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2:04:57

우크라이나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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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Holodomor_Famine_map.jpg

1929년에서 1933년까지의 지역별 인구감소율 표.[1]

1. 개요2. 과정3. 사망자 수4. 원인에 관한 고찰
4.1. 정설: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무지에 의한 인위성 4.2. 고의적 제노사이드 설(과거의 제노사이드론)
4.2.1. 반론
4.3. 소련 추종자들의 역사왜곡: 우크라이나인 원인설, 스탈린 미화
5. 특성과 개념으로서의 '제노사이드' 논쟁 (2010년대 이후 논쟁)6. 참혹한 실상7. 이후의 전개8. 다른 지역에서의 피해
8.1. 카자흐스탄 대기근8.2. 타타르스탄 대기근
9. 사과 및 보상 요구10. 기타11. 창작물에서12. 같이 보기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olodomorKharkiv.jpg
굶어죽은 시체 옆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
(1933년 당시 우크라이나 SSR의 행정수도인 하리코프에서 촬영된 사진)
파일:File_72219938Cb.jpg
상단의 사진이 찍히기 불과 2년 전의 하리코프의 풍경

1932년~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라는 명칭으로도 널리 불리며 의미는 기아를 통한 대량살인(Mass killing by hunger)이며, Holodo는 기아란 뜻이고 mor는 대규모 죽음이란 의미다.

대기근의 피해는 소련의 고난의 행군 대약진 운동이라고 할 만큼 끔찍했다. 기록이 부실하여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니얼 퍼거슨, 스탈린의 대숙청을 연구한 로버트 콘퀘스트 등 반공 인사들은 최소 1,100만 명에서 많게는 1,500만 명의 인구 감소 결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출산손실을 감안한 수치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유산 및 영양결핍으로 인한 신생아 출산 감소까지 감안한 수치인 셈이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과 맞물리는 까닭에 정치적으로 계획된 대기근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반러 감정의 영향으로 학살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사태는 이후에 소련에서 독립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2. 과정

소련의 스탈린은 신경제정책( NEP)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단화 정책으로 통제를 극대화 함과 동시에 계획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자기들이 힘들여 일군 농사의 열매들이 자기들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당연히 반발했고,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의 큰 목표였던 집산화 자체도 느리게 전개되었다.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3]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집단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라크(부농)들을 소련 정부가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단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단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 버린 까닭에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작스레 집단화되자 농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기근이 참혹했던 돈강 유역에서 자란 러시아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그 군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말 그대로 "남 줄 바엔 잡아먹자"였다.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Гремячий лог)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약 200푸트(Пуд)[4]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5]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이 당시 우크라이나는 아직 기계화 영농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마소와 같은 가축은 필수적인 농사 수단이었다. 가축 수의 절대 부족은 바로 농업 생산량의 격감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32년경에는 농작물의 작황 또한 좋지 못했는데 고르지 못한 날씨와 농업 사보타주가 겹친 결과였다. 이 지경에서 국가에서 할당한 징발량을 억지로 채우고 나면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마저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한 사태를 가장 집중적으로 직면했던 국가가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대기근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종 청소 내지는 소련 농민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대기근이었는지, 아니면 단순 정책 실패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진 바 있다.

3. 사망자 수

최소 100만에서 많게는 1,500만까지 추정한다.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32-1933년 소련 우크라이나에서 기아와 기아 관련 질병으로 약 3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수치를 제안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Snyder, Timothy (2010).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New York: Basic Books. ISBN 978-0-465-00239-9, p. 53. https://en.m.wikipedia.org/wiki/Holodomor 재인용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1,000만 명의 사망자를 주장하며 우크라이나인 수를 3배 가량 과장하는 심각한 해악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기근은 의도적인 정치적 결정의 결과였고, 약 3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실이다.

" Holocaust: The ignored reality". Eurozine. 25 June 2009.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April 2010. Retrieved 22 November 2010. https://en.m.wikipedia.org/wiki/Holodomor 재인용
2001년 휘트프크로프트는 1931년부터 1934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에서 280만 명, 출생 손실을 포함한 370만 명(최대 670만 명)을 포함하여 연방 전역의 총 인구 손실을 1,000만 명, 아마도 최대 1,500만 명으로 추정했다.

Уиткрофт, С. (2001). "О демографических свидетельствах трагедии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в 1931–1933 гг." [On demographic evidence of the tragedy of the Soviet village in 1931–1933]. In V.P. Danilov; et al. (eds.). Трагедия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Коллективизация и раскулачивание 1927–1939 гг.: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The Tragedy of the Soviet Village: Collectivization and Dekulakization 1927–39: Documents and Materials] (in Russian). 3. Moscow: ROSSPEN. ISBN 978-5-8243-0225-7.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 March 2008.p. 885. https://en.m.wikipedia.org/wiki/Holodomor 재인용
2002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스타니슬라프 쿨치츠키는 최근 분류되지 않은 데이터를 포함한 인구통계학적 데이터를 사용하여 손실을 약 320만 명으로 줄였고, 정밀한 데이터 부족을 감안하여 300만~350만 명으로 수정했다.

Kulchytskyi, Stanislav. 23–29 November 2002. "How many of us perished in Holodomor in 1933." Dzerkalo Tyzhnia. Available online "Скільки нас загинуло від Голодомору 1933 року?" (in Ukrainian). Retrieved 20 January 2021.(https://zn.ua/ukr/SOCIUM/skilki_nas_zaginulo_pid_golodomoru_1933_roku.html);Kulchytskyi, Stalislav (2–8 October 2004). "Demographic losses in Ukrainian in the twentieth century" Демографічні втрати України в хх столітті. Dzerkalo Tyzhnia (in Ukrainian). Retrieved 20 January 2021.(https://dt.ua/SOCIUM/demografichni_vtrati_ukrayini_v_hh_stolitti.html);Kulchytsky, Stanislav; Yefimenko, Hennadiy (2003). Демографічні наслідки голодомору 1933 р. в Україні. Всесоюзний перепис 1937 р. в Україні: документи та матеріали [Demographic consequences of the 1933 Holodomor in Ukraine. The all-Union census of 1937 in Ukraine: Documents and Materials] (in Ukrainian). Kyiv: Institute of History. ISBN 978-966-02-3014-9.42–63 https://en.m.wikipedia.org/wiki/Holodomor 재인용

