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2:31:30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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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
파일:IMG_2928.jpg
기간
1991년 3월 31일 ~ 1995년 11월 12일
장소
크로아티아
원인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독립 반대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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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틀:국기|]][[틀:국기|]] 고란 하지치
[[틀:깃발|]][[틀:깃발|]][[라트코 믈라디치|]]
병력
피해규모
결과
크로아티아의 독립

1. 개요2. 상세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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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을 원하는 크로아티아와 그 독립을 제재하려는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전쟁.

2. 상세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연방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슬로베니아로 진격하자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지역 방위군 등을 모아 게릴라전으로 대항했고, 슬로베니아와 인접한 크로아티아에서도 저항군을 조직해 맞서면서 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 간 충돌이 치열해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학살당한 과거를 내세워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여 1991년 8월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던 크로아티아 리카센 주와 시베니크크닌 주 등 크로아티아 중부 지역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수립, 분리 독립을 선포하였고,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한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세르비아인 민병대[3]를 결성해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군에게 저항하면서 전쟁은 크로아티아군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싸움에서 크로아티아 국내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분규로까지 확산되는 등 양상이 매우 복잡해졌다. 이에 대해서 무력으로 크로아티아 전역을 점령해 연방을 유지하려던 연방정부의 전략이 실패할 경우 차선책으로 실행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슬로베니아 독립전쟁 이후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게 되었고, 모든 군사력을 크로아티아로 집중시켜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 방해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인 민병대를 지원하는 등 무력 공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 내전 초기 크로아티아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는데 육군력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공군의 경우 아예 공군력 자체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불량했다. 게다가 1991년 9-11월 시점만 해도 크로아니아 영내에 (고립되기는 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기지가 곳곳에 있었다. 크로아티아군은 임시로 농업 복엽기 안토노프 An-2 폭격기로 이용하였고, 내전 발발 이후 구 유고 지역에 내려진 국제사회의 대유고 군사 무기 금수 조치를 피해 냉전 붕괴 후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로 경제난에 빠지면서 다른 나라에서 팔기위해 내놓은 다른 동유럽권 국가들의 MiG-21 전투기와 Mi-24 공격 헬기 같은 여러 공산권 국가의 군용기들을 밀수 거래를 통해서 들여오는가 하면, 전쟁 초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공군에서 운용하던 MiG-21 전투기를 몰고 크로아티아 측으로 귀순한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공군 조종사로부터 MiG-21 기체 3대를 확보했다.

파일:mig4w_sundin13.jpg
크로아티아 공군 소속의 MiG-21bis 전투기.

그리고 1991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때로는 전투를 통해, 때로는 EC 등이 개입된 협상을 통해 크로아티아 내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기지를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인원 중 일부를 자기 군대로 흡수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척 사기가 높았으며 외국 PMC의 도움을 받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크로아티아 간의 전투가 치열해져 가던 1991년 9월에는 남부의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모든 군사력을 크로아티아에 집중시키던 연방정부는 마케도니아의 이탈을 저지하지 못해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파일:profimedia-0015114616.jpg
1991년 부코바르 전투 당시 크로아티아군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간 전투로 파괴된 부코바르 도심의 거리.

한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도시인 부코바르(Vukovar)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동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군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는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본토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인 부코바르를 함락하기 위해 1991년 8월에 1차 공세를 펼쳤으나 도시에 많은 건물들을 활용해 기습전을 펼치던 크로아티아 측의 격렬한 저항과 시가전에 약한 인민군의 전략 미비로 인해[4] 부코바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9월 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작전 사령관으로 지보타 파니치 사령관이 부임했고, 파니치 사령관은 부임하자마자 인민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조직을 해결하기 위해 새 본부와 지휘 통제 체계를 수립하는 등 개편을 단행하고 기갑부대와 포병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주력으로 전투를 벌이는 전술을 채택하여 1991년 10월 부코바르에 대한 2차 공세를 개시했다. 크로아티아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1991년 11월 3일 부코바르는 함락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들 역시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내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는 부코바르를 함락시킨 다음에 오시예크(Osijek)와 포제가(Požega) 등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추가로 진격, 점령하고,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까지 진격하여 분리주의 세력들을 제압하려는 군사 작전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코바르에서 입은 피해가 워낙 커서 결국 크로아티아에 대한 추가 공격을 백지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1년 11월 시점에서 유고 인민군이 오시예크와 자그레브에 대한 공세 계획을 백지화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보스니아 전쟁의 임박 때문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상황이 1991년 10월 14일 라도반 카라지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랩배틀 디스전[5]이 벌어질 정도로 심각해졌던 때가 부코바르 점령 때와 겹쳤다. 1991년 10월 이후로 카라지치와 이제트베고비치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보스니아 내 상황이 나빠지자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은 크로아티아내 거점 지역들을 추가 공격할 예정이던 모든 병력과 병장기들을 보스니아 지역으로 분산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공세종말점에 다다랐다. 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보스니아의 상황이 심각해진(전쟁 임박) 1991년 11월 후반부터 부코바르 시를 잃고 패배당한 크로아티아가 오히려 세르비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상대로 공세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91년 11월 부코바르를 함락한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는 두브로브니크와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중부 지역 등지로 공습과 공세를 진행했으나 크로아티아 측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고[6], 결국 연방정부는 이듬해인 1992년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유지를 명목으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지원은 지속되어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괴뢰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간 군사적 대치는 이어졌으며 뒤이은 보스니아 전쟁에 크로아티아 역시 참전하는데 뒤에 보듯 그렇게 순수한 목표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실제 휴전은 1995년 8월, 공식적으로는 1995년 11월 12일의 에르두트 협정 이후 전쟁이 끝을 맺었다.

