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코지마 바그너 Cosima Wag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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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코지마 프란체스카 가에타나 리스트 Francesca Gaetana Cosima Liszt |
출생 | 1837년 12월 24일 |
오스트리아 제국 롬바르디아 벨라조 | |
사망 | 1930년 4월 1일 (향년 92세)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로이트 | |
부모 |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 어머니 마리 다구 백작 부인[1] |
형제자매 |
언니 블랑딘 리스트 동생 다니엘 리스트 |
배우자 |
한스 폰 뷜로 (1857년 ~ 1870년, 이혼) 리하르트 바그너 (1870년 결혼 ~ 1883년 사별) |
종교 | 가톨릭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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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낭만시대 피아노 음악계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3남매 중 차녀이다.또한 동 시대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로도 유명하다.
2. 상세
2.1. 성장 과정
코지마를 포함한 리스트의 아이 3남매는 탄생 과정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신예 피아니스트로 각광받던 리스트는 꽤 오래도록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운영하는 음악 살롱에 출입하며 구애를 해 왔다. 본래 리스트가 관심을 갖던 파리의 스타 마리 듀플레시스는 백작 부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리스트는 귀족 부인과의 로맨스 로망이 있었기에 같은 방향을 바라본 이들은 결국 맺어지지 못했는데, 마리 듀플레시스는 백작부인이 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하고, 리스트는 프랑스 망명귀족의 딸이기도 한 마리 다구 백작부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연하의 리스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마리 다구는 병으로 사망한 첫 아이 루이제에 대한 아픔이 있었고 리스트로부터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아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첫 딸 블랑딘이 생기자 마리 다구는 남편에게 결별을 요구하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 둘은 유럽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리스트와 다구 부인은 약 10년에 걸친 연애 기간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3남매를 슬하에 두었는데,[2] 파리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다구 백작 부인과 바람둥이 리스트 사이는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했다. 리스트의 오랜 투어에 지친 마리 다구는 정착을 권했으나, 리스트는 음악 활동을 원했다.더욱이 심리적 갈등도 있었다. 작가를 꿈꾸던 마리 다구는 조르주 상드의 연애소설 스킬을 동경했으며, 리스트는 쇼팽의 작곡 스킬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나 쇼팽은 당시 리스트의 작곡에 대해 남이 길들여 놓은 말을 타고 산을 넘는다는 신랄한 평가를 하고 있어 서로 친구 사이면서도 내심 불편함이 누적되던 터였다. 그러다 유명한 쇼팽 공연 중 리스트가 쇼팽이 연주를 마치기도 전에 손을 잡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태, 쇼팽이 잠시 집을 비우고 리스트로부터 마리와 잠시 묵을 곳을 빌려달라는 요청에 흔쾌히 열쇠를 빌려주었을 때 마리 다구가 아닌 쇼팽의 후원자 플레옐의 아내인 마리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쇼팽이 점점 리스트를 멀리하게 된 사건처럼 껄끄러운 일들이 계속 벌어지며 두 커플 사이의 다툼도 잦아졌고, 3남매를 낳은 두 사람의 사이도 시들해지며 점점 멀어졌다. 리스트와 플레옐 부인과의 외도가 쇼팽의 계략이라고 믿은 마리 다구가 상드와 쇼팽을 리스트 앞에서 비난하자 리스트가 오히려 마리 다구의 의견을 부정한 것처럼 둘 사이의 믿음도 깨어져 갔다.
