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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복원론

대한민국 왕정복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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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제국 제정복고 주장의 역사3. 평가4. 쟁점
4.1. 역사적 쟁점4.2. 법적 쟁점4.3. 사회적 쟁점
5. 관련 사건
5.1. 황세손 이구 사망5.2. 이해원 옹립 사건
6. 부정적 견해
6.1. 황실 복원의 정당성 결여6.2. 황실 복원의 현실적 어려움6.3. 실권이 없는 입헌 군주를 굳이 새로 세워야 할 이유6.4. 구 조선·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정서적 반감6.5. 황족의 모범 사례 결여 문제6.6. 황족의 정통성 결여 문제6.7. 황실 개인에게 황족으로서의 삶 강요6.8. 구 황손 스스로가 황실 복원을 지지하지 않는 문제6.9. 황실에 대한 표현·언론 자유의 저하 우려6.10. 국민의 역사인식 재고와 황실 복원 문제6.11. 복원과 유지에 드는 경제적 비용6.12. 복원 이후의 입헌군주제 지속 가능성
7. 낙관적 견해와 반론
7.1. '국민 통합의 상징'화
7.1.1. 반론
7.2. '전통문화 복원의 상징'화
7.2.1. 반론
7.3. 군주를 이용한 외교 전략 수립
7.3.1. 반론
7.4. 유사 시 국가의 공백을 대비한다는 주장
7.4.1. 반론
8. 기타 주장
8.1. 구 황실 재산 복구8.2. 새로운 왕조를 선정
9. 대체 방안10. 결론11. 북한의 입장12. 외국의 사례13. 황실복원 혹은 황실이 등장하는 창작물14. 관련 문서1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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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은 구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하여 현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군주정으로 바꾸자는 일련의 주장이다.

다만 실현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먼저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지 100여 년이 넘어갔고 이미 민주주의 체제가 잘 자리잡아서 사람들이 황실 없는 분위기에 더 익숙하다는 점, 그리고 황실을 복원한다 쳐도 누가 대를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점, 휴전선 북쪽의 김씨왕조 때문에 세습직이나 상징적 계급을 원치 않는 점[1][2], 2020년대 들어 태국 왕가 영국 왕가의 비도덕적 행위가 세계적 이슈가 되며 군주 자체의 인식이 나빠진 것도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을 복원하려 해도 이미 공화정 체제로 잘 굴러가고 있는 마당에 복원할 명분이 없다.[3]

특히 정치권에선 농담으로조차 나온 적이 없다.[4]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를 천명하는 헌법 제1조 제1항의 규정은 임시헌장 이래 단 한 번도, 심지어 군사정권 시절에조차 수정된 전례가 없으므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든 군주정 이야기를 꺼내면 그 자체로 큰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비록 오늘날 구 황실 후손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전통문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드물게 재야사학계나 민족주의 논단에서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기는 하지만, 이는 이상과 향수를 넘어 정치적으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무력을 동원하여 황실을 복고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형사적으로는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행정적으로는 위헌정당해산제도 등을 통해 처벌될 것이다.

설령 절차상 문제가 없는 개헌이라고 할지라도, 헌법 제1조를 헌법개정의 한계조항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기 때문에, 권한쟁의심판, 탄핵심판, 국민투표무효소송 등의 구제수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국민 저항권이 인정 된다고 보기도 한다.[5] 이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논란인지를 알 수 있는 간접적인 예로, 참여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의 경우 이구의 장례식 당시 궁궐이자 문화재인 창덕궁 낙선재를 빈소로 쓰도록 허용하였다가 "민주공화정 국가에서 국가 문화재를 개인 장례식을 위해 빌려주는 시대착오적 행정을 했다."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6]

황실복원론이 진지한 선에서 정치 화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론조사는 리얼미터의 2006년, 2010년 조사가 전부이다. 드라마 궁의 방영으로 입헌군주제에 대한 환상이 강했던 2006년에는 찬성 54.4%에 반대 30.5%, # 2010년에는 찬성 41%에 반대 23%였다고 한다. #

황실복원론이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을뿐더러 그 논의된 적 없는 가설조차 이 문서만 봐도 조선말기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7] 부정여론이 높으며, 그나마 유의미한 주장도 사실상 전제군주정을 복고하자는 의견이 아니라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이기는 하지만, 이조차 위헌 문제나 국민 정서상 현실성은 없다고 판단된다. 특히 이 이론 자체와 영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아 "전제군주 복원"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8]

2. 대한제국 제정복고 주장의 역사

경술국치 직후에는 제정복고를 앞세운 복벽주의자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양반가, 유림을 중심으로 보수 이념을 갖고 있었던 명문가나 일제강점기 자체가 정치적 정당성이 없다고 본 일부 지식인 계층에서는 독립운동 참가 이유로 황실 유지를 되살려야 한다는 복벽론을 내세운 사람이 많았다.

1910년대까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독립운동 단체들도 제법 활동했으며, 고종황제 의친왕 같은 황실 인사들을 해외(중국 상해)로 망명시켜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1919년 황실 인사들 중에선 그나마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고종이 사망한 뒤,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의친왕 망명 시도와 의친왕과 이회영의 도움을 받은 고종의 망명시도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복벽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사실상 일소되고 만다.[9][10] 이후론 독립운동 단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공화정 계열로 대동단결했다. 복벽파 최대의 단체인 대동단이나 대한의군부도 각각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공화주의의 대동으로 내부에서 복벽파가 일소되었다.

대표적 근왕파인 유림은 이미 고종황제 치세 중반기에 개화파에 밀려 중앙정계에서 어떤 정책을 추진할 만한 권력이 없었다. 게다가 간재 전우 같이 아주 보수적인 인물은 일본이나 '머리 깎은 자'[11]들이나 똑같은 놈들로 보아서 교류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유림 계열은 김창숙을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종 사후 순종은 권신 김홍륙의 커피 독살 시도사건으로 바보가 되었단 소문도 사실여부와 별개로 많이 퍼져있었던 데다가 재위기간도 짧았고, 너무 유약한 이미지라서 구심점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그런 순종도 오래 지나지 않아 1926년 사망해 1920년대의 분위기 변화에 한 몫을 보탰다.

대한제국은 일단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일본 제국은 명목상 황실 간 병합으로 이뤄진 일제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황실을 상당히 우대했다. 이왕 문서로. 따라서 일제강점기 내내 구 황실은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큰 돈과 재물을 받고 부족하지 않게 살았고, 의친왕을 제외하면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도우려는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독립운동에 있어서 왕정복고나 복벽주의는 명분으로써 자리가 아주 낮아졌다.

결국 한국의 왕당파들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라졌다. 그나마 해방 이후까지만 해도 왕조에 익숙하여 근왕의식이 남아 있던 노인들은 " 영친왕 전하를 그 일본인 여자와 이혼시키고 참한 조선 각시를 하나 들이면, 다시 조선 왕조를 여는 것도 괜찮을 텐데"라고 했다지만, 그런 노인들이 조직적인 왕당파를 구성한 것도 아닐 뿐더러 그저 넋두리에 가까운 구시대의 소리에 불과했다.

민중 차원에선 의친왕의 인기가 높았다는 이유로 군주정을 선호하는 감정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민중과는 달리 지식인 계층에서 복벽주의자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술국치 후 일본 왕가에 편입된 조선 왕가가 일본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 걸 넘어 오히려 그걸 좋아하기까지 했던 점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에 비판적이었던 진보 지식인은 물론이고, 충절을 강조하는 유교 가치관이 선명한 보수 지식인에게도 결코 좋게 보일 수 없는 행보였다. 전통적 지식인이자 근왕파여야 할 유림인 조긍섭 등 조차도 고종 황제가 사망했을 때 '일본 이태왕이 된 배신자'라고 조롱했다. 유림조차도 이 모양이었는데, 개화파 지식인들은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쨌거나 해방 직후가 한반도에 다시 왕정이 들어설 수 있는 그나마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갓 독립한 한국을 이끌어 갈 지식인 계층 중에 왕정 지지파는 없었으며, 미군정도 조선 황실을 독립 조선의 지배자로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12] 게다가 한국 역사 상 최초로 국민투표를 통해 집권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대한제국 황가에 대하여 혐오감을 보였다.[13] 대한제국이 망한 후 이승만은 "나라가 망한 건 슬픈데 , 양반, 상투 없어진 것은 속이 다 시원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였고 김일성도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던 독립운동시기 "이씨 왕조를 내가 때려부수지 못해 원통하다"고 했을 만큼 향후 남북한 양쪽의 집권 세력 및 엘리트층에서 황실을 저렇게 나쁘게 봤으니 독립 직후 한반도에서 황실복원은 의논조차 되지 못한 게 당연지사.

여하튼 이승만은 구 황족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국내의 순정효황후, 의친왕을 비롯한 황족들을 홀대하여 조선인민군 손에 죽을 뻔하게 만들었으며, 영친왕을 비롯한 구 황족들의 귀국이나 국적 회복조차 일절 허락해주지 않았다. 김일성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정치체제를 꾸릴 때 이씨 조선에 관련한 모든 것은 이유불문 청산해야 할 찌꺼기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반도 전체가 황실에 적대적인 마당이니, 구 황족은 황실 복원은커녕 한반도에 돌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박정희 정권 시기였던 1960년대에 와서는 구 황족들의 귀국을 허락하는 등 약간 유화적으로 돌아섰지만,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 하에서 구 황족들이 감히 입장을 어필하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황손 이석( 의친왕의 10남)을 중심으로 이런 모임이 있었으나, 당시에 전주 이씨 내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어그로를 끈다고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운동은 전혀 영향력이 없었다.

이전까지 우리황실사랑회[14]와 황실문화재단[15] 등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긴 했어도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인지도는 거의 미미했으나, 2006~2007년에 들어 온라인 상에서 황실복원에 찬성하는 카페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다만 이 경우도 황실에 관한 드라마 궁(드라마)의 인기에 힙입어 활동했을 뿐이지 정치 쪽에서 영향력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미미했다. 나중에 황실에 관한 부정적인 면모가 인터넷상에 확산되면서 황실복원론도 식었다.

황실문화재단을 세운 이석은 아직도 자기들끼리 '황실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석이 2018년에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앤드루 리'라는 사람을 '황세손'으로 지명하여 책봉식까지 했다고 한다. 기사 이 앤드루 리라는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퍼듀대를 자퇴하고 VPN 서비스 회사를 차린 사업가이며, 최근 138억 원에 달하는 저택을 매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 해당 인물이 실제로 황실 가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앤드루 리의 인적이 대강 소개되어 있으나, 모두가 전문 인용이라 확실하지 않다.

2020년에는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재재단의 궁중문화축전 유튜브에서 '살아있다! 대한민국에 황태자가? / 헬로우 황태자'라는 제목으로 영상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비판 여론에서는 "명목상 공화국인 나라에서 공공기관이 ' 황태자'라는 명칭을 쓰는 것부터 문제"이며, "일개 자연인을 국가가 조명하는 것이 타당한가?"하는 지적이 이어졌다.

단, 영상에 등장하는 황사손 이원는 일제를 거부하고 임시정부로 탈출하려 했던 바로 그 의친왕의 후손[16]이며, 황실 복원 놀이를 하는 이석과는 다르게 공화국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한국의 전통 문화로서의 각종 제례 및 전통의식의 계승에만 관심이 있는 멀쩡한 시민이다. 즉, 한국문화재재단이 영상에 설레발 자막을 넣어 별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게 하는 등 너무 쓸데없는 논란을 일으킨 면이 있다.[17]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거나 마친가지지만 만일 황실복원이 되었을 때를 가정한다면 이석이 아닌, 이원이 계승권을 가져갈 확률이 훨씬 크다.

3. 평가

"만약 현대의 한국에도 왕실이 존재한다면? 한국이 입헌군주국이라면?"이라는 아이디어는, 만화 이나 더 킹 : 영원의 군주 같은 미디어 매체에서 대체역사물의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는 왕자, 공주에 관한 동화적인 판타지의 충족과 드라마적인 재미로서의 인기였을 뿐, 현실에서 실행하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선 말기에 대한 이미지도 안 좋은 것은 물론이요, 태국 왕가 일본 황실같이 특정 가문이 혈통만으로 국민 세금을 써가면서 우대받는 체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미개하다고 까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태국에서 왕가 사람을 만날 땐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야만 한다 라는 규칙이나 일본에서 황실 사람을 만날 땐 황족보다 머리를 높여서는 안된다라는 규칙이 있다는 걸 듣게 되면 왕가에 대한 낭만이 들기는커녕 "뭐 그런 미개한 풍습이 다 있냐"고 비판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일단 민주주의 체제와 국민 모두가 평등하다는 선진적인 의식이 널리 퍼진 지금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인 주장이라는 점, 현대에 왕실과 왕가가 있어봤자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는 군주제로 굴러가는 것은 물론 그렇다고 실질적인 외교를 하는 것도 아니여서 그야말로 세금은 세금대로 들어가지만 효율성이 없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인 큰 이유이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대한제국 황실은 황족이라지만 현대 대한민국의 광복과 발전, 민주화에 있어서 손톱만큼도 공헌했거나 기여한 바가 없으며, 저항은커녕 일본에서 왕족 신분으로 대접받으며 살아왔던 주제에 지금 와서 일부 파벌들이 단지 혈통만을 근거로 대다수 국민들보다 높은 신분에 위치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뭘 잘했다고 이제 와서 주인 행세냐?"라며 주장 자체를 괘씸하게 여기는 사람이 매우 많다.

의친왕 등 소수의 왕족들은 친일파로 돌아서지 않고 독립운동을 도왔다곤 하나 이게 전부다. 절대 다수는 그냥 구황족 대접을 잘 받으면서 친일파로 전향해 일본 왕실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는 일제의 군에 복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황실 복권을 노리며 공작을 펼치려다가 조선왕조 극렬 혐오자였던 이승만의 반대와 추방령 때문에 일본에 계속 있었다. 이후 이승만이 혁명으로 실각하고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대한황실에 유화적이라서 박정희 정부때 겨우 남한으로 왔다. 그렇게 궁에서 거주하는 특권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때 탄압을 받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는커녕 도로 미국으로 빤스런하며 망명을 갔기 때문에 당연히 근현대사에서도 이들은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힘든 시절 다 가고 나라가 부강해지니,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겠다?"는 식으로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아예 국내에 못 들어오게 했으니 기여할 수 없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하다 못해 민주화 운동과 같은 근현대사에 중요한 사건들에서라도 일반 국민으로서 참여해 무언가 업적을 이룩했다거나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라도 국민들의 구심점이 되어주거나 외교적으로 민주화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면 왕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입국금지를 당했던 것도 1950년대의 이승만 정부 시절까지였으니,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1960~80년대엔 마음만 먹으면 행동할 수도 있었다.[18][19]

하다못해 조선왕조를 그렇게나 혐오했던 이승만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조선왕조를 혐오했던 김일성도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무력투쟁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했다. 둘 다 나중에 절대권력 독재자가 되긴 했지만, 적어도 조선백성을 이끌만한 명분 자체는 이씨 왕족에 비하면 훨씬 많았다. 실제로 1945년 광복 후 잡지 《선구》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을 이끌어 갈 적임자로 이승만(21%, 2위), 김일성(9%, 5위)로 꼽은 사람은 있지만 조선 왕가 관련 인물을 고른 여론은 거의 없었다. #[20]

그런데 산업화 시절에 급속히 세를 불린 대기업, 중견기업 회장들 중에서 황실 출신은 없었으며 아니면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때 주도하던 사람, 하다 못해 이에 참여하던 사람들 중에서 황실 일원의 이름은 없었다.[21] 대림산업 일가가 인성군파이긴 하다만 철종을 끝으로 남계 후손이 끊어진 효종계이든, 고종과 그 자손 등 최후의 왕가를 배출한 인평대군계이든 모두 인조의 자손인데, 인성군파는 조선 후기 왕통을 석권한 인조계와는 선조대에서부터 갈라져서 황실 일원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멀다.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같이 조선 국초에 진작 갈라진 쪽보다는 훨씬 가깝지만.

조상이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 참가한 공헌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홀대 받으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인식이 있어 대다수 국민들이 동정하고 대우 받길 원하는 독립유공자 참전용사의 후손들도, 이들에게 왕족과 같은 특별한 세습 지위를 보상으로 주자 하면 논란이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정치인, 기업인, 학자, 연예인, 운동선수 그 외 다수 큰 지지를 받고 귀감이 될만하다고 평가받는 유명인들 모두 마찬가지다. 세습 지위는커녕 당사자에게 주어지는 병역특례조차도 크게 호불호가 갈리는 마당이다. 이들은 그나마 업적이라도 있어서 이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이룬 것도 없고, 오히려 1인당 GDP가 35년간 반토막이 날 정도로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던 일본 제국에게 붙어 앞잡이를 하던 후손들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가장 빈곤했을 당시 과거 조선 왕실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지위에 선다고 했을 때 지지층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이승만을 비롯한 대다수는 반대하여 사장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에 가까운 부국이 된 시점에서 재벌들의 가족 경영과 기업 세습에 관해서도 금수저 혹은 상속관련 세금 문제로 구설수가 많은 사회가 되었는데, 조선 황실이 "아예 혈통만으로 이 나라의 황제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순간 전국민적인 분노가 쏟아지고 심하면 돌팔매를 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다.

현재 대다수 한국인들은 현재의 고종 직계 전주 이씨 황실을 세종대왕 같은 존경 받을 만한 성군의 후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대다수는 이들을 암군 고종과 그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왕실 인사들의 자손으로 인식할 뿐이다. 애당초 세종 같은 자랑스러운 조상을 가진 전주 이씨 사람들은 고종 직계 대한제국 황가 외에도 널리고 널렸다.[22]

다시 말해서 조선 왕가 최고의 전성기이던 태종 - 세종 - 문종 - 성종 시절의 후손은 지금 황실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 중에는 없으며 오히려 '경술국치 후에도 딱히 저항도 없이,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에서 아사자가 동네마다 수백 씩 나올 정도로 수탈당하는 와중에 지들만 일본 왕가 뒤에 숨어서 호의호식한 집단의 후손'이 지들 잘난 줄 안다는 인식에 한 몫 한다는 것.[23]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게 전주 이씨이며 1~3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가 태종 이방원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이런 방계 중의 방계 수준임에도 자기의 왕실 가문 혈통을 이용해서 ' 프린스'로 자기 PR하고 다녔다고 한다.

결국 현대 입헌군주제에서는 왕이 있기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기 보다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왕이 존치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즉 존재 자체가 민족의 통합과 본인의 명예를 보장해주는 게 아니다. 따라서 말기 조선왕조에 대한 반감이 해소되거나 왕실이 민주화ㆍ독립에 크게 기여한 공로 등이 새롭게 발견되어야 그나마 "복원론"이 나올 가능성이라도 생기게 될지도.[24]

4. 쟁점

4.1. 역사적 쟁점

대한제국 1910년에 망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다. 갓난아기 시절이나마 한반도의 군주정을 경험한 사람은 2020년 기준으로 최소한 110살은 넘어야 한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한국인은 2023년 시점에서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식민지인의 신분이긴 했어도 일본 황실을 군주로 칭하던 일제강점기를 겪은 노인을 기준으로 잡는다 해도 최소 75살이 넘어야 한다. 물론, 일제강점기는 대한민국의 지배 주체로서 법적 정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의미도 없는 추산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한반도 최후의 군주인 조선 왕조는 교과서를 포함한 책이나 인터넷, 드라마, 영화, 만화 등 대중매체와 역사적 사료, 그 시대의 유물 문화재 등지에서나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과거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에 익숙하며, 특정 가문이 절대 다수의 군중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명분을 찾아내기 어렵다.

