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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72727><colcolor=#fff>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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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 |
출생 | 1864년 6월 11일 |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 | 1949년 9월 8일 (향년 85세) |
서독 바이에른 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 |
직업 |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
사조 | 후기 낭만주의 |
가족 |
배우자 파울리네 데 아나(1894년 결혼) 자녀 1명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 무신론)[1] |
서명 |
[clearfix]
1. 개요
어쨌든 그의 얼굴은 음악가에 걸맞은 얼굴이다. 헌데, 눈과 표정의 움직임은 '
초인'의 그것이다. 바로 그의 스승이자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있는
니체, 그 사람이 말한 '초인'의 그것이다.
― 클로드 드뷔시
― 클로드 드뷔시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독일 후기 낭만파 음악 황금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음악가이자 관현악법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2. 생애
1864년 6월 11일에 뮌헨에서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22~1905)와 어머니인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 1838~1910)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 프란츠는 바이에른 왕립 오페라단의 호른 수석이었고, 당대 최고의 호른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매우 엄하고 완고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의 부유한 양조업자 게오르그 프쇼르(Georg Pschorr, 1798~1867)의 딸로, 1854년에 콜레라로 며칠 만에 전처와 두 아이를 모두 잃었던 프란츠의 후처였으며, 아버지와 달리 부드럽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인 베르타 요한나(Bertha Johanna Strauss, 1867~1966)의 생일은 오빠랑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6월 9일이었고, 무려 만 98세까지 장수했다.
친가에는 전문 음악인이 많았고, 외가에는 음악애호가가 많아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음악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어린 리하르트의 음악 교육은 4살 반부터 시작되었는데, 슈트라우스의 첫 스승은 당연히 아버지었다. 불과 여섯 살 때에는 '재단사 폴카' 라는 곡을 처음 작곡해 신동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호른을 들으면 미소를 지었으나 바이올린 소리를 들면 울었다는 이 어린 소년은 6살에 성당의 부속 학교에 입학했고, 10살에 왕립 루드비히 김나지움에 입학했는데, 어린 슈트라우스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특히 역사, 고전어)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어린 슈트라우스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뮌헨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리허설도 자주 참관했고, 11살 때부터 단원들과 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 편곡법 등을 계속 배웠으며, 11살에 아버지가 결성한 소규모 관현악단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작곡가로서의 공식적 데뷔는 후에 파르지팔을 초연하게 되는 헤르만 레비가 1881년 3월에 지휘한 교향곡 1번 d단조의 초연 무대였다.
1874년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딱히 바그너에 대한 흥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2년에 여름에 호른 주자로 초빙된 아버지와 함께 바이로이트로 간 슈트라우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과 파르지팔 초연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다만 아버지인 프란츠와 주변 지인들이 엄청난 반(反)바그네리안이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좋았다고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참고로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를 위시한 고전주의 음악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바그너를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당시 프란츠가 소속된 뮌헨 궁정 오페라의 주인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열렬한 바그너의 애호가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중기 이후 작품 대부분을 초연했을 정도로 바그너를 자주 연주해야 했다. 반(反)바그네리안이였던 프란츠는 걸핏하면 자신이 맡은 바그너 작품의 호른 파트가 연주 불가능한 패시지라고 항의하여 바그너 제자들을 애먹였다.[2] 그렇지만 바그너는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견디기 힘들지만 호른을 불면 화를 낼 수 없는 녀석'이라며 자신을 매우 싫어하던 당대 최고의 호른 연주자 프란츠를 염두에 두고 여러 어려운 호른 패시지들을 작곡해 나갔다. 바그너의 칭찬에도 프란츠의 바그너에 대한 반감은 굳건하여, 바그너 사망 후 추모음악회에서도 전 오케스트라가 기립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프란츠 슈트라우스만 끝까지 앉아서 연주했다고 한다.
1883년부터는 베를린으로 잠깐 옮겨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한스 폰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했는데, 뷜로가 이 후배를 좋게 봤는지 1885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마이닝엔 궁정극장 음악 감독 직책을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닝엔 재직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시인이었던 친구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 1833~1896)의 영향으로 점차 바그너와 리스트 류의 '신독일파' 계열 음악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작곡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뷜로와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3]
1894년에는 자신이 직접 대본까지 쓴 첫 오페라인 '군트람' 을 발표했지만 비평계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4] 하지만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를 아내로 맞이하여 동년 9월 10일에 결혼까지 하게 되는 행운도 얻었으며,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작곡과 지휘를 병행했다. 1897년 4월 12일에는 아들을 낳은 후 아버지의 이름인 '프란츠(Franz)'로 이름을 지었다.[5]
1905년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를 오페라로 만든 ' 살로메'가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잔인함과 외설성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6] 이어 작곡한 '엘렉트라'는 전작을 능가하는 음악적 파격성을 보여주면서 '무서운 신예' 로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엘렉트라'에서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1932년의 '아라벨라'까지 모두 여섯 편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하면서 명작 오페라들의 양산에 큰 몫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 득세하기 시작한 나치와 그다지 좋지는 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고,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성 휘하에 만들어진 '제국 음악국(Reichsmusikkammer)'의 총재로 취임하자 좌파/반나치 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원만하기는 커녕 계속 삐걱댔고, 호프만슈탈에 이어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자 총재 직책을 사임해야 했다.