4. 원인에 관한 고찰

4.1. 정설: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무지에 의한 인위성[6]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스탈린의 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은 인정하지 않으나 제노사이드설이 부정받을 뿐이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인위적'(man-made)이었다는 정설까지 부정되지 않는다.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없는 정설은 스탈린 정권이 이념 혹은 무지에 의한 인위적인 결과가 기근이라는 점이다. 이점은 대숙청의 대표적인 '수정주의'로 유명했던 아치 게티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다.[7] 아치 게티는 제노사이드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증거 없는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다음 사실들을 논문에서 지적하였다.
무지에서든 이념에서든 스탈린은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집단화 정책의 창시자이자 수행자였다. 그것은 나나 다른 사람에 의해 논쟁된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쁜 정책은 고의적인 민족 제노사이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다른 지역을 황폐화시킨 기근이 어느정도 사람이 만든 것(some extent man-made)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그것이 고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 450 https://doi.org/10.1017/S0960777318000322
아치 게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어느정도 사람이 만든 것임이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스탈린의 개인 기록 보관소와 서신을 포함한 몇몇의 새롭게 공개된 문서들은 그가 정말로 1920년대 후반의 식량난, 집단화에 대한 저항, 굶주린 지역에서의 농민 탈출, 심지어 기근 그 자체가 조직화된 쿨라크의 저항이나 현장에 있는 요원들이 용기가 없는 것이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이점들은 단지 어리석은 정책을 옹호를 위한 전가가 아니었다, 비록 그런 이유도 많았지만. 그는 정말로 믿었다. 적 쿨라크들의 교활한 음모에 스탈린주의 상상력은 영원히 사로잡혔다.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 451 https://doi.org/10.1017/S0960777318000322
스탈린 정권이 상상력에 의한 믿음으로 탄압했음을 설명한다.
우리가 찾은 특별한 서류철에서, 예를 들면, 스탈린이 내린 비밀 명령으로 곡물 수출을 줄이거나, 곡물의 정확한 양을 줄이거나 씨앗(곡물 종자)을 마을로 보낼 것을 지시했다. 아마 스탈린은 그의 당이 직면한 것을 방해하지 않기위해 그 모든 것을 극비로 해야한다고 판단: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저하는 것은 광범위한 후퇴를 촉발시킬 수 있다. 만약 스탈린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일부 지방들이 알게 된다면 무자비한 정책의 개념이 약화된다.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452
스탈린이 무고한 피해자가 있음을 알고 일부를 구제하기 했지만 이것은 비밀 명령이었고 그 사실을 극비로 해서 다른 지역에 알려지지 못하게 했다.

스탈린에겐 제노사이드가 의도는 분명히 없었고 무고한 희생이 존재함을 나중에 알고 일부 피해자들을 구제하긴 했지만 이 점을 고의적으로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력에 근거해 정책을 계속 수행했고, 잘못이 드러나자 타인에게 책임도 전가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노사이드설만을 부정할 뿐이지 스탈린 정권이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이건 아치 게티조차 마찬가지다.[8] 아치 게티도 스탈린이 부당한 비판을 받는다는 주장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일부 농민들을 구제한 사실은 극비명령이었기에 아치 게티도 스탈린을 옹호하는 맥락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아치 게티는 대기근이 스탈린 정권의 무지나 이념으로 만들어낸 결과라는 건 인정하고 짚어 넘어간 다음에 제노사이드설을 반박했다.

대기근이 소련의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평가받음은 러시아의 전문 논문에서 볼 수 있다.
국제적인 학술단체 «메모리얼» 관리국장 А.Б.로긴스코에 따르면, 소련에서는 1921년 이래 정치적 이유가 있는 형사법적 사건이 5백만건이 된다. 이들 중 약 10%가 유죄 판결을 여러 차례 받은 것을 고려하면, 정치적 테러의 희생자 수는 450만명이 된다. 여기에 보충하면 강제추방된 700만 명이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정치적 이유로 광범위하게 일삼은 탄압에 발생한 희생자의 수는 약 1150-1250만명이다.(이 숫자는 내전[레닌시기 러시아 내전] 희생자의 상당수가 제외됐다.) 또한 이 숫자에는 1921—1922, 1932−1933, 1946−1947년에 발생한 «라스쿨라치바니예[내쫒음, 강탈]» 및 홀로도모르 피해자들이 제외됐다. 최소 50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1920년대 초반 기근, 최대 6,7백만명 희생자를 낸 1932-1933년 기근, 최대 150만명의 희생자는 낸 1946-1947년 기근: [정치적 탄압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에]기근의 사망률을 제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외시킬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망자가 정치적 해결법과 경제적 계산 착오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По мнению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ления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общества «Мемориал» А.Б. Рогинского, с 1921 г. в СССР на преследуемых по политическим мотивам было заведено 5 млн уголовных дел. Если учесть, что примерно 10% из них были осуждены несколько раз, число жертв политического террора составит 4,5 млн чел. К ним следует прибавить примерно 7 млн депортированных. Таким образом, количество пострадавших от массовых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составляло около 11,5−12,5 млн чел. (без учёта значительной части жертв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Также в это число не входят «раскулаченные» и жертвы голодоморов 1921—1922, 1932−1933, 1946−1947 гг. [37] От этого нельзя абстрагироваться, поскольку голодная смертность была вызвана в первую очередь политическими решениями и хозяйственными просчётами: голодов начала 1920-х гг. унёс не менее 5 млн жизней, 1932−1933 гг. — до 6−7 млн жертв, в 1946—1947 гг. — до 1,5 млн.)

«소비에트 마을의 비극» 계획 관계자들은 «커다란 테러»[한국에선 '대숙청'이라 부른다.]의 희생자 숫자를 보다 정확하게 집계했다: 전에 생각되던 68만 2천 명이 아닌 72만 5천−74만 명, 체포자가 판결을 총살형으로 받은 현상이 현저히 더 크게 발생한 건 1937-1938년이었다. 일부 특히 잔인하고 난폭한 징벌 정책 사항에 대해서는 몇개의 연구가 있다, 예를 들면 1933년 나림스콤 지방 유형자들의 광범위한 전멸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있다. «청소»당한 숫자를 포함하여, 형사법 위반 범죄자 중 제일 작은 경범죄에 속한 자들, 또한 강제 집단화에 반대한 사람들, 방랑자, 집시들이 시베리아 습지에서 먹을 것도 거처도 없이 상습적 범죄자들과 함께 추방당해서 그 상습적인 범죄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할 운명들, 이 출판물은 이런 점들을 인상적으로 생기가 넘치게 묘사한다, 망명자와 더불어, 정권 가장자리에 있는 대량의 버림받은 피압박자 집단에 대해 혁신적 연구성과를 낸 전문적인 논문이다.
(Участники проекта «Трагедия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уточнили количество жертв «Большого террора»: к расстрелу в 1937—1938 гг. было приговорено заметно большее число арестованных — не 682 тыс., как ранее считалось, а примерно 725−740 тыс. Часть особенно жестоких эксцессов карательной политики стала предметом отдель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например, история массовой гибели ссыльных в 1933 г. в Нарымском крае, на о. Назино. Эти издания дают впечатляющую картину того, как в число «вычищаемых» в ходе паспортизации были включены, наряду с меньшей частью криминального элемента, также противники насильственной коллективизации, бродяги, цыгане, оказавшиеся затем в сибирских болотах, без еды и жилья, обречённые на террор со стороны высланных вместе с ними уголовников-рецидивистов и мучительную смерть. Новаторский характер носит недавняя коллективная монография о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маргинальных париях режима, в том числе ссыльных.)

