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7:48:14

프란츠 리스트

서양 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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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란츠 리스트[1]
Franz Liszt
파일:Franz_Liszt_1858.jpg
출생 1811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틀:국기|]][[틀:국기|]] 헝가리 왕국 라이딩[2]
사망 1886년 7월 31일 (향년 74세)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바이에른 왕국 바이로이트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육인
사조 전기 낭만주의
신체 185cm
자녀 장녀 블랑딘 리스트 (1835~1862)
차녀 코지마 리스트 (1837~1930)
장남 다니엘 리스트 (1839~1859)
종교 가톨릭[3]

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4. 음악가들과의 관계
4.1. 선배 음악가
4.1.1.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은 경우4.1.2. 교류만 있거나 영향을 받은 경우
4.2. 동료 음악가4.3. 후배 음악가4.4. 주요 제자들
5. 음악 성향
5.1. 연주 스타일5.2. 작곡 성향
6. 후대의 평가와 영향7. 연주와 레코딩8. 작품 목록9. 기타10.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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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육인.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는 리스트는 피아노 역사에서 크나큰 업적을 남겼으며, 리스트의 혁신적인 연주 기법과 작곡 기법은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높이 평가 되고있다.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는 낭만주의 음악사에서 쇼팽과 함께 피아노 음악의 역사 전반으로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19세기 서양음악 전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양대산맥격의 인물이다. 바그너 외에도 로베르트 슈만,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 샤를 발랑탱 알캉, 지기스문트 탈베르크 등 여러 작곡가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으며, 그중 쇼팽과의 인연이 뜻깊었다. 요절한 동년배의 천재 음악가들과 달리 별다른 잔병치레도 없이 대단히 건강하게 장수해서 음악계에 나름의 족적을 남긴 동기들 중에서도 몇 안되게 초, 중, 후기 낭만파 일대를 전부 풍미할 수 있었던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고도프스키, 부소니, 프로코피에프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사실상 리스트 이후에 등장한 모든 피아니스트들은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에스테 장의 분수나 Two Legends 등의 곡들을 작곡하여 인상주의 음악을 시작시켜 후배 작곡가들인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리고 후기에 무조성의 음악을 작곡하는 등 새로운 실험적인 곡들을 작곡하여 그가 서양 음악계, 나아가서 전 세계적으로 음악계에 남긴 직간접적인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리스트 곡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라 캄파넬라, 사랑의 꿈, 헝가리 광시곡 2번은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 실력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낭만주의 음악 시대에서 바그너 등이 속한 신독일악파(New German School)를 이끌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당시의 음악형식들에 있어 이념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더욱 진일보한 방식의 미래지향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따라서 기존 음악 장르의 대표격인 교향곡을 탈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특히 피아노의 기능성에 있어 그의 동료인 쇼팽이 창안해낸 테크닉적 발상 및 정신적 유산들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과 초절기교 연습곡, 베토벤 교향곡 편곡, 오페라 편곡이나 그에 덧붙인 환상곡 등의[4] 여러 창작들을 통해서 기교적, 관현악적인 표현력을 극한까지 구현해냈다. 또한 기록상 최초로 연주자 한 명만을 위한 독주회를 초연하기도 했다.

한편 연주와 작곡 외에도 당대의 많은 동료, 후배 작곡가들의 스승이자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였으며 각종 음악사업을 추진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스트 이후 에르뇌 도흐나니, 버르토크 벨러, 코다이 졸탄, 리게티 죄르지 헝가리의 수많은 대작곡가를 배출한 헝가리 국립 음악학교(Hungarian National School of Music)는 바로 리스트의 주도로 설립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의 모국인 헝가리에서는 리스트를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추앙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헝가리의 관문인 부다페스트의 국제공항 이름에도 리스트 이름이 들어갔을 정도다.[5]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사거(死去)한 지 100년째 되는 1986년부터 프란츠 리스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3년 간격으로 시행하고 있다.
파일:Liszt_(Lehmann_portrait).jpg
Henri Lehmann 작,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Portrait of Franz Liszt) (1839)[6]
프란츠 리스트의 젊은 시절을 그린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다
젊은 시절에는 금발에 키가 크고 패기와 카리스마가 넘치는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7]. 동료 음악가인 로베르트 슈만은 <음악신보>에 "빈의 어느 유명 판화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리스트의 얼굴은 어떤 화가라도 그리스 신의 모델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다."라고 저술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같은 글에서 "특히 창백한 얼굴, 마른 몸매, 인상적인 옆얼굴, 머리끝으로 갈수록 인물의 표정이 풍부해지는 것까지 그(리스트)는 젊은 장군 시절의 나폴레옹과 비슷하다."라고도 언급했다.[8]

2. 이름 표기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독일어 이름이다. 성이 앞에 오는 헝가리어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 당시 정서법으로는 Liszt Ferencz)'이다.

리스트의 출생지와 유년기 성장지는 헝가리 왕국의 도보르얀 지역으로 독일어권에 속한 지역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아예 오스트리아[9]로 넘어간 지역이다. 한편 리스트의 부계는 헝가리인이고 리스트 본인도 자신의 정체성을 헝가리인으로 두고 있었다. 리스트는 ' 밀가루'를 뜻하는 헝가리어 성이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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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가들과의 관계

4.1. 선배 음악가

4.1.1.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은 경우

리스트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피아노 스승. 9살부터 체르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체르니는 리스트와의 첫만남에 대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보이는 소년", "(피아노를 연주할 때)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연주는 체계가 없이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 대로 움직였다"고 서술하면서도 "그럼에도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초견연주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고 회상했다.

원래는 상당히 비싼 수업료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침이었던 체르니였으나 어린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재능을 인정하여 특별히 한시간에 1굴덴만 받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으며, 리스트 가족의 경제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아예 레슨비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고 한다. 체르니 본인의 회고록에 의하면 처음 몇 달은 철저하게 기교 연습에만 매진하도록 했으며 리듬을 엄격하게 통제시킨 채 고른 소리,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강조했고, 곡들을 아주 빠르게 초견하도록 훈련시키거나 주제를 제시하여 즉흥 연주도 익힐 수 있게 훈련했다고 한다.

