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남아메리카에서의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에 대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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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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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태평양 전쟁 太平洋 戰爭 | Pacific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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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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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41년 12월 7일[1] ~ 1945년 9월 2일[2] | |||||
장소 | |||||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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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중일전쟁으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의 팽창 정책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와 그에 대한 일본의 보복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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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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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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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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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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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196,543명 전사 및 실종 240,000명 부상 민간인 16,000명 사망 [[틀:깃발| ]][[틀:깃발| ]][[중화민국| ]] 380만 명 전사 민간인 약 1,700만 명 사망 [[틀:깃발| ]][[틀:깃발| ]][[소련| ]]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틀:깃발| ]][[틀:깃발| ]][[영국| ]] 56,000여 명 전사 [[인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최대 240,000명 사상 87,000명 전사 민간인 200~300만 명 사망 [[틀:깃발| ]][[틀:깃발| ]][[호주 자치령| ]] 51,000명 이상 사상 17,501명 전사 민간인 20,000~30,000명 사망 [[자유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20,000명 전사 [[필리핀 제2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100,000명 전사 민간인 50~100만 명 사망 [[틀:깃발| ]][[틀:깃발| ]][[네덜란드 망명 정부| ]] 9,400명 전사 중일전선 제외 총 49만여 명의 연합군 전사 및 실종 |
]][[틀:깃발| ]][[미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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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191919>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12] 1,480,397명 전사 및 실종 130,420명 부상 민간인 약 550,000 ~ 1,000,000명 사망 [[태국| ]][[틀:국기| ]][[틀:국기| ]] 5,600명 전사 민간인 2,000명 사망 중일전선 제외 총 1,485,397명 전사 및 실종 |
}}}}}} |
결과 | |||||
연합국의 승리 | |||||
영향 | |||||
연합군에 의한 일본 제국 강제 해체 미국의 초강대국 등극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한민족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독립[13] |
[clearfix]
1. 개요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좁은 의미로는 1941년~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미국과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을, 넓은 의미로는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2. 서론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 내 긴급 속보 방송[14] |
臨時ニュースヲ申シ上ゲマス。臨時ニュースヲ申シ上ゲマス。大本榮陸海軍部、12月8日午前6時發表。帝國陸海軍ハ、本8日未明、西太平洋ニ於ヒテ、アメリカ、イギリス軍ト戰鬪狀態ニ入レリ。帝國陸海軍ハ、本8日未明、西太平洋ニ於ヒテ、アメリカ、イギリス軍ト戰鬪狀態ニ入レリ。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본영 육해군부에서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오전 7시, 라디오 임시 뉴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라는 위협을 일시적으로 제거한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남방작전을 개시해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저항하는
영국 해군을 여러 해전에서 격파하며(
말레이 해전,
실론 해전)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본영 육해군부에서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오전 7시, 라디오 임시 뉴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재건된 미 해군의 반격과 거듭되는 일본 해군의 패착으로 남방으로의 보급은 불안정해졌으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해군 전력이 전멸 당하고 이윽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한 채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한 일본 제국 수뇌부는 지속적으로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격렬한 저항을 거듭했으나, 결국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항복 이후 일본은 연합국에게 7년간 점령되었다.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설치하여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협력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였으며, 거대 재벌들이 해체되었다. 쇼와 덴노는 인간선언을 통해 자신이 현인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연설했고, 구 대일본제국 헌법을 대체해 민주주의, 천황의 정치적 권한 박탈 등의 내용을 담은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어 화족 제도가 폐지되고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을 제외한 황족들은 황적이탈되었다.
이윽고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해 기존 GHQ의 자유주의적 일본 개혁들은 상당수 보수화되었고, 비무장 정책은 수정되어 준군사조직인 경찰예비대, 해상경비대가 창설되었다. 7년이 지난 1952년 4월 28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한국과 대만, 쿠릴 열도 등의 기존 해외 영토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주권을 회복했다.
3. 배경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경과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경과 문서 참고하십시오.4.1. 개전 이전
4.2. 1941년
4.3. 1942년
- 미국 본토 공격
-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 둘리틀 특공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가 공습당했다.
- 산호해 해전
-
미드웨이 해전: 일본에게 유리하던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전투. 사실 엄밀히 말해서
미국 해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최후에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으로
일본 제국 해군을 피해 달아나는 등 일본의 우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 해군은 더이상 동진할 만한 여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큰 의미 없이 이후로는 계속해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알류샨 열도 전역 (~1943년 8월)
- 코코다 트랙 전투
- 부나-고나 전투 ( 링크 참조)
- 과달카날 전역
4.4. 1943년
4.5. 1944년
- 글로스터 곶 전투
- 헤일스톤 작전
- 임팔 작전
- 사이판 전투
- 필리핀 해 해전
- 제2차 괌 전투
- 펠레리우 전투
- 앙가우르 전투
- 대만 항공전
- 필리핀 탈환전
- 레이테 만 해전: 군함만 600척이 넘게 동원되었으며, 항공모함만 28척, 야마토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 아이오와급 전함 등 당시 최신예, 최고성능의 전함들이 한데 참전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다.
- 일본 본토 공습 (~1945년 8월)
4.6. 1945년
- 람리 섬 전투
- 페낭 해전
- 오보에 작전
- 도쿄 대공습
- 이오지마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구레 군항 공습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시탕 굽이 전투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8월 9일)
- 궁성사건
- 마츠에 소요 사건
4.7. 미실행 작전
- 지퍼 작전
- 카보네이드 작전
- 결호 작전
5. 종전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항복 문서 참고하십시오.6. 군사력
미국, 일본 제국의 군사무기 생산력 비교 (1939-1945)[15]미합중국 | 일본 제국 | |
전차 및 자주포 | 88,410 | 2,515 |
야포 | 257,390 | 13,350 |
박격포 | 105,054 | 미공개 |
기관총 | 2,679,840 | 380,000 |
트럭 | 2,382,311 | 165,945 |
전투기 | 99,950 | 33,405 |
폭격기 | 97,810 | 15,117 |
수송기 | 23,929 | 2,110 |
항공모함[16] | 141 | 18[17] |
전함[18] | 8 | 2 |
순양함 | 48 | 9 |
구축함 | 349 | 63 |
잠수함 | 203 | 167 |
태평양 전쟁 당시 취역한 미-일 항공모함의 평형. 보시다시피 격차가 어마어마하다.[19]
일본 제국 측의 무기 생산량 중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잠수함은 82.27%). 하지만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 능력을 배분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올인하였음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미군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 같은 전투기였고, 일본군은 초기부터 개량해서 운용한 제로센이다.
