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1:17:09

플라자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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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J 커브 효과
3. 합의4. 합의의 영향5. 평가
5.1. 일본측 시각5.2. 영미권 시각
6. 독일(서독)과의 비교7. 언어별 명칭8. 관련 문서

1. 개요

1985년 9월 22일 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남단 5번가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1]에서 진행한 환율 조정 합의이다. 미국이 인위적으로 달러의 가치를 하락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 화폐들(특히 일본 엔화)의 가치를 올리도록 한 것(평가 절상)이 합의의 골자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당시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의 입지를 슬슬 침범하던 일본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초 일본은 자국의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자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며, 그중 소니 워크맨은 미국에 돌풍을 일으켰고,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경제적이라는 인식이 생겼던 토요타를 중심으로 한 일본산 자동차 수출도 호실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엔저를 등에 업고 엄청난 대미 무역 흑자를 연이어 기록하자, 꾸준히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엔 환율을 250엔에서 120엔으로 대폭 조정하여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낮추는 데 성공한다.

엔고 시대가 도래한 일본은 경기 부양을 위해 양적 완화 정책을 펼쳤지만, 늘어난 통화는 투기 자본으로 흘러들어 부동산, 주식 등을 들썩이게 했고 결국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만들어낸다. 이 초대형 자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은 엄청난 경제 타격을 입고 이후 그 여파가 20년간 이어져 소위 ' 잃어버린 10년(혹은 2-30년)'이라는 초장기 불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플라자 합의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인 원폭투하'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당시 대한민국은 여전히 원화의 가치가 낮았기에 일본 엔화와 비교하여 가격 경쟁력을 갖추어 수출 경쟁력이 커짐으로써 큰 수혜를 보았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에서 이루어진 환율 조정은 일본에 대해서만 한 것이 아니라 서독의 통화였던 마르크화의 가치 역시 절상시켰기 때문에, 일본의 거품 경제 붕괴를 온전히 플라자 합의의 탓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거품 경제의 원인은 합의 이후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잘못된 양적완화 정책과 대규모 토목 건설을 통한 경기 부양 정책을 썼던 것이 더 크다는 것이다.

2. 배경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위대한 사회 계획으로 인한 복지지출 증액과 베트남 전쟁 전비 조달을 위해 보유한 금 따윈 신경쓰지 않고 마구 달러를 찍어냈는데, 이는 1971년 닉슨 쇼크로 불리는 미국 닉슨 대통령의 금본위제도 폐지 선언으로 이어졌고, 전세계 물가와 원유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미국 달러의 가치는 추락하였고 70년대 내내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마침내 1979년 8월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에 취임한 폴 볼커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전격적으로 금리를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금리 인상으로 인해 1960~70년대 당시 서구권으로부터 돈을 빌렸던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소말리아, 이집트 등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달러가 미국으로 회수되면서 높아진 이자로 인해 외채가 불어나면서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1980년대 중남미 외채 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구권에서 돈을 끌어다가 공장을 지었던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아 1989년 동구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한국도 이 당시에 세계 순위권에 들 정도로 외채가 엄청났기에 자칫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2]

이때 제3세계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내에서도 이자율 급등으로 중소기업들이 자금을 빌려서 쓰기 힘든 상태가 되었고, 대기업들도 사업 투자를 하는데 써야 될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통에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한때 세계의 공장 소리를 듣던 미국의 제조업은 파산 상태로 내몰렸다.

