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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T.[1] | |||
1936년 ~ 194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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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 소말릴란드 영국군 정부 | ||
영국령 소말릴란드 | |||
위치 | 동아프리카 | ||
국가 | 왕의 행진곡 | ||
수도 | 아디스아바바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 ||
황제 [2]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
총독 | |||
언어 | 이탈리아어, 암하라어, 소말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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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 지역에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다.2. 역사
이탈리아는 이미 소말릴란드[3]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에티오피아 제국도 강점하고 식민지로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3개의 식민지를 합쳐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탄생시켰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는 6개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기존의 소말릴란드, 에리트레아와 새로 정복한 지역인 에티오피아 지역을 암하라, 갈라-시다모, 하라르, 시오아 4개주로 나누었다. 인도 제국을 본떠 1936년 5월 9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로 겸임 즉위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사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군 잔당 출신 게릴라와 일부 부족의 저항 때문에 식민지가 해체되는 때까지도 완전히 장악하진 못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인에게 에티오피아 이주를 권장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소말리아나 에리트레아로 이주했지 에티오피아로 이주하려 하진 않았다. 1937년 2월 19일에는 2명의 에티오피아 거주 에리트레아인들에 의한 로돌포 그라치아니 총독의 암살 미수가 있었다. 그 이후 보복으로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시민의 20%인 19,200명이나 학살했다.[4] 그나마 그라치아니가 리비아로 전출되고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가 새 총독으로 부임한 후로는 이탈리아의 통치도 좀 더 유화적으로 변했다.[5]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당시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일시 점령하나, 결국 금방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여 식민지 본토까지 영국군 주도 연합군[6]이 들어와, 1941년 5월 5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아디스아바바로 환도하며 그 해 말에는 에티오피아 제국 전 지역이 해방되고, 나머지 식민지들도 영국 점령하에 들어갔다. 전후 이 식민지들은 영국 식민지에 편입되거나, 에티오피아에 병합되거나, UN 신탁통치 하에 들어갔다가 독립한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 왕국이 에티오피아를 상실한 이후에도 에티오피아 황제 칭호를 쓰다가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 추축국을 탈퇴한 뒤에야 사용을 중단한다.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수만 명의 이탈리아 식민자들이 정착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왕국의 패퇴 이후에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 의해 사면되어 에티오피아에 계속 정착할 수 있었지만, 1974년 데르그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국으로 난민이 되어 복귀했다.
현재 암하라어와 티그리냐어에는 이 시기에 유입된 이탈리아어 단어들이 있다고 한다.
3. 식민지 통치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통치는 전형적인 디바이드 앤 룰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암하라인을 탄압하고 에리트레아인, 소말리인을 우대하는 형태였다. 이탈리아는 암하라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식민지 행정의 요직을 에리트레아인이나 소말리인과 같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리아 지방을 에리트레아에게 귀속시키는 등 노골적인 차별을 가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에티오피아 개발을 위해 이탈리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했지만, 에리트레아나 소말리아에만 유의미한 이주가 있었을 뿐 에티오피아에는 잘 이주하지 않았다. 1940년까지 에티오피아에 이주한 이탈리아인은 3천여명 뿐이었다.