공산주의 테러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연구원들은 현재 인정한다.(겁을 주는 실재하거나 상상된 적대자를 제거, 볼셰비키 독재의 강화, 새로운 사회체제 편성, 적대적 사회집단의 대표자 인물들과 민족집단에 대한 청소) 연구자들은 보편적인 단 한가지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중한 서구의 역사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설명에 동의한다, 테러 및 독재 형벌 기관이 레닌주의-스탈린주의 시기 에 사회적-경제적 및 군사적-외교적 해결과제를 유효하게 해결하려는 욕구를 위해 강요됐다는 것, 탄압이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피할 수 없는 대가라는 것을 이해한다.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 исследователи признают, что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террор выполнял целый ряд функций (устрашение ликвидацией реальных и мнимых противников, укрепление большевистской диктатуры, формирование нового общества, очищенного от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раждебных социальных, а также национальных групп), отказываясь от какого-то одного универсального объяснения. Среди серьёзных западных историков многие согласны объяснять террор и всевластие карательных органов ленинско-стали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ынужденным стремлением эффективно решить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е и военно-дипломатические проблемы, видеть в репрессиях неизбежную плату з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ую модернизацию.)

Тепляков, А. Г. "Эпоха репрессий: субъекты и объекты." Между канунами. Истор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России за последние 25 лет. 2013
https://www.elibrary.ru/item.asp?id=24932330
http://rusk.ru/st.php?idar=68533
역사학자들은 고의적 기근설(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을 반박할 뿐이지 기근의 인위적 여부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4.2. 고의적 제노사이드 설(과거의 제노사이드론)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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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로는, 인디언 전쟁 미국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다.)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이라면 ⚖️ 표시.
사건 목록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발생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Reichskolonialflagge.svg.png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홀로도모르 [!]
,1932 ~ 1933,
발생 위치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파슬리 학살
,1937,
발생 위치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제2차 세계 대전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홀로코스트 ⚖️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관련 단체
체트니크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발생 위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발생 위치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동파키스탄
이키자
,1972,
발생 위치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발생 위치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관련 인물
이디 아민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발생 위치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킬링필드 ⚖️
,1975 ~ 1979,
발생 위치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재판
ECCC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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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올쓸라엥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발생 위치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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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무가베
안팔 학살
,1986 ~ 198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재판
안팔 학살/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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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이사크 학살
,1987 ~ 1989,
발생 위치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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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드 바레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발생 위치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국기.svg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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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브레니차 학살
,1995,
발생 위치
파일:스릅스카 공화국 국기.svg 스릅스카 공화국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발생 위치
파일:르완다 국기(1962-2001).svg 르완다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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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1997,
발생 위치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 키부
밤부티인 학살
,2002 ~ 2003,
발생 위치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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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발생 위치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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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바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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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201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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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발생 위치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라카인주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이후엔 제노사이드론 학자들도 '고의적 기근설'같은 개념의 제노사이드설은 주장하지 않으며 대체로 복잡한 개념의 '제노사이드' 개념으로 설명하므로 해당 문단에서 설명하는 제노사이드 논쟁은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이후의 주류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아래의 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은 2010-2020년대 기준으로 Andrea Graziosi 등의 주류 제노사이드론 학자의 개념론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읽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20세기 역사에서도 그 규모가 매우 컸던 기근으로, 이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 대기근은 분명 인재(人災)였으며, 우크라이나 인구의 10%가 희생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또한 스탈린 정부가 이 대기근에 대한 사실을 덮으려고 정부 차원에서 정보 조작을 해 왔음은 역사적 사실이고 특히 우크라이나와 쿠반 지역에 대한 봉쇄 명령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 및 쿠반 카자크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들었다.

라파엘 램킨(Raphael Lemkin)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1)우크라이나의 엘리트의 근절, 2)우크라이나 정교회 청산, 3) 우크라이나의 전통, 음악, 언어 등의 문화의 말살 4) 우크라이나 민족을 해체시키기 위해 타 민족들을 이주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가 맞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 외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집단살해로 인정한 국가들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를 잠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의 주요 기지가 되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적군이 점령해 소련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

대기근 당시 소련의 상황을 묘사한 《Havest of Sorrow》라는 도서에 의하면, 몰수한 식량을 서쪽으로 운송하여 바다에 버리거나 그대로 썩게 방치시켰다는 서술이 있다.

집단화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한 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던 우크라이나였다. 유독 격렬한 농업 집단화에 대한 반발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의 집권 세력으로서는 농업 집단화 완수와 혹시 있을 수 있는 각지의 분리주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 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 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가 "아직도 계란 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말을 할 정도였다.

거기에 스탈린은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젬스트보 산하에서 부를 축적한 쿨라크들을 수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개발과 집산화 과정에 방해되는 존재로 여겼다. 또한 스탈린은 1929년에 부하린과 지노비예프 등 다른 전연방 공산당 간부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일당 독재에 입각한 좌익 전체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불안정한 기반 속에서 다른 간부들을 하나하나 쳐내며 절대 지도자가 된 스탈린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아직 숙청되지 않은 정적들이 스탈린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농업 국가였던 소련을 공업화된 국가로 바꾸기 위해 급진적인 중공업화 정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농업으로 부를 쌓은 쿨라크들을 의도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강제적 중공업화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 지역을 착복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식량 사정을 악화시켰다는 관점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인민을 돌보기는 커녕 수탈한 곡식을 수출하여 강국의 껍데기를 선전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농부가 수확한 식량을 농부에게 남겨줄 최소한의 식량을 남겨주지 않고 전부 가져가버린 것도 한몫했으며 또한 대기근이 일어나기 전에 스탈린 정권이 농촌이 우익적인 풍토를 지향한다며 이를 배격하는 사건이 벌어진적이 있는데, 대기근이 발생할 당시 도시와 촌락 사이에 엄청난 사망자 차이가 있었던 등의 이유로 고의적 방치라는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정책이 실패했으면 시정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에서 최소한의 대처도 마련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스탈린과 소련 정부는 기근에 대한 소식을 공개하는 것을 제한하였고 해외에는 공식적으로 기근이 없다고 거짓말하면서 외국의 원조 제안을 거절하였다. 또한 대기근 당시 소련에서는 예전보다 양이 적기는 하지만 계속 곡물을 수출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소비에트 측은 대기근의 존재를 비밀리에 부치면서 대기근이 극심한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돈강 유역에 대한 출입을 봉쇄하기도 했는데 외부 인사의 유입뿐 아니라 굶주린 농민들이 외부로 나가는 것 또한 통제했다. 이들의 이주나 탈출을 용인한다면 지역이 공동화되어 식량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차를 타고 외부로 탈출하려던 어린이들이 당국에 체포되어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농촌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곧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들이 상당수 거주한 쿠반지역에 봉쇄명령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농촌에서 도시로 기근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나 당시 똑같이 기근이 일어난 카자흐스탄의 경우 60만명의 난민이 성공적으로 기근이 일어난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는 똑같이 기근을 피해 이주하려다 다시 농촌으로 추방당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수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동유럽사의 권위자인 노먼 네이마르크 교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크라이나의 살인적인 기근은 대량 학살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스탈린과 그의 부관들은 1932~33년 소련에 만연한 기근이 특히 우크라이나를 강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죽는 것을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그들은 구호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이 소련의 도시나 다른 곳에서 스스로 식량을 구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너무 늦을 때까지 곡물 배달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기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스탈린의 적대감과 그들의 "가정 통치" 형태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시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집단화에 저항했다는 그의 분노는 살인적인 기근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해당 구절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해당 구절에는 의도적 기근설을 의미하는 문구가 없다.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도 자신의 저서 "피에 젖은 땅: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32년이 저물어가는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과 내부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스탈린은 그의 통치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정당성 없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기로 선택했다. ...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니라 식량 분배였으며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결정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또한 스나이더 교수는 당시의 대기근의 원인이 식량의 부족이 아닌 식량의 분배가 문제였고 스탈린이 이 사태의 최고책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건 위의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무지에 의한 인위성'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티모시 스나이더는 아래의 복잡한 개념의 제노사이드 논쟁에 논문으로서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며, 현재 제노사이드론에서도 티모시 스나이더와 달리 좀 더 진보적이고 복잡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티모시 스나이더의 저서는 그런 복잡한 학계 개념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