하술하듯 관습적 군주로 간주하고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비주권군주제라는 예외도 있으나, 이는 왕정이 보유한 권한을 빼앗기고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통해 껍데기만 남겨둔 형태이다. 이미 왕정이 완벽하게 사라진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껍데기를 새로 만들어 세워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

4.2. 법적 쟁점

대한민국 헌법 제4호(1960.6.15.)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제7조의2
*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 국민투표에 부하여 민의원의원선거권자 3분지 2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 3분지 2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 전항의 국민투표의 발의는 국회의 가결이 있은 후 1개월 이내에 민의원의원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
*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지 못한 때에는 제1항의 국회의 가결사항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한다.
국민투표의 절차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써 정한다.
* 제98조제6항 ⑥제1조, 제2조와 제7조의 2의 규정은 개폐[25]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조의 경우 2공화국 헌법 당시에는 명시적으로 헌법 개정 불가능 규정이었고, 현재도 학설상 헌법 개정의 한계의 대표적인 규정으로 꼽히고 있다. 즉, 헌법 개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쿠데타라도 일어나서 국가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민주공화국을 명시한 1조가 바뀔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26]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민주공화국을 제외한 그 어떤 체제도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아 놓았으며, 제11조 2항에서는 '사회적 특수계급 창설의 금지'를 규정해 놓았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도 개헌안 가결 후 국민투표를 거쳐서 헌법을 전반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다만 정말로 모든 개헌절차를 거쳐 개헌한다면 사실상 막을 방법은 없다. 특히 헌법개정에 있어 국민투표를 거치도록 되어 있으므로, 주권적 의사의 개입을 통하여 헌법개정이 확정되면 이를 무효로 선언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 결의만으로 헌법 개정이 가능한 일부 나라들의 경우라면, 의회가 위임받은 권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국체의 정의 등 핵심요소에 대한 개정 불가능 규정이 큰 의미를 가지겠지만, 일단 의회에서 명확한 다수에 의해 결의된 후 다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한국의 경우 현실적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국민투표'보다 더 강력한 정당성을 가진 주권적 의사의 표현 및 행사 방법을 찾기는 어려우므로 이를 뒤집을만한 정당성을 찾는 것 역시 어렵다는 것. 물론, 그래서 소위 황실 복원론이 주권을 가진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다만 그래도 개정 불가능 규정이 있었던 이유는, 한국은 워낙 근현대사가 투표 조작질 쿠데타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에, 국민투표가 부정했거나, 비리가 있었다면 그러한 오염된 국민투표로 개정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목적으로 있던 것이긴 하다. 그 외에도 모종의 사유[27]투표율이 지나치게 저조할 경우 그를 통한 날치기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정말 완전무결한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단 국민투표를 진행한 다음, 공무원을 대거 동원해서라도 법적으로 의사표현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만 14살 이상의 모든 미투표 국민들에게 1:1로 찾아가서 기권의사 확인서라도 받는 정도는 되어야 잡음 없이 완벽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행 법률상으로는 소위 '황제 자리'를 복원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어떤 특권도 줄 수 없으며 단지 ' 황제'라는 칭호(호칭)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무형문화재: 대한제국 황실 / 기능보유자: 황제" 같은 식으로 등록해두는 유명무실한 수단밖에 없다. 즉,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부활한 황실의 구성원들은 헌법상으로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며,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수 없다.

만약 '구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과 구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서 복원한다고 하더라도, 헌법소원만 걸리면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과 구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져 법률이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걸 고치려면 구 황실의 후손들이 그럴 힘이 있어도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로 인해 불가능할 지경인데, 황실 후손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 없는 존재로 전락했고, 경제적 특권 역시 해방 이후 국가가 모두 회수했다. 지금 와서 황실의 후손이란 건, 그냥 '조상이 왕이었던 사람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점을 인식했는지, 황사손 이원은 조선 왕조의 유산을 제대로 알리고 청소년들에게 문화 교육도 시키는 '대한황실문화원'이란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 #

4.3. 사회적 쟁점

대한민국은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음을 표방하고 있지만,[28]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역사를 계승했으므로 대한민국은 민족의 역사로서 이들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유지를 잇는 것과 그 정체(政體)를 부활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황실 복원에 대한 명분이나 정당성은 사회적으로 전혀 합의된 바가 없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도 황실복원을 시대착오적이라는 쓴소리를 하며, 황실 복원보다 황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둘째 언니인 이해원 옹주 옹립에 대해 불편한 기색[29]을 보였으며, 매우 부정적인 입장으로 나타내며 비판하였다.

참고로 본문에 적혀 있듯, 이해경이 황실 역사와 문화 복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적극 지지한다. 하지만 한국 황실 관련 무형문화재 행사의 연장선이다. 당연히 공화제 국가들도 자국의 과거 왕실 문화는 지키려고 하고 있고, 이에 대해선 어떤 국민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삼권은 물론 사람 목숨까지 호령 한 번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암묵적인 '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북한에서마저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는 왕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군주정이라는 단어에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인식이 있다는 것은 세계적인 시선이며, 아직도 왕가가 존재하는 유럽 몇몇 나라는 왕실이 나서서 대의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전통적인 권위를 자제하려고 한다. 애초에 황실 복원은 딱히 득 될 것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 외에도 바티칸처럼 사실상 대한민국에 100% 종속되고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이 없는 반쪽짜리 허수아비 국가를 대한민국 영토 안에 하나 세워서, 명목상으로만 분리독립시키는 방법도 있겠다. 예를 들면 경복궁 경내만 딱 잘라서 대한제국으로 분리독립시켜서 사실상 대한민국만 인정하는 페이퍼 네이션[30]으로 만든다든지.

이것도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민국의 영토범위를 규정한 헌법조항에 걸리기는 하는데, 영토야 뭐 20세기 후반, 아니 21세기 현재에도 국제적으로 봤을 때 국가간에 통치권[31]을 할양하고 매각하는 전례가 있으니, 이를 근거로 개정불가규정이 아니라고 볼 실마리가 있으니 그나마 고치기는 쉽다.

물론 그게 국회 표결을 뚫고 국민투표까지 뚫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중화민국이 세워진 이후의 청나라 황실이 청나라 소조정이라는 형태로 살아남긴 했지만 꼴랑 12년만에 없어졌다. 그마저도 당시 중화민국이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라서 그랬다.

황궁 생활 모습, 종묘제례까지 묶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허수아비 나라를 만든다면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지만, 혹시 그것이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황족들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것 때문에라도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32]

허수아비 나라를 세우는 게 아니라 민간 재단에 맡겨 관광/교육/문화 유산 자원 목적의 형식적인 나라 흉내를 내게 한다고 해도, 정부 소유인 궁궐과 종묘라는 나라의 문화유산을 이용해 얻은 수익을 온전히 민간 재단이 관리하게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5. 관련 사건

5.1. 황세손 이구 사망

2005년 마지막 황실의 적장자라고 할 수 있는 황세손 이구가 사망했다. 이구에겐 자식이 없었기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의친왕의 손자 이원을 양자로 지명해 이구의 뒤를 잇도록 했다.

한국 황실의 제사라고 할 수 있는 종묘제례를 봉행하려면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후계자가 필요한데, 영친왕의 아들 이구에게 후사가 없으니 후계자를 이을 양자가 필요했다. 그 후로 이원은 '황실의 적통을 이은 자손'이란 뜻의 황사손(皇嗣孫)으로서 종묘제례 같은 행사에서 제주(祭主)가 되어 매년 봉행한다.

이 사건 자체는 대한제국 구 황실복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이원은 이 사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한민국 민법상 사후 입양은 무효다.[33] 다만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일종의 종교행사 겸 문화행사인 종묘제례를 봉행하기 위한 자격 취득의 목적일 뿐, 이구의 양자로서 어떤 법률적인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34]

5.2. 이해원 옹립 사건

2006년 9월 29일에 일부 대한제국의 황실 후손들이 모여 만든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단체에서 십자가가 새겨진 의자를 빌려와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선언했다. 뉴스기사 당시 안티 기독교 성향 네티즌들은 기독교계에서 내란죄가 성립될 수 있는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사실 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선교청은 이강무가 독자적으로 세운 종교 교단이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기성 기독교 종파와는 전혀 다른 비주류 종파다. 선교청은 동양에 새로운 교황청인 선교청을 세우자는 종교 운동인데, 당연히 천주교는 물론, 정교회 개신교와도 결이 다르다.[35]

애초에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종교는 유교 성리학이었고 기독교는 오히려 조선 말기 서학 시절부터 조선 왕실에게 박해받았다.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조선 왕실이 외세에 의존하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때는 종파 단위로 폐합과 분할이 일상화될 정도로 특히 심한 핍박과 박해에 시달렸는데 당시 이왕가 사람들은 그런 악독한 일본 뒤에 숨어서 자기 배나 불렸으니 여론이 좋을 리가 없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안창호, 함석헌 같은 기독교 신자인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공화파였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기독교계에서는 전반적으로 황실 복원 운동을 싫어할지언정 동조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기독교 세력 역시 공화국 위주로 생각한다.

이런 역사로 인해 선교청은 기성 기독교 종파를 벽돌교회라고 부정하면서 과격한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는데, 교리가 심하게 다른데다가 종교를 통해서 조선 황실을 복원하려는 의도가 다분해서 기성 기독교 종파들은 선교청을 이단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이해원 옹립 사건으로 자신들이 욕을 먹자 선교청에게 더욱 악감정을 가졌다고도 한다.

특히 선교청이 개신교의 용어, 전례 방식을 많이 빌려가서 엉뚱하게 개신교가 가장 욕을 많이 먹었기에 다른 기성 종파보다 더욱 적대적이다. 비록 일부 황실 후손들이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모두 황실복원론에 회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황실복원론에 호의적인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선교청에게는 매우 적대적이다.[36]

이들은 힐튼 호텔에서 대관식을 갖고, 이해원을 황위에 옹립하였다. 이유인 즉슨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2005년 일본에서 의문사로 타계한 이후 그 혈통이 끊어졌기에, 의친왕의 차녀인 이해원을 추대한 것. 이 대관식에서 황족회는 총리 대신으로 선교청대학교(당시 성민대학교) 총장 이강무( 효령대군 후손), 비서실장에 이성주( 남연군 후손)를 추대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인정이나 지원은 커녕 제재조차 받지 못하고 끝난 그야말로 흑역사이다. 정부의 반응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내란죄로도 규정하지 않은 무시 그 자체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헛짓거리였다. 정부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헌법에 반하는 이 일을 인정한다는 건 모순으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만이 아니라 황실과 관련된 다른 민간 단체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단체의 일원 중 일부는 이원이 이구의 양자가 된 것은 현행법으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의친왕의 자녀들 중 최연장자인 이해원이 이구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37]

다만 이해원은 여성이기에 유교를 중시한 조선의 문화를 생각해봤을 때 정통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38]. 또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황실수장 역시 이원이다.

그리고 총리대신에 추대된 이강무의 경우 자신이 세운 선교청대학교가 2010~11년에 2년 연속으로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는 등 온갖 비리 혐의가 드러나, 결국 학교는 폐교되고 자신은 2013년 1월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에 불구속 기소되어 "대학 하나도 제대로 운영 못하는 인물이 무슨 한국 황실 총리대신인가"하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단체에서 여황제로 옹립된 이해원은 이후 2020년 2월에 자택 인근의 노인요양병원에서 사망했고, 후계자가 따로 추대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런 영향도 없이 끝나버린 해프닝이다.

6. 부정적 견해

6.1. 황실 복원의 정당성 결여

대한민국 자체가 민주공화국 체제의 국가로 탄생되었는데, 구태여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 왕조 후손이었던 이승만조차 대한제국 황실 복원은 거론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39] 본인도 조선 왕의 핏줄을 받았고, 마지막 과거시험에도 응시한 전력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승만은 구 왕족들을 증오해서 이들을 임기 내내 박대하며 귀국을 열심히 막았다. 행여나 여론이 왕정을 원하게 되면 공화제에 큰 위협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영친왕 이방자가 귀국하려 하자 불허했고, 오히려 이들의 일본 아카사카 저택을 "한국 재산이니 주일 대표부 공관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1950년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대한민국 국적 취득과 귀국을 논의했을 때도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같은 해 차남 이구가 미국 MIT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것도 거절했다. 결국 그는 일본 정부가 발행한 임시 여권으로 미국을 오갔다. 6.25 전쟁 부산으로 피난갔던 순정효황후 창덕궁 낙선재로 환궁하는 것도 불허해, 순정효황후는 1960년 4.19 혁명 전까지 서울 정릉의 인수재에서 지내야 했다.

애초에 역사적으로 전제군주정이 끊겼다가 민주공화정으로 새로 태어난 상황에서 입헌군주제로 다시 변화할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40] 민주공화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군주정으로의 회귀는 이것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6.2. 황실 복원의 현실적 어려움

폐지된 왕조나 군주제가 복원된 사례는 정말 드물다. 굳이 꼽자면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41]이 되었다가 크롬웰이 죽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잉글랜드, 1931년 왕정 폐지 이후 내전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우익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 1975년 프랑코 사망 후 왕정 복고[42]가 이루어진 스페인, 1970년 군부 쿠데타로 왕정 폐지 후 내전과 폴 포트의 독재 정치, 킬링필드 대학살, 베트남군 침공 등 온갖 국가 막장 테크들은 다 겪다 1993년 유엔이 사태에 개입하여 다시 왕국으로 되돌아 간 캄보디아 정도가 있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왕정 폐지 후 들어선 공화정의 기반 약화나 왕정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의 상실로 나라가 내부분열, 독재, 내전, 학살 등으로 나라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 그 대안으로서 왕정으로 돌아간 사례고,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뒤에도 공화정이 별 문제 없이 멀쩡하게 돌아가는 국가가 왕정복고를 한 사례는 그냥 전무하다. 왕가 복원이 현실 문제 해결과 관련 없다는 점도 한 몫 한다. 황실이 복원된다고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민소득이 오르는 것도 아니며 국방력이 강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국제적인 위상이 오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황실 품위 유지비, 경호비용 등 황실 운영비와 같은 내부 문제가 더 생길 뿐이다.

이런 '현실적 문제'는 나름 몇백년 넘게 왕조가 이어진다는 정통성이라도 있는 나라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례는 대표적으로 태국 왕실 일본 황실인데 왕가 관련 인물의 자질 논란이 불거질 무렵 경기불황까지 덮치자 왕가 유지에 대한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왕실을 만든다고 선언하는 것도 당연히 불법인데다 국가보안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내란음모죄로 체포될 걱정이나 해야 될 것이다.

나름대로 경제호황기였다는 라마 9세 시절이나 헤이세이 천황 시절엔 이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왕족의 존재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던게 태국과 일본이었다. 물론 이런 인식 형성에는 경제적 원인보단 라마 9세나 헤이세이 천황이나 현대 입헌군주국 국왕으로서 모범사례라고 불릴 정도로 구설수가 없고 청렴했던 게 더 크긴 했다.[43]

하나 문제가 다소 있는 인물인 라마 10세와 본인은 문제가 없지만 황태제인 후미히토 일가가 문제를 일으키는 레이와 천황 재위가 시작되고 나서 왕실 관련 인물이 사건사고를 자주 벌이고 경기불황이 심해짐에 따라 왕실 유지에 드는 현실적 비용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지핀건 태국은 태국 왕비가 독일에서 호화 파티를 했다는 것이 밝혀진 사건과 일본 황실에서는 마코 공주 결혼 소동 사건이었다. 21세기 최악의 불황기라 불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와중에 혈통빨로 우대받는 사람이 저렇게 쓸데없는 일에 혈세를 쓴다고 하니 당연히 반발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44]

이 사건을 기점으로 태국과 일본에서는 왕실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공공연히 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두 나라 모두 국민성이 매우 보수적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나 놀라운 일이다. 라마 9세 시절이나 헤이세이 시절에는 설령 군주제에 불만이 있더라도 애써 모른 척 하거나 아예 천황 관련 언급을 안 하고 말았지, 이를 공개적으로 밝힌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한국도 국민성이 보수적인 걸로 유명하지만 한국은 군주가 없어야 한다는 입장에 정치적 정당성이 있으며 당연히 국왕이 없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뜩이나 이런 마당에 황실을 복원시킨다면, 황실의 권위와 생활을 누리려면 그 자금은 전부국민 세금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그것까지 눈감아줬다고 해도 21세기 한국의 국민들에겐 실질적으로 득 되는 건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선 그들이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고 올바른 국민이란 어떤 것인지 선도해야 하는 입장이여야 한다. 하지만 후술되어 있듯 현실에선 어떠한지 이미 자명된 사실이다.

제정이 폐지된 이후 군사 쿠데타, 독재, 부정부패, 경제 위기등의 혼란을 겪은 브라질에서도 1990년대 초 제정 복고 운동이 있었으나 극소수의 주장으로 그친 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참고로 브라질의 마지막 군주였던 페드루 2세는 노예해방에서부터 전쟁 승리까지 여러 업적이 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폐위당하게 된 계기인 공화 쿠데타도 말이 좋아 '공화' 쿠데타지 군주가 직접 주도한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기득권층이 주도한 거라 민중에겐 인기가 하나도 없었고, 페드루 2세 본인이 그 시점에서 권력욕을 잃고 힘빠진 노쇠한 노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력 사수욕이 있었다면 쉽게 막았을 거라 평가받는 사건인데도 그렇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 쿠데타, 공산화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뀐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동유럽 발칸반도 나라들[45] 역시 쫓겨났던 전 국왕이나 몇몇 왕족들, 왕정 시기 모국에 대한 향수에 빠진 몇몇 왕정 복고 지지파들이 군주제 복위를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이들 나라들의 국민 여론 역시 한국에서 조선 왕조 복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못지않게 대단히 부정적이다.[46]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슬람 신정주의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뀐 이란도, 혁명으로 쫓겨난 팔라비 2세 전 국왕의 장남 레자 팔레비 전 왕세자 등 현재 미국과 캐나다 등 서방 해외에 망명 중인 팔라비 왕조 인사들이 "이란 현 정권을 몰아내고 다시 옛날 팔라비 왕조 체제로 되돌아가자"고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지만, 호응은커녕 비난만 받고 있다.[47]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과 동맹관계였던 미국 등 서방 주요 강대국들은 물론 국제사회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지지는커녕 무시당하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서야 2022년 이란 시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커졌다.[48]

비교적 최근인 2008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정치체제가 바뀌었던 남아시아의 국가인 네팔에서도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으로 폐위되었던 갸넨드라 전 국왕과 일부 자국내 근왕파 세력들이 왕정복고와 갸넨드라의 복위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갸넨드라 전 왕이 재위기간에 저지른 폭정과 정치탄압,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만행들이 엄청나다보니 네팔 국내에서도 논란과 비판이 만만치 않으며, 특히 갸넨드라 전 국왕이 통치하던 2000년대 당시 네팔공산당 반정부군과 왕실 휘하 정부군 간 내전에서 부모나 친지가 당시 갸넨드라의 왕실 정부군 군대에게 살해당하거나 고문을 당해 장애인이 된 피해자의 유가족과 왕정을 축출하고 집권한 네팔 정부내 고위층들은 갸넨드라 전 왕이 자행한 여러 범죄행위들을 제기하며 반대하고 있다.

