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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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 |
혁명가 & 저항가들 |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 |
대통령들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 |
첫 여성들 |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 |
범법자들 |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 |
예술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 |
종교인들 |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 |
팝 아이콘들 |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 |
제국 건설자들 |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 |
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color=#fff><colbgcolor=#000> 존 D. 록펠러 John D. Rockefe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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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데이비슨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
출생 | 1839년 7월 8일 |
미국 뉴욕 주 리치퍼드 | |
사망 | 1937년 5월 23일 (향년 97세) |
미국 플로리다 주 오몬드비치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업인 |
신체 | 180cm |
학력 |
오웨고 아카데미 (
전학, 1851 ~ 1853) 클리블랜드 센트럴 고등학교[1] ( 졸업, 1853 ~ 1855) 챈슬러 대학교[2] (1855) |
정당 |
|
부모 |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 (1809 ~ 1906)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 (1813 ~ 1889) |
형제자매 |
누나 루시 록펠러 형 프랜시스 록펠러[3] 남동생 윌리엄 록펠러 주니어, 프랭크 록펠러 여동생 메리 앤 록펠러, 프랜시스 록펠러 이복형제 클로린다 록펠러, 코넬리아 록펠러 |
배우자 | 로라 셀레스티아 스펠먼 록펠러 (1864년 결혼 / 1915년 사별) |
자녀 |
장녀 엘리자베스 록펠러 차녀 앨리스 록펠러[4] 삼녀 알타 록펠러 사녀 에디스 록펠러 장남 존 D. 록펠러 주니어 |
종교 | 개신교 ( 침례회) |
관련 | 시카고 대학교, 록펠러 대학교, 록펠러 센터 |
재산 |
사망 당시 재산 : 14억 달러(한화 약 2조 1,000억원) 인플레이션 적용 : 295억 달러(한화 약 42조 4,300억원) |
서명 |
[clearfix]
1. 개요
<nopad> | |
1902년 이후 탈모증으로 콧수염이 빠진 후 찍은 사진 |
[navertv(43993222)]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5부 - 그레이트 패밀리 · 거대재벌 100년[5] |
미국 굴지의 기업인이다. 석유 산업에서 이름을 떨쳐 석유왕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앤드루 카네기와 함께 대공황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기업가였으며, 카네기 멜런 대학교를 설립한 앤드루 카네기, 밴더빌트 대학교를 설립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처럼 시카고 대학교와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다만 동시에 당대 석유 산업의 90%를 독점한 독점왕으로 악명을 얻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에너지 회사를 보유했던 그의 영향으로 반독점법까지 만들어져서 현재는 시장 상태가 블루 오션이 아닌 이상은 한 기업이 산업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6]
2. 상세
1937년에 록펠러가 사망할 당시 그의 재산은 14억 달러(한화 약 2조 1,000억원)에 달했는데,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를 이용해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7] 2024년 환율로 약 295억 달러로, 한화로 환산하면 약 42조 4,300억원이다. 이는 일각에서 록펠러가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였다고 주장하는 것과는[8] 전혀 맞지 않고[9] 오늘날의 세계적인 갑부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1937년 당시 미국 GDP가 930억 달러(한화 약 133조 7,700억원)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경제 규모가 지금보다 작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재산인 셈이다. 실제로 록펠러의 재산은 당시 미국 GDP의 1.5%에 달했는데, 2024년 기준 미국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의 재산이 미국 GDP의 0.8%를 차지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던 셈이다.[10]그리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한 1913년 기준으로 록펠러의 개인 재산은 9억 달러(한화 약 1조 2,900억원)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그 해 미국 GDP(391억 달러, 한화 약 56조 2,400억원)의 거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며, 2024년 환율로는 약 279억 달러, 한화로는 약 40조 1,000억원이다. 엄청난 기부에도 불구하고 재산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는데, 이는 록펠러가 스탠다드 오일 신탁 및 기타 투자에서 얻은 수익도 막대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어 표기 ロックフェラー(록쿠페라)에서 중역되어 들어온 록펠러 표기법이 널리 통용되며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예외로도 인정된다. 다만 발음은 /ˈrɑːkəfelər/(옥스포드 사전 기준)이라 가운데에 e가 묵음이 아니고 4음절이므로 록펠러가 아닌 라커펠러 또는 로커펠러가 훨씬 비슷한 표기이며, 록펠러가 일본식 발음이고, 라커펠러가 비교적 원어발음에 가장 가까운 셈이다.