이런 가르침으로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역대 최고를 논할 수준의 테크닉을 갖추게 되었으나, 너무 화려한 연주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체르니는 성장한 제자의 음악을 그닥 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런 체르니한테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을 헌정했다.
빈에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시기에 살리에리 밑에서 가창, 관현악 총보를 읽는 방법, 화성, 대위, 관현악 편곡 지식 등을 배웠다. 체르니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 또한 수업료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 당시에 리스트 일가족은 경제형편이 어려워 빈 외곽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체르니와 살리에리의 수업을 받으러 빈 시내까지 오갔어야 했는데, 살리에리는 이런 환경 때문에 리스트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리스트 부자 몰래 아담 리스트가 근무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리스트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의 가족이 빈 시내로 이사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리스트 가족의 이사를 도왔다. 살리에리에게 배웠던 시절로부터 60년이 지난 후에도 리스트는 살리에리에 대해 "지금까지도 마음 깊숙히 감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안톤 라이하, 페르디난도 파에르
파리음악원 입학이 외국인이란 이유로 무산되자 12세의 리스트는 개인교습으로 파에르에게 작곡을, 라이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파에르는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엥 음악감독으로서 리스트의 오페라 <동상슈> 위촉을 추진했으며, 라이하는 파리음악원의 대위법 교수였다.

위처럼 리스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명망 높은 음악가들의 자비와 친절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런 경험의 영향인지 리스트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키우게 됐다.
리스트는 밀라노에 방문할 때마다 이미 오페라계에서 은퇴해 있던 로시니의 살롱을 방문하며 로시니와 교류했다. 1830년대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는 인기 있어도 피아니스트나 유명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로시니와 그 동네 악보 출판 관계자의 인맥 덕분인지 리스트는 스칼라 극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

4.1.2. 교류만 있거나 영향을 받은 경우

당대 대부분의 연주가들이 그랬듯이 리스트 또한 파가니니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겠다”라고 다짐한 일화가 유명한데 리스트는 정말로 이를 이룬다. 이렇듯 그의 영향력은 리스트 생애에 있어 매우 지대하다보니 그의 초~중기 대부분의 피아노곡들에서 공통적으로 돋보이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성격들은 파가니니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1830년 12월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그 전날에 지인을 통해 환상교향곡의 악보를 미리 접한 리스트가 베를리오즈에게 찾아간 것을 계기로 알고 지내게 됐다. 이 작품에 대해 청중의 반응은 상당히 엇갈렸지만 리스트는 열렬히 칭찬하고 갈채를 보냈다고. 1834년에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자비로 출판하고 자신의 연주회에서도 연주했는데, 환상교향곡의 원곡의 악보 출판이 1845년에서야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리스트가 환상교향곡을 알리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에 영향을 받아 리스트가 탄생시킨 것이 바로 교향시이다. 리스트는 파우스트라는 작품에 큰 애정을 갖고 메피스토 왈츠,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에게 처음으로 파우스트를 추천한 것도 베를리오즈이다. 파우스트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에게 헌정되었다.

1840년대 이후 파리에서 급속하게 지지를 잃은 베를리오즈였으나 리스트는 이후로도 베를리오즈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바이마르의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한 후에는 연주하기가 까다로운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베를리오즈는 리스트가 있는 바이마르를 여러번 방문했는데, 그 중 한번은 카롤린 공작부인과 친해질 기회를 얻었고, 1858년 카롤린의 격려로 오페라 <트로이인>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카롤린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1882년 리스트의 회고에 의하면 1860년에 파리에서 연주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사이의 비평논쟁 때문에 리스트까지 베를리오즈와의 관계가 복잡해졌다고 한다.
스승인 카를 체르니의 스승. 리스트의 빈 데뷔콘서트에 참석한 베토벤이 그의 연주에 감동해서 무대 위로 올라와 '야 이 헝가리 소년아, 너 참 대단하구나.'라고 감탄을 연발하며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는 일화가 유명하고 이후에 판화로까지 그려졌다. 하지만 이 일화는 리스트가 죽은 지 12년이 흐른 뒤에나 출판된 회고록에서 등장할 뿐이고 베토벤이 리스트의 콘서트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없는 데다가[10] 결정적으로 당시 베토벤의 청력은 거의 완벽하게 상실된 직후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허나 그와 별개로 리스트 본인의 베토벤에 대한 존경은 대단했는지 그의 초기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편곡이 대다수였으며, 베토벤의 고향인 이 베토벤의 동상을 세울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란 이야기를 듣고 발 벗고 나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 연주회를 열거나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하는 작업을 완성하기도 했다.

4.2. 동료 음악가

쇼팽은 1810년생, 리스트는 1811년생으로 거의 동갑에 둘 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활약한지라 둘이 만나기도 전부터 비교되곤 했는데,[11] 정작 1832년 쇼팽의 파리 데뷔연주회에서 알게 된 뒤로 둘은 평생 막역한 사이가 되었으며, 리스트-탈베르크 같은 경쟁관계가 된 적이 없다.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살롱계에서 살길을 마련하도록 애썼으며 쇼팽을 평생 존경했다. 쇼팽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리스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해서 자신의 에튀드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트의 작곡실력을 높게 쳐주지 않았고 그의 작곡능력에 대해 0점이라거나 남의 말을 타고 높은 산을 정복한다고 비꼬기도 했다.[12] 그래도 리스트를 신뢰했던 모양으로 연주회를 꺼리는 쇼팽이었지만 리스트와 함께[13]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그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리스트가 그렇게 받은 열쇠를 플레옐의 사장 부인[14]과 관계를 가질 때 사용하는 병크를 저질러버린다.[15] 이 사건으로 인해 리스트와 쇼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꽤 있으나 이걸 계기로 당장 절교하진 않았다.

사실 쇼팽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 조르주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한 것도 다름 아닌 리스트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의 친구였던 상드는 리스트-다구 커플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했는데, 그 때 리스트로부터 쇼팽의 천재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상드가 쇼팽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마리 다구가 파리에서 돌아와서 연 살롱에서 리스트의 중개로 쇼팽과 상드가 처음 만나게 된 것. 정작 둘을 소개시켜준 리스트는 상드와 다구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똥이 튀어 늘 상드에게 초대 받아서 방문했던 노앙의 집에 초대도 못 받고 쇼팽-상드 커플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후로도 리스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 때 쇼팽의 가족들을 만나는 등 쇼팽과의 우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쇼팽의 지병 때문에 잘 풀리지 않은 채 쇼팽이 39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쇼팽 사후에도 리스트는 최초이자 쇼팽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쇼팽 전기[16]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거나 연주회를 가질 때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등 쇼팽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17]
멘델스존이 16살일 때 처음으로 14살인 리스트의 연주를 들었는데 "손가락은 많은데 머리가 모자라다"는 감상을 남겼다고 한다. 정식으로 서로 알게 된 건 1830년대 초반에 멘델스존이 파리에 머물 때로, 리스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견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음악에 있어 리스트는 진보적인 성향이고, 멘델스존은 보수적인 성향이라 멘델스존이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에 불평하는 일이 많았다.[18] 그래도 친구라고, 리스트가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슈만이 쓴 기사에 의하면 리스트의 컨디션 난조로 둘째 날 공연이 취소됐을 때, 멘델스존과 힐러 주최로 리스트를 위한 음악축제를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음악성의 차이로 점차 교류가 없어졌다.
리스트는 일찍이 슈만의 재능을 알아보고 있었다. 편지로 작곡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았고 슈만은 리스트가 연주회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편지로 교류해오다가 1840년에 처음으로 실제로 만났는데 슈만은 마치 20년 지기를 만난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슈만과 결혼한 클라라는 리스트를 싫어했고[19][20], 낭만주의 논쟁에 있어 슈만은 바그너, 리스트가 속한 진보 진영의 반대인 보수적 낭만주의 진영에 속해있었기에 음악적으로 대립했다. 슈만은 <음악시보>라는 언론사를 설립하고 10년 동안 편집자로 활동하다 사임했는데, 그 다음으로 편집장을 맡은 리스트의 막강한 지지자인 프란츠 브렌델이 슈만과 그의 무리를 공격한 일로 슈만과 리스트의 사이가 더 멀어졌다.