이처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극심한 불황과 기업 구조조정 증가, 실업률 증가와 같은 고통이 있었지만 이 기간 폴 볼커가 강행한 엄청난 기준금리 인상은 기축 통화국인 미국이 세계의 소비 국가가 된 이후 발생한 달러 통화량 증가에 따른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연방기준금리가 과격하게 올라가자 글로벌 시장에 풀린 미국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며 국제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고 물가가 잡혔다. 달러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통화긴축, 고금리 정책을 펼쳐 달러 가치를 지켜내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로 3년의 고통스런 기간을 거치고 1983년부터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정되면서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고 미국의 패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달러를 국가 간의 무역 거래에 사용하려면 그만큼 달러를 많이 찍어내 전 세계에 공급해야 한다. 기축 통화인 달러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축 통화국인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달러를 많이 발행하면 그만큼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렇다고 달러의 발행을 줄이면 달러의 공급 부족 현상에 직면하게 되고 그러면 국제 무역과 자본 거래를 제약해 기축 통화국의 지위를 위협받을 수 있다. 이를 '트리핀 딜레마'라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폴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펼침으로써 달러의 가치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역 적자가 심각하게 커지게 되었다. 닉슨 쇼크 이후 고정 환율제가 무너지고 생겨난 변동 환율제하에서 달러 가치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 화폐 가치가 떨어지므로 미국의 수입량은 증가하고 미국의 수출량이 감소하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자국 화폐(엔화)의 저환율 상태를 통해 미국에 엄청난 무역 흑자를 일으켰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빌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 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3]

막대한 무역 적자에 더해 1981년에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와 경기 활성화를 위한 재정 지출을 늘렸다. 연방준비제도는 냉각기를, 행정부는 온풍기를 튼 셈이었다. 행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의 엇박자로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가 같이 나타나는 소위 '쌍둥이 적자(twin deficits)'가 심해지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카드가 절실했다.

결국 미국은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5 재무 장관들과의 회의를 통해 일종의 환율 조정을 진행한다.

2.1. J 커브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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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 변동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며, 수입품에 대한 기존 수요가 한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초반에는 오히려 무역 적자가 악화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유의미한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 마르크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 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3. 합의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일어났으며,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제조업과 그 노동자들, 농민들은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펴든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합의 과정 그 자체는 겉보기엔 원만하게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미국 측이 들끓는 민심을 반영한 의회의 격한 반응을 등에 업고 상당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은 상태였다. 즉 미국 정부는 합의 결렬 시, 의회의 보호 무역주의자들에 의해 GATT 탈퇴 및 관세 인상은 물론이고, 극단적으로는 달러 무제한 발행, 심지어 문제 해결과는 직접 관련도 없는 안보 보장 철회까지,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조치든 취하게 될 것이라고 단단히 경고해 놨던 것이다. # #

물론 GATT 탈퇴 및 관세 인상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 시대에 이르기까지 허구헌 날 반복되온 압박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스스로 구축해 놓은 자유무역의 판을 엎어버리는 엄청난 후폭풍을 정치적으로 부담해야 하기에 그 누구도 감히 실천할 엄두도 못내던 것이고, 달러 무제한 발행은 이미 1970년대에 닉슨쇼크와 오일쇼크의 여파로 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매년 떨어지고, 이에 따라 선진국들의 물가도 같이 따라올라가던 스태그플레이션 시대로 되돌아가는것은 물론이고 페트로 달러 체제까지 흔들리게 된다, 안보 보장 철회도 냉전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던 당시 상황에서 역시 실현가능성이 떨어지는 수로 평가받았던, 딱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다른 참여국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순순히 응했던 것은, 자신들이 우위에 서있는 미국 주도 경제 질서의 판도가 이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태의 본질에 공감하면서, 미국의 협박만큼 비현실적 사태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최소한 1971년 닉슨쇼크 등과 같이 미국 정치가 일방주의적 기조로 흐를 가능성을 견제할 필요성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방적 금 태환 중단으로 이어진 혼란상 및 그 수습 과정에서, 상호 이익이나 안보 관계 등으로 미국과 묶여있는 이 강대국들은 미국의 리더십을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구조적 대안은 없다는 절망을 몸소 경험한 바 있다. 이 당시에 중국과 인도는 잠재성은 기대되지만 1인당 구매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개발 도상국이었고, 소련은 1970년대 이래로 경제적으로 침체기에 있었고 아직 폐쇄적인 정책도 같이 폈던지라 또 다른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4]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일방적 조치에 의한 손해에 있어 저항보단 달러 지위 향상에 협조하는 식의 타협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시장 경제에 오히려 유착하고 의존하게 됐다. 미국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10여년 사이에 여럿 반복되면서, 그들은 미국에 어느 정도 양해를 봐주는 한이 있더라도 리더 스스로 판을 뒤엎어버리며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만큼은 방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점을 익히 잘 알게 됐던 것이다. 한편으로 미국과 달리 역사적인 상승세를 타고 자신감이 차오르던 그들로서는, 가격 부분에서 일정 경쟁력을 잃더라도 여전히 전반적으로는 경쟁할만한 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던 점도 합의가 보다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던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합의 거부 시, 그로 인한 손해와 책임의 화살은 미국이 아닌 자신들에게 온전히 향할 것이라는 모양새까지 정치적 부담으로 더해졌다.