3. 생애
3.1. 유소년기
1839년 7월 8일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와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의 4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정부 낸시 브라운 사이에서 얻은 두 딸까지 합하면 4남 5녀 중 셋째다.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이 문구만 보면 진짜 흙수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록펠러의 집안은 당시에도 중산층 이상[11]인 경제적으로 나쁘진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는 그 자신의 기적 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2] 물론 유년 시절 대비 이후 재력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한 거다.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한 사기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탕아였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피워서 사생아를 두 명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13]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장사 수완 등의 교육은 혹독하게 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에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씩 주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게 시켰으며, 어머니의 직장에서 일손을 거드는 식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익혔다. 심지어 아버지는 성인이 된 록펠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낼 정도였다. 또한 하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록펠러는 의심 없이 아버지 품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조차도. 마치 실제 야생에서 야생 동물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록펠러는 일생 동안 엄청난 철두철미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14] 이 영향인지 훗날 철인으로 불리며 미국의 최고 부자가 된다.[15]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한 달 앞둔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 직원으로 채용된다. 록펠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고작 몇 년 전이었는데, 직후 대통령이 되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고 부통령은 장가 가기 전까지 문맹이었으니 고졸만 해도 당시 사회에선 나름 괜찮은 학력이었다.[16]
3.2. 창업, 그리고 석유왕이 되다.
중년의 록펠러 |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 나가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 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면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갚는 방식을 이용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공했고, 꽤나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물론 록펠러가 본격적으로 거상이 되는 건 이후 닥친 남북 전쟁과 이른바 재건 시기에 기회를 포착하고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 덕분이 컸다.
남북 전쟁 당시 모건-록펠러-듀폰 커넥션[17]의 일원이던 록펠러는 전쟁 이후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최초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18] 결과적으로 그 유전 지대는 꽤나 번성하게 된다.[19]
유전이 발견된 초기만 하더라도 록펠러는 이쪽 관련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석유 채굴에 눈을 돌리지만 진짜 돈이 되는 사업은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사업이라는 걸 깨닫고 '이거다!' 라는 느낌을 받아 정유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 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그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 외에 새뮤얼 앤드류스, 헨리 플래글러까지 끌어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 미더워했고, 결국 앤드류스, 플래글러와 손을 잡고 기업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데,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 5만, 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7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 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클리블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가 주장한 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으며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몰랐다. 또 이때 상당히 운이 좋기도 했는데, 바로 존 록펠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준 것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20]
당시 그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자체는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의 1인자였던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옮겨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차가 고장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21]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제공한 악명 높은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 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그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 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다드 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져만 갔고, 그 영향력은 다른 업계에까지 미쳐,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그리고 밴더빌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톰 스콧에게 가장 큰 물량을 제공하는 고객으로서, 리베이트를 점점 올려가며 운송 요금을 후려쳐갔다.[22]
사업은 커지고 주머니는 두둑해져 갔지만,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일화가 스탠더드 오일 창설 직후에 있다. 본인 소유의 정제소를 시찰하던 중 록펠러는 본인 회사 소유의 원유 운송용 나무통의 땜질이 총 40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휘하 직원에게 "38번으로 해보시오."라는 말을 던지고 확인 결과, 38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 중에는 새는 것이 있었지만, 39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은 새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번의 땜질 지시가 담긴 공문이 전 지사 및 사원에게 회람되게 된다. 장년~노년 즈음에, 관련하여 질문을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걸로 꽤 많이 아꼈지."라고 회상하게 된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하게 하였고, 옷이 해지기 전에는 절대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서 알바도 시켰는데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다고 한다.[23]
이런 점을 볼 때 분명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간에서 욕도 많이 먹은 사람이지만, 문헌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국가나 법률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신념대로 일을 처리한 사람으로 보이며 이는 석유 산업을 수직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회사 이름이 STANDARD인 이유는 당시 등유 품질이 나빠 등불을 켜놓고 자다가 폭발로 화재가 나는 등 불순물이 많은 저질 등유가 많았는데 우수한 기본 품질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었으며, 땅에 파이프만 꽂으면 석유가 나오는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유 개발과 정유업에 뛰어들어 블랙홀로 빠질 수도 있는 석유 산업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초기에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필라델피아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록펠러는 43세에 미국 최고 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며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메사비 대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필두로 철강 사업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쪽에는 본좌인 앤드루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마침 카네기의 사업을 인수한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스탠더드 오일 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써 록펠러 측에서는 모건의 철광산업 트러스트 형성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 와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은 꾸준히 성장하여 53세에 확고한 위치를[24] 다진다.
