 음악가에 비해 세계적인 인지도는 약한 편이다. 러시아 외에 캐나다에서는 유명 드라마 < Les Belles Histoires des Pays d'en Haut>와 국민 스포츠 영웅 테사 버츄 / 스캇 모이어 조의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프리에 삽입된 곡으로 인해, 글라주노프가 잘 알려져있다.

또한 음악교육가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제자 중에는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가 있다.

2. 생애

글라주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출판업자였고 모친은 피아니스트이자 발라키레프의 제자였는데, 어린 시절 글라주노프의 재능을 알아본 모친이 아들을 자신의 스승인 발라키레프에게 소개했다. 발라키레프는 당시 14세였던 글라주노프를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데려갔는데, 사람을 가려서 제자를 받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였지만[1] 그의 재능에 놀란 나머지 바로 제자로 받아들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의 글라주노프에 대해 "그는 하루 단위가 아니라 매 시간 단위로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면서 단순한 칭찬의 수준을 넘는 극찬의 말을 남겼으며, 그를 가르친지 2년이 되기도 전에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음악교육을 끝냈다.

어린 시절 글라주노프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했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에는 기억력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아무리 긴 곡도 한 번 들으면 켤코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40분 분량의 자신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옆방에서 이 연주를 듣고 있던 글라주노프가 그 긴 곡을 그대로 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가 보로딘의 작품을 보완하는데 참여했던 것도 어린 시절 들었던 보로딘이 직접 피아노로 연주한 미완성 부분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

1881년 글라주노프는 16세에 현악 4중주 1번(Op.1)을 발표했고 17세 때인 1882년에는 교향곡 1번(Op.5)을 초연했는데, 현재까지 러시아(소련 포함)에서 가장 이른 나이에 정식 교향곡을 발표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1번 교향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스승 발라키레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물론 차이콥스키 등으로부터도 격찬을 받았으며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이 교향곡을 들은 후 그를 ‘소년 삼손’이라고 표현했다. 글라주노프는 이 때부터 촉망받는 소년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글라주노프, 교향곡 1번 E장조

한편 이 첫 교향곡이 발표되자 당시 부유한 목재상이자 음악가들의 후원자였던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4)는 글라주노프를 눈여겨보고 자신이 만든 진보적인 음악가들의 모임인 벨랴예프 살롱에 그를 참여시켰다. 이후 글라주노프는 벨랴예프의 도움으로 그의 작품들을 출간하고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1884년에는 벨랴예프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다. 리스트는 글라주노프의 재능과 열정을 칭찬하면서 자신의 지휘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1번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으며 글라주노프가 연주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홀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리스트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글라주노프는 1886년 리스트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자신의 2번째 교향곡 '리스트를 추억하며(To the Memory of Liszt)'를 작곡하기도 했다.

1885년 20살된 해에는 벨랴예프가 만든 글린카상의 수상자가 됐으며 교향시 '스텐카 라친'을 알렉산드르 보로딘에게 헌정했다. 보로딘이 1887년에 사망하자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공'과 교향곡 제3번 등을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보완해서 완성하기도 했다.

1888년 23살에 지휘자로도 데뷔했다.

이 때까지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스승들의 영향을 받아서 러시아 국민악파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1890년대부터는 국민악파적인 경향이 점차 약해지고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의 영향이 많이 나타는 독일 낭만주의 스타일의 작법으로 회귀하게 된다. 굳이 좋게 말하면 좀더 세련되고 정교한 음악을 추구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대신 이 시기 이후 글라주노프의 음악에서는 더 이상 파격과 새로운 경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또 이 시기부터 차이콥스키의 영향으로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다만 오페라는 작곡하지 않았다.

한편 글라주노프는 성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냥 술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경력에 (당연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별도로 지휘자 및 연주자로서 글라주노프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그는 리허설을 할 때도 중간중간 술을 마셨으며 공연에서 종종 술에서 덜 깬 채로 지휘를 하는 바람에 연주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성인이 된 이후 글라주노프의 행보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각광았을 때의 기대치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으며 점점 보수화되는 그의 음악 성향에 대해 당연히 실망과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서구의 세련되고 잘 정립된 음악수법을 적극 익히고 도입하려고 했던 글라주노프의 성향은 비판 못지 않게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며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후원자 벨랴예프가 변함없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에 글라주노프의 음악적 입지는 계속 탄탄대로를 걸었다. 1899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주선으로 이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9년 모리스 푸티파의 대본에 의해 발레곡 <사계>가 작곡되어 이듬해 2월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계절을 의인화한 4막의 발레로 '겨울' '봄' '여름' '가을'로 이루어졌고 작품번호 67이다. 봄으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는, 사계절을 제재로 한 여타의 작품과는 달리 겨울로 시작해서 가을로 끝난다. 특히 가을중 <아다지오>[3]가 백미로 클라식 라디오에서도 가을만 되면 리퀘스트되는 명곡이다. 또한, 사계는 <레이몬다>와 쌍벽을 이루는 글라주노프의 대표적인 발레곡으로, 러시안 발레의 프로그램을 장식하는 곡이다. 1막 4장의 무곡으로, 또한 같은 형식으로 연주용 모음곡으로도 만들어졌다. 러시아 아카데미즘을 구축한 글라주노프의 세련된 감각이 이 작품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으며, 그 특유의 전원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담담한 수법으로 잘 그려져 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자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시위대의 편을 들면서 시위의 자유를 주장하다가 음악원에서 쫓겨났는데, 이 때 글라주노프도 스승을 따라 사임했지만 얼마 후에는 오히려 음악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애초에 글라주노프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데다 그처럼 음악원의 각종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4]