4.2.1. 반론

식량이 넉넉한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한 것이라면 당연히 다른 지방의 식량 공급은 원활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서 기아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발생한 시기에 소련의 대외 식량 수출량이 32%로 줄어든 것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집산화 저항에 대한 주장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으로 인한 농업 실패가 대기근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는 주요한 반증이다.[9] 또한 1930년의 추수량은 전년, 즉 1929년 대비 37%가 증가한 전례없는 대풍작이었으며 유례없는 추수량에 고무된 소련의 당 관료들은 곡물 생산 목표치를 매우 높게 잡았으나 1931년 추수는 작황이 좋지 않았고 목표치인 7940만톤보다 6,950만톤에 불과하여 1,000만톤이나 적었다. 무리한 수탈이 지속되지 않으면 당에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할 수 없었고 겨우 1930년과 그럭저럭 비슷한 수준의 추수량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제 1차 5개년 계획에 의해 급속도로 성장하던 도시 인구의 식량 수요량은 매년 15%씩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높았다고 주장되는 수탈량은 사실은 오히려 불충분한 양이었다.

4.3. 소련 추종자들의 역사왜곡: 우크라이나인 원인설, 스탈린 미화

2010년대 이후 학계에서 완전히 폐지된 주장으로 '우크라이나인 원인설'이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쿨락들과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사보타부자와 테러가 기근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2010년대 이후엔 Arch J. Getty 같은 대숙청 수정주의자들조차도 주장하지 않는다.

202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런 왜곡을 일삼는 주요 세력은 로자 룩셈부르크 마이너 갤러리가 있다. 이들이 전문가라 주장하며 인용하는 출처란 그로버 퍼(Grover Furr)라는 교수의 서적인데, 정작 그로버 퍼라는 교수는 중세 영국 문학 (Medieval British Literature ) 분야 전문가라 소련 분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소련의 범죄를 옹호하는 측은 Arch J. Getty 같은 대숙청 수정주의자 학자의 논문조차 인용하지 못하고 중세 영국 문학 전문가의 주장을 반론 자료로 인용한다.

5. 특성과 개념으로서의 '제노사이드' 논쟁 (2010년대 이후 논쟁)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제노사이드' 논쟁의 개념이 변화됐는데 이 이후로 제노사이드란 '고의적 기근설'이나 민족말살 같은 원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개념론으로서의 제노사이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매우 복잡한 언어적, 인문학적 개념이 포함된 논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론은 부차 학살 이후 학계에서 다시 주목됐다.

논쟁의 논점은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정의에 가해자의 민족학살 의도성을 따져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10]

1929년 제1차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집산화가 실행되자 활동가들과 청년들 적군(Red Army)의 고참 병사들이 당의 지역기관에 의해 지방으로 전파됐다. 1929년 10월 초 7.5%의 농민들이 콜호스에 가입했고, 이에 따라 대중적인 집산화 운동이 전개됐다. 1932년에서 1933년 무렵까지 소련 공산당은 10%의 집산화 목표를 계획했고 1930년 1월 우랄이나 볼가 하류 그리고 중앙 볼가 지역에서는 이미 39%에서 56% 사이의 집산화 비율을 기록했다. 이 집산화 과정에서 반쿨락 운동이 수반하여 일어났는데, 쿨락들의 토지는 몰수되고 때때로 추방됐다. 이것이 빈농과 부농 사이의 계급투쟁 첫 단계였다. 1930년 콜호스에서 일했던 한 학생은 미국 시민 힌두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노사이드 개념 찬성측: 제노사이드 개념정의에 가해자의 '민족학살' 의도여부는 무관하다
Andrea Graziosi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또한 '기근'(어떤 기근?)이 잘못된 관리와 집단화의 실패 또는 의식적인 계획의 결과인지 묻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히 전자의 산물인 1931~4년의 일반 소비에트 '부족의 시기'를 정치적, 경제적 선택의 결과인 홀로도모르와 카자흐스탄의 비극과 같은 특정 기근과 혼동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우크라이나 소작농들이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죽었는지 아니면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죽었는지 따지는 행위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둘 다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수가 죽었고, 그들과 함께 Shtetl 유대인과 같은 다른 국적의 구성원이 몇 명 이상 죽었다. 1937-8년 테러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범주 기반의 대량 작전'도 정확할 수 없고, 스탈린이 분명히 말했듯이 '나무가 베이면 칩이 날아간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I also find it misguided to ask whether the ‘famine’ (which famine?) was the result of mismanagement and failure of collectivisation or of a conscious plan. This means going back to confusing the general Soviet ‘time of scarcity’ of 1931–4, certainly a product of the former, with specific famines, such as the Holodomor and the Kazakh tragedy, which were the result of political and economic choices. And I find it problematic to ask whether Ukrainian peasants died because they were Ukrainians or because they were peasants. They died in such numbers because they were both, and with them died more than a few members of other nationalities, such as Shtetl Jews, also because – as the story of the 1937–8 Terror indicates – no ‘category-based mass operation’ can be precise, and ‘when woods are cut, chips fly’, as Stalin apparently loved to say.
Graziosi, A. (2018). The National and the Social in Stalin's Political Famin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474. DOI: https://doi.org/10.1017/S096077731800036X
Andrea Graziosi는 우크라이나 소작농들이 우크라이나인이라서 죽었는지,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죽었는지 따지는 행위가 문제라고 생각하며, 제노사이드 여부에 중요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Alexander Etkind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대 학자들은 소련-우크라이나 기근의 의도적 특성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새로운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정량적 연구는 소련 우크라이나의 국경 내에서 1932~33년 기근이 우크라이나 민족에 의해 불균형적으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크라이나인의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초과사망률이 높다. 이 강력한 결론은 홀로도모르의 선택적이고 의도적이며 민족적으로 정의된 성격에 찬성하는 가장 심각한 주장이다. 그러나 다른 제노사이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수사학은 실체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다. 스탈린 정권은 이 가능성이 있는 제노사이드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차이점에 대해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푸틴 정권은 더 이상 세부 사항을 공유하지 않았다.제노사이드 문제에서는 대량살인과 관련된 사소한 차이점이다.
Contemporary scholars still debate the intentional character of the Soviet-Ukrainian famine.22 Recently, quantitative research based on new sets of archival data has demonstrated that within the borders of the Soviet Ukraine, the 1932–33 famine disproportionally hit areas populated by ethnic Ukrainians. The higher the proportion of Ukrainians in a district, the higher the excess mortality.23 This robust conclusion is the most serious argument in favour of the selective, intentional, ethnically defined nature of the Holodomor. But like in other cases of genocide, its rhetoric was far behind its practice. Stalin’s regime was not very articulate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Ukrainians and Russians that could possibly have directed this genocide; as we will see, Putin’s regime has not shared any more details. In the issue of genocide, it is minor differences that are connected to mass murders.
Alexander Etkind (2022): Ukraine, Russia, and Genocide of Minor Differences, Journal of Genocide Research, 6.