이렇게 나치와 늘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독일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서 음악 활동을 했다. 종전 후에는 나치 부역 문제로 군정 측으로부터 활동 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예전부터 쌓아온 명성 덕인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80대를 넘긴 고령이었던 만큼 건강도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적인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1947년 10월에 런던에서 지휘자로 마지막 공식 연주회를 가진 뒤에는 해외 여행도 하지 않았고,[7] 독일 최남단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에 칩거하며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를 비롯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 1948년 6월에는 뮌헨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1949년 7월에는 각각 영화 촬영과 방송용 녹음을 위해 '장미의 기사'의 2막 끝부분과 '카프리치오'의 간주곡을 지휘한 것을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완전히 끝마친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 오후 2시 직후에 잠을 자다가 심장 발작과 요독증으로 타계했다. 3일 후인 1949년 9월 11일에 열린 슈트라우스의 장례식에서는 '장미의 기사' 제3막의 삼중창이 연주되었다.
성이 같은 Strauss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가문과는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두 사람은 각각 오스트리아, 독일 출신으로 국적도 전혀 다르고. 'Strauss'라는 단어가 '싸움'이라는 의미라 하니, 조상들 중 싸움 좀 하는 분이 계셨다는 점, 그리고 'ß'가 아닌 'ss'라는 점에서 스위스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공통점은 있다.[8]
3. 주요 작품들
3.1. 관현악곡
3.1.1. 교향곡
가정 교향곡 |
알프스 교향곡 |
교향곡 1번 D단조 AV.69 (1880)
교향곡 2번 F단조 Op.12 (1883)
가정 교향곡 F장조 Op.53(1904)
알프스 교향곡 B플랫 단조 Op.64(1915)[9]
3.1.2. 교향시
돈 후안 E장조 Op.20 |
죽음과 변용 Op.24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Op.30 |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 G장조 Op.16 (1886)
돈 후안 E장조 Op.20(1889)
맥베스 Op.23 (1888. 1890 개정)
죽음과 변용 Op.24 (188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Op.28 (189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Op.30 (1896)
돈 키호테 Op.35 (1898)
영웅의 생애 Op.40 (1899)
3.1.3. 서곡
연주회용 서곡 B단조 (1876)서곡 E단조 (1876)
서곡 E장조 (1878)
서곡 A단조 (1879)
연주회용 서곡 C단조 (1883)
3.1.4. 그 외 관현악곡
세레나데 G장조 (1877)안단테 B플랫 장조 (1877)
축전 행진곡 E플랫 장조 Op.1 (1881)
축전 행진곡 C장조 (1888)
축전 전주곡 Op.61
장미의 기사 모음곡 AV.145
그림자 없는 여인에 의한 교향적 환상곡(1946)
3.1.5. 편곡 작품, 부수음악
부수음악 '평민 귀족' (1917)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무용 모음곡 (1923)
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소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Op.86 (1940-41)
3.2. 현악합주
메타모르포젠 |
3.3. 관악합주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Op.7 (1881)13개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Op.4 (1884)
3.4. 협주곡
호른 협주곡 2번 E플랫장조 |
호른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Op.8 (1881-82)
호른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Op.11 (1882-83)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883)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부를레스케 D단조 (1886-90)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가정 교향곡 부록' (1925)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파나텐 축제 행렬' (1926-27)
호른 협주곡 2번 E플랫장조 (1942)
오보에 협주곡 D장조 (1945)
클라리넷, 바순과 현을 위한 이중 소협주곡(1947)
