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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러시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2. 투르크 제족들의 지배
동유럽 국가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슬라브인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칸반도 등 동유럽 일대에 퍼져 있던 동 게르만족들이 4 ~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대이동하자, 5 ~ 6세기 동쪽에서 슬라브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동해와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 영역을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슬라브인들은 동유럽으로 진출한 중앙아시아의 아바르족, 하자르족 등 여러 투르크계 유목 민족들에게 차례로 정복을 당해 그들의 노예로 지내야 했다. 3세기부터 스텝을 따라 동유럽에 진출한 투르크족들은 이 지역의 동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5세기부터는 신흥 투르크계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었다. 이후 하자르 카간국 시절을 거쳤다. 투르크족의 지배는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본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투르크족들의 지배로 인해 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일부 동슬라브인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며 투르크족에 동화되기도 했다. 동슬라브인들은 특히 하자르족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유럽과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다.
역사 학자들은 투르크족, 특히 하자르족의 지배로 인해서 동슬라브족이 이슬람화되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하자르는 7세기 이후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이슬람 제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그들이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3. 루스 카간국
이후 8세기 말부터 루스(Rus)족[1](바랑기아인)이 바다를 건너 러시아 땅에 도래했다. 루스족은 스웨덴 쪽에 살던 노르드인( 바이킹)의 일파였다. 루스족은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라도가 호수변[2]에 요새를 건설, 정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북유럽에서 도착했던 루스족/바랑기아인들은 주로 교역에 목적을 두고 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많은 노르드인들이 합류하며 세력이 강해졌고, 이들은 차차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며 현지 토착 슬라브족들을 정복, 혹은 교류하며 정착지를 넓혀나갔다. 이 시기(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 중반) 현 유럽 러시아 지역에 루스족들의 정체(政體)를 현대 역사학자들은 루스 카간국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rus+sia)는 루스족에서 유래했다. 카간은 고대 튀르크어로 왕이라는 뜻이다.4. 노브고로드 루스 - 키예프 루스
9세기 초중반 루스족의 일파는 러시아 내륙,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까지 진출하여 정착했는데, 이 루스인들은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했고, 현지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여 루스인들을 북쪽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현지 부족들은 서로 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루스인, 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3]이에 류리크가 이끄는 루스인들은 노브고로드 지역에 정착촌을 만들어 862년 노브고로드 루스( 노브고로드 공국)를 건국했다. 류리크가 죽고 제2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뒤 중심지를 그쪽으로 옮겨 키예프 루스로 이어졌고, 옛 수도 노브고로드도 계속 중요시되었다. 즉 이 노브고로드 루스-키예프 루스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동 기원이 되는 나라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1862년에 건국 1,000주년 기념 행사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국가를 건설한 류리크는 원초연대기에 루스인(즉 노르드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러시아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건 러시아 입장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다보니 러시아 학계에서는 이는 오류라고 주장하며 류리크가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의 공통 시조가 되는 루스 카간국은 스웨덴에서 건너온 북유럽인(바이킹)[4]들이 세운 나라이다. 다만 이 지역에는 슬라브족의 이동 당시에 이주한 현지 슬라브인 살고 있었고, 이들과 어느 정도 공존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는 있지만 확실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즉 최초의 노브고로드 루스는 순수 루스인(바이킹)들로만 구성된 나라였을 수도 있고, 루스인들과 이들보다 먼저 현지에 정착해 있었던 슬라브인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노르드인과 슬라브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후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는 주변 슬라브인들을 복속하며 적극적인 팽창을 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이 피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배계층은 루스인들이었고,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은 노르드인들의 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였다.
스웨덴계 노르드인의 일파인 루스족이 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건국 시조라는 이 노르드설은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역사가들을 제외한 세계 역사학계에서 사실상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쪽에서는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주제다.[5] 역사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노브고로드 루스를 세운 류리크는 부하 장군인 아스콜트, 디르를 남쪽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키예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국에서는 류리크의 후계자로 올레크 베시가 등극했으며, 882년 올레크 베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콜트와 디르를 죽이고 일대 부족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키예프를 수도로 하는 키예프 루스를 세웠다. 올레크 베시는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여, 노브고로드 공국, 폴로츠크 공국,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갈리치아-볼히니아 등의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이렇게 초기 러시아사의 중심지는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서쪽의 키예프 일대였고 현대 러시아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황금의 고리) 아직 루스 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루스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루스를 영향권 하에 두었고 이곳의 지배자는 대공이라고 불렀다.