보다시피 제노사이드라 정의하는 측도 '우크라이나를 명확히 정의해서 제노사이드를 지시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개념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제노사이드의 실행은 반드시 해당 민족에 대한 말살을 지시하거나 가해자들이 해당 개념을 인지했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고 적지 않는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개념의 논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뿐 아니라 부차 학살 같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우크라이나인 학살에도 적용되는 매우 복잡한 개념론이다.
제노사이드 개념 반대측: 제노사이드 개념정의에 가해자의 '민족학살' 의도여부가 중요하다
J. ARCH GETTY는 ANDREA GRAZIOSI의 개념정의에 반대하며 '제노사이드 논쟁에 의도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제기된 스탈린 제노사이드의 문제는 의도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나는 기근이 잘못된 관리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제노사이드 계획에서 비롯되었는지 묻는 것이 '잘못된 이해'라는 Graziosi의 믿음이 어리둥절하다. 이것이 사실 이 문제의 주요 질문이 아니었나? 나는 이것이 의도적인 제노사이드인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라고 이해하며 의도의 문제가 그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본다.
The question of a purported Stalin genocide, as it has been posed, must be a question of intention. I am thus mystified by Graziosi's belief that it is ‘misguided’ to ask whether the famine resulted from mismanagement or from a conscious genocidal plan. Isn't that in fact the main question here? I understand the debate to be about whether or not this was purposeful genocide, and the question of intent would appear to be at the center of that question.
Getty, J. A. (2018).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451.
물론 제노사이드론 개념에 반대하는 J. ARCH GETTY도 우크라이나 농민들에 대한 대량사망이 스탈린 정권에 의한 인위적인 결과라는 점은 인정하고 스탈린을 비난하는 건 물론 가능하다(Of course we can)고 말하고 있으므로 스탈린에 대한 옹호에 사용할 수는 없다.

6. 참혹한 실상

영국 기자 가레스 존스는 1933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대기근의 현장을 접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폭로했는데 당시 모스크바 주재 서방 기자들은 대체로 친소 성향이라 이들은 존스의 취재가 거짓, 과장되어 있다고 방해했고 결국 그의 기사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존스는 끈질긴 노력 끝에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기사를 올리긴 했지만 곧바로 친소 기자 중 한 명이었던 뉴욕타임즈의 월터 듀런티[11]가 반박 기사를 냈다. 이후 존스는 소련 입국 금지를 당했는데, 1935년 내몽골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유족들은 이를 소련의 공작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존스의 취재가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존스는 재평가받고 존스와 그의 취재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던 월터 듀런티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한 언론인의 수치로 평가받게 되었다.[12] 결국 2003년 월터 듀런티에 수여된 퓰리처상의 재심이 이뤄졌고 이에 뉴욕 타임즈는 월터 듀런티가 스탈린 인터뷰 등 소련 취재물 연재를 위해 거짓을 보도했다고 사과했지만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모든 업적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없었으므로 상이 박탈되지는 않았다. 2019년 12월에는 개리스 존스와 위 일화를 다룬 영화도 개봉했다. 작품명은 ' 미스터 존스(Mr.Jones)'다.

소련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인 《차일드 44(Child 44)》의 도입부에서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의 본문에 따르면 '개미나 곤충 알이 있을까 싶어 흙덩이를 깨무는' 수준이었고 '나무껍질을 씹다가 잇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소설의 본문에서 이 대기근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 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 버렸다."

1937년 이 지방을 다녀온 미국인 사진 작가가 말하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유색인종 아이들이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으로 을 뜯어먹는 걸 여럿 보았지만 백인 아이들이 똑같은 꼴로 풀을 뜯어먹는 걸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봤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우크라이나의 평균수명은 무려 남자 7세, 여자 10세.(!!!) 어느 정도냐면 르완다 내전 당시 르완다, 킬링필드 당시 캄보디아 평균수명이 우크라이나의 2배 가량 되는 14세였다!

