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2034'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호메로스(메트로 유니버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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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드래곤 퀘스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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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알렉산드로스 3세 |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 소크라테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리스토텔레스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 플라톤 | 페리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 멜리나 메르쿠리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 니코스 카잔차키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호메로스 | 마노스 하지타키스 | 레오니다스 1세 | 히포크라테스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피타고라스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 마리아 칼라스 | 아르키메데스 |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 엘 그레코 | 콘스탄티노스 11세 |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 리가스 페레오스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 요안니스 메탁사스 | 니코스 갈리스 |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 데모크리토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 야니스 리트오스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테미스토클레스 | 헤라클레이토스 | 투키디데스 |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 파블로스 멜라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 무명용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페이디아스 | 아리스토파네스 | 코스티스 팔라마스 |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소포클레스 | 니코스 벨로야니스 |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에피쿠로스 |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 오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반젤리스 | 솔론 | 클레이스테네스 | 아이스퀼로스 | 바실리오스 2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콘스탄티누스 1세 | 이온 드라구미스 | 코스타스 시미티스 |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테오 앙겔로풀로스 | 니코스 실루리스 |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 에우리피데스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카롤로스 코운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라키스 라조폴로스 | 헤로도토스 | 다나시스 벤고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 카티나 팍시누 | 알리키 부지욱라키 |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바실리스 치차니스 | 피로스 디마스 | 마노스 로조스 | 마노리스 글레조스 | 엘레나 무잘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필리포스 2세 | 디미트리스 혼 |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 탈레스 | 프락시텔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 Ὅμηρος[1]|Homer[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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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 | 약 기원전 800년 ~ 기원전 750년경[3] | |||
고대 그리스 | ||||
직업 | 시인 | |||
언어 | 고전 그리스어 | |||
장르 | 서사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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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 ||||
이탈리아어 | Omero | |||
스웨덴어 | Homeros | |||
라틴어 | Homerus | |||
힌디어 | होम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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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 문화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위대한 시인.고대 그리스인으로서 그의 대서사시들은 《 성경》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근원이며 문학은 물론, 철학, 교육, 그림, 음악, 언어, 정치 등 수많은 학문과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
히스토리 메이커 호메로스[4] |
오늘날 호메로스의 출생지나 출생 연도, 정확한 활동 사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는 편이지만, 언어와 작품 내에 등장하는 여러 사실로 판단해 보았을 때 두 작품은 대략 기원전 800년~기원전 750년 사이에 정립되었다고 본다. 이 시기는 그리스의 초기 철기 시대이다. 에게해의 섬 국가들이 바다 민족이 휩쓸고 간 후 남겨진 폐허와 빈곤의 나락에서 한창 부활해 나가던 시기였다. 청동을 만드는 기술이 부활했고,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며 무역이 재개되고 조선 기술이 발달했다. 잊혀져 쇠퇴한 선형문자 B 대신 페니키아 문자에서 차용한 그리스 문자가 만들어졌고, 경기장, 화폐, 사원, 도시가 만들어졌으며, 올림피아에서는 오늘날 올림픽의 조상뻘 되는 운동 경기가 열렸다. 다시 말해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정치와 문화가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의 인물이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후보군으로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수많은 도시들이 올랐지만, 소아시아 반도 서해안에 있는 도시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르)와 키오스 섬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이 지방을 중심으로 서사시인으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키오스 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5] 호메로스의 영향력과 유명세 덕분에 최소 7개의 도시가 자신이 호메로스의 성장지라고 주장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도시들이 자기가 호메로스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풍자하는 풍자시도 있다.
부유한 일곱 도시가
호메로스는 우리 고장 사람이라고 서로 다툰다
생전에 호메로스는
그곳에 빵을 구걸하며 돌아다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리한 걸로 유명한 미국 작가 토마스 불핀치(T. Bulfinch)가 인용한 풍자시[6]
고대 문서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래로 구걸하던 가난하고 눈먼 가객(歌客)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따라서 호메로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인이 아니고,
트로이 전쟁에 관한 구전 이야기들을 노래하고 다니던 가객, 이른바
음유시인이었다. 또한, 그가
장님이기도 했다는 것은 그의 탁월함을 뜻하는 말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장님은 지혜로운
예언자로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맹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안과 질환이 있었는데 여행 중 실명한 것으로 그려진다. 한 가지 더, 비교적 확실한 것은 호메로스가 사용한 말이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어였다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오니아 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어 초기에는 이오니아 방언이 고대 그리스 세계의 문어 역할을 했다. 플라톤이나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와도 다른 말이다.호메로스는 우리 고장 사람이라고 서로 다툰다
생전에 호메로스는
그곳에 빵을 구걸하며 돌아다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리한 걸로 유명한 미국 작가 토마스 불핀치(T. Bulfinch)가 인용한 풍자시[6]
호메로스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과 시에서 인용된 인용구는 기원전 7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7세기에는 아르킬로쿠스, 알크만, 티르태우스, 칼리누스 등이, 6세기 초에는 사포 등이 호메로스 시의 문구와 음보를 자신의 목적과 리듬에 맞게 각색했다. 동시에 호메로스가 지은 대서사시의 장면들이 예술작품에서 인기를 얻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델로스의 아폴로에게》는 호메로스 자신에 대한 전통을 지칭하는 '투박한 키오스에 사는 맹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호메로스에게 호메리데라고 알려진 후손들이 있었고, 호메로스의 시의 보존과 전파를 그들이 차지했다는 생각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세기 말경에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있는 레기움의 시조는 많은 우화적 해석들 중 첫 번째를 썼다.
기원전 5세기에는 호메로스 전기 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페소스의 헤라클리토스 이전의 사회철학자는 호메로스의 죽음에 대한 사소한 전설, 즉 이 잡기에 대한 몇몇 소년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것에 대한 분개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사이의 인용구 경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스 시인들의 참여는 소피즘 전통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게 그리스 신학의 제정을 맡겼고, 그들이 자신의 시대인 기원전 5세기 이전에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호메로스가 그가 노래한 트로이 전쟁보다 더 늦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피상적인 가정과 대조되어야 한다.
호메로스가 이오니아(소아시아 반도 서부 해안 중심부) 출신이라는 주장은 시 자체가 이오니아 방언에 지배적인 것에 기인한다. 스미르나와 키오스 섬은 일찍이 명예 경쟁을 시작했지만 시인 핀다로스, 기원전 5세기 초 호메로스를 둘 다와 연관시켰다. 다른 이들이 가담했지만, 구두 시인이든 아니든 그의 시대에 주목할 만한 인물은 어디에서도 증명된 지역적 기억은 남지 않았다. 딱딱한 사실의 부재는 어리둥절하지만 그리스인들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소설들은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알렉산드리아 시대에(진정한 학문뿐 아니라 거짓된 학문이 난무했을 때) 환상적인 가학 문헌으로 발전되었고, 이것들은 로마 시대의 파생 학자들이 더욱 정제했다.
현대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일반적인 활동 장소에 대해서만 고대의 출처에 동의한다. 고대의 증거 중 가장 구체적인 것은 그의 후손인 '호메리데'(Homeridae)가 이오니아의 섬인 키오스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트로이 평야에서 볼 때 임브로스 섬의 중간 덩어리를 넘어 보이는 사모트라케 섬의 절정, 에페소스 근처의 카이스트로스(케이스터) 강 어귀에 있는 새들, 즉 시에 나오는 어떤 지역적 언급에 의해 제안된다. 이 착색법은 주로 그리스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오디세이아》에서 더욱 증폭된다. 예를 들어 이타카 섬의 입장을 둘러싼 시의 애매함은 이오니아 시인이 그리스 세계의 저편에서 파생된 자료를 정교하게 다듬는 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
물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같은 저자에 의해 쓰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그러한 의심은 고대에서 시작되어 주로 장르의 차이[7]에 의존했지만, 다른 과목에 의해 부과되는 것과는 별개로 어휘의 미묘한 차이로 강화될 수도 있다. 《일리아스》가 [8] 두 서사시 중 더 이른 것이라면, 《오디세이아》는 그 이미지 이후에, 그리고 의식적인 보충물로서, 일단 한 번 더 《오디세이아》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시의 유사성은 부분적으로 둘 다 뒤에 숨어 있는 영웅적인 시적 전통의 일관성에 기인한다. 그 시들의 내부 증거는 호메로스가 언제 살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하다.
결코 언어로 정확하게 재현되지 않았던 시적 언어의 어떤 요소들은 서사시들이 구성상 미케네 시대 이후의 것일 뿐만 아니라 기원전 약 1000년경의 소아시아 소도시 최초의 이오니아 정착촌의 기초보다 상당히 늦은 것임을 나타낸다. 인접한 짧은 모음이 함께 달리는 것과 세미보울 디감마[9]의 소멸은 이것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예를 들어, 시간 척도의 다른 끝에서 진정한 확정 기사의 시에서의 발전은 7세기 중후기의 시에서 예시된 것보다 더 이른 단계를 나타낸다. 양식적으로나 미터적으로나 호메로스 시는 기원전 700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학자들이 배치한 헤시오도스 시보다 일찍 나타난다.[10] 시에서 언급된 데이터 대상과 실천 요강에 의해 서로 다르고, 아마도 더 정확한 기준이 제공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아테네의 한 두 가지 덧셈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기원전 약 700년까지 이상 늦은 것 같지 않다.