관계에 금이 갔지만 바이마르 시절 리스트는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장면> 3, 교향곡 4번, 피아노 협주곡, 4대의 호른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협주곡 등 그의 음악을 지휘와 피아노를 통해 적극적으로 연주했다. 리스트는 슈만이 자신에게 환상곡 op.17을 헌정했던 것에 대한 답례로 소나타 B단조를 썼는데, 악보가 전달됐을 땐 슈만이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슈만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클라라 슈만은 예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를 존경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아버지와 순수한 음악사조를 목표하던 남편의 영향으로 점차 그의 음악과 연주를 싫어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거부감이 더욱 심해졌다고 기록에서 회고되고 있다. 하지만 1854년, 슈만의 정신불안이 심해져 입원한 후 자녀 8명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클라라는 바이마르의 리스트에게 연주 요청을 했으며, 리스트는 이에 동의하여 함께 그 공연을 주관했고 얼마 후 <신음악시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실리는 비평에서 클라라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클라라는 리스트에 대한 태도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신인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를 모방하는 것을 경계하여 리스트 사후에 "그(리스트)는 뛰어난 비르투오소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위험한 교본이다. 최근에 데뷔하는 연주가들은 대부분 리스트를 모방하고 있으나 그들에게는 정신도, 재능도, 고귀함도 결여돼 있다"와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21]
바그너와 리스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40년대 초 파리라고 알려져 있다. 리스트는 일찍부터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의 인간성이 좋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추진력과 천재성만큼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22] 1849년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바그너는 혁명의 편에 섰다. 이 혁명은 실패했고 그는 총살과 체포를 가까스로 피해 탈출에 성공했으며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정부와 본인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카를 알렉산더를 설득하여 피난길에 오른 바그너에게 중립국 스위스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리스트가 대신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했고 이 공연으로 지휘자로서의 리스트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리스트는 바그너가 취리히에 있을 때 그를 여러번 만났는데, 특히 1853년에는 며칠동안 대화와 음악작업으로 영감을 주고받았고 리스트는 이 때 한창 바그너가 구상 중이었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집필을 격려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삶>에 따르면 이 때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을 비롯해 여러 교향시 신작을 함께 검토했고 이 일로 창작의욕을 크게 자극 받았다고 한다. 1854년 리스트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바그너의 예술성을 옹호했다. 사방에서 돈을 빌리고 다녔던 바그너답게 리스트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위해 돈을 빌려줄 것을 여러 번 요구했고, 한번은 리스트가 자신의 형편도 좋지 않다며 출자를 거절하자 오히려 성질을 내 리스트를 어이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리스트는 바그너의 예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니벨룽의 반지 상연을 위해 바이마르의 알렉산더 대공을 설득해서 바이마르에 새 극장을 건설하고 바그너를 궁정의 특별요원으로 임명시키려는 시도도 해봤는데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그너 또한 리스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는데, 지금이야 낭만주의시대 최고의 소나타로 평가 받고 있지만 당시엔 한슬리크와 클라라 슈만에게 까이고 연주를 듣던 브람스는 졸기까지 했던 리스트 소나타를 리스트의 제자 칼 클린드워스의 연주로 듣고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위대하고 사랑스러우며 심오하고 고상하다"며 격찬했다. 한스 폰 뷜로에게 쓴 편지에서는 리스트의 작품을 알게 된 후로 화성에 관해서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고 언급했다. 다만 저명인사 중에서도 안티크리스트의 선구자 격이였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종교음악에 관해서는 무관심 혹은 비판적인 태도였고 화해 후 리스트로부터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악보를 받았을 때는 코지마와 함께 작품을 디스했다.

60년대 이후 종교관의 차이에 더해 생애 문단에서도 언급 됐듯이 바그너와 코지마의 불륜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한동안 틀어졌다. 1867년에 리스트가 바그너를 방문했을 때 말싸움을 한 이후로 5년동안 그들은 절연했고, 1872년에서야 가까스로 바그너가 화해요청과 바이로이트 극장 정초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23] 바그너가 사망하기 직전, 1882년 11월부터 1883년 1월 사이에 리스트는 바그너 부부의 초대를 수락하여 베네치아에서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이 때 리스트는 마치 바그너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슬픔의 곤돌라>(첫번째 판본)를 작곡했다.

4.3. 후배 음악가

브람스는 슈만을 만나기 전에 레메니와 함께 리스트를 찾아갔는데, 이 때 리스트는 브람스의 <스케르초 E플랫 단조> 자필악보를 초견으로 완벽하게 연주해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소나타 B단조를 연주했는데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브람스가 앉아서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 말도 없이 응접실에서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싸한 첫만남에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몇주동안 브람스와 레메니를 손님으로 초대했다.