3.5. 실내악
현악 4중주 C단조 (1875)피아노 3중주 1번 A장조 (1877)
피아노 3중주 2번 D장조 (1878)
현악 4중주 E플랫 장조 (1879)
현악 4중주 A장조 Op.2''' (1880)
첼로 소나타 F장조 Op.6 (1880-81)
피아노 4중주 C단조 Op.13(1883-85)
바이올린 소나타 E플랫 장조 Op.18 (1887)[11]
피아노 4중주를 위한 2개의 소품 (189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E장조 (1948)
3.6. 피아노
피아노 소나타 B단조 Op.5 (1880~1)5개의 피아노 소품 Op.3 (1882)
모음곡 인상집[12] Op.9 (1882-84)
3.7. 가곡
4개의 가곡 중 4곡 '내일!(Morgen!)' Op.27 Nr.4[13] |
4개의 마지막 노래 |
헤르만 길름의 시집 '마지막 장' 에 의한 8개의 가곡 Op.10(1885)[14]
방랑자의 폭풍의 노래 Op.14(1884)[15]
5개의 중성(中聲)용 가곡 Op.15(1886)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17(1886-87)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집 '연잎' 에 의한 6개의 가곡 Op.19(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녀의 꽃' 에 의한 4개의 가곡 Op.22 (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박한 가락' 에 의한 5개의 가곡 Op.21( 1889-90)
니콜라우스 폰 레나우의 시에 의한 2개의 가곡 Op.26(1891)
4개의 가곡 Op.27(1894)[16]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29(1895)
칼 부세와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의한 4개의 가곡 Op.31(1895-96)
5개의 가곡 Op.32(1896)
관현악 반주에 의한 4개의 가곡 Op.33(1896-97)
4개의 가곡 Op.36(1897-98)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37(1896-98)
이노크 아든 Op.38 (낭독자와 피아노를 위한 멜로드라마,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에 의함)
5개의 가곡 Op.39(1898)
5개의 가곡 Op.41(1899)
옛 독일 시인들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43(1899)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성(低聲)용 가곡 Op.44(1899)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Op.46(1899-1900)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7(1900)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과 칼 헹켈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8(1900)
8개의 가곡 Op.49(1901)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음 베이스용 가곡 Op.51(1902/06)
6개의 가곡 Op.56(1903/05-06)
알프레트 케어의 시에 의한 12개의 가곡 '상인의 거울' Op.66(1918)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동시집' 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67(1918)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시에 의한 6개의 가곡 Op.68(1918)
아힘 폰 아르님과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5개의 작은 가곡 Op.69(1918)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찬가 Op.71(1921)
한스 베트게의 페르시아와 중국 번역시집 '동양의 노래' 에 의한 5개의 가곡 Op.77(1928)
4개의 고음 베이스용 가곡 Op.87(1922/29/35)
3개의 가곡 Op.88(1933/42)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4개의 마지막 노래 (1948)
가곡 '아욱꽃' (1948)[17]
3.8.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중 '고귀하신 공주님' Op.60[18][19] |
군트람 Op.25(1892-93. 1940 개정)
불의 결핍 Op.50(1900-01)
살로메(오페라) Op.54(1903-05)
엘렉트라 Op.58(1906-08)
장미의 기사 Op.59(1909-10)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Op.60(1911-12. 1915-16 개정)
그림자 없는 여인 Op.65(1914-17)
인테르메초 Op.72(1918-23)
이집트의 헬레나 Op.75(1923-27)
아라벨라 Op.79(1929-32)
말없는 여인(1933-34)
평화의 날 Op.81(1935-36)
다프네 Op.82(1936-37)
다나에의 사랑 Op.83(1938-40)
카프리치오 Op.85(1940-41)
3.9. 발레
요셉의 전설 Op.63(1914)발레 '요셉의 전설' 에 의한 교향 단편 (1947) 위의 작품에서 발췌한 것.