에티오피아 정복 후, 이탈리아는 이 지역의 산업 및 인프라 개발에 꽤 관심을 가지고 투자했다. 아디스아바바로부터 시작해 식민지 각지를 잇는 도로가 건설되거나 건설 예정이었으며, 이탈리아군의 보급과 교통망 연결을 위해 철도가 건설되었다. 아디스아바바에는 공항이 건설되어 아디스아바바-지부티-트리폴리-로마로 이어지는 항공편이 개설되었다. 산업 개발 또한 이루어져 각종 공기업과 민간기업의 유치가 벌어졌다. 또 식민지 당국은 아디스아바바를 확장해 화려하고 거대한 새로운 현대적 수도로 탈바꿈하기 위한 공사를 계획했으나, 2차대전 개막으로 인해 페이퍼 플랜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총독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총독부가 한 해에 185억 리라를 벌어들인 반면, 인프라 개설과 각종 유지보수에 나가는 총 지출은 191억 리라에 달했다. 산업 개발 또한 생각보다 더뎌서, 자원 부족, 극한 환경, 이주 유치 실패, 에티오피아인들의 저항 등이 겹쳐 이탈리아 당국에서 예상한 것보다 저조했다. 그나마 에리트레아에서 유의미한 산업 개발 성과가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이탈리아는 또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교육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아프리카인들 교육 목적은 근본적으로 '파시즘적인 이념에 가득찬 전사'를 육성하는 것으로서, 파시즘적 이념을 세뇌시키고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을 불어일으키며, 두체를 숭배하고 충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역사 교육이 강조되었는데, 이 역사 교육은 굉장히 기이한 것으로서 이탈리아의 근대 민족주의 운동과 통일 과정은 아프리카인들에게 민족주의적 관념을 실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오직 로마 제국의 영광과 그 로마의 후신으로서의 이탈리아의 위대함, 그리고 두체 무솔리니에 대한 우상화와 숭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또 매일 아침마다 학생들에게 파시스트 경례를 강요했으며, 두체를 숭배하고 따르도록 세뇌했으며 국기 계양과 국가 제창이 의무적으로 이루어졌다.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을 파시스트 문명에 접하게 해 문명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현지의 이탈리아인에 대해서는 본토와 동일한 교육과정이 적용되었다.
4. 여담
1992년에는 이탈리아군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소말리아에 파병되었다. 즉 옛 식민지에 돌아온 셈이다.이 때 황당한 에피소드도 있다. 현지에 도착한 이탈리아군이 주둔지를 편성하고 있는데 한 현지 노인이 2차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왕국군 복장과 소총을 완벽하게 갖춘 채로 다가왔다. 당황한 이탈리아군 장병이 어찌된 연유인지 묻자 그 노인은 자신이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에서 복무한 아스카리(Askari, 현지인 출신 장병)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이탈리아에게 충성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를 위해 평생 의무를 다하겠다고 주장했다. 부대 지휘관들은 논의 끝에 그 노인을 일종의 의장대로 삼고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노인은 매우 헌신적이었고 이탈리아군 장병들도 그 노인을 꽤 좋아했다. 그러나 한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탈리아군 부대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 때 이 노인도 당연히 참석했는데, 그 때마다 이탈리아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문제는 그 구호의 내용이란 게 'VIVA RE( 국왕 만세)! VIVA DUCE( 두체 만세)! VIVA ITALIA(이탈리아 만세)! 였다. 즉 베니토 무솔리니가 통치하던 옛 입헌군주정 시절[7]의 이탈리아 왕국의 구호. 이탈리아군 장병들이 제발 하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출처
하지만 해당 일화는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도 있는것이 당장 출처로 서술된 이 사이트도 이탈리아 제국을 찬양하는 웹사이트고 (사이트 이름부터가 "Italia Coloniale"이다) 해당 일화가 기술된 다른 웹사이트는 텀블러와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 뿐 공신력 있는 소스는 없기 때문.
5. 매체에서
Hearts of Iron IV에서 AI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후 세우는 괴뢰국으로 등장한다.
[1]
라틴어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표어 F.E.R.T. 항목 참고
[2]
에티오피아 점령후 이탈리아 왕이 에티오피아 황위를 차지해 동아프리카 식민지에 한해서 황제 칭호를 가졌다.
[3]
현재의 소말리아다.
[4]
에티오피아에서는 예카팃 12(የካቲት ፲፪)라 부르며 매년 추모한다. 예카팃은
에티오피아력의 6번째 달로 암살 미수가 일어난 날을 가리킨다.
[5]
그래서인지 하일레 셀라시에는 2차대전이 끝나고 아오스타 공작의 유족들을 에티오피아로 초대하기도 했다.
[6]
영국군 외에 자유 벨기에군 등 다른 나라의 연합군과 이탈리아의 강점 후 그때까지 에티오피아 내에서 항전 중이던 저항세력이 있었다.
[7]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투표를 통해 공화정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