그리하여 G5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 즉 각국이 달러를 매각하여 시장에 풀고 자국통화를 매수하여 유통량을 줄임으로써 달러 약세와 자국통화 강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일단락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당시 대장대신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여기에 서명하고 돌아온 뒤 " 미국 일본에 항복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후에 이 발언은 미국 화폐가치가 낮아지고 엔화가치는 상승하였기에 표면적으로 본다면 일본 화폐가치 상승으로 이득 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보루 대신이 일본 내의 정치적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5] 이후 타케시타는 이 발언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출처 이와 대조적으로, 레이건은 불공정 무역으로부터 발생하는 미국 기업의 실패와 실업문제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메세지를 던지며,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한 국가들을 상대로 계속 투쟁을 이어갈 것을 예고했다.

4. 합의의 영향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서독 마르크화는 채택 1주 만에 약 7%, 엔화는 8.3%씩 가치가 대폭 상승했고[6],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 유럽 무역 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시장개방이 제한적이었고 일본인들의 소비성향도 자국 제품 우선주의일 정도로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특히 빌 클린턴 집권기를 보면 미국이 일본에 시장개방을 강압한 적이 많았다.

이후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벌어진 엔고 상황[7]에서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1995년 4월 역 플라자 합의가 성사되었다.[8]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6년도부터 1989년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의 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하락, 금리인하,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고,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 맞물렸다고 해서 3저호황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한국은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9] 또한 한때 외채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외채가 불과 3~4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10]

1980년대 초 일본반도체 업체들의 덤핑공격으로 삼성전자가 위기에 봉착했는데 플라자 협의로 위기를 넘겼다는 분석이 있다. https://youtu.be/ITJYENRjPMQ?si=e6xrrsPVvx6o4I0z

이런 호황은 한국 뿐 아니라 신흥국 상당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도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대만과 태국[11]도 이 시기가 역사적인 호황기로 손꼽히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자원에 의존하는 비율이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제조업 육성으로 자원값 하락에 따른 손해를 모두 메꾸고도 남는 성과를 올렸다. 물론 모든 개도국이 호황을 누렸다는 뜻은 아니라서 브라질이나 멕시코는 물가상승이나 외채, 악화되어가는 빈부격차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았고, 상술하듯이 소련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각국도 여전히 골골거리기는 매한가지로 이러한 후유증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 합의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직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면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썼다. 이 결과 그렇지 않아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팽창 분위기였던 일본의 부동산 시장과 주식 시장에는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의 거품 경제로 이어진 것. 물론 이 거품 경제와 엔고로 미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오히려 크게 좁혀지고 일본 자본이 엔고를 이용해 미국의 기업과 자산을 잇따라 사들이면서 미국내에서도 이거 우리가 일본에게 점령당하는거 아니야라는 두려움 섞인 반응이 나왔지만, 1992년을 전후하여 일본의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며 한숨돌렸다. 아무튼 저 플라자 합의 때문에 독일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합의에 관한 대책으로 루브르 합의가 나왔으나, 각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다.

