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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두어: غیاث الدین تغلق힌디어: गयासुद्दीन तुग़लक़
영어 Ghiyath al-Din Tughluq
재위 1320년 9월 8일 ~ 1325년 2월 1일
생몰 ? ~ 1325년 2월
델리 술탄국의 17대 술탄이자 투글루크 왕조의 창건자. 펀잡 출신으로, 할지 왕조 하에서 몽골의 인도 원정에 맞서 활약하며 고향인 데팔푸르의 총독이 되었다. 1320년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가 힌두교도 출신의 심복 쿠스라우 칸에게 시해되며 할지 왕조가 멸망하자, 투글루크는 주군의 복수와 '이슬람의 영광'을 천명하며 거병하여 델리로 진군하였다. 세력이 크지 않았음에도 뛰어난 지도력과 행운 덕에 연이어 승리한 그는 같은해 델리를 장악, 쿠스라우 칸과 그의 바라두 힌두 부대를 죽이고 술탄에 등극하였다.
즉위 후 투글루크는 할지 왕조 대부터 속국이던 중남부 인도의 카카티야 왕조를 공격해 병합하였고, 1324년에는 40여년간 독립 상태로 있던 벵골을 원정하여 재차 델리 술탄의 통제 하에 두었다. 하지만 벵골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칸푸르와 알라하바드 사이에서 임시 막사가 무너져 사망하였고, 재상이자 후계자이던 장남 파크룻딘 무함마드 (주나 칸)이 계승하였다. 사후 투글루크는 1321년부터 자신이 델리의 새로운 궁성으로 건설하던 투글라카바드에 매장되었다. 다만 공사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영영 중단되었다.
2. 생애
정확한 혈연적 배경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튀르크계로 추정되는 그의 가문은 13세기 후반 펀잡 중남부 데팔푸르에 정착하여 현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 델리로 향하여 마부로 일하던 투글루크는 잘랄 웃 딘 할지의 치세에 입대하여 1291년 람탐보르 공방전 당시 활약하였고, 당시 사령관이던 알라 웃 딘 할지의 동생 울루그 칸에게 발탁되어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1305년 몽골군과의 암로하 전투 당시 투글루크는 총사령관 말리크 나야크 휘하의 장군으로서 활약하였고, 이로써 더욱 승진하여 이듬해의 라비 강 전투 당시에는 말리크 카푸르 휘하의 선봉장으로서 승리에 기여하였다. 가지 말리크란 칭호는 당시의 '성전'으로 인해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2.1. 데팔푸르 총독
연이은 전공을 세운 투글루크는 술탄 알라웃딘에 의해 물탄에 이어 데팔푸르 총독으로 봉해져 대몽골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고, 현지 자트 부족들을 휘하에 포섭하였다. 후일 투글루크 나마를 쓴 역사가 아미르 쿠스라우에 의하면 펀잡에 재임하는 동안 투글루크는 몽골군의 침공을 18번 격퇴했다 한다. 물탄의 자마 마스지드 (금요 모스크 / 회중 사원)에는 투글루크가 '타타르'에 기록한 29번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1316년 알라웃딘의 사후 델리에서는 연이은 정변에 의한 정치적 혼란이 일었고, 구자라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당초 집권한 말리크 카푸르는 장군 아이눌 물크 물타니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지만 곧 본인이 암살당했고, 뒤이어 술탄에 오른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는 투글루크에게 당시 치토르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물타니에게 가서 구자라트로의 진군을 계속하라는 명을 전하게 하였다. 이에 투글루크는 치토르로 향하였고, 물타니는 그를 환대했지만 술탄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군 재개의 명은 거부하였다. 그후 투글루크는 델리로 향하여 무바라크 샤에게 물타니와 그 장교들에게 작위 임명 칙령을 보내라 권하였고, 술탄이 그렇게 행하자 물타니 역시 명을 따랐다.