10세기, 쿠데타를 일으켜 친형 야로폴크 대공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여 통치자가 된 블라디미르 대공은 종교를 수용하기로 결정,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을 탐색한 결과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선택하여 국교로 삼았고[6]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블라디미르는 동방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 대공은 루스 최초의 고대법전인 <루스카야 프라우다>을 창립했고, 이후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대공까지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이러한 키예프 루스의 번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아랍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혹은 쿠만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서 루스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본격적으로 멸망하는 것은 후술할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서 시작되었다.
5. 몽골-타타르의 멍에
사실상 본격적으로 전환기에 들어선 것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국이 위치했던 드네프르 강 일대의 평원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 평야 지대여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특성상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경우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키예프 공국의 위치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고 몽골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제대로 방비할 역량이 부족했던 시점에서 침략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을 위시한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사준사구라 불리는 8장군의 일원이던 제베와 수부타이가 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 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봄이 되자 몽골 기병들이 녹아서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 철수하면서 운 좋게 침략을 면한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키예프처럼 완전한 멸망은 면한 대신 동시대 고려의 원 간섭기와 비슷하게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다른 공국들과 달리 몽골의 비위를 잘 맞춰 주며 지냈고, 14세기에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정략 결혼하는데 성공하며 이후 러시아 지역의 조세(상납금)를 징수하여 몽골에 바치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7] 이후 주변 공국들로부터 상납금을 걷어 몽골에 바치며 주변 공국들에게 갑으로 행세하게 되었고, 동시에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몽골인들은 직접 러시아를 관리하는 것보다 적당히 공물을 징수하다가 트집을 잡고 쳐들어가서 노예를 잡아오는 편을 선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1480년 모스크바 공국군과 킵차크 칸국이 대치하다 그대로 전투없이 철군한 우그라강 전투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루테니아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세력의 위상은 14세기 초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히 추락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대공의 경우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지속적으로 후계자를 낳으며 계승구도를 확실히 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 초기에는 대공계승에 적장자라는 계승자가 확실히 있었기에 이전 키예프 러시아처럼 형제상속이 아닌 자연스럽게 장자상속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계 공국과는 달리 힘을 길러서 킵차크 칸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8] 이후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자신을 차르, 곧 황제로 호칭한다. 그의 손자가 유명한 이반 뇌제이다. 이후 차르의 전제정치는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
물론 몽골 제국으로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말은 몽골 지배의 장점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 제국으로 인해 러시아의 문화는 키예프 시대에 비해 완벽하게 퇴보했다. 러시아가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의 교류가 사실상 차단당한 상태에서 이런 퇴보는 더욱 악화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백 년이 걸렸으며, 러시아 제정 말기까지도 군사적인 면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게 앞서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점은 오직 영토가 커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동방 개척은 모피 외에는 수출할 게 별로 없었던 그리고 동방 유목민으로부터 적극 영토를 방어해야 했던 러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속령 러시아 시절 러시아의 국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을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또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은 모피였는데, 이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동물 자원이 계속 고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진을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게 이 땅들은 아직은 탐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지나치게 추운 날씨와 농경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우는 적었다. 러시아 제국이 동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자국민을 동방으로 이민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 시절 지도 제작 때부터이다. 러시아가 위상과 군사력으로 대제국이 된 시기는 몽골 제국 덕이 아닌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별다른 우위를 보이지 못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 게시판에서 토론된 바 있으므로, 이곳을 참고할 것.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 등의 문서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6.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루스계 제후국들을 통합,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반 뇌제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루스 차르국을 선포한다. 이반 뇌제는 강력한 전제정치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552년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점령한다. 1583년에는 코사크 부대가 시비르 칸국[9]의 중심지 카실리크를 점령했다.그러나 이반 뇌제가 정신줄을 놓은 틈을 노리고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수만 명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뇌제는 일을 이것저것 벌려놓고 죽어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와 그의 후계자이자 이반 뇌제의 아들이었던 드미트리와 표도르가 죽으면서 류리크 왕조에서 정식으로 이을 후계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방계 가문은 많았지만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방계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6.1. 혼란 시대 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이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차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 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제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혼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혼란 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면서 끝나게 된다. 비록 류리크 왕조는 사라졌으나 그 가문과 결혼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노프 왕조가 생길 정도로 류리크 왕조가 만든 차르 전제정권은 강력했다. 귀족회의를 통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차르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오히려 귀족들이 혼란 시대를 통해 세가 약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다시 긴 기간동안 강력한 전제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차르와 간략한 역사는 항목 참조.7. 러시아 제국
7.1. 표트르 대제의 개혁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문화권인 반면 당시 발전하던 서유럽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던 것도 서유럽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제한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이반 3세와 4세를 시절 성장한 직후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큰 위기를 겪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맞물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하지만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적극적인 서구화 개혁과 북방의 패자 스웨덴을 상대로 한 대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표트르 1세는 1721년 러시아 군주의 명칭을 차르에서 임페라토르로 바꾸고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였다.
