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4:17:26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아드와 전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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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각에서 본 아드와 전투. 이탈리아 측을 묘사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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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시각에서 본 아드와 전투. 에티오피아 측을 묘사했다.

1. 개요2. 배경3. 개전
3.1. 1895년3.2. 1896년: 아드와 전투
4. 결과5. 기타

1. 개요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 열강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 아프리카의 몇 안 되는 독립국가 에티오피아 제국을 본격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안일한 판단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패전으로 이어졌다. 또 근대에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 국가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부족을 상대로 전투에서 패배한 사례는 대영제국 줄루족을 상대로 패배했던 이산들와나 전투 등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최종적으로는 열강 국가가 승리를 거두었다. 당장 영국도 줄루족을 상대로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최종적으로 줄루 전쟁을 승전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는 최종적으로 패전하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식민지로 강탈한 에리트레아 지역 일부를 반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2. 배경

19세기 들어 에티오피아 제국은 제위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 분쟁은 이 지역을 노리던 이탈리아 왕국이 후원한 메넬리크 2세가 황위에 오르며 종식되었고 메넬리크 2세는 1889년 5월 2일 우찰레 조약을 통해 자신을 밀어준 이탈리아 왕국에 보답하였다. 우찰레 조약에 의해 에티오피아 북부의 에리트레아 지역이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넘어갔는데 이 지역은 근대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해외 식민지였다.

표면적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양국 사이의 관계였지만 사실 시작부터 독소조항이 숨어있던 친선 관계였다. 에티오피아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서로 우호를 위해 체결한 우찰레 조약에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식민지화를 위한 포석이 담겨 있었던 것. 조약 중 제 17조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에 대한 부분이 문제의 발단. 이 조항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이 외교권을 행사하는 부분에 있어 이탈리아에게 자문을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이탈리아에게 자문을 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 반면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에게 자문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해석하여, 에티오피아가 자주적인 외교권이 없는 이탈리아의 보호국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식민화하기 이전 단계의 행위로써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는 기본 공식이나 다름없었던 루트였다. 당장 을사조약에서 볼 수 있듯이 열강들이 어떤 국가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차지하려 드는 게 외교권이었다.

이 문제로 양국의 분쟁이 가시화되었고 이탈리아 왕국의 압박에 격분한 메넬리크 2세는 1893년에 우찰레 조약의 완전 폐기를 선언했다. 국가 간의 분쟁에 있어 대화보다는 힘이 앞섰던 시대였고 눈치 볼 이유도 없는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분쟁이었기에 이탈리아는 이를 빌미로 에티오피아 침공을 개시한다.

3. 개전

3.1. 1895년

이탈리아 왕국은 조약 폐기를 구실 삼아 에티오피아 제국을 자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심했다. 따라서 당시 에리트레아 식민지 총독이었던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에 명령을 내려 우선 에리트레아군을 통한 에티오피아 침공을 명령하였다.

문제는 에리트레아에 이탈리아의 식민지 주둔군이 있긴 했으나 말 그대로 식민지 주둔군에 불과했지 대규모 침략 전쟁을 벌일 여력은 안 되었다는 점이다. 수적으로도 열세한 상황이었음에도 이탈리아 왕국은 본토에서 그 어떤 지원병력도 보내주지 않은 채 에리트레아 식민지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총독은 아무리 아프리카의 미개한 군대라고 할지라도 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라며 반발했으나 본국의 압박에 결국 1894년 12월 15일 고작 2만 5천의 에리트레아군이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