투글루크는 할지 가문의 심복으로서 '이슬람의 영광'을 실현하고 반역 무리를 토벌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데팔푸르에서 거병하였다. 동시에 그는 우치 총독 바흐람, 물탄 총독 무글라티[2] , 사마나 총독 말리크 야크 락키[3], 신드 총독 무함마드 샤 루르[4], 잘로르 총독 후샹 샤[5]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참을 권유하였다. 다만 그중 실제로 가담한 것은 전자 뿐이었고, 나머지는 오히려 쿠스라우 칸을 지지하며 투글루크와 맞서거나 가담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사태를 지켜보다 전후에야 델리에 당도하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였다[6]
2.2. 델리 진군
다민족-다종교 부대로 구성된 반란군은 신드에서 델리로 향하던 카라반 행렬을 나포하였고, 투글루크는 그 재물을 공평히 분배하였다. 한편 델리의 쿠스라우 칸은 할지 가문의 복수라는 반군의 명분을 꺾기 위해 실명 후 감금되었던 알라웃딘의 남은 세 아들들 (바하웃딘, 알리, 우스만)을 처형했으나, 오히려 여론이 악화되는 반대 효과를 불러왔다. 또한 쿠스라우 칸은 칸-이-카난 (대장군)인 동생 후사뭇딘에게 4만 기병을 주어 반군에 맞서게 했는데, 그는 곧장 데팔푸르로 향하였다. 다만 그 사이의 요충지인 시르사 성채가 반군측 무함마드 사르티아의 수중에 있었기에 후사뭇딘은 무리하게 야간 행군을 통해 데팔푸르에 속히 다다르려 하다가 다음날 아침, 지친 채로 투글루크의 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7]전투는 반군의 선봉에 선 코카르 부대가 공격하며 개시되었고, 토벌군의 선봉장 말리크 쿠틀루그의 말에 화살이 맞아 그가 낙마하며 기세를 잡았다. 코카르 병사들은 투글루크에게 데려가 달라는 말리크 쿠틀루그를 죽였고, 전쟁 경험이 부족하던 토벌군 사령관 후사뭇딘은 선봉이 괴멸당하는 것을 보자 도주하였다. 코코르 병사들은 후사뭇딘의 차트르 (양산)를 탈취하여 투글루크에 전상하였고, 이로써 전투는 반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투글루크는 적군을 용서, 아군에게 전리품을 분배한 후 델리 방면으로의 진격을 이어갔다. 투글루크가 한시를 점령하고 델리 서남쪽 15km 지점인 팔람에 다다르자 쿠스라우 칸은 그에게 팔람을 경계로 제국의 분할을 제안하려 하였다.
하지만 참모들이 그리 한다면 군주로써의 위상이 꺾이고, 어차피 투글루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자 쿠스라우 칸은 생각을 바꿔 그들의 참언대로 국고를 열어 장병들에게 2년 반에 해당하는 봉급을 하사하였다. 역사가 아미르 쿠스라우에 의하면 당시 힌두교도 장교는 무슬림 장교보다 2배의 금액을 받았고, 해당 지출 기록은 불태워졌다 한다. 그후 쿠스라우 칸은 힌두-무슬림이 각각 반씩 섞인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델리 인근 야무나 강 서안의 라흐라와트 평원[8]에서 투글루크의 (역시 힌두-무슬림 혼성 부대인) 군대와 조우하였다.[9] (1320년 9월) 전투 전날 밤, 쿠스라우 칸은 진영 앞에 참호를 파고 그 뒤에 진흙 방벽을 세우게 하였다. 다만 그 틈을 타 재상 아이눌 물크가 이탈하여 남쪽 웃잔으로 도주하였다.[10]
투글루크는 전투 준비가 완벽하지 않다 여겨 대결을 미루려 하였으나, 금요일 아침 쿠스라우 칸이 공세를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교전에 응하였다. 쿠스라우 칸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적군을 압도하였고, 투글루크에게는 수백의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특히 바라두 부대는 투글루크의 아들 파크룻딘 자우나를 밀어내고 투글루크의 본영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좌익에 있던 투글루크의 동생 아사둣딘이 구원하려 했으나 쿠스라우 칸의 우익에 의해 저지되었고, 투글루크는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쿠스라우 칸은 샤이스타 칸에게 투글루크의 본영과 보급품을 취하게 하였다. 투글루크의 막사를 장악한 샤이스타 칸이 승리를 선언하자, 쿠스라우 칸의 병사들은 안심하고 전리품 약탈에 나섰다.