1933년 1월 초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몰도바의 7개 지역에 기근이 찾아왔다. 최초 보고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중부 체르카시와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영양부족 사태와 기근이 발생했다. 2~3월에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중동부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주와 키예프에서 장티푸스와 말라리아가 창궐하기까지 했다. 최초 발생일로부터 6개월 만에 기근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북부 체르니히우까지 확대되었다. 3월에 이르자 우크라이나 집단농장의 절반은 곡물 배급이 중단되고 우크라이나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기근을 맞이했으며 결과적으로 1933년 말까지 우크라이나 인구의 10~25%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태 직후 현지의 한 조사에 따르면 대기근 희생자는 기근이 한창일 당시에 약 480만이었는데 최근에는 그 숫자를 500만에서 1,000만까지 추산하고 있다. 심한 지역은 하루에 분당 17명씩 약 25,000명이 죽어나간 경우도 있었으며 33개 지역에서 식인 사례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당시 우크라이나 곡물 징발 담당이었던 몰로토프의 70년대에 회고한 것에 의하면 그정도면 참사 피해를 자신이 목격했거나 보고 받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사실이 없고 오히려 볼가강 유역의 대기근이 심각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폴란드 제2공화국 루마니아 왕국의 국경 지대에서는 탈출하려다 사살당한 농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것도 대부분 루마니아군, 폴란드군이 아니라 소련군의 총격에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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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여자들이 죽었다. 가장 끔찍한 광경은 꼬마들이었다"고 한 당 활동가는 썼다. 굶주림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자취를 깡그리 앗아갔고 그들은 고통받는 괴물을 닮아갔다. 두 눈에만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엎드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얼굴과 배는 부풀어 오르고 두 눈은 멍했다.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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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는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비 지하의 기념관이 있다. 또한 추모비 앞에는 이삭을 소중히 잡고 있는 맨발의 앙상한 소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 매년 11월 넷째 토요일에 우크라이나 장관들이 와서 곡물을 뿌리면서 굶주림으로 죽어간 넋들을 기린다고 한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이 동상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였다.

7. 이후의 전개

여하간 대기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자체에 대한 차별은 심각했기에 독소전쟁이 터진 뒤 독일 국방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다른 지역들과 달리 주민들이 '우리의 해방자'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들고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물론 새로운 지배자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환영의 열기도 다 사그라졌다. 이 때문인지 독일군이 소련 주민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조금만 자제했어도 우크라이나 등 수많은 소련 국민들이 줄줄이 독일 편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자신들 스스로를 망친 셈이다. 하지만 이들 중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홀로도모르와 대숙청을 전후하여 이미 다 사라진 후라 전쟁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스탈린은 이 사태에서 뭔가를 배우기는커녕 소련의 식량 상황을 더욱 나쁘게 했다. 이 때 대두되던 인물이 바로 트로핌 리센코였기 때문이다. 리센코는 스탈린의 지지 아래 우크라이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인재는 자신밖에 없다고 설치고 다녔으며 바빌로프 같은 학자들이 서방의 부르주아 학문을 들여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하였다고 공격했고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 바빌로프와 그를 따르던 유전학자를 수용소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결국 소련의 농업은 회생 불가능할 수준으로 퇴보했으며,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식량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나마 1950년대 이후에는 소련이 이전처럼 고립되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기근은 없었다지만 어찌되었던간에 엄청난 국토를 지닌 것과는 별개로 상당한 외화를 곡물 수입에 써야 했고 소련 농산물 생산에서 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해졌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농업 생산성 하나만큼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원래 동유럽에서는 농업 기술 발전이 늦어지고 농노제가 오래 유지되었던 데다가 농민들이 수확한 밀을 수출해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입하던 역사의 영향으로 부드러운 흰 빵, 육류, 낙농, 채소 같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고위층에 한정되었다. 중산층 이하 일반인은 호밀 등으로 만든 거친 검은 빵과 '카샤'라는 죽 중에서도 재료가 저렴한 것만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지만[13] 이 기근으로 더 심각해졌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전투식량을 보면 주 품목은 돌덩이 이나 날감자, 청어 머리 같은 것으로 맛도 없고 단단해서 먹기도 고역인 물건이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계란 따위는 귀중품이었다.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계란을 하나씩 짚을 이용해서 정성들여 묶은 것이 큰 선물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흐루쇼프가 집권하기 전인 1950년대 초반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존재했다. 그나마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크림 반도를 떼어서 우크라이나에 주는 등 거의 노골적으로 고향을 우대한 덕분에 반감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고,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사태는 그제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로서는 행정구역 변경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괜찮은 방법이었지만[14]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차라리 물자나 투자를 퍼 주었다면 모르지만 땅과 인구도 함께 퍼 주는 바람에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부터 문제가 생겼고 유로마이단을 통해 2014년부터 격렬하게 불타오른 우크라이나 민족 갈등의 불씨를 심었다.

8. 다른 지역에서의 피해

1932~1933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만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본 문서 맨 위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 보로네시, 돈강 하류 등 러시아 남부(혹은 북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도 큰 피해를 입었다. 구자정 교수의 경우는 '러시아를 포함한 소련 전역의 농업 중심지에 피해를 줬다'고 보기도 한다. 숫자 자체로만 보면 러시아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으로도 보는데, 피해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서 제대로 집계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8.1. 카자흐스탄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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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희생자 추모비.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당시에는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기근은 홀로도모르보다도 더 참혹했다고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보통은 150만 명 이상, 많이 잡으면 230만 명 정도지만 인구 비율로 따지면 카자흐스탄의 피해가 우크라이나보다 심각한데 카자흐스탄 인구의 1/3이 말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들이 이 기근의 주요 희생자였는데 카자흐인 희생자는 약 130만 명, 카자흐인 민족의 약 38%가 사망했고, 60만여명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소련을 떠났다. 당시 카자흐스탄을 떠난 카자흐인들 중에 신장성 동북부 일리강 동부 유역으로 이주한 인구도 많았는데, 1940년대 중국국민당에서 이들에게 무상으로 말을 징발하자 당시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카자흐인들이 즉각 봉기하였고 이는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들은 유목 문화를 유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유목민들이 순순히 가진 가축을 다 내놓고 하루아침에 비좁고 더러운 목화공장에 들어가서 일할 리도 없고 농업집산화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축을 다 잡아먹다[15] 엄청난 참극을 겪은 것이었다.

출산율이 높았을 시점이라 인구 복구가 비교적 빨랐음에도 카자흐인들의 인구는 1937년 281만 명으로 1926년에 비해 1/3이나 감소해 버렸고 카자흐인의 민족 공동체/민족 문화가 아예 뿌리뽑혀 버리다시피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카자흐인의 인구는 우즈벡인과 비슷했지만 대기근이 카자흐스탄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지며 카자흐인의 인구가 우즈벡인에게 훨씬 뒤쳐지게 되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 자리를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 고려인들로 채워 버렸다.

1919~22년의 전시 경제 체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아직 인구 손실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로 대기근이 닥쳐 카자흐스탄 인구가 혁명 이전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리자 소련 당국은 인명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러시아인을 대거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고 그 결과 카자흐스탄 내 카자흐인과 러시아인의 인구 비율이 역전되어 버렸다. 이후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인의 나라'라는 뜻의 국명과 달리 1988년까지 러시아인의 인구 수가 카자흐인보다 더 많고 1990년대까지도 非카자흐인이 인구의 과반을 점하는 인구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의 대기근은 카자흐스탄의 농업집단화를 주도해 대기근을 불러일으킨 서기장 필리프 골로쇼킨(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의 이름을 따 골로쇼킨 제노사이드(Голощекиндік геноцид / Goloşekindık genotsid)라고도 한다.