또한 왕정 폐지 이후 내부 분열과 쿠데타 등 정변, 독재, 전쟁, 내전, 학살, 알 카에다, IS 등 외국 테러조직들의 소굴들로 전락하는 등 나라 꼴 자체가 말이 아닐 정도로 심각하거나 어려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리비아[49], 세르비아,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들도, 폐지된 군주제 복원이 논의만 되고 실현되지 못한 예가 있다.

6.3. 실권이 없는 입헌 군주를 굳이 새로 세워야 할 이유

백 번 양보해서 한국에 군주제를 복원한다 치더라도, 이미 공화제와 민주주의체제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마당에 전제군주제를 하고 대한제국의 헌법처럼 "황제는 무한한 권력을 갖는다"와 같은 체제를 만들자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중매체의 일이기는 하지만 현대 한국에 조선왕실이 보존되어 있다는 설정의 작품의 경우에도, 전제군주제인 경우는 없으며 대부분 입헌군주제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50]

따라서 군주제가 복원될 경우 한국의 군주제 또한 입헌군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이나 일본의 입헌군주제와 같이,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제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미 공화정이 익숙해진 한국에서 대체 '통치하지 않는' 군주를 굳이 세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반발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적인 입헌군주국에 왕들이 있는 이유는, 본래 왕정이던 나라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종의 타협으로, 왕가는 기존의 왕위를 유지하지만 실권을 갖지 않고, 국가를 움직이는 통치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에 넘기는 것이 된 것이다.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이제부터 국민이 뽑은 사람이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헌군주국에서는 국왕이 명목상으로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사하지 않고, 갖고 있는 권한들도 극히 미약하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일본 천황인데 현대의 천황은 일본국 헌법상 특수 신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일본 헌법에는 천황의 존재가 명시는 되어 있으나, 천황이 '일본의 군주'라거나, 혹은 '국가원수'라는 명시적 선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이 입헌군주제를 복원시킨다는 것은, 왕 없이 50년 이상 잘 굴러온 나라에서 일부러 일을 하지 않는 왕실을 만들고 거기에 국비를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꼭 왕실이라서가 아니라, 수행할 직무가 없는 기관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황실 복원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현대 한국에 왕실이 남아있는 내용의 창작물에서도 '공화제 대한민국이 왕실을 다시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독립을 유지한 경우' 또는 '1945년 광복 후 국체를 다시 군주제로 선정한 경우'[51]이다. 이런 창작물의 저자들도 공화국 대한민국이 갑자기 왕을 세우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52]

또한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경우 이에 맞춰 의원내각제 개헌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의원내각제는 여러 국가에서 채택해 나라를 무리없이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개헌 여론조사를 하면 의원내각제 방식도 비중도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왕실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내각제로 개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이나 국민도 입헌군주제 얘기는 당연히 꺼내지 않는다. 애초에 이들 조차도 한국이 내각제 공화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각종 시위, 반정부운동들은 그 이념과 내용을 막론하고 공화주의가 기본이었다. 군부독재 시기 반독재투쟁 또한 '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을 원했고, 2016년 촛불 집회 또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상화'가 주된 내용이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에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은 무엇을 지향하던 간에 공화국을 지향하며 왕실을 복원하자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가 공화국을 위한 정부였고, 북한 정권보다 우위에 있는 요소나 남북통일의 중요한 근거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인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국가공인 연예인 정도의 수준으로 4.1문단에 있는 무형문화재 황제 등록을 실현시기키거나 하는 방법이 그나마 타협안이다.

그나마 영국, 스페인 유럽 왕이나 태국 국왕은 개인 재산이라도 많아서 이를 이용한 사업으로 대부분의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일본 천황은 개인 재산이 국가 수반치고 많은 편이 아니고 궁내청의 연금을 받아서 산다. 물론 이것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합의해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박탈감을 느끼고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이가 있기는 하나, 오랫동안 이어진 국가 상징을 없애는 데 드는 막연한 거부감에 기반한 보수 여론 때문에 실현하지 않을 뿐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보장되는 입헌군주국들에서도 군주국의 공화주의 운동으로 왕정이 불필요하므로 없애고 공화국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당수 나오고 있는 판인데, 공화국인 나라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왕실을 굳이 만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댓가로 나랏돈을 쓰자고 하는 것은 극히 시대착오적인 주장일 뿐이다.[53] 실제로 바베이도스는 2021년 11월 영연방에서 아예 탈출해 공화정을 수립했고 다른 영연방 국가들도 꾸준히 공화제 전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찰스 3세 즉위 후 더 활발하다.

6.4. 구 조선·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정서적 반감

조선/평가에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듯 일반 국민들의 옛 조선 내지는 대한제국 왕실에 대한 이미지는 21세기인 현재는 매우 나쁘다. 옛 조선 왕실 인물들 가운데 임진왜란 시기의 선조와 병자호란 시기의 인조의 추태,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쇄국, 그리고 고종의 실책[54] 같은 걸로 인한 부정적 평가가 크다. 세종, 성종, 정조 등 좋은 평가를 받는 조선 왕도 있지만 적어도 왕정복고를 논하는 데 있어서 정통성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옛날 사람이다.

현재 남아있는 군주국의 왕실들은 국가를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루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혁을 하며 선정을 펼치거나, 혼란스러운 주변 지역 정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교를 잘 했거나,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게 국권을 수호하거나, 혹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식민지배에서 독립시킨 공로가 있다.

예를 들면 캄보디아의 시아누크의 경우 썩 좋은 군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치세에는 심각하게 탈이 난 일은 없었고 왕정폐지 이후에 벌어지는 론놀의 독재와 부정부패, 크메르 루주 킬링필드에 비하면 이 사람의 치세는 양반이긴 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독립을 받아낸 인물이다. 덤으로 이 사람이 쫓겨나자 나라가 개판이 되었으니 왕실 복원 얘기가 나오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었고 결국 탈냉전 이후에 진짜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반면 대한제국 황실은 갖은 실정을 점철해가다가 광무개혁으로 어떻게든 발버둥쳤지만 너무 늦은 개혁 개방으로 인해 결국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몰락해버린데다, 심지어 나라 멸망 이후 구황족 가문이라는 일제의 관작과 재물을 받고 국가의 권리와 재산을 팔아버리며 호의호식한 매국노들이 수두룩하다. 고종은 그래도 을사늑약 이후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망명도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그 후손들은 너무도 쉽게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가 그들을 길들이기 위해 퍼준 재물과 관작에 안주해버리고 말았다.

구한말 대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고종과 민비도 암군 그 자체였다. 나라의 장기적인 자립과 역량 강화에는 관심 없고 당장의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55] 고종 시절의 조선왕조실록 기록들을 찾아보면 백성들만 당시 흉년 때문에 굶어죽거나 홍수 피해를 입고 겨울에는 얼어 죽은 것도 모자라 국가 기관이었던 사역원의 관원들까지 굶어죽고 얼어죽었으며[56] 시체가 널리고[57] 호환(재해) 때문에 10가구 중 9가구가 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도 모자라[58] 도적들까지 날뛰어 백성들이 눈먼 칼날에 맞아죽거나 집과 땅을 잃은 채 유랑민이 되고[59]그나마 살아남은 백성들도 굶주려서 비쩍 마른 것도 모자라 얼굴에는 부황이 떠 있고[60]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인조릉 솔숲까지 들어와서 거기 있던 소나무의 껍질을 다 벗겨먹고 그 옆에는 쭈그리고 앉아 죽은 시체들이 줄을 서 있던 나머지 군대도 이들을 막지 못할 정도였는데도[61] 관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금만 거둬들이며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을 처벌하기는 커녕 외국은 수도가 2개나 있는데 조선은 왜 하나만 있냐며 풍경궁을 짓는 데 나랏돈을 쏟아붓고 있었다.[62] 그리고 고종이 광무제가 되었을 때도 구덩이 안에 굶어 죽고 얼어죽은 시체가 널릴 정도로 답이 없는 나라 경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63] 이는 굶어죽는 사람이 마을 단위에서 나올 만큼 내부 경제를 망쳐놓은 북한 정권과 비교해봐도 도무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준이고 결국 고종과 민비의 무능함 때문에 경술국치를 맞았으며 나중에는 북한 정권의 탄생과 한반도의 분단까지 영향을 끼쳤으니 도저히 좋게 봐 줄 수가 없다.

치적이라는 광무개혁만 해도 고종이 보수적으로 접근하다보니 한계성이 명백했다. 그나마 고종은 을사조약 등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이 확정된 뒤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지만 과오를 씻는 데는 결국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실패하고 말았다.

진정 자신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고종에게 있었다면,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자신의 백성이 무참히 도륙되도록 하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어쩔 수 없었다면 몰라도 이게 일어났을 때 고종의 반응은 매우 가관이었는데, 신하들이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고종은 청군을 부르자고 해서 신하들마저 "아니, 청군을 부르자니요. 그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톈진 조약으로 인해 일본군도 상륙합니다."라고 했을 정도. 즉, 처음부터 고종은 자국의 군대가 아닌 외국 군대를 통해 자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

더불어 고종의 죽음은 한국독립운동의 대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3.1 운동의 계기[64]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 집단에서 황족의 영향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장 3.1 운동 직후 설립된 수많은 임시정부 단체들의 정치 체제에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는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65]

이는 3.1 운동 이전의 복벽주의의 한계도 이유가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고종 외의 다른 황족에게는 고종만한 입지도, 존경받을 이유와 업적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순종황제 그 밑의 황족들은 의친왕을 제외하곤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고, 상당수는 일제의 이왕가로서 순응하거나, 독립심은 있어도 일본에게 활동을 강하게 통제받았던 현실적인 입장상 포기한 상황이었다.

왕조 체제에서 왕실보다 더 혜택본 것이 없는 인물들도 왕실보다 더 오래 일제와 맞섰음에도 종국에 체념 혹은 변절의 길을 걸었다면 결국 민족반역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66] 하물며 나라에서 가장 귀한 가문으로서 특혜를 누리던 황실이 자신들에게서 나라를 빼앗은 적국한테서 왕공족이라는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한 마당에 이제와서 정통성이나 상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67][68]

그리고 고종을 재평가해봐야 황실 복원론에 소용이 없는 게, 고종의 재평가는 고종에게 한정되지 다른 황족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애초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흥친왕이나 영선군 흥선대원군과 함께 고종을 퇴위시키고 자기들이 왕위에 오르려다가 실패했던 전력이 있다.

황족 대부분이 매국노이자 동시에 고종의 배신자들이었다. 결국 대한제국 황실에서 고종이나 의친왕만큼이라도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인물들이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지금 주류세력은 그 쪽이 아니다. 오죽하면 복원 주장을 하면서 여자에다가 서열로 정통성이 떨어지는 옹주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울까?

우선 현재 나라가 혼란하여 사라진 왕조를 복고하는 정도의 체제 대격변을 꾀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한 세기도 더 전에 망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거쳐온 성장 과정에 아무런 공적이 없는 황실의 후손들에게 안정적으로 잘 자리잡은 공화제를 폐지하여 감투를 씌워줄 가치가 정녕 있을까?

앞서 기술한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는 잘해봐야 대통령 혹은 총리 후보로 밀어주는 게 고작일 것이다. 실제로 불가리아에서는 전 국왕인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기도 했으니 영 불가능할 일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그 인물은 여느 대통령처럼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정치인으로서 오르는 것이지, 황실 후손이라는 점 하나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닌데다가 종신 집권은 꿈에도 못 꾸니 그냥 황실 후손이기도 한 정치인이 대통령/총리가 되는 것이지 황실 복원의 ㅎ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6.5. 황족의 모범 사례 결여 문제

왕정국가의 경우 왕가가 솔선수범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그래야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 지켜진다. 왕가는 한 국가의 얼굴이고 전체적으로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국 왕실은 1965년에 영국에서 징병제가 폐지된 후에도 지금까지 자원해서 군복무[69]를 수행했으며, 이들 상당수가 업무 강도가 높은 군 부대로 간다.

남자들 뿐 아니라 전 국왕 엘리자베스 2세 공주 시절 비록 여성이 총을 드는 게 금기시된 당대 특성상 전장에 직접적인 참전은 못했지만 영국 공군 보급 중위 신분으로 손수 운전을 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군에 복무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영국 본토가 공습 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않고 궁을 지켰고, 부부가 함께 폭격받은 도심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국민들을 위문했다.

이후 찰스 3세 역시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해군 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었고 앤드루 왕자 해리 왕자 사생활과는 별개로 헬기 조종사가 되어[70] 포클랜드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해[71] 왕족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했다는 건 영국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은 거의 모든 남성이 군복무를 하는 징병제 국가라서 잘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지만 영국은 모병제 국가임에도 왕실 일원들은 모두가 군복무를 하는 게 기본이다. 영국 왕실은 영국인들에게는 결코 의무가 아닌 군복무를 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반면 조선왕조의 구성원들은 그러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왕족들은 여러가지 잘못을 저지르다가 급기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이 망한 이후 조선의 황실은 이왕가란 이름으로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일본 왕족과 맞먹는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

황실 재산인 내탕금도 그대로 인정받아서 일본 내의 다른 귀족들보다도 더 부유한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영친왕 이방자와 결혼했을 때, 이방자의 친정을 다른 방계 황족· 화족 가문들이 부러워했을까.[72] 국민들이 탄압 받을 때 이들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73]

또한 유럽을 비롯한 해외유람을 다니며 호의호식을 누렸다. 차라리 극심한 탄압을 당해서 빈곤에 찌들어 살고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면야 동정표라도 불러서 조금은 호의적인 감정이 생겼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놈이 그놈인 실정이니 도저히 답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광무제의 친형 이재면, 이준용, 황실 친족 이지용, 이재극, 이해승, 이해창 등을 비롯해 여흥 민씨 해평 윤씨 등의 세도가는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로부터 주는 귀족 작위를 받아가며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며 동정받는 덕혜옹주의 삶도 사실 매우 유복했다.

오늘날 현재에도, 황실 친족(이해승, 이재극 등), 척족 세도가문[74] 후손들은 선조들의 이런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들의 재산을 되찾겠다면서 소송을 거는 중이다.[75][76] #[77]

차라리 황족들이 일본 제국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척 유럽을 여행하면서 몰래 독립 운동 비슷한 것이라도 했으면 독립유공자 대우를 확실히 받아 왕정복고에도 꽤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힘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요청한 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78] 당시 이승만이 주석으로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된 방침도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자는 외교독립론이라 욕하기도 뭣하다.

1920년대라면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 때문에 일본의 입지가 워낙 높아져 있었고 반대로 조선은 독립하더라도 앞날이 캄캄한 상태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들 사이에선 평판이 더 올랐을 것이며, 게다가 사실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군주정은 무슨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정치 체제였던지라, 아무리 멸망한 식민지 왕족이라도 군주들에 대한 선망이나 존중은 어느 정도 남이있는 분위기였다.

당장 이승만이 자신을 '프린스 리'라고 칭하며 현지 엘리트와 교류했던 걸 생각하자. 그리고 김구, 김규식 역시 중국 장제스 등과 같이 협력한 것을 생각해봐도 이들에게는 외국에 독립운동의 목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인도제국 같은 식민정복 이전 독자적 정치적 전통이 깊었던 나라들의 망국 군주들은 직접적인 반란에 연루되지 않는한 의전상의 특권이나 명예는 식민 당국도 존중하는 편이었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전하고 쫓겨나온 망국의 군주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성토하며 한 연설은 당장의 실이득은 못봐도 세계 정가에서 큰 인상을 남기며 파시즘에 대한 중요한 경고가 되었다.[79]

하지만 조선 황족들은 대부분 그 간단한 특권과 연줄을 이용한 최소한의 독립 호소조차 하지 않고 일제에게 혹사당하는 조선 백성들을 외면한 채, 그저 일제가 자신들에게 제공해주는 온갖 특혜와 사치의 달콤함만을 즐기는데 열중했다.

단,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영친왕 이우는 일본의 정치적인 의도로 인해 볼모가 되어 억지로 끌려간 측면이 있고 일제의 강요로 한 행위를 넘어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는 않았으므로 매국노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왕족들은 일본의 회유책인 사치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 실권을 잡은 이승만이 옛 황실 일족을 아예 한국 땅에 발도 못 붙이게 입국을 금지시키고 황실 자체를 폐문시켜버린 것에 대해 당시 독립운동가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80][81]만 봐도, 당시 한국의 국민 및 독립운동가들에게 황족들은 전부 사라져주는 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황실 일족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면서 일본에 있던 일부 한국 황족들이 귀국할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에서 옛 황실 일가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등 구 황실에 대해 어느 정도 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우대를 중단하면서, 구 황실 일족들은 완전히 몰락하여 경제적 하층민으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두환은 예우만 중단한 것이 아니라 "구 황족이고 뭐고 왜 국가 문화재에 불법 거주하고 있냐?"며 그들을 전부 궁에서 퇴거시키는 식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허가로 귀국한 구 황족 인사들 중 일부는 이러한 탄압을 못 이겨 해외로 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드라마 궁의 경우도 황실 복원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황족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추대되었기에 가능한 일로 설정되어 있고 마이 프린세스에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스폰서를 하려다가 중간에 먹튀한 인간이 있었다는 설정으로 변호를 해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황실이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인데 그만큼 현 황실이 복원되려면 최소한 그정도의 공적은 있었어야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라는 게 일반 대중들이 보는 것인 만큼 그들의 정서에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항일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이던 보수 유림이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항일 투쟁을 포기해 나갔던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유교적 신분질서와 군신대의와 같은 유교적 명분으로 투쟁에 임했건만, 정작 유교적 가치의 핵심이자 명분으로 삼아야 할 황족들이 일본 왕공족에 흡수되어 잘먹고 잘살았으니까.

물론 예외도 있다. 의친왕 이강은 그래도 조국을 되찾겠다며 황족으로의 예우를 포기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려고 한 적이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만일 이 망명이 성공했다면 에서 그려진 모습이 현실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많은 황족들 중에 그나마 독립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한 사람이 의친왕 한 명 뿐인 것에서 당시 왕공족들이 얼마나 일제에 순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82]

그러나 망명 실패 이후 조선에 억류되어 공(公)의 지위와 친왕으로서의 특혜를 박탈당하고, 전보다 더 삼엄해진 감시를 받게 되자 독립운동 단체의 후원과 교류마저 막히면서 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황족의 삶을 누리는 걸 거부하거나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 저항 밖에 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동단의 도움을 받은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하자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서 임시정부는 이미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국무총장이 있는데 의친왕에게 줄 자리가 어디 있냐며, 황족이나 귀족이 오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특별대우는 절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고, 의친왕과 복벽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오는 것도 너희 조선 왕족과 복벽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미끼로 민심과 권력을 얻으러 임시 정부에 기어들어오려고 하는 더러운 속셈을 누가 모를 것 같았냐면서 가증스럽고 교활한 적이라고 깠다. # 의친왕이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편지에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는 말이 있으니 의친왕의 독립에 진심이었으며 권위 의식도 없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그 편지는 의친왕이 직접 쓴 게 아니라 대동단의 전협이 의친왕의 이름을 빌려서 대신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출처:대동단실기 148~149p, 신복룡, 도서출판 선인) 또한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여 일제를 아버지의 원수라고 생각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

만일 의친왕이 일제에게 잡히지 않고 대동단을 위시한 복벽주의자들과 임시 정부 망명에 성공했다면 임시정부 안의 공화주의 독립운동가들과 갈등하여 임시정부 안의 갈등을 키웠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는데[83] 만약 망명에 성공하고 임시 정부의 권력까지 잡고 그의 주도대로 한반도가 독립했다면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독립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던 의친왕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친일파거나 희생양이거나.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선 의친왕만 '별난 황족' 일뿐 나머지 황족들은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자들 뿐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족들을 신용할래야 신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의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의 경우 독립운동설은 근거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민족의식이 강했던 점+30대의 젊은 나이와 수려한 외모 등으로 황실복원 여론을 끌어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광복 직전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즉, 하다못해 의친왕이 억류된 상황에서 다른 황족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의지를 보였다면, 복벽주의 세력이 명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아무도 그 의지를 뒤따르지 않았다. 흥친왕, 영선군, 이건 등 다른 왕공족들은 일제가 준 지위에 안주하며 부귀를 누렸고, 볼모였던 영친왕은 망국에 한탄하며 무기력해 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은 시도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1919년에 벌어진 고종의 죽음, 3.1운동, 의친왕 망명이 실패하자, 구심점이 사라진 복벽주의 세력은 1920년대가 되면서 모두 몰락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84]

왕공족의 삶을 거부하기는커녕, 철저히 일제강점기에 순응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길을 선택한 시점에서 황실 복원의 이야기는 물 건너 간 것이다.