적군이 약탈에 몰두하며 분산되자, 5백의 병력과 함께 철수했던 투글루크는 마지막 승부수로 쿠스라우 칸을 노리고 필사적으로 돌격하였다. 동시에 코카르 부대의 굴 찬드라는 그 후방을 공격하였고, 갑작스러운 적의 출몰에 당황한 쿠스라우 칸은 전장에서 도주하였다. 술탄의 도주 소식은 쿠스라우 칸 진영에 혼란을 초래하였고, 굴 찬드라는 (이번에도) 왕실 차트르를 탈취하여 주군에 드리웠다. 술탄의 병사들 대부분이 도주한 후에도 바라두 힌두 부대는 코끼리를 앞세워 버텼으나, 결국 포위 섬멸되었다. 승리한 투글루크는 끝까지 저항한 바라두 부대를 학살하여 쿠스라우 칸의 핵심 지지 세력을 일소하였다. 델리 시내에 남아있던 바라두 부족도 전투 결과가 알려진 다음날, 군중에 의해 길거리에서 학살되었다.[11]
2.3. 즉위
투글루크가 치세 내내 건설에 치중하던 투글루카바드. 다만 그의 죽음과 함께 공사는 중단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승전 후 델리에 입성한 투글루크는 술탄 기야스 웃 딘으로 즉위하였고, 며칠 뒤에는 패주했던 쿠스라우 칸이 붙잡혀 살해되었다. 즉위 후 투글루크는 연고지인 물탄과 데팔푸르 출신 인사들을 조정에 기용하였다. 젊은 시절 할지 왕조 휘하에서 수십 차례 몽골군과 싸웠던 투글루크는 인도양 건너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칸이 보낸 사절단이 당도하자 그들을 처형하고 몽골인 포로들을 가혹히 대하는 등 몽골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내란을 틈타 신드 남부의 이스마일파 세력인 숨라 왕조가 타타를 점령했으나 투글루크는 직접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다만 타즈웃딘 말리크를 물탄, 카와자 카티르를 바카르, 말리크 알리 셰르를 세흐완 총독에 봉하여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1321년부터 투글루크는 기존의 시리 성채 동남쪽에 그를 대신할 새로운 궁성으로 쿠글라카바드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몽골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육중한 성벽을 지니도록 설계되었다. 그 건설에 집착한 투글루크는 델리의 모든 노동자에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수피 치슈티 종단을 이끌던 니자뭇딘 아울리야가 저주를 내렸다. 1323년 투글루크는 아들 파크룻딘을 남부로 파견하여 속국인 카카티야 왕조의 수도 와랑갈을 포위하게 하였고, 함락 후 카카티아 조를 완전 병합하여 술탄국의 영토를 넓혔다. 동시에 전공의 대가로 파크룻딘을 후계자로 봉하는 칙령을 내려 고관들에게 알렸다. 이듬해 투글루크는 1287년부터 술탄국에게서 자립한 채로 서벵골의 라크나우티 (가루다)를 통치하던 발반 왕조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당시 벵골은 1322년 샴스웃딘 피로즈 샤가 사망한 후 내전에 돌입한 상태였기에 약화되어 있었고, 투글루크는 자칭 술탄 기야스 웃딘 바하두르 샤를 패배시킨 후 사로잡았다. 투글루크는 벵골을 동서로 나누어 동부는 직할령으로 삼고 서부는 나시룻딘을 군주로 봉하여 속국으로 두었다. 이후 바하두르 샤를 대동하고 델리로 돌아가던 투글루크는 비하르 북부 티르후트의 라자와 싸워 그 역시 격파하고 일대를 병합하였다. 1325년 2월, 델리와 비하르의 중간 지점인 마닉푸르 ( 알라하바드 서쪽)를 지나던 투글루크는 목재 전각을 세워 잠시 쉬었는데, 전각이 갑자기 붕괴하며 차남 마흐무드 칸과 함께 깔려 죽었다. 사후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계획했다고 의심받는) 장남이자 재상인 파크룻딘 무함마드 자나 칸이 계승하였다.
