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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두어: فیروز شاہ تغلق힌디어: फ़िरोज़ शाह तुग़लक़
영어 Firuz Shah Tughlaq
재위 1351년 3월 23일 ~ 1388년 9월 20일
생몰 1309년 ~ 1388년 9월 20일
델리 술탄국의 19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의 사촌으로, 그가 원정 중 급사하자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피루즈 샤는 치세 초반 벵골과 히마찰 원정을 제외하면 무리한 전쟁 대신 재정 파탄으로 위기에 몰린 내정을 돌보았다. 우선 인프라 구축에 나서 운하, 병원, 여관 등을 세웠고 저수조와 우물을 신축 혹은 보수하였다. 또한 선대에 부과된 지나친 세금을 경감하였고, 빈곤층에 대한 각종 복지에 나섰다. 회복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피루즈 샤는 새로운 왕성 피로자바드와 힌두스탄의 새 중심인 자운푸르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세우는 각종 토목 공사를 벌였다.
본래 힌두 종교서를 번역하는 등 종교적 관용을 이어오던 피루즈 샤는 치세 후반기에 들어 비무슬림에 대한 지즈야를 부과하고 북인도에 샤리아를 적용하는 등 이슬람 정체성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정치에 있어 피루즈 샤는 선대와 달리 귀족들에 지나치게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하여 기득권의 세습과 세력화를 허용하였는데, 이는 후일 연이은 내전과 제국의 (추가적인)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1384년 재상 자우나 칸의 반란을 시작으로 이어진 혼란은 1388년 피루즈 샤의 사망과 함께 가열되었고, 투글루크 왕조는 10년 후 티무르의 침공으로 사실상 붕괴하고 만다.
2. 치세
왕조의 창건자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의 동생 말리크 라잡과 라지푸트 공주 나일라[1]의 아들로, 사촌 파크룻딘의 치세 시절 장군에 올랐다. 1351년 파크룻딘이 신드 원정 도중 급사하자, 당시 종군한 아미르들이 피루즈 샤를 설득하여 술탄에 추대하였다. 와지르 (재상) 카와자 자한이 이미 한 소년을 선왕의 아들이라며 옥좌에 올린 상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별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이로써 피루즈 샤는 순조롭게 술탄에 등극할 수 있었다.1350년대 델리 술탄국의 영토
즉위 후 피루즈 샤는 전임자와 달리 인도 각지에 자립한 세력들을 무리하게 토벌하지 않았다. 다만 치세 초반에는 몇몇 군사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는데, 그 주요 대상은 부유한 벵골 지방이었다. 삼분되어 있던 벵골은 1342년 샴수딘 일야스 샤가 서벵골을 통합하고, 1352년 동벵골까지 정복하며 벵골 술탄국으로 통일된 상태였다. 1353년 말엽 피루즈 샤는 벵골을 침공하여 그 수도인 판두아를 점령하였다. 다만 일야스 샤가 에크달라 성채는 2개월 간의 공성전에도 함락되지 않았고,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일야스 샤는 반격에 나서 델리 군대를 바라나시까지 추격하였고, 격전 끝에 겨우 격퇴되었다.[2] 1355년 델리로 귀환한 피루즈 샤는 일야스 샤가 벵골 전역을 회복하고 비하르 동부까지 장악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던 1358년 일야스 샤가 사망하자 피루즈 샤는 옛 동벵골의 마지막 술탄 파크룻딘 무바라크 샤의 페르시아계 사위 자파르 칸 파르스를 술탄으로 추대하며 벵골을 재차 침공하였다. 기병만 8만에 470마리의 코끼리, 그리고 다수의 보병으로 구성된 델리 군대는 이번에도 판두아를 점령하였고 일야스 샤의 후계자인 압둘 무자히드 시칸다르 샤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에크달라 성채로 피신하였다. 피루즈 샤는 이번에도 성채를 함락하지 못하였고 몬순 (장마) 철이 다가오자 연공 납부를 조건으로 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1359년) 이후 델리와 벵골 술탄국은 상호 병존을 인정한 채로 평화를 유지하였고, 피루즈 샤는 오리사 지역을 원정하여 자즈나가르의 호족 라자 가즈파티에게 연공을 내게 하였다.[3]
또한 피루즈 샤는 선대에 대패를 겪었던 히마찰 지역의 캉그라 성채를 포위하고 그 동남쪽의 네팔도 공격하여 나가르코트로 하여금 연공을 내게 하였다. 역시 선대에 복속시키지 못한 타타에게도 연공을 내게 하였다. 한편 피루즈 샤가 각지를 원정하는 틈에 북방 호라산의 타타르 칸이 펀잡을 수차례 공격하였는데, 펀잡 동북부의 구르다스푸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나가르코트 출신의 라자 칼리아쉬 팔이 피루즈 샤가 하사한 보검으로 타타르 칸의 얼굴을 베어 델리 군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피루즈 샤는 그를 치하하며 (이슬람 개종 후) 사위로 삼았다.[4] 다만 그의 여러 원정과 안정적인 내치에도 불구하고 1382년 나르마다 강 남안에 남은 술탄국의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던 칸데쉬가 자립하는 등 영토 축소를 막지지는 못하였다.