1908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하자 글라주노프는 암묵적으로 그의 후계자가 되어 명실상부한 러시아 음악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5] 20세기 초 러시아가 체제 전복과 혁명으로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는 와중에도 그의 입지는 큰 흔들림 없이 승승장구했으며, 1922년에는 인민 예술가라는 훈장까지 받았다.

글라주노프는 공식적으로는 193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직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28년 빈에서 열린 슈베르트 100주기 추모 행사와 관련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떠난 후 1936년에 사망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였지만 당시 소련 공산당의 숙청을 피하기 위해 많은 유명인사와 예술가들이 소련을 떠났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글라주노프 역시 일종의 망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928년에 사실상 소련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글라주노프는 2년 가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소련에서 그의 입지가 얼마나 탄탄했는지 알 수 있다.

소련을 벗어난 글라주노프는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고 파리 근교에 정착해서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을 떠난 이듬해인 1929년에는 64세의 나이로 뒤늦게 결혼을 했는데,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율리야 가브릴로바의 어머니였다.[6]

1936년 글라주노프는 자신이 정착한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인근 묘지에 묻혔다가 1972년 레닌그라드의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3. 음악 성향

글라주노프는 71살까지 살았지만 그의 음악적 전성기는 대략 10대 후반인 1880년대부터 40대 초반인 1910년대 전후까지이며,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한 이후에는 음악 교육과 음악원 업무에 주력하면서 작곡빈도가 크게 줄었다.[7]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기악곡으로 가곡이나 합창곡과 같은 성악곡도 작곡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 오페라는 작곡하지 않았지만 대신 발레음악이나 연극 부수음악 등의 무대음악을 작곡했다.

교향곡은 완성된 8곡 외에 1악장 스케치만 남아 있는 9번이 있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도 남겼다.

생애 항목에 기술된 것처럼 글라주노프는 음악사적으로도 드물게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보여준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학습능력은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으며 이런 능력을 통해 10대 중반에 이미 주목받는 소년 작곡가이자 연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잠재력이 창작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기존의 작법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수법을 도입하고 실험하는 데는 의외로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너무 이른 시기에 얻은 명성과 성취가 오히려 음악적 성장에 독이 된 측면이 있는데, 일찌감치 주류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선 글라주노프는 성인이 된 후 그간 자신이 쌓아 놓은 입지를 지키기 위해 모험을 시도하는 대신 좀 더 무난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초기에는 발라키레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아서 러시아의 민속음악을 차용하고 러시아적인 선율과 음계를 사용하는 국민악파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1893년 작곡된 교향곡 4번을 기점으로 국민악파와 점차 결별하고 독일식 낭만주의에 가까운 성향으로 돌아섰으며 서구식의 조성/화성체계와 대위법 등의 작법을 본격 도입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가 된 후에는 당시 보수파로 분류되었던 자신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보다도 한층 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이 보여준 새로운 성향의 음악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반면 글라주노프는 철저하게 이들을 외면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나름 세련된 작법과 잘 갖춰진 형식미가 돋보이는 대신 개성이 부족해서 항상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이라는 느낌이 든다.[8] 데자뷰 이런 음악성향을 나름 학구적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식 아카데미즘'이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성향의 음악은 당시부터 제기됐던 '서구 음악의 아류'라는 비판을 넘어설 만한 임팩트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21세기 현재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대체로 '잘 만든 평작'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주자나 클래식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36살(1901)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 쇼팽, 브람스 등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한편 성인이 된 이후 그의 성장세가 약해진 배경에는 술이 있었다. 글라주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으며 지휘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연습을 충실하게 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연주자나 지휘자로서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1897년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의 초연이었는데, 지휘를 맡았던 글라주노프가 술 때문에 리허설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연주한 탓에 초연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런 심한 주벽은 그가 더 높은 음악적 성취를 이룩하는데 상당한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보수적이고 모험을 싫어하는 성격은 음악교육 분야에서는 나름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글라주노프는 18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가 된 후 30여년간 여기에 재직하면서 많은 음악가와 연주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교육 방식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참고가 되고 있다. 전통과 기본에 충실했던 그의 교육방식은 제자들로부터 '진부하다', '답답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교육적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효과적이었는데, 그 똘끼 넘치는 반항아 프로코피예프가 나름 다듬어진 형식미를 갖춘 음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글라주노프 덕분이었고[9] 쇼스타코비치의 특유의 탄탄한 관현악법도 글라주노프의 손길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10] 물론 이 뛰어난 제자들은 스승의 보수적인 음악을 롤모델로 삼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4. 주요 작품