제로센은 초반에는 F2A 버팔로와 F4F 와일드캣을 상대로 우세하였지만, F4F 와일드캣은 점차 내구성을 살려 타치위브 기동 전술로 격추했고 중반부터 F6F 헬캣, F4U 콜세어 등 더 좋은 성능의 미군 전술기들이 등장하고 아예 이오지마가 함락된 이후에는 육군항공대의 P-51 머스탱까지 배치되면서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살 돌격 전술로 수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전술기를 개량해서라도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 하는 상황에 베테랑 조종사, 숙련된 조종사들이 소모되었다.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전술기 양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패전 때까지 제로센만 운용한 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다. 당시 일본은 전투기의 생산 속도와 생산 가능량이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우세했다. 전투기 쪽에 올인하고 또 많이 써먹기도 했던 만큼, 초기에는 영국과 소련조차도 능가했으며,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왕국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세계 최강자 미국이었다. 미국의 생산속도와 생산량에 비하면 일본은 새 발의 피, 아니 그 피의 적혈구 하나만도 못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끊임없이 전투기를 상실했다. 제로센은 기존의 선회전으로는 미군 전투기를 압도했지만, 미군 전투기에 비해 무전시설이 조악했다. 때문에 미군은 우수한 무전시설의 장점을 살려, 제로센 1대에 미군 전투기를 2~3대씩 붙여서 무전으로 끊임없이 서로 약점을 보완해주며 다구리치게 만드는 전술을 채택, 제로센을 하나씩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전쟁 후반부에 들어서자 미국은 우월한 성능의 신형 전투기를 양산하는 반면에 일본은 본토공습으로 인해 공업력까지 상실하면서, 미국과의 격차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사실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일본에는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올인하는 분야에서조차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인데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이 1944년부터 양산한 M26 퍼싱 중형 전차는 44-45년간 생산량이 약 2,800대로, 대전 시기 일본 제국이 생산한 모든 전차, 자주포 총량보다 많았다.[20]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의 무책임한 징병 정책으로 숙련 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 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통상파괴로 인해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 산업 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렌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트럭이나 야포 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주 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그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도 매우 컸다. 특히 일본은 워낙에 철이 모자라서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고,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노선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의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일본 본토에서도 절이란 절은 다 돌아다니며 종들을 떼가질 않나, " 동전 따위 만드는데 쓸 금속은 없다"며 1944년에는 엔화보다 아래 단위인 5전, 10전을 주화가 아닌 지폐로 발행했다. 전쟁을 벌이면서 무기 등을 제작하기 위한 철이 모자라다는 것 자체가, 암담한 전황을 나타낸다.
사실 일본은 옛날 옛적부터 철이 부족한 국가였고, 산업화를 하면서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일본은 고급 강철은 사실상 전량수입, 프라이팬 만드는 수준의 선철조차 과반을 수입했다. 강철을 만들 기술은 있었는데 워낙 생산성이 떨어지고, 선철산업은 좀 육성해보나 했더니 대공황이 터지며 싹 망해버려서...그나마 조선과 만주에서 철광과 제철소를 만들고, 소련에서 강철을 수입하고, 영국령 인도에서 선철, 미국에서 고철을 수입하는 게 중일전쟁기 일본이었는데, 일본은 시원하게 그 모두와 전쟁을 벌인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 제국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 능력과 전투력 유지에 위기가 닥쳤다. 일본이 원유를 공급받던 유전은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 등에 있었는데 미국은 전쟁 후반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했고, 영국은 코코스 제도에서 전투기를 띄워 계속해서 팔렘방을 두들겼다.[21] 한 마디로, 일본은 안심하고 석유를 퍼올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석유난으로 인해, 전쟁 막바지에는 소나무에서 뽑아낸 송근유를 동원하여 전투기를 가동하려 했을 정도였다.[22]
그 밖에도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 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23])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할 기술력이 없었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사용되는 자원인데, 일본 제국은 텅스텐 가공 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동부전선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 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수한 산업 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 가지 천연자원들, 특히 천연 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 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합성고무를 만들어서 천연고무를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강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산업 능력으로 생산한 화학 살충제였다.
이런 직접적인 전투 장비(무기) 및 전략자원 문제 말고도, 양국의 산업력과 기술력의 차이는 이 전쟁에 크게 작용했다. 사실 애초에 일본이 영국,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에 과학기술을 의존하고 있던 현실[24]도 있었다. 당장 전황이 아직 불리하지 않던 개전 초인 1942년에는, 알류샨 열도 전역을 위해 자국의 고양이들을 죄다 공출해서 방한복 만드는 소재로 사용( #)할 정도로, 일본은 전 분야에서 기술력, 산업력, 자원보유량 모두 압도적 열세였다. 고양이 1마리 잡는다고 모피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또 다른 예로 불도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기간 내내 인력을 동원해 삽과 곡괭이로 활주로를 만들었다.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 반면 미군은 불도저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활주로를 뚝딱 만들어냈다. 과달카날에서도, 알류샨 열도에서도, 전쟁 후반기 괌과 사이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도 말이다. 일본 제국은 전쟁 초기 노획한 불도저를 본국으로 가져간 후 그 효율성에 주목하여 고마쓰 중공업에서 카피해내긴 했으나,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고, 수량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6.1. 일본군의 한계
일본군은 일본 황실 회의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스스로도 미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국을 이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 미국과의 장기전은 무리이고 단기전으로 미 태평양 함대를 무너뜨린 뒤 하와이 점령, 파나마 운하를 장악해 미국을 곤경에 빠뜨려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미국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조건으로 금수조치를 풀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일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미국이 생각보다 격앙된 모습을 보였고 함대를 긁어모으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단 1년 만에 전시생산 체제를 완성해 쇼 미 더 머니를 보여주며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신속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립은 너무 심했다.