3.3. 반독점법과 해체
이후 미국의 주마다 있는 스탠더드 오일 사의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주보다 맨해튼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주의 스탠더드 오일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4개의 회사로 분리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합종연횡을 거쳐 현재도 존속 중이며, 소위 7대 석유 메이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스탠더드 오일 오브 뉴저지(지주회사)는 현재 석유회사의 본좌인 엑슨[25],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욕)는 이후 모빌이 되었다가 두 회사가 합병하여 엑슨모빌이 되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현재의 쉐브론(칼텍스)이다.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 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왜냐하면 독점 상태에서 경쟁사를 말려죽이기 위해 갤런당 6센트라는 염가에 팔고 있었는데, 더 이상 독점 상태가 아니니 새로 쪼개진 회사들이 너도나도 가격을 올려 40센트 가까이 폭등한 것이다. 퍼센트로 따지면 거의 700% 가까운 폭등이었다. 이로 인해 물가상승률이 1911년 0.00%에서 1912년 2.11%로 상승하였고, 루스벨트 행정부의 지지율 폭락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다.
거기에 스탠더드 오일의 공급망이 붕괴가 되는 바람에 등유 가격도 폭등해버려서 정부에서는 성난 국민들을 달랠려고 애를 썼다.
결과적으로 이 기업분할로 인해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국정 회의에서 "요즘 월 스트리트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더 해체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한다는군."이라고 언급했을 정도.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해산될 즈음 같이 골프를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정유업계에서 걸프 오일, 텍사코, 펜조일을 포함한 새로운 업체들의 설립과 성장이 쉬워졌고 스텐더드 오일의 위세에 눌리던 유럽계 석유 회사들도 진입도 쉬워져서 이들은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실제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브라노벨과 경쟁을 벌여 결국 승리했는데, 이 이후의 세계 석유시장은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한 기업이 독점했던 셈. 이런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당시 미국에 만연했던 트러스트나 독과점 기업들과 비교하더라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사례였다. 일례로 JP모건의 US스틸조차도 미국 철강업을 80% 선에서 독점하는 데 그쳤다.
3.4. 시한부 선고와 자선사업 시작
1902년 병으로 인해 수염이 사라진 모습 |
록펠러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탈모증과 비슷한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 받았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하나님께 바치고,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이라고 말했고, 록펠러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자선사업을 시작하였다. 록펠러는 이때 가슴이 확 트이면서 행복을 느꼈다고. 록펠러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 후 40년이나 더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리버사이드 교회를 세웠다.
사실 50대 중반부터 이미 록펠러는 과도한 다툼과 경쟁 때문인지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및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록펠러 본인도 50대 이후부턴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했다.
실제 20세기 들어 록펠러는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상태였고, 가문과 기업의 실질적인 지휘는 아들인 록펠러 주니어가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4년, 월급을 올려 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회사가 고용한 경비원들과[26] 주지사가 파병한 주 방위군이 총질을 해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러들로 학살 사태가 일어난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 이후 전미광부노조가 세운 러들로 학살 위령비 |
이런저런 여파로 우울증이 심해지던 록펠러는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 라는 말을 듣게 되고[27]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고아원, 도서관을 세우고 연약한 자를 돕는 일 등을 하게 된다.[28] 다만 자선사업에서도 입지가 나쁜 곳보단 될 만한 학교를 지원하는 편이었고, 연장선상인지 록펠러 재단도 의학과 과학 등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집중했다.
