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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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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C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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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년 3월 22일 |
필리핀 도독령 카비테엘비에호 (現 필리핀 카비테주 카윗) |
|
사망 | 1964년 2월 6일 (향년 94세) |
필리핀 케손시티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1899년 1월 23일 – 1901년 3월 23일 | |
학력 |
산토 토마스 대학교 산후안 대학교 |
직업 | 정치인, 독립운동가 |
가족 |
배우자:힐라리아 아기날도(1896~1921)[2] 마리아 아곤칠로(1930~1963) 슬하 2남 3녀 |
신체 | 163cm |
종교 | 기독교 ( 로마 가톨릭) |
|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2. 생애
당시 필리핀 독립운동가 대부분처럼 아기날도도 메스티소 출신이며, 무장독립 단체인 카티푸난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주도권 경쟁을 벌였고, 후기에는 보니파시오가 밀려나 아기날도가 정권을 잡게 된다.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자, 리베라 총독의 공세에 밀려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던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를 몰아내고 필리핀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 때문에 제1공화국이 패망하자 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잡혔다 풀려난 뒤 은거했다.
이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자 대선에 출마했지만 마누엘 케손에게 낙선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 협력한 혐의로 전후 잠시 징역을 살았다. 그래도 전후에 복권되어서 필리핀 민주주의에 대한 자문역을 맡았다가 1964년에 사망했다.
3. 평가
필리핀의 독립을 이끈 국부로서 국민 영웅으로 추대되어 왔으나, 2010년대에 들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장군 둘을 처형한 것과 일본 제국의 필리핀 점령기 동안 일본 제국과 협력한 것에 관해 부정적인 평가도 증가했다.[3]최근에는 아기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를 초대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을 정도.
4. 여담
1985년부터 기존의 보니파시오 대신 5 필리핀 페소 지폐의 도안으로 등장해 중간에 동전으로 바뀐 후에도 도안으로 계속 있었는데[4], 위의 현상으로 인해서인지는 몰라도 2017년부터 새로 발행되는 5페소 동전의 자리를 보니파시오에게 넘겨주었다.다만 과거 1, 2, 5페소 지폐 뒷면의 아기날도가 독립을 선언하는 장면은 현 필리핀 200페소 지폐 좌측 하단에 작게 삽입되어 있으므로 완전한 퇴출은 아니며, 중앙은행 측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
5. 참고자료
-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에서 필리핀 부분.
- 조병욱, '이야기 필리핀사', 해피&북스, 2013
- 권오신 (2009). 스페인지배 말기의 필리핀 독립운동: 미완의 혁명(1896-1898)
- 유인선 (1990). 필리핀의 역사와 문화 - 필리핀근대사의 성립과 전개과정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897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필리핀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46 (57.03%) | 당선 (1위) | 초선[5] |
1935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179,349 (17.54%) | 낙선 (2위) |
[1]
필리핀 내에서 수여하는 기사작위이며,이름은
리잘의 작위이다. 대표적인 수여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니노이 아키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코라손 아키노,
피델 라모스 등이 있다.
[2]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기존에 평가가 좋았던 것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 시절 일본과의 관계 개선 차원에서 띄워진 측면도 있다.
오노다 히로오가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변사면된 후 일본으로 송환되어 천수를 누린 것 또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4]
대신 보니파시오는 1998년까지 통용된 2페소 주화의 도안으로 있기는 했었다.
[5]
1901.4.19. 아기날도가 같은 해 3월 23일 이사벨라주 팔라난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미국에 정식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필리핀 국민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