한편 플라자 합의 당시 대장성으로 불린 일본 재무부처는 90년대 후반에 여러 뇌물, 정경유착 스캔들로 신음하다, 2001년 일본 중앙성청개편을 통해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5. 평가

5.1. 일본측 시각

일본에서는 이 플라자 합의를 1987년의 미일 반도체 협정과 함께 1980년대 상승하던 일본의 기세를 무너뜨린 두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이 합의는 결정적으로 일본에 불리했음에도 당시 일본(독일도 마찬가지)은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과의 무역 전쟁(관세 폭탄)이 두려웠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는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합의임에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치인들은 이런 불리한 합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승리한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플라자 합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예측하던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플라자 합의 당시나 그 몇년 후까지도 일본 경제는 끄떡 없이 잘 나갔고, 실제로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기나긴 불황에 접어든 것은 플라자 합의 6년 후인 1991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이 합의의 의미를 안 일본인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일본의 여러 자산들이 폭등하면서 일본인들은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고평가된 엔화 덕에 일본인들은 해외 자산을 마구 사들였고, 미쓰비시 그룹 록펠러 센터를 매입한 것이나, 소니가 1989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자 마치 1980년대 후반에는 아예 일본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엔강세를 힘입은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이 활성화 된 시기도 바로 이 때이다. 몇년 동안 갑자기 엔화의 가치가 두배로 껑충 뛰면서 여러 일본 기업들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일본 기업들은 갑자기 돈이 많아지니까 기술개발보다는 해외 자산 매입에 열중했다. 이때 일본계 자금들은 미국 부동산은 물론 전세계의 예술품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때 일본의 한 보험회사가 고흐의 해바라기, 고갱과 세잔의 작품을 사들여서 현재도 자사의 도쿄 본사에서 전시중이며, 로마시대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을 후원하던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영어식 이름을 따서 예술을 후원하자는 메세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엔고로 수출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일본은 내수가 컸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안되는 것처럼 보였고, 기업들은 갑자기 많아진 돈으로 기술개발보다는 이상한 곳에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기업들이 갑자기 많아진 돈으로 세계를 휩쓸고 다니자 일본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미국마저 제치고 세계 패권을 쥘 것이라는 국뽕스러운 책도 여러권 나왔다. 그중 하나가 1989년 나온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며, 이 책에서 일본은 미국에 단호히 노를 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책은 극우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 소니의 회장이었던 모리타 아키오가 펴낸 것이다. 다만 영문 번역판에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가 쓴 부분은 빠졌는데, 이는 영미권에서 소니의 기업 이미지가 손상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그 틈에 외국계 자본은 일본의 자산 거품을 이용해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 일본 GDP의 10배에 달하는 이익을 챙겼으며,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국민의 돈이 직접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었고 일본은 이때 무분별하게 자산시장을 부양해서 경기를 띄우다가 결국 장기침체의 길로 걸었다.

물론 거꾸로 거품 경제 당시 일본 자본 또한 전 세계의 자산들을 싹쓸이 했고 장기 경제침체를 겪은 이후에도 이들의 상당수가 남아있어 일본 경제 유지의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그 때 거품이 낀 엔화로 마구잡이로 매입한 해외 자산에 바탕한 경상수지 흑자는 2019년 기준 원화로 연 229조에 이른다.