반면 《오디세이아》에서 교역자로서 페니키아인들에게 부여된 역할은 하나 또는 두 가지 다른 현상과 함께 적어도 기원전 900년 이후의 관련 문맥에 대한 구성 일자를 제시한다. 《일리아스》의 몇 구절은 기원전 약 750년 이후의 중장보병( 호플리테스)을 위한 특수 무기의 개발에 의존하며, 밀접하게 형성되어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투를 암시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의 장식 모티브 포인트로서 고르곤 마스크를 언급하고 있다. 시에는 많은 전통적이고 고풍스러운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들의 언어와 물질적 배경은 서로 다른 날짜에 생겨난 다른 구성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훨씬 더 짧은 전임자와 구별되는) 대서사시의 구성 시기가 기원전 9세기 또는 기원전 8세기라고 결론 지음은 그럴 듯해 보인다. 몇 가지 특징들이 기원전 8세기를 더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세기말에 속할 수도 있고, 《일리아스》는 그 중간쯤에 속할 수도 있다. 호메릭 영웅들의 숭배자들이 기원전 8세기 말엽에 급부상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서사시의 장면들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대 호메로스 텍스트의 정확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은 경구 전송은 항상 어느 정도 유동적이기 때문에 에피네프린트가 '고정'된 날짜, 즉 권위있는 서면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알파벳 문자 체계는 기원전 9세기 또는 8세기 초에 그리스에 도달했다. 그 이전에는 미케네 문화의 붕괴와 선형 B 글의 소멸(각 부호가 일반적으로 음절을 나타냄)에 따라 200년이나 300년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그리스는 문맹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 동안, 확실히, 서사시적 전통의 많은 부분이 형성되었다. 생존한 최초의 알파벳 글자로, 그 중 몇 글자는 기원전 730년경부터 짧은 6각시 조각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호메로스가 기원전 750년 이후 어느 시기에 《일리아스》를 만들었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을 돕기 위해 글을 사용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그랬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호메로스가 문맹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데, 문맹은 보통 구술 창의성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를 문맹 조수에게 받아쓰게 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그 시들이 적어도 다음 기원전 7세기 중반까지 구전으로 보존되었을지도 모르고, 너무 부정확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데, 그때는 엄격한 의미의 '문학'이 아르킬로쿠스의 시에 나타났던 때였다. 세 가지 이론에 모두 반대 의견이 있지만, 이 정도는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글쓰기는 보조적이었고, 호메로스는 전통적인 구술 시인처럼 중요한 방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두고 이런 미묘한 효과와 상호 참조는 눈으로 서적을 보고 읽을 줄 알아야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적어도 대서사시의 일부 텍스트가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사용되었을 것임은 납득할 만하다. 최초의 완전한 버전은 기원전 6세기 중 어느 시기에 아테네에서 4년마다 열리는 판아테나이아 대축제에서 표준으로 확립되었을 것이다. 그것조차도 본문을 영구히 고치지 않았고, 그때부터 대서사시의 역사를 두고 왜곡하며 본문을 안정화하는 작업이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서적 무역의 성장과 기원전 4세기 이후의 도서관의 확산에 따른 시가 널리 보급된 것은 기원전 2세기 사모트라케 섬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학자 아리스타르쿠스의 비판적 업적, 그리고 훨씬 후에 정확한 서적의 전파가 뒤따랐다. 《일리아스》의 '베네투스 A'로 알려진 유명한 필사본은 중세 비잔티움 세계에서 그레코로만 학문의 최고 등급을 통합한 것이다. 두 시의 희귀한 부분들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요 구성 행위인 트로이 첩자 돌론을 사로잡아 《일리아스》의 10권을 채우는 야간 원정, 《오디세이아》 11권의 지하 세계의 일부 장면, 그리고《오디세이아》 결말의 상당 부분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원래 아리스타르쿠스가 내린 결론으로 간주하는) 책은 구조, 언어, 스타일을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정교함의 가능성은 차치하고, 모든 구전시의 사소한 모순을 예시하며, 때로는 시인의 전통적 소재를 대규모의 구조로 융합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상은 강력한 통합의 하나이다.
요약하자면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존재했는지 아니면 가상의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존재했다면 기원전 9~8세기 무렵 살았을 테고, 이오니아 키오스 섬 출신이 유력하다고 여긴다. 구전 전통의 시인인 그의 작품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을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맹인으로 묘사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문맹이었다고 주장한다.
3. 영향력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예가들 중 한 명. (중략) 그는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들 중 한 명이기도 한데, 두 서사시는 고전 시대에 걸쳐 그리스 교육과 문화의 기초를 제공했고,
로마 제국 시대와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교육의 근간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양권 문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 성경》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근원이다. 문학은 물론 철학, 교육, 그림, 음악, 언어, 정치 등 수많은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세계적 위인들은 너무나 많아서 그 이름들을 일일이 다 꼽는 게 불가능할 정도. 작가들로만 예를 들어 보면 단테 알리기에리의 《 신곡》에는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저승에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르길리우스가 《 아이네이스》란 작품에서 영웅이 저승 가는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는 《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가 저승에 가는 이야기를 모태로 삼았다.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에 닿는 것이다. 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용한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표현은 《오디세이아》에 처음 나온다. 원래는 '사자'(死者)라는 뜻이다. SF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호메로스의 작품에 로봇이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호메로스의 작품이 만들어진 지가 2,000년 이상이 넘었지만 불멸의 반열에 오른 서양 문명의 원류이기에 계속해서 많은 작품과 미디어를 통해서 인용된다. 한마디로 서구의 후대 명작들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메로스의 《 일리아스》와 《 오디세이아》를 읽어야 한다.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11] |
1827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호메로스의 신격화>는 호메로스가 서구 문명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의 주변으로 42명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서구권 문화를 이끈 주요 인물들이다. 전설적인 가수 오르페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음악 교사인 리노스, 서사시 분야에서 그의 뒤를 이은 헤시오도스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이탈리아의 단테를 비롯해서 3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와 근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몰리에르 등도 보인다.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우화 작가 이솝,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조각가 페이디아스, 그리스의 화가 아펠레스, 그리고 르네상스의 화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라파엘로 산치오도 보이며,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페리클레스, 데모스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등 주요 정치적인 인물들도 보인다. 그들이 경탄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호메로스 신격화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 그리고 호메로스의 발치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은 다름아닌 《 일리아스》와 《 오디세이아》의 의인화이다.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 1948년~)은 호메로스가 없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배움의 장소랍시고 존재하기는 하지만, 뛰어난 미덕을 배울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호메로스는 서양 문명의 정신적 틀(시원적 사고)이다. 키토(H.D.F. Kitto)는 그의 저작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에서 호메로스의 위대성은 그의 작품들이 “ 그리스 문명의 본질을 이루는 모든 특성을 보유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서양 문명이라는 장구하고 도도한 강물을 이루어낸 ‘시원적 사고’들이 호메로스에서 흘러나왔고 보았다. 서구 사상, ‘생각의 도구’들이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 일리아스》와 《 오디세이아》는 지금도 모든 서양 학생의 교육 자료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지식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상상력의 보고이다. 로마 문학을 대표하는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대서사시 《 아이네이스》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종합해 구상했다. 두 서사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 국민의 문학, 교육,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언어, 문학, 조형미술, 나아가 그리스인의 자의식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에서 근무한 저널리스트이자 영국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인 애덤 니컬슨[12]은 호메로스의 시야말로 '그리스 정신'(훗날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의 작품이라고 정의내린다. 그에 따르면 서사시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활동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문명의 전성기를 살았지만 호메로스는 과거를 노래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반유목민적 문화인 영웅주의 세계관과 지중해의 도시문화라는 상반된 두 문화의 충돌로 기존의 원칙이 흔들리면서 생겨난 질문에 답하고자 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3.1. 역사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가 발굴되고, 발굴 초기엔 작은 크기로 여겨졌던 트로이가 현재는 발굴 초기보다 약 17배 가량 컸던 대도시였음이 알려짐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서 호메로스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사실 트로이의 존재가 아니라도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역사적 가치가 엄청난데, 호메로스의 추정 생존년대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암흑시대(Greek Dark Ages)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약 기원전 1200년대 도리아인들에 의해서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고, 바다 민족들이 한 번 설치고 지나간 다음에 간신히 폴리스로 유명한 고전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기원전 700년대까지의 이 기간 동안 문헌 기록이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심지어 폴리스인들은 크레타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이 남긴 유적의 정체를 몰랐다. 그래서 미케네 문명의 성벽에 대해서 퀴클롭스들이 쌓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자기들은 못 만드는 성벽이 이미 존재하니까.
물론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시대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미케네 문명 시기이다. 하지만 음유시인이지 역사가가 아닌 호메로스는 미케네 문명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해서 작품을 지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대서사시를 지어나갔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왕에 해당하는 바실레우스(basileus)나 왕들 중 연맹장(중국 춘추시대의 패자와 유사)에 해당하는 아낙스(anax)와 같은 정치체제, 귀족들의 집인 동시에 농업 경영의 단위였던 오이코스(Oikos)나 상인들에게서 보이는 경제체제, 생활 상황, 전쟁의 양상 등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통해서 말이다. 때문에 이 시대는 이른바 서사시 시대(the age of epic poetry) 또는 좀 더 노골적으로 호메로스 시대(Homeric Age)라고 불린다.
다만, 호메로스의 시대에 나타난 역사적 요소들이 모두 그리스 암흑시대나 그 이후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청동 무기, 거대한 방패, 멧돼지의 뼈로 만든 투구 등의 요소는 여전히 미케네 문명의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풍습이나 작은 방패 등은 철기 시대로 접어든 이후인 암흑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사회 묘사이다. 또, 서사시에 등장하는 일부 묘사는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신화적 모티프를 바탕으로 한 것도 존재한다.
또 그의 책들은 수백년 동안 고대 그리스를 교육시켰다. 그리스의 아이들은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암송하면서 전설적 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배우며 자랐다. 호메로스가 그린 영웅들의 자질들을 계발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인의 교육 목표였다. 이런 고대 그리스의 정신이었던 호메로스의 작품은 훗날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모든 종류의 씨앗을 담고 있는 못자리와 같다. 사람들은 거기서 원하는 식물을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
카이사르가 로마 군대에 준 그 막대한 금품도 호메로스가 인류에게 준 선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교과서였다. 《일리아스》는 인간이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인생 독본’이었다.3.2. 철학
현대의 많은 철학사는 호메로스에서 시작된다.호메로스는 생각의 보편화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호메로스는 사물들에는 공통성(共通性)이 존재하고, 사건들에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있고, 세상은 어떤 법칙(法則)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생각의 보편화를 시작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앙드레 보나르(Andre Bonnard)가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일삼는 부족에서 태어나 천성적으로 전투를 사랑하는 용맹스러운 전사, 즉 야만인으로 헥토르는 그에 못지않게 용감하지만, 문명인으로 보았다. 호메로스는 어떻게 하는 것이 야만인지를 아킬레우스를 통해 보여주었고 헥토르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그렸다고 말한다. 그는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가 아닌 헥토르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리스인이 본받아야 할 보편적 인간상을 아킬레우스에서 헥토르로, 즉 야만에서 문명으로 옮기고 싶었고 트로이전쟁으로부터 700년 후에 나타난 아테네 시민에게서 헥토르의 냄새가 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호메로스는 한발 더 나아가 「오디세이아」에서 그는 지혜와 참을성, 그리고 용기를 통해 바다와 싸우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했다. 그럼으로써 수백 년 후에 페니키아인들을 물리치고 지중해의 주인이 될 그리스인들의 미래를 열었다. 호메로스가 한 작업을 현대의 인지과학 측면에서 보면, 호메로스는 그의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신성함과 비속함, 위대함과 하찮음, 용감함과 비겁함, 고결함과 덧없음, 주인과 노예, 지혜와 우매, 정숙과 부정, 자긍(自矜)과 비루(飛樓) 등을 가장 전형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추상적 개념의 범주화를 교육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현생 인류가 살아남은 것은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지혜를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種)을 ‘호모사피엔스 나란스(homo narrans)’ 즉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혜의 원천인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의 집단의 능력일 것이다. 호메로스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통해서 지혜를 전해주었다.