교향곡 1번 E major Op. 5(1882)
교향곡 2번 f♯ minor Op. 16, "리스트(Liszt)의 추억"(1886)
교향곡 3번 D major Op. 33(1890)
교향곡 4번 E♭ major Op. 48(1893)
교향곡 5번 B♭ major Op. 55(1895)
교향곡 6번 c minor Op. 58(1896)
교향곡 7번 F major Op. 77, "전원(Pastoral)"(1903)
교향곡 8번 E♭ major Op. 83(1906)
교향곡 9번 D minor(1910, 미완성)[11]

현악 4중주 1번 D 장조 Op. 1(1881)
현악 4중주 2번 F 장조 Op. 10(1884)
현악 4중주 3번 G 장조 Op. 26(1888)
현악 4중주 4번 a 단조 Op. 64(1894)
현악 4중주 5번 d 단조 Op. 70(1898)
현악 4중주 6번 B♭ 장조 Op. 106(1921)
현악 4중주 7번 C 장조 Op. 107 "과거에 대한 경의(Hommage au passé)"(1930)

바이올린 협주곡 a 단조 Op.82(1904)
피아노 협주곡 1번 f 단조 Op.92(1911)
피아노 협주곡 2번 B 장조 Op.100(1911)
알토 색소폰 협주곡 Eb 장조 Op.109(1934)[12][13]

피아노 소나타 1번 b♭ minor Op. 74(1901)
피아노 소나타 2번 e minor Op. 75(1901)

러시아 주제에 의한 행진곡 E장조 Op.76
개선 행진곡 B장조 Op.40

발레곡 사계 Op.67[14]

5. 기타

5.1. 스트라빈스키와의 악연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15]에 따르면 그는 음악 인생 초기에 자신보다 17살 선배였던 글라주노프를 매우 존경했으며 음악가로서 자신의 모범으로 여겼다.[16]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첫 교향곡(op.1)을 글라주노프의 교향곡을 많이 참고해서 작곡했으며[17] 글라주노프의 현악 사중주를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글라주노프의 태도였는데, 보수성향의 글라주노프는 스트라빈스키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를 음악가가 아니라 관현악 기술자 정도로 취급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첫 교향곡을 들은 후 직접 스트라빈스키에게 "왜 이렇게 관현악을 무겁게 썼어?"라고 비판했다.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불꽃놀이(op.4)[18]를 들은 후에는 '재능이 보이지 않고 불협화음만 가득하다'고 평했으며, 페트로슈카에 대해서는 '이건 음악이 아니고 다만 관현악 처리가 돋보이는 음향'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계속되는 글라주노프의 냉담한 태도에 속으로 분노를 쌓아가던 스트라빈스키는 이후 글라주노프와의 인연을 끊었으며, 음악계의 거물이 된 이후에는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운 인물'이라고 평했다. 스트라빈스키는 80세가 되던 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방문했는데, 음악원에 걸려있는 글라주노프의 사진을 보자 '글라주노프!'라고 외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글라주노프는 말년인 1930년대에 파리에 머물렀는데, 당시 프랑스 최고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 합작하며 음악계의 중심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스트라빈스키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여겨진다.