물론 당대 거의 모든 나라의 군대에서 각 군종별 대립은 있었다.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도 비슷했던지 아돌프 히틀러의 수기에도 언급된다.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25], 국방군 내에서도 육해공군간의 대립이 있었다. 특히 항공모함을 가지려던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에 편제 될 항공대 지휘권을 가지고 괴링이 독일에서 나는 것은 전부 자기 지휘권이라 주장하며 견제만 하는 바람에 항공모함을 건조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에도 굴리지를 못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독일 해군의 에리히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께 부탁드리는데, 해군의 적인 헤르만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고[26],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이나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따로 존재하는 등 엉망인 면도 있었다.
일본의 적국이었던 연합국에도 이러한 면은 있었다. 미 해군과 미 육군항공대는 폭격의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 미 육군 출신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해군 출신 어니스트 킹이 필리핀-대만 진공루트 가지고 박터지게 싸운 적이 있고, 영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 해군항공대의 처우를 두고 갈등한 것처럼 타군과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상당히 치열했던데다가, 미군의 경우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상호간에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지원이 늦어져 애꿎은 미 해병대만 제대로 피를 보는 바람에 양측에 해병대가 이를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물론 두 조직 모두 내전은 원치 않았기에 대규모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소규모 부대 간에는 정말로 총질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완전 따로 놀았을 정도로 일본군은 서로 손발도 하나 맞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일본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27]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의 포인트는 "같이 이오지마에 배치된 해군 지휘관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긴 하다. 사사건건 육군의 작전에 딴지를 걸면서 앵무새처럼 연합함대의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해군을 보고는 쿠리바야시 중장이 "해군은 (연합함대의 전멸을) 모르고 있냐?"라고 묻는 장면이 백미.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한 협력과 통제 아래 전쟁을 이끌어나가도 승전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작전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의 육해군은 서로 불협화음이다 못해 서로 방해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의 조건대로 중일전쟁 당시 얻은 영토를 포기, 철수하는 방법과[28] 미국과의 양면전선을 만들어버리는 가불기에 가까운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스스로도 "미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명백하며,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시 일본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 언급된 황실회의록의 기록만 보아도 자명하다. 일본군은 정복전쟁에 이미 수많은 예산과 인력을 소모한 시점이라서 중국과 만주를 무혈로 내주기에도 불가능하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이 고민에 빠지다가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킨 뒤 필리핀을 먹고 브루나이 방면 원유지대를 차지하자' 라는 최악의 결론을 내놓으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고르게 된다.[29][30]
미국이 전쟁에 참여는 안 해도 연합국과 함께 유럽에 최우선적인 역량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 방면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반미 정서[31]와 미국 내에서도 탈식민지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 해군의 심각한 전력 공백 상태를 야기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 위치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선전포고 전 기습공격의 문제로 반일감정에 불을 붙여, 결과적으로는 전쟁 수행 의지만 더 불태우게 만든 꼴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참전국의 위치에서 유럽의 반인륜적인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간 구원자의 입장이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느닷없이 자국 영토가 공격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극대노하였고, 정치권 역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참전 결의안에 동의하면서,[32] 일본의 계획이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통해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목표는 첫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만일 미 해군을 크게 약화시킨 뒤 지속적으로 미 해군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필리핀 및 태평양의 패전 소식이 지속되면 미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그렇다면 미국 내 여론도 "일본의 요구를 그만 들어주자"는 여론이 생겨, 미국은 점점 태평양에서 손을 떼고 유럽에만 올인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 의지를 불태움으로써 오판이었으나, 진주만 이후에도 미국이 확실하게 공세로 돌아서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미국 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제대로 된 선전포고 등이 이루어진 것도 반드시 오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은 다시 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구르는 해병대와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를 무료로 상영해야 할 정도로 전쟁 수행 의지가 갈수록 떨어져가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 미 해군을 섬멸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력 공백을 야기한 뒤, 점감요격작전으로 지속적인 미 해군의 피해를 강요하여 경제적ㆍ정치적으로 부담을 받고 있는 미국을 단기간 내에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와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용인하게 하거나[33] 적어도 동남아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댓가로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재개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34] 그러나 미국 상부의 입장에서 태평양은 사실상 미국의 앞마당이자 천연 방어 라인인데, 이 곳이 뚫렸다는 것은 언제든지 적국이 함부로 침공할 수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국이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공습의 피해도 좀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이것이 장거리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만 이루어진 공습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고[35], 미국도 국채를 발행하고 렌드-리스 정책을 통해 빠른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그 많은 양의 전력을 단기간에 보충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어떻게든 일본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거나 지연을 시켜야 했다.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긁어모은 전력으로 일본군의 항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총 4척을 지닌 항모기동부대 2개를 수장시킨 덕에 백중세로 바뀌었고, 이후 일본 해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수세적인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6]
일단 일본 입장에선 쓸데없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느라 항공모함 2척 허비하지 말고, 괜히 폼 잡는다고 전함 뒤에 배치하지 말고, 항공모함 6척을 싹싹 긁어모은 뒤 초대형 전함 야마토, 무사시로 몸빵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을 펼쳐 미국 항공모함 4척[37] 다 잡고, 무슨 수를 써서든 하와이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함대기지를 지어서 하와이를 봉쇄하고 전함 주포든 함재기든 지상발진 폭격기든 싸그리 동원해서 진주만을 어떻게든 함락은 못 시켜도 무력화만 시키면, 만약 1942년 6월 시점에서 미국이 태평양에 보유하고 있던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 미국 항공모함은 1943년 중반 이후나 되어야 나오니, 그 사이에는 거의 미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립된 하와이를 두고 일본군이 태평양을 장악할 기회가 왔을 분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기엔 전위에서 몸빵 역할을 할 야마토급 전함과 무사시가 체급이 너무 커서 속도 등의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과 속도가 느린데 연료는 무지막지하게 먹는 괴물인데 정작 운용국인 일본은 연료(석유)가 부족해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전함사상에 찌들어 있던 일본이 왜 괜히 야마토를 호텔로 운용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냥 답이 나온다. 하와이의 방어력이 엄청났던 건 맞지만, 결국 고정된 타겟이고 요새화된 섬을 굳이 공략하지 않고 고립만 시키면 된다는 전략은 이미 현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겪은 바가 있다.