철학계에서도 호메로스의 가치는 대단히 높은데, 아주 예전에는 그리스 고전 철학자들을 공부하는 것에서부터 철학 공부가 시작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리스 고전 철학자들 모두가 호메로스의 텍스트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고 호메로스를 기반으로 논의나 사고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져, 고전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는 대신 호메로스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단 우리나라는 철학과에 들어오거나 호기심 삼아 철학 입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서양과 달리 고대 그리스 시대가 너무 생소하기 때문에 호메로스부터 시작했다가는 철학 입문 수업 시간을 많이 날려먹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 고전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한다. 어쨌든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해에 있어서 호메로스가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므로 관심이 있다면 필히 읽어두어야 한다. 헤시오도스가 신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탐구를 보여줬다고 한다면, 호메로스의 가치는 분노와 복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가 서사시를 창작하던 고대 그리스 시대, 제대로 된 법도 없고 문학도 없던 당시 지배층인 귀족계급의 미덕은 오직 싸움이었다. 힘 세고 싸움 잘하는 것만이 정의였던 시절, 호메로스는 분노와 복수라는 가치관을 도입했다. 일리아스의 수많은 영웅들은 분노에 미치고 복수에 미친다. 그런데 이를 잘 생각해 보면 분노와 복수는 그 안에 정의라는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당했다는 인식이 있어야 비로소 분노가 일어나고, 복수가 따라온다. 즉 정의가 없이는 분노도 복수도 없다. 호메로스의 장엄한 서사시는 문학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완결성, 그리고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성까지 더해 힘만이 지배하던 고대 그리스 사회에 복수, 분노, 정의의 가치관을 깊숙이 불어넣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신을 도입했으며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영웅들을 도입했다. 비록 필멸자인 영웅들은 신에게 거역할 수 없고 운명에 패배하는 존재들이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신과 같은 위엄을 지녔다는 형용사를 달고 신과 비슷하게 행동하며 운명에 도전하는 위치에까지는 올라온 것이다. 또한 이처럼 호메로스에 묘사된 신들이 위의 있는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많으므로, 가면 갈수록 그리스인들은 신을 그저 하나의 은유로 이해하며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간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성향을 갖추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 역시 호메로스에 관련된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이것을 정리한 책이 바로 '철학의 신전'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플라톤과 호메로스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해 음모, 전쟁, 폭행, 강간 등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스 신들을 노래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영웅 사이에는 거짓말도 도둑질도 불량한 행실이 아니다. 정의란 바로 친구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고민은 이와 정반대다. 그는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선과 정의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올바른지 고민했다. 아테네식 민주주의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이 '철인(哲人)정치'다. 플라톤의 고민의 출발점은 호메로스였다. 그는 호메로스의 작품이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보았고, '국가'를 통해 "시인을 추방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롱기누스는 "플라톤이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 호메로스와 온 마음을 다해 다투었다"라고 말했다.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불화로부터 철학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검은 것은 흰 바탕 위에서 검게 보이지 않는가"라며 플라톤과 호메로스를 대조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지배한 신화의 세계관을 표현했다. 반면 플라톤은 시가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국가에선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올바름이 신(神)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봤다. 반면 호메로스의 시에서 신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인간처럼 온갖 욕망에 사로잡힌다. 신은 인간 세계에 개입해 사건을 만들고 비극을 낳는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시에서 인간은 신에 복종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인간이 추구할 것은 몸의 즐거움이 아니라 영혼의 돌봄을 통해 신의 곁에 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니체는 플라톤을 '그리스 정신의 파괴자'로 여겼다. "니체는 플라톤의 사상에 숨겨진 신앙의 그림자를 발견해 철학의 자유를 위해 신을 살해한다"라는 것. 물론 '이데아=신'이라는 개념은 저자의 독창적인 고찰이다. 플라톤의 신은 호메로스가 노래한 신과는 정반대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철학의 탈을 쓴 신학이기도 하다.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시 플라톤의 신을 죽이고, 호메로스의 신을 옹호한다. 그는 '이데아를 향한 플라톤의 열광은 종교적 차원의 광기'라며 "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호메로스와 플라톤, 신과 인간과의 불화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철학사를 꿰뚫어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는 모든 그리스인, 나아가 모든 서양인들의 정신적인 스승인 것이다.
3.3.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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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 왼쪽부터 단테,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이들은 웨스턴 캐넌의 중심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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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노래를 듣고 있는 셰익스피어, 괴테, 단테. [13] |
호메로스의 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 '가장 뛰어난 시'라고 평가받으며 불멸의 작품으로 역사에 남았다. ‘ 웨스턴 캐넌(Western Canon)’[14]은 서구 최고 명작들의 목록을 일컫는 말인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하는 작품들을 일컫는 용어다. 수백 권에 달하는 위대한 책들 중에서도 3대 작품[15]은 기독교의 성경,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16],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17] 이것만으로 호메로스가 문학사 내에서 가지는 위상을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노벨연구소가 주최한 전세계 작가들이 뽑은 세계 100대 문학 작품 중 하나 #, 영어권 작가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 #, 프랑스 작가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18] #, 스페인 작가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19] #로 뽑히는 등 오늘까지도 역대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
현재와 같은 호메로스의 위상은 중세 이후에 만들어졌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중세에 들어와 언어를 그리스어를 쓰던 동로마 제국과 달리 라틴어를 쓰던 서유럽에서는 1100행 정도로 요약된 '라틴어 일리아스'라는 라틴어 번역본만 읽고 인용되었을 뿐, 작가 호메로스의 명성이 차츰 퇴조하였다. 하지만 문명의 순수한 근원인 그리스, 로마 시대로 복귀할 것을 외치던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고전에 관심이 커지면서 호메로스를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마크로비우스의 베르길리우스 찬양과 신곡에서 단테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 베르길리우스 상에 압도한 사람들은 아이네이스를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보다 높이 평가했다.[20] 그러나 '질풍노도' 문학에서 습득이나 기교, 규범이나 천재성과 사실성, 독창성이 더 중시됨에 따라 베르길리우스의 작품[21]보다 호메로스의 문학성이 압도적이었고 호메로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문학의 불멸의 사표로 추앙받는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독일의 레싱, 헤르더, 괴테 등이 있다.[22]
14세기 유명한 라틴 시인 알베르티노 무사토가 이교도의 시에 대해 말했을 때, 최초이자 최고의 시인이라 주장한 이는 바로 호메로스였다. 비록 라틴어 고전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도서관에서 자존심을 지켰지만, 호메로스가 원천이자 최초의 근원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어떤 문화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단테 역시 이런 이유로, 「신곡」의 < 지옥편> 첫 번째 모둠에서 호메로스를 등장시켰으니[23], 내세의 복잡한 건축 구조는 단테 자신의 것이었지만 그 주춧돌은 호메로스의 것이었던 셈이다. 「일리아스」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네이스」를 쓴 베르길리우스의 생동감 넘치는 인도를 받은 단테는 지옥의 문을 통과했으니, 호메로스는 철저히 관찰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연결성을 보았으며, 단테는 결론을 이끌어낸 셈이다. 그리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조금만 아는 것으로 유명한, 원전으로 호메로스를 읽지도 않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다양한 영어 버전들을 원천 자료로 이용하여 희곡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를 쓰기도 했다. 시인 존 키츠는 자신이 처음 호메로스를 만난 충격적인 인식의 순간을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처음으로 읽고」라는 자신의 시에 기록했다.
호메로스 이후 문학작품에는 아킬레우스, 헥토르, 오디세우스는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 일리아스」이거나 「 오디세이아」다."라고 평했다. 호메로스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가능한 그 일을 맡겼다. 왕 프리아모스는 '보편적인 아버지'로, 왕비 헤카베는 '보편적인 어머니'로, 아내 안드로마케 역시 지극히 보편적인 아내로만 그렸고 그들의 성품이나 취향은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인물들의 '본질'과 '탁월함'만을 노래하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제거했다. 호메로스는 아레테(Arete) 즉 보편적 인간의 원형이자 인간성의 본질을 다루었다. 그럼으로써 호메로스의 인물들은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마땅히 본받거나 물리쳐야 할 보편적인 인간의 원형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아레테'라 부르며 탐구한 인간성의 본질이자 탁월함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같은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암송하면서, 다름 아닌 인간적 미덕의 전형이자 극단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보편적 인간의 사고와 삶의 태도를 훈련받은 것이다.
4. 작품의 특징
호메로스의 시는 또한 밀려드는 비애감, 시련과 고통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맞닥뜨린 자의 필사적인 고뇌 및 죽음과 마주한 자의 쓰라림이라는 정서적 추동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시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이야기며, 이처럼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을 향한 애잔한 마음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동력이다. (중략) 호메로스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주춧돌이고,
키츠는 기꺼이 ‘우리’가 그의 시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호메로스는 당신의 삶을 확장시켜줄 것이다. 인간의 시간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광대함이자 인간 마음의 최대치인 호메로스는 동참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살아 있다. 호메로스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 애덤 니컬슨(영국 작가, 영국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 #
― 애덤 니컬슨(영국 작가, 영국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서두에 제시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주제에만 집중하고 그 외의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삽화들이 상호 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가 최악의 플롯이라고 했지만,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간결하고’, ‘정확하고’, ‘명료하고’, ‘구조적’이라고 규정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틀’이 만들어진 하나의 형식이며 보편성을 추구하던 문명적 특징이다. 또 호메로스의 독창성은 전통을 주어진 그대로 엮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에 맞춰 어느 한 부분이 빠지거나 자리바꿈할 경우 전체가 무너질만큼 꼭 필요한 부분을 골라 적절히 배열하는 플롯에 있다. 플롯의 완벽한 통일성이야말로 호메로스 문학의 으뜸가는 가치이다.
