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7:21:24

라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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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총리
아유타야 왕조 · 톤부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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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마 1세.jpg
왕호 푸타욧파 쭐랄록
(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1])
마히돈
통두앙(ทองด้วง[2])
출생 1737년 3월 20일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
사망 1809년 9월 7일 (향년 72세)
시암 왕국 방콕
재위 기간 시암 국왕
1782년 4월 6일 ~ 1809년 9월 7일
부모 아버지 통디(ทองดี) (1711~1768)
어머니 다오레웅(ดาวเรือง) (?~1743/1745)
배우자 아마린트라(อมรินทรา) (1737~1826)
후궁 43명
자녀 슬하 21남 21녀
적장자 푸탈릇라 나팔라이 (1767 ~ 1824)
종교 상좌부 불교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톤부리 왕조의 장군2.3. 짜끄리 왕조의 왕
2.3.1. 재위2.3.2.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2.3.3. 죽음
3. 자녀4.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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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태국어: พระ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 영어: Phra Phutthayotfa Chulalok
1737년 3월 20일 ~ 1809년 9월 7일

태국 짜끄리 왕조의 초대 국왕.

원래 톤부리 왕조의 국왕 딱신의 휘하에 있던 장군이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통두앙(라마 1세의 아명)은 1737년, 보롬마꼿 왕의 통치하에 있던 아유타야 왕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유타야 왕국의 하급 귀족이었고 많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버마와의 전쟁 중에서 중국 남부에 원정을 갔다가 현지에서 사로잡아 온 욕(หยก)이라는 이름의 중국 여성이었다. 어린 나이의 통두앙은 아유타야의 우툼폰(อุทุมพร / Uthumphon) 국왕의 사관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친구인 딱신을 만났다.

2.2. 톤부리 왕조의 장군

시간이 흘러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기 전날, 딱신은 도시의 몰락이 확실하다고 예견했고, 딱신은 버마군에 의한 아유타야 시의 포위망을 깨고 외곽에 새로운 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결국 1767년, 아유타야 왕국 버마 꼰바웅 왕조에게 멸망했고, 아유타야의 각 지방에서는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유타야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딱신과 그의 부하들은 짠타부리(จันทบุรี)와 뜨랏(ตราด)을 간신히 점령했다. 이 기간 동안 통두앙은 딱신의 여섯 명의 장관 중 한 명이 되었고, 프라야 피차이(พระยาพิชัย)와 함께 딱신으로부터 가장 귀중한 두 장군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 이후 딱신과 부하들은 전략을 세웠고 1년 만에 아유타야를 탈환했다. 그리고 1768년, 딱신은 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하고 톤부리를 새로운 수도로 삼아 짜오프라야 강(แม่น้ำเจ้าพระยา) 하구의 서쪽 둑에 톤부리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톤부리 신 정권에서 통두앙은 프라 라차린이라는 칭호를 달고 왕실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후에 시암의 총독이 되는 동생 분마와 함께 피마이(Phimai)[4]의 군호[5]를 복속시킨 후, 통두앙은 프라야 아파이라나릿(Phraya Aphairanarit)로 승격되었다.

1769년 팡의 영주를 제압하기 위한 진압 운동이 있고 나서 그는 프라야 욤마랏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는 사무하나욕(북부 지방 장관)이 되었다.

짜끄리(통두앙)는 버마와의 전쟁에서 시암의 군대를 지휘했고 캄보디아를 복속시켰다. 1774년에는 동생 분마와 함께 버마의 통치로부터 시암을 해방시키기 위해 람팡 출신의 왕자 프라야 까윌라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보내졌고, 1776년 크메르 파동을 정복했다.

1778년에는 라오스 왕국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같은 해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참파삭 왕국을 함락시켜 마침내 솜뎃 짜오프라야 마하 카삿슥(Somdet Chao Praya Maha Kasatsuek)으로 승진했다.

만약 이대로 계속 장군으로 지냈다면 그는 톤부리 왕조에 충성을 다하는 장군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2.3. 짜끄리 왕조의 왕

그렇게 톤부리 왕조가 세워지고 난 뒤인 1781년, 톤부리 왕조의 장군이었던 짜끄리는 캄보디아에 대항하여 세력을 동원해 나섰으나, 프라야 순(Praya Sun)의 반란이 일어나 반군이 딱신 왕을 물러나게 하자 퇴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딱신이 수도원에 위탁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782년 톤부리에 도착한 짜끄리는 자신의 병력으로 프라야 순을 제압했다. 이후 장군이 결국 축출된 딱신을 처형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다. 그 후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오늘날까지 태국을 계속 통치하고 있는 짜끄리 왕조를 세웠다.

2.3.1. 재위

짜끄리는 1782년 4월 6일에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그는 시암의 수도를 짜오프라야 강의 동쪽 둑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보다 나은 전략적 위치와 새로운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알리려는 욕망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는 새로운 수도의 이름을 '라따나꼬신'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2.3.2.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라마 1세 치세 시기 시암은 강력한 국가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도 전쟁을 많이 하였다.

우선 베트남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당시 시암과 베트남의 관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었다. 우선 베트남이 떠이선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1784~1785년, 베트남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군주였던 응우옌푹아인은 라마 1세를 설득하여 당시 떠이선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을 달라고 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일어난 락검·쏘아이뭇 전투에서 응우옌-시암 연합 함대가 파괴되었다.