여담으로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이슬람 극단주의를 제어할 목적으로 스탈린이 고의로 일으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게시물이 한국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 하지만 카자흐인들이 농업 집산화에 저항한 이유는 이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말과 양 같은 가축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데 상식적으로 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이방인들에게 가진 가축을 다 내놓고 비좁은 목화 공장에서 일하라고 시키면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퇴치 운동을 시행했던 지역은 캅카스 아제르바이잔 다게스탄 일대,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부하라 등등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16] 참고로 우즈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과는 다르게 대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우즈벡인과 카자흐인의 인구는 1930년대 초반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대기근이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며 카자흐인의 숫자가 크게 줄었고, 그 결과 우즈벡인이 카자흐인보다 훨씬 많은 인구수를 지니게 되면서 이는 현재에 이른다.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고의적인 학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자료들도 있다. 이들의 논리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고 러시아 공산당과 이후 전 연방 공산당으로 계승됐다. 1922년 이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자진 해산으로 인한 결과, 소련 전국에서 정당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전 연방 공산당(볼)은 집산화와 산업화, 문화 혁명에 대한 노선을 정립했다.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은 인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기 위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둘째, 기근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계획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유목민들: 카자흐스탄 정부와 기근(Stalin’s Nomads: Government and Hunger in Kazakhstan)≫의 저자인 독일의 역사학자 로베르트 킨들러(Robert Kindler)는 1930년대 기근이 비록 참혹했던 결과에도 불구하고 제노사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지도부는 특정 “소비에트” 민족들(우크라이나인, 카자흐인 등)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카자흐스탄의 기근은 단순히 1930년대 초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여러 기근들이 있었고, 대표적으로 적백내전기인 1921년과 1922년에도 심각한 기근이 있었다. 역사학자 이고르 쁴할로프(Igor Pykhalov)는 기근이 러시아 제국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했고[17],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도 만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기에 이르러 이전 시대까지 만성적으로 일어났던 기근은 명실상부하게 자취를 감췄다. 대규모 기근은 1921년 내전 이후와 1932-33년, 대조국전쟁 종전 이후 1947년에 세 차례에 걸쳐 출현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들어 카자흐스탄 대기근 또한 공산당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이 견해이자 주장이다. 1932-33년 카자흐스탄 기근은 집단 학살이었는가?

1990년대 이후의 카자흐스탄에서 기근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높아지고는 있고 실제로 추모 기념물도 세워지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처럼 첨예한 정치적 쟁점화는 되고 있지는 않는데 이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가 북부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따로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을 걱정하다 보니 일부러 그런 것이다. 사실 조상 대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라는 비슷한 비극이 있었던 우크라이나계 카자흐스탄인들도 언어·문화적으로 러시아화가 상당히 진행돼서 러시아계에 묻어가는 경향이 강할 뿐더러 일단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민족의 일이다 보니 카자흐스탄 대기근에 대해서는 굳이 부각시키는 일이 없는 편이다.

8.2. 타타르스탄 대기근

홀로도모르보다 10년 앞선 시기인 1921년부터 1922년까지 타타르스탄(당시에는 타타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기근이다. 1921~1922년 당시는 1932년과 마찬가지로 소련 전역에서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했지만 그 중에서도 볼가강 유역 타타르스탄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었다. 이 대기근은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황폐화에 농장을 재국유화하는 정책에 따른 농민들의 반발로 농업생산량이 혁명 이전보다 감소했고 거기에 기록적인 가뭄까지 겹치면서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으며 기근의 틈을 타서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까지 겹치며 소련 전역에서 사망자가 약 500만 명가량 나왔는데, 그중 10~20% 정도가 타타르스탄에서 나왔다.

타타르스탄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사망하고 13%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희생자 규모는 50만여 명에서 200만여 명 사이로 추정하는데, 주로 볼가 타타르인이나 볼가 독일인이었다. 당시 소련 상황이 워낙 만신창이였던 관계로 기아 희생자의 규모가 더 커질 수도 있었으나 해외에서 구호 식량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피해 규모가 감소하였다고 한다.[18]

당시 대기근 역시 1차대전 이후 소련의 반독감정으로 인한 독일계 러시아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였는지 관련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소련 수립 직후 세계 열강들이 소련을 불법정권으로 취급하고 무역을 거부하면서 타타르스탄의 무역이 타격을 입고[19]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을 수탈, 운반하던 볼셰비키들이 비교적 소출이 많고 부유했던 독일계 농민들의 농작물을 집중적으로 뜯어가면서 피해 규모가 더 늘어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10년 뒤 일어나는 대기근의 전초전에 해당하는 참사였다.

당시에 내전과 기근의 여파로 볼셰비키 세력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지역조차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기근 극복을 위한 신경제정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펼쳐졌을 때 '볼셰비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은? 볼세비즘는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는 시골에 식량이 없다'는 농담이 나돌았다.

9. 사과 및 보상 요구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게 스탈린이 저지른 이 만행에 대한 사과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련과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게 저지른 만행임을 인정하나 우크라이나에 피해 보상을 거부해 왔다.

2022년 12월 15일, 유럽의회는 홀로도모르를 소련에 의해 자행된 학살로 규정했다. #

10. 기타

  • 당시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가 있다. 당연히 이 당시 소련 정부는 충격을 받아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의 소련 경찰과 군대에게 식인 행위를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인육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인육을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이것을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소련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잡아먹힐까봐 우크라이나로 방문할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20]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21]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서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특히 살아 있는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받는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서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아이들과 여자 55명을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하였다. 다만 그 당시 워낙 흔했던 일이라서 이것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Ghoul이라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현장의 어떤 마을로 간다는 내용의 페이크 다큐 영화가 있다. 배경은 위에서 서술한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태어났다는 설정의 마을인데 치카틸로의 형 스테판이 대기근 당시 사람들에게 잡혀 먹혔다는 설정을 가지고 이어나가는 영화이다(이건 후반부에 나온다). 내용은 말할 것 없이 대기근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한 마을로 가면서 시작된다.[22][23]
  • 하도 굶주림이 심하다 보니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하며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 좀비 영화 랜드 오브 데드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 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PTSD는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기만 했을 때에도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보통 좀비 영화는 전염 과정에서 식인 장면이 꼭 따라오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 대기근 당시에 농민들의 반발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자 인민을 지킨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학살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에 군인들 사이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감이 생겼고 공산당원인 군인들 중 일부가 당에서 스탈린에게 노골적으로 반대하거나 반대표를 던졌다. 이게 스탈린을 자극해서 군부를 대숙청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이 시기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사진들 중 다수는 전시 공산주의에 의해 발생한 1921~22년 대기근의 사진이다.
  • 2006년 이후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은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이 되었다.