그래도 나름의 성과를 벌이긴 했고 에티오피아도 전쟁 준비가 완전히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 초반에는 승리를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 에리트레아군은 1895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하여 에티오피아 북부에서 저항하는 토호세력들을 간단하게 격파하고 에티오피아의 심장부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자신의 제국에 총동원령을 선포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직속 친위대와 기존의 정규군 8만명에 각 지방 부족민들로 구성된 민병대 12만명까지 병력을 모두 집결시켰는데 모두 합친 그 숫자가 총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당시 개발도, 발전도 안 된 아프리카 국가의 군대는 통상적으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못 받아 단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들에 불과했고 에티오피아의 '민병대'는 마찬가지로 머릿수만 많지 활과 창검으로 무장한 처참한 상황이었다. 반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를 경계하던 에티오피아 제국이 신식 군대 육성에 공을 들여 놓은 터라 친위대와 정규군은 대부분 근대식 화기로 무장하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은 상태였다.[2] 더군다나 에티오피아군은 9천에 달하는 기병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이탈리아 왕국이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아니꼽게 여기던 프랑스가 에티오피아 제국에 여러 군수물자를 제공하였고 러시아는 아예 중포까지 지원해 주었다. 에리트리아의 바라티에리 총독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추가 지원 없이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승산이 아예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 처음부터 전쟁에 반대했던 것이었다. 아드와 전투 직전 바라티에리 총독이 보유한 에리트레아군은 식민지 주둔군 1만에 에리트리아 현지에서 고용하거나 징발한 현지인 병력인 '아스카리' 7천까지 합쳐 고작 1만 7천에 불과했다. 원래는 2만 5천이었으나 각지에 수비대로 짱박아 두거나 전투로 소모되어서 이렇게 줄어 버렸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저항하는 에티오피아군을 착실하게 격파하며 남하하였으나 12월 들어 본격적인 에티오피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95년 12월 7일 암바 알라기(Amba Alagi) 전투에서 에리트레아군 2천이 3만에 달하는 에티오피아의 정규군에 포위당해 괴멸되었다. 포로로 잡힌 아스카리 1,300명은 모두 처형되었고 에리트레아군은 뒤이어 메켈레 전투(1896년 1월)에서도 패배하며 상당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3.2. 1896년: 아드와 전투

사실 바라티에리는 장기간 동원이 불가능한 에티오피아군의 근본적 한계를 알고 결전을 미루며 적당한 순간을 노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에티오피아의 국가 체제로부터 비롯된 근본적인 군사적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그래도 명색이 근대국가에 열강이었지만 에티오피아는 바흐루 저우데(Bahru Zewde) 같은 에티오피아 역사학자도 인정하듯이 봉건제 국가에 가까웠다. 특히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이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각지에는 황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소규모 군벌들도 난립했다. 시간을 끌면서 지방의 봉건 영주들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고 에티오피아군이 약화되었을 때 그들을 격파하면 된다는 것이 바라티에리의 계산이었다. 메넬리크 2세도 자기 군대의 한계를 잘 알고 진군로에 '기비르'라는 보급창을 건설하여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지만 2월 말이 되면 보급이 슬슬 바닥나서 군대를 해체하고 물려야 한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탈리아군의 보급난은 더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본토에서 싸우는 에티오피아군과 달리 이탈리아는 거의 전적으로 본국의 물자에 의존하고 있었고 게다가 열악한 보급로 때문에 진작에 식량 배급을 절반으로 줄였음에도 보급난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라티에리는 아군을 일시 후퇴시켜 태세를 재정비하는 한편 본국에 증원을 요청하며 증원이 불가능하면 퇴각 허가를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애초에 재정적 이유를 들어 개전 시기부터 지원을 거부했던 이탈리아 정부는 지원 요청도, 퇴각 요청도 모두 불허해 버렸다. 심지어 총독에게 "에티오피아군을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거두라"는 비현실적인 지시를 내리며 이를 따르지 않겠다면 총독직을 박탈하겠다며 엄포를 내렸다. 2월 29일 바라티에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진격을 선택했다.

차라리 바라티에리 총독이 본국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철수시켰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겠으나 총독은 결국 용기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에티오피아군의 규모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 끝에 수적으로 열세하지만 병력을 총집결시켜 결전을 벌여 이기면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착각해 버렸다.[3]

3월 1일 바라티에리 총독이 이끄는 에리트레아군은 에티오피아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던 아드와(Adwa)[4]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원래는 병력도 열세였고 지형도 익숙하지 않아 공세 자체가 무리한 시도였으나 본국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공격에 나선 것이다.

에리트레아군은 군 부대를 3개 여단으로 구성하여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에 대해 3방향 동시 공격을 계획했다. 이것이 성공했다면 훈련도가 부족한 에티오피아군을 무찌를 수 있었겠으나 지형 정보 부족과 전장에 낀 짙은 안개로 인해 중앙 방면 여단이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이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좌익과 우익 방면 여단은 계획대로 공격을 개시했는데 고지에서 전황을 살피던 메넬리크 2세는 중앙 방면의 공격이 들어오지 않자 정규군 3만을 투입하여 포위 공격한다. 좌익 여단은 무려 2시간 동안 공격을 버텨냈으나 전황을 살피던 메넬리크 2세는 그간 아껴오던 에티오피아 제국 황실 근위대 3만을 추가로 투입해버린다. 에티오피아군의 맹공에 결국 에리트레아군은 붕괴, 상황을 파악하고 뒤늦게 합류한 참여한 중앙 여단까지 휘말려 괴멸당해 버렸다.