7.2. 러시아 제국의 본격적 팽창: 폴란드 분할, 크림 칸국 병합, 캅카스· 핀란드 진출
이 시기에는 러시아에게 두 가지의 행운이 겹쳤다.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은 때맞춰서 프로이센 왕국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10]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캅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1788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1721년과 1744년 잃은 카리알라 지역의 반환을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1790년 베렐레 조약으로 해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이 얻었던 영토는 유지되었다.[11]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프로이센 왕국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이후 러시아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들어서서였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의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러시아의 확장은 일단 저지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오스만 제국과 스웨덴은 털어먹어 1809년 스웨덴을 상대로 핀란드 전역을 얻어냈고,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드네스트르강 동쪽의 몰다비아 공국 영토를 빼앗아 베사라비야 현을 설치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수십만 대군을 털리고 알거지가 되는 바람에 마침내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어권과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7.3. 러시아 제국의 쇠퇴
그러나 겉보기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모습과는 달리 경제수준은 계속 몇 세기 뒤를 달렸다. 잇달은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으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아르메니아 전역까지 석권했지만 상대는 이란 역사 중 가장 최악의 국가였던 카자르 왕조였다. 러시아의 난적인 서유럽의 군대가 다시 적극적으로 변혁을 받아들이게 되자 러시아는 밀리기 시작했고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영프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 제국에 패배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일본 1년 국가예산의 5배에 달하는 예산을 써가며 전쟁을 치른 탓에 국가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러시아는 장기전을 치른다면 이길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국내 정치 혼란으로 전쟁에서 발을 뺐기에 정작 일본이 승전국임에도 별로 얻은 것은 없다고 하나,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손익을 무시하고 당시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그래도 '백인 국가'인 러시아가 '황인 국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었다.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펄펄 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창 막장 테크를 열심히 타던 오스만 제국(1299~1923)이었다. 거의 틈만 나면 오스만을 털어먹는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을 살려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12]
7.3.1. 제1차 세계 대전: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패배
제1차 세계 대전(1914.7~1918.11) 당시의 러시아군은 전쟁 초반 갈리치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몰아붙이며 비교적 잘 싸웠다. 러시아의 진격은 탄넨베르크에서 독일에 의해 가로막히게 된다. 하지만 독일이 급하게 이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끌어온 병력으로 인해 서부전선 독일군의 세력이 약해지며 프랑스가 방어에 성공, 반격의 토대를 놓는 결과를 낳았다.하지만 곧 오스만이 동맹국으로 참전하며 흑해 무역로가 막혀 서방의 우군의 물질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도 초반의 혼란을 정리하고 반격에 나서며 1915년경에는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를 통해 갈리치아를 대부분 회복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러시아는 장비 부족이 심화되며 동맹국의 주력인 독일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밀어붙이고도 발트 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브루실로프 공세는 오스트리아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독일의 역량을 소진시켜 서부전선의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는 한 원인이 되었으나 정작 러시아의 전쟁 수행 역량마저도 고갈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다 못해 분노해 2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러시아 임시정부)이 잠깐 생겼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하였다. 임시정부는 1917년 6월에 전황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케렌스키 공세를 추진하였으나 이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가로막혔다. 결국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다 다시 10월 혁명이 터져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국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가 수립되었다. 이 와중 전쟁을 지속하려는 러시아를 끝장내기 위해 수십만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파우스트슐라그 작전을 발동하며 서부 러시아로 물밀듯이 진격, 핀란드와 로스토프에까지 도달하자 결국 볼셰비키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엄청난 영토를 내주는 등 사실상의 패배로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볼셰비키의 의한 테러와 러시아 내부의 정치 혼란 속에 러시아 제국 아래 있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독립하고자 했고, 국내 반공세력과 외세도 공산주의 국가를 두려워해 혁명을 저지하고자 하였고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이 터졌다. 이때 러시아 제국 영토 내에 젤레나 우크라이나, 퉁구스 공화국, 쿠반 인민공화국 같은 여러 미승인국들이 생겨나고 소멸하였다. 백군은 초기 단결하지 못하고 1918년 말에서야 러시아국을 조직해 하나로 뭉치지만, 결국에는 적군이 승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뜯긴 영토를 일부 회복하였으며, 이들을 구성국으로 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건국했다.