또 호메로스는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총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다양한 비유들을 그토록 자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삶과 인간 정신에 대한 총체성 구현이라는 시각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완결된 우주와 그 안에서 영위되는 총체적인 삶이다. '오디세이아'는 전작보다 새로울 뿐 아니라 인류의 성취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업적, 바다를 어떻게 장악했냐를 이야기한다. 일리아스는 불가피성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전쟁은 특히 아킬레스(아킬레우스)에게 ‘인간 비극의 근원’으로서 ‘불굴의 전사 정신’을 이끌어낸다. 반면 오디세이아에서 전쟁은 “자기 향상의 기회”다. 또 오디세이아의 세계는 전쟁보다는 협상의 세계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미루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삶의 유혹에 이끌린다.
호메로스 작품에는 모든 게 있다. 폭력, 복수, 우정, 불륜. 노골적인 성애 장면은 없지만 팽팽한 성적인 긴장감이 있고 섬세한 인물 묘사가 있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도 현대의 주말 연속극 못지않게 포착했다.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약속하는 미인을 뿌리치고 조강지처와 아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영웅도 있다. 미국의 저술가이며 독서 관련 에세이로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관한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하였다. 우선 그는 병력 100만 명과 선박 6천여 척이 동원된, 20세기 중반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예로 들면서, 그 작전의 최고지휘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읽어보아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청동기 시대 부족들 간의 전투를 기록한 "일리아스"만 한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건 결코 아이젠하워 장군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가 호메로스가 아니었을 뿐이다."
패디먼의 이 말은 호메로스의 위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서사시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운명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얼마나 냉혹한지, 인간다움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전쟁과 고난은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는지. 호메로스의 탁월함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할 때에 더욱 두드러진다. 양대 서사시에는 수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훌륭한 묘사가 수두룩하다. 가령 "일리아스"에는 분노의 창칼로 적을 도륙하는 영웅들의 무용담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운도 묘사되어 있다. 창에 맞아 선지피를 내뿜으며 땅에 쓰러진 아무개의 아들 저무개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를 뒤로 하고 하데스(저승)로 떠났다는 참혹하고도 구구절절한 묘사 앞에서 독자는 새삼스레 전쟁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일리아스"는 사상 최초의 ‘전쟁 문학’인 동시에 ‘반전 문학’이기도 하다.
또 호메로스는 편집과 창작의 천재였다. 그는 수백 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음유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해 통일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창작을 덧붙였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는 페니키아 문자의 영향하에 그리스에 알파벳이 도입되자마자 문자화됐다. 파피루스에 기록됐을 것이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의 문자화를 위해 그리스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문자를 갖게 된 그리스인들이 받은 최초의 선물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였다. 호메로스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말의 세계에서 글자의 세계로 넘어가는 시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뛰어난 점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호메로스 이전의 민담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마법과 우연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운명에 맞서 싸우다가 비장하게 죽어가는 자유 의지를 가진 영웅들, 자신의 재주와 기지로 운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영웅들, 호메로스는 처음으로 이런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그의 두 작품은 장구한 세월 동안 서양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므로 수천 년 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지닌 재미와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경탄할 뿐이다. 그러나 두 작품은 정규적인 문학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지나온 대중적인 신화에 훨씬 더 가까웠음을 증명한다.
호메로스는 주로 위대한 시들 그 자체에 대한 투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취향과 세계관에도 상당하지만, 그의 기교와 그가 어떤 시인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드러낸다. 특히 미국 학자 밀만 패리는 이름과 관련하여 호메로스 작품의 전통으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서, 호메로스적 전통은 구전적 전통이었다는 것, 즉 이것이 일종의 시로서 구전으로 만들어지고 전해지며, 글쓰기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실제로 호메로스의 시인 용어는 아오이도스, 즉 우리나라 말로 "가수"이다. 오디세이아에서는 그러한 두 시인을 어느 정도 상세히 묘사했다. 이타카에 있는 오디세우스 궁전의 궁정가수 페미우스와 반미신앙의 마을에 살면서 알시누스 궁전의 귀족들과 오디세우스를 위해 열린 게임에서 모인 대중을 위해 모두 노래한 드모도쿠스. 이 경우에 그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연애에 대해 정확히 호메로스적 구절 100개가 이어지는 버전으로 노래로 노래한다. 이것과 이들 가수들에게 할당된 다른 노래들, 예를 들어 오디세이아에 요약된 트로이 목마의 노래들은 영웅적인 전통의 평범한 아오도이들이 단 한 번의 기회에 완전히 주어질 수 있는 비교적 짧은 시로 작업했음을 암시한다.
그것이 바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시기와 세계의 다른 지역의 가수와 관객들의 습관에 의해 확인된다(무슬림 세르비아의 시인-가수들의 전통은 지금까지 가장 유익한 비교를 제공했다). 영웅적인 노래로 좋아하는 어떤 경우든, 귀족적인 잔치든, 종교적인 축제든, 아니면 선술집이나 시장에서 인기 있는 모임이든 간에, 시의 길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제한은 관객의 가용 시간과 관심뿐 아니라 가수 자신의 체격과 그의 레퍼토리의 범위에 의해 부과된다. 이렇게 비교적 짧은 곡들은 호메로스가 물려받은 전통의 근간을 제공했을 것이며, 데모도쿠스와 페미우스의 초상화는 이런 점에서 정확할 것 같다. 호메로스 자신이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한 시간이나 저녁이상을 불러야 하고, 문학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다 일화적이고 삽화적인 노래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새롭고 복잡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시의 형태로, 전혀 다른 형식의 시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의 운문의 본질은 그 답의 상당 부분을 제공할 수 있다. 시의 형식은 "공식적"이다. 즉, 그들은 주식 상피와 반복된 구절이나 구절의 집단, 즉 베르길리우스처럼 문학적 모방자에서 훨씬 덜 발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부분에서 유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수 많은 고정된 구절들에 많이 의존한다. 시문의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예는 소위 명사-epitet 공식이다. 이것들은 모든 주요 신이나 영웅들이 그 운문의 양과 그 중 어느 부분을 다 써버리고자 하는지에 따라서만 선택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묘사를 가지고 있는 진정한 시스템을 구성한다. 배는 이 특정한 배를 다른 배와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리드미컬한 문맥의 품질과 요구와 관련하여 검은색, 속이 비어 있거나 대칭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전체 명사-epitet 시스템은 광범위하고 경제적이며, 정확한 축소나 불필요한 중첩이 거의 없는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은 단일 시인의 발명이 될 수는 없지만, 기능적인 이유로 연장과 경제 모두를 필요로 하는 오랜 전통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억, 실천, 그리고 일종의 즉흥적인 성격 때문에 이러한 고정된 문구 단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펜앤페이퍼 작곡가의 고의적이고 자화자찬한 단어별 진행 과정을 노래로 대신하다 물론, 호메로스의 나머지 어휘들은 명사의 측면(또는 연설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표현처럼 또 다른 인기 있는 예)만큼 두드러지게 공식적이지 않다. 많은 표현들, 많은 문장의 부분들은 그 때를 위해 개별적으로 발명되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렇더라도 호메로스가 사용했던 인공어에는 입자, 접속사, 대명사 등의 눈에 덜 띄는 측면을 포함하여 강하게 공식화되고 기성화된 요소가 있다.
따라서 호메로스는 이미 확립된 가수들로부터 획득한 정상 길이의 노래 레퍼토리를 구축함으로써 (현재의 유고슬라비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시작된 평범한 아오이도로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가장 위대한 영웅적 모험은 어떤 레퍼토리에서든 이미 두드러졌을 것이며, 특히 테베의 범헬렌적 모험과 아르곤나우츠, 트로이에 대한 아차이안 공격 등이 두드러졌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어떤 면은 비록 한 번의 기회에 여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특이한 길이의 노래로 확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마도 기념비적인 일리아드를 만드는 데 훨씬 더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절 1만 6천 개 이상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시대는 긴 저녁 네다섯 번, 그리고 아마도 그 이상이 공연하는 데 소요될 것이다.
관객들의 예외적이고 거의 불합리한 요구를 했던 기념비적인 이 돌파구는 상당히 예외적인 역량과 명성을 가진 가수, 즉 그의 노래의 전혀 생소한 천재성에 의해 청취자들에게 새롭고 분명히 어려운 형식을 강요할 수 있는 가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 역시 다른 점에서는 문화 혁신의 시대였고, 기념비적인 방향으로도 그랬으며, 거대한 사원(사모스의 헤라의 초기 신전과 같은)과 거대한 장례용 화병(아테네 디필론 공동묘지에서 나온 소위 기하학적 양식의 혼합 그릇과 암포래와 같은)은 문학적인 아날로그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에서 호메로스는 모든 알려진 구전 영웅시의 경향을 정교하고 확장하는 쪽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호메로스는 단순 암기만으로 다른 가수의 노래를 얻지 않는다. 그는 기존의 문구점이나 전형적 장면, 주제 등에서 듣는 것을 조정하고, 자신에게 생소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족하게 되는 익숙한 소재를 추가해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다. 살아 있는 구전 전통의 모든 가수는 그가 획득한 것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가 신선한 소재를 전용함에 있어서 기억뿐만 아니라 즉흥적인 요소가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세르비아, 키프로스, 크레타에서 공부한 시인들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조정, 정교, 개선하려는 성향이 모든 구술 시인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고전 문헌학자 헤르만 프렝켈(Hermann Fränkel)은 호메로스의 인간들이 철저하게 단면적인 생명체라고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심리적인 깊이의 차원이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의 전체 본질을 해명해 주는 것은 그들의 말과 행위이다. 호메로스의 언어에 풍부한 심리학적인 어휘들이 있어서 그 어휘들을 도움삼아 인간들의 합리적인 힘들과 비합리적인 힘들을 뚜렷하게 갈라 표시하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힘들은 내적, 영적 삶의 어떤 자율적인 영역도, 심리의 영역과 대립할 만한 어떤 영역도 총괄하여 구성하지는 못한다. 도리어 모든 심리학적인 관념들은, 위험 앞에서 도망칠 때 두 다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현상에 직접 연결된다. 여러겹의 심리학적인 표현들은 물론이고, 행위로야 드러나는 인간의 거의 모든 섬세한 움직임들을 두고 인간의 앎이라고 부르곤 하는 호메로스 언어의 관례까지도, 민감함이야말로 인간적인 행위들과 실행에 대해 정당성을 입혀주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반성은 심리학적인 집합개념들로 귀결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하나의 행위 자체만을 밝혀줄 뿐이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죽음 뒤의 본질적인 삶을 재는 어떤 도덕적인 잣대도 알고 있지 않다. 그들 삶의 의미는 여기 지상에서 다한다. 죽음과 함께 인간 자신은 "개떼와 새떼"한테로 돌아가나, 꼭 영혼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그의 혼은 하계에서 무가치한 무의 실존을 영위하기에, 아킬레우스는 그러한 실존이라면 차라리 극빈한 날품팔이의 현존과 맞바꾸길 원했다. 이렇게 이승에 국한시킴에 걸맞게, 좋은 일에는 흔연히 기뻐하고 나쁜 일에는 서슴없이 슬퍼한다. 호메로스의 인간은 그것이 가능했다. 무슨 일을 당하든 무슨 일을 행하든, 저승의 현실을 고려하느라 그 어떤 일도 상대화되지는 않았다. 관습과 명예가 요구하는 일을 존엄과 위엄으로 행하거나 감수한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싸움터에서 자신에게 생명을 애걸하는 혈기왕성한 트로이아인에게 말한다(제21권, 104행 이하 ):
허나 벗이여, 그대 또한 죽게나. 무에그리 헛되이 애걸하는가?