노년의 록펠러는 죽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골프를 칠 정도로 정정했고, 죽기 4일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를 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
1936년 4월 24일 촬영된 록펠러의 모습[29] |
그러다 1937년 5월 23일[30] 오전 4시 5분 플로리다주 오몬드 비치의 별장에서 잠을 자다가 동맥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7세.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장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록펠러는 1839년생이므로 매우 장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31] 한마디로 인물 사진이 막 만들어지던 시절에 태어난 인물이[32] 유성 영화 상용화 후에도 1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시한부 판정 이후 1년밖에 못 살 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한부 판정 이후 43년이나 더 살았다. 막내 손자인 데이비드 록펠러(1915년생)가 성인이 되고 2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
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 위치한 록펠러의 묘 |
이후 록펠러의 기업과 재산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에게 상속되었고[33] 그의 가문은 재력을 바탕으로 유력가로 거듭나게 된다. 정치계에 입문한 후손도 나왔는데[34] 뉴욕 주지사에 네 차례 당선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이 된 손자 넬슨 록펠러가[35] 대표적이다. 록펠러 가문의 당주는 1915년생인 데이비드 록펠러며 그는 2017년 3월 20일 10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뒤를 이을 당주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데이비드 록펠러의 장남이자 록펠러 재단 이사회 일원인 1941년생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David Rockefeller Junior)가 유력하다.
4. 음모론
유대인 배후자본설 관련 음모론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이고 마치 그가 유대인인 것처럼 나오는데, 존 록펠러는 유대인을 별로로 생각했다. 유대인은 수천 년간에 걸쳐 혼혈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인종이나 혈통보다는 풍습과 유대교로 유대인의 여부를 가리는 게 크다. 록펠러 가문은 일단 독일계 미국인이었으며[36] 독실한 기독교( 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그것도 종파가 엄격한 침례회[37]라 평생 술도 마시지 않았다. 카네기가 록펠러를 놀릴 때 일부러 술병을 선물했을 정도다. 게다가 당장 그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제법 흔하던 반유대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 게다가 영국 쪽 로스차일드 가문은 스탠다드 오일이 쪼개질 때 뒤에서 교묘히 부추기는 짓을 하기도 했다.[38]그 외에도 그나마 설득력 있는 음모론 중에 록펠러 가문이 아직도 엑슨모빌과 셰브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석유 업계를 지배하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홀라당 넘겨줬을 리도 없으니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에도 이러한 음모론이 있다. 그쪽은 둘 다 아직 세계 금융은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모건 가문이 지배한다는 내용이고, 역시나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거기다 이는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전 이야기로 지금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39] 물론 넬슨 록펠러까지만 하더라도 재단 소유의 기업에서 일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록펠러 가문은 재단을 통해 기업 집단을 지휘하는 기업가 가문이 아닌 정치를 비롯, 사회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는 유력가 가문으로 체제 전환이 끝난 상황이다. 또 록펠러가의 거대한 재산들도 계속 후손들이 분할 상속해서 현재는 많이 쪼개진 상태다.
5.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록펠러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둘째인 차녀 앨리스가 1살 때 요절했기에 실질적으로 장성한 건 1남 3녀이다.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는 중산층 가정 출신의 애비 올드리치와 결혼해서 5남 1녀를 두었다. 손자가 5명, 친증손자가 10명이다. 록펠러만큼은 아니더라도 후손들 역시 많은 재산을 보유하며 가장 부자인 경우 세계 부자 순위에도 이름이 종종 거론되는 등 제법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록펠러 재단으로 간접 상속시켰기에 가문의 부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꾸준한 기부 활동과 후손들의 분할 상속의 결과로 록펠러 재단의 자산은 2020년 기준으로 63억 달러에 불과(?)하다. 다만 1970년대 정치적 야망이 컸던 3대 넬슨 록펠러가 포드 정부의 부통령을 지내기 위한 인준청문회로 불려가 록펠러 재단의 재산과 탈세 의혹을 증언하면서 록펠러 재단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후에야 제대로 된 기부 활동을 했지만 재단으로 간접 상속되었던 재산을 또 다른 곳으로 빼돌렸으리란 의심이 가시지는 않아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3년 환율로도 295억 달러나 되는 석유왕 당대의 재산을 3대까지 재단을 통해 6대 동안 거의 고스란히 유지해왔으니 말이다.[40]
6. 사업 방식
사업 경쟁자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박살냈던 걸로 유명하다. 덕분에 그는 당대 90%의 석유 산업을 독점하는 이른바 '독점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상 이 사람 한 명으로 인해 미국에서 반독점법이 제정되었을 정도. 덕분에 지금 독점으로 욕 먹는 기업들은 사실 이 당시 록펠러 기업의 독점에 비하면 나름 귀여운 수준이긴 하다. 다만 상기했듯 본인도 이런저런 경쟁에 스트레스를 달고 살아 꽤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모양이다.사업적으론 무자비했지만, 한편 이런 경쟁 속에서 나타났던 치킨 게임 양상은 소비자들에겐 이득이 되었다. 실제 그가 이끈 스탠다드 오일은 갤런당 30센트 하던 석유 가격을 갤런당 6센트, 1/5로 줄여버리고 독점하고 있는 동안 이 가격을 절대 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 환원의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경쟁 기업의 시장 진입을 엄두도 못 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41]
7. 오해와 진실
-
"록펠러는 석유 사업권을 독점한 이후
유가를 올려서
폭리를 취했다?"