엔고로 인한 이득과 손해는 누가 더 컸는지는 해외자본 일본자본의 수지를 모두 계산해 대조해 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본의 이득과 손해를 제처두고서라도 플라자 합의가 일본 제조업을 박살 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1980년대까지 경제를 떠받치던 일본 제조업은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고로 박살났다. 1980년대 세계에서 경쟁자가 없던 전자산업의 여러 기업들은 2010년대까지는 거의 전멸했고, 조선업도 거의 몰락했고 자동차 산업도 토요타, 혼다를 제외하면 거의 지지부진해졌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상수지는 1980-90년대 엔고로 벌인 여러 투자로 해외에서 들어오는 흑자를 보지만, 상품수지는 계속 적자를 보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제조업이 박살이 나면서 전반적으로 국내경제가 어려워 졌고, 성장이 정체되거나 마이너스를 보는 해가 많아졌다.

5.2. 영미권 시각

영미권 주류 경제학자들은 정부 간섭없는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경제 성장의 전제로 보며, 동아시아(한국, 일본, 중국) 식의 관치 금융을 후진적인 것으로 보고 영미권처럼 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대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일본 경제의 침체가 플라자 합의보다는 일본의 후진적인 금융 시스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금융 당국의 여러 문제로 금융 폭등을 제어하지 못해 위기가 점점 확대된다. 영미권 학자들은 이를 일본 특유의 관치 금융 및 후진적 금융 관행 탓으로 돌린다.[12]

이코노미스트지를 비롯한 영미권은 '일본의 거품 경제 붕괴는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람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플라자 합의만을 탓하는 건 옳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로 일본 경제사를 분석하는 이들은 당시 미국의 무역 적자와 일본의 흑자가 단순한 환율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 생산성이나 경제 구조 등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일본 몰락 원인을 플라자 합의 이후 수출 경제 탈피와 경기 활성화 방안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근본적 체질 개선에 실패하고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 같은 악수를 둔 등 일본측의 정책에서 찾는다.

6. 독일(서독)과의 비교

1980년대 미국에 막대한 무역 흑자를 보던 일본과 독일은 똑같이 플라자 합의로 환율절상을 강요받았다. 일본의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일컬어졌고, 독일은 이 당시에 재통일로 인한 재정 부담까지 겹쳐 " 유럽의 병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1985년 이후 2020년대까지 일본의 GDP가 10%도 늘지 않은데 반해 플라자 합의의 공동 당사자였던 독일의 GDP는 같은 기간 동안 60% 가량 늘어난 대조적인 결과를 두고 위에서 말한 일본측 시각과 영미권 시각은 완전히 해석이 다르다.

독일은 플라자 합의 직후와 더불어 재통일로 동독 지역 재건이라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고 특히 중추 산업이었던 철강 산업의 몰락을 겪었다. 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독일 경제는 침체 국면에 들어간다. 이후 사정이 나아지다가 2008년 대침체 때 한번 삐끗하지만 2010년대 내내 고성장을 구가했다. 영미권 경제학자들은 같이 환율 절상을 강요받았으나 2000년대부터 이를 딛고 꾸준한 성장을 한 독일을 사례를 두고 1990년대 독일의 침체는 통일 때문이며 플라자 합의 때문이 아니고 일본의 몰락은 플라자 합의보다는 일본의 자체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영미권 주류 시각은 일본과는 달리 독일이 이런 고환율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일본과는 달리 재정 정책을 잘 썼기 때문이라기라고 주장한다. 다만 여러모로 EU가 창설되며 2002년에 독일이 기존에 고평가된 마르크화에서 유로화로 통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의 영향에서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하는 추세이다.

독일의 경우 이렇게 10년 간은 통일 비용 등 부진을 겪기도 했으나 EU를 구축하고 기존 자국 마르크화 대비 저평가된 유로화빨로 가격 경쟁력을 얻은 제조업 활성화로 히틀러 사후 60년만에 다시금 경제력으로 유럽을 제패하여 제4제국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을만큼 유럽을 제대로 휘어잡았다.