자, 파트로클로스도 죽었잖는가, 그대보다 훨씬 나은 자였는데도.
그대 보고 있잖는가, 나 역시 얼마나 멋지고 위풍당당한가를,
위대한 아버지의 자식이요, 여신이 날 낳으신 어머니라네:
그러하나 나에게도 죽음과 거센 운명이 닥치기 마련이라.
어느 한 때가 올 것이네, 아침, 저녁, 아니면 한낮이,
어느 누군가가 싸움터에서 내 목숨마저도 앗아갈 때가,
어쩌면 창을 던지어, 어쩌면 시위를 떠난 살로.
자, 파트로클로스도 죽었잖는가, 그대보다 훨씬 나은 자였는데도.
그대 보고 있잖는가, 나 역시 얼마나 멋지고 위풍당당한가를,
위대한 아버지의 자식이요, 여신이 날 낳으신 어머니라네:
그러하나 나에게도 죽음과 거센 운명이 닥치기 마련이라.
어느 한 때가 올 것이네, 아침, 저녁, 아니면 한낮이,
어느 누군가가 싸움터에서 내 목숨마저도 앗아갈 때가,
어쩌면 창을 던지어, 어쩌면 시위를 떠난 살로.
호메로스 영웅은 자신이 행하거나 당하는 일을 두고 주위 세계의 판단과 독립하여 따져 볼 수 있는 어느 내적인 심급도—어느 양심이나 그 비슷한 것도—알지 못하므로, 그의 도덕적인 실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통하여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지탱하거나 쓰러진다. 육체의 힘과 아름다움도, 성공과 부와 명예와 같이, 사람됨의 실현에 속한다. 그가 얻은 명예는, 동급 신분의 동료들이 존중하는 실질적인 관심 속에서야 압도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가져가야 하는 노획물의 몫이 줄어든 사건이야말로 일리아스의 모든 행위를 푸는 열쇠가 된다. 후대 그리스에서는 우호적이거나 애틋한 호감을 뜻하는 낱말이, 호메로스에게서는 완전히 구체적으로 손님 접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행동할 때의 그러한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귀족 사회가 모든 삶의 기반에서 유지하고 있는 규칙들은 엄격하며, 자제심과 위엄과 인격적 참여라는 면에서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한 귀족 사회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멋드러진 덕인 위풍당당함은, 벗과 적에게서 단점인 동시에 장점으로 묘사되는 불편부당에서 더없이 잘 나타난다. 영웅들 중에서 우리를 가장 사로잡는 자는 어느 그리스인이 아니라 헥토르이다.
호메로스의 그 같은 영웅들이 전설(Sage)의 사건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시인의 각별한 상황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앞에는, 인간학적으로 말해, 엄격한 결정론의 의미로 해석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행위의 흐름이 주어져 있었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다른 서사시들에서도, 예컨대 자손 하나하나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쏟아부은 ‘실현되고 말 저주’가 사건을 몰고가는 동력이었던 오이디포디아에서도 알고 있다. 이처럼, 전승을 통하여 ‘무엇’을 행하였고 ‘무엇’을 겪었는지가 미리 주어져 있으므로, 시인의 도덕적인 판단은 대체로 그 일을 ‘어떻게’ 행하였고 ‘어떻게’ 겪었는지에 국한된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영웅들을 대개 새로 창작한 어느 행위 속에서 뭔가 예기치 못했던 일을 행하게끔 할 때마다, 그 도덕적인 판단의 시발점이 되는 지점은 어김없이 신성의 직접적인 개입, 행위자가 별다른 놀라움 없이 받아들이는 신성의 개입이다.
이제 그러한 신들, 인간들의 싸움에 직접 끼어드는 신들, 인간들마냥 울고 웃는 신들. 기원전 6세기 어느 시인이 노여워하며 표현했던 대로 "훔치고 오입하고 속이는" 그들, 그들은 너무나 높은 귀족 사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왕과 여왕이 측근들과 함께 사는, 아울러 다소 반항적인 귀족들도 함께 사는, 가지가지 애욕과 염증과 특권과 약점을 가지고서 사는 귀족 사회 말이다. 당연히 그들 모두가 여타 인간들보다 더 위대하며, 더 강하며, 더 권위가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행각은 도무지 종잡기가 힘들다. 그들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업적을 이루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들의 돋보이는 인간성 안에는 섬뜩함이 없으며, 인간의 단란한 상황을 지켜보되 처벌 강도는 물씬 약하다. 그들은 불멸이요 늙지 않으며, 서사시의 언어로 "가벼운 삶"이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실현해야 하며, 하나하나의 인간적인 행위로부터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결말이, 행위자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결말이 탄생한다. 반면에 신들은 심하게 다툰 뒤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같이 즐거워 하며 식사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화를 입지 않고 인간들만을 곤경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네들 기분삼아 아주 발랄하게 흥미를 두고 있는 사건까지도 그들이 결정하는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는 트로이아 면전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사르페돈을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이것은 일리아스 서곡의 선포, 그러니까 트로이아 면전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에서 제우스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선포와 매끄럽게 어우러지지 않는 듯하다. 여기에서 다시, '사건이라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그때그때 전승을 통하여 미리 주어졌던 것이며 자연스레 "제우스의 뜻"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이 그러한 모순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행위가 진행될 때에 오로지 시적인 창작으로 인하여 수정이 가해졌으면서도 또 그 행위가 개개 신들의 바람이나 뜻과 연결되어 있었을 경우, 미리 정해진 운명과 어느 한 신이 나중에야 내놓는 의향 사이에 엇갈림이 생기게 된다.
호메로스 신들의 모습들은 뚜렷하고도 개별적인 인상으로 각인되어 훗날 수세기 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선사하였다고 말한다. 분명히, 서사시의 낭송을 통하여 그리스 전역에 알려졌던 호메로스 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들의 입체성이 지역적인 제의와 전설에 연결되어 있었던, 예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히 눅눅한 여러 관념들을 몰아냈다. 온갖 인간적인 제한 너머에 살고 있는 신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인간들에게 이롭기도 해롭기도 한 신들, 오히려 인간들의 선한 행위들을 갚아 주지도 않으며 오만함을 벌하지도 않으며 도덕적인 모범과는 판이한 온갖 일들을 저지르는 신들, 그들은 이미 일찍이 그리스에서 그 '비도덕'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호메로스 신들의 천상이 제시하고 있는 저 드높은 귀족 사회는, 비범한 감각적 매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탁월한 종교사적인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되리라. 호메로스 신들은, 기하학 시대의 어느 한 그리스 영주가 대대로 물려받은 제의를 올릴 때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념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거의 해명해 주지 못한다. 소박한 백성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신들은 단연코 호메로스에게서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아니면 가장자리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이미 수세기 동안 종교성을 넉넉하게 담아내고 있었던 신화적인 전통을 서사시적으로 만들고 난 뒤에, 신들이 맡은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볼품 없는지는 오뒷세이아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뒤의 헤시오도스가 이미 감안하고 있는 터였다.
호메로스의 시는 또한 밀려드는 비애감, 시련과 고통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맞닥뜨린 자의 필사적인 고뇌 및 죽음과 마주한 자의 쓰라림이라는 정서적 추동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시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이야기며, 이처럼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을 향한 애잔한 마음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호메로스는 고전기 아테네인들에게 일종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위대한 남녀에 관한 이야기, 고결함이 위기에 빠진 이야기,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깊은 도전에 직면했을 때 해야만 하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로 다뤄졌다. 말하자면 호메로스는 도덕적 선택에 관한 하나의 백과사전이었다.
5. 그에 대한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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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학교 그리스 문화학 교수 폴 카트리지의 '왜 호메로스가 중요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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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연세대학교 교수의 호메로스 강의 |
호메로스는 신적인 소질을 부여받고 온갖 종류의 서사시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 데모크리토스, 단편 21
― 데모크리토스, 단편 21
우리는 그가 시적 어법의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인간에게
신들의 언어를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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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작가의 작품은 주문된 정원에서처럼 모든 미인을 뚜렷이 볼 수 없다면 그 수가 무한히 많기 때문만이 아닐 수 없는 야생의 낙원이다. 그것은 마치 온갖 종류의 씨앗과 첫 번째 생산물이 들어 있는 다방면의 보육원 같다. 그 중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공상에 따라 각각 몇 가지 특정한 식물을 선택했다. 어떤 것이 너무 풍성하면 그것은 토양의 풍요로움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완벽하거나 성숙하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더 강한 본성의 그것들에 의해 압도되고 억압되기 때문이다..[26] #
― 알렉산더 포프[27](영국 시인)
우리 작가의 작품은 주문된 정원에서처럼 모든 미인을 뚜렷이 볼 수 없다면 그 수가 무한히 많기 때문만이 아닐 수 없는 야생의 낙원이다. 그것은 마치 온갖 종류의 씨앗과 첫 번째 생산물이 들어 있는 다방면의 보육원 같다. 그 중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공상에 따라 각각 몇 가지 특정한 식물을 선택했다. 어떤 것이 너무 풍성하면 그것은 토양의 풍요로움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완벽하거나 성숙하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더 강한 본성의 그것들에 의해 압도되고 억압되기 때문이다..[26] #
― 알렉산더 포프[27](영국 시인)
호메로스의 시는 절대적이고 충만한 자유분방한 분노로부터 쓰이고, 베르길리우스는 공손하고, 애쓰고, 완전히 모방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가 하는 유사성이 아니라 호메로스의 것이다. 발명품, 사람 또는 기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또는 원래 호메로스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많은 곳에서 호메로스가 보는 호메로스가 사용하는 바로 그 말들을 쓰고 있다. 모든 종류의 시로부터 선례와 같은 것이다; 아무 것도 모방하지 않고, 가치 있게 모방하지도 않는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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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책 중에서 호메로스가 제일이고 최고다.[30] #
― 조지 채프먼[31](영국 극작가)
모든 종류의 책 중에서 호메로스가 제일이고 최고다.[30] #
― 조지 채프먼[31](영국 극작가)
호메로스와 그의 동시대의 시들은 어린 그리스의 즐거움이었다; 그것들은 모든 후대 문명의 기둥인 사회 시스템의 요소였다. 호메로스는 인간성에 있어서 자기 시대의 이상적인 완벽함을 구현했다. 또한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이 아킬레스, 헥터, 율리시스처럼 되고자 하는 야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우정과 애국심, 그리고 어떤 대상에 대한 끈기 있는 헌신이라는 진리와 아름다움이 이러한 불멸의 창조물 속에서 깊이 드러나고 있다.