휘핑크림 Op.70(1920-21)
4. 창작 시기별 성향
전 생애를 통해 초기에는 교향시를 비롯한 표제음악, 중후기에는 오페라에 전념한 것을 볼 수 있다.4.1. 초기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나 뷜로 등 반바그너 계열 인물들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던 탓인지 오히려 브람스를 비롯한 절대음악 계열 선배들의 작품들을 벤치마킹한 교향곡이나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등을 많이 남겼다.4.2. 중기~후기
교향시, 오페라 작곡 시기로, 교향시 같은 표제음악이나 오페라와 같은 무대 음악 중심으로 작곡했다.- 교향시 창작 시기: 리터와 만난 뒤로 서서히 친바그너-리스트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교향시 분야의 괄목할 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돈 후안' 이후의 작품들은 지금도 관현악단들의 주요 연주곡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줄거리가 있는 문학 작품이나 희곡, 전설 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악보에도 간략한 해설이나 제목을 나타내는 시 등이 적혀 있다. 이런 교향시들에서는 대개 큰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고,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 같은 고전적인 틀이나 화성 구조 등에 얽매이지 않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첼로와 비올라 독주자를 요구하는 '돈 키호테' 처럼 협주곡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가정 교향곡' 이나 '알프스 교향곡' 에서처럼 교향곡 형식을 응용한 대규모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20]
- 오페라 창작 시기: 음악 자체보다는 표제나 가사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데 도가 튼 탓인지, '영웅의 생애' 이후 작곡한 오페라들도 주목할 만한 걸작들이 꽤 많은 편이다. 특히 호프만슈탈과 작업한 오페라들은 지금도 독일어권 뿐 아니라 전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상시 상연작으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교향시에서 보여준 대담한 성향은 '엘렉트라' 이후 많이 완화되어 있으며, 빈 왈츠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주는 '장미의 기사' 나 모차르트 오페라의 영향을 반영한 '그림자 없는 여인' 에서처럼 신고전주의 계통의 사조로 경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4.3. 말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처절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인지, 실내악, 협주곡 등 고전적이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기악 작품들과 가곡을 주로 작곡했다. 이들 작품은 어두운 악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밝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데, 다만 '메타모르포젠'[21] 이나 '4개의 마지막 노래' 같이 대단히 어둡고 비통하거나 진지하고 관조적인 작품도 몇 곡 남기고 있다.전후 나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슈트라우스가 살고있던 가르미슈를 점령한 미군은 당시 그곳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슈트라우스의 저택을 징발해 지휘본부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미군 몇 명이 소총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놀란 슈트라우스는 미군을 향해 '나는 오페라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라 말을 했는데 마침 병사들을 지휘하던 밀턴 와이즈(Milton wiess) 중위는 전쟁전 피아니스트와 학교 음악선생님을 했던 인물이라 슈트라우스를 알아보았고 지휘소를 다른 곳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다른 미군들이 집으로 찾아와 15분 이내에 집을 비워야 한다고 통보를 하였고 이에 슈트라우스는 당시 지휘관이였던 존 크라이머스 소령에게 과거 미국 순회공연중 받았던 웨스트버지니아주 모건타운 명예시민증과 함께 '장미의 기사' 악보를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하였는데 슈트라우스의 열혈팬이였던 크라이머스 소령은 슈트라우스 자택 잔디밭에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 슈트라우스 일가를 보호하고 존중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당대 최고 음악가중 한명인 슈트라우스의 소식이 전해지자 클래식 애호가인 몇 몇 미군들이 가르미슈의 슈트라우스 자택을 찾아왔었는데 그 가운데 미국 전략사무국( OSS - CIA의 전신) 소속의 젊은 장교 존 드 랭시가 있었다. 전쟁 전 피츠버그 심포니의 수석 오보이스트를 지냈고 전후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수석 오보이스트를 역임할 만큼 뛰어난 오보에 연주가였던 랭시는 슈트라우스에게 오보에 협주곡을 작곡 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고 이에 슈트라우스는 '아니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6개월 후 슈트라우스는 오보에 협주곡 D장조를 발표하였는데 악보에 '어느 미군이 제안하였음'이라고 적어놨으며 오보에 협주곡 D장조의 미국 초연에 대한 권리를 랭시에게 주었다.
5. 작곡 성향
교향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22] |
관현악법에 있어서는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시기까지 자아낼 정도로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다.[23] 대규모 편성을 때려박더라도 위의 악보처럼 각 파트를 잘게 쪼개서 실내악에 가까운 정밀한 음색을 얻어내거나 새롭게 개발된 악기[24], 이미 사장되어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악기들[25]까지 작품에 넣는 열성을 발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악기의 구석구석까지 연구한 결과 실제로 슈트라우스의 악기에 대한 이해력은 어떤 면에서는 전문 연주가 이상이었다고 하며, 때때로 악기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발휘하도록 작곡하여 웬만한 베테랑 연주자들마저도 종종 절망에 빠뜨리는 엄청난 난이도를 보이기도 했고,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명저 '관현악법' 을 개정한 책도 쓰기까지 했다.