거짓이다. 유가를 떨어뜨린 후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유가를 떨어뜨린 덕분에 석유를 기반으로 한 사업들은 대대적으로 발달했다.[42] 이 부분은 오히려 록펠러가 석유를 독점한 뒤 계속해서 싼 가격으로 공급한 것이 진실로[43] 대기업의 가격 혁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막대함을 알려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44] 당장 미국 전자상거래 업계의 큰손으로 군림 중인 아마존닷컴이 영업 이익 저하를 감수하고 약탈적 저가격으로 경쟁자 진입을 막고 있는 걸 보자. 미국은 한국처럼 시장이 작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경쟁자가 완전히 고사한 뒤에 한 기업에 모든 게 좌지우지될 것이라 보기 어렵다. 우리 고전 허생전에도 나오듯이 나라가 좁으면 쉽게 좌우되지만 미국은 스케일이 다르다. 록펠러는 경제적 해자 형성을 목적으로 덤핑 행위를 했지만 사회 환원이라는 부수적 결과도 얻었다. 게다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록펠러의 탐욕은 고래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 그가 등유와 휘발유의 가격을 떨어뜨리자 고래 기름의 수요까지 사라졌기 때문에 고래의 대량 학살은 자취를 감추게 됐기 때문.
-
"록펠러는 평생 무지막지한 철인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 그는 덤핑, 독점, 소송 등으로 자신의 경쟁자들을 철저하게 짓눌러버리는 등 사업적인 면에서는 냉혹한 성격 그 자체였지만, 사적으로는 경건주의적 성향을 보인 인물로 도망 온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는 등 박애적인 면모도 보인 인물이었다. 아내가 노예 해방 운동 같은 것에 종사하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슬쩍 이를 도우는 등의 인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기본적으로 자신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45][46] 그야말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그는 독실한 침례회 교인이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처음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수입의 일부를 꾸준하게 기부해왔던 기록도 남아있다.
8. 기타
- 뉴욕시민들은 상수도 요금을 내지 않는다. 존 록펠러가 유언으로 사후 100년 간 수도요금을 대납해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2036년 말까지는 혜택이 계속될 예정이다. 물론 기업들은 내고 있으며 시민들도 하수도 요금은 내고 있다. 수도 사업자가 기준 요금은 계속 올리고 있다.
- 합법적으로 돈 주고 남북 전쟁 때 군대에 가질 않았다. 노년의 록펠러는 이 기부금의 숫자를 점점 늘려서 얘기하곤 했다는데, 그 숫자는 5명분에서 점점 10명, 20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에겐 병역회피가 콤플렉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 토머스 에디슨과 존 피어폰트 모건, 니콜라 테슬라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선도한 전기산업을 엄청나게 견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석유산업의 주축은 등유와 그 조명이었기 때문. 허나 결국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지 전기가 조명의 대세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석유 산업은 내연기관과 플라스틱이라는 대박을 잡아서 세계 산업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또한 원자력이 대두되기 이전에는 전기 또한 상당부분 석유로 생산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이 사람조차도 현대 미국 중산층보다 가난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부자조차도 누릴 수 없었던 현대 문명의 산물( 컴퓨터, 인터넷, 컬러 텔레비전 등)을 너무나 쉽게 누리고 있다는 의미로, 그만큼 현대 기술의 발전 수준이 매우 빠르다는 일종의 비유법이다. 물론 진지하게 따져보면, 기술 수준이 많이 올라와서 유흥거리가 풍족해진건 사실이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랄 수 있는 의식주 자체는 현재 초고소득층보다도 당연히 록펠러가 훨씬 잘 먹고 잘 살았다.