전황을 뒤늦게 보고받은 바라티에리 총독은 경악하며 우익 여단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문제는 우익 여단이 에티오피아군의 주력이 이탈리아 군 좌익과 중앙에 집중하는 동안 냉병기 중심의 민병대를 상대로 천천히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것. 우익 여단이 철수하자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레아 좌익과 중앙에 공격을 더 집중시켰고 안그래도 무너지고 있던 좌익과 중앙 여단은 속절없이 괴멸되고 말았다. 심지어 후퇴하던 우익 여단은 우회한 에티오피아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해 추격하던 에티오피아군에 의해 포위섬멸당하고 말았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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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와 전투에서 승리 후 싱글벙글 웃으며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오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친위대소속 오로모족 기병.[5]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6]

아드와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대재앙이었다.
  • 지휘부: 바라티에리 총독은 도주. 휘하 여단장 3명 중 2명 전사, 1명 포로로 중간지휘부 소멸.
  • 병력 손실: 사망자 7천, 포로 3천으로 에리트레아 철수 병력은 7천 명에 불과. 이 중 부상자는 1,500명.
  • 물자 손실: 전장에 방기된 중포 56문 전량과 소총 1만 1천여 정 노획당함.

반면 에티오피아군은 전사 4천 명, 부상자 8천여 명으로 사망자 수치에서도 압도했다.

아드와 전투의 대참패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훗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동양의 섬나라 일본에게 패배한 것에도 비슷한 충격은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시도하고 있었고 유럽 열강들에게 최소한 '자기네들 흉내내는 지구 반대편의 동양 국가' 정도의 이미지는 자리잡혀 있었다. 동아시아는 한때는 잘나갔던 2류 국가들 취급받기도 했고.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고 수많은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인 끝에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당연히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인식도 바닥을 기었고 아프리카인에 대한 이미지도 '식민지에 사는 미개한 열등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아프리카 국가에게 지는 것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아무리 2류 열강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엄연한 강대국이자 식민 제국이 아프리카에서 참패 끝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평화협정을 서명했으니 열강들에게 엄청난 놀림감이 된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드와 전투의 패전 책임을 물어 바라티에리가 경질되었으나 모든 책임을 일개 총독에게 넘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시당초 무리한 공격을 요구한 건 본국이었기에 본국의 크리스피 내각도 패전 책임으로 일괄 사퇴한다. 더군다나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경계선까지 밀고 왔다는 사실에 로마는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메넬리크 2세는 더 이상 밀고 오지 않았다. 비록 아드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에티오피아 측의 피해도 컸고 제국 각지의 부족들은 방어를 위해 집결했을 뿐, 공세에는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물론 중앙군만으로도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부족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상황이라 자칫하면 내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승리를 거둔 것도 어디까지나 방어측의 입장이었고 여기서 무너지면 국토가 유린당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낸 성과이며 공세는 이야기가 달랐다. 게다가 만일 에리트레아까지 공세를 벌일 경우 이탈리아에서 에티오피아에게 복수하자는 여론이 팽배해져 이탈리아 본국의 군대가 참전할 우려도 있었다. 아무리 에티오피아군이라 할지라도 본국에서 증원된 이탈리아군을 전면전으로 상대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결국 영국·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양국은 1896년 10월 26일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했다. 이탈리아는 포로의 몸값으로 1천만 리라를 에티오피아에 지불했고 에티오피아 측에게 약 20㎢ 정도의 영토를 할양했으며 문제의 발단이 된 우찰레 조약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에티오피아 측도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 영토로 계속 인정하며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이탈리아가 가하던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메넬리크는 이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예전처럼 또 다른 정복전쟁을 벌였다.[7]

다른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신나게 재미를 보고 있을 때 이탈리아는 졸전 끝에 참패하여 '식민지 대륙' 소리 듣던 아프리카 국가에게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으니 실추된 명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아디스아바바 조약에 치욕이라고 반발하며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폭력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진압해야 했다.

사실 바라티에리 입장에서는 맞는 말만 했는데 윗선에서 귀 막고 있어서 패배를 강요당한 다소 억울한 상황이긴 했다. 몇 년 동안 '우리 병력 부족해! 보급품 줘! 쟤들은 총도 야포도 있어!' 라고 외쳐 왔는데도 전투 패배 소식을 들은 총리의 대답이 '걔들은 창과 방패밖에 없는데 어떻게 졌어?' 였다. 이탈리아 수뇌부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무능함을 보여준 셈이다.

