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21:57:19

구스타우 후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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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슬로바키아의 국영방송 RTVS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슬로바키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밀란 라스티슬라우 슈테파니크 루도비트 슈투르 안톤 스르홀렉 안드레이 흘린카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알렉산데르 둡체크 구스타우 후사크 요제프 가브리크 페테르 사간 유라이 야노식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마리카 곰비토바 요제프 크로네르 얀 쿠치악 앤디 워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요제프 라즈 파볼 데미트라 오렐 스토돌라 모리크 베노프스키 마렉 함식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우 마리아 테레지아 밀란 라시카 요제프 데크레트 마테요비에 실베스터 크르치메리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슈테판 바니치 페트라 블로바 슈테판 크비에틱 스탠 미키타 요제프 무르가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밀란 루퍼스 얀 예센스키예세뉴스 미할 도콜로만스키 스타니슬라프 슈테프카 로베르트 피초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율리우스 새틴스키 유진 서넌 아델라 빈체 프란티셰크 디바르보라 요제프 톰코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온드레이 네펠라 얀 카렐 마틴 벤카 야로슬라우 필립 유라이 야코비스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프리비나 로베르크 베자크 가보 젤레나이 율리우스 판티크 빈센트 흘로즈니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이베타 라디초바 블라디미르 주릴라 슈테판 노살 라스티슬라우 추디크 안드레이 키스카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존 크리소스톰 코렉 안톤 베르놀라크 안드레이 단코 카타리나 콜니코바 미쿨라시 주린다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마테이 흐레벤다 보리스 필란 페테르 슈타스트니 스바토플루크 1세 이반 크라이체크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블라디미르 크르치메리 페테르 드보르스키 미로슬라우 라이차크 임리히 카르바시 파볼 도브신스키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밀란 호자 밀란 치치 카밀 페테라이 마테이 벨 미할 코바치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에밀리아 바샤료바 미쿨라시 갈란다 카롤 두초프 사모 찰루프카 카롤 폴라크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페테르 본드라 요제프 골론카 데조 우르시니 아나스타샤 쿠즈미노바 미로슬라프 샤탄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루돌프 슈스터 라디슬라우 메드난스키 바브로 슈로바르 안드레이 바비시 미로슬라프 트른카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류드밀라 포자보린스카야 마투시 차크 트렌치안스키 로만 칼린스키 안드레이 슬라드코비치 두산 유르코비치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이반 벨라 요제프 베드나디크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에바 시라카 미로슬라프 발레크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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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체코슬로바키아 제9대 대통령
구스타우 후사크
Gustáv Husák
파일:후사크.jpg
출생 1913년 1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現 슬로바키아 두브라우카)
사망 1991년 11월 18일 (향년 78세)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브라티슬라바
(現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묘소
재임기간 제9대 대통령
1975년 5월 29일 ~ 1989년 12월 10일
서명
파일:구스타우 후사크 서명.svg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역임한 인물이다.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ácia) 과정에서 프라하의 봄에 의한 자유화 조치를 대부분 취하했으며,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밀로시 야케시(Miloš Jakeš)에게 정권을 넘기고 은퇴했다.

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포조니히데쿠트(Pozsonyhidegkút)[1]에서 출생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가 1918년에 독립하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으로 체코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 되었으며, 슬로바키아에는 요제프 티소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탄생했다. 후사크는 티소에 반대하는 슬로바키아 저항운동에서 활동했고 소련이 해방점령한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 경력과 공산당원임을 이용해서 중앙 정부에 들었갔다.[2] 그러나 1950년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주도한 반스탈린주의자 숙청에 걸려서 목숨만 건진 채로 1963년까지 당에서 제명되었다.

한편 안토닌 노보트니가 이끄는 스탈린주의자 그룹은 흐루쇼프가 주도한 탈스탈린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억압적인 행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체코우월주의를 주장해서 슬로바키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슬로바키아 공산당과 대립하였다. 결국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은 개혁파가 둡체크를 수반으로 당내 혁명을 일으켜서 노보트니를 은퇴시키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때 후사크도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당내 강경파들의 압박으로 종래의 알렉산데르 둡체크 지지를 그만두었고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후사크는 혁명이 실패하자 재빨리 태도를 바꿔서 보수파의 거두가 되었으며 소련군에 전적으로 협조하면서 스보보다를 대통령으로 올리고 자신이 서기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후 정상화 정책을 통해서 민주화, 자유화 분위기를 억압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충실한 바르샤바 조약의 일원으로 남겼다.

반면 국내의 반소 자유화 운동을 억압하는 동시에 후사크는 소련을 압박해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 내었으며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실망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서 브레즈네프의 소 거래(little deal)[3]를 본뜬 3H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는 70년대의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루어내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하지만 국내의 반체제 운동을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았고 헬싱키 선언의 준수를 요구한 지식인들의 선언인 77헌장이 발표되고 80년대 들어서 경제가 다시 침체된데다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며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자 후사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후사크 개인의 건강도 썩 좋지 않던 상황이었다.[4] 후사크는 소련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것과 상관없이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려했지만 89년 벨벳 혁명이 일어나자 당에서 제명, 야케시에 정권을 넘겨주고 은퇴하였다. 물론 공산정권도 곧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후사크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배신자로 취급받으며 평가가 좋지 못하지만 후사크 실각 이후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보다는 사정이 낫다고는 해도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격은 영향으로 인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노년층을 중심으로 향수를 가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체코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보헤미아 모라비아 공산당이 상당한 득표율을 획득하기도 했다. 다만 2010년대 후반에는 지지층들이 대거 ANO 2011로 흡수되면서 세가 악화되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1] 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주 두브라우카(Dúbravka). [2] 정확히는 체코슬로바키아가 1945년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퍼센트 거래(percentage deal)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대통령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으로 존속했었다. 하지만 베네시는 뮌헨 협정 때문에 친소파였고, 1948년 총선에서 부진할것으로 예측되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하에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총리직을 고트발트에게 반강제로 넘겨줬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3] 1970년대 들어서 현실사회주의권의 성장이 서방을 추월하지 못함이 분명해지고 오히려 사회분위기가 과도하게 보수적이고 침체되자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석유나 자원을 판 돈으로 서방의 경공업 제품이나 사치품을 사서 복지를 확충하는 정책이다. 즉 정부는 인민들에게 여러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폭넓게 제공하고 인민들은 그 대가로 공산정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1970년대 동구권의 전성기를 열었으나 현실은 미래를 담보로(외채문제) 경제적 위기를 방치한 땜방용 조치였기 때문에 80년대 말 공산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4] 후사크는 담배를 빽빽 피어대던 골초였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당뇨병으로 인해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했다. 다만 눈의 경우에는 수술을 받으면서 어느정도 회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