크로아티아는 수도 자그레브, 유명한 관광지 두브로브니크,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등 전 국토가 폭격 대상이 되어 독립을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 특히 플리트비체 호수에선 첫번째 내전 사망자가 여기서 나왔는데 이 충돌이 공화국 선포 전인 1991년 3월에 있었기 때문에 위의 유고 내전 발발 시기조차도 논쟁의 여지가 생기게 된다.

4년에 걸친 연방정부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으로 쌍방 합계 2만 3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약 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인명피해는 크로아티아군이 약간 더 많았는데 이것은 창군 초 크로아티아군의 장비, 조직력, 훈련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군이 그나마 군대다운 군대가 된 것은 1995년 이후의 일이다.

연방 해체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많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계 출신 군인들 대부분이 연방에서 독립한 모국이자 신생국가의 군대인 크로아티아군과 슬로베니아군, 마케도니아군으로 편입/재편되었고, 그나마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남아 있던 이들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의해 모두 배제되면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서 세르비아와 싸우거나 제3국으로 망명했다. 원래부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내에서 압도적인 인구 비율을 자랑하던 세르비아계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정규군을 대규모로 투입하기보다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나 현지 세르비아계 국가의 군대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들은 세르비아 마피아 출신 등등 범죄자들도 많았고 기강도 별로 좋지 못했다. 준 제노사이드 경향을 보인 이 전쟁에서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적중했다. 국제 사회는 세르비아 자체에는 직접적인 책임을 크게 묻지 않고 민병대 지원 및 학살 지시에 직접 가담한 것이 확인된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과 라트코 믈라디치, 라도반 카라지치 같은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선에서 그쳤다. 그나마도 밀로셰비치가 감옥에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코소보 전쟁이었지 보스니아 전쟁이 아니었다.

마침내 같은 해인 1992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마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국 연방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그해 4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과 함께 국명에서 사회주의를 제거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즉 신유고 연방의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유고 연방은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3. 기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에는 여러 외국 의용군들도 참여하였다. 그 중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민족주의 조직인 우크라이나 인민자위대(UNA-UNSO)[7]도 있었는데, 50명이 참전하여 16명만 살아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의]


[1] 크로아티아어로 조국전쟁 [2] 세르비아어로 크로아티아 전쟁 [3] 한편 이들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인 민병대들은 나중에 점령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의 장악지들을 들어 월경지 형태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병합했다. 본래 이 일대에서 살던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본국에 합병하려 했으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 전 대통령이 국제 여론을 의식해 세르비아와의 합병, 인수을 거부하자 대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영토로 합병했다. [4] 내전 발발 이전 당시 인민군은 정규전과 산악전 중심의 군사 전략을 펼치며 군사훈련을 벌였다. [5] 해당 영상에 나온 대사는 대충 다음과 같다. 라도반 카라지치: 보슈냐크인( 무슬림) 놈들 독립 선언 한 번 해 봐라. 다 죽여버리겠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헝가리인, 보슈냐크인까지 그 어떤 바보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르비아 놈들이 무슬림 학살 열심히 해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6] 1991년 부코바르 전투의 패배 이후 부코바르에 있던 크로아티아인 시민과 크로아티아군 포로들이 세르비아인 민병대와 유고 인민군 병사들에게 학살당하는 '오브차라 학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세르비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우리는 세르비아계에게 모조리 보복/학살당한다, 남은 지역들을 사수해서라도 어떻게든 세르비아를 막아야만 살 수 있다라는 항전 여론이 당시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국민들 사이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7] 이 조직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에서는 황당하게도 러시아인들과 함께 트란스니스트리아 측에 붙어서 몰도바군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주의] 세르비아 입장에서 작성된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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