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글루크 왕조의 강역 | 피루즈 샤 투글루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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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델리 술탄국의 세번째 왕조. 투르크계, 인도인의 혼혈 투글루크족이 세운 이슬람 무슬림 왕조이다.2. 역사
2.1.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
기야스 웃 딘이 세운 투글루카바드 성채
할지 왕조 최후의 술탄이었던 쿠스라우 칸이 1320년 쿠데타로 새 술탄에 오르자 펀자브의 군사령관이었던 가지 말리크에게 대신 술탄이 될 것을 요청했다. 가지 말리크는 델리로 진격해 쿠스라우 칸을 죽이고 새로운 술탄이 되어 술탄 즉위 후 이름을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로 개명하고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할지 왕조를 꺾고 델리 술탄국을 차지한 기야스 알 딘 투글루크는 튀르크계 귀족과 인도계의 혼혈 혈통이었다. 기야스 알딘 투글루크는 즉위 직후 무슬림들에 대한 세율을 낮추고 대신 힌두교도들에 물리는 세금을 높이면서 친이슬람 정책들을 펴나갔다. 또한 끊이지 않고 인도를 침공해들어오는 몽골에 대해서는 대단히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몽골의 사신단을 죽이거나 델리 동쪽 6km 즈음에 투글라카바드 요새를 지어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몽골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보였다. 1323년에는 아들이었던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에게 남쪽 카카티야 왕조를 치도록 명령했고, 결국 수도 와랑갈을 함락시키면서 카카티야 왕조를 끝장내고 완전히 델리 술탄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이후에도 아란갈, 틸랑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성공적으로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술탄 기야스는 무함마드를 자신의 후계로 삼겠노라 공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325년 기야스가 사망하면서[1]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술탄위를 승계했다.
2.2.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
투글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인도 정벌을 위해 1327년에 수도를 다울라바트[2]로 천도했고, 수도까지 옮기면서 정복에 매진한 보람이 있었던지 투글루크 왕조는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 치하에서 델리 술탄국 역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3] 무함마드는 현 텔랑가나의 와랑갈, 말라바르, 마두라이를 정복해 델리 술탄국의 영향력 아래에 넣었고, 정복 활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인도 최남단의 카르나타카까지 다다르기도 했다.[4]1330년과 1350년의 강역 비교. 출처는 Ollie Bye 채널. # |
한편 무함마드는 정복 외에도 여러 분야의 정책을 펼쳤다. 그가 진행한 사업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수도 천도 사업이었다. 새로운 수도로 정한 다울라타바드를 델리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성장시키고 싶었던 무함마드는 모든 정부 기관들을 다울라바트로 옮겼으며, 다울라바트를 완전한 계획도시로 설계하여 인도 곳곳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을 직업별, 계급별로 나누어 살게 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5] 또한 다울라바트를 중심으로 인도 전역에 넓고 평탄한 길을 깔고 일정 거리마다 역참을 설치했으며, 1333년에는 다울라바트에 아예 조폐청을 두고 동전을 발행했다. 또한 무함마드 본인은 대단히 독실한 무슬림이었으나, 타 종교에도 상당히 관대한 면모가 있어서 심지어 힌두교 축제에 공적으로 참가하는 등 델리 술탄국에서 손꼽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2.3. 피루즈 샤 투글루크
무함마드가 신드 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1351년 사망하자 투글루크 왕조의 세력도 함께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인도 아대륙이라는 대륙의 특성상 문화나 사회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던 남인도가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델리 술탄국에 자연스레 합쳐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무함마드 정복 직후에도 남인도 지방에서는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무함마드가 1351년 사망하자 그가 정복한 지방들은 모조리 바흐마니 술탄국, 자운푸르 술탄국, 벵골 술탄국, 구자라트 술탄국, 말와 술탄국, 비자야나가르 왕국, 메와르, 물탄, 신드, 곤드와나 등등 수많은 소왕국들로 떨어져 나갔다. 무함마드 사후 그의 친척인 마흐무드 이븐 무함마드가 잠시 술탄에 올랐으니 1개월도 되지 않아 쫒겨났다. 이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45세의 피루즈 샤 투글루크가 술탄에 올랐다. 