- 허쉬의 창업주였던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하고는 상당히 사이가 나빴다.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의 선량한 성격상 록펠러의 노동운동 탄압을 마뜩잖게 보았기 때문이다.
- 콧수염을 기르고 다녔으나, 60대가 되면서 탈모증 때문에 콧수염이 빠지게 되었다. 문서 상단의 사진 중 위의 사진은 콧수염을 기르던 1895년 시절의 사진이고, 아래의 사진은 콧수염이 없어져버린 1902년의 사진이다. 같은 사람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
- 록펠러의 동업자이면서 스탠더드 오일의 재무이사를 지냈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라는 인물은 의외로 한국과 인연이 있는데, 바로 세브란스병원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에 사정이 열악했던 제중원의 소식을 듣고 거액의 후원금을 내주어서 이 돈으로 병원을 새로 지은 제중원 측에서는 새 병원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렸다고 한다. 또한 세브란스병원을 모체로 세워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훗날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 록펠러의 이름에서 따온 오이스터 록펠러라는 음식이 있다.
9. 어록
하루종일 일하는 사람은 돈 벌 시간이 없다.
나는 그저 나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을 채용했을 뿐이다.
진정 부유해지고 싶다면 소유하고 있는 돈이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도록 하라.
성공하려면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
[1]
Cleveland's Central High School. 당시 클리블랜드 지역에 처음으로 생긴 공립고등학교였다고 한다.
[2]
현재는 사라진 대학교. 록펠러가 재학시에는 상과대학교였다.
[3]
요절했다.
[4]
요절했다.
[5]
2017년 6월 10일 방영된, 20세기 동안 세계를 겉과 음지에서 움직여 온 대표적인 거대 재벌들의 흥망성쇠를 다룬 다큐로, 존 록펠러 가문에 주요 초점이 맞춰져 이야기가 진행된다.
[6]
다만
디즈니나
아마존처럼 은근슬쩍 우회하는 사례가 존재하긴 한다.
[7]
다만 환산 기준도 자료마다 좀 다르긴 하다. 애초에 정확한 환산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다.
[8]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 1위가 록펠러,
만사 무사 왕이 2위,
앤드루 카네기 회장이 3위였다고 한다.
[9]
2024년 기준
세계 부자 순위 기준으로 50위권 수준에 그친다. 물론 1937년 사망한 사람의 재산이 거의 90년 후 기준으로도 Top 50 수준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인 것도 맞지만 말이다.
[10]
미국의 GDP는 2024년
IMF 추계 기준으로 28조 8,600억 달러(한화 약 4경 1,500조원)고, 머스크의 재산은 2024년 12월
포브스 추계 기준으로 4,640억 달러(한화 약 667조 3,000억원)다.
[11]
청소부에서 부자가 되었다는 네덜란드 금수저 후손인 웨인 후이젠가 같은 면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ckefeller_family
[12]
자수성가를 참고해보면 의외로 조건이 괜찮았던 사람들이 상당하다. 물론 중산층 이상의 환경에서 자란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13]
1856년이었으니 장녀만이 성인이었고, 그나마 존 록펠러와 바로 손아랫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17세와 15세로 그나마 장성한 청소년이었다.
[14]
시중에 돌아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탈무드 서적에도 이 얘기를 토대로 한 내용이 실려있다.
[15]
그와 라이벌로 불릴 사람은 강철왕 카네기나 은행왕 존 피어폰트 모건 정도다.
[16]
대신 링컨처럼 나중에라도 배운 사람들은 꽤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도 은근 있기는 했다.
[17]
남북전쟁 때 북군 화약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 생산했다.