그런 다음 그 선에서 미국이 '무리다' 싶어 강화해주면 하는 거고, 강화를 해 주지 않으면 일본 해군이 오매불망 바라오던 함대결전도 가능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하와이가 고립된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서태평양 진출이 불가능해서,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긁어서 진주만으로 왔을 것이다. 여기서 이겨내면 그 때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강화론이 꽤나 대두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압도적 함대를 어떻게 이기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과 미국의 정규항모비율은 5대7[38]이었는데, 만약 미드웨이에서 일본항모는 다 살아남으면 9[39], 미국항모가 다 죽으면 5[40]가 되므로, 비율이 뒤집힌다. 필리핀해 해전이 역사에서 일본에게 처참하게 끝난 것은 미드웨이에서 한번, 과달카날에서 또 한번 일본 함대의 허리가 꺾였던 걸 어거지로 복구했던 게 원인인데, 위에 말했듯이 일본이 다 이기는 이 IF에서는 일본 함대는 1944년이 되어도 여전히 미국보다 우세를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의 공업력이 압도적이라도 항공모함을 1년 안에 다 만들어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항공기 우세 상황 지원을 일본이 받는 하와이 근해에서의 정면결전이라면 미국이라도 이긴다고 단언 못 한다.
물론 이렇게 연전연승을 해도, 유럽전선의 상황 같은 것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더 자세히 말하려면 길어지지만 하여간 원 역사만큼 속수무책으로 발리진 않았을 거란 말. 1942년이 미국 입장에서 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건, 역사적으로 하와이가 함락될 가능성이 "있기라도 했던" 유일한 시기였다는 점 때문이다.
수송선과 달리 군함은 당장 발주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고[41],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자만하지 않은 채 철두철미하게 작전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다르게 돌아갈 가능성 역시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 미 해군의 F4F 와일드캣에 대항하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미 해군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는 기체였으나[42], 내구력이 좋은 와일드캣의 장점을 이용해 타치 중위가 내세운 2(와일드캣) : 1(제로센) 비율로 이용한 공략법이 통하면서 제로센의 압도적인 속도나 선회력도 통하지 않기 시작했고, 미군이 전투기 F6F 헬켓으로 학살하는 와중에도 신형기 개발을 늦게 시작했다.
거기다가 일본 해군은 전함세력이라도 건재하였던 반면 미 해군의 경우 비교적 구형의 펜실베니아급 전함 USS 펜실베니아(BB-38)만이 진주만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테네시급 전함 USS 테네시(BB-43),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BB-46) 및 네바다급 전함 USS 네바다(BB-36)는 1942년까지 수리되어야 했고, 나머지 전함은 이미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굳힌 대전 후반에나 수리를 받고 동원되거나 그대로 폐기되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꺾이고 과달카날 해전서 열세로 변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완전히 미 해군에 의해 섬멸되기 전까지는 미 해군에 대하여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일본군의 실책 등을 모두 고려하니 "내가 맛깔나게 따귀를 때리면 감동 먹고 협상하겠지?" 라는 일본의 안일한 방침은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한 뒤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인 막대한 규모의 함대를 무력화하고, 증원되는 미국 함대를 각개격파하여, 태평양에 국한하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지속적으로 전력상 우위에 서게 할 경우, 미국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43] 물론 일본군이 굳이 하와이를 점령할 필요도 없이, 미 해군이 수세에서도 분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국내의 전쟁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하였다면 일본군이 이루려고 했던 부분이 일정 부분은 정말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만약 자신의 전력을 100%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굴릴 역량이 되었다면 미군이 이기기는 할 수 있어도, 1945년까지 100% 무릎 꿇린다고 호언장담하기는 힘들었다. 일본이 엄청나게 막강하거나 무서웠던 것은 절대 아니나, 당시의 그들은 분명 미 해군을 태평양에서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해군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태평양이라는 대양을 사이에 끼고 싸우기에 일본이 공격하기 힘든 만큼 미국도 공격하기가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이오지마 전투로, 방어군의 지휘관이 잘 대처하자 무려 다섯 배나 되었던 미군도 제법 고전했을 정도로 상당히 진땀을 뺐던 바가 있다.[44] 엄연한 열강이었고[45] 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쟁패일로를 달리던 강국으로, 분명 머리만 좀 있었으면 미군과의 전쟁을 졌잘싸로는 끝낼 역량이 되었다.