기악에서는 호른, 성악에서는 소프라노를 꽤 편애했다.[26] 아버지가 바그너도 신임할 정도의 최상급 호르니스트였고 아내가 소프라노 가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아들의 곡에서 호른이 두드러지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아들의 작곡 능력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호른에 대한 애정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리하르트가 호른 파트를 작곡할 때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그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였다는 점이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의 난이도는 어느 악기에서나 쉽지 않지만, 특히 호른 파트는 매우 까다롭다. 또 두 곡의 호른 협주곡은 완성 직후 몇몇 호른 주자들로부터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아버지라면 자다가 일어나서도 이 작품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협주곡이 아닌 일반 관현악곡의 호른 패시지도 무척 어렵기로 유명한데, 심지어 빈 필하모닉 호른 단원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 때문에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보다 연주하기 용이한 현대적 호른으로 악기가 바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27] 그리고 오페라 레퍼토리 대다수의 소프라노 주역 가수들은 아무나 도전했다가는 제대로 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레퍼토리들로 손꼽힌다.[28]
하지만 교향시나 오페라 같이 몸집 큰 편성과 규모의 곡들 외에 가곡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가곡의 경우 큰 단절 없이 평생 동안 작곡한 탓에 작곡 기법의 변천사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고, 목소리와 피아노 반주법에 대한 진지한 접근 자세도 관현악 작곡 못지 않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성악가들의 리사이틀 무대에서 애창되고 있다.
6. 지휘/피아니스트 활동
작곡 다음으로 슈트라우스가 명성을 얻은 것이 지휘 활동이었는데, 만년에 남겨진 동영상 등을 보면 정말 재미없게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팔의 움직임을 넥타이 폭으로 한정하는 등 극도로 최소화한 탓에 보기에는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게다가 음악이 커지건 작아지건 동작 변화도 거의 없어서 '박자 기계' 라고 불평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화려하고 강한 연출이 담긴 지휘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다.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연주가 끝난 후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본인이 보낸 편지에는 최근 지휘의 폭을 적게 했더니 지휘를 끝낸 후에 피곤함이 덜하다고 씌어 있다. 하지만 청년 시절에는 '마치 발작이라도 난 듯 지휘한다' 는 평이 있었다고 한다.[29]
1944년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교항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을 지휘할 때의 모습.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재미없게' 지휘하는지 잘 보여준다.[30] |
자작곡 보다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대선배들의 작품을 지휘할 때 꽤 강도 높은 리허설을 했다는 기록을 봐서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들어내는 음악 스타일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보여주는 스타일이어서, 자기 주장을 작품에 많이 이입시키는 낭만주의 지휘 양식과 대척점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후배 혹은 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인 헝가리 출신 미국의 명지휘자 조지 셀은 슈트라우스를 회고할 때 '지휘자로서는 별로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고 장난스레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의 오페라 ' 피델리오' 를 지휘할 때 공연 끝난 뒤에 있을 회식이나 게임에 정신이 팔려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갑자기 템포를 확 올려 지휘하는 등의 기행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박수를 하면서 커튼콜을 할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고.
이런 조지 셀의 평가가 너무 널리 알려지면서 인해 지휘자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지휘자로서도 결코 우습게 볼만한 인물은 아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에서 보여주는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탄탄한 해석은 열악한 녹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주의적 해석의 지휘자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해석이며,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을 여지가 있는 지휘자다. 조지 셀의 언급 때문에 빠른 템포의 지휘자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슈트라우스는 빠른 곡에서는 빠르게, 느린 곡에서는 느리게 하는 지휘자였다.
현재 남아있는 녹음의 상당수가 자작 관현악곡이라서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과장이나 가식이 별로 없는 엄격한 면모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년에는 자작 연주회에서 리허설도 안하고 바로 본 공연이나 녹음에 임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뷜로의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꽤 전문가급 솜씨를 자랑했다고 하는데, 특히 자신의 가곡 리사이틀에서 반주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곡이 끝나고 가수가 박수를 받고 있을 때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멋대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장난인 것 같았지만 각 곡 사이의 분위기나 가사를 암시하는 연주를 들려주면서 가수와의 교감을 극대화시키려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7. 사생활
1904년에 베를린에서 촬영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일가[31] |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 파울리네[32]는 슈트라우스와 기본적으로는 궁합이 잘 맞는 사이였지만, 기본적인 성격이 하도 지배적이고 불같았기 때문에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일어났고, 슈트라우스가 파격적인 음악을 쓴 경우 자필보에 멋대로 비판하는 글을 마구 끄적여 놓는 등 악처 기질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슈트라우스 자신은 이런 가정사를 감추기는 커녕 '가정 교향곡' 이나 오페라 '인테르메초' 등에 대놓고 보여주었으며, 그의 마지막 명곡인 '4개의 마지막 노래'는 파울리네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썼다고 한다. 남편의 말로는 아내가 자신의 가곡을 연주할 때면 '표현력이 풍부하고 시적'인 느낌을 자아냈다고 한다.