8. 소련
8.1. 레닌 시대
러시아 내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내전이 끝난 후 소련 정부는 자국 경제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점을 인정하고 경기 회복에 나서고자 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는 한편, 훗날 소련 경제의 본격적인 성장기반을 갖추기 위해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했다. 신경제정책은 사유재산 제도를 일부 도입하는 한편 자본주의 요소를 적극 도입해 노동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 비교적 짧은 시간 내 러시아 경제는 전쟁 이전 수준까지 회복하게 되었다.레닌의 신경제정책은 내전 이전의 경제수준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에서는 향후 소련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두고 여러 노선 차이가 생겼다. 이 와중에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소련 정계에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급부상했다.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8.2. 스탈린 시대
스탈린은 서기장으로써 트로츠키 및 부하린을 포함한 당내 유력 인사들을 몰락시켰으며, 제1차 5개년 공업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소련은 본격적인 산업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제1차 공업화 이후 제2, 제3차 공업화 계획이 진행되며 훗날 독소전쟁을 수행할 전시공업의 기틀을 닦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발이 거세서 지방마다 크고 작은 봉기와 퉁구스 공화국과 같이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또한 집단농장화를 추진함에 따라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야기하여 수백만 명이 아사했으며, 대숙청 시기 지식인들을 다수 처형하거나 수용소로 끌고 가면서 군사, 로켓 분야를 제외한 소련의 학문이 크게 쇠퇴하였다.1930년대 중반 무렵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경계하였으나 곧 유럽에서 패권을 추구할 기회로 여기면서 1939년 8월 나치 독일과 함께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은 독일과 비밀협정을 통해 발트 3국을 합병하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자국으로 흡수했다. 소련은 폴란드 침공 이후 핀란드 또한 겨울전쟁으로 병합하려 했다. 하지만 핀란드군의 완강한 저항과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 장교단의 약화로 인해 오랫동안 고전했으며, 이는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과 동유럽 국가를 정복한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게 되면서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 초기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며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1941년 말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도를 포함한 정치중심부가 함락되는 일을 면하면서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을 패배시키면서 쿠르스크 전투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어서 1944년에는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결정타를 먹이며 1년간 승승장구를 거두면서 동구권 각 나라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여 전후 위성국가로 만들었고 1945년 5월에는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여 독소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나치 점령 시절의 소련 군정청,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로코트 자치국에서 활동한 러시아 해방군, 카민스키 여단, 동방부대 등의 군 세력이나 소수민족들은 종전 후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처형되었다.
독소전이 끝나고 세 달이 지난 1945년 8월 8일에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남하하며 대일전을 시작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 북부 지방 일부와 슘슈 섬에서 멈추게 된다.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북위 38도 선 북쪽까지 내려오고 남북 분단에 영향을 미친 것은 종전 이후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자 스탈린은 철의 장막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국가들만의 폐쇄적인 경제권을 형성했으며, 소련은 이들 위성 국가들의 주요 공산품을 독점적으로 수출했다.
