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解 體 新 書일본 에도시대에 편찬된 번역 의학서. 내용은 한문훈독체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서양의 책을 완역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 책의 발간으로 인해 일본에선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배우는 ' 난학(蘭学)'의 효시가 되었으며,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웬만한 의학 용어들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2. 배경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네덜란드만은 유일하게 일본과 교류할 수 있었다.
데지마에 온 네덜란드인은 대부분
기독교 전파보단 상업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는 안심할 수 있었고, 이들은 서양을 이해하는 통로로서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마침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교호 개혁의 일환으로 외국 서적 수입의 기준을 완화해 네덜란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3. 번역
(사진 - 해체신서 번역의 총 책임자였던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스기타 겐파쿠는 원래 한의사였다. 그러나 1754년에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1]가 일본 최초로 관허를 받고 사형수를 해부해 서양 의학서적의 정확성을 검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의학계로 퍼져나갔고, 그는 기존의 오장육부설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겐파쿠는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 등이 쇼균에게 연례인사 겸 찾아갔을 때, 그들이 묵는 숙소인 나가사키야(長崎屋)를 찾아갔다. 이 일로 겐파쿠는 서양 의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사진 - 타펠 아나토미아)
1771년 3월에 스기타 겐파쿠는 나카가와 준안(中川 淳庵)을 통해 '타펠 아나토미아[2]'라는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책은 독일 의사 요한 아담스 쿨무스(Johann Adam Kulmus)의 '해부도표(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물건이었는데, 겐파쿠는 이 신기한 책에 굉장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와 그의 동료였던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과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는 사형수의 해부광경을 보면서 그 책의 정확도가 엄청나게 높다는 걸 보고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땐 외국어 사전이라는 물건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겐파쿠 일행 중에 네덜란드어를 알고 있던 사람은 마에노 료타쿠인데 그것도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들은 4년을 열심히 노력한 끝에 '해체신서'를 간행하였다. 그림은 오다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가 그렸는데, 그는 일본 최초로 서양회화 기법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겐파쿠는 향후 문제의 소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카츠라가와 호산(桂川甫三)이라는 지인을 통해 막부에게 헌상했다.
해체신서는 출판되자마자 난의(蘭醫)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한방의들의 비난을 받았다. 겐파쿠는 해체신서 출판을 옹호하기 위해 '광의지언(狂醫之言)'이라는 문답집도 냈다.[3]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엔 없던 새로운 말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신경, 연골, 동맥같은 말들이 그러하다. 이는 일본을 통해 다른 한자문화권 나라들로 전해졌고 한국 또한 이를 차용하여 사용중이다.
원본은 니혼대학 의학부에, 초판은 큐슈대학 의학 도서관, 나카 쓰시 오에 의가 사료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도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4. 외부 링크
[1]
대표 저서로는 蔵志(장지)가 있다. 일본 최초의 해부서로 알려져 있다.
[2]
네덜란드어 명칭은 Ontleedkundige Tafelen, 라틴어 명칭은 Tabulae Anatomicae이다. 말하자면 타펠 아나토미아는 네덜란드어와 라틴어가 합쳐진 괴상한 조합어이다.
[3]
기존의 오장육부설을 신봉하던 한방의들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예로 난학자인 키타시마 쇼(北山彰)는 조선통신사가 오자 인체해부학에 대한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통신사를 수행했던 조선의 의관(醫官:한의사) 남두민은 "그대나라 학자들은 기이한 논설을 즐겨 말하는 구나. 인체를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가르지 않고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미혹되지 마시오." 라고 답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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