파울리네도 슈트라우스에게 다소 까칠하고 괄괄하게 굴기는 했지만, 평생 바람피지 않고 철저한 내조를 통해 대작곡가의 아내로서 임무를 다했다. 일례로 아들인 프란츠가 태어나자 파울리네는 오페라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가곡 가수로만 활동하게 되었다고 하며, 슈트라우스가 젊었을 적에 돈을 탕진하고 대충 사는 버릇이 있었을 때 파울리네가 "여보! 냉큼 들어가서 작곡해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그 버릇을 고쳐줬다고 한다.[33] 실제로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가 죽자 실의에 빠져 거의 매일매일 울며 지내다가 8개월 뒤 남편 곁을 따라갔는데, 이를 보면 파울리네는 외강내유의 대단한 조강지처라고 할 수 있다. 슈트라우스도 그런 아내를 좋아해서 결혼 후 36년이 지난 1930년에도 '나는 오로지 당신 곁에서만 완전히 행복할 뿐이다'는 고백을 했다.
물론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부터 별의별 비평가들의 공격을 당해낸 탓인지 꽤 자존심이 셌다고 하고, '살로메' 가 반사회적인 오페라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나는 그 오페라 공연해서 번 돈으로 집을 샀다네.'같은 식으로 조롱하기도 했다.[34] 취미가 등산이었는데, 등산 애호가들 치고 야망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는 속설이 슈트라우스에게도 적용된 모양인지 '알프스 교향곡' 도 알프스 등산 체험에 기반한 작품이고, 자택도 산장 수준으로 높은 고도에 지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머 감각도 갖추었다고 하는데, 그 일례로 슈트라우스 본인의 말로는 본인이 말년에 작곡한 작품들은 '지휘봉에서 해방된 오른쪽 손목의 마비를 피하기 위한 손목 관절 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치 시대에는 괴벨스와 종종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유대인 며느리를 두고 있던 탓에 며느리가 종종 게슈타포의 먹잇감이 되는 등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강하게 항의해 다시 데려오는 근성(?)도 보여주었다. 전쟁 말기에 자신의 별장을 부상병 수용과 치료를 위해 징발하겠다는 당국의 명령에도 '나는 그런 전쟁은 원하지 않았으니 빌려줄 수는 없소.' 식으로 대응하다가 강제로 압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8. 정치적 논란
나치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독일 음악계를 대표하는 명사였던 탓에 나치가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독일 음악의 우월성' 이라는 구호를 위한 선전용으로도 곧잘 이용되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 나치 정권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35]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음악을 후원하는 나치 정권을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36]이외에 나치 정부나 관련 단체의 의뢰로 작곡된 작품들도 떡밥으로 자주 던져지는데,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올림픽 찬가' 나 1940년에 일본 황실의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황기 2600년 봉축곡, 1943년에 나치 빈 대관구 주최의 행사를 위해 작곡한 '빈 시의 축전음악' 같은 곡들은 지금도 슈트라우스의 흑역사격 작품으로 간주되어 연주/녹음이 대단히 뜸한 편이다. 대략 1950년대 이후로 독일과 일본(일본 축전음악)을 중심으로 리바이벌되고 있기는 하지만, 상설 레퍼토리의 경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슈트라우스 자신부터 작품의 질이 낮음을 인정한 바 있고, 과거 나치나 일본 제국에게 피점령국 신세를 당한 나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 며느리 엘리스와 자신의 손자, 손녀 등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37]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 제국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치 부역자'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파울 힌데미트[38]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화나게 했다. 거기다가 슈트라우스는 심지어 엘리스의 할머니인 파울라 노이만의 석방을 위해 테레진 강제 수용소로 직접 차를 끌고 간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39]
슈트라우스가 아꼈던 츠바이크와 주고 받은 서신을 통해 당시 슈트라우스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초기 나치에 대해서 우호적인 면도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치의 유대인 문제 해결 방식의 문제와 심각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족의 안전 문제와 더불어 좀 더 열정적으로 나치 독일에 저장하지 않았던 요인으로 보여진다. 이에 츠바이크는 70세가 넘은 작곡가가 공개적인 저항보다는 자신의 작품과 가족과 친구들의 안녕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 자신 외에 흔히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고 종종 얽히는 안익태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자료들이 최근 발굴되고 있는데,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슈트라우스를 존경했고 한국환상곡 등 그의 작품에서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이 깊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유럽 현지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안익태는 그리 일찍부터 슈트라우스에게 배우지도 않았고, 그저 '일본 축전음악' 의 지휘자로 슈트라우스와 접촉하기 시작했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논쟁에 불을 붙여준 꼴이 되었다.