이런 대한제국 황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도 있는 사례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인데, 응우옌 왕조도 외세에게 굴복해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이 같지만, 조선은 아예 멸망하고 조선의 왕족은 왕공족이라는 지위로 변한 반면,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채 형식적으로는 남아 있었다.

당연히 응우옌 왕조의 황제도 남아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의 4대 황제인 사덕제 시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래 바오다이 황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겪었지만, 응우옌 왕조는 대한제국 황실과는 달리 프랑스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펼친 황제가 3명이나 나왔다. 이들의 사례를 보면 이렇다.
  • 첫번째는 출제 함의제로, 당시 실권자인 똔텃투옛의 보조를 받아 궁을 나가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 기간이 3년. 저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본인은 붙잡혀 프랑스령 알제리로 유배당했고 다시는 베트남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43년 사망했다.
  • 2번째는 폐제 성태제로, 겉으로는 프랑스의 지배에 순응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독립운동을 시도했다. 이쪽도 결국 실패하고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되었다.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끝난 후까지 살아 있었기에 이쪽은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54년 사망했다.
  • 3번째는 폐제 유신제[85] 프랑스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베트남 광복회와 함께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 아버지처럼 레위니옹으로 유배되었고[86] 유배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의 어떤 대우도 거절하고 라디오 수리, 법률학교에 등교해 외국어 공부, 신문사 창간 등의 일을 하다가 2차대전이 터지자 비시 프랑스의 레위니옹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자유 프랑스 군에서 싸웠다. 이쪽은 아버지와는 달리 끝은 안 좋아서 응우옌 왕조가 베트민에게 멸망한 후 프랑스의 드골과 응우옌 왕조의 부활을 논의하려고 떠났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87]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보호국이라고는 하나 한 나라의 국가원수였던 3명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88] 그리고 이 대가인지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에서 평가가 좋지 않음에도[89] 출제 함의제는 다른 응우옌 왕조의 후손들이 베트남 입국이 금지된 와중에도 독립운동의 공적을 평가받아 그의 후손들은 입국하여 프랑스와 싸워보기라도 했고, 3년 동안이나 저항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폐제 유신제의 경우에도 평이 높으며 베트남 각지에 그의 이름을[90] 딴 주이떤로가 있다. 또 그의 아들은 폐제 유신제 사후 미국에 묻혀있던 유해를 베트남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상을 보면 알겠지만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조선과는 달리, 명과 암이 공존하기는커녕 왕조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좋지 않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으로라도 대우받는 대한제국 황실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몇몇 이들을 빼면 구 왕실의 일원들은 베트남 입국도 불가능하다. 반면 저 왕조에서는 국가원수가 3명이나 나서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황실복원 주장은 어림도 없다.

황제 3명이 나서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응우옌 왕조도 현재 왕정복고는 말도 못 꺼내고 있는 실정인데, 대한제국 황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친왕을 제외하면 일제에 저항한 황족이 거의 전무하다.

의친왕 이외에는 황제 시절에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헤이그 특사사건을 벌이면서까지 어떻게든 일제에게 저항했으며, 황실 내탕금이 독립군에 지원하고 중국과 러시아로 여러차례 국외망명을 시도 했던 고종 정도이다.[91]

그나마도 앞의 두 사건은 상황이 막장인 건 맞지만 식민지까지는 아니라고 평가되던 시기의 일이다. 순종은 일본의 감시 아래 무기력했으며 그나마 다른 친일 왕족들과 달리 검소하게 살았고 그의 죽음이 이후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긴 했다. 이렇게 의친왕[92]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제에 굴복했고 백성들을 외면한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대한제국 황실이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더욱이 황족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황실이 보통 국민의 대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실 복원을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93]

일찍히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외친 말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바로 "코레아 후라!"였다. 안중근은 어떻게든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기 위해 발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조선 왕실은 일본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에게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라는 전보 #를 보내고 토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식에는 이토 대사가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북쪽에서 들려오자 하늘의 태양마저 빛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추모사를 보냈다. #[94] 그것도 모자라 이토 히로부미 대사님은 자신의 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하여 나갔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큰 계책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칭찬하면서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왕실의 행정을 멈추고 # 수도 한성에서는 사흘 동안 음악과 노래를 금지시키라고 명령하고 #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식을 여는 등 # 자세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이 비판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당시 대한제국은 거진 멸망한 상태로서 사법권조차 넘어간 허울뿐인 국가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국가체계는 사실상 허울뿐인 상태에서 대놓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으니 잘 되었다며 쾌재를 부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차라리 독립운동을 안했다고 욕하는 건 그렇다 쳐도 일본 눈치보면서 이토 히로부미 추모를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황실을 역적 취급할 이유는 없다.

6.6. 황족의 정통성 결여 문제

왕실이나 황실의 복원을 운운하려면 제1조건으로 바로 혈통적 또는 계통적 정통성을 갖춘 황위 계승자가 있어야 한다. 계승자가 있어야 복원이 가능하니까.

한데 현재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혈통적 정통성은커녕 계통적 정통성마저 결여되어 황실 복원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군주제 국가였다가 공화국 체제로 바뀐 다른 나라들 중 입헌군주제가 가능한 국가로 거론되는 나라들은 실제 재위했다가 폐위당했거나 황위 계승자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어 정통성을 획득한 후계자와 그 일가가 있고, 그 외에도 계승의 정통성을 가진 후손들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계통적 문제를 걸고 넘어간다면 문제는 대한제국 황실에는 정통성을 가졌다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고종 대로 올라가보면 고종 이형(高宗 李㷩)에게는 순종 이척(純宗 李坧),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이렇게 세 명의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95] )

이 중에 용상은 이척에게 넘어갔고, 이척은 후계자를 이은으로 삼았으니 이척과 이은의 후손이 적법한 후계자라 할 수 있다. 이척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척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겠지만 이척에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복동생'인 '이은'을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은의 후손'들이 바로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자인 셈이다.

이은의 아들 이구(李玖)가 있긴 했는데, 그에겐 아들이 없었다. 사후양자로 이원(李源)을 들이긴 했으나 현재 대한민국 법률상 사후양자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결국 이은의 대는 끊겼다. 즉, 계승순위에서 넘버 원, 투라 할 이척(순종)계, 이은(영친왕)계 모두 씨가 말랐다. 하다못해 여자 후손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척은 자녀가 아예 없고, 이은은 아들 둘만 있었다. 이은의 장남인 이진(李晋)은 요절했고 차남 이구도 이척처럼 자녀가 아예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이척과 이은의 이복형제인 이강의 후손들 뿐이고, 그의 후손들이 가장 적법한 후계자라 할 만하다. 이척과 이은의 대가 끊긴 것과는 달리 이강의 후손은 상당히 많다. 이구의 사후양자가 된 이원도 원래는 이강의 손자였다. 하지만 이강은 10명이 넘는 여성들로부터 21명(12남 9녀)에 달하는 자식을 낳았지만, 정작 정실에게서 본 적자는 없었다.

그나마 적자로 '인정받은' 아들이 이건(李鍵)과 이우(李鍝)인데, 이건은 1955년 일본으로 완전 귀화하여 아예 떨어져 나간 인물이라 논할 가치가 없다.[96]

이우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양자로 갔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인정받지 않을 수가 없고, 심지어 사후양자도 아니니 문제될 것도 없긴 하다. 이우의 문제는 그의 형 이건이 일제에 순응한 것과는 달리 일제에 비교적 협조적이지 않았던 반면, 양부 이준용이 친일파라는 것. 파양을 하려고 한다 쳐도 당사자인 이준용과 이우 모두 죽은 시점에서는 의미없는 이야기이다. 이우 슬하에 아들 이청(李淸)이 있긴 하나 그의 외증조할아버지인 박영효가 친일파이기 때문에 둘 다 정통성이 결여된다.[97] 심지어 이 두 사람만이 적자로 인정받은 것도 일제의 영향이다.

이렇게 보면 이강의 후손들은 결국 난립하는 형태라 누가 더 정통성이 높네 마네 할 처지가 못 된다. 궁여지책으로 "이강의 적장손()을 앉히면 되지 않냐?"[98]라고 하면 좋겠지만 이것도 힘들다. 할아버지 의친왕마저도 임금이 아니라 임금의 아들이었을 뿐이고, 증조부 고종은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너무 정통성이 떨어진다. 당장에 실제 좋은 사례가 있었으니 헌종 사후 왕이 된 사람은 철종이었다.
  • 철종은 무려 5대조까지 올라가야 임금인 조상이 나왔고, 그 때문에 철종은 정통성에서 많이 밀렸다. 5대손이나 4대손이나 어차피 그게 그거인데다, 철종 때와는 달리 왕이 죽고 바로 다음도 아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도 이미 100년이 넘은 마당이다. 누구를 데려놓든 결국 정통성 문제는 불거질 것이다. 어찌저찌 왕정복고를 결정한다 해도 누구를 보위에 앉히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여기서 한 가지 상기할 점이 있다면, 공화정에서는 내가 대통령을 못해먹어도 내 자녀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군주제에서는 내가 왕이 아니면 나의 자녀는 당연히 왕이 될 수 없다.
  • 하지만 왕조국가에서는 내가 왕이 되면 아들→손자→ 증손자 이런 식으로 대대손손 그 혈족이 왕이 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보면 승자는 천년 만년 군주가 되고, 패자는 그저 황실 일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정 옥좌에 앉고 싶다면 현 임금이 후손 없이 죽기를 바라야 한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왕족은 일정 대수 이상이 되면 왕위 계승권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 동명이인인 부장 무의공 이순신이다. 이 무의 이순신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천신만고 끝에 황실 복원을 국민들이 허락한다고 쳐도 그 다음은 일원들끼리 야합을 하건 암투를 벌이건 해서 승자를 정해야 하는데, 민주적으로 하기 위해서 선거를 하기엔 이들 황실 일원들은 존재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과연 제대로 평가받고 올랐을까?"라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황실 구성원들이 야합이나 암투를 벌인다면 국민들은 다시 황실 복원에 등을 돌릴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한국이 있기까지 피땀 흘려 기여한 인물이 있다면, 혈연적 정통성과 별개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정통성을 얻을 것이다. 당장에 엘리자베스 2세의 아들인 찰스 3세는 선왕의 장남인데도 국민들 지지도가 별로여서 왕위가 계승되기 전에 "공화국 하자", "저 사람은 왕에 앉히지 말자."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국민들의 지지는 혈연적 정통성의 부족함을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다. 문제는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인물이 없다는 것.

당장 입헌군주제를 택하겠느냐, 공화제를 유지하겠느냐 결정하려면 투표를 해야 하고, 투표를 하려면 후보자는 적어도 현 대통령이나 총리보다는 지지율이 높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적어도 임금을 칭하려거든 위기의 나라를 구하거나 사회 전반적인 문제들을 해결했거나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마저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런 지지를 받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의지도 있어야 한다.

문제는 황실 일원들은 정부고 군이고 이렇다 할 연줄이 없다. 즉, 당장 정부/국회/군에 가서 "나 황실 후손인 이 아무개인데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려고 하니 협조해주시오."하더라도, 절대다수는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어?"하고 무시할 것이다. 당장 황실이 복원되면 현 대통령부터 물러나야 하고, 국회의원들은 당 지도부라면 차기 대권이나 총리직을 노릴 텐데 다 무산되며,[99] 군 입장에서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할 일인데 도와줘봤자 5.18이나 재현될 것이다.[100]

말하자면, 대한제국 황실 후손은 남아 있으나 정통성 쪽에서는 단절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승만이 황실 계승과는 거리가 먼 쪽이지만 전주 이씨였던 만큼 황실의 일원이 대통령이 된 선례가 있는 이상, 그들도 정당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어야만 대한제국 황실 출신의 대한민국의 국가수반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6.7. 황실 개인에게 황족으로서의 삶 강요

조선시대가 아니라 21세기의 왕조, 그게 뭔 뜻인 줄 알아? 우린 그냥 마네킹이야![101]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 왕제(王弟) 이재하의 대사 중

드라마 속 이재하의 말마따나 정말로 황실이 복원되고 헌법도 개정되어 황족들의 특수신분을 어떻게든 인정하고, 그래서 황족들에게 경복궁 등을 돌려주고 입헌군주제로 간다고 가정할 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은 바로 마네킹 같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쇼윈도전시용 마네킹 같은 삶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발달한 서구보다는 일본의 경우와 비슷하게 지배자에게 모범이 될 것을 요구한다. 조선 왕들 중에 연산군 광해군을 제외하고 이러한 도덕성에서 누가 봐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굳이 도덕적인 문제를 언급하자면 인조를 들 수는 있겠다. 다만, 인조도 무능으로 인해 비판받지, 인간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행동은 장남 소현세자 일족을 몰살하려 든 것 정도밖에는 없다. 그나마 이것도 소현세자가 사망한 뒤 차남 봉림대군으로 후계자를 바꾼 상황에서 다음 왕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당장 주변 왕족과 신료들이 그렇게 죽이고 싶어했던 데다 수많은 반대파들의 인조 제거 시도에 수도 없이 연루되고 개중에 본인이 직접 개입한 정황도 나온 바 있는 광해군이 주변인들이 숱하게 희생당했을 때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인조가 연산군을 사실상 제거한 걸로 추정되는 중종과 달리 끝까지 주변의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왕과 세자가 아닌 왕족들의 난동을 일부 용납할 수밖에 없는 전제군주제 시절인 조선 시대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이라면? 황실을 복원하게 된다면 황제 가족은 물론, 그 주변 황족들 역시 철저하게 도덕적 규범에 칼같이 맞춰서 살아야 할 것이다.

과거라면 왕과 왕비, 좀 더해서 곧 왕이 될 세자와 세자빈이 처신만 잘하면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왕위계승권이 없어도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실의 도덕적 규점을 철저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생긴다.[102]

나는 임금의 막내아들이라서 계승 가능성이 없으니 국민들 세금으로 매달 생활비 받으며 궁궐에서 살면서 고급 외제차를 끌고 댕기며 친구들이랑 같이 최고급 식당에서 마음껏 포식하고 뒷골목 클럽에서 젊고 예쁜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와서 초호화 호텔에서 같이 술 마시고 담배 피고 마약 하면서 놀아제껴도 된다? 전제국가면 몰라도, 민주국가에서는 그런 것이 안 통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국민들은 왕족이 왕족답게 행동하는 걸 조건으로 왕실을 복원시켜 준 거고, 왕과 왕족들은 그런 국민들의 뜻에 따를 의무가 있다.

즉, 국민들이 황제와 황실의 일원으로 떠받들어주는 대가로 그에 걸맞은 의무를 준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 현재에도 유명 정치인 기업인들과 그 가족들의 범죄와 갑질 이슈가 많은 마당에, 국가수반인 황실 일원이 국민들에게 밉보여 건수라도 잡힌다면? 그날로 많은 국민들에게 하도 까여 걸어다니는 샌드백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범죄라도 저지르면 해외토픽감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 황실이 복원되더라도 대외적인 활동은 결국 국민들의 동의와 통제 하에서만 가능하고 지속적인 감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또한 품위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생활비도 국가에서 충당할 것이고 이 경우 엄격한 나라의 통제와 간섭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103]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 황실의 천황과 그 일가가 정부의 통제와 간섭 속에서 본인들 소유 재산은 단 한 푼도 없는 상태로 책 한 권 사는 것조차 궁내청의 승인을 받아가며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물론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품위유지를 위해 상류층의 삶이 보장될 테니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겠지만, 이러한 인생이 상식적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104]

연예인을 포함한 유명인들에게는 숙명인 언론의 사생활 침해와 파파라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어딘가에서 내 사진을 찍기 위해 잠복 중인 기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나의 행동이 다음날 인터넷에 쫙 퍼져 여러 커뮤니티 등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그야말로 국가 공인 연예인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신분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겪고 있는 정치인들&기업인들&연예인들&운동선수들 등은 본인이 선택한 '직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황족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갓난아기 때부터 전국민의 시선 속에 살아야 한다.

일본 황족들 중에 50~60대에 암 말기 혹은 기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지병으로 죽은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임신 소식이 매체를 통해 알려져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유명인으로 살아온지라 황족 지위를 포기하고 황실을 나간다 해도 전 황족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매스컴에서 주목하니, 정신력이 약하면 버텨내기가 힘들 노릇이다. 물론 극빈곤층 vs 황실 구성원이라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일 것이나 이건 또 너무 극단적이다.

단순한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운동선수에게도 상당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는 대한민국에서, 황족에게 요구할 도덕적 수준은 그 이상일 것이다.[105]

드라마 황후의 품격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바 있다. 결국 황실의 품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못한 황제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온갖 부정을 저지르던 황태후는 사형수 신세로 전락했으며, 황후 오써니 또한 자신의 지위보다 국민들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 그나마 황실 내에서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 공적이 인정됐을 뿐 "본인이 속한 황실이 큰 잘못을 한 책임은 같이 져야 한다"는 이유로 황족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아, 황실은 사라지게 되었다.

6.8. 구 황손 스스로가 황실 복원을 지지하지 않는 문제

애초에 당사자인 구 황족들이 스스로 황실 복원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석이나 이해원이 황실 복원을 주장한 적이 있긴 하지만, 서열상으로 정통성이 높은 인물들도 아니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을 비롯한 구 황실 종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행태라며 무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부친인 의친왕 이강부터 독립운동 시절 임시정부에 보낸 서한에 '황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한 평민으로 살겠다.'라고 밝힐 정도로 황실 복원에 부정적이었다.

광복 당시 가장 황통과 가까웠던 영친왕의 경우는 황실 복원은커녕, 이승만의 귀국 거부와 1947년 5월 3일 왕공족 지위 상실 이후 일치감치 '귀국과 한국 내 재산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이민해 자녀를 교육하고 싶으며, 자신의 이름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한국 정파에게 말려들지 않겠다.'라는 뜻을 미 극동 사령부에 밝힌 적이 있다. #

그 말대로 영친왕의 후계자인 이구는 미국으로 유학했고, 귀국이 허가된 이후에도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종묘제례 때를 제외하면 일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즉, 한국인보다는 한국계 미국인에 더 가깝다.