결국 2002년 유로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면서 독일이 잘 나가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유로권 저개발국(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및 동유럽 국가)들의 지지부진으로 유로화는 독일의 경제 상황에 비해서는 매우 저평가되었고, 이들 저개발국은 오히려 자국의 경제 상황에 비해 유로화가 고평가되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았으며 그로 인해 경제 위기가 왔다. 결국 이들의 희생으로 독일이 잘 나간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저개발국은 독일에게 좀 더 재정 기여를 하라고 주장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의 차이는 독일은 고평가된 마르크를 버리고 저평가된 유로화로 갈아타는 호재를 만났지만 일본은 고평가된 엔화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7. 언어별 명칭

8. 관련 문서



[1] 1907년에 지어진 뉴욕 플라자 호텔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데 나 홀로 집에 2의 경우 당시 소유주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촬영장소 제공 계약 당시 자기를 카메오로 출연시켜야 한다고 우겨서 주인공 케빈이 로비에서 길을 물어보는 씬에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 플라자 합의 후 수십 년 뒤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등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이미지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출연 장면을 컬킨 본인의 늙은 모습으로 합성해 바꿔달라는 팬들의 온라인 청원이 있었다. [2] 예외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에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돈을 끌어왔지만 일찌감치 디폴트를 선언했고, 소련으로부터 경제지원까지 강하게 받고 있던 탓에 경제 침체는 일어나도 루마니아처럼 경제파탄이 나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동구권 공산국가 붕괴와 소련 해체로 직격타를 받아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차라리 매도 먼저 맞으라고 이때 타격을 받는게 나을 뻔했다. [3] 미국의 무역 적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마셜 플랜을 필두로 한 유럽 경제 부흥과 우방국 경제 지원을 위해 미국이 감내를 한 것이고 무역수지 자체가 제로섬에 가까운지라 미국이 무역수지를 흑자를 내면 누군가 적자를 내야하는데 미국이 흑자낸 만큼 적자를 볼 만한 소비가 되는 나라가 종전 직후엔 존재하지를 않았다. [4] 또한 당시에 동독을 제외한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은 외채 위기로 신음하고 있던지라, 소련이 한가하게 대체해 줄만한 여력이 되주질 못했다. 물론 이때 중남미 각 국가도 골골거리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소련에 비하면 부담이 덜했다. [5] 물론 아예 객관적 근거가 없다곤 볼 수 없다. 미국의 비이성적 협박이 합의에 절박하게 메달려야 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일본 경제는 거품 경제 상태가 터지기 전의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던, 자신감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결국 미국의 항복 표현은 곧 일본의 우월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오만함은 거품 경제 붕괴라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6] 일본은 플라자 합의 전까지 연평균 엔달러 환율이 1달러에 200엔이 항상 넘었다. 그리고 플라자 합의 이후인 1985년에 엔달러환율은 200엔 이하로 내려가면서 엔화가 고평가되기 시작한다. [7]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의 금리는 2.5% 수준까지 내려갔고 일본내 저금리 환경을 피해 해외 자산에 투자가 확대된 상황이었는데 효고현 남부 지진이후 보험금 지급을 위해 해외 자산을 매각, 엔화를 사들여야 했다. [8] 이 당시 일본은 1995년의 환율이 평균 1달러에 79엔까지 떨어졌었다. 미국 대비 일본 GDP의 비율이 1995년에 최고치를 찍었던 이유가 바로 이때의 엔고 때문이다. [9] 작년 경상흑자 46억 5천만불,수입 12%·수출 28% 늘어 [10] 하지만 1990년 3저가 끝나자마자 경상수지는 다시금 적자로 전환되어 꾸준히 증가했고, 외채도 1989년 294억 달러에서 1996년 1,600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이런 빚잔치는 1997년 외환 위기로 끝이 난다. [11] 특히 태국의 경우에는 1985년부터 1996년까지 12년간을 자국 최대의 호황기로 손꼽는다. [12] 다만 이런 "후진적" 관행이 일본이 쇼와시대에 고성장의 밑바탕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한국의 재벌체제가 영미권 시각에서는 후진적인 시스템이지만,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한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