일본군은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웃음거리로서의 일본군이 아닌 명백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연합군에 대한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 중 잔인성을 제외[46]하면 멍청하고 무능하며 전근대적인 정신론만 고집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대한 오판과 이후 미 해군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장기전이 되면 질 것이라 예상하였던 전쟁이 장기화되어 막장이 되면서 결국 그렇게 몰락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일본군은 작은 오차도 허용하기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는 자신들의 손발도 매번 엇박자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항상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는 국가를 상대로, 적인 미 해군의 분전으로 원하던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금수조치 및 일본 자체의 경제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에 대처할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전쟁이 자신들의 계획에서 틀어지자마자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7. 인명피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8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28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20만 여명이다. 전투 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60,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12,935명, 말라리아로 6만 명이 추가로 죽었다.[47]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 피해는 일본이 루손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전쟁 미군 전사자 2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평양전쟁 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자"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Leapfrogging, Island hopping) 라 불렸다. 더글라스 맥아더를 위시한 미 육군은 '이건 미 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라고 까고, 미 육군 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 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쨌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 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 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으며, 이를 감당할 물자를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었던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00만여 명에 달했다.[48]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 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총력전 상태로 돌입하자 차마 전쟁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미군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한다.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 그래도 동원 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 때문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 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민족말살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 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오자 결국 방침을 바꿔서 조선인과 대만인들도 강제징집해 전선에 밀어넣고, 의무교육제도 및 선거권 도입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동화정책에 나섰으나 너무 늦어버렸고, 그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난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당시 심각한 혼란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굶주리는 빈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까지 당해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으니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전선, 그중에서 동부전선[49]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주로 전투 사망자가 다수인 유럽전선과 달리, 태평양전선은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만큼이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부유하던 청나라 멸망 후 폐허가 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나 임진왜란[50]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 살해/ 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태평양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백만 명씩 죽고 다친 국공내전과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참상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사실 세계적으로 힘을 과시할만한 아시아 강국들 입장에선 "태평양 전쟁" 자체가 중요한거지 미국과 일본이 치고받은 "태평양 전선"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도 중일전선과 국공내전, 6.25,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하게 부각하는지라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참상을 물을 때를 제외하곤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여전히 크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이다. 소련군 포로는 30~57.5% 이상이 사망했고[51]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 독일이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52]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 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53]
8.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문서 참고하십시오.9. '대동아전쟁'과 명칭에 관하여
전쟁 당시에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일본 내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 대동아공영권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행보를 귀축영미들이 방해하므로, 여기에 반격하기 위했던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전후 GHQ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전쟁([ruby(大, ruby=たい)][ruby(東, ruby=とう)][ruby(亜, ruby=あ)][ruby(戦, ruby=せん)][ruby(争, ruby=そう)])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미 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54]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극우세력들을 중심으로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중에는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흔한 주장부터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현대 일본 극우들이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애매한 부정적 입장[55]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본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기억하는 80대 이상의 세대들에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이들이 존재한다.[56] 이는 중일전쟁을 일컫는 지나사변이라는 표현과도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제국의 해당 명칭 사용과 잦은 선전에 기인한다. 현재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진 국가는 일본뿐이며, 그마저도 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태평양 전쟁의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한편, 영어로는 ‘Pacific War’라고 하는데, 태평양을 뜻하는 ‘Pacific’이 ‘평화롭다’는 뜻이다보니 실제로는 매우 참혹했던 전쟁인 ‘Pacific War’가 ‘평화로운 전쟁’이라는 뜻도 되므로 그 자체로 훌륭한 시적인 역설이 된다. 한국어로 ‘태평양 전쟁’이라고만 부를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 중의적인 감정이다.[57]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과 묶어 아시아-태평양 전쟁(Asia-Pacific Wa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10. 전쟁범죄
10.1. 미국
미국은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체를 훼손하였으며, 일본 열도를 대공습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이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20만여명에 달하는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10.2. 일본
일본은 중국과 필리핀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으며, 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성노리개로 삼았다. 또한, 잡힌 미국 및 서방측 포로들을 학대, 쿠타하는 등 가혹행위를 저질렀으며, 심하면 굶겨죽이기까지 하였다.
11. 관련 어록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천황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천황
"1억의
일본인들[58]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 도조 히데키, 진주만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 도조 히데키, 진주만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뤄진 연습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그 당시에도
삼국간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군의 성과는 단순히
탁상공론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그 의외성이 반영되지 못했다. 제군은 이 책상연습의 결과를 경솔하게 발설치 말라.
― 도조 히데키
― 도조 히데키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1년에서 1년 반 정도는 승산(
남방작전,
싱가포르 전투)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60]"
ㅡ 야마모토 이소로쿠[61]
ㅡ 야마모토 이소로쿠[61]
"대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 야마모토 이소로쿠
諸君、佐藤烈兵団長は、軍命に背きコヒマ方面の戦線を放棄した。食う物がないから戦争は出来んと言って勝手に退りよった。これが皇軍か。皇軍は食う物がなくても戦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兵器がない、やれ弾丸がない、食う物がないなどは戦いを放棄する理由にならぬ。弾丸がなかったら銃剣があるじゃないか。銃剣がなくなれば、腕でいくんじゃ。腕もなくなったら足で蹴れ。足もやられたら口で噛みついて行け。日本男子には大和魂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ちゃいかん。日本は神州である。神々が守って下さる…
제군, 사토 군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잖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1944년 7월 10일, 무타구치 렌야가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 작전의 훈시 중. 후루카와 사토시 저, 『은밀한 세계(葉隠の世界)』- 304 ~ 305p.
제군, 사토 군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잖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1944년 7월 10일, 무타구치 렌야가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 작전의 훈시 중. 후루카와 사토시 저, 『은밀한 세계(葉隠の世界)』- 304 ~ 305p.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これで日本は滅びるのや。お前たちも畳の上では死ねないようになった。今からその覚悟を固めておくことどすな。
이걸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도 다다미 위에서 죽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제 그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라.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제국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이걸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도 다다미 위에서 죽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제 그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라.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제국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64]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천 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65]
― 아돌프 히틀러 ( 나치 독일 총통)
3천년 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66]
― 윈스턴 처칠 ( 영국 수상)
― 아돌프 히틀러 ( 나치 독일 총통)
3천년 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66]
― 윈스턴 처칠 ( 영국 수상)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 서문.
-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 서문.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67] 중 일부. #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67] 중 일부. #
"다시 돌아오겠다."
― 더글러스 맥아더
― 더글러스 맥아더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 쪽바리들을 죽인다! 쪽바리들을 죽인다! 쪽바리들을 더 죽인다!"
―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 쪽바리들을 죽인다! 쪽바리들을 죽인다! 쪽바리들을 더 죽인다!"
―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나와 함께 있었던 해병대원들은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 것임을."
―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의 항복 조인식 후 전함 미주리 갑판에서의 연설
―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의 항복 조인식 후 전함 미주리 갑판에서의 연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커티스 르메이, 일본 본토 공습 중 Operation Meeting House를 짜면서.