8.3. 흐루쇼프 시대
스탈린이 죽고 말렌코프가 잠시 집권할 때즈음 드넓은 시베리아에서 석유가 터져나오며 소련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었다.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 소련은 1950년말부터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석유, 천연가스를 필두로 한 자연 수출, 그리고 공산권 위성 국가들의 소비를 위한 자동차 등 중공업 등을 기반으로 소련은 양대 강국이 되었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연이어 개를 우주에 보냈으며, 1961년에는 최초의 유인 우주 탐사를 실행해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자동차나 VHS 기기같은것을 구하려면 몇달에서 몇년씩 기다려야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물자공급이 제대로 안되다보니 주요 대도시로 물건을 사려고 일부러 여행가는 등 소비재 부문은 구입에 오랜시간 기다려야되는 경우가 많은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이 시기의 소련 경제사정을 비꼬는 공산주의 유머 시리즈도 많다. 또 소련인들은 자국의 빈약한 공산품에 불만을 품어 많은 서방제 생활용품이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13] 1980년대 기준으로 치면 월급이 200루블인데 청바지 하나에 100루블씩 하는 식이었다.
개혁적, 진보적인 흐루쇼프 시대에 소련은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사실 이 시절에도 과거 대숙청의 부작용으로 트로핌 리센코처럼 공산당에 아부하는 사이비 과학자들이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면서 비과학적인 농업정책으로 흉작이 발생하는 등 흉작이 발생해서 외국으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산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8.4.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코시킨 개혁이 실패로 돌아기고 이 시기부터 경제성장률이 3% 안팍에 그치며 경제가 정체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오일 쇼크가 터졌고, 오일 쇼크 최대의 수혜자는 당사자 중동이 아닌 소련이었다. 오일 쇼크로 석유 가격이 4배 폭등하자 세계 최대 산유국 소련의 경제 역시 다시 침체기를 벗어나게 되었다.8.5. 고르바초프 시대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집권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80년대 중반 폭락하면서 소련의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이러한 경제적인 위기 속에서 다음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만이 소련이 살 길이라 생각했고,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쳤다. 개방 정책이 효과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소련의 재정은 1985~86년경 이미 붕괴 상황에 이른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하여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먹였고,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었다. 먼저 발트 3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며 소련에서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는데, 과거 이러한 움직임을 군대를 이용해 강경 진압했던 소련 지도자들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오히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동유럽 모든 나라에서 민주화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며 1990년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소련에서 독립을 선포했고,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소련내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 소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폭락했고 소련은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다. 1991년 소련 군부의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주도권을 잡았고, 1991년 말 고르바초프는 소련 해체를 선언하였다.
9. 러시아 연방
9.1. 옐친 시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구성국은 모두 독립했고, 소련의 왕초였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러시아 연방으로 개편되었다.소련이 갑작스럽게 해체되면서 기존의 러시아 SFSR 내의 자치공화국들과 자치주들이 문제가 되었다.[14] 이들의 자치 최고 소비에트는 1990년 7월 20일 북오세티야 ASSR을 시작으로 러시아 SFSR 내에서 주권의 퍼레이드를 벌이면서, 주권 선언을 발표하여 러시아 SFSR 소속이 아닌 새로운 소련의 SSR임을 주장하였는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갑자기 독립국이 되어버렸다.(러시아 SFSR 외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ASSR중엔 크림 공화국, 카라칼팍스탄, 나흐츠반, 트란스니스트리아/AO 중엔 가가우지아, 나고르노-카라바흐도 주권선언.) 그러나 이들은 체첸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받는다면 러시아 연방에 가입할 생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옐친 정부는 각 정부들과 협상을 벌여 1992년 3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연방 조약을 체결시켜 타타르스탄과 체첸을 제외한 기존 러시아 SFSR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타타르스탄은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여 2년 더 협상한 끝에 1994년 '러시아 연방과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국가 당국과 권한의 상호 위임 사이의 관할권 구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서 러시아 연방에 가입했으며, 체첸은 끝까지 거부하면서 체첸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외에도 갑작스러운 해체로 인해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1978년에 제정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이 러시아 연방 결성 이후에도 한동안 헌법 역할을 했다. 당시 1978년 제정된 소련 시절 헌법은 1990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다당제가 용인되고 민주주의, 지방자치가 헌법에 명시되는 등의 개헌이 이루어졌으나, 근본적으로는 소련의 존재를 전제로 한 헌법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구성국이 아닌 독립 국가가 된 러시아 연방은 새롭게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이 때 러시아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웠다. 대통령의 권한 또한 이원집정부제의 대통령에 가까워, 대통령은 총리를 지명할 수가 있었지만, 의회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또한 의회는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거나 국정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었다.