리스트는 진보적 낭만주의, 브람스는 보수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음악가였다. 리스트의 지지자가 브람스를 비난하거나, 반대로 브람스의 지지자가 리스트를 비난하는 일, 브람스가 요아힘과 함께 리스트의 신독일악파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게재한 일 등이 있었으나 둘은 인간적으로 대립했다기 보단 음악에 대한 사상으로 대립한 것에 가깝다.
그리그는 리스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곤 했는데, 리스트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칸디나비아 혼이다"라고 극찬하며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하라고 격려했는데, 이것이 그리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1861년에 처음 만난 후로 사적으로 함께 연탄 치는 것을 즐기거나 왕복서간을 보내며 교류했으며, 리스트가 생상스의 < 죽음의 무도>를 피아노로 편곡한 것 처럼 생상스도 리스트의 몇몇 작품의 편곡을 남겼다. 또한 파리 생 마리 교회에서 생상스의 연주를 듣고 그에 대해 리스트는 "이 시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초연하기 위해 힘 쓰기도 했는데 정작 초연에는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며, 생상스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인 오르간 심포니는 리스트가 사망하기 2개월 전인 1886년 5월에 초연 됐는데 얼마 후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자 이 작품은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드뷔시가 로마대상에 수상하여 로마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1886년 1월에 리스트와 만났다. 이후에 부조니가 들은 얘기에 의하면 드뷔시는 리스트의 인상주의적인 작품 <에스테장의 분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드뷔시의 <물의 반영>이 이 <에스테장의 분수>에서 영향을 받아 작곡된 곡이다. 드뷔시와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인 모리스 라벨의 < 물의 유희>도 <에스테장의 분수>의 영향을 받았다.
리스트는 러시아 5인조의 작품의 화성에 관심을 가져 차이코프스키보다 5인조 쪽을 높이 평가했다. 무소륵스키의 가곡집 <아이들의 방>을 선호했으나 무소륵스키의 교류는 없었고, 5인조 중에서는 특히 보로딘과 친분이 있었다. 리스트는 독일의 음악제 관계자들에게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리스트가 존명 중일 때는 전 독일음악협회의 음악제에서 거의 매년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5인조, 루빈시테인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이 연주됐으나 리스트 사망 후엔 차이코프스키 이외의 작곡가들의 연주빈도가 현저히 떨어진 것을 보면 독일에 러시아악파의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리스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보로딘은 "나의 <교향곡 1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안타르> 같은 작품이 바덴바덴이나 마그데부르크의 음악제에서 연주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대성공하여 독일의 언론에 지극히 호의적으로 보도된 일은, 리스트의 신러시아악파에 대한 큰 관심과 공감, 그리고 독일의 음악계에서 가진 영향력 덕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면식은 없었지만 서로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리스트는 발라키레프의 < 이슬라메이>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발라키레프는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을 러시아에서 초연했고, 무료음악학교에서도 <단테 교향곡>과 같은 리스트의 여러 작품을 연주해 러시아에 리스트의 음악을 알리는데 공헌했다. 그의 교향시 타마라는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편지를 통해 교류하고 있었으며 큐이의 피아노 조곡이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자신의 편곡이 포함된 러시아 민요집을 선물 받은 리스트는 이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자신도 직접 러시아 민요 <이별>을 편곡했는데, 이 곡은 러시아 출신 제자인 실로티에게 헌정됐다.
보로딘이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교향곡 1번에 대해 경험부족이라며 자조하자 이대로 괜찮으니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했다. 보로딘 교향곡 1번은 1880년 5월에 개최된 전독일음악협회의 음악제에서 연주돼 보로딘이 국제적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다. 보로딘의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4.4. 주요 제자들

5. 음악 성향

5.1. 연주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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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의 악마적인 기교를 묘사한 풍자화
음악사를 풍미한 리스트는 명음악가이기 전에 전례없는 비르투오조로서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허나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에 와서 19세기에 살았던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기 때문에[24][25] 사라진 그의 연주는 자료를 통한 추측뿐만이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리스트는 그가 작곡한 곡의 전반적인 스타일대로 과거의 피아노 주법, 즉 얌전하고 정확하며 우아하고 간결한 화음을 짚는 종래의 기법을 깡그리 무시한 채 관현악 소리에 맞먹는 우렁차고 화려한 연주 효과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감정적이며, 전례 없는 빠른 속도가 특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리스트는 낭만주의 안의 고전주의를 지향한 브람스나 클라라 슈만과는 노선을 같이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연주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놀라움을 넘어 소설이 아닌가 의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당대는 물론 음악사의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을 통틀어서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초견 능력과 즉흥 연주, 기교를 가졌다고 화자되는데[26],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당시 그와 비견되는 기교가였던 알렉산더 드레이쇼크(Alexander Dreyschock)가 연주자이자 평론가인 토마섹의 발언[27]에 자극을 받아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씩 연습해서 쇼팽의 혁명연습곡의 왼손을 원템포 그대로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여 인기를 얻자, 리스트는 그의 활동지였던 비엔나에 방문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 중 가장 빠른 템포인 25-2 쇼팽 연습곡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리스트는 스케일로 이루어져 있는 해당 연습곡의 오른손 기교부를 옥타브로 짚은 채 느린 템포로 반복하면서 원템포에 다다를때 까지 속도를 점점 빠르게 올렸고, 종래는 모든 쇼팽 연습곡을 그 속도만큼 유지하면서 옥타브로 변형하여 연주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였다고 한다.[요약]

또 다른 예시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을 연주할 때 리스트가 검지와 중지로 불이 붙은 담배를 잡은 채로 반주했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리스트 생전에 그의 전기를 작성한 리나 라만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나가 리스트에게 루트비히 뵈너가 두 손가락에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으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고 그 이후의 일화는 이렇게 전해진다.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는 피아노에 앉아 양손을 각각 세 손가락만 사용한 채로, 바흐의 어려운 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일례로,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쇼팽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작곡가였던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내 펜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
리스트가 지금 나의 연습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가 나의 머릿속의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네.
그의 연주를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라네.
또한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악보를 보자마자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그리그 앞에서 바로 초견으로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일례는 이미 유명하다. 한 번은 바이올린 소나타를 가지고 리스트를 찾아간 그리그 앞에서 "악보를 보자마자 단 한번만에 바이올린 파트와 피아노 파트를 혼자서 완벽한 퀄리티로 연주하는 유일무이한 모습을 보고 그만 어린아이처럼 웃고 말았다"며 그리그 본인이 편지로 회고한 기록도 남아있다.

5.2. 작곡 성향

"피아노는 그 자체로 오케스트라다."
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1개의 오페라[29], 수십개의 합창곡과 교향시, 수십곡의 성악곡[30]과 몇곡의 실내악곡, 1천 곡에 다다르는 피아노곡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 중 리스트가 가장 중점적으로 작곡한 것은 역시 피아노곡이다. 리스트는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매우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을 즐겨 작곡했다. 따라서 리스트의 피아노 곡들은 하나같이 테크닉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연주하기 매우 어렵기로 유명하다.

리스트는 “피아노는 그 자체로 오케스트라다”라는 특성 속에 많은 관현악 곡들, 오페라 등을 피아노 한 대로 표현하기 위해 일생동안 연구하고 편곡했으며,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피아노 음악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단 하나의 피아노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으면서 피아노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그의 곡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기교와 세세한 표현력을 요구하는 등 테크닉의 극한을 추구한다.

전술했듯이 그의 수많은 피아노 곡중 상당수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것인데, 그 당시 비싼 연주회장에 자주 가기 어려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관현악곡을 피아노로 효과적이게 편곡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31] 하였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거나 연주해서 알리기도 했다.[32]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해 남긴 것은 특히 유명한데, 하나같이 끔찍하게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며, 그와 비례해서 레코딩 수도 적다.