9. 대중 매체의 사용
아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인용된 가장 유명한 슈트라우스 작품을 꼽으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초반부 대목일 것이다. 조용하게 밑에 깔리는 오르간 저음 위에서 떠오르듯이 나오는 트럼펫의 팡파르와 팀파니의 강타부터 굉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에서 쓰여 히트했다. 이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나 프리드리히 니체와 관련되어 이야기되던 이 곡이 단번에 '우주음악' 이나 'SF음악' 으로 인식이 바뀌었을 정도.[40]영화 외에도 하도 웅장해서 그런지 엘비스 프레슬리도 자신의 콘서트에서 오프닝 음악으로 썼고, WWE의 노장 프로레슬러 릭 플레어도 '호우!' 하는 자신의 외침소리와 함께 등장 음악으로 사용했다. 이외에 다른 교향시들도 묘사적인 표현 때문인지 종종 광고음악으로 쓰인다고 한다.
10. 저서
《사색과 기억》(김윤미 역, 포노, 2022)
[1]
Charles Youmans, "
Chapter 16 - Philosophy and Religion; from Part III - Cultural Engagement and Musical Life", cambridge.org, 2020.10.8.
[2]
그 일례로 프란츠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호른 파트는 클라리넷에나 어울릴 것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렇게 프란츠가 불평할 때에는
니벨룽의 반지 초연의 중책을 맡았던 바그너의 수제자
한스 리히터가 이런 패시지들을 본인이 직접 연주해 보이곤 했다고 한다.(한스 리히터는 호른 연주자 출신이었다.)
[3]
참고로 뷜로도 예전에는 열성적인
바그네리안이였지만, 바그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빼앗아가자 대번에 반바그네리안으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4]
슈트라우스는 나중에 이 오페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가르미슈 산장 정원에다 '군트람의 묘'까지 만들어 이 슬픔을 유머로 승화했다.
[5]
참고로 이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97~1980)는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와 완전히 똑같은 나이인 83세까지 살았다.
[6]
물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는데,
폴 뒤카는 '이전까지는 내가 관현악법이 무엇인지 안다 생각했으나 이것을 듣고는 아직도 관현악법에 대해 알 게 많단 것을 깨달았다'고 극찬한 것과 달리,
코지마 바그너는 슈트라우스가 이 오페라의 일부를 피아노로 연주한 것만 듣고 '광란'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살로메가 초연한 해에 사망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 오페라의 일부를 피아노로 연주한 것을 듣고는 '이리 저리 기어다니는 오월의 풍뎅이가 가득 찬 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7]
이때 생활고에 시달렸던 슈트라우스는 자필 악보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가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8]
스위스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에스체트는 사용하지 않는다.
[9]
두 교향곡은 이름만 '교향곡'이라 불릴 뿐이지, 실제로는 교향시(자신은 '음시(Tondichtung)'라고 불리기를 바랐다.)로 간주된다. 아니면 환상교향곡처럼 표제교향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교향곡으로 분류하지만,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교향시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교향곡과 교향시의 중간에 위치한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교향곡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고, 연가곡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는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와 비슷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
[10]
바이올린10, 비올라5, 첼로5, 더블베이스3이다. 원래는 현악 7중주 버전이었다.
[11]
간혹 플룻 버전으로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12]
5곡으로 구성
[13]
1947년 6월 11일 슈트라우스가 직접 지휘한 버전. 소프라노 Annette Brun, 스위스 이탈리안 관현악단(Orchestra della Svizzera Italiana)
[14]
마지막 10번 곡인 Zueignung(헌정)이 유명하다.
[15]
원제는 Wandrers Sturmlied. 합창을 위한 작품이며 가사는
괴테의 시다.
[16]
4번째 곡인 '내일(Morgen)'이 특히 유명하다.
[17]
이게 슈트라우스의 진정한 최후의 작품이다. 1983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18]
작중 유명 무용가 체르비네타가
아리아드네를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 '고금의 성악곡 중 가장 부르기 어려운 곡'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고난도의 기교로 유명한데, 심지어 이것도 초연 당시 '인간이 부를 수 없는 곡'이라는 등 너무 어렵다는 평이 많아서 짧게 단축하고 조성을 낮추며 쉽게 개작한 거다.(그 일례로, 개정판에서 High E(E6)인 부분이 초판에서는 High F#(F#6)이다.) 사족으로
조수미가 1994년에 이 아리아의 초고를 원본 그대로 불러서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9]
해당 녹음의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Natalie Dessay, 1965~,
프랑스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이 난곡을 아련하면서 단아한 분위기로 손쉽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 녹음을 2000년 녹음한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가 녹음 1년 후인 2001년 급서하면서, 이 녹음은 시노폴리가 녹음한 마지막 오페라 음반이 되었다.
[20]
그래서 이 두 곡은 교향곡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문헌들에서 관현악곡/교향시 영역으로 분류한다.