당시의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최고회의의 권한보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대통령제 헌법을 원했다. 반면 러시아 최고회의는 소련 시절과 비슷하게 최고회의가 실권을 쥐는 내각제처럼 제정되길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제를 가지고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조율했지만, 당연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옐친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경제 파탄과 옐친의 비민주적 통치행위로 인해 최고의회는 점점 옐친과 대립각을 세웠다.[15] 여기에 대해 옐친이 헌법에도 없는 ' 최고회의 해산'을 단행하고 새 입법부를 선출하려 하고, 이에 맞서 최고회의는 옐친을 탄핵하려고 들자, 대통령과 최고회의는 결국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 사건이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이다.
1993년 10월 최고회의가 해산 결정에 반발해 모스크바에서 무력 봉기를 일으키자, 옐친은 군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최고회의의 무력봉기를 제압했다. 이어 1993년 12월 러시아 연방 헌법을 제정해 자신의 꼭두각시가 된 새 입법부(국가두마)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이 헌법안은 국민투표에서 54.8%의 투표율, 58.4%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정식으로 헌법이 되었다. 이 헌법은 프랑스 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원집정부제를 표방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은 이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에 비해 크게 강해졌다.
경제적으로 러시아 연방은 소련식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격한 시장경제 도입으로 인한 사회혼란이 발생했다.[16]
특히 소련 해체 직후 1990년대 말까지 러시아 루블은 여러 차례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통화로써 자산손실을 일으켰고, 임금수준의 급격한 하락, 복지정책 감축으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붕괴, 빈부격차 심화로 인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이로 인하여 1990년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욕을 잃었다. 여기에 혼란한 정치 상황까지 겹치면서 결국 각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고도 갚지 못해 모라토리움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는 러시아 전체 역사에서도 최악의 암흑기라고 볼 수 있으며, 당시 러시아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17] 모라토리움이 선언된 1998년에는 인구 1억이 넘는 인구대국임에도 불구하고 GDP가 20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며, 당시 일본의 1인당 GDP의 4.5%, 미국 GDP의 2%라는 처참한 수치를 보여주었다.[18]
사회적으로 치안이 소련 시절보다 훨씬 나빠진 것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하루 벌고 하루 살아가는 빈곤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또한 자국에서 마땅히 돈을 벌 수 있는 곳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해 해외로 나가서 돈을 버는 러시아인들도 매우 많았다. 알다시피 이 당시의 러시아는 경제뿐만 아닌 사회 시스템 자체가 파탄나 정상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이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도시의 큰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을 가도 고기는 커녕 계란 하나 보기 힘들었으며, 관광호텔의 호텔 직원들도 관광객들을 제대로 접대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구소련의 항공사이자 현 러시아의 국영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는 1990년대에는 기내 서비스라는 개념이 없는 수준으로 손님들을 짐짝 취급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비스 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나라 자체가 이렇게 막장 상황이다 보니, 이 당시 러시아인들은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나가면 백인 대우도 못 받고 흑인들이나 동양인들처럼 똑같이 인종차별을 당했다.
9.2. 푸틴 시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옐친은 당시의 총리였던 푸틴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2000년에 푸틴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푸틴은 옐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는 가즈프롬 등 민영화된 에너지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시키면서 에너지 수익을 세수로 확보하여 경기 회복에 나섰다. 푸틴 정부는 2000년대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이렇게 확보한 세수로 외국에 있던 채무를 처리하고 대침체 당시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 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푸틴은 러시아 연방의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정적들을 죽이고 언론을 탄압해 가며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푸틴은 2008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바지대통령을 내세워 집권한 이후 헌법을 개정하여 6년으로 증가시켰으며, 2020년에는 부정선거를 무릅쓰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초기화하면서 사실상 종신 집권 독재자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푸틴은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힘쓰는 한편, 총리 시절부터 해 오던 네오나치를 필두로 한 극우 민족주의 운동을 나시같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흡수하였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패권적인 행보에 나섰으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여기에 2014년에는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2022년에는 1월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 진압, 2월 돈바스 지역에 공식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등 중앙아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권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주며 옛 초강대국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으며[19] 명분없는 전쟁 선포, 총동원령 선포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저항을 맞이하였으나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실패하게 되면서 전장 상황이 우크라이나에게 훨씬 불리해짐에 따라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1]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 수장의 아들 중 하나인
루스란 남자가 이 일족의 시조라 한다.