한 마디로 작곡/편곡 측면에서 관현악에 맞먹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피아니즘을 추구한 작곡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급격한 도약, 급속한 패시지, 긴 아르페지오와 장식음, 분산화음에 의한 선율처리, 평행 트릴 등 이후의 피아노곡에 널리 쓰이게 된 각종 기법의 운지법을 연구하여 연주와 작곡에 도입하였다. 난이도가 꽤나 되는 작품은 항상 3도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 외에도 리스트는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관현악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교향시는 시, 소설, 영웅의 일대기, 회화 등 다른 예술분야에서 얻은 인상이나 작곡자가 스스로 착상한 시적 영감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관현악 장르로, 엄격한 형식을 갖고 순음악적인 경향이 강한 교향곡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표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33] 이 교향시는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생상스, 시벨리우스 등 많은 관현악 대가들이 걸작을 작곡했지만 신고전주의부터는 그 명맥이 서서히 끊기면서 부진한 장르가 된다.

이렇게 피아노와 관현악 양쪽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겼지만 의외로 둘이 합쳐진 피아노 협주곡 분야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하다. 3곡을 작곡했는데 3번은 사후에 발견되었다. 관현악이 약했다고 평가받는 쇼팽의 협주곡보다 잘 연주되지 않는 편이다. Dies Irae의 패러프레이즈 곡인 죽음의 춤이 그나마 인지도 있다. 피아노 자체를 관현악 급으로 활용하는 장점이 막상 진짜 관현악과 함께일 땐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어려워서인 듯. 에밀 폰 자우어[34],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등의 음반이 있다. 네이버 캐스트 참고

그의 후기 작품들은 기교적인 요소가 줄어든 대신 실험적인 화성, 반음계적 진행과 모호한 조성을 활용하여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을 예견하고 있다. 제목에 대놓고 드러낸 무조 바가텔(Bagatelle without tonality)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기에 쓴 소품들을 살펴보면 메피스토 폴카, Sospiri! 등 전체적으로는 조성적으로 진행하되 시작과 끝만 애매하게 한 곡이 많은데, 이런 묘한 작품들을 들으면서 노년기 리스트가 예견한 미래가 무엇일지 곱씹어보는 것도 리스트의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순례의 연보 3편에 있는 에스테장의 분수(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처럼 인상주의를 예견하는 작품도 남겼다.[35]

한편 리스트는 헝가리 태생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에 헝가리적인 특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난 라이딩 지역은 헝가리 영역이긴 했어도 당시에는 독일어권에 속해 있었고, 그의 부모는 독일어를 사용했기에 그 역시 독일어가 모국어였다. 하지만 어릴때 프랑스로 넘어간 이후로 리스트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일상 생활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본격적인 출세를 프랑스에서 하였고 순회연주자 생활을 접은 후에도 바이마르나 로마 등에서 여생을 보냈다.[36]

그렇긴 해도 그는 나름 헝가리 집시음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곡의 헝가리 광시곡이다. 다만 헝가리 음악을 표방한 그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선율만 차용한 것이고 작곡 기법 자체는 전형적인 독일의 후기낭만파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리듬, 화성, 선법 등 헝가리 민속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를 분석하여 본격 도입한 후배 작곡가 버르토크 벨러나 졸탄 코다이 등과는 대조를 이룬다.


한국계 클래식 작곡가이자 유튜버인 Nahre Sol의 소개 영상. 영상 후반부(6:50)에서는 프란츠 리스트 스타일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무슨 월광소나타 3악장처럼 들린다

6. 후대의 평가와 영향

단순히 인기있던 음악가의 범주를 넘어서 당대의 그 어떤 음악가와 비교하더라도 탁월한 재능까지 모두 갖춘, 그야말로 19세기에 현현한 음악의 신이라 해도 전혀 모자름이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줬으며[37], 매우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수많은 분야에 창작의 손길을 뻗었기 때문에 후대에까지 매우 광범위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요약하자면 1. 피아노에 대한 혁신적인 연구 2. 교향시 형식의 창립 3. 민속 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의 시작 4. 현대 사조 음악과 대중문화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 5. 음악인들의 사회적 지위 신장 및 후학 양성으로 그 업적을 정리할 수 있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기 자체의 발전과 더불어 혁신에 비견될 만큼의 음악적 격변들이 태동을 머금던 대 낭만주의 시기의 초창기이자 전성기였으며, 리스트 이외에도 프레데리크 쇼팽, 지기스문트 탈베르크,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 안톤 루빈스타인처럼 기라성과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쏟아져나오던 시기였기도 하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은 리스트인데, 화려한 쇼맨쉽과 이를 받쳐 주는 잘생긴 용모[38], 강철같은 체력과 프로 의식, 고고한 상류층 사교계 여성들을 사로잡을만한 수완 높은 사교성과 처세술, 거기에 안티들도 부정할 수 없었던 업계 최상위의 실력까지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위인은 낭만주의를 통틀어 리스트에 미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39] 게다가 자신을 찾아온 후배 음악인을 배척하지 않고 대부분 받아주는 대인배 기질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음악팬들 뿐만 아니라 전업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가히 압도적이었다.[40]

리스트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을 옮겨다니는 동안 각국의 왕족, 황제들이 하사하는 귀족 칭호나 부와 명예는 따위 취급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가 존경하던 베토벤처럼, 상류층들이 자신에게 하는 대우가 소홀하면 연주를 거부하거나 면전에서 모욕을 주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며, 그에 반해 어느정도 나이가 들은 뒤로는 레슨비 하나 받지 않은 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후학들[41]을 양성하면서도 생애 평생 동안 일 중독에 가까울 만큼[42] 정력적인 활동을 통해 엄청난 양의 작,편곡 이외에도 수천 건이 넘어가는 저술 활동, 평론, 곡 평가 및 검수 등을 남겼음에 옅보이듯이 그러한 성공을 이루고도 흔쾌히 음악도들의 편에서 앞장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음악의 질적 성장과 더불어 음악인들의 권리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의 전수에 매우 인색했던 파가니니와 달리 리스트는 자신이 창안하고 터득한 기교, 운지법, 작곡법 등을 거리낌없이 공개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상기한 엄청난 숫자의 작,편곡을 남기는 동안 그 안에 자신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남김없이 구현해내었으며, 자신의 근거지인 바이마르로 각지에서 몰려든 후배들한테 자신이 터득한 각종 음악적 기법들을 숨김없이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못 따라해서 문제지 덤으로 상기한 파가니니 연주법은 리스트 편곡을 토대로 잊혀질 뻔한 연주법이 복원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리스트의 후기 작품은 당대의 작곡가들 뿐만 아니라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과 같은 인상주의 색채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한테도 강한 영향을 남겼다거나 부조니,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등의 여러 리스트 세대 이후의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은 리스트가 남기고 떠난 작곡/연주기법들을 더욱 진보시켜 나갔다. 또한 그가 창시한 교향시와 헝가리 집시 음악에서 발굴한 광시곡은 후기 낭만주의 및 국민악파 작곡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로 자리잡았다.