[18]
석유는 1860년대에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전략 자원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선박용 석유 보일러를 개발한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 배의 동력은 석탄이었으나, 석유를 사용할 경우 액체라 공간도 덜 차지하고 에너지 효율도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텍사스에 거대 유전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부상하고, 영국이 자국의 석탄 산업을 포기하고 당시 영국의 괴뢰국이었던 이란에서 석유를 가져오게 되어 중동 지역을 최초로 주목하게 되는 나비효과를 낳게 된다.
[19]
단순 석유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고, 석유에서 등유를 정제할 기술이 있어야 한다. 등유는 전기가 없던 시절 밤을 밝혀주는 데 유용했기에 그 수요는 대단했다. 물론 등유만 유일한 연료는 아니었고 고래 기름같이 동물성 기름도 쓰였으나 단가가 비쌌다.
[20]
참고로 윌리엄도 사기나 여러 편법에 굉장히 능해서 비도덕적인 꼼수로도 돈을 많이 벌었다. 1890년대에
유령회사를 이용해서 4천만 불이나 되는 돈을 꽁으로 얻은 사건도 있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교육을 받은 난형난제.
[21]
참조.
[22]
리베이트 시스템이란, 한 드럼 배송 이용이 만 원이면 나만 다시 나중에 이천 원 돌려받는 방식을 말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랑 같은 배송비를 내지만 알고보면 왕창 할인받기 때문에 다른 회사는 곧 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게임"의 결과는 1870년대의 밴더빌트-톰스콧 동맹에 의한 운송비 담합으로 인한 또 다른 기업 전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승리자는 송유관이라는 새로운 시스템과 인프라를 날로 먹는 데 성공한 록펠러가 된다.
[23]
다만,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토록 한 것은 록펠러가 아니라 그의 부인 세티의 결정이었다. 그는 아이들 모두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싶어했으나 세티는 자전거를 공유해야 아이들이 양보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반대했다. 세티는 남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검소한 인물이었다.
[24]
당시 기부 사업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이대로 축재를 내버려두다간 회장님이 본인의 돈에 깔려 죽을 수 있다고까지 경고할 정도.
[25]
스탠더드 오일의 약자 SO를 글자 그대로 읽은 브랜드인 Esso로도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엑슨이 '에키손'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는 뜻인 額損과 발음이 같아서 2002년까지도 에쏘 브랜드를 사용했다.
[26]
말이 경비원들이지 사실상 돈으로 고용한 갱단이나 다름없었다.
[27]
이때 그는 대중들을 위한 기초 교육과 기초 의료 시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주었고, 이는 나중에 록펠러가 기부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8]
말년의 이미지 개선 작업일 뿐이었다고 평가 절하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록펠러는 청교도로서 20대부터 이미 기부 등을 해오던 사람이긴 했다. 그리고 은퇴 이후 평온한 삶은 록펠러가 평생 품었던 숙원이었다.
[29]
사망 약 1년 전이다.
[30]
바로 전날
소련에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31]
미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1937년 기준으로 58세였고, 2021년 기준으로도 73.5세에 그친다. 물론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평균수명이 낮은 축에 속한다. 미국이 세계적인 선진국임에도 평균수명이 그다지 높지 않은 대표적인 이유는 미국은 약물 남용이 너무나 심하고 비만율이 매우 높고 총기규제가 느슨해 총기사고가 느는 등 자유라는 명목 하에 방임되는 수많은 사회 문제 때문이다. 거기다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 또한 이해관계에 의한 로비 때문에 빈번히 막히고 있다. 물론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데다 세계 기술의 중심지이다 보니 잘 살고 잘 관리하는 사람들은 100세~110세 이상 사는 경우가 많다.
[32]
록펠러가 태어나던 해인
1839년에 프랑스의 발명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입을 발명했다.
[33]
그의 가문은 상속세 때문에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련 법안의 입안 논의가 늦어졌더라면 상속이 늦어졌을 거라는 예측은 있지만 실제로 당시 상속법은 굉장히 느슨했기 때문에 록펠러 2대째가 가문의 힘을 이어받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34]
유력 정치 가문과 결혼한 덕이 컸다. 록펠러의 사돈 집안은 당시
유명한 상원의원이었다.