이후 1935년 이탈리아는 복수전을 벌이고 승리해 굴욕을 되돌려줬지만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망명을 받아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에티오피아를 해방했고, 추축국이 패배해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식민지를 뱉어내면서 국경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게 되어 두 국가의 악연은 끝이 나게 된다.

5. 기타

당연히 이 전쟁의 승리는 21세기에도 에티오피아인들의 자부심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매년 3월 2일 국경일로 총리를 비롯해 정부의 주요인사들의 참석하에 성대히 기념된다고 한다.

문명 5 에티오피아 문명의 특성은 이 전쟁을 모티브로 하여 디자인되었다. 자신보다 도시가 많은 국가, 즉 강대국을 상대로 전투 보너스를 받는다. 특성 이름부터가 '아드와 전투의 정신(Spirits of Adwa)'이다.

에티오피아 역사학자 바흐루 저우데에 따르면 당시 유럽인들은 '흑인이 백인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사실 에티오피아는 적도의 햇빛에 노출되어 피부가 까맣게 탄 백인들"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8] "야만족 추장" 메넬리크 2세가 갑자기 "군주적 덕성의 현신"으로 바뀐 것은 덤.

메넬리크 2세뿐만 아니라 황후인 테이투 베툴(Tayitu Betul)도 이 전투에 참여했는데[9] 황후의 친정 가문을 움직여서 병력을 모았으며 황후 본인도 장병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올렸다고 한다.


[1] 에티오피아군은 군복도 안 입고 창을 들고 저항하는 걸로 묘사되었지만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부대는 2만명 정도로 대부분은 아래의 그림처럼 7만명 넘게 군복과 총으로 무장했으며 8,000명의 기병대와 이탈리아군에게서 노획한 기관총에 대포까지 가지고 있었고 규모도 상당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런 것들에게도 패배하는 이탈리아군'이라는 프로파간다적 요소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시대는 아직 자동화기가 제대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냉병기로 무장한 군대도 화기를 지닌 군대를 상대로 승산이 있었다. 기병대는 더욱 그러했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근대식 군대가 있기 때문에 예비병력으로 운용할 전투력은 있었다. [3] 바리티에리 총독은 에피오피아군의 규모를 대략 3만에서 4만으로 추산하고 아직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오판해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규군만 따져도 그 2배 가까운 8만이었던 데다 무려 12만의 민병대까지 합치면 총 20만이었다. 총독의 에리트레아군은 애초에 승산이 없었다. [4] 또는 아두와(Aduwa)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공식 명칭은 Battle of Adwa.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는 '아도와' 전투라고도 한다. [5] 이 기병은 에티오피아의 실세인 암하라족과는 다른 민족인 오로모인으로 징집된 친위대소속 기병으로, 이탈리아군은 이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관습에 따라 성기를 자른다는 풍문(외부인인 이탈리아군은 황실 반역죄에 해당하지 않아 곱게 돌려보냈지만 자국민 취급을 받았던 에리트레아인 포로는 진짜 잘랐다. 어느 정도 사실이 포함된 헛소문인 셈)을 믿어 항복하든 말든 여러 의미에서의 죽는다는 공포에 질린 이탈리아 병사의 단말마가 "갈라 기병... 갈라 기병... 공포... 공포...!!"였다고 하며(서양에서 오로모인을 부르는 명칭이 갈라인이다.) 이 용감한 오로모인병사들은 6.25 전쟁에도 참전하여 253전 253승의 엄청난 인간병기급 전적을 올렸다. [6] 화려한 장식 때문에 갈라 기병, 즉 축제 기병이라고 불렸다. 오로모족 기병대는 이런 멸칭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고자로 만든다는 소문을 더 불쾌하게 생각한 듯하다. [7] 사실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해서 그렇지, 에티오피아도 주변의 약소국이나 부족들 상대로는 어찌보면 그보다 더한 패권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원래 에티오피아의 영토는 오늘날의 서북부 지역에 불과했지만 메넬리크 2세가 사방팔방으로 정복전쟁을 펼치면서 다른 약소국을 병합하여 넓어진 것이다. 한때는 에리트레아를 병합하여 내륙국 신세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에리트레아가 도로 독립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8] 실제로 에티오피아의 지배민족인 암하라인 자체는 솔로몬의 후예이며 예루살렘 왕국에서 이주해 왔다는 오래된 전승이 있고 암하라어 아랍어와 같이 셈어파에 속하기도 하는 등 흑백혼혈이 기원인 민족이다. [9] 문서 상단부 두번째 그림을 보면 말에 타고 있는 황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