이에 따라 아직 어린 블랑딘과 코지마, 남동생 다니엘의 사이가 각별하기도 했고,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가 마리 대신 아이들을 양육할 의사를 보이자 리스트는 마리 다구에게 결별과 함께 자신이 모두 키우겠다며 3남매의 양육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리스트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바로 블랑딘을 임신하면서 루이제의 환생이라고 믿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애착을 갖고 있던 마리 다구는 반발하며 언론에 입장문을 게시할 만큼 치열한 양육권 분쟁을 벌였으나, 프랑스에 거주하던 친어머니 플라비니 백작 부인이 세 아이들을 자신의 외손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여론이 불리해지자 단념하며 결국 3남매를 모두 빼앗기게 된다. 이후 블랑딘과 코지마는 할머니, 기숙학교, 개인교사를 오가며 자랐는데, 사실 마리 다구로부터 3남매를 모두 빼앗은 리스트에게는 나름대로의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친모를 닮아 상당한 미인이고 우아한 블랑딘은 왕가나 귀족 가문과 맺어지고, 미모는 덜하지만 어릴 적부터 연주와 작곡, 음악 전반에 엄청난 재능을 갖춘 코지마는 음악가와 결혼시켜 내조에 전념하도록 할 것이며, 긴 손가락과 뛰어난 두뇌를 지닌 막내이자 아들 다니엘은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법학을 전공한 피아니스트로 키워 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침 리스트가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면서부터 리스트는 공작부인의 딸과 자신의 아이들을 함께 양육할 것을 권했으며, 공작부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코지마도 마리 다구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에게는 순종적이었지만, 언니와 기숙학교에 들어갔을 때 몰래 찾아온 마리 다구를 만나는 것을 반가워할 만큼 모녀들간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리스트는 금족령을 내리고 가정교사를 고용해 자매와 마리 다구와의 만남을 중지할 것을 딸들에게 요구하면서, 코지마도 내심 조금씩 반감을 갖게 된다. 리스트 또한 공작부인과 깊은 관계가 되면서 음악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킨 코지마에게는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보이기보다는 양육비나 교육 환경 정도에만 관여했다. 더욱이 언니 블랑딘은 귀부인의 교양에 필요한 연주 정도만 배웠지만, 일찍이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코지마는 개인교사로부터 혹독한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유년기 코지마는 언니에 비해 미모로는 한 수 부족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곤 했지만, 신체조건까지 좋은 데다 음악성과 열정이 압도적이어서 리스트도 한 때 코지마를 다니엘처럼 프로 피아니스트로 고려한 적도 있었다.
2.2. 바그너의 아내가 되다
코지마가 10대 후반이 되었을 때 리스트는 성인이 다 되어가는 딸들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녀들의 어머니 마리 다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55년 딸들을 베를린으로 이주시켜 베를린에서 명망있는 뷜로 남작 부인 집에서 머물면서 음악과 교양 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 때 그들의 음악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이 바로 리스트와 바그너의 제자 한스 폰 뷜로였다. 뷜로의 회고로 코지마는 그녀의 아버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그렇게 교류하며 연애감정이 싹튼 둘은 리스트의 승인을 받고 1857년 8월 18일에 베를린의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결혼한지 얼마 후 코지마는 남편 뷜로와 아버지 리스트와 함께 취리히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자택을 방문했다. 두번째 방문때는 떠나면서 숭배하는 바그너에게 격한 팬심을 드러냈는데, 그때 바그너는 오죽 당혹스러웠는지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그녀가) 내 발 앞에 쓰러져 내 손에 눈물과 키스를 퍼부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숙고했으나 답이 나오질 않았다."[3]
사실 코지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배워오며 대작곡가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고 바그너를 동경, 경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혼하게 되면서 남편의 스승으로 직접 바그너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 감격했던 것이었다. 바그너를 직접 만나게 된 코지마는 바그너를 사랑하게 된다. 코지마는 연주와 지휘를 통해 다른 이의 음악을 '재현'하는 데 종사하는 한스보다, 작곡가로서 위대한 예술을 직접 '창조'하는 바그너를 더욱 동경했다. 사실 뷜로에게 호감이 커진 계기도 그가 바그너의 수제자이자 오른팔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 뷜로도 훌륭한 작곡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작곡을 하도록 장려했고, 오페라 시나리오를 찾아 뷜로에게 주기도 했다. 하지만 뷜로는 뛰어난 지휘자이긴 했지만 작곡에서는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뷜로는 스승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의 공연 준비를 위해 바빴기에 작곡을 할 시간도 부족했다. 뷜로는 타지 공연을 위해 오랫동안 떠나 있을 때가 많았고, 코지마는 혼자 남겨져 있는 때가 많았다. 게다가 파리 출신의 코지마는 베를린 사람들과 정서가 달라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년시절부터 가까웠던 자매 블랑딩이 출산 중 사망하면서 충격을 겪었다.
한편 바그너 음악 공연을 위해 바쁘던 뷜로는 1962년 당시 바그너의 새로운 작품들의 공연 준비를 돕기 위해 아예 아내 코지마와 함께 바그너의 자택에 수개월간 머물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그너도 코지마를 잘 알게 되었다.