피루즈는 무함마드에 비해서 훨씬 온건하고 평화주의적인 술탄으로 약 37년간 재위했다. 피루즈 재위기의 델리 술탄국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굉장히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기할만한 전쟁이나 대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6]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무함마드만큼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힌두교도들에게 부과된 지즈야 세금은 날로 상승했고 시아파 등 기타 이슬람 종파들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또한 이슬람에서 타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혹형을 가하기도 했다. 무함마드만한 군재가 없었던 피루즈는 무함마드가 정복했던 남인도와 벵골 지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용인했고, 벵골 재정복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피루즈가 죽기 약 4년 전인 1384년, 델리 술탄국에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피루즈가 가장 아끼던 아들 칸 자한 1세는 1368년 사망했고, 칸 자한 1세의 아들인 칸 자한 2세가 술탄의 총애를 한몸에 입었던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재상이 되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칸 자한 2세는 점차 욕심이 커져 조부인 피루즈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인 무함마드 샤 투글루크를 제치고 술탄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술탄에게 무함마드 샤를 내치고 자신을 후계로 삼을 것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정작 피루즈가 택한 것은 칸 자한 2세의 재상직 박탈이었다. 결국 분노한 칸 자한 2세가 군대를 일으키며 내전이 일어났다. 무함마드 샤 역시 1387년에 추방되었고 1년도 되지 않아 피루즈가 사망했다.
2.4. 투글루크 왕조의 쇠락과 멸망
피루즈 사망 후 어찌어찌 왕위를 계승한 무함마드 샤는 칸 자한 2세의 군대를 격파, 1390년에 내전을 종결했고 칸 자한 2세를 따르던 모든 귀족들을 숙청했다. 수도 델리에서 난립상이 지속되자 기회만을 노리던 지방의 힌두교도들, 그리고 무슬림 귀족들이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 삽화 |
무함마드 샤가 죽자 아들 후마윤 칸 투글루크가 새 술탄이 되었으나 2개월만에 암살당했고, 연이어 즉위한 나시르 알 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는 귀족들에게 영 인기가 없었다. 이쯤되자 델리 근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동부와 서부 영토들을 잃어버려 군웅할거 상태로 전락해버렸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델리의 귀족들 사이에서 또다시 갈등이 일어나면서 1394년에 또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은 술탄까지 끊임없이 갈아치워지는 혼란상이 끝없이 이어졌다. 2명의 대립술탄이 등장하여 진지를 차리고 서로 싸우는가 하면, 주변에서는 수많은 소왕국들이 옛 델리 술탄국의 영토들을 침략했다. 결국 1398년 위대한 정복자인 티무르가 델리를 침공, 8일 밤낮으로 도시를 약탈하고 10만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잡아 죽이면서 투글루크 왕조는 말그대로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티무르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물탄의 지배자 키즈르 칸 사이드가 1414년 델리를 점령하여 사이드 왕조를 건국하면서 투글루크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3. 관련글
[1]
기야스의 죽음에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다. 아버지가 자신 외에 다른 아들을 더 총애하여 그에게 술탄직을 물려줄 것 같으니
일부러 기반을 제대로 쌓지 않은 건물에 아버지를 초대, 사고사로 위장해서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다.
[2]
'데바기리'라고도 한다. 현재의
마하라슈트라 주의 도시.
[3]
참고로 당시 델리의 귀족들은 수도를 옮기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도를 옮기고 난 이후 델리는 예전만큼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델리의 귀족과 엘리트층들의 권력은 크게 약해졌다.
[4]
무함마드는 남인도 뿐만 아니라 망해가는
차가타이 칸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지방에도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군대 보급 실패와 원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돌아온다.
[5]
다만 이 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6]
이 당시 인도의 고문 수법은 대단히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뼈를 부러뜨리거나 손발톱 밑에 못을 박는 것은 예사요, 톱으로 사람을 산채로 썰거나 눈을 뽑고 목구멍에 녹인 납을 부어넣은 사례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