[21]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파괴된 오페라극장의 모습을 보고 작곡했다고 한다.
음반의 표지로도 나왔었다.
[22]
정확히는 7장 '회복되어 가는 자'(문서 내 영상의 20:47~20:57 부분)에서 나온다.
[23]
특히 당대의 경쟁자 포지션이었던
클로드 드뷔시가 이런 식으로 열폭을 했으며, 슈트라우스 이상의 관현악의 대가로 평가받는
모리스 라벨은 드뷔시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슈트라우스의 관현악법에 깊은 감명을 받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악보를 모서리가 해질 때까지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24]
첼레스타(1886년에 개발되었다.), 헤켈폰(Heckelphon, 일반 오보에보다 한 옥타브 낮은 음을 내는 바리톤 오보에의 일종, 1879년에 바그너에 의해 개발이 의뢰되었으나 1904년에야 완성되었고, 1905년에 살로메에 처음으로 쓰였다.),
트라우토니움(1929년에 개발된 초기형 전자악기로
황기 2600년 봉축곡을 녹음할 때 썼다. 원곡에서는 그나마 평범하게(?)
공 14개를 사용했는데, 일본에서 연주할 때에는 주최측이 이를 오해해서 아예 절에서 범종을 가져가 썼다고 한다.)
[25]
바셋 호른(클라리넷 계열 악기, 모차르트 대에는 자주 쓰였으나 이후 사장된 상태였다.),
오보에 다모레(오보에 계열 악기, 바흐 같은 바로크 작곡가들이 애용했는데 19세기에는 사장된 상태였다.)
[26]
호른의 경우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알프스 교향곡의 편성인데, 관현악단에 8대 배치한 것도 모자라 무대 뒤에 12명 더 쓰라고 지시되어 있다. 총 20명. 물론 무대 뒤의 연주자 배치에 대해서는 '정 여의치 않다면 생략해도 무방하다' 고 기입하고 있다.
[27]
일례로 빈 필의 전 호른 수석 볼프강 톰뵈크 2세는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과 영웅의 생애는 독일에서 F조 싱글 호른에 사형을 선고한 곡'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28]
심지어는 상술한 것처럼 소프라노의 High F#이 나오는 악곡도 있다.
[29]
그런데 이건 동시대인이자 전문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그 역시 젊었을 때는 격렬한 지휘 동작 때문에 이를 풍자하는 그림이 있었을 정도였지만 훗날에는 점차 절제된 지휘 동작을 선보였고, 나중에는 숫제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30]
영상 후반 5분 동안의 음성 없는 지휘 모습은 선배 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슈(베토벤 5번을 녹음한 최초의 메이저 지휘자다)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지휘 영상이다.
[31]
참고로 같은 해에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한 교향시
가정 교향곡이 초연되었다.
[32]
Pauline Strauss, 1863~1950.
빌헬름 1세의 대관식 때 바이에른 대표단으로 참여했던 장군 아돌프 데 아나(Adolf de Ahna, 1830~?)의 딸이었으며, 남편보다 1년 먼저 태어나서 1년 뒤에 죽었다.
[33]
그 말을 들으면 슈트라우스는 그렇게 좋아하던 스카트 게임(카드 게임의 일종)도 그만두고 바로 작곡에 돌입했다고 한다. 참고로 슈트라우스가 스카트 게임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피델리오'를 지휘했을 때 스카트 게임 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는 갑자기 템포를 급격히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도 파울리네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는 증거.
[34]
참고로 그 집이 바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이었다. 지금도 슈트라우스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슈트라우스 관련 문서나 자료의 보관소로도 이용되는 중이다.
[35]
의외로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초기 나치는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평가가 나오기도 했으며 수많은 엘리트 독일인이 지지했다.
[36]
그리고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곡 '시냇물' 이나 '라플란드 평원의 비상 경보' 같은 곡들은 각각 괴벨스와 재무 장관이었던
발터 풍크에게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37]
당시 며느리는 자택이 압류되고 상점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슈트라우스의 두 손자는 학교로 가는 도중 동급생들에게 구타당한 일까지 있었으며, 심지어 며느리의 가족 26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38]
힌데미트 본인은 순수 게르만계였지만, 아내가
유대인이었다.
[39]
그렇게 수용소까지 찾아가 석방을 요구한 슈트라우스의 노력은 불발되어 안타깝게도 파울로 노이만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고 많다. 그 외에도 슈트라우스는 여러차례 나치 친위대에 편지를 보내 수용소에 수감된 며느리의 일가친척들의 석방을 요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40]
이 점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교향시 모음 '행성'과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