― 커티스 르메이, 일본 본토 공습 중 Operation Meeting House를 짜면서.
12. 관련 문서
12.1. 교리
12.2. 사건사고
- 설리번 5형제
- 코브라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 어뢰 스캔들 : 미 해군 잠수함대와 뇌격기 비행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다.
- 벵골 대기근
13. 참고 자료
-
HyperWar Foundation
미 해군과 미 해병대 공식간행물을 중심으로 사진, 전문, 지도 등 많은 1차 사료를 찾아볼 수 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70]의 자서전 "산호와 장성(Coral and Brass)" 등 일부 단행본도 전재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사 밀덕이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
-
존 톨랜드 저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전쟁 1936~1945》 (원제: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1972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아돌프 히틀러>로 유명한 전쟁사학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저자가 15개월 동안 극동지역을 돌며 자료를 조사하고 500여 명을 인터뷰하여 완성한 태평양전쟁 통사.
-
노나카 이쿠지로 외 공저 《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원제: 《
실패의 본질 -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
태평양전쟁 때 일본 육·해군이 벌였던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 6개 작전을 분석하면서 일본군이 조직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
이노세 나오키 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미국과 총력전에 나설 때 그 예상 경과와 결과를 연구한 총력전 연구소의 시뮬레이션 과정과 실제 일본 정책 결정자들의 전쟁 결정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 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
일본 문화론의 대가로 알려진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 포병부대의 초급장교로 참전했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미드웨이 해전》
원제 "Shattered Sword: The untold story of the battle of Midway".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 과정을 기술하면서 해전에 대해 그 동안 잘못 알려졌던 신화들을 하나하나 논파. 해군의 전쟁인 태평양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결전인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설한다.
-
우가키 마토메 저 <전초록>
<Fading Victory: The Diary of Admiral Matome Ugaki, 1941-1945>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한동안 절판이었으나, 2008년에 다시 출간되었다.
-
해군반성회
전후에 군령부와 연합함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상급 지휘관과 함장들이 비공개 학술대회를 열었고, 녹취 기록으로 남겼다. 이름답게 각자가 이기적인 판단을 한 부분에 대해서 죽은 이와 살아남아 참석한 이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 많다. 당사자들의 증언이어서 해군선옥론의 느낌이 나는 것은 사실이나, 전술/전략 면에서 계파간의 접근 방식이 어땠는지를 확인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
미즈키 시게루 저 《
전원 옥쇄하라!》
태평양전쟁의 참전한 미즈키 시게루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만화.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당시 일본군의 막장성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
-
박광홍 저 《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한국인 저자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군인ㆍ군속 출신자들을 인터뷰하여 쓴 책. 당시의 일본인들이 어떻게 황국신민으로 자라나 전쟁에 동원되고 패전을 마주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 기타 일본군 관련 참고 서적 문서 참조.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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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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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술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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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보어 전쟁 ,1899 ~ 1902, |
트란스발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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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1918 ~ 1920, |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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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colbgcolor=#01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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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만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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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바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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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베트남 전쟁 ,1841 ~ 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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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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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1967 ~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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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베트남 | ||
걸프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공화국 |
[1]
진주만 공습이 발생한 날로, 하와이가
날짜변경선 건너편에 있기에 한국 및 일본 시각으로는
12월 8일이다.
[2]
시게미쓰 마모루 대사가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한 날.
일본 제국의 공식적 종전 선언은 1945년 8월 15일의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이다.
[3]
영국은 여기 적혀있는 인도 제국, 캐나다 자치령, 호주 자치령, 뉴질랜드 자치령 외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지의 식민지에서 상당한 군대를 끌고 왔다.
[4]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본에 협력했으나, 이후 일본의 잔혹한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영국에 협력하여 일본을 몰아낸다. 당시 일본이 필요 이상으로 잔혹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웅산 열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이 활약했으며, 이 독립군 소속 인물들은 현대
미얀마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5]
볼드체는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이다.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A]
영연방 왕국의 총독
[12]
중일전선 제외
[13]
한반도와
대만과 같이 일본 제국에서 독립한 경우도 있으나,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반도와 같이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경우도 있다.
[14]
영상 초입부의 노래는
일본 제국 해군 군가
바다에 가면, 영상 마지막의 노래는
일본 제국 해군 군가
군함행진곡(일본)이다.
[15]
출처 : John Ellis, World War II: A Statistical Survey (New York: Facts on File, 1993), 277-80,
링크
[16]
호위 항공모함 포함이다. 그러나 호위항모를 제외해도 정규 항공모함은 에식스급 항공모함 20척이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일본군은
여객선으로 건조 중이던 선박을
항모로 개조한 것도 있다. 저 두 선박은 애초에 항공모함으로 개조할 것을 전제로 건조되었다.
[17]
처음 보유하고 있었던 9척은 제외한 수치이다.
[18]
이 수치에는
진주만 공습 때 파괴되었다가 수리해 복귀시킨 전함들은 제외되어 있다.
[19]
호위항모가 5번 나오는데 4대라고 적혔다.
[20]
사실 저 숫자도
독일군을 얕본
미군 수뇌부에 의해 퍼싱의 본격 양산이 늦어져서 그런 거다.
[21]
팔렘방 방공전에는
대한민국 공군 건군의 주역 중 한 명인
김정렬이 일본군 소속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2]
정작 우스운 것은 그렇게 송근유를 악착같이 만들고도 별로 사용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송근유의 품질 자체가 워낙 나쁘기도 했지만, 일본이 사용할 기계에 들어가는 석유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일본 영토 전체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송근유로 뽑아가도 양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23]
강원도
영월군
[24]
그래서 그 지원이 끊어진 초반에는 전차, 전투기 등도 의외로 그렇게까지 밀리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25]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
[26]
카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실화를 밝히면서, "타 군의 실패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너무 서둘러 한다."며
헤르만 괴링을 비판했다.
[27]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하였다.
[28]
미국은
일본에
석유 수출 규제를 먹이면서, 규제를 푸는 조건으로 "
중국 및
만주 철수"를 내걸었다. 이는
헐 노트에도 나와 있다.