― 퍼시 비시 셸리 #
― 퍼시 비시 셸리 #
나는 베르길리우스보다 호메로스를 더 선호해... 왜냐하면 그리스인은 라틴 시인보다 나의 천재성에 더 따르기 때문이다. [중략] 베르길리우스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미였다. 호메로스는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며 불 투성이였다. 베르길리우스의 주된 재능은 생각의 적절성, 말의 장식품이었다. 호메로스는 생각이 빨랐고, 그리고 숫자와 표현의 자유를 모두 가져갔는데, 그 자유는 그의 언어와 그가 사는 연령이 허락한 것이었다.
― 존 드라이든[35] #
― 존 드라이든[35] #
시인들 가운데 최고이며 가장 신성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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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떻게 해서 헤시오도스나 다른 시인들이 아닌 호메로스만 이런 기술을 갖게 되었는가? 호메로스는 다른 모든 시인들이 다루는 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지 않는가? 전쟁이 그의 대논쟁인가? 또한 그는 인간 사회와 인간, 선악, 숙련되고 비숙련된 인간, 그리고 서로와 인류와 대화하는 신들, 그리고 그 아래 하늘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신과 영웅의 세대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이것들이 호메로스가 노래하는 주제들이 아닌가?][36] #
― 소크라테스
그러나 어떻게 해서 헤시오도스나 다른 시인들이 아닌 호메로스만 이런 기술을 갖게 되었는가? 호메로스는 다른 모든 시인들이 다루는 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지 않는가? 전쟁이 그의 대논쟁인가? 또한 그는 인간 사회와 인간, 선악, 숙련되고 비숙련된 인간, 그리고 서로와 인류와 대화하는 신들, 그리고 그 아래 하늘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신과 영웅의 세대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이것들이 호메로스가 노래하는 주제들이 아닌가?][36] #
― 소크라테스
주로 다른 시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기술을 교묘하게 가르쳐온 사람은 호메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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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야말로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가장 잘 안 시인. #
― 아리스토텔레스[39]
호메로스야말로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가장 잘 안 시인. #
― 아리스토텔레스[39]
크레타 맞은편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섬들은 일종의 마을이었고, 아마도 벽이 있는 마을이나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리온이라고 불렸지만 트로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이름은 결코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지와 시나 노래를 퍼트리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시인이며,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고, 전통에 의해 시각장애인으로 묘사된 시인은 그리스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되찾기 위해 이 마을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그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전설처럼 들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는 그런 작은 마을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G. K. 체스터턴(영국 소설가, 가톨릭 신학자)[41] #
― G. K. 체스터턴(영국 소설가, 가톨릭 신학자)[41] #
우리가 인생에서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것들이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어쩌면 호메로스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42]
― 토머스 제퍼슨 #
― 토머스 제퍼슨 #
호메로스처럼 쓰진 않았지만
단테처럼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의 전성기처럼은 아니지만
괴테나 다른 사람들처럼은 아니지만
나처럼, 아무리 작아도
나처럼,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다.
― 윌리엄 앨링엄(영국 시인) #
단테처럼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의 전성기처럼은 아니지만
괴테나 다른 사람들처럼은 아니지만
나처럼, 아무리 작아도
나처럼,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다.
― 윌리엄 앨링엄(영국 시인) #
호메로스를 한번 읽으면 더 이상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다.
다른 모든 일들은 너무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책을 보아라.
그리고 다른 책은 거의 필요 없을 것이다.
― 존 셰필드(영국의 정치인, 백작) #
다른 모든 일들은 너무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책을 보아라.
그리고 다른 책은 거의 필요 없을 것이다.
― 존 셰필드(영국의 정치인, 백작) #
호메로스의 작품은 형언할 수 없는 사람들의 토포스[43] 위에 몇 번이고 올라온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할 것이다.
책, 특히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호메로스가 되기를 희망한다.
― 움베르토 에코 #
책, 특히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호메로스가 되기를 희망한다.
― 움베르토 에코 #
호메로스는 모든 위대한 시인들 중에서 문체가 가장 단순하며
구약성경의 시적 부분과 가장 닮았다. 그들은 교황의 번역으로만 그와 아는 사이인 그의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번역이 뛰어난 시적 연기로, 원문에 충실하다. 어떤 곳에서는 호메로스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무례함을 일부 누그러뜨렸고, 그의 감정에 섬세함과 우아함을 더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아닌 호메로스가 현대화한 것이다. (알렉산더) 포프씨의 언어의 우아함과 럭셔리함 속에서 우리는 낡은 바드의 소박함을 보지 못한다. 나는 정말로 호메로스만큼 번역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 저자를 알지 못한다.
― 휴 블레어(스코틀랜드 작가)[44] #
― 휴 블레어(스코틀랜드 작가)[44] #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감춰진 생생함을 폭로함에, 삶의 정수를 분명하게 드러냈음에 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인이 아니다. 그는 세계 속에서 반짝거리는
빛이다.
― 애덤 니컬슨(영국 작가, 영국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 #
― 애덤 니컬슨(영국 작가, 영국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 #
그는 기원전 9세기나 8세기에 살았던 맹인 그리스 구술 시인으로 문화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서사시의 저자로 여겨진다. 이 두 권의 책이 한 천재에 의해 쓰여졌든 아니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 전통에 기여하고 다시 작업하는 많은 인물들의 산물이었든 간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양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작품으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 교육과 문화의 기초를 제공했고, 2천년 동안 서사시의 형태로 스토리텔링의 본문이 되었으며, 이후 로마 제국을 통한 고전 인문학 교육, 19세기까지 기독교의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 미국 시 재단 #
― 미국 시 재단 #
6. 논란
6.1. 호메로스 문제: 실존성과 단일성
앞의 2대 서사시 외에 호메로스 찬가라는 일군(一群)의 찬가집(讚歌集)이나 익살스러운 풍자시 마르기테스와 와서회전(蛙鼠會戰) 등 몇 가지 서사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하나 이것도 불명확하다. 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동일인의 작품이냐의 문제로 오래전부터 논쟁이 많았다. 18세기 후반 F.A.월프가 호메로스 서설(序說, 1795)을 발표한 이래, 그의 존재 그 자체와 작품의 성립과정, 2대 서사시의 작자의 진부(眞否) 등 여러 가지 시비가 있었다.특히 유명한 것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를 한 작가가 집필했다는 통합론과, 언어, 문체, 사고방식 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작가들이 썼다는 분리론의 논쟁이다. 분리론자 중에서도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1897년에 "오디세이아의 여성 저자(The Authoress of Odyssey)"라는 책에서 오디세이아를 여자가 썼지 않았는가 하는 대담한 가설을 제시했다. 근거로는 오디세이아가 전쟁이나 항해와 같은 고대 남자의 직업 영역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으나 가정생활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칼립소나 키르케, 나우시카, 페넬로페와 같은 여자들은 개성 있고 생동감 있게 묘사했으나 남성 등장 인물들의 묘사는 상대적으로 단조롭다는 점이다. 이 가설은 당대에도 버나드 쇼 등이 지지했고 후대에도 콜린 윌슨 등이 지지하였다.
종합하자면, 워낙에 알려진 게 없어 온갖 설이 다 있는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는 설, 심지어는 여자였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편의상 남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를 눈 먼 시인으로 부른 고대의 문호들도 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이 어근을 따져보면 눈이 멀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는 주로 눈 먼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다.[47] 아르놀트 하우저는 호메로스를 전혀 역사적인 확실성이 없으며 그저 도리스 침공 이전 그리스 궁정에서 형성된 영웅시가 이오니아 시대의 서사시로 발전해나간 과정을 총괄해서 일컫는 하나의 상징적인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뒷세이아의 한국어 전공 역자 중에서 이준석 교수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를 단일하게 본다. 반면 김기영 교수는 두 작품의 저자가 다르고, 1~4권(텔레마키아)이 이미 독립된 본래의 귀환 이야기에 후험적으로 삽입되었다고 본다. 다만 두 학자 모두 현재의 오뒷세이아 텍스트가 높은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역자는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에 이 작품(『일리아스』)을 글로 썼고, 그 후속작으로 『오뒷세이아』 역시 썼다고 생각하는 쪽이다."[48]
"역자는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오뒷세이아』 역시 한 시인의 일관된 시학과 정교한 설계를 상정하지 않으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49]
이준석 교수
"역자는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오뒷세이아』 역시 한 시인의 일관된 시학과 정교한 설계를 상정하지 않으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49]
이준석 교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모두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점들이 있긴 하지만 두 서사시가 같은 작가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전학자 웨스트(M. L. West)는 『오뒷세이아』의 시인을 Q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오뒷세이아』의 시인은 위대한 서사시 『일리아스』를 모방하고 경쟁하면서 『오뒷세이아』를 지어냈다. ...... 1권에서 4권까지는 텔레마코스가 중심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텔레마키아(Telemachia)’라고 불린다. 이 부분은 『오뒷세이아』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추가된 부분으로 보인다. 본래 이야기는 남편의 귀향이었을 것이다. 귀향하는 남편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이야기는 한 사내와 그의 아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내에게 아들이 추가되면서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더 흥미로워졌다."[50]
김기영 교수
김기영 교수
상기한 두 역자의 원본으로 삼은 그리스어 비평본의 편집자(Martin Litchfield West)는 이렇게 본다:
I shall argue for two complementary theses: firstly that ‘Homer’ was not the name of a historical poet, but a fictitious or constructed name, and secondly that for a century or more after the composition of the Iliad and Odyssey there was little interest in the identity or the person of their author or authors. This interest only arose in the last decades of the sixth century
나는 두 가지 보충 가설을 주장한다: 첫째로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역사적 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가상의, 즉 모조된 이름이다. 둘째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완성 후 한 세기 이상 저자(들)의 신원이나 인격이 거의 관심 받지 못했다. 이 관심은 오직 BC 6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에나 일어났다.