그래도 시암은 이 일로 손해를 본 것만은 아니었는데, 이 일로 응우옌 왕조는 시암의 지원을 호소함으로써 시암인들은 응우옌의 법정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른 이야기로는 막뚜신의 이야기가 있다. 막뚜신(Mac Tu Sinh)은 막티엔뜨의 아들로 시암인들 사이에서 자랐으며, 1787년 사망할 때까지 베트남 서남부의 도시인 하띠엔의 총독으로 취임하였다.
또 시암계 장군인 응고마는 막뚜신의 후임으로 총독 대리로 임명되었다. 응우옌아인도 왕궁에서 떠이선을 물리칠 기회를 기다리며 시암으로 피신했다. 이 일화들은 라마 1세가 그의 왕국을 넘어 시암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캄보디아와의 관계에서도 시암은 종주국의 위치였다. 그 예로 캄보디아에서는 1779년 레암라자 왕(Ang Non Ⅱ)이 퇴위하고 어린 왕자인 앙엥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앙엥 휘하의 일부 캄보디아 귀족들의 친베트남 정책은 라마 1세를 화나게 했고 결국 라마 1세는 앙엥을 체포하여 방콕으로 추방다. 라마가 앙엥을 그의 아들로 입양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은 그에게 친시암 정서를 강요하려 하는 것이었다. 또한 라마 1세는 짜오프라야 압하야 부베트를 캄보디아의 섭정관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화들는 당시 캄보디아가 사실상 시암의 속국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시암과 일종의 라이벌 관계였고 아유타야 왕조를 멸망시킨 꼰바웅 왕조와는 자주 전쟁을 치르던 원수와도 같은 관계였다.

처음 전쟁을 시작하게 된 원인은 라마 1세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버마 꼰바웅 왕조의 보도로파야 왕이 시암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해 버마 족의 군대가 처들어왔고 이때 버마 족이 9개 군대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 당시 시암에서도 "아홉 군단 전쟁"으로 알려진 버마-시암 전쟁(1785~1786)이 발발해 버마 병사들이 란나와 북부 시암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 람팡(태국 북서부의 도시)의 왕자인 카와일라가 지휘하는 시암 군은 용감하게 싸우며 버마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는데, 그 동안 내내 방콕에서 증원군을 기다렸다. 또한 피타눌록(태국 북부의 도시)이 점령당하자 후궁 아누락 데브시, 라마 1세는 시암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암 군은 람팡을 버마의 포위망에서 탈환해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보도로파야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체디 샘 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왕은 라마 1세의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나콘시탐마랏을 통해 라농으로 오는 버마 인들을 반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칸차나부리 근처에서 버마 인들을 전투에 끌어들였다. 버마 인들도 당시 총독이 막 죽은 탈랑(푸켓)을 공격했다. 이때 탈랑에 살던 찬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여동생 묵은 지역 사람들을 모아 버마 인들을 상대로 탈랑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오늘날 찬과 묵은 버마의 침략에 대한 저항 덕분에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라마 1세는 그들에게 타오 테프카사트리와 타오 스리 선손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버마 인들은 계속해서 송클라를 점령해갔다. 그 소식을 듣고 파탈릉의 지사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프라 마하라는 한 스님은 이 지역 시민들에게 버마 족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라고 격려했다. 그의 격려도 성공적이었다. 프라 마하는 후에 라마 1세에 의해 귀족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그의 군대가 패퇴하자 보도로파야는 퇴각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공격했고, 이번에 보도로파야는 군대를 단일 군대로 구성했다. 이 군사로 보도로파야는 체디 샘 옹을 지나 타딘 댕에 도착했다. 이때 부왕은 시암 군을 진군시켜 보도로파야와 맞섰다. 전투는 매우 짧았고 보도로파야는 빠르게 패배했다. 이 짧은 전쟁은 타딘댕 작전으로 불렸다.

한편 라마 1세는 청나라에도 사신을 보냈는데, 자신을 정소(鄭昭)[6]의 아들인 정화(鄭華)로 소개하여 섬라국왕(暹羅國王)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은 청나라로 사신을 보낼 때 정씨를 칭했다.

2.3.3. 죽음

1809년 9월 7일 병으로 승하했다. 당시로서는 장수한 나이인 72세였다.

3. 자녀

라마 1세도 다른 창업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여러 식구들을 왕족으로 키웠다. 동생 수라시(아누칫 라자)나 마하 수라 싱하나트를 '프런트 팰리스'로, 조카 퉁인이나 아누락 데베스를 '리어 팰리스'로 임명했다.

왕은 42명(21남 21녀)의 자녀가 있었다. 이 중 10명(그 중 5명은 요절)은 아마린다 왕비에게서 태어났고, 나머지 자식들은 여러 후궁들에 의해 태어났다.

4. 업적

그의 치세 중의 시암은 16세기 이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시암은 버마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또한 영토가 크게 늘어 그 이전 최대 규모였던 나레수안 시기의 영토 확장을 능가함으로써 시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문화적으로도 라마 1세는 잇따른 전쟁 후 사람들을 전쟁의 여파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 문화 사업을 장려했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사찰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정책은 시암이 향후 영토 확장을 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 RTGS: Phutthayotfa Chulalok [2] RTGS: Thongduang [3] 사실 딱신의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존재한다. 해당 설에 따르면 이전부터 중국계 부모에게서 태어나 차별과 멸시를 받은 짜끄리 라마 1세는 국왕에 대한 정변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며, 버마의 위협에서 국민들을 지키려고 희생한 딱신 왕을 몰아내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었다는 것이다. [4] 현재 태국 북동부의 도시. [5] 적출(嫡出)이 아닌 왕자나 종친·훈신에게 임금이 군(君)을 봉할 때 주는 이름. [6] 딱신 대왕의 중국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