이후 코지마는 바그너의 비서를 자처하며 그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바그너도 시간이 흐르면서 코지마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1863년 11월 28일 베를린에서 서로의 감정을 "눈물과 흐느낌"으로 고백했다고 한다. 수많은 여자들처럼 쾌락의 상대로 여겼지만, 코지마가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모습에 흔들린 것이다. 그렇게 1865년 4월 10일에 둘의 불륜으로 인한 첫 아이인 이졸데가 태어났는데, 남편인 뷜로는 이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로 출생신고를 했다. 이유는 이졸데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고, 분쟁을 일으키기에는 바그너의 세력과 왕실 후원세력이 막강해 척을 졌다가는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장인인 리스트에게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생아가 둘이나 더 태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바그너가 자신과의 결합을 주저하며 계속 아이들에게 뷜로의 성을 붙이기를 원하자 분노한 코지마는 적반하장으로 뷜로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이졸데를 낳은 직후 이혼을 해 주지 않아서 바그너가 자신과 결혼해 주지 않는 것이라며 집요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코지마는 존경하는 스승과 자신의 은인의 딸이기도 한 아내와의 불륜을 눈감아주던 뷜로와 1870년에 이혼하고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현대 기준으로도 막장스러운 불륜인데 당시 아버지 리스트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으며, 바그너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도 제자에게 상처를 주고 딸을 노리개로 삼은 것에 격분해 평생 배은망덕한 바그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3남매 중 혼자 살아남은 딸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뷜로를 몰아세웠듯 마리 다구와 리스트로부터 강한 성격을 모두 이어받은 코지마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바그너를 감쌌다. 이 모든 과정에서 부녀와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결국 리스트는 딸과의 의절을 선언해버렸다. 이후 십수 년이 지나 화해하긴 했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딸은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백안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의 죽음과 공작부인과의 결혼 실패 이후 종교에 귀의한 리스트는 딸이 그리워져 먼저 화해를 청해 왔지만 코지마는 정중하게 화해 의사를 밝히되 사적인 만남을 사양하고 아티스트로 참가하거나 관객으로 와 달라고 권유했을 정도다. 심지어 리스트의 사망 원인 중 직간접적으로 작용한 것이 코지마를 보기 위해 지병을 앓고 있음에도 무리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감기 증세가 도져서 사망하고 만 것일 정도이다. 반대로 코지마는 금족령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 다구에 대해서는 평생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으며, 탄생과 인생이 모두 불륜인 것도, 평탄치 못한 연애사도, 모녀가 모두 비슷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인정하며 위태로운 바이로이트를 지키기 위해 마리 다구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함을 애통해 했다.
2.3. 이후의 삶
코지마는 바그너의 모든 일상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바그너는 대부분 집에서만 내조하는 아내를 둔 음악가들과 달리 음악감독과 매니저 같은 아내 덕분에 창작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물론 화려했던 외부 연애 행각도 코지마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사이가 각별했던 언니와 동생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기에, 자식을 많이 갖는 것 또한 코지마의 꿈이었다고 한다. 전남편 뷜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의 이름도 다니엘라, 블랑딘으로 지으며 혈육들을 추모했다. 그 밖에 주목할 점은 코지마의 재능 중 하나가 작가인 어머니 마리 다구처럼 스토리텔링 콘셉트를 잡는 것으로, 바그너의 스토리 중 로맨스와 치정물이 적지 않은 것도 코지마가 바그너의 역대 연애담을 대담하게 그의 음악에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잠들 때까지 24시간 바그너를 마크할 수 있던 것은 주부로서, 총보를 읽고 악기 연주에 능숙한 음악가로서, 아마추어 소설가로 남편의 음악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에 크나큰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종합예술장르인 뮤직 드라마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완성에 적극적 협조하였고, 1883년 바그너가 사망한 후에는 그들이 거주했던 바이로이트를 바그너 음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클래식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오래 된 단일음악가 전문 페스티벌의 시작이다.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의 작품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 인연이 되어 코지마는 히틀러의 후원자이자 추종자로서 나치에 부역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코지마가 싫어한 것은 바그너를 공격하는 유태인 카르텔이었으며, 직접 히틀러에 부역했다는 것은 그녀가 낳은 바그너 가문 후손들의 이야기다. 코지마의 아들 지크프리트가 동성애 의혹으로 곤경에 처하자 영국에서 온 위니프레드가 그와 결혼했으며, 이들 부부가 훗날 이졸데 부부와 상속권 문제로 법정 투쟁을 벌였을 때 코지마는 결국 장고 끝에 지그프리트의 편에 섰다. 그리고 위니프레드가 히틀러의 측근으로서 바이로이트 운영에 특혜를 얻으면서 사실상 바이로이트의 후계자는 위니프레드가 차지했고, 바그너 가문과 히틀러는 막역한 관계가 된다. 바그너 가문에는 직계와 방계 모두 나치 추종자와 부역자가 상당한데, 반면 이런 집안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입단한 후손들도 있어 이 상반된 대립관계도 음악계에 유명하다.
[1]
본명은 마리 카트린느 소피.
[2]
장녀 블랑딘은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하다 죽고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이자 남동생이었던 다니엘은 20세에 죽었다.
[3]
"She fell at my feet, covered my hands with tears and kisses ... I pondered the mystery, without being able to solve it". 출처: Hilmes, Oliver (2011). Cosima Wagner: The Lady of Bayreuth.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ISBN 978-0-300-17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