현재 황통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황사손 이원(의친왕의 9남 이갑의 장남이자, 이구의 명목상 양자)의 경우는, 원래 하고 있던 직업도 포기하고 반강제로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제사를 전담하게 된 인물이며, 황실 복원을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본인의 책임을 다한다."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이원의 생부 이갑은 자녀들에게 황손인 것을 미국 이민 직전까지 숨기고 살았을 정도로 황실 복원 자체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영친왕이 친일 황족이라 의친왕으로 황통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에 따르면, 의친왕의 사손 이준이 황실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역시 황실 복원을 주장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는 "대한제국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이 이어진다."라고 언급했다. 저 말 자체는 대한민국의 뿌리는 대한제국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담긴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를 인정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해방 이후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황실이 복원되었을 경우 황위 계승 서열 1위에 해당하는 황손들이 황실 복원을 반대하고 있다.

6.9. 황실에 대한 표현·언론 자유의 저하 우려

황족은 어떻게 간주하더라도 명백한 사회적 특수계급에 해당하고, 따라서 황실이 어떤 식으로든 공식화되고 특별 대우를 받게 되면,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인정됨에도 황실의 권위를 근거로 '불경함'을 주장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오게 될 것이며, 한국 역대 대통령, 총리들이나 대기업 총수들만 봐도 비판해야 할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거나 예의나 특별대우를 원하는 걸 생각하면 비록 실권이 없더라도 더 높은 명예를 지닌 특수계급의 경우 이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외국의 많은 나라에서 이미 사문화되거나 폐지된 모욕죄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형법전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조항으로 굉장히 활발한 기소 및 재판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사회적 특수계급에 대한 불경 문제가 얽힐 경우 이것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는 현저하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조선시대의 역사적 해석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계유정난을 다루면서 세조에 대해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다루면서 연산군[106]에 대해서 기묘사화를 다루면서 중종에 대해서, 을사사화를 다루면서 명종에 대해서, 임진왜란을 다루면서 선조에 대해서[107], 병자호란을 다루면서 인조에게, 임오화변을 다루면서 영조에게, 구한말을 다루면서 고종, 명성황후에게 부정적인 묘사를 한다면 불경한 짓으로 여겨져 비난받게 될 것이며, 조선 왕실에 대한 묘사나 해석, 재해석을 하기 어렵게 된다.[108][109]

고작해야 양반가만 하더라도 부정적인 묘사는 물론이고 사실을 묘사해도 조상의 명예에 흠집을 냈다며 문중에서 항의가 들어오는 판국이다. 일례로 영화 명량에서 배설 장군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후손들이 고소장을 제출한 적이 있다.[110]

이처럼 현대에도 과거 인물에 대해 허위사실을 적시할 경우 사자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소지는 있다. 법원의 유권해석은 역사적 인물의 경우 명예훼손의 기준을 아주 까다롭게 정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제 일본의 경우 사실상 메이지 덴노 이후의 천황들은 일본에서 거의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남아있다. 이전 시기의 천황들이야 그렇다 쳐도 쇼와 덴노는 비판할 게 상당히 많음[111]에도 불구하고 쇼와 덴노를 비판하는 주장은 외국에서나 볼 수 있지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다. 물론 천황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가 총리를 하는 등 그 때 기득권층들이 지금도 실권을 잡고 있는 일본의 현실상 천황 뒤에 숨어 책임소재를 회피하기 위해서지만.[112]

한 예로 1988년 나가사키의 시장 모토지마는 "외국의 여러 가지 책이나 일본의 역사책, 그리고 본인의 군 생활 경험을 통해서 보건데, 쇼와 덴노에게 2차 대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는데,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받았고, 1990년에는 암살범이 쏜 총탄에 맞아 총상을 입기까지 했다.

다만 일본과 한국은 이런 면에서 다를 확률이 높은데, 일본은 아직까지도 천황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없지 않고, 21세기 들어 극우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과거의 제국주의 시절과 그 상징이었던 천황에 대한 종교적 우상화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군주를 우상화하며 신성시한 일이 없었던 한국 같은 경우, 똑같이 황실이 있었다 해도 일본의 사례처럼 전방위적 압박이 가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113]

그렇다고 군주제의 아킬레스건인 불평등, 즉 민주주의라는 이념과의 충돌이라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진보 좌파, 공화주의 단체들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인데, 사실 한국 대중에게는 "모범적인 명예적 위엄만 누리고 실제 민주적 정치과정은 존중하며, 따라서 존경받는 국가 통합과 전통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알려진 서구 입헌군주정 역시 현실은 그리 장밋빛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영국의 사례만 하더라도 찰스 3세에게서 흑거미 편지 스캔들이 터진 게 2005년이다. 당연하겠지만 왕실이 보수우익적 방향으로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심각한 의혹을 담고 있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자면, 20세기에 왕실이 사라졌다가 다시 복고한 스페인에선 아예 왕실이 낭만적인 국민 통합의 상징은커녕 그 자체만으로 영원히 조용할 날이 없는 근현대사 역사적 논란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국가적 분열의 상징이다.

그나마 후안 카를로스 1세 자국의 민주화에 확실한 공적을 세웠고, 긍정적인 면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한 업적이 있어서 존경받았던 것이며, 현지 스페인에선 아예 왕실이란 기관이 아니라 후안 카를로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의미하는 juancarlismo라는 정치평론 용어까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후안 카를로스가 말년의 삽질, 스캔들로 명예가 실추된 상태에서 양위하며 동시에 스페인의 경제 문제와 내부 내부 민족 갈등이 불거지자 스페인 정국은 오히려 하루가 멀다고 공화정 복귀를 주장하는 좌파와 여기에 반대하는 우파가 정치적으로 험악하게 갈등하는 상태가 되었다.

거기에 예전부터 왕실의 '정치적 중립성'은 환상이었으며, 실제론 이만한 특권 집단에선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비공식적인 연줄, 특혜, 인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을 꾸준히 행사해왔다는 것이 뽀록난 건 덤이다.

이 폐단이 심한 곳이 태국인데, 태국은 왕실을 비판하면 외국인이라도 처벌함은 물론이고 왕실이 아예 정치에 개입을 해서 현 정권이 마음에 안 들면 군부를 사주하여 아예 정권을 붕괴시켜 왕실 어용 정권을 수립하는 폐단이 현재도 나타나고 있다.

현 태국 국왕인 마하 와치랄롱꼰은 선왕 라마 9세[114]와 다르게 완전 망나니짓 때문에 태국 국민들이 폭발해 왕실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코로 똠얌꿍을 먹이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듯이 '자신들의 체제가 삭막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공화국 시민들이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대 민주주의 입헌군주제도, 현지에선 나름대로의 정치적 갈등과 마찰의 원인 중 하나이기에 각 나라의 시민 사회에선 공화주의, 왕실 폐지 여론도 늘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나라들은 여전히 전체적인 국민 여론으로 보면 "왕실이 여전히 존재하면서 끼치는 부정적 영향력보단, 이를 폐지하면서 생길 마찰이 더 시끄러울 것"이라는, 즉 옛날부터 이어져왔던 기관을 굳이 없앨 필요성을 못 느끼니 잘못하면 긁어 부스럼이란 마인드로 여전히 존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왕실의 실제 정치적 영향력이 한 발짝 더 강해지고 있으며, 자국 내 특수한 근현대사와 이념 대립에 의해 왕실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인 경우에는, 오히려 스페인이나 태국처럼 국민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현대 한국 사회에서 군주정 부활을 운운하는 건 영국처럼 무슨 간지나는 국가 전통의 상징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보다 더 극심한 국가 분열의 상징이 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태국처럼 개혁파가 왕실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조짐을 보이면 극단적으로 왕실이 군부에게 쿠데타를 사주해서 친왕실 정권을 수립하여 사회혼란과 함께 친왕실 정권이 독재를 펼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현실의 한국에서 황실 복원 운운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이 아니며, 그저 특정 드라마를 지나치게 감명 깊게 본 소수의 몽상가들이 하는 소리이다. 그러니 지금 대다수의 시민들이 이런 주장을 비웃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국민 통합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6.10. 국민의 역사인식 재고와 황실 복원 문제

설령 구한말에 대한 국민들의 치욕적 인식이 희석된다고 해도, 그 용서가 곧 다시 황실을 복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한국 황실에 대한 분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많이 희석됐다.[115]

1960년대에 박정희가 황실의 귀국을 허용했던 것도 이미 황실이 국민들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 박정희라도 황실에 대한 분노가 여전했으면 주저했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근데 사실 그 시절은 경제개발이랑 당장 내 가족 굶기지 않는 일이 우선이라 황실 따위에 별 관심도 없었다. 쉽게 말해, 일제랑 놀아난 것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것도 없는 왕족들이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 자체가 워낙 미미하니 논쟁이 일어날 건덕지도 없고 그냥 존재감이 없다.

국가를 팔아넘기는 행동을 주도한 건 조선 왕족들이라기보다는 이완용, 송병준 간신 역도들이었고, 국민들의 분노도 그들에게 집중되었지 황족에 대해서는 '무능한 사람들, 제 몸만 사리는 경계인들' 정도로 평가하는 수준이었다. 프랑스의 나치 청산을 봐도 피에르 라발 같은 작자와 단순 부역자에 대한 처분이 전혀 달랐음을 생각하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답이 나올 것이다.

청나라 황실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씻겨나간 것과 비슷한데, 당시 군벌들의 막장 통치 시대와 국부천대 이전 국민당의 전횡, 일제의 침략,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허리가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던 중국인들은 청 황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이 과정에서 황실에 대한 분노가 희석되면서 선통제 공산당 정권 치하에서 나름 우대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등 망한 황실의 군주치고는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다만 말년에 터졌던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고 제때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을 뻔 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나라의 존재가 위협받았고, 광복 직후엔 한국 전쟁을 거치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간신히 나라를 꾸린 다음엔 국민들이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으로 황실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동안 신분제라는 관념 자체가 아예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 파괴되어 버렸다.

사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엔 군주제 폐지 이후 겪은 역사적 사건들이 워낙 강렬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며, 전반적으로 고생을 심각하게 한지라 전세대에 퇴위한 군주따윈 상대적으로 화제에서 멀어져 큰 감정도 없는 것이다.

"국민이 용서했다" 따위의 소리는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 대다수의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그저 먹고 살기 바쁜 현실적인 현대인들이고, 이들이 현대사에서 직접 마주했으며, 지지 혹은 비판으로 여전히 격렬하게 역사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 역시 장제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현대사를 쥐락펴락했던 비군주 정치인들이다.

즉, 국민들이 황실을 용서하고, 그 구성원들이 대한민국에서 대한제국의 후손으로 살아가도록 받아준 것은 사실이지만, 황실을 복원해도 된다고 허락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황실의 후손들은 언제까지나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이라는 배경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적어도 사회적 신분에 대한 차별은 없어졌으며 반대로 신분에 의한 특별대우도 용납되지 않는다.[116]

이탈리아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개헌된 이래 마지막 국왕이였던 움베르토 2세를 비롯한 이탈리아 왕실 일가들을 추방, 입국금지를 시키다 2002년에 사보이아 가문에 대한 귀국을 허락했지만 왕실과 군주제를 복원하지 않고 현재까지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구 왕실 구성원들에게 특권을 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도 한국 못지않게 구왕실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놀랍게도 이탈리아 왕실의 몰락은 대한제국 황실의 몰락과 구도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 대한제국 황실이 나라를 못 지켜내고 지배층의 책임을 다하지 않아 국민들의 원성을 샀듯 이탈리아 왕실 또한 무솔리니를 중용하여 2차대전이라는 삽질에 가담하게 만들었고 정작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오자 로마를 버리고 남부 이탈리아로 도망쳐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분노를 사 당시 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마저도 험악한 민심에 왕정 유지를 위해 자진 퇴위와 망명을 택했다. 그럼에도 국민투표를 통해 결국 이탈리아의 왕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17]

6.11. 복원과 유지에 드는 경제적 비용

이러한 법적인 문제, 이념적인 문제, 역사적인 문제 외에도 황실 복원이 문제시되는 이유 중 하나는 결국 경제적인 문제를 들 수 있다.

황실은 복원만 하면 알아서 유지보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속에 큰 비용이 들어가게 되어있다. 문제는 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이 점을 이유로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차라리 그 돈을 다른 정책에 투자하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논리. 이웃나라 일본의 황실 반대론자들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황실은 단순한 한 가정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이기 때문에 그 취급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외국의 귀빈이 방문하여 이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황실이 돈이 없어서 캐주얼 복장이나 입고 외국 귀빈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따라서 황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냉정하게 생각해서 황실에 돈이 들어가서 창출되는 가치는 그저 정서적인 만족감 외에는 논할 것이 별로 없다.

군주를 복위시켰을 때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것은 단순히 군주니까 간지를 유지할 비용이 필요하다 수준이 아니라, 어쨌든 나라의 국가원수이자 국가의 VVIP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이 드는 측면이 있다.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 후에도 집 근처에 상주 경비인력이 있는 이유는, 어쨌든 국가 대통령으로서 이런저런 기밀정보 등을 접했기 때문에 혹여 테러리스트나 정부 전복세력, 적대국의 공작원 전직 대통령을 납치할 경우 나라의 중요한 기밀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군주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현대적인 민주적 입헌군주국의 왕이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테러를 당하거나 암살, 납치당할 경우 그 자체로 엄청난 사회 혼란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과 군이 24시간 동안 호위하는 것이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엄청난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실을 유지한다고 국제적인 무역 회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고, 물가지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물가는 갈수록 올라서 허리띠를 졸라매도 시원찮은 시기에 황실 유지를 위한 비용까지 빠져나가면 부담이 되는 것은 국민들이다.

얼굴마담 하나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곳에 쓰여야 할 예산을 끌어다 쓰다보면 결국엔 어느 가엾은 결식아동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점심 한끼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황실을 유지한다고 쳐도 그 황실이 나라의 간판이라 할 수 없는 추태를 보이는 순간 황실의 존재 가치는 급락한다. 기껏 돈 들여 유지시켜 줬더니 특권의식에 젖어서 갑질이나 망언 등 경거망동을 일삼으면 뭣하러 유지시켜야 하는가?

전주 이씨 가문이 세계적인 갑부라서 돈이 많다면 그나마 복원된 황실이 알아서 사재를 쏟아붓는 식으로 약간이나마 국비 문제가 덜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주 이씨, 정확히는 조선-대한제국 군주 가문은 현재 돈이 없다. 본관이 전주 이씨인 사람들 중에는 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나, 이들 중 상당수는 본관이 전주 이씨라는 사실이 있을 뿐 자신을 황족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이들이 과연 황실 유지비를 대줄지가 미지수다.

흔히 영국 왕실이 자진해서 납세를 한다고 했을 때 이 소식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예시로 써먹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세금을 낼 만큼 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국 왕실이 가난했다면 내야 할 세금 자체가 없어 애초에 논의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18] 영국 왕실은 2021년 기준으로 왕의 명의로 된 재산만 3억5천만 여 파운드, 한화로 약 5,000억 원에 달한다.

국왕 명의로만 되어 있지 않을 뿐, 왕실의 다른 재산까지 더 합치면 윈저 왕가의 재산은 더욱 많다 할 수 있다. 이렇게나 부유한 왕실도 돈 있으면 세금 내라고 등쌀에 떠밀려 결국 세금을 납부하는 판에, 한국 황실을 복위시키고 그 재산에 세금을 물린다는 생각은커녕 애초에 그만한 돈도 없는 황실을 다시 세우자고 돈을 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119]

여기에 황실의 거처를 어디로 할 것이냐도 문제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으로 하자니 경술국치 이전보다 많이 훼손된 거처를 제공한다는 품위유지의 문제는 물론(관광 중단은 물론 즉시 중건에 들어가야 하므로 비용이 막대), 정부서울청사, 서울시청 등 관공서는 물론 각종 기업 본사/본점이 몰려 있는 서울 중심가가 경호 문제로 한층 더 복잡해질 수 있다.

6.12. 복원 이후의 입헌군주제 지속 가능성

만에 하나 한국 황실이 복원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 놓은 입헌군주제를 미래 시대에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이런 정치 혁명은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된다.

앞의 "황실 구성원에게 황족으로서의 삶이 행복한가"에 대한 부분에서도 나온 문제지만, 굳이 유교 문화 때문이 아니더라도 황실이 복원되면 황족들은 항상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여지껏 일반 시민으로서 영위할 수 있었던 자유로운 삶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 정서상 어쩌면 일본의 황실처럼 혹은 황실 복원 또는 황실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 속의 인물들처럼 한평생 마네킹 신세를 면치 못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지금 가장 유명하고 명성이 높은 왕실이라는 영국 왕실조차, 찰스 3세에 대한 평판이 그리 좋지는 않아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제로 가자"는 여론이 생기고 있으며, 어떤 시민단체는 " 여왕 사후에 군주제 폐지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안했다.[120] 정말 좋게 백 번을 양보해서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시켜줬다고 치자. 그걸 유지하는 게 쉬울 것 같은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이건 황제 한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다. 그 옛날 궁정이 일반 백성과 분리된 시절이라면 대외적으로 존재가 드러나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 좀 더 범위를 확장해도 일선에 드러나는 직계 왕자, 공주들 몇몇만 처신을 잘하면 문제될 건 없었지만, 지금은 일가친척까지도 다 공개되는 세상이다.

가령 황제의 8번째 아들이나 딸이 한량이라 치자. 전제군주제 시절이라면 그냥 어디 지방 외딴 곳에 가둬놓으면 된다. 어디서 살인을 저질렀어도 언론 같은 건 발달되지 않았으니 대충 잘 묻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언론과 SNS가 매우 발달하여 한량이 저지르는 깽판이 매스컴을 타서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즉, 대한제국 황실이 복원되면, 대한제국 내의 유수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가 100% 황실에 집중된다.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일일이 뉴스에 오르내리며 당사자를 숨막히게 할 것이다. 영국 찰스 3세의 전처 다이애나가 어쩌다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지 생각해보라.[121] 쫒아오는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가 교통사고로 참변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사고 당시에도 기자들은 피를 흘리며 숨져가는 그녀를 구조할 생각은 안 하고 죄다 카메라 플래쉬만 터뜨려대다가, 살인자라고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 계기로 다이애나 스펜서의 차남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는 언론과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형 웨일스 공 윌리엄과의 갈등, 형수 캐서린 왕세자비와 아내 메건 마클의 동서 간 갈등, 메건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까지 겹치면서, 결국 영국 왕실로부터의 탈퇴와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해리 왕자와 메건 내외는 그들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메건의 고향인 미국으로 갔지만 파파라치들의 사생활 침해는 막지 못했으며 영국에서 먼 나라 한국에서도 걸핏하면 사생활 관련 기사가 나온다.

게다가 조금만 잘못해도, 설령 그것이 일반인 같으면 "뭘 그 정도 갖고 그러냐?" 소리가 나올 정도로 사소한 것에도 구설수에 오르는 게 군주제 국가에서의 왕실인데, 황족들 중에 누가 일생동안 하루하루 기자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고 처신을 잘하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철저한 자기관리와 더불어 타국의 대통령 또는 총리에 준하는 뛰어난 능력을 겸비하는 것이 요구되는 게, 군주제 국가에서의 왕실이다. 군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이나 일본이 왕정제 국가라고 해서 부러워 보이는가? 그들이 어떤 고충에 시달리는지 알고 있는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그 자손들이 어떤 고충에 시달리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인지는 아는가? 일본 황실 역시, 언론 보도가 잘 되지 않고 있지만 극악의 군기를 시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루히토 천황의 오촌 당숙인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황실은 거대한 스트레스 덩어리"라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의식주 또한 상당부분 제한을 받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못 입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못 먹고, 살고 싶은 집에서도 마음대로 못 산다.