[2]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래에 나오듯 후대에 정책적으로 조성한 계획도시고 이때는 늪지대에 불과했다.
[3]
원초연대기에서 발췌.
[4]
'바랴기'라고 불렸다. 동로마 황제의 바이킹 출신 호위대인
바랑기안 친위대를 뜻한다.
[5]
2차 대전 당시 게르만의 또다른 일파인 독일이 이 노르드 루스설 및
동방식민운동과 같은 여타 역사적 사례를 들먹이며 쳐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6]
블라디미르는
기독교로 결정하고 신하들을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 두 그룹씩 보냈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가톨릭
미사를 보았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정교회의
성찬예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들이 신계에 있었던 건지, 지상에 있었던 건지라고 보고했다.
[7]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었던 이반 1세는 상납금을 수금받아 그 상납금을 바치면서 간간히 귀한 선물을 준비해 몽골 장군들에게 진상했고 이에 크게 기뻐한 몽골 장군들과 칸들은 이반 1세를 모든 러시아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었고 상납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다. 이후 이반 1세는 특유의 재산관리와 상납금을 이용해 몽골의 환심을 받았고 이후 돈주머니란 이름의 칼리타란 호칭을 얻었다.
[8]
니꼴라이 V. 랴자노프스키 작, 러시아의 역사 1 '속령 러시아' 부분 참조
[9]
시베리아의 어원이 되는 나라이다.
[10]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11]
대신 1721년 뉘스타드 조약 이후 러시아가 합법적으로 스웨덴에 내정 간섭을 할 수 있었던 특혜는 사라졌다.
[12]
애초에
크림 전쟁 역시 이런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
[13]
이들 물품은 주로 외교관이나 선원, 상인 등 외국에 들락나락 거릴 일이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돈벌이용으로 들고오는 경우가 많았다.
[14]
체첸-인구시 공화국,
타타르스탄 공화국,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사하 공화국,
칼미키야 공화국,
모르드바 공화국,
추바시 공화국,
우드무르트 공화국,
투바 공화국,
부랴티야 공화국,
고르노-알타이 공화국,
하카시야 공화국,
북오세티야 공화국,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
카렐리야 공화국,
코미 공화국,
마리 엘 공화국,
다게스탄 공화국. 그리고 자치주 중에서는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아디게야 자치구.
[15]
옐친 정부에서 경제가 파탄나자 최고회의는 옐친과 점점 대립했고, 옐친이 지명한 총리에 대해 최고회의가 동의해 주지 않아 내각 구성이 제대로 되지 않자 행정명령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6]
사실 러시아 정부가 일명 충격요법으로 불리는 급격한 전환을 추진한 배경에는 1980년대 말 계획경제 체제가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경제가 사실상 마비 직전까지 악화된 이유가 컸다. 소련 시절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분업화된 생산체계가 마비되어 버리자,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당장 적자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자구책을 장기간에 걸쳐 추진하기 어려웠다.
[17]
1999년 당시 아시아의 일개
중진국이자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경계선에 있던
한국 GDP의 40%가 채 안됐을 정도이다! GDP가 이러니
1인당 GDP는 더 벌어졌을 수밖에.
[18]
여담으로,
일본은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선진국임에도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서양 자체에 대한 동경 문화가 매우 강한 나라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러한 신드롬으로부터 거리가 다소 먼 편인데, 이유는 상술했듯이 러시아는 소련 시절이었던 1980년대부터 일본보다 훨씬 못 살고 배울 점이라고는 더더욱 없는 나라였으니 당연히 동경이나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
이 여파로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를 제외한 서양권 전체,
대만 등이 러시아 전역을
여행금지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