[35]
공화당 내 리버럴 컨셉으로 온건파 혹은 자유주의 공화당 시절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민주당 행정부에서 국무 차관 등을 지내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미국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쳐 1970년대 '록펠러 공화당'이라는 명칭까지 나돌 정도였으나, 80년대 이후 보수 세력이 장악한 공화당에서 비주류가 되었다.
[36]
부계는 라인란트에서 온 독일계였으며 어머니 쪽은 스코트계 얼스터(북아일랜드)인이었다.
[37]
미국 침례회(ABCUSA)의 전신인
북침례회(Northern Baptist Convention)에 속한 교회를 다녔다.
[38]
다만 이는 로스차일드 남작뿐만 아니라
존 피어폰트 모건 등 당시
월 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앞에선 웃고 뒤에서는 칼 꽂는 경우가 흔하긴 했다.
[39]
실제 당시는 록펠러 가문의 힘이 최전성기에 달했을 시절이다. 손대는 기업마다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미국의 동아시아권 진출의 첨병 역할 또한 수행했으며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맨해튼 금융가의 실권자로 군림하는 등 그 힘을 미국 내외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 그 정도 영향력이 있었다.
[40]
쉽게 말해 1937년부터 2020년까지 70년 넘게 기부 등으로 매년 약 3.2억 달러(3,840억 원), 매일 약 87.7만 달러(10.5억 원) 가량을 쓰고도 조 단위의 재산을 유지한 셈이다!
[41]
규모의 경제라고
덩치가 있는 기업은 싼값에 팔더라도 엄청난 매출로 인해 기업을 운영할 수익이 창출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너무 지나치게 값이 떨어지면 경기에 매출이 크게 요동치게 된다. 물론 대기업도 영향을 받지만 중소기업보다야 덜 받는다. 대기업이 그저 매출이 떨어지는 정도라면 중소기업은 문 닫아야 할 수준. 결국 시장진입이 힘들게 된다. 그렇다고 값을 올려서 받자니 당연히 값이 올랐으니 사줄 사람이 없다. 정 값을 올리고 싶다면 차별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아니면 값을 더 내리는 방법도 있긴 한데 당연히 경기에 따라 요동치는 정도가 커지며 그나마 사장이 기가 막힌 사업수완이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이것도 방법이 없다.
[42]
사실 유가 상승은
오일 쇼크로 비롯된 것이다.
[43]
독점을 눈감아주는 대신 미국 사회에 석유를 싸게 공급한다는 암묵의 협정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44]
독점을 유지하려면 산더미같은 경쟁자를 진입 못하게 할 해자가 필요하다. 만약 록펠러가 석유 가격을 올렸다면 당시 살아있던 로열 더치 쉘등 다른 기업들이 록펠러의 점유율을 더 싼 가격으로 먹어치웠을 것이다. 당시 록펠러에게는 100개 이상의 경쟁 기업이 있었다. 록펠러는 누구에게도 기름을 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를 유인했을 뿐.
[45]
이는 록펠러가 사업을 키운 계기를 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도우며 사업을 키웠는데, 당시 북부군을 주도하던 공화당은
공화당 급진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금과 달리 소수 인종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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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당시 자본가들은 인도주의를 떠나 능력주의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경우도 상당했다. 귀족들과 달리 피보다 능력을 중시하여 자유만 있으면 그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노예제를 인정하긴 어려웠던 것. 역으로 말하면 우생학을 신봉하는 일부 사람들조차 너희가 하찮게 사는 이유는 타고난 신분 때문이 아닌 열등한 능력(유전적 원인만이 아니라 환경적 원인까지 포함해서 상속은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예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물론 록펠러가 이 경우였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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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망한 J.P. 모건의 전재산이 8000만 달러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참고로 모건이 죽을 당시인 1913년의 8천만 달러를 인플레이션을 계산해 2024년으로 환산하면 25억 5천만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므로 당연히 모건 본인도 엄청난 부자였던게 맞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세계 경제의 규모 자체가 현재보다 당시 훨씬 작았던 걸 생각하면 실질적인 위상은 표면적인 금액보다도 훨씬 높다. 그저 록펠러 본인이 저런 어마어마한 재산 정도는 따위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상식 밖의 부자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