거주지가 궁궐로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옷차림도 마찬가지. 일반인들은 입고 싶으면 무슨 옷이든 자유롭게 입고 다닐 수 있지만, 왕족들은 옷을 입더라도 왕실의 품위에 맞게 입어야 한다. 그 예로 일본 나루히토 천황의 조카 카코 공주가 어릴 때 어머니 키코 비의 권유로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다가, 궁내청에서 "너무 짧은 옷을 입는다"고 불같이 반발하여 결국 그만두어야 했던 사례가 있다. 왕실을 보좌한답시고 궁내청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카코 공주의 할아버지 아키히토 당시 천황은 그 말에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식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은 먹고 싶은 거 어디든 가서 사먹지만, 왕족들은 왕궁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도, 음식점에 가는 것도,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 삼각김밥 편의점 도시락 같은 식품들을 먹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왕궁 음식도 막 먹다가 살찌면 얼마 후 매스컴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고, 그 뒤 외출은 꿈도 꿀 수 없게 될 것이다. 만화 등에서 왕족이 일반인 음식 한 입 베어먹고 "이게 서민 음식이구나, 흑흑."하면서 우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들은 가끔 가다 컵라면이나 치킨을 먹을 수 있는 재벌이 아니다.[122] 진짜로 감명을 느끼고 그런 거다. 1년 365일 궁궐에서 진수성찬을 대접한다고 한들, 매번 똑같은 것만 먹으면 쉽게 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아무하고나 자유로이 어울리지 못한다. 친구 사귀는 것도 제약이 많은 데다가[123] 연애나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124] 왕실 어른들이 정해준 사람하고만 연애 및 결혼을 해야 한다. 또한 아주 우연의 확률로 일반 시민과 마찰이 생겼다고 하면 재빨리 현명하게 대처해야겠지만, 만일 "나 왕족이야!"라면서 갑질을 한다면? 나 고종 황제 손자야! 어떻게든 소문나서 역관광당할 수 있다.

당장 조선 시대 사극만 봐도, 왕궁에서 생활하는 신하나 왕비, 세자는 물론이거니와 왕도 왕궁 생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왕궁에 나왔다가 서로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난다든가, 궁중에서의 피비린내와 여러 사건으로 인해 왕 역시 신변을 보호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왕정제 생활은 여간 자유로운 게 아니다.

실제로 전제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가 국민을 폭행하자 경찰관들이 나서거나 신료들이 상소하기도 전에 아버지인 국왕이 바로 왕자를 재판 끝날 때까지 구속하라고 명했다. 이 왕자는 몰래 팬 것도 아니고 SNS에 폭행영상을 직접 올렸다. 아예 대놓고 정신줄 놓은 거나 다름 없다는 것. 이건 뭐 사우디 왕정이 타락했건 말건 답이 없는 상황이며, 국왕이 직접 엄벌을 주문하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할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사우디는 율법대로 처벌을 하기 때문에 단순 폭행죄도 재수없으면 징역은 기본이므로, 그럼 몇 년은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국민들에게 왕족의 타락한 모습을 스스로 보여줘서 아버지인 왕의 권위까지 추락시키고 자식 잘못 키운 부모로 만들었으니 본인의 이미지 떡락은 말할 것도 없다. 왕실 구성원 한 명이 잘못한 경우 일반인이면 과태료 처분이나 경고로 끝날 일도, 이미지 유지를 위해서는 대국민사과라도 해야 하는 게 왕실이다. 만약 재벌들처럼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될 경우, 재벌의 경우보다 더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다.

또한 인터넷, 게임, SNS도 마음대로 못한다. 온라인 게임[125] 하다가 할 일 없는 잉여들에게 아이피 아이디를 추적당해서 혹여 왕족 신분이 까발려진다면 엄청 피곤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오프라인 게임 정도는 비밀리에 하긴 하겠지만, 일반 시민 앞에선 겜알못 코스프레를 해야 한다. 여타 SNS 댓글 사건으로 잉여들에 의해 SNS 계정이 털려 왕족임이 드러날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SNS로 발언을 잘못할 경우 처벌 뿐만 아니라, 심하면 사회에서 매장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SNS에 황족의 사생활이 막장으로 올라왔을 때 비난받게 될 수 있다.

또한 국민들의 권리 중 하나인 참정권이 제한된다.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도 나라에 따라 왕족이 선거나 국민투표에 대한 선거권을 가지는 경우는 있지만[126], 왕족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까지 가지는 입헌군주국은 거의 없으며, 정치와 관련된 발언도 할 수 없다.

나라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현대 왕실 사람들은 일반인들에게 약점 잡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영국 윈저 왕조의 경우 자기관리는 그나마 왕실 역사가 오래되고 국민들의 지지가 확고해서 개인적인 불륜 같은 일탈은 최소한 잘리지는 않으니까 욕만 실컷 먹고 끝난 거다.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그거 따라하다가 왕이 갈렸다. 그나마 이쪽은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민주화에 공이 있는 데다가, 왕 빼고는 아무 것도 해본 게 없고, 이미 고령이다 보니, 국민들이 봐준 셈이다.

그런데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해주면, 그 구성원들이 이 정도의 전심전력의 노력을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들도 사람이기에 절대 불가능하다. 길거리에서 코도 함부로 못 후비는 게 왕족이다. 행여 노상방뇨라도 하는 날이면, 그 사건이 신문 1면에 실리고 전국적인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왕실의 구성원이란 이런 존재다.

국내 언론은 통제한다 쳐도, 외신은 통제가 안 된다. 여기에 언론통제를 시도하다 들키기라도 하면 전국민이 "전제정권 물러나라!"며 들고 일어날 것이 뻔하다. 뿐만 아니라 언론을 황실 어용언론으로 만들기 위해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욕을 허벌나게 쳐먹을 것이다. 즉, 언론통제 시도와 언론을 황실 어용언론으로 만드려는 것은 자충수에 불과하다. 차라리 그 황실 일원을 영구히 일원에서 배제시켜버리는 게 더 싼 대가다.

대통령은 왕보다 더 자유롭지만, 대통령도 지도자인만큼 의원내각제 대통령제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건 똑같다. 실례로 철저한 의원내각제인 독일에서, 2010년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방문 때 한 포함외교 옹호발언 때문에 사임까지 했다.

또한 "황실을 폐지하자"는 여론이 들끓게 되면 어떻게 무마시킬 것인가? 대책은 있는가? 전제군주제에서조차 국민의 암묵적 동의가 요구되는 것이 황실이다. 하다못해 그 북한의 김정은조차 평양 주민들과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고위 장교단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그룹의 지지 속에 권력을 유지하는 실정이다. 나머지 국민들을 혼자 탄압하는 게 절대 아니다. 적어도 300만의 기득권층과 함께 나머지 2,200만을 최대한 쥐어짜서 무력하게 만든 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탄압하니까 유지되는 거다.

그런데 그들조차 등 돌릴 정도의 상황이 터지면? 2,200만이 진짜 너죽고 나죽자로 나서고 기득권층이 김정은을 버리기로 한다면?[127] 결국 김씨 정권이 위험해진다. 김정은이 2018년 이후 갑자기 딴사람처럼 바뀌어 평화 이야기를 하며 체제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비핵화를 하겠다고 한국과 미국에 제안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핵화 과정에서의 온갖 요구도 그냥 한국 무장해제 시도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말하면 내부 세력을 탄압이 아니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두명이 지지를 철회하면 강건군관학교 보내서 기관총으로 처형해버리면 되지만, 수백만명이 동시에 철회하면 본인이 그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 악독한 차우셰스쿠마저 군민이 합동으로 반대하면서 부인과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걸 상기하자.[128] 참고로 설사 시진핑 미국이 원하는대로 중국공산당 해산, 중국의 탈공산화를 결심했다고 해도 함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데 있다.

타인에게 존경이라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대인관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들 중 가장 어려운 행위다. 존경을 받아내는 것은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넘사벽으로 높은 행동이다. 그 엄청나게 어렵다는 연애 따위보다도 비교도 안 되게 훨씬 어려운 게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다.[129] 황실 구성원이라는 감투 이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내는 그 정도의 인망을 쌓아올려야 하는 게 왕실이다. 아무리 입헌군주제가 되어 반쯤 연예인으로 전락한 게 세계 왕정제 국가의 현실이라지만, 일반인과 뭐가 다른지를 확실히 어필해야만 하는 게 왕가의 구성원이다.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은 "황실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시켜 주면 그 황실이 과연 전국민 모두에게 존경을 받아낼 자신이 있는가?

황실(왕실)이 국민 모두에게 존경을 받아야만, 하다못해 암묵적 동의라도 따라야 유지가 가능한 게 왕정제다. 입헌이건 전제건 똑같다. 그 때문에 찰스 3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윌리엄은 왕실 일원들에게 주어진 의무인 병역 기간을 다 채우고도 한번 더 병역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의지만이라도 보였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왕실 구성원은 일반 국민의 몇 배에 달하는 희생정신과 애국심이 요구되는 신분이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 분조(分朝)를 이끌어야 했고, 소현세자는 패전의 책임이 없음에도 왕족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으며, 자신의 인생까지 희생해가며 국가 개혁의 필요성 그리고 그 기반을 배우고 돌아왔다.

자, 이제 지금의 자칭 황족들에게 물어보자. 애국심이야 그렇다 치고 소현세자나 광해군처럼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앞장설 자신 있나? 지금이야 전쟁이 터지면 징집 연령에 속하는 모든 국민이 어차피 다 휘말리니 앞장서서 죽으라고까지 할 건 없겠지만, 최소한 본인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평도 해병대, 해군 특수전전단, 특전사 등으로 복무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일반 국민들보다 더 힘든 부대에 자원하는 정도는 되어야 납득을 한다. 다만 한 가지 특권은 있는데 왕족이기 때문에 부사관이나 병으로는 복무할 수 없으며[130] 장교로 복무해야 한다.[131] 이 정도가 '귀하신 혈통'인 왕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대우다.

물론 그 때문에 복무기간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기본 5~6년은 된다. 찰스 3세가 사생활은 별로였지만, 영국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경력 등 왕족으로서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는 게 영국인들의 평가다.

만약 황실이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거나 의열활동 및 독립군의 대장으로 참여했던 전력이 있었다면 독재 정권으로 혼란스러울 때 왕정복고 구호가 나왔을 것이고 국민들의 바램에 힘입어 정치권에서도 왕정복고 논의가 나왔을 것이다. 만약 논의가 이루어졌을 경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체제가 무너지고 대한 '제2제국'이 출범했을지도 모르며, 군사 쿠데타를 막아냈다면 제2제국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막아내지 못하고 독재정권에 빌붙어 자리를 보존했을 경우 황실에 대한 실망이 커져서 황실이 복원되지 못하거나 폐지되었겠지만, 황실이 조금이라도 민주화 운동을 도와줬을 경우나 독재정권에 의해 황실을 유지하면서도 입헌군주제의 틀 내에서 정권에 저항했을 경우 대한제국은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97년 외환 위기 등의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황실의 재산을 환원하는 등의 모범을 보여야 국민들도 인정한다. 조선왕조가 멀쩡할 때의 내탕금도 그 쓰임새를 보면 가뭄이 들었을 때 구휼의 목적으로 내놓는다든가 경복궁 공사 때처럼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내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단 왕실이라도 돈을 꼭 움켜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제군주제 시절의 조선에서도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계층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실 재산을 내놓기도 했다.

또 말실수 하거나 행동을 잘못하면 위험하기 십상이다. 역사 속에서도 보면 대한제국 이전 조선의 왕족들의 삶을 돌아보면 말 실수와 행동 하나로도 목숨이 위험해진 경우[132]는 수두룩하다. 재능이 뛰어나서 위험해진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지금과 옛날을 비교하긴 어렵다.

그래도 정말 왕과 왕실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의 왕족들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최소한 지켜야 할 건 지키고 살았다. 왕권이 전세계적으로 드높던 시대에 말이다.[133] 유명인들도 말실수하거나 행동을 잘못하면 대대적으로 비난받는 시대인데, 황족은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민주국가인만큼 사형이나 귀양을 갈 가능성까진 적겠지만 비난받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알려져 있는만큼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들이 왕실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하는 게 없어도 중산층 생활은 확실하게 보장되는 대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원 지금과 같은 자유를 반납하고 각자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이 시종일관 뉴스거리가 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있을까? 조금만 의무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도, 심지어 일반인이라면 동정을 살 목숨 거는 일이더라도 해야 하며 거부하면 황족이라는 이유로 비난거리가 되어도 괜찮은가? 이것을 대한제국 구 황족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대한제국 황실 계승자들 역시 그에 합당할 수준의 부가 주어지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다. 물론 여기에 반기를 들면 국민들은 "꼬우면 다 때려치고 공화제 하던가"라고 할 것이다. 어차피 황실 복원이 된다면 사실상 임금은 국민들에게 '추대'된 것이고, 국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봉사할 임금을 원하지, 옛날처럼 자신들의 위에서 지배할 임금은 원하지 않는다.

7. 낙관적 견해와 반론

구 황실 당사자인 이석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하술할 낙관론 중 세 개인 국민 통합의 상징화, 전통문화 복원의 상징화, 군주를 이용한 외교 전략 수립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물론 실제 황실을 복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역사와 전통, 문화적인 면만은 유지 계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상징적인 황실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국 왕실처럼 상징적인 어른이 있으면,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34]
전주 지역명사 이석[135], 2020년 7월 출처: 지역명사문화여행 21세기의 '궁'을 꿈꾸는 대한제국의 황손, 매거진《디그램》|인터뷰에서

7.1. '국민 통합의 상징'화

전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 및 한국 국민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한 세기 전에 위정척사파 유생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은 외세의 내정 간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민주주의보다 조선 왕실을 부활시키는 것이 국민적 통합과 정치적 안정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으며 마찬가지로 조선 왕실을 부활시키려고 활동했던 복벽주의 단체인 대동단의 회원이었던 전협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지만 한반도의 전통은 군주제이기 때문에 지금 공화정을 하면 민족의 단결이 어렵다고 임시정부에 의친왕을 보내서 조선 왕실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을 했다.[136] 마찬가지로 영국과 일본의 왕실이 실제로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점, 국민간 화합이 안 돼서 국론이 자주 분열되는 한국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황실복원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다.

7.1.1. 반론

예시로 든 영국에서도 적지만 왕실 폐지 여론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 가십거리에 관심을 좀만 기울여보면, 영국 왕실이 국민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만큼 왕족으로써의 모범을 충실히 실천해온 영국에서조차 왕족의 생활과 평민과의 신분 차이에 대한 구설수는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게다가 찰스 3세가 왕세자 시절 왕족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하다가 걸린 사례가 있어서, 영국 내부에서조차도 이를 근거로 그에게 국왕 자리를 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많았고 즉위 이후에는 더 나아가 왕정 자체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즉위식 때 잉크 사건으로 입방아에 올랐고, 경제 위기 와중에 막대한 혈세를 들여 대관식을 한다는 비판을 받있다.

그럼에도 영국은 세계대전 당시 위기의 영국을 국민들의 구심점이 되어 함께 구해냈다는 이미지라도 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조지 6세는 런던이 폭격을 받는데도 피난을 떠나지 않았고, 왕가가 거주하던 버킹엄 궁전은 독일군의 폭격을 정통으로 맞고 심한 화재를 겪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이전까지는 공업지대가 주로 폭격당해 노동자들의 집이 날아가는 등 서민들이 주로 큰 피해를 입어 왕이나 귀족은 멀쩡하고 서민만 피해를 본다며 불만이 높았지만 얼마 못 가 버킹엄 궁전이 폭격을 맞아버리자 서민/왕이 다를 바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았다.[137]

또한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일본 등의 경우에는 왕실이 근대화를 이끌거나 입헌군주제에 적응하였거나, 민주화를 이끈 역사적 공로에 의해서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형성된 것이지, 황실의 존재 자체가 신뢰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38]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로 "국민통합의 구심점이 될 수 있게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주객전도된 주장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경우, 2019년 현재 공화국으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더 많아졌다. 이전까지 여론 조사 내용을 비교해 봐도, 사실 스페인 국민이 왕실 자체를 지지했다기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라는 개인을 종신 국가원수로서 지지했던 것에 가깝다. 유로존 위기 카탈루냐 독립운동 이후로 스페인 왕실은 확실하게 이제 국가 통합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태국에서도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사치와 처신 문제와 태국 왕실의 절대 권력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반발하고 있으며, 그 세대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태국 왕실을 지지하는 기성 세대와의 갈등으로 인해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 이후부터 태국 왕실은 국가 통합이 아닌 분열의 상징이 되고 있다.

황실복원론자들은 "일본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139]이 있어서 국민통합이 잘 된다"고도 주장하는데, 사실 일본 황실은 일본이라는 폐쇄적 세계관 안에서 원나라의 일본원정 정도를 제외하면 외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고, 실권이 없는 그야말로 상징적 존재로만 여겨졌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40]

오늘날에는 장년층, 넓게 봐도 중장년층 정도에서나 '불경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존재'일 뿐, 40대 이하 기성층 및 청년층에서의 천황 가문은 '예전부터 존중되던 존재이기에 존중은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 정도로나 인식한다. 무엇보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단합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각해보면 딱히 자랑할 거리는 아니다.

즉, 황실이 생겼다고 자동으로 구심점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국민 국가 형성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개념은 왕을 죽이고 시민들이 통치하던 프랑스 혁명 시기 프랑스 시민들 사이에서 최초로 형성되었다. 그 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군주·귀족에 귀속된 신민(臣民)이었지 민족/국민 같은 관념이 없었다. 그 시절 왕과 귀족들이 부랑자들을 모아서 국가의 군대를 조직해 전쟁을 벌일 때 툭하면 병사들이 도망쳤던 이유는 국가와 상관 없는 신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민중이 왕과 귀족들의 목을 치고 스스로 '국민'이 되자 이들로 구성된 군대는 자신들의 권리를 짓밟으려는 외부의 침략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국가의 국가적 구심점의 뿌리는 왕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가의 목을 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애초에 황가가 있다고 해서 국민 통합이 잘 된다면 세계사 속 왕조들이 지금까지 자기 자리를 계속 유지했어야 하지만, 현실은 왕정 폐지가 이뤄진 곳이 훨씬 많다. 이는 영국의 북미 식민지가 독립하고서 워싱턴 왕조가 아닌 세계사 최초의 근대 공화정을 수립한 데서도 알 수 있다[141]

게다가 구심점이 될 거라는 군주와 가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반란이나 내전을 벌이거나 더 심한경우 외국의 군대를 끌어와 자국 국민들을 공격해 달라고 했던 사례 등 자칭 구심점이라는 군주들이 자신의 손으로 구심점 주변의 사회를 붕괴시켜버린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142][143] 당장 이 조선 왕실도 이 구심점 고종과 명성황후가 동학농민운동을 저지하려고 외국 군대를 끌고 와서는 결국 본인들도 자멸한 전례가 있다. 사실 이는 임오군란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다. 황실이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기본인 다양한 사례들과의 비교를 망각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그리고 입헌군주제든 공화제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합의와 공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지, 특정한 구심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7.2. '전통문화 복원의 상징'화

오랜 기간의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시기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의 수많은 전통문화들이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조선왕실은 이러한 전통문화 복원의 중심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7.2.1. 반론

황실과 전통문화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왕실제사 외에 황실 사람들이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전통문화 복원에 도움을 줄 만한 게, 있다면 외국 관광객을 위한 공연배우 비슷한 구경거리 정도로나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시시한 황실을 그 나라의 국민이 바랄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종묘제례 등 황실과 관련이 있는 행사는 이미 시행하고 있기에, 굳이 복원한다고 해도 그 이상 나아질 것은 없다.