11. 창작물에서

  • 2019년 HBO의 체르노빌 5부작에서도 피난을 거부하는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언급한다.
  • 2019년 당시 대기근을 취재 조사한 영국인 기자인 가레스 존스를 소재로 한 영화 미스터 존스가 만들어졌다.
  • 2016년 Bitter Harvest가 개봉했는데 대한민국에는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VOD가 풀렸다.
  •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해당 대기근이 은유되는데 돼지 나폴레옹이 달걀을 팔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여 달걀을 부수고 저항하는 닭들을 굶겨 죽이는 내용이 나온다.

12. 같이 보기



[1] 노랑: 감소하지 않거나 증가
연주황: 1~14.9% 감소
주황: 15~19.9%% 감소
진한 주황: 20~24.9% 감소
빨강: 25% 이상
[2] 철자는 같지만 읽기는 다르다. 우크라이나어로는 '홀로도모르', 러시아어로는 '골로도모르' [3] 우크라이나 지역은 지표면 아래 1.5m까지 차 있는 초르노젬(Чорнозем, 흑토) 덕분에 막말로 씨만 뿌려도 농사가 되는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 팜파스, 중국의 둥베이와 함께 세계적인 옥토로 꼽힌다. [4] 러시아의 옛 질량 단위로 (1899년 이후) 1푸트는 약 16.38kg에 해당한다. 200푸트면 거의 3,200kg에 달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그 많던 고기도 얼마 안 가서 다 없어졌다. [5] 이런 협동농장화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가진 재산을 파괴하거나 팔아 버리거나 소비해 버리는 일은 이후에 마오쩌둥 주도로 공산화된 중국에서 반복되었다. 중국에선 위에서 언급된 가축 도살뿐만 아니라 숲 전체를 베어 팔아 버리고 집까지 부숴서 벽돌로 만들어 팔아 버리는 등 저항이 이어졌고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6] 스탈린 옹호자들은 해당 내용들을 '집산화 과정에서 일어난 정책실패'나 '집산화 과정의 의도치 않은 기근설'이라는 내용으로 왜곡하려고 시도하나 아래 논문들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7] 물론 그 수정주의란 것도 1980년대 이야기다. [8] 아치 게티는 대숙청에 대한 80년대 수정주의로 유명하지만 단 한번도 스탈린의 테러를 옹호하거나 긍정한 적이 없다. [9] 그렇다고 스탈린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연히 저항으로 인한 농업 실패도 독재자인 스탈린에게 궁극적 책임이 있다. [10] 참고로 ICC 규정 등 국제법에서 제노사이드 여부를 논할 때는 반드시 "인종/종교/성별 등 특정 집단"을 "고의적으로 멸절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따져야 한다. [11] 그는 소련 취재 연재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스탈린을 직접 인터뷰하기도 한 당대 최고의 스타 기자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과 소련 정부는 듀런티를 비롯한 서방의 친소 성향 소련 주재 기자들을 '관리'하는 것을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중대 업무로 생각했다. [12] 그러나 듀런티가 진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실제로 듀런티는 당시 소련 정부 측의 가이드가 안내하는 루트를 위주로 취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 정부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한 듀런티에게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는다. 2019년 영화 미스터 존스에서 듀런티는 아예 소련의 성접대를 받는 것으로 나온다. [13] 러시아는 소련 붕괴 후에는 곡물 생산이 소련 이전 시절로 회복되긴 했지만 토지의 비옥도가 낮다 보니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농산물의 품질이 낮은 편이다. 2014년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제재를 한것에 푸틴이 빡쳐서 미국, 유럽산 농수산물 수입을 금지했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반발이 심했으며 유럽산 치즈와 버터 밀수가 한동안 활개를 쳤다. [14] 다만 흐루쇼프로서는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의 성장세는 괜찮았기에 앞으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취지(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의 발언도 했던 사람이었기에 흐루쇼프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기는 하다. [15] 당시 카자흐스탄의 가축 대다수사 농업집산화 저항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통계상으로도 나타난다. 기근 전후로 양, 말, 소 사육 두수가 40~100% 감소하였다. [16] 소련 초기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일대에서는 파란자 퇴치 운동 및 바스마치 봉기 진압 등이 일어났다. [17] 그러나 러시아 제국 시대에 주기적으로 기근이 일어났다는 건 거의 설득력을 잃은 주장이다. 데이비드 문(David Moon), 스티븐 호치(Steven hoch), 보리스 미로노프(Борис миронов) 등의 전문가들은 타타르의 멍에, 혼란 시대 같은 암흑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런 암흑기의 주요 원인이 전국가적 기근이었다)나 나폴레옹 전쟁, 세계대전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제정 시대의 기근들은 지역적이었고 전국가적 기근은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사실 제정 러시아의 농민 빈곤이나 기근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소련 학자들이나 제정 러시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는 서방 학자들에 의해 지나친 프레임화가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18] 이때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가 지원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인도적인 지원과 대형건설사업 지휘로 유능한 관료로 이름을 높였고 미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나중에 대통령직에까지 오른다. [19]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소련이 고의로 그랬다고 보기는 힘들다. [20] 위의 포스터 내용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녀를 잡아먹어서 체포된다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이해가 안 간다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왜 돌아다녔는지를 생각해보라. [21] 산 아이를 죽여서 먹으면 살인죄가 되지만 기아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먹는 것은 식인은 될지언정 살인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22] 제작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대기근 당시의 내용들과 치카틸로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스테판을 하나로 엮어서 영화랍시고 만든 고인드립 쓰레기급이다. 우크라이나를 무슨 동남아 오지의 문명의 해택도 못 받고 대기근을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묘사해 버린 게 악의적으로까지 느껴진다. [23] 하지만 딱히 우크라이나 전국민 자체가 화낼 영화는 아닌 게 구울이란 영화에서 식인을 하는 등 나쁘게 표현되는 건 대기근 당시 식인을 한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다. 당시 식인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엄밀히 따지면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라 영화에 화를 낼 이유는 없는 셈이었다. 영화 속에서 식인을 한 사람에 대해 나쁘게 표현되는 모습들에 화를 낼 사람이 있다면 대기근 당시 식인을 한 사람들 정도일 텐데 이 경우도 본인이 식인을 해서 그걸 모티브 삼아 식인을 했다는 식으로 영화 속에서 나쁘게 표현되는 걸 뭐라고 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리고 인터넷에 구울이란 영화를 검색해서 줄거리를 보거나 영화를 직접 감상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악의적인 영화는 아니다. 줄거리를 대충 설명하자면 미국인 3명이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의 카니발리즘(식인 행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대기근 당시 실종자가 가장 많았던 도시로 가서 최후의 생존자라고 알려진 사람과 인터뷰를 하려고 하는데 실수로 50명 이상을 죽인 연쇄살인마에 식인마인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악령을 깨워 버려서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다는 줄거리의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B급 공포 영화며 그다지 악의적인 영화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