[29]
군부 내각들도 미국의 협박 한 방에 중국일대에서 철수하면 당연히 유족은 물론 일본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니 승리 가능성이 없는 도박이니 논외였으나 전쟁이라면 승리할 가능성이 적지만 대박만 터진다면 모든게 잘 돌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는 도박이었으니 당연히 선택은 전쟁이었다.
[30]
미국과 전쟁도 미친짓이었지만, 첫번째 선택은 가히 당시 일본에게 있어선 자살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동안 일본 군부 및 내각의 발전 과정이 1. 타식민지를 점령 -> 2. 점령한 식민지의 자원 및 인구 흡수 -> 3. 그리하여 군부의 지지도 상승 -> 4. 다시 새로운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져왔다. 조선과 대만 그리고 만주와 중국 동남아까지 모두 패턴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미국의 말대로 중국과 만주에서 철수를 한다면 군부의 정당성과 업적이 모두 부정당할 수 있었으며, 최악의 경우 일본 본토내에서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즉 일본은 군국주의를 택한 시점부터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을정도로 막장 국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렇게 남은 선택지가 1. 미국과 협상해서 스스로 군국주의 행위를 부정하고 자멸할지 2. 미국과 전쟁을 해서 패배한 이후 자멸을 할지 로 나뉘게 된 것이다.
[31]
태국도 추축국에 가담한 근본적인 원인은
독재자
쁠랙 피분송크람의 의지이지만, 송크람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합국들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점령 등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32]
어느 정도냐면 이전까지 전쟁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던 야당 포지션 공화당 파벌 의원들조차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전쟁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는 사실상의 충성 맹세를 했을 정도였다.
[33]
일본은 당시
석유와
고무 등 천연자원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34]
1941년 11월 5일 자
일본 황실 회의록에서도 "휴전하면서 전쟁 이전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석유 수출을 보장받을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는 부분이 있다.
[35]
미군 전함 전력을 일정기간 동안 공백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배들 대부분도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36]
이후
엔터프라이즈가 대활약을 하면서 태평양 전쟁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전설의 배가 된 화려한 이면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여러 격전을 거치며 손상을 입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수리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믿을 만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서 얼마 되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며, 그 정도로 1943년까지는 미군도 고군분투를 거듭한 전역이다.
[37]
산호해해전에서 침몰한 렉싱턴 포함이다.
[38]
물론 성능 차이는 꽤 났다.
[39]
미드웨이에서 침몰한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
[40]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은 호넷, 엔터프라이즈 -
[41]
1주일에 1척씩 진수했다고 하여 '무슨 배 1척 만드는데 1주일이 걸렸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주문 수량이 워낙 많아서 거의 동시에 건조되기 시작한 것이 1주일에 1척씩 진수되었다 보는 것이 옳다.
리버티선의 경우도 용골을 올리고 블록들을 조립하는데 4일이 걸린 것이지, 블록들의 생산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당연히 1주일 내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 말이다.
[42]
일본군 파일럿이 역량이 워낙 되었기 때문에 제로센이 주도권을 가져온 것도 있다. 일단 카탈로그 상으로는 제로센은 일본 군부의 독촉과 압박으로 조종사의 탈출 및 생존 등 안전을 경시한채 장갑을 얇게 해 스피드와 선회력은 와일드캣을 압도했으나 그 외의 화력/내구성/안전 등등은 와일드캣에게 카탈로그 스펙을 따지면 떨어졌고 미군 파일럿도 타치 위브의 협동 전술로 이길수 있었다.
[43]
물론 당시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냐면, 사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당시 요새화된 하와이를 점령하기에
일본 해군의 보급선 유지능력도 안 되었고,
일본 육군의 상륙능력 역시 모자랐다. 그렇기에 애초에 하와이 침공을 주장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과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주장은 황실에서도 묵살당하였고, 그럴 만한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하와이의 요새화 수준과 방어력은 그야말로 개사기적인 수준으로, 만약
미사일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2010년의
미 해군도 48시간 내의 점령을 장담 못한다.
[44]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이 고전했다는 말은 어폐가 조금 있다. 사령관 이하 전
일본군이 전원 옥쇄를 결단했던 만큼 생각보다 훨씬 큰 피해가 나기는 했지만, 전투 자체는 전투 계획에 맞게 착실하게 일정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방탄복의 부재와 후송 능력의 한계로 '사상자'가 일본과 비슷했던 것이지, 실제로 전사한 인원수는 전원이 전사한 일본보다는 미국이 훨씬 덜 발생했다. 대부분의 전투가 보병전으로 전개되던 태평양전쟁 전투의 특성상 전원 자결을 결단, 조직적인 저항을 한 것치고는 미군에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를 안겨줬다 뿐이지, 전투의 계획을 틀어지게 할 정도로 일본군이 미군을 고전시켰다고 하긴 어려웠다. 미국의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미군은 여기를 3일이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가 한달이나 끌린 것과, 속된말로 그냥 내다버리다시피하는 일본군의 인명경시와는 달리
타라와 전투에서 3,7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사령관이 청문회까지 소환될 정도로 비싼 미국인 장병을 무려 7,000명이나 잃어 장사를 치른 인명손실 때문이다.
[45]
육군의 경우
미국,
영국,
소련 같은 연합군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다면
중국 본토의 절반을 실질적으로 점령했을 것이고, 해군 역시 실질적인 전투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영국보다 높은, 미국 다음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46]
일본군은 개전 초부터
나치 독일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상당히 폭력적이고 잔인한 군대였다. 애시당초 나치와 마찬가지로
우생학을 맹목적으로 믿던 인간들이라 다른 민족은
노예로서 지배하거나 절멸시켜야 할 동물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었다.