한편 리스트는 당시 찬조 출연자를 반드시 동참시켜야 하는 형태가 음악회의 불문율임에도 후대에까지 리사이틀(recital)이라고 불리는 독주회의 개념을 최초격으로 이끌어냈다[43]. 최초로 무대에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연주하였으며, 곡을 모두 외워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했다. 또한 피아노가 놓인 방향도 관객이 연주자의 손과 옆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바꾸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44]

생전 그 독보적인 위상으로 전 유럽을 순회하면서 연주여행을 하는 동안 왕이나 다름없을 만큼 화려한 마차를 타고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대의 마차들을 거느린 채 순회연주를 다니거나, 공연의 열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손의 장갑을 벗어던지며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등의 연극적인 퍼포먼스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러한 행위와 이에 동조하는 팬덤현상은 현대의 아이돌리즘(idolism)과도 맥이 닿아 있다. 즉, 그가 시연해낸 공연문화는 연주자(가수)에 열광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현대 대중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45][46] 이렇듯 리스트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자리잡자 당연하게도 당시의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질 낮은 연주자들의 무분별한 악보 편집, 무질서한 템포 변화, 맹목적인 기교의 추구, 그리고 음악의 내용보다 퍼포먼스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들이 이때를 중점으로 조장되었다고 한다.

물론 너무 지나치게 연주자를 영웅시하게 되는 아이돌리즘화 조장의 책임에 대해서는 당시부터도 많은 비판이 있었으며, 상기되있는 것처럼 뱁새가 황새 따라하려는 듯이 가랑이를 찢어대는 사례가 어찌나 많았던지 당시 평론들의 상당수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노골적일 만큼 이렇게 실력없고 겉멋만 잔뜩 든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들로 가득했다. 또한 볼륨이 매우 높거나 화려함을 추구하는 류의 음악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음악적 깊이는 얕고 피상적이라는 평가도 많았는데, 그가 생전 건재했을 땐 잠잠하던 비판여론이 그의 사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리스트가 정립해놓은 사조 전반이 사향세로 접어들던 시기도 있었다[47]. 또한 후대에는 리스트가 정립한 낭만 사조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음악사조들이 주류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후배인 버르토크 벨러를 비롯한 다수의 현대 음악가들은 피아노 음악에서 과장된 기교를 배제하고 좀더 직선적이면서도 타악기 소리와 같은 원초적인 음향을 구현하려고 했다.

허나 안티 리스트적인 일부 학계 경향이 존재했다고 해서 그가 음악사에서 많은 성취와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리스트의 음악에는 공과 과가 같이 존재하지만 자타를 막론하고 여러 측면에서 서양음악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인물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이마르 시절부터 남긴 그의 작품들은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원숙하고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주자나 음반사들이 지속적으로 그의 이런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고 있다. 그의 작업물들이 단순한 인플루언서 정도의 그것이었거나 운이 조금 좋았던 케이스에 불과했다면 아무리 그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을지라도 한때 음악성을 제외하고 그의 몇 안 되는 맞수로 평가받았던 탈베르그나 루빈슈타인처럼 그 또한 역사에서 잊혀졌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많은 작업물들의 일견 피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형식들 사이에 숨어있는 천재적인 발상과 뛰어난 음악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기 때문에 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거장들의 반열에 서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 연주와 레코딩

대표적인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레슬리 하워드, 호르헤 볼레, 조르주 치프라, 라자르 베르만 등이 있다.[48] 다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악 중에 피아노음악의 비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관계로 리스트의 곡만 연주하는 연주자는 많지 않다.

리스트의 피아노 전곡을 수록한 전집은 하이퍼리언 레코딩스(Hyperion Recordings)의 레슬리 하워드(Leslie Howard) 전집이다. 하워드의 전집은 CD 장수만 99장에 재생시간만 5일[49]을 넘긴다![50] 이 공로로 하워드는 영국 리스트 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국제 리스트 콩쿨(네덜란드)에서 심사위원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올해 리스트 전집 100번째 CD가 나온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Cyprien Katsaris)가 연주한 리스트 편곡 -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은 전설적인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8.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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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로는 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형편이라 자신이 리스트의 제자가 아님에도 리스트의 수제자라고 거짓 광고를 했는데, 그 마을에 리스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을 염려하여 리스트를 찾아가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리스트는 그녀에게 음악회 때 연주할 곡을 쳐보라고 한 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었고, "이제 나에게서 배웠으니 틀림없는 나의 제자이다. 그러니 연주회를 포기하지 말고 떳떳하게 연주하라." 고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시 대인...다른 얘기로는 리스트가 우연히 그 마을에 들렀고 숙소에서 제자의 공연 때문에 오셨군요라는 말에 공연장에 가 그녀를 만났고 사정을 알게 돼 그녀에게 조언해주고 공연에도 직접 출연해주었다고 한다.[51] (확실치가 않음) # #]
  • 대단히 큰 손, 약 12도(도~솔,라)에 달하는 손을 지녔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리스트의 손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증언된다. 특히 그의 제자였던 라흐문드는 리스트가 직접 그에게 '청중은 내가 대단히 큰 손을 가진 줄 알지만, 네가 보다시피 나는 그저 10도(도~미)를 겨우 벌려서 조용히 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라 증언했다고 한다. 허나 대단히 넓은 폭의 아르페지오, 비상식적일 정도의 도약[52], 복잡한 코드들은 화려한 악절을 위한 제물인지 그의 음악들은 유독 손이 작을수록 고통받는다, 또한 리스트는 손가락 사이사이가 잘 벌어진 편이라 한결 수월하게 어려운 연주가 가능했었다고 한다.[53]
    그리고 음악계에는 거대한 손의 본좌가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
  • 이름이 비슷한 유명인으로 법학자 프란츠 폰 리스트가 있는데, 두 사람은 실제로 친척이었다.

10. 외부 링크

  • 저서
《내 친구 쇼팽》(이세진 역, 포노, 2016). 한국어판. 쇼팽 사후 처음 출간된 쇼팽 전기.