Martin Litchfield West, 」The invention of Homer」
나는 두 가지 보충 가설을 주장한다: 첫째로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역사적 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가상의, 즉 모조된 이름이다. 둘째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완성 후 한 세기 이상 저자(들)의 신원이나 인격이 거의 관심 받지 못했다. 이 관심은 오직 BC 6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에나 일어났다.
Martin Litchfield West, 」The invention of Homer」
천병희 교수의 경우, 두 서사시가 단일 저자에게 소급되는지는 단답하지 않았으나, 서사시 곳곳에서 후대 편집층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일리아스의 경우, 대표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리아스 10권의 <돌론의 정탐> 이야기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라고 본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일까? ... 고대 그리스에 새로운 알파벳이 도입된 것이 기원전 8세기 초이므로 설사 호메로스가 고대 그리스에서 문자에 의해 작품이 고정된 최초이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호메로스 당시 그러한 성문화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자의 사용이 아직 생활화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문학작품이든 역사 이야기든 어디까지나 구송(口誦)을 위해 씌어진 것이지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씌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메로스 당시의 텍스트는 시인 또는 음송자(rhapsodos)들이 시를 낭송할 때 참고하기 위해 요지만 기록해두는 식의 간단한 것에 불과하고 전승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구송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텍스트가 완전히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경우 후기의 음송자들에 의해 새로운 부분이 첨가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실제로 호메로스의 텍스트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일리아스』, 천병희 번역, 숲, 2007, pp.773-774
『일리아스』, 천병희 번역, 숲, 2007, pp.773-774
6.2. 비사실성
일리아스는 1만 5693행(行), 오디세이아는 1만 2110행의 장편 서사시이며, 각각 24권으로 되어 있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그 후의 문학 ·교육 ·사고(思考)에 큰 영향을 끼쳤고, 로마제국과 그 후 서사시의 규범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비판도 받았다.우선 고대서부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사실성에 의문을 던지며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부흥기에 호메로스는 더 이상 교육의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며 당시 아테네의 우월성을 주장했으며[51] 중세 당시 제프리 초서는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의 이야기를 쓰며 비기독교적인 호메로스를 비판했다.
즉, 대부분의 경우 호메로스의 비사실성을 비판한 것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흥미롭다.
7. 주요 작품
호메로스의 서사시 | ||
일리아스 | → | 오디세이아 |
8. 대중 문화에서
|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의 '호메로스와 그의 가이드' |
-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 율리시스"는 "오디세이아"의 내용과 구조에 착안해서 20세기 더블린의 하루 사이 사건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종종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된다.
- 프랑스의 소설가 크리스티앙 자크가 쓴 유명한 소설 람세스에서는 람세스 궁정의 식객으로 등장한다. 호메로스뿐만 아니라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도 나온다. 이들이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스파르타로 돌아가던 도중 이집트에 잠시 머물었다는 설정인데 호메로스가 이 일행에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직접 목도하고 일리아스를 썼다는 설정인 것이다. 호메로스는 이미 눈 먼 노인으로 나오며 메넬라오스가 이집트를 떠날 때 따라가지 않고 이집트에 남으며 이후 람세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간혹 람세스의 말상대가 되어 준다. 물론 호메로스가 람세스와 만나 비호를 받는다는 내용은 작가의 가공이다. 호메로스가 실존한다는 가정하에 람세스 2세와 같은 시대 인물로 놓고 카메오 출연시킨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설의 설정일 뿐, 실제로는 시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에서도 등장한다. 신비한 강물을 마시고 그 무엇에도 상처입지 않는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로 인해 삶에 무감각해져서 강물을 마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신줄 놓고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주인공 '존 카르타필루스'(기원후 2세기 경의 로마 군단장)에게 야만인으로 오해받아 '아르고스'[52]란 이름이 붙었으나 오랜만에 내린 비를 맞고 제정신을 차리며, 마찬가지로 불사신이 되어버린 주인공에게 자신과 그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이후 그와 헤어진 후로는 등장이 없다. 한편 주인공은 오랜 세월 동안 방랑하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앞서 말한 강물의 해독제인 강물을 발견하고 다시 필멸자의 몸이 된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컷은 호메로스의 에스파냐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서사시 "오메로스"(1990)를 펴내 격찬을 받았다. 여기서는 아킬레우스, 헥토르, 헬레네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이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이며 월콧의 고국인 세인트루시아 토착민으로 묘사된다.
- 장뤽 고다르 감독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경멸’은 ‘오디세이아’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 현장에 대한 이야기다.
- 코엔 형제의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는 오디세이아를 '아내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기본 뼈대와 주인공의 이름만 가지고 와 각색한 영화이다.
- 오늘날에는 힘든 여행의 대명사로 ‘오디세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쓴다. 클래식 오디세이, 우주 오디세이, 과학 오디세이, 논술 오디세이, 미학 오디세이, 한자 오디세이, 금융 오디세이까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디세이도 호메로스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중적 볼거리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가 물속에 있는 나우시카를 엿보는 장면은 스트립쇼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들’로, 키클롭스는 영화 ‘킹콩’으로, 키르케는 빌헬름 파브스트의 영화 ‘아틀란티스의 여왕’에서 안티네아로 바뀐다.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1826년 루브르의 천장을 장식할 <호메로스의 예찬>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듬해 완성된 이 그림(상세한 것은 위 '영향력' 문단 참조)은 1855년에 천장에서 떼어져 만국 박람회에 전시되었고, 이후 줄곧 천장이 아니라 벽에 걸려 있다. 사실 이 그림은 천장화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지 않아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감상하기에 더욱 적합하다. 엄격하게 대칭을 이룬 인물과 건축물, 과거와 현대의 인물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단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시간을 초월한 고전의 가치에 대한 앵그르의 신념을 대변한다.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 신처럼 앉아 있는 호메로스 뒤로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신전이 있고, 이 성스러운 구역은 이를 무대처럼 감싼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호메로스는 고대와 현대의 역사적 위인들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의 정점을 이루고, 이런 구성은 위대한 시인을 신격화하는 주제와 조응한다. 호메로스의 머리 위로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발치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의인화이고, 작품을 상징하는 검과 노를 들고 있다. 주변에는 전신상으로 표현된 고대의 위인들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대칭으로 서있다. 왼쪽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아이스퀼로스는 오른쪽의 리라를 들고 있는 핀다로스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아펠레스는 나무망치를 들고 있는 피디아스와 대응된다. 아펠레스의 인도를 받는 라파엘로와 베르길리우스를 따라오는 단테만이 유일하게 이들과 같은 단에 오를 수 있다. 아랫단에는 왼쪽으로 17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예술가인 푸생과 코르네유, 라 퐁텐이, 오른쪽으로 부알로와 몰리에르, 라신이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다. 왼쪽 구석에는 셰익스피어와 타소, 오른쪽 구석에는 카모엔스 같은 외국의 문호들이 있다. 전체 구성은 엄격한 대칭을 이루지만, 세부는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앵그르는 이 작품을 통해 새로움의 도전을 받던 프랑스 아카데미의 전통을 옹호하고자 했지만, 병치된 인물들은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단순히 열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로 인해 그는 고전주의자들에게도 혹평을 받았고, 이에 크게 상처 받은 앵그르는 1835년에 다시 로마로 떠난다.
- 1944-1945년 살바도르 달리는 호메로스의 신격화라는 그림을 그렸다. 초현실주의 그림인 이 그림은 잉그리스의 동명의 그림을 통째로 해체해버림으로서 영원한 예술의 규칙과 가치는 불변하다는 환상을 해체했다.
- 트로이 전쟁이 배경인 토탈 워 사가: 트로이의 공개 트레일러에서 나레이션이 일리아스의 구절들을 읊는다. 이후 인게임에 등장하는 조언자가 늙은 맹인인 점을 보면 호메로스가 나레이터라는 설정으로 추정된다.
- Hades 2에서 나레이션의 정체로 나온다.
9. 여담
- 호메로스는 ‘인질(hostage)’이라는 뜻이다.
- 많은 도시가 자기네가 호메로스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그가 바빌로니아 사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호메로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 2006년 호메로스의 서사시 내용들이 생생한 삽화들로 그려진 2천 500년 전 한 석관(石棺)이 키프로스 서부에서 발견됐다. 건설 노동자들이 파포스 연해지역의 코우클리아 마을 인근 한 무덤에서 이 석회암 석관을 지난주 발견했으며, 이 무덤은 고대 전사의 것으로 추정되고 고대에 약탈당했다. 이 섬의 고대유물국 간부 파블로스 플로렌초스는 삽화들의 "장식 양식이 예술적 관점에서라기보다, 주제들과 사용된 색깔들로 볼 때 독특하다"라고 말했다. 단지 2개의 유사한 석관들이 키프로스에서 지금까지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다른 하나는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나 색깔이 이번에 발굴된 것보다 더 침침하다고 플로렌초스는 밝혔다. 그는 흰 바탕에 붉고, 검고, 푸른 색깔로 그려진 이 관은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 동부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던 기원 전 500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석관의 화려한 삽화 장식이 그리스 세계에서 아주 인기를 모았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나오는 영웅 율리시스를 묘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석관의 한 큰 그림에서 율리시스와 동료들은 키클롭스의 폴리페모스 왕이 가둔 동굴에서 탈출하고, 다른 그림은 일리아드에 나오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장면들이 석관 속 사람의 신분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플로렌초스는 그린 사람이 "왜 하필 이 두 장면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취했으며, 또 왜 율리시스를 그리겠는가. 아마 전사였던 죽은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
- 2018년 '오디세이아'의 가장 오래된 대점토판이 발견됐다. # 로마 시대인 서기 3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점토판에는 오디세이 14편에서 발췌한 13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라틴어로 율리시스)가 자신의 고향 섬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내용이다. 그리스 문화부는 성명을 통해 "이 점토판의 제작 날짜가 확인된다면 그리스에서 발견된 호메로스 작품 기록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8)는 그의 시론(Ars Poetica)에서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도 (자기 실수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라는 글을 썼다. 이 말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우리 속담과 의미가 똑같은 말이다. 또 학술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죽었던 인물이 버젓이 살아 맹활약하는 경우가 발견된다는 말이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좋아한 작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를 “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배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 아시아 원정중에도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원정과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마치 성전과도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인 마크 푸크너는 그의 책 '글이 만든 세계'에서 호메로스 서사시는 헬레니즘 문화을 잉태하고 키운 근본 텍스트였다고 주장했다. #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좋아한 작가이다. 청력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호메로스의 책을 읽었다. 또 프리드리히 니체가 가장 좋아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일리아스를 꼽았다. 또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열렬히 사랑한 게 호메로스의 작품이다. '변화하며 움직이는 거울’인 호메로스가 자신의 원초적인 모델이었다.