[47]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 대우를 해준 덕분.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드물다. (단 해당 수치는 포로 수용소에서 수감된 포로 기준이므로 이것이 서방 연합군 포로가 독일군의 전쟁 범죄로 부터 완전히 예외였음을 뜻하지 않는다. 독일군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가짜 항복과 포로 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악명높은
말메디 학살과
그래뉴 학살,
르 파라디 학살, 발하우젠 학살 등 포로가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에 현장에서 즉결 처형된 사례는 상당수 존재한다. 흔하지는 않았으나 수용소에서도 소규모 단위로 포로가 뚜렷한 이유 없이 처형된 사례도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된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1% 미만으로 극히 낮았으나 수용소로 보내지기 이전에 현장에서 처형된 독일군 포로의 수는 연합군 포로 수용소 사망률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다.
[48]
대부분의 피해는
미군과 싸우다 발생한 것. 민간인 사망, 실종자는 46만여 명 정도.
[49]
민간인 사망자 2000만 명 이상이 나온 절멸전쟁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0]
여담으로 임진왜란이 패전국인 일본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익을 얻은 전쟁인 반면, 태평양 전쟁은 패전국인 일본이 해당 전쟁으로 민주화 외에는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한 케이스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 일본이 이익을 얻은 전쟁은 일본이 직접 참전하지도 않았던 후술할 6.25 전쟁이다.
[51]
70%까지 잡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러시아측 학자들도 대부분 57% 이하로 본다. 70%까지 잡는 경우는 "포로로 잡혔던 사람 중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수가 포함되어서 나온 수치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소련군이 독일에 항복한 포로들을 포로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해서, 자국 범죄자나 형벌부대 처분 대상자보다도 더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 물론 그것을 감안해도
일본보다 높은 수치인 건 맞다.
[52]
독일군도 전쟁 동안 일본군과 매우 유사한 시스템의 위안소를 운영했으며 점령지의 여성들을 납치 또는 취업 사기로 강제 동원하여 성노예로 학대하였다. 피해 여성 대부분은 소련 등의 동유럽 국가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나치 독일이 비교적 인종적으로 우위로 여긴 지역 출신 여성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해당 위안소를 이용하는 독일군 장병들에게 성병 키트와 설문지가 보급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할 정도로 명명백백하게 체계적으로 벌여진 짓이라는 점에서 일본군의 위안부와 매우 비슷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독일군의 위안소 피해 여성 대부분은 전후에 침묵을 택했다는 점이다.
[53]
참고로 이건 독일 측 보고서에서 나온 수치인데, 이런 범죄 행위를 가해자가 고의로 부풀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도 저 정도가 벌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범죄로 인식을 했다면 말이지만.
[54]
참고로
8.15 광복 직후
조선에서는 미일전쟁(米日戰爭)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
[55]
쓰지 않을 것이지만 딱히 파고들 생각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56]
1960년대생 등 그보다 한참 아래 세대에 속한 이들 중에서도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아는 사람들은 적지 않은데, 이는 바로 이전 부모 세대가
일제강점기를 걲어 이들을 통해 전해 들었거나 1971년 노벨문화사에서 《종군기자실록 대동아전쟁비사》라는 일본 책 시리즈를 번역하여 발매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6년에도 '대동아전쟁'이란 용어가 간간이 쓰였다는 말도 있다.
# 물론 '소위 대동아전쟁' 식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57]
널리 인식되진 못하고 있지만 태평양은 Pacific Ocean 의 태평(太平)한 바다라는 뜻의 훈차로 역설을 느낄 순 있다.
[58]
순수
일본인 약 7천만과 나머지
조선인, 대만인, 만주인, 류큐인까지 다 합친 수치다. 웃긴 건 식민지인들은 같은 일본인 취급도 안해주고 온갖 차별과 약탈을 일삼았으면서 필요할 때만 일본인으로 끼워버려서 같이 죽자고 호소하는 꼴이라는 거다.
[59]
물론 전쟁에서 정신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병사가 전쟁 중에 멘붕을 일으키고 주저앉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수행에 도움이 되는 부분일 뿐이다.
중일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기술력과 전투력이 적들보다 우월했고, 덕분에 정신력만 다듬어도 신속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는 기술력과 전투력 전반이
미군에 비해 후달렸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60]
도쿄 대공습,
필리핀 탈환전,
펠렐리우 전투,
과달카날 전투,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오지마 전투,
레이테 만 해전,
대만 항공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임팔 작전,
구레 군항 공습 등을 참조.
[61]
실제로도 이 사람은 미국 유학파이기에 미국의 모든 것들에 대해 전문가일 수밖에 없었다.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도 주미일본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일했던 적이 있어 비슷한 예측을 한 적 있다.
[62]
이런 몽상가 마저도 정상인 스러운 말을 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63]
참고로 유언이다.
[64]
아주 사실이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도조 히데키 내각의 압력 때문에 덴노가 전쟁을 승인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65]
정작 일본의 문헌화된 역사는 3,000년은커녕 2,000년도 안 된다. 게다가 일본이 2,000년간 전쟁에서 뚜렷한 패배를 겪지 않은 까닭은 전쟁을 잘 안 해서다. 일본 본국의 정부가 한반도나 중국에 쳐들어갈 수준으로 공고해진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자마자 쳐들어왔었고, 목적이었던
명나라 침략도 조선 점령도 다 실패했다. 즉, 패배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을 잘 안 했다는데, 저것도 사실 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율령국 체제이던 시절에는 각 율령국들이 서로 잘만 싸워댔다. 현재의
자위대
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육해군 대립의 원인 역시 근원을 따져서 올라가면 이거다.
[66]
전쟁의 승패는
사상자 수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을 이뤘는지 못 이뤘는지에 따라 갈린다. 일본 본토를 외국 군대가 처음 점령한 것은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이 처음이다.
[67]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68]
이 때 홀시 제독 휘하의 항공모함 중 하나가 후에 '1척의 배가 역사를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
USS 엔터프라이즈다.
[69]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사실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48년까지 내다본 듯하다.
[70]
5상륙군단장, 태평양함대해병단장(FMFPAC)을 역임한 현대 상륙작전의 아버지.
사이판 전투에서 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소장을 보직해임한 소위 Smith vs Smith 사건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