5.2. 다른 후배들과의 관계

글라주노프의 보수적인 성향은 스트라빈스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제자였던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연주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프로코피예프의 스키타이 모음곡이 한창 연주되는 중에 연주회장을 나가버린 적이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스키타이 모음곡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버금가는 격렬함과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곡이기 때문에 글라주노프 입장에서는 상당히 듣기 불편했을 것이다. 한편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종종 '왜 그렇게 불협화음에 집착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으며, 그의 첫 교향곡에서 마음이 안 드는 부분들을 다 교정하려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에 따르는 척 하면서 실제 연주할 때는 자신의 원래 악보대로 밀고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글라주노프가 자신과 성향이 다른 음악을 무조건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음악원 교수가 된 후 바그너의 발퀴레의 음악을 10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끝에 드디어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도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들은 끝에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다만 이 일화들은 출처가 불확실하다.[19]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를 매우 아꼈는데, 쇼스타코비치가 19살에 완성한 1번 교향곡의 초연을 자신의 1번 교향곡이 초연된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초연 후 이 교향곡도 글라주노프의 1번 교향곡 못지 않은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스승의 음악성향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평생 글라주노프를 존경했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의 육성 회고록 '증언'에 보면 스승의 개인적인 면모와 후덜덜한 천재성에 대해 많이 기술되어 있다. 40여분에 이르는 교향곡을 한 번 듣고 피아노로 틀리지 않고 연주했다던가, 항상 알콜에 푹 절어 있었다던가...

키가 161cm로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작은 편이었지만 몸무게가 89kg까지 나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려진 그의 초상화를 보면 호리호리한 편이었는데 술 때문에 중년 이후 상당히 후덕한 체구가 된 것.


[1] 재능이 보이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갔지만 기초가 부족하다면서 퇴짜를 먹은 적이 있다. 절치부심한 스트라빈스키는 좀 더 음악 공부를 한 후에 간신히 그의 제자가 되었다. [2] 물론 보로딘의 연주를 재현했다는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기억력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와 관련된 일화 중에는 과장된 것들이 많기 때문. 후에 글라주노프는 이고르 공 보완작업에 대해 이 오페라의 3막은 사실상 자신이 썼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3] 소치 올림픽 아이스댄싱 은메달 테사 버츄 스캇 모이어조가 이곡을 프리에 사용했다. [4] 글라주노프는 음악원장이 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다시 복귀시켰지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얼마 후인 1908년에 사망했다. [5]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스트라빈스키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자 유족들이 '걱정 마, 아직 우리에겐 글라주노프가 있으니까'라고 반응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6] 결혼 후 글라주노프는 율리야를 양녀로 삼았으며 율리야는 글라주노프 사후 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7] 단적인 예로 그의 완성된 마지막 교향곡인 8번 교향곡이 그의 나이 41세인 1906년에 완성되었다. 이후 그는 30년을 더 살았지만 더 이상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으며 그마나 1910년에 시도한 9번 교향곡은 1악장 일부만 작곡된 채로 중단되었다. [8] 이러한 글라주노프와 대척점의 음악성향을 갖고 있는 작곡가로 무소륵스키를 꼽을 수 있는데, 무소륵스키의 음악은 구조적인 형식미나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9] 프로코피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시절 글라주노프의 교육방식이 진부하고 낡았다고 신나게 욕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욕하면서 배우는 스타일의 전형으로 자신이 비난하고 무시하던 음악가들의 작법을 은근히 많이 참고했는데, 글라주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10] 쇼스타코비치 항목에도 있지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시 쇼스타코비치는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글라주노프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줘서 간신히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글라주노프를 평생 은인으로 존경했다. [11] 1악장의 피아노 스케치만 남겼는데 가브릴 유딘(Gavril Yudin)이 이 1악장을 관현악 버전으로 완성했다. [12] 이 협주곡은 알토 색소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최초의 색소폰 협주곡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글라주노프는 말년에 프랑스에서 색소폰에 큰 관심을 갖고 색소폰 4중주 Bb장조, Op.109(1932)를 작곡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활약중이었던 색소폰 연주자 시구르드 라쉬어(Sigurd Raschèr)가 이 4중주를 들은 후 협주곡도 작곡해 달라고 글라주노프를 엄청나게 졸랐으며 결국 협주곡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13] 색소폰 4중주와 색소폰 협주곡은 작품번호가 109로 같다. 단순한 착오인지 같은 색소폰 곡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작품번호를 같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4] 한국에서 가장 알려진 작품으로, 가을중 아다지오가 대표적이다. [15] 글라주노프 생존 당시 쓰여졌으며, 마침 글라주노프도 말년에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스트라빈스키로서는 어느 정도 선배에 대한 존중심이 있던 시기라 보면 된다. [16] 현재 글라주노프와 스트라빈스키가 갖고 있는 위상의 격차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안되겠지만, 당시에는 이게 당연했다. 글라주노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수제자로 계속 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나갔던 반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기초가 안 되어 있다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한번 퇴짜를 맞았으며, 어렵게 그의 제자가 된 후에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7] 다만 이 스트라빈스키의 첫 교향곡은 스트라빈스키의 개성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습작풍의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 전집에 수록할 목적이 아니면 잘 연주되지 않는다. [18] 디아길레프가 듣자마자 스트라빈스키를 전격 발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19] 그가 실제로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음악에는 딱히 이들의 작법을 참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