- 리하르트 바그너의 어린 시절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바그너는 특히 영웅과 신,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최고봉 문학인 호메로스에 빠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고전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주었고 나중에 음악극이라는 자신만의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 로마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나름대로 소화한 결과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의 작품 아이네이스(Aeneid)가 나왔다(베르길리우스는 전쟁에서 진 트로이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로마인들의 조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서부 유럽에서 잊혀졌던 호메로스가 다시 부활한 것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다. 1488년 최초로 인쇄본이 나왔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호메로스를 번역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됐다. 그만큼 호메로스는 당시 서유럽에서 뜨거운 화두였다.
- 트로이 유적지의 비밀을 밝혀낸 것은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다. 그는 집요한 추적 끝에 1873년 마침내 유적지를 발굴했다. ‘일리아스’를 길라잡이로 사용한 슐리만은 오늘날 터키 북서쪽에 있는 히사를리크 마을 아래서 트로이를 발견한 것이다. 슐리만이 호메로스에 심취해 트로이 발굴에 나선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여덟 살 때 그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루트비히 예러가 쓴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사줬다. 어린 슐리만은 불타는 트로이 삽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가 트로이의 몰락은 옛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슐리만은 믿지 않았다. 슐리만이 처음 호메로스의 시를 접한 것은 독일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할 때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직원 하나가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줄줄 암송했다. 난생처음 그리스어를 들은 슐리만은 뜨거운 눈물까지 흘렸다. 이후 그는 그리스어를 비롯한 외국어 공부에 열중해 영어, 라틴어 등 무려 15개 언어에 능통했다.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라 신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로 여겼다.
- 호메로스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플라톤조차도 호메로스를 331번 언급했다. 플라톤만이 호메로스의 진정한 위대함을 맨 먼저 눈치를 챈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라’라고 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사회의 음유시인들이 끼치는 해악을 염려해서였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호메로스가 죽고 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스인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호메로스의 영향력을 알아차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신들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작가로서의 호메로스를 극찬했다.
- 유럽이 그리스도교화된 후에도 호메로스는 중요한 작가로 대우를 받았고, 서로마 제국에서는 소년들이 그리스어를 익히게 하는 기본 교재로 쓰였다. 다만 고전 그리스어와도 거리가 있는 호메로스의 문체가 라틴인들 귀에 쏙쏙 들어올리가 만무하므로, 실제로는 수많은 라틴 어린이들의 원성을 샀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회고한 바로는, 교사들의 체벌 때문에 오히려 호메로스에 대해 반감만 들었다고 한다.
-
국내 그리스어 원전 번역은 오랫동안
천병희 번역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만 존재했다. 천병희 교수는 본래 독어독문과 전공이었지만 독일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문학을 함께 전공했으며, 국내에 그리스어 번역 인프라가 얕던 시절에 원전 번역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천병희 독주 체제가 이어지다가, 2020년대부터 새로운 그리스어 원전 번역들이 등장했다. 2022년에 김기영[53] 번역 오뒷세이아가 출간되고 2023년에 이준석[54] 번역 일리아스가 출간됨으로써 다양한 그리스어 원전 역본이 경쟁하게 된 것이다.
-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을 때 주의할 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겐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이야기라 따로 배경 설명이 필요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독자의 경우 배경지식이 없으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니 주의. 이해가 안된다면 강대진 교수의 호메로스 해설서를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
- 영문권에서는 Homeros(호메로스)란 이름 말고도 간략화한 Homer(호머)로도 자주 불린다.[55] 이슬람 세계에선 Umatirash(우마티라쉬)라고도 불렸다.
- 호메로스의 초상은 기원전 460년께부터 나타난다. 보통 얼굴이 길고 볼에 살이 없는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 국제어로서 프랑스어가 영어에 밀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호메로스를 둘러싼 치열한 ‘번역 전쟁’에서 밀린 결과다. 프랑스어로 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는 수십 종, 영어로 된 것은 수백 종이다. 대략 5년에 한 번씩 참신하거나 원전에 충실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발간되는 같은 영미권 내에서도 영국보다는 미국의 호메로스 번역 작업이 활발하다. 일리아스의 최고의 영어 번역본
-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극화한 ‘일리아스’의 낭독을 듣기 위해 2005년 9월 무려 3000여 명이 로마 공회당의 가장 큰 극장을 가득 메웠다. 낭독 공연은 3일 밤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 한국 극사실주의 화가 정중원이 호메로스 석상을 보고 상상해서 그린 호메로스의 얼굴이다.
10. 관련 문서
11. 외부 링크
[1]
고전 그리스어, 발음은 호메로스.
[2]
영어, 발음은 호머
[3]
이 시기를 호메로스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의 기록 역사가 호메로스의 저서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4]
호메로스가 대충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단히 알고 싶으면 이 영상을 보자.
[5]
자신이 지었다는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여기 거룩한 호메로스의 머리를 흙이 덮고 있다. 그는 영웅들을 찬양한 사람이었다.”
[6]
불핀치의 시대에도 이미 호메로스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
《일리아스》는 무훈적이고, 영웅적인 데 반해 《오디세이아》는
피카레스크 성향이며 종종 환상적이다.
[8]
《오디세이아》에서 비교적 단순한 구조와 비교적 늦은 언어 형태의 더 큰 빈도로 보아.
[9]
이전에 그리스 알파벳에 존재했던 문자.
[10]
다만, 반대로 마틴 리치필드 웨스트처럼 호메로스의 작품이 헤시오도스의 작품에게서 영향을 받은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산물이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11]
영문위키백과 문서에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 하나 하나를 집어서 누구인지 설명해놨다. 참고로 습작도 남아 있는데, 크기도 훨씬 크고 등장인물도 늘어난다. 습작과 해당 작품 모두
루브르 박물관 소장
[12]
니컬슨은 어릴 적 그리스어 시간에 호메로스의 시를 배우며 ‘대체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는 40대 후반인 10여 년 전 친구와 범선을 타고 여행하던 중 거대한 폭풍우를 만나 40시간의 사투를 경험한 직후 《오디세이아》를 읽었다. 그는 “인생의 중반기에 들어선 남자인 내게 불현듯 이 시가 그때, 그곳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지중해가 아니라 한 인간이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욕망을 항해한 것이며, 갈수록 호메로스가 인생의 안내서로, 일종의 경전으로까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3]
1909년 크로아티아 화가 Bela Čikoš Sesija의 작품이다.
[14]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 문학에서는 호메로스에서
제임스 조이스로 이어지는 서구의 지적 전통을 일컫는 용어다.
[15]
문학적인 가치도 당연히 훌륭하지만 서구 문명권에 끼친 영향력면에서 이 세 작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16]
특히 4대
비극. 그 중에서도
햄릿이 그렇다.
[17]
그 외에도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괴테의
파우스트가 들어가기도 한다. 다만 세 작품만 꼽는다면 성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많이 언급한다.
[18]
Telerama 조사
[19]
El Pais 조사.
[20]
프랑스의 인문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아이네이스보다 논리적으로나 심미적으로 열등하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21]
베르길리우스는 민족시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의 작품보다 우월한 호메로스보다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22]
괴테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의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얼마나 호메로스에 심취했는지 엿볼 수 있다.
[23]
단테를 맞이할 때 손에 칼을 든 것으로 나온다. 서사시의 호전성을 상징.
[24]
니체의 책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에서 나오는 말이다.
[25]
관련 문서 The Iliad 서문 (1727
[26]
관련 문서 The Iliad 서문 (1727
[27]
17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신고전주의를 제창했다. 그가 번역한 호메로스 저작물은 역대 최고의 번역본 중 하나라고 볼리기도 한다.
[28]
단테는 개인적으로 호메로스를 엄청나게 존경했다.
[29]
관련 문서 dedication to Achilles' Shield (1598).
[30]
관련 문서 The Iliads of Homer (1611
[31]
17세기의 호메로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32]
The Aeneid of Virgil (1971), p. vi.
[33]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표 극작가
[34]
The Hierarchy of the Blessed Angels (1635)
[35]
17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36]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37]
The Iliad and the Bible, reported in Hoyt's New Cyclopedia Of Practical Quotations (1922)
[38]
그의 책 서양 철학사에서 나온 말
[39]
모두 그의 책 시학에서 나온 말이다.
[40]
아킬레우스의 무덤에서 말한 이야기다.
[41]
그의 저서 영원한 사람에 나오는 글.
[42]
다른 문명들이 사라져도 호메로스의 작품만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43]
문학의 영역에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motif)들.
[44]
Lectures on Rhetoric and Belles Lettres (1784), Lecture XLIII: 'Homer's Iliad and Odyssey—Virgil's Aeneid', p. 407.
[45]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어서 말한 이야기다.
[46]
보리스 존슨은 그리스 고전 덕후로 유명하다.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읽기도 했다.
# 우리나라로 치면
한문학 덕후로서
사서삼경을
한자 원문 그대로 읽는 격.
[47]
오디세이아를 보면 데모도코스라는 솜씨 좋은 장님 가객이
오디세우스에게서 시인들은 찬양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트로이 전쟁을 생생하게 노래해서 오디세우스를 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인물이 바로 호메로스의
오너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48]
『일리아스』, 이준석 번역, 아카넷, 2023, p.807
[49]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아카넷, 2023, pp.654-655
[50]
『오뒷세이아』, 김기영 번역, 민음사, 2022
[
ebook]
[51]
"따라서 우리는 호메로스나, 그 밖에 그 미사여구가 당장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도 실체적 진실에 의해 허구로 드러나게 될 다른 시인의 찬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에 나오는 구절이다.
[52]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견 아르고스에서 딴 이름이다. 그 오디세이아를 누가 지었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 때문에 정신을 차린 이후 자신을 아르고스라 부르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는 오디세이아의 구절을 읊는다.
[53]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소포클레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54]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55]
호머 심슨이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