[1] 헝가리어로는 리스트 페렌츠 (Liszt Ferenc). [2] 헝가리어로는 도보랸(Doborján). 본래는 헝가리 왕국의 지방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 리스트의 생가는 헝가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에 있다. [3] 수많은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지만, 청소년 때부터 성직자가 꿈이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신앙심이 독실하여 실제로도 사제의 길을 걷다가 부제품 두 단계 전인 시종품까지 받고 사제의 길을 접었다. [4] 그의 회상곡과 같은 패러프레이징 편곡들을 통해 감상할 수도 있다. [5] 2011년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정식 명칭이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Budapest Liszt Ferenc Nemzetközi Repülőtér)으로 바뀌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의 정식 명칭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인 것처럼. 재미있는 건 폴란드 헝가리가 우방국이라는 것. [6] 프랑스 파리 소재 카르나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 소장, 캔버스에 유채. [7] 리스트의 초상화만 봐도 보이는데 베토벤 같은 여타 음악가들의 초상화들이 시대 유행에 따라서 대부분 그림체에 의한 과장이나 어느정도의 보정이 들어가 있던 것과 다르게, 리스트는 80년에 달하는 긴 생애동안 타 미술가의 초상화들이나 여러 매체의 기록 및 동료 음악가들의 회고에서 충분하게 교차 검증이 가능한 전형적인 서양 백인 미남의 표본과도 같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8] 말년에 살이 올라서 그렇지 나폴레옹도 젊은 시절 뭇 미남들 못지않게 잘생겼었다. [9]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헝가리와 이중제국을 구성했다. [10] 다만 어린 리스트가 체르니와 함께 연주회 전날에 베토벤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남겨져 있다고 한다. [11] 리스트가 12살에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가져 유명해지자 바르샤바의 한 신문은 "우리에겐 리스트를 능가하는 천재소년 쇼팽이 있으니 빈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12] 멘델스존이나 쇼팽처럼 창작 능력까지 조숙했던 신동들의 기대치 혹은 낭만주의 피아노 테크닉의 원류격인 쇼팽 입장에서는 독자적 음악성보다 피상적인 화려함만 보여주면서 자신의 주법을 다수 인용하는게 영 탐탁찮았겠지만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쇼팽이 생전에 접했을 리스트의 작품이 리스트 창작력의 최절정인 바이마르 시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13] 가끔은 페르디난트 힐러까지 세 명이서 [14]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옐 피아노는 쇼팽이 가장 애용하던 브랜드이기도 했다. [15] 이 플레옐 부인이 바로 베를리오즈가 로마로 유학 간 사이에 약혼을 깨고 플레옐과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메이드복을 입고 변장한 베를리오즈에게 복수를 당할 뻔한 그 마리 모크 플레옐이다. [16] 다만 이 전기는 리스트의 연인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기초적인 사실관계 확인이나 자료수집을 우선시하기보단 마치 산문처럼 대필했기 때문에 "쇼팽을 리스트로 만들어버렸다"는 쇼팽의 친구 율리안 폰타나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사료적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점효과 때문인지 국내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도 종종 이 자서전에서 발췌된 에피소드를 무분별하게 인용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포노 출판사에서 '내 친구 쇼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출간되었으며 2019년 현재 온오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17] 리스트의 생애 마지막 리사이틀에도 자신이 편곡한 쇼팽의 곡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었다. [18] 리스트도 멘델스존의 음악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하필 멘델스존이 죽은 지 1년 뒤에, 그것도 멘델스존의 절친이었던 슈만 앞이라 슈만을 화나게 했다(...). [19] 한 일화에선 리스트가 슈만이 작곡한 5중주를 듣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다가 슈만이 5중주를 완성하자, 그날 밤 당장 슈만의 동네로 와서 그 곡을 듣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클라라가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연주자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리스트 본인은 2시간이나 지각을 한 데다가 이를 듣고 나서는 정작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슈만한테 이건 당신의 곡이 아니라 음악교사 정도의 곡이라며 면박을 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슈만의 소심한 성격을 감안할 때, 정황상 뭐라 하지도 못했을 확률이 높으니 클라라가 리스트를 인간적으로도 좋아하지 못했을 공산이 높다. [20] 음악 평론가 어니스트 뉴만이 인용한 데에 따르면 리스트는 '만일 당신이 슈만의 작품이 절대 그런 식으로 연주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주를 듣고 싶다면 클라라의 연주를 들으시오.'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21] 약 150년 전 조선에서도 김창흡의 시를 따라하는 후학들에게 이천보가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오늘날 시를 짓는 사람들이 삼연을 본받지 않으면 남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삼연의 학식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삼연의 기이한 점만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삼연의 나쁜 병통을 얻고 만다. 오늘날 시가 쇠퇴하게 된 데 대해 삼연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22] 카롤린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에 대해 "그는 병들었고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그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돌봐야만 합니다"라고 얘기했다고(...) 카롤린은 코지마 뿐만 아니라 리스트도 바그너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23] 리스트는 이 편지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정초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24] 리스트가 1886년까지 살았는데, 축음기가 실용화된 것이 1887년이다. 따라서 간발의 차이로 리스트는 녹음을 남길수 없었으며, 만약 조금 더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리스트는 죽기 몇 년 전부터 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녹음을 남길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생상이나 부조니 같은 후배 작곡가들이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상용 초기단계라 여러가지 여건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연주자들의 녹음본 중 양질이거나 충분한 평가를 내릴 만큼의 수준은 많이 없다. [25] 그러나 녹음본이 있다는 카더라도 나오고 있다. 