게다가 유교적 제례문화에 거부감을 갖는 종교인이 상당수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144], 이러한 제례의식을 현재와 같이 상징적인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시행한다면 몰라도, 국가의 공식 의전행사로 격상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자칫 종교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 될 소지도 있다. [145]

또한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나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황실을 통해 복원할 수 있는 전통문화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다. 모든 국가들, 심지어 영국에서마저 소위 전통으로 간주되는 왕실의례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이후에나 만들어진 근대적 장식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황실을 통한 전통문화 복원 운운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146]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제국 황실은 일제강점기에 잘 먹고 잘 살았으며 일본 황실과 문화적, 혈연적 교류를 가졌다.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뒤 머리를 자르고 유럽식 복식을 했으며, 서양식 건물을 궁에 짓고 홍차와 커피를 마시는 등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생활 양식을 추구했다. 이건 전통 파괴 행위지 전승이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황실의 전통이 있다면 바로 이 시기, 그러니까 일본 황실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관습이 남아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국민들이 과연 이런 '전통'을 원할까? 그렇다고 예전부터 지금까지 왕실이 보존되어 온 국가인 영국, 일본도 전통문화 보존이 공화국 체제인 주요국들에 비해서 잘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도리어 보수적인 일본 궁내청이 일본 내부에서도 여러 꼴통행위로 욕먹는 것을 감안해보면, 어설픈 전통 복원은 국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만 남길 수 있다.

또 요즘 한국에서도 대통령 고향 지자체에서 대통령 탄신제와 위령제 개최에 세금을 쓰면 국민들이 반발하는 마당에, 황실 제사 등 황실 의식에 국비를 쓰면 국민들이 쓸데없는 허례허식에 세금을 쓴다며 더 반발할 수 있다. 그 예는 최근에 치러진 일본 대상제를 들 수 있는데, 그 의식에 27억엔(한화 기준 약 290억원)이라는 국비가 들어갔다. 그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소수의 일본인들은 천황제 폐지 집회를 벌였다.

무엇보다도 전통문화 복원은 가능하다 치자. 하지만 그것을 유지시키려면 왕실과 국민이 모두 노력해야 한다. 만일 전통문화 복원을 시켜놨는데 양쪽 중 하나가 무관심하면, 결국 원상복귀가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왕실 복원과 전통문화 복원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문화의 복원과 전통정치의 복원은 하등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현대에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고대 이집트, 중세 시대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신분제, 노예제, 농노제를 복원하자고 하는가? 애당초 전통문화와 황실은 하등관계가 없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19세기에 일본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서구식 문화를 유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이 메이지 덴노와 그 추종자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도 이 전제 자체가 맞지 않는다.

애초에 전통문화는 백번 양보해서 존중이나 권장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면 역사는 항상 흐르는 법이고,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도 항상 변하는 법이다. '전통 문화'란 이유로 굳이 이걸 반드시 '복원'할 당위성 또한 없다. 입헌군주제가 오늘날에 와서는 악습으로 규정되고 있는 서얼차별, 처첩제, 노비제도 같은 전통문화를 되돌리자는 건 아니지만 [147] 그럼에도 공화정 국가에서 그런 제도가 연상되는 체제를 되돌리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문맥에서 흔히 말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전통문화'는 기본적으로 실제 현대사회에서 삶과 근본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항목들 중에서 그것도 현대인의 주관적인 취향, 기호에만 맞는 걸 선택적으로 복원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의 역사성을 고려하면 세간에서 떠도는 "현대 한국의 민속놀이는 스타크래프트"라는 농담은 (실제 현대 한국 사회, 문화적 소프트파워 등에서 e-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농담이 아니다.

전통이란 원래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이런 문맥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아 '복원'하자는 전통문화들은 왕실복원 운운이 아니라 지금도 저예산과 무관심, 취업난에 시달리며 막막한 현실에서 사명감 하나로 연구하는 역사, 문화, 철학, 민속 관련 인문학계를 지원하면 되는 일이지 '왕실복원'은 전혀 상관도 없는 생뚱맞는 소리이다.

7.3. 군주를 이용한 외교 전략 수립

예를 든다면,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의 우호국이나 동맹국 방문을 들 수 있다. 즉, 다른 나라의 정상을 만나 국가 간 커다란 협상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황실이 나서서 미리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7.3.1. 반론

찰스 3세의 경우 영연방[148]이라는 영국을 주축으로한 국가연합에서 상징적 원수(Head of the Commonwealth)를 맡고 있다. 또한 영국 포함 15개국의 영연방 왕국에서는 각각 국가원수(국왕)지위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이 가시적인 외교적 효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영제국이라는 역사적인 후광이 있기에 가능한 특수한 사례로, 군주제의 이점이 아닌 패권국가로서의 이점으로 봐야 한다.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뿐 세계에 어떤 영향력도 없었던 대한제국 황실에 영국 왕실의 사례를 갖다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영국이 왕실을 폐지하지 않는 이유

군주대 군주로서의 외교로 접근한다는 것을 반대로 보면 군주국가들에만 한정된 외교전략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화정을 채택하거나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에서 군주를 통한 외교전략은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 전통적으로 역사적인 교류관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비교적 근현대에 들어 공화정으로 전환한 나라들도, 그 왕실은 이전부터 유럽의 왕가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그렇기에 왕가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우호적인 관계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황실이 단기간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어려우니 당장에 가시적인 효과를 얻기는 힘들다.

물론 한국이 어느 정도 국력이 있기 때문에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 대통령부터 강대국들에게 수시로 외교적 결례를 당했을 것이다. 어차피 국가간 고하없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현대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왕실에게 결례를 범함으로써 발생하는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자초하는 왕실은 없다. 오히려 영국 같은 자국의 군주제 여론이 위태한 국가의 왕가가 외교적 마찰을 부르는 건 자충수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인적 네트워크 자체가 단기간에 형성되는 건 아닌 만큼 황실을 통한 외교전략은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할 사안이며, 그러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해도 실익이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결국 외교적 영향력을 키우려면 황실보다는 한국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 단적인 예로 세계에서 외교적 역량이 가장 강한 미국에는 군주가 없다.

차라리 유명 기업인, 연예인이나 체육인 등을 외교 전략의 하나로 쓰는 게 훨씬 효율성이 높다. 예를 들면 이재용이나 정의선 등 재벌 그룹 회장들을 미국과의 외교 전략에, 배용준을 일본과의 외교 전략에, 박항서를 베트남과의 외교 전략에, 방탄소년단이나 NewJeans K-POP 아티스트들을 K-POP이 인기가 있을 만한 나라와의 외교 전략에 활용하는 것이다.[149]

7.4. 유사 시 국가의 공백을 대비한다는 주장

벨기에의 경우 2007년에서 2011년 사이 프랑스계 왈롱계와 네덜란드계 플란데런계의 정치분쟁 선거 후 정부 수립에 실패해 정부가 셧다운 상태로 간 사례가 있었는데 이때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2세가 성공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2010년 선거와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 벨기에 정부를 이끈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이 입헌군주를 수립함으로서 정치분쟁으로 인한 무정부 사태 시 대비를 할 수 있다는 게 이 문단의 주 논지다.

7.4.1. 반론

이 주장은 말 그대로 벨기에라는 전혀 다른 풍토의 사례 하나를 가져 와서 무리하게 접목시키고자 한 것으로, 정치학의 개론 수준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통령 유고 시 권한 대행 승계 순서와 선거 절차 등이 짜여 있으며, 벨기에처럼 군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중심으로 그 의사를 반영하여(대의제) 정당성을 반드시 얻도록 하게 되어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제헌 당시부터 정해 놓고 있는 철칙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통령 탄핵되면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서 정부를 구성하고 그 기간 동안 국가가 무리 없이 돌아간다는 것이 검증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도 국무총리의 권한대행으로 국가가 무리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같은 방식으로 정부 요인들이 대거 죽었을 경우에도, 그냥 법률에 정해진 순서대로 장관 → 차관 → 서울시장이 권한대행 역할을 하면 되고 지정생존자 제도를 시행하면 된다.

의원내각제의 경우도 총리 불신임결의안의 대상이 되고 내각 총사퇴, 의회해산권이 발동되어도 새로운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혹은 윈스턴 처칠과 같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비상사태 해결 후에 총선을 치르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기 위해서 예비 내각 등 여러 기구들이 존재하고 총선이 없다고 하더라도 부총리 등이 대행하게 된다. 아예 총선 없이 당 내 경선으로 총리를 교체하는 방법 역시 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코로나에 걸리고 총리 업무가 중단될 때 부총리 → 장관 → 정무차관 → 사무차관 순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영국, 캐나다와 같이 국가원수가 의회에서 새로 선출된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하는 방식도 있다.

국가가 망했는데 황실이 무사하기는 힘들며, 설령 무사한다고 하더라도 왕당파들이 갑자기 등장 할리가 없으며, 전제군주제라면 모를까, 입헌군주제인 영국이나 일본 황실이 실권이 없듯이 대한제국 황실도 실권이 없을 것이므로, 그냥 존재감만 보일 뿐 왕실 자체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 힘들 것이다. 끽해봐야 나라 망하고 난 다음에 망명정부나 세우겠지만 그건 공화제 국가에서도 할 수 있다.

테러 사건 같으면, 오히려 왕실이[150] 정부 인사보다 더 좋은 타깃이 된다. 대통령은 임기 5년이 정해져 있고, 총리 등 정부 인사들 역시 특정 주기는 없지만 업무 중 사망이 아닌 이상 퇴임은 하게 되어있다. 반면 왕은 일단 한번 되면 죽을 때까지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151] 즉, 우스갯소리로나마 정부가 무정부 상태로 망하는 것을 대비할 수는 있겠다. 자기네들이 타깃이 되면 상대적으로 정부는 좀 더 안전할 테니까. 당장 세속적 실권은 없다시피 하고 상징성만 있는 로마 가톨릭 교황도 정신이상자의 소행에 암살당할 뻔 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공화제가 훨씬 유리하다. 당장 같은 조직 내에서 내부 승진이나, 여당 내에서 재선출, 혹은 이것도 부족하면 야당에서 뽑는 등 인재풀은 공화주의가 훨씬 많다. 업무 미숙으로 인한 혼란도 가능성은 있지만, 이마저도 공화제가 입헌군주제보다 유리하다. 공화제에서는 정권이 바뀌는 게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당 야당은 서로 권력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일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공화제에서는 빠른 인수인계와 인력대체로 미숙한 상황을 벗어나는 과정이 단기간에 가능하지만, 정권 교체는 꿈도 못 꾸는 군주제는 준비도 안되어 있고, 경험도 없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군주제가 붕괴되거나 공화제로 대체되면 이 진통이 발생한다.[152]

또한 국가 지도자가 적에게 잡혔을 때를 생각해보자. 대통령일 경우 비록 본의 아니게 탄핵소추와 같이 간주되고,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했다가 대통령이 권력을 잃을 경우 다시 대통령을 선출하면 된다. 국무총리의 경우도 부총리나 장관급 인사들이 권한을 대행하면 되고 필요하면 다른 내각으로 교체하면 된다.

이 경우는 민주적 방식으로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지 않아서 정통성에서 딸리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이 시점에서는 국가가 붕괴되게 만든 주체나[153] 그에 맞서는 이들이 난립할 것이니 정통성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 경우에도 이전 정부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권한대행' 명목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국내 선거 같은 걸 할 여건이 안 되니까, 자체적으로 대통령제 - 집단지도체제 - 국무령제 등으로 바꿨다.[154]

하지만 군주는 그게 어렵다. 후임 황제를 즉위시키면 되긴 하지만, 이럴 경우 전임 황제가 죽으면 그냥 후임 황제가 황제를 계속하면 되는 반면, 전임 황제가 석방 또는 탈출의 과정으로 귀국에 성공할 경우 내란이 일어난다. 나라는 전임황제파와 후임황제파로 갈라져 나라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전임황제파의 논지는 "원래 황제 자리는 우리 폐하 꺼"이고 후임황제파의 논지는 "나라도 못 지키면서 무슨 황제냐?"이다. 심하면 공화주의자들마저도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나라가 위기 상태일 때는 되려 군주정이 공화정보다 훨씬 불리한 것이다.

실제로도 명나라의 경우, 주기진이 황제로 있다가 토목의 변으로 인해 오이라트족에게 붙잡혀 간 적이 있다. 이에 명나라에서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해서 "주기진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니까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하라!"는 태도를 보이자, 오이라트는 매우 어이없어하며 주기진을 명나라로 되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차라리 주기진이 죽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더 큰 난리가 났는데, 명나라 내부에서 주기진 파와 주기옥 파가 갈라져 투닥투닥 거리며 싸움박질을 한 것이다. 결국 탈문의 변이 일어나서 주기진은 간신히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그렇다면 교육이 아닌 경력으로 능력을 판단하는 시각으로 한 번 바라보자. 이는 일종의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 변명으로 말해줄 수 있다. 황족으로써 자신의 직무에 대한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이 기준으로 보더라도 과연 현재의 대한제국 황실 수장이 국가를 경영할 능력은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기초자치단체의원이라도 해본 적이 없으며 하다못해 연간 5,000명이나 배출하는 그 흔하디 흔한 소대장 경험도 없다. [155]

아무 교육도 못 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업적은 있어야 하는데 그 걸 상쇄할 수 있는 이력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윤영하 이희완 제2연평해전에서 죽거나 장애인이 될 정도로 심하게 다쳐가면서까지 뛰어난 군공을 세웠는데, 이 정도 희생과 공은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애초에 현역판정률 80%, 보충역 판정률까지 합하면 94%를 넘어가는 나라에서 외국처럼 군복무 했다는 정도로 사회에 공헌했다며 인정받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직업군인으로 군복무가 사실상 최저기준이라 할 수 있고[156] 인정이라도 받으려면 특전사에 가거나 그럴 신체 스펙이 안 되면 최전방 수호병 정도는 하고 나서 황족의 권위를 논해야 한다.

아무런 능력도 검증하지 못한 채 그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니까 황제시켜 달라는 논지인데, 21세기는 카스트보다는 스펙이 우선되는 세상이다. 잘 모르는 사실이 다른 입헌군주국은 국민들의 존경이 있어서 권한이 없더라도 유지된 것이지, 군주가 남아있는 것 자체가 곧 존경과 통합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후돈의 아들로 태어나기만 했지 실상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 하후무보다, 쫄병임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적장 황조의 목을 베는 엄청난 군공을 세운 풍칙이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르고 훨씬 출세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 복원은 이를 거꾸로 가자는 논지인데, 하후무가 무능한 걸 알면서도 하후돈의 아들이니까 중용하자는 논지와 동일하다.[157]

게다가 조선도 이에 대해 인지했다. 정도전의 재상제가 왜 주목받는지 생각해 보면 조선의 정치문화에서 왕을 상징적 존재, 최소한 견제의 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과거를 통과한 관리들을 상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다. 조선의 왕들의 정통성은 혈통보다는 '상징', 지식과 역량으로 사대부에 군림하는 왕으로 생겨난 것이다. 일군만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단순히 정통성이 조선의 왕위를 보장했다면, 왕족끼리 벌인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은 그렇다쳐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같은 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선의 전통이 있는데 그 복원이 쉽지 않다. 조선의 전통만 복원해도 수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끊임없는 감시와 기록이 생길 텐데, 과연 존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망해버린 국가라는 인식과 '과거의 영광'이라는 모순 속에서 그 과거의 영광의 '재현'을 요구할 텐데 과거의 영광만으로 쉽지 않은 그 과오까지 씻어내야 한다. 말 그대로 제2의 세종대왕 정도는 나와야 그래도 국민들이 "그래, 황실을 복원하길 잘 한거 같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게 아니라 해도 당장 지금 대한민국에 놓여 있는 문제들을 어느것 하나라도 완벽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자신들이 공화정 시대보다 더 잘 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국민들도 굳이 잘 돌아가고 있는 공화정을 군주정으로 바꾸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고 "군주제를 복원시키고 보니 뭔가 나아지긴 하더라"라는 인식이 박혀야 기껏 복원시켜놓은 군주제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쳐도 조선 세종때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세종대왕이 더 나음"이라며 끊임없이 세종대왕과 비교할 것이다.

이 글의 주장과는 다르게, 국민적으로 망국을 원하지 않는데도 황실과 일부 지도층만 날려버리면 오히려 쉽게 나라가 망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위 주장의 대상이 되는 옛 한국 황실이다. 일본은 한국인의 국민적 반감과는 상관없이 지도층을 포섭하고 황실을 끌어들여 일제강점기를 만들어버리고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도 심각한 수준의 수탈로 1인당 GDP를 구한말의 절반 수준으로 만들어버렸으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말~1945년까지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시기라 꼽히는 경신대기근기, 임진왜란기, 북한 고난의행군기에 버금가는 진짜 지옥을 만들기도 했다. 독립까지는 35년이 걸렸고 그나마도 고종과 의친왕 정도가 독립을 위한 노력이라도 했지, 실질적으로는 기여한 것도 없었다. 그나마 의친왕이야 최소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던 행적은 있지만 나머지 후손들은 뭘 했는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왕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선대에 이미 왕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으며[158] 스스로도 왕정을 극도로 혐오하며[159] 초대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 논할 가치조차 없다.[160]

오히려 누구보다 앞장서서 황실을 철저하게 배제한 인물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고, 정작 동정한 인물이 왕족 출신은커녕 흙수저 빈농의 아들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이런 과거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인데, 무정부 상태로 망할 때를 대비하겠다고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건 그저 웃기는 소리다. 오히려 국가가 위기를 극복한 뒤 "나라가 망한 것도 못 막은 황실은 꺼져라"라고 외치는 공화주의와 "황실 복원"을 외치는 복벽의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는 그래도 당장 나라가 망해도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로 가지고 좀 다툼이 벌어질 지는 몰라도 그래도 군주제를 하느냐 공화제로 하느냐로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21세기에 의원내각제 왕국인 벨기에가 극심한 남북 대립[161]으로 약 500여일간 반쯤 무정부 상태(정확히는 무내각)였을 시기에, 벨기에 국왕은 아무것도 못하고 이를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각 정당들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벨기에는 지방의 권한이 강해서 그나마 나라가 돌아가긴 했다는 점도 있지만 만일 아예 정국이 불안정했다면 비록 정부만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의 불만이 왕실을 향할 수도 있다. 벨기에 왕실 입장에서는 겨우 살아남은 셈이다. 1977년쯤엔 옆 나라 네덜란드가 그랬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이 주장은 소말리아급 무정부 상태가 벌어질 시 정부는 망하고 황실은 멀쩡할 거라는 전제에서나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로 황실이 국민들의 중심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면 정부가 망하면 황실이 그 구심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망한다고 해도 정부를 다시 교체하면 해결되는데 굳이 황실을 복원할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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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주장

8.1. 구 황실 재산 복구

변형으로 " 국유화한 황실의 재산을 다시 돌려주자"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법률로 황실의 모든 재산을 일괄 국가가 소유하고 있어 돌려줄 이유도, 명분도 없다.