2.1. 복지와 귀족주의
피루즈 샤는 내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신민들에 대한 복지 증진과 기득권 층의 배려에 힘썼다. 우선 대중의 물적 복지 향상을 위해 많은 사라이 (객잔), 정원, 영묘 등이 세워졌고 무슬림들의 종교 교육 증진을 위해 마드라사 역시 다수 건립되었다. 빈자들을 대상으로 무상 진료를 하는 병원들도 다수 세워졌고, 빈곤층 여성들에게 디완-이-카이라트 (자선부)를 통해 결혼 자금을 지원하였다. 증설된 병원의 의료진들을 대상으로는 당시 선진 의술로 여겨지던 유나니 (그리스) 의학이 장려되었다. 그외에 피루즈 샤는 델리에 많은 공공 건축물을 세웠고, 그의 치세동안 300여개의 마을이 세워졌다. 그는 5개의 대수로를 재건 혹은 신설했는데, 그중에는 프리트비라즈 차우한 시기에 세워진 서야무나 수로도 있었다. 이로써 하리아나 지방의 농경지가 넓어져 곡물과 과일 생산량이 늘어났다. 경제 부흥을 바탕으로 피루즈 샤는 델리 내외에 많은 건설 사업을 벌였다.두번째로 기득권인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피루즈 샤는 우선 공적에 따라 작위를 하사하는 대신 피루즈 샤는 귀족들로 하여금 아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세습하도록 허가하였다. 군인의 경우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심지어 노예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귀족들의 봉급도 인상되었고, 수족 절단형 등의 가혹한 처벌도 금하였으며 선대에 인상된 토지세도 경감해주었다. 따라서 피루즈 샤의 치세는 중세 인도에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부패한 시기로 평가된다.[5] 종교 측면에 있어 피루즈 샤는 신실한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법인 샤리아를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전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않던 비무슬림 신민들에 대한 지즈야가 부과되었고, 성인의 무덤에 소원을 비는 등 신학자들이 비이슬람적이라 여긴 관습들의 철폐에 나섰으며 이단 소지가 있는 종파들을 박해하였다. 따라서 울라마 (성직자들)는 피루즈 샤를 매우 지지하였다.
피루즈 샤는 지즈야 부과와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들에 대해 후히 포상하였고, 힌두 농민들에 대한 귀족들의 수탈이 더해져 북인도 각지에서 개종자가 속출하였다. 그중 대표적으로 차우한 라지푸트 일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현재 카임카니 부족으로 남아있다. 국정에 있어 피루즈 샤는 힌두 개종자 출신으로, 옛 와랑갈 총독이던 말리크 마크불 틸랑가니 (자한 칸)[6]를 중용하였고, 원정 시에는 그에게 수도를 맡겼다. 한번 피루즈 샤가 신드와 구자라트 원정을 위해 6개월간 수도를 비운 후 연락이 거의 끊긴 동안에도 델리의 안정이 유지되자 그에 대한 신임은 더욱 커졌다. 피루즈 샤는 말리크 마크불을 형제라 부르며 칸-이-자한 작위를 내려 재상을 능가하는 권력을 주었다. 2천의 후궁을 거느리며 실질적으로 국정을 도맡았던 말라크 마크불이 1368년 사망하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 아들 자우나 칸이 그의 작위를 계승하였다.[7]
2.2. 건축광
페로즈 샤 코틀라 유적 (아소카 대왕 철주 & 자미 마스지드)
37년의 치세 동안 피루즈 샤는 북인도 각지에 여러 개의 신도시를 세웠다. 우선 1354년 델리 북쪽 외곽 (현 뉴델리와 올드 델리의 경계 지점)에 피로자바드를 세워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피로자바드의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 옆 궁전 옥상에 델리 북쪽 180 km 지점의 암발라에 있던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옮겨와 세웠다. 1359년에는 델리에서 서북쪽으로 120km 지점, 한시의 서쪽 방면에 히사르를 세웠다. 이후로도 3개의 도시를 더 세워 델리에서 서북쪽으로 150km 지점에 파테하바드, 펀자브 동부 술테즈 강의 동안에 피로즈푸르를, 그리고 힌두스탄 한복판에 술탄 파크룻딘 (자우나 칸)을 기리며 자운푸르를 세웠다. 그중 자운푸르는 피루즈 샤 사후에 세워진 자운푸르 술탄국의 수도가 되어 번영하였다.