리스트를 연구하던 한 음악박사의 말에 따르면, 리스트가 시험삼아 했던 녹음본이 소실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26] 일부 서적에서는 특정 분야에서 리스트보다 뛰어난 기교를 가졌다고 평론하는 몇몇 사례들이 소개되긴 하지만 유념해야 될 것은 당장 상술한 풍자화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이들이 기준으로 삼는 대상이 전성기가 이미 수십 년은 지나간 "노년의 리스트"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이나 지인들한테서의 기록으로 유추한다면 이 시기의 리스트는 테크닉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상위에 비견될 만큼의 실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경이롭다고 말하기에 모자름이 없다. [27] 쇼팽의 혁명연습곡으로 칼럼을 기고했는데 최근 곡들을 놀라운 속도로 진보시킨 기교적 업적 등을 가리키며 '조만간 이 곡의 왼손 파트를 모두 옥타브로 연주하는 사람이 나와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요약] 쉽게 말해서 리스트가 기준점으로 삼은 해당 연습곡의 평균적인 오른손 연주속도는 대략 이러한데, 해당 일화에 따르면 이 음절들을 속도 감속 없이 전부 옥타브로 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모든 쇼팽 연습곡들도 이와 같은 변형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29] 미완성의 오페라도 몇곡 있다. [30] 성악곡 중에는 종교음악의 비중이 높다. [31] 당시 기준으로 바흐나 베토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친숙하게 전해내려오는 많은 바로크~고전주의 작곡가들의 곡들은 난해하고 듣기 어렵거나 호불호가 극히 갈리는, 일부 매니아 혹은 음악가들 사이에서나 유행하는 곡 취급받기 일쑤였다 [32] 한편으로 무명작곡가의 악보 제목에 작곡가가 리스트의 제자이거나 악보를 리스트가 감수했다는 내용을 붙여 출판하여 그 작곡가가 주목받기 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33] 교향시는 대체로 단악장이지만 주제에 따라 여러 악장을 갖기도 한다. 대표적인 다악장 교향시가 바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34] 리스트의 직계 제자. [35] 후에 모리스 라벨이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물의 유희(Jeux d'eau)를 작곡하게 된다. [36] 다만 헝가리에 자신도 설립 후원자로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원이 설립된 이후 리스트는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다. [37] 활동 시기가 겹치는 데다가 당대 비견될 만한 천재성을 가진 자가 적었고, 생전에 업적을 존경받으면서 이후에도 광범위한 학문적 족적을 남겼다는 부분에서 미루어 비교해보면 수학계의 가우스와 매우 비슷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38] 젊을 때는 물론이고 당시로서는 노년에 가깝다고 평가받았을 40~50대에 접어드는 중년에도 초상화에서 드러나듯이 마치 30대 초반의 젊고 패기넘치는 청년으로 보일 정도의 동안을 유지했기 때문에 반 정도는 수도자의 길을 걸었을 때도 여자들이 쉴 새 없이 꼬였다고 한다. 백발에 미간의 사마귀가 매우 커진 쭈글쭈글한 노인이 됐을 때도 그의 연주회를 묘사하던 언론들의 각종 기록을 보면 젊었을 때랑 다름없이 카리스마만큼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39] 굳이 따지자면 상기한 피아니스트 중 탈베르그는 용모, 연주실력에서 젊었을 시절의 리스트와 쌍벽을 이뤘다고 전해지지만 리스트와 달리 전형적인 테크니션 기교가로서의 길만을 걷다보니 리스트와는 커리어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져서 완전히 잊혀져버리게 되었다. 이외에도 안톤 루빈슈타인은 실력과 스타일, 음악적 커리어에서 정말 얼마 없는 리스트의 대항마로 꼽히고, 좀 후대까지 저변을 넓혀보면 이후 등장한 폴란드의 이그나시 얀 파데레프스키가 실력이 부족함에도 연주자로서는 그에 비견될 만한 인기를 끌었다고 평가받는다. [40] 다만 이를 무작정 인간성 면에서 좋은 평가로 생각하기에는 힘들 것이, 문헌을 살펴보면 상기한 슈만의 일화처럼 리스트가 자신보다 모자란 동업인들에 대해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일화는 여럿 있으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하 작곡생한테 하루 10시간이 넘는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도 있고 당시 재능 많은 유망주였던 안톤 루빈슈타인이 직접 찾아와 연주를 선보였음에도 거절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41] 수제자를 자처한 한스 폰 뷜로 말고도 카를 타우지히, 소피 멘터, 에밀 폰 사우어, 페루치오 부조니, 이사크 알베니스, 아델 아우스 델 오, 에두아르도 리슬러, 유진 드 알버트, 모리츠 로젠탈, 라파엘 조세화이, 알프레드 라이젠아우어, 베른하르드 스타벤하겐, 아르투르 드 그리프, 알렉산더 실레티 등등, 업계 정상급에 군림했던 연주자들만 꼽아봐도 수십 명은 넘어가고 단순하게 레슨만 받거나 리스트 클래스에 발만 딛어본 정도의 연습생까지 합하면 족히 수천 명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42] 물론 그도 사람이었는지 말년인 1881년의 일기에서 '편지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1년에 2천 통이 넘는 편지들에 일일이 답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불평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43] 처음에는 창안자인 리스트에 의해 솔리로퀴(soliloquies, 독백)라는 가제로 명명되었지만 이 명제가 최초로 등장하는 1839년의 리스트와 벨지오조소 공주 간 서신에 따르면 리스트는 이 가칭을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40년 하노버 스퀘어 룸에서의 당시 연주회 담당자인 프레드릭 빌은 기록상 처음으로 신문에 '리스트의 피아노 리사이틀'이라는 표제의 광고를 개재했으며, 이 표현이 리스트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고유명사화 되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44] 이전에는 연주자가 청중을 바라보았다. [45] 그 이전에는 니콜로 파가니니가 이러한 판타지스타 계열의 효시격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였지만 괴팍한 성격과 그닥인 용모, 리스트보다 폭넓지 못한 활동폭, 시대적 엇갈림 때문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던 데에 반해서 리스트는 파가니니한테 부족했던 덕목이란 덕목은 모두 가지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더 큰 족적을 남긴다. [46] 다만 팬덤 문화의 특성은 리하르트 바그너 때 창설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팬덤끼리의 대립과 빠가 까를 만든다는 구조가 이때 정착되었다. [47] 이에 관하여 리스트부터 이어지는 인상파 사조는 이러한 영향으로 인한 거부감 때문에 매우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던 신고전주의 등한테 주류 음악계의 자리를 뺏긴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48] 치프라와 볼레 두 연주자는 각각 반대방향으로 끝판왕 스타일의 연주를 보여주기 때문에 청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치프라는 리스트의 철학에 딱 어울리는 극한의 기교를 추구하는 연주를 하며 그래서 깊이가 없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어디까지나 오해이다). 볼레는 정 반대로 기교가 최대한 느껴지지 않는(?), 쉽게 들리는 연주를 추구한다. [49] 7,320분 26초에 달한다! [50] 정확히는 CD 98장에 보너스 디스크 1장. 보너스 디스크에는 리스트가 작곡에 도움을 주었으리라 보이는 리스트 제자의 피아노 협주곡이 수록되어 있다. 하워드의 연주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구적이고 훌륭한 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곡에 따라 연주력의 기복이 좀 있는 편이다. [51]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떠도는 이야기로, 일본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려있다고 한다. [52] 특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 연습곡 3번인 일명 라캄파넬라가 이 방면에서 유명하다. [53] 사실 9~10도 정도의 손으로도 리스트의 곡에 나오는 웬만한 화음들은 무리없이 꽉꽉 누를 수 있으며, 넓은 아르페지오는 손의 유연성을 기르고 손가락으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손목, 팔꿈치 등도 활용하면 할 수 있다. [54] 그에게 독설을 했던 프레데리크 쇼팽 스네이프를 더 닮았다는 이 있다. [55] 이와 더불어 같은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에서 해리 포터(다니엘 레드클리프가 맡은)를 닮은 작곡가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꼽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