3. 기타
투글루카바드의 외곽 요새 내에 세워진 투글루크 영묘
비슷한 시기 인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는 투글루크의 죽음이 사고로 가장한 암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
이에 쿠스라우 칸은 대장군 샤이스타 칸을 보내어 추격하게 했지만 사로잡는데 실패하였다
[2]
그는 반란 가담에 거부했으나 투글루크의 벗 바흐람 시라즈가 물탄 주둔군에게 봉기를 선동하였고, 내부 반란에 직면한 무글라티는 도주하려 했으나 투글루크의 부임기에 세워진 수로에 빠져 사로잡힌 후 바흐람 시라즈의 아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물탄 주둔군은 끝내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3]
힌두교도 노예 출신인 그는 반란 가담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쿠스라우 칸에게 반란을 알리고는 자신도 군대를 모아 데팔푸르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그는 투글루크에 의해 격퇴되어 사마나로 철수하였고, 델리로 향하려 했으나 분노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4]
당시 장교들의 반란에 직면해 있었는데, 투글루크를 지원하는 대가로 그들과 타협하였다. 다만 그의 병력이 델리에 도착한 것은 이미 투글루크가 정권을 장악한 후였다. 투글루크는 후일 그를 아즈메르 총독에 봉하였다.
[5]
투글루크에 가담 의사를 밝혔지만 무함마드 샤 루르와 마찬가지로 투글루크가 이미 승리한 후에야 델리에 당도하였다. 투글루크는 그의 직위를 유지시켰다.
[6]
투글루크는 또한 당시 와지르였던 아이눌 물크 물타니와도 접촉했으나 그는 당시 쿠스라우 칸의 궁정 내에 있었기에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술탄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충성심을 보이고자 하였다. 다만 2번째 서신을 받은 후에는 투글루크의 뜻에 동조하며 자신은 적진에 고립되어 있어 임박한 전투에서 한쪽 편에 설 수 없으나 투글루크가 델리로 진격해오면 철수할 것이며, 술탄에 오른 후 자신을 유임하든지 죽이든지 하라고 답하였다.
[7]
연대기에 따르면 지치고, 목마르고, 흙먼지에 덮힌 채로라 묘사되었다. 토벌군은 선봉장인 아미르-이-쉬카르 말리크 쿠틀루그를 비롯하여 좌익에는 탈바가 야그바, 우익에는 카즙 브라흐마와 나그가 이끄는 바라두 힌두 부대로 구성되었다. 반군은 쿠틀루그가 중앙, 그 앞에 파크룻딘 무함마드, 굴 찬드라와 니주가 이끄는 코카르 선발대, 바흐람 아이바의 좌익, 투글루크의 조카 아사둣딘과 바하웃딘이 이끄는 우익으로 구성되었다.
[8]
할지 왕조 시절의 궁전인 시리 성채 북쪽, 현재의
뉴델리 남부 일대
[9]
연대기에 의하면 양측 모두 이러한 혼성 편성에 놀라워했다고. 쿠스라우 칸의 진영의 우익은 아와드 총독 티긴, 좌익은 나그 등이 이끄는 1만 바라두 힌두 기병/코끼리 부대와 주요 대신들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투글루크의 진영은 중앙의 투글루크 본인, 선봉의 굴 찬드라 휘하 코카르 부대가 있었다. 좌익에는 투글루크의 동생 아사둣딘, 조카 바하웃딘,우치 총독 바흐람 아이바, 몽골 출신 개종자 카리, 아프간 족장 누르만드 등이 있었다.
[10]
쿠스라우 칸은 아침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다
[11]
투글루크의 장교들은 약탈을 삼갔고, 무슬림 병사들은 상대편 무슬림 포로들을 존중하였다. 하지만 코카르, 메오, 아프간, 몽골족 등 투글루크 휘하의 비무슬림 병사들은 적극적으로 약탈에 임하였다. 특히 힌두교도 포로들은 무슬림 포로들과 달리 목숨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