2.3. 치세 말엽의 혼란
피루즈 샤는 본래 자신의 장남 파테흐 칸을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가 1376년 사망하자 상심에 빠졌고 샤리아 (이슬람법) 적용에 박차를 가하며 그외의 국정을 등한시 하였다. 그리고 피루즈 샤를 옹립한 공신들의 자손들이 그대로 기득권을 이어받아 비무슬림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그러던 1384년 피루즈 샤가 와병하자 재상 자우나 칸 (말리크 마크불의 아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술탄의 막내 아들 무함마드 샤와 대립하였다. 자우나 칸은 여러 아미르들을 임명, 호의를 베풀며 권력을 강화하였고 병석의 술탄을 설득하여 무함마드샤 대신 파테흐샤의 아들인 장손 투글루크 칸을 후계자로 봉하게 하였다. 그에도 만족하지 않은 자우나 칸은 더 나아가 무함마드 샤를 해임하도록 권하였는데, 재상이 폭주한다 여긴 피루즈 샤는 (예상과 달리) 거부권을 행사하며 자우나 칸을 해임하는 강수를 두었다. 역풍을 맞은 자우나 칸은 거병하려 했으나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다만 이후로 여러 반란이 발생하였고, 혼란 속에서 1387년 8월 노쇠한 술탄은 무함마드 샤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그에 반발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자 무함마드 샤를 추방하고 다시 투글루크 칸을 후계자로 선임하였다. 1388년 피루즈 샤가 향년 79세로 사망하여 하우즈 카스의 영묘에 안장되었다. 사후 투글루크 칸이 기야숫딘 투글루크 샤 (투글루크 2세)로 계승했으나 곧 숙부 무함마드 샤와 사촌 아부 바크르 샤의 반란에 직면하여 1년만에 후자에 찬탈당하였고, 아부 바크르 샤 역시 그 이듬해 무함마드 샤에게 찬탈당하였다. 이로써 그나마 안정을 찾는듯 했던 델리 술탄국은 1394년 무함마드 샤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들과 파테흐 칸의 또다른 아들 누스라트 샤 간에 4년에 달하는 내전에 돌입하며 크게 쇠퇴하다가 (내전이 간신히 끝난) 1398년 티무르의 침공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리고 15년 후 피루즈 샤의 손자 나시룻딘 마흐무드 샤가 델리를 내어주며 투글루크 조는 종언에 이른다.
3. 평가
하우즈 카스의 페로즈샤 영묘. 델리 지하철 마겐타 선으로 접근 가능하다.
피루즈 샤가 생전 귀족들에 보인 관용적인 태도는 귀족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의 치세 말엽부터 10년 넘게 (1384-90년, 1394-97년) 이어진 내전은 투글루크 왕조의 쇠락을 야기하였다. 피루즈 샤의 계승자들은 가뜩이나 능력이 부족한 군주였고, 설사 능력이 있다 해도 귀족들을 전혀 제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피루즈 샤는 파크룻딘 대의 혼란을 잠재우고 투글루크 조의 남은 영토를 유지시키며 사회/경제적 안정을 회복한 중흥 군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투글루크 조의 멸망 원인을 제공한 암군으로도 평가된다.
4. 기타
피루즈 샤의 죽음을 전후로 한 내전의 결과 과거 자우나 칸과 결탁했던 귀족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리고 집권한 무함마드 샤와 마흐무드 샤는 이미 구자라트, 라지푸트, 힌두스탄 등을 상실하고 펀잡과 델리 근방의 축소된 영토만을 지니고 있었기에 더이상 북인도의 패권을 유지하지도 못하였고, 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공한 티무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델리를 내어주고 사실상 멸망하고 만다.
[1]
바티 라지푸트 왕공 라나 말의 딸로, 투글루크 가문의 근거지 데팔푸르 출신이라 한다
[2]
혹은 피루즈 샤가 거짓 후퇴를 통해 일야스 샤를 성밖으로 끌어내어 패배시켰으나, 습한 풍토에 병사들이 적응하지 못하자 결국 일대를 병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고도 한다
[3]
이때 마하나디 강 하류의 쿠타크가 점령되고 힌두 성지인 자가나트 사원이 약탈되었다 하나 정황상 벵골 술탄국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부부가 낳은 11명의 아들들은 후일 바드파기 카스트를 이루게 되었다 한다.
[5]
일례로 술탄은 기준에 부적합한 말을 통관시키기 위해 세관에게 금화를 쥐어주기도 하였다.
[6]
개종 전에는 카카티야 왕조의 장군 간나야
[7]
뉴델리 중남부의 니자뭇딘에 있는 말리크 마크불의 무덤은 인도의 첫 팔각 형태의 영묘이다
[8]
이는 고대 제왕에 대한 동경 의식의 일환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