여기에 황실 재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탕금의 경우, 고종 시기에 쌓아놓은 출처를 보면 대개 악화 제조, 이권 넘겨주고 다시 받기 등 정당하고 떳떳하지 못한 방식[162]으로 벌어들였다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8.2. 새로운 왕조를 선정

구 '대한제국' 중심의 황실 복원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찾아 군주로 옹립하자는 주장. 대한제국 이씨 황족 후손이 아니라 그 이전 왕조의 후손[163]을 찾는다든가, 여러 왕조의 피가 섞인 인물[164], 아니면 이와도 무관하게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새로운 인물을 옹립하는 것이다.[165] 혹은 다른 나라 왕가에서 계승 순위에서 밀리는 인물[166] 등을 수입해서 군주로 추대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유럽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167]

물론 이 경우에도 대한제국 황실 복원 논의와 마찬가지로 무수한 제도적・사회적 제한과 비용을 극복해야 함과 더불어, 여기에 더해 "대체 누구를 옹립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까지 해야 하므로 어찌 보면 더 골치아픈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군주를 선정하는데 성공하더라도 "새로운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정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까지 해야 한다.[168] 그래서인지 현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단체가 있지는 않다.

고려 왕씨는 조선의 왕씨 몰살로 족보가 불분명한 상태고, 신라 왕가도 김씨와 박씨가 따로 존재하는데다 고구려와 백제 등의 왕가들은 단절되었거나 족보가 불분명하다. 또한 통일신라 고려는 통일국가였기에 그렇다 쳐도[169], 그 외 나라들은 통일국가도 아니었고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정체성이 강해 다른 지역 주민들은 거부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며, 이전 왕조들과 무관하게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새로운 인물을 옹립하는 경우 남북분단 상태에서 옹립되었기 때문에 남북을 아우르는 정통성에서 대한제국 황실 복원보다 밀리므로 북한에서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170]

또한 유럽에서도 타국에서 왕가를 수입하는 일이 잦았던 탓에,[171] 입헌군주제 개헌만 가능하다면 이론 상으로는 타국 군주를 수입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닌데, 문제는 국민 정서가 군주정에 호의적이라고 가정해도 타국 군주를 수입하는 것까지 호응할 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문화, 정서 등이 판이하게 다른 동양과 서양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 부터가 문제인게, 유럽 국가들은 과거부터 비록 싸울 땐 서로 싸우더라도 사이좋게 지낼 때는 교류와 서로 간의 혼인도 전반적으로 흔했으니 서로의 왕가끼리는 서로 혼인하는 것도 문제가 없었지만, 동양은 서로 혼인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한국은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현재에도 "한국은 단일민족국가"라는 정서가 매우 강해, 당장 한국인과 유전적, 인종적으로 매우 가까운 중국인, 일본인과의 혼혈도 좋게 말하면 특이하게, 나쁘게 말하면 이상하게 보아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혼혈 자체가 매우 비상한 관심을 일으킬 마당에, 한국인 피가 한 방울도 안 흐르는 타국 왕족을 한국 군주로 추대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바라볼 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172]

그리고 굳이 한때 한반도 내에서 군림했던 구 왕가가 아닌, 현대의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한 명을 새 군주로 추대하자는 주장도 따지고 보면, 전술했듯이 "도대체 누구를 옹립해야 하는가"가 문제다. 애초에 범 국민적인 존경을 받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이를 누리는 것도 까딱하면 금방 깨지게 되어 있다. 진짜 문제는, 과연 해당 인물이 군주가 되겠냐는 제안을 수긍할 지가 관건. 물론 이런 인물들은 농담 혹은 진담으로 정계 입문 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끽해봤자 국회의원이 되거나, 장·차관으로 임명된 것이 전부고, 대권주자까지 오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게다가 한국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매우 상당해, 이런 인물들도 정치권에 뛰어드는 걸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173] 설상 뛰어들더라도 한 순간에 비호감도가 치솟는 것은 뻔하다. 즉, 아무리 인기 높고 존경 받는 인물이라도 정계에 입문하는 순간 이미지가 크게 깎을 건 감수해야 할 지경인데, 범 국민적인 존경을 필요로 하는 왕/대통령 같은 국가수반의 자리를 쉽게 노리려 할 지가 의문이다. 설상 왕이 되고 싶다고 해도, 일단 대통령부터 된 다음에 왕이 되든 말든 할 것이다.[174]

9. 대체 방안

9.1. 초소형국민체

시랜드 공국이나 헛리버 공국의 예처럼 오래 된 법률의 허점을 파고들어 국가를 선포하는 것은 봉건 전통이 남아있던 서양에서는 가능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진지하게 초소형국민체를 선포하는 것이 불법이며, 초소형국민체를 인정하기 위해 개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이를 만들자면 철저히 남이섬 같은 관광지가 되어야 한다. 문화 행사・관광산업 목적으로 초소형국민체를 비슷하게나마 구현한 사례가 나미나라 공화국이다.

관광목적으로 만들어진 남이섬을 따라 주식회사 대한제국(업종명: 유원지 및 테마파크 운영업[175])으로 만든다면, 복원에 있어서의 조건만 보면 상술한 제한이 상당부분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세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야 할 것이다.

몆가지 정리를 하자면

이방안으로 간다고 한다면 황실 개인에게 황족으로서의 삶 강요받을 일도 테마파크 운영이니까 결국엔 황실 복원의 정당성 결여문제도 해소되며 황족의 정통성 결여 문제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을수도 있으며 민주주의 및 표현·언론 자유의 저하 우려도 따질 필요가 없어지는등 많은부분이 해소된다.

9.1.1. 반론

당연하게도 이 방안은 굳이 황실직계혈통을 세울 필요도 없어져서 그냥 아무나 왕 노릇을 할 가능성도 있다.이방안으로 이문서에 작성된 제한이 상당부분이 완화될수밖에 없는 건 과거에는 어떤지 몰라도 현대에 와서 초소형 국민체는 대부분이 컨셉이기 때문이다.[176] 거기다가 이런식으로 운영해도 얼마나 갈지도 미지수이다.

세보르가 공국이 이런 식으로 전통을 유지하고 있긴 하다만 이쪽 또한 진지하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초소형국민체는 해체된 곳들이 많고 이런식으로 운영되는 관광지 또한 해체된 곳이 많다.

결국 이 방안은 좋게 말해야 문화재 테마파크고 나쁘게 말하면 황실을 인간 동물원 만드는 것 밖에 안된다. 다시말해 이 방안도 현실적으로는 무리다.

이방안으로 가장 비슷한 쪽이 이석의 황실 복원 주장인데 이석 또한 비판을 많이 받고있다.[177]

9.2. 비주권군주제로 복원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왈리스 푸투나나, 뉴질랜드에서 마오리 왕을 옹립한 사례처럼 주권이 없는 황실로 재건하는 경우. 즉 대한민국 정부 관리 하에 황실의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복원하는 시나리오다. 위의 초소형국민체와 달리 정부에서 인정한 것이니 황실의 체면은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다. 임시정부 시절 검토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구 황실이 독립운동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전주 이씨 가문임에도 황실을 혐오했던 이승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78]

9.2.1. 반론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는 그대로 유지되겠지만 현행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므로 개헌부터 해야 한다. 법률인 특별법은 제 11조 2항에 위헌이므로 위헌법률심사에서 무효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러한 사실을 국회의원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의안이 제출조차 되기 어렵다. 오히려 상대 진영으로부터 법에 무지하여 위헌의 소지가 있는 법률안을 상정했다고 공격할 빌미를 만들어주는 꼴이 된다. 헌법을 개정하더라도 3분의 2의 동의와 국민 투표라는 복잡한 과정이 있고, 이런 이슈가 등장하면 헌법학자와 정치학자 등 외부 패널까지 참석하여 많은 지적을 거치게 될 것이며, 특히 세금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국민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칠 것이다.

이미 전 국민들이 공화제에 익숙해져 군주제 문화가 소멸된지 70여 년이 넘어가고 그나마 남은 군주주의자들도 실질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아닌 그저 이상적으로만 주장한다.[179] 이제 영향력이 하나도 없는 구 황실을 갑자기 공화국 내의 법적인 지위로써 복원한다고 하면 과연 여론이 호의적일지 의문이며 오히려 세금 낭비[180]라고 대대적인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며, 필요 경비를 어디서 충당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공인이 아닌 공인의 입장이 되기에 대한민국 국민 정부의 엄청난 감시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체제에 그 어떤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반인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온 권리들도 크게 제한되는 "반쯤 국민" 신세를 지내야하며 정부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행동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는 비주권군주는 아니지만,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 영국 왕실에서 탈퇴해 민간인 신분으로 살겠다고 한 뒤 처음에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캐나다 정부 측에서는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가 캐나다에 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경호 비용은 부담하지 않겠다고 했다.[181] 그 후 해리 왕자 내외가 미국으로 이주하자, 트럼프 행정부와 해리 왕자 측이 경호 비용 부담을 놓고 대립하였고, 끝내 트럼프 행정부가 경호 비용을 부담하지 않겠다고 하자, 아버지 찰스 3세에게 경호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주권군주제를 하는데 있어서는 정책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논의와 의견 수렴이 뒷받침 되어야 하며 관련 용역을 통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시점 현저히 낮은 국민적인 지지나 정책적으로 추진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이러한 정책은 추진해야 할 타당성이 부족하다. 앞서 언급된 마오리 왕의 경우 마오리족들만의 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했고, 정부에서 예우를 갖추는 일부 동유럽의 군주들도 국민들의 지지여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 복고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국내 여론상 비주권군주제도 지지 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

9.3. 인간문화재 지정

이 쪽이 나열된 주장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대한제국 황제 후계자를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 사직제례 등과 같은 대한제국 황실 의례를 주관하는 기능 보유자로서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이다. 특히, 이와 같은 황실 의례에서 초헌관(初獻官)[182]의 역할은 황제가 맡는데, 그 역할을 계승하는 기능 보유자로서 인간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지 않냐는 주장이다. 예를들어, 판소리에서 '소리꾼'이나 '고수'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는데, 종묘제례에서의 초헌관은 안 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실질적인 황실의 복원이라기 보다는 황제 역할극을 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대한제국 황실 의례를 황실의 후손들 중심으로 치르고 있으며, 이러한 의례에서 이구씨가 초헌관을 맡았었고, 현재는 이원씨가 초헌관을 맡고 있다.[183]

위 주장은 명목상의 대한제국 황제 후계자인 이원[184] 국가유산청에 한 제안[185]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이원의 전문 분야가 광고/방송이며, 궁중문화축전을 기획하기도 하는 등 황실 복원이 아닌 황실의 문화를 전통이자 문화콘텐츠의 일종으로 활용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쪽이 상기했던 것중에서 진행도 가장 원활한 편이다.

10. 결론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이 딱히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건 왕정제를 통해서 얻을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본 문서의 부정적인 의견들은 대한제국 고유의 사정 몇 가지(일제 강점기 때의 황족들의 행보 등)와 여러 법률상의 문제들을 제외하면, 공통적으로 일반적인 왕실 폐지론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러한 이론에 따라 실질적으로 왕조가 폐지된 사례들도 많다.

덧붙여 왕정복고명백한 위헌이며 법적인 문제들이 많고,사회적으로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 왕정제를 유지하는 유럽 일부 나라, 그 중에서도 왕정제의 대명사인 영국과 태국에서도 여러 문제점 때문에 왕정제에 대한 회의를 갖는 시민들이 많이 있다. 또한 왕정복고를 한 나라 중에서 나름 성공한 스페인도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그 비견 대상이 동세대의 독재자들인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일 정도로 엄청난 폭정과 개판으로 점철되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왕정제로 회귀했을 뿐이다. 또한 왕정제를 유지한 나라들도 대체재 정도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제 체제는 상당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수십년째 유지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황실의 기능은 그 어디에서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군주제가 부활할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 그나마 현실적인 시나리오라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사회와 문명이 한 번 붕괴하고 전근대 수준으로 후퇴했다가 문명이 재건되면서 입헌군주제로 격변하는 정도인데, 이렇게 된다고 해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지 굳이 황실을 복원하려고 하지는 않을것이며 복원된다쳐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에서 떠오른 군벌이나 지도자가 새로운 왕실이 될 것이며 굳이 대한제국 황실 출신의 후손을 찾아내서 즉위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단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는 그 수가 200만이 넘을 정도로 흔하기에 문명 재건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군주로 등극하면서 정통성 강화를 위해 대한제국 황실과의 연관성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황실 복원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의 일원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엄청난 노력을 쏟고 성과를 거두는 등 공화주의자들을 압도할 정도로 지지를 받아 해방 이후 입헌군주제로 설립되었거나 아니면 스페인처럼 특이한 상황에서 왕정복고가 되는 식이라면 왕정복고가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이런 역사와는 거리가 멀게 수십년을 발전해온 민주주의 체제를 뒤집고 갑자기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절대다수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왕정복고 이론 자체가 거의 역사 학자나 매니아층을 제외하면 인지도 자체가 전무하며 공화주의 영향으로 왕실 그 자체에 대한 강한 반감 등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186] 그나마 황실복고라는 소재는 "한국이 입헌군주제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정도의 진지하지 않은 상상과 가상역사 매체 제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각색도 최소한 "일제시대 때 조선 황실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혹은 "일제강점기 없이 이어져 왔다"라고 설정하는게 대부분이다.

11. 북한의 입장

북한은 기본적으로 김일성 정권 이전의 한국 왕조와 그 사회상을 극도로 비하하며 대한제국 역사를 거의 없는 걸로 취급하고 그 빈자리를 김일성 우상화와 날조로 채워놓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제국 황실 복원과 더더욱 거리가 멀다.

12. 외국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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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은 폐지되었지만 왕가의 후예로써 기존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을 왕위 요구자라고 칭한다. 대부분 특별한 법적인 지위가 없는 명목상의 신분이지만 그중에는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어느 정도 지위를 보장받거나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왕실 복원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곳이 세르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몬테네그로 페트로비치-녜고시 왕가, 루마니아 호엔졸레른-지크마링엔 왕가 정도다.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세자인 알렉산다르 2세 카라조르제비치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 돌아온 이후 세르비아의 학살자이자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반대하면서 자선활동 등 사회활동을 열심한 대가로 2001년 세르비아 시민권을 받았다.

2011년 세르비아 신문사의 조사의 의하면 64%, 과반수가 넘는 세르비아인들이 왕실 복원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조지아는 대통령들이 잇달아 삽질을 하는 통에 시민들이 바그라티온 왕조의 부활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은 왕정에 대한 지지도가 높으며, 카다피 사후 내전에 지친 리비아도 다시 왕정 복고가 논의되고 있다.

13. 황실복원 혹은 황실이 등장하는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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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러니하게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통해 정통 조선을 자처하는 김씨왕조는 조선왕조를 〈리조李朝〉라고 폄하할 정도로 나쁘게 본다. 김일성 자서전인 《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조선왕조에 대한 폄하가 수도 없이 등장할 정도다. [2] 애초에 김일성 본인부터가 극성 조선왕실 혐오자로,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할 때 북한이 〈리조〉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대놓고 강조할 정도로 조선왕조 색 빼기에 혈안이었다. [3] 왕정/황정으로 복고한 국가들은 폐위된 황가/왕가가 국가 재건을 위한 리더십을 보여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캄보디아의 사례처럼 킬링필드라는 대량학살이 일어나고 후에 베트남이 들어온 뒤 나아진 후 국민들이 원하던 왕실을 다시 권좌에 올려놓은 사례도 있다. 이는 나라가 공화제로 하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에 차라리 그런 위험이 적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거라 보면 된다. 한마디로 도무지 개선이 안 될 것 같거나 공화제 때 일어난 일들이 매우 심각할 때만 가끔 된 거다. [4] 허경영 제15대 대통령 선거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주장한 적은 있으며 20대 대선에서는 아예 자기가 황제가 되겠다고 했다. # 허나 그는 대학이나 국회의원을 폐지한다든지, 경기도를 서울시에 완전히 합병시킨다든지, 조선왕조 자체를 부활시켜 소위 도덕 혁명을 한다든지 하는 늘 하는 헛소리와 함께 주장했기 때문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5] 다만 과반수, 심지어 대부분이나 거의 모든 국민이 입헌군주제나 심지어는 전제군주제 개헌을 지지하게 된 상황에서 절차상 문제가 없는 개헌을 막거나 무효로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국민 저항권을 사용하더라도 이미 민주공화국을 지지하는 국민이 소수가 된 이상 성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과반수의 국민이 입헌군주제 전제군주제든 군주제 개헌을 지지하게 된다는 것부터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6] 사실 이건 뒷북이기도 한데, 애초에 80년대부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국비 지원 아래 종묘제례를 주관하고 있으며, 이구의 장례식도 조선 왕조식 장례를 이어나가는 무형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지 대한민국 정부가 구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상 전주 이씨 종가가 종묘제례를 계승하게 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7] 조선에 대한 오해나 과도한 사대주의의 영향도 있긴 하나 일단 국가 쇠퇴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론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8] 비록 논의된 적이 없으나 당연히 모두가 입헌군주제로 생각할 것이고 표현은 자유라고 하지만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전제군주제를 하자는 의견은 이상함을 떠나 위험한 사상으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대통령이 독재를 하기를 바라는 게 더 현실적일 정도... 일부 극단적 보수 진영도 이승만, 박정희 등 독재일지라도 대통령제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독재를 선호하지, 북한 마냥 세습되는 절대권력자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9] 그 이후로도 1920년대 후반까지 일부 복벽파 인사들의 활동이 포착되곤 하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공화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10] 복벽주의 계통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사가 공화파 인사에게 정치적 양보를 얻은 건, 임시정부 임시헌장에 나온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우대 정도였다. 그들은 이에 만족하고 공화주의를 대세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황실 우대 조항을 넣는 데 젊은 독립운동가의 반발이 심했다. [11]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12] 의외로 황실복원이 되지 않은 데 있어서 상당히 큰 이유다. 다른 나라 사례를 들자면, 하미드 카르자이는 2001년 탈레반 축출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집권자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인물이었는데 미국이 그를 대통령으로 내세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뜬금없이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됐다. 미국이 조선황실을 독립 한국의 최고지도자로 내세우려 했다면 조선황실은 일제강점기 내내 한참 낮아진 정치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다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었다. [13] 대한제국기 존재했던 반외세 성격의 자유주의 성향 단체인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정을 주장했다가 고종황제에 의해 해체까지 가버린 적이 있었다. 해방 이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대통령중심제 민주집중제 의원내각제든 공화정을 바탕으로 한 정치체제를 꾸리려 했지, 입헌군주제를 하려 하진 않았다. [14] 1990년대 초기에 활동을 시작했으며, 황사손 이원을 적통으로 본다. [15] 이석이 세운 단체. 이쪽은 이석 자신을 새 황제로 보고 있는 듯한 의혹을 지울 수 없는 활동을 하며 역시 1990년대 이전에 활동을 시작했다. [16] 의친왕의 친손이지만 서열을 따져 영친왕의 아들인 황태손 이구의 사후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은 케이스다. 대한민국 법은 사후양자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양자로서의 어떠한 법적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원이 황사손의 책무를 계승한다는 것이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최후결정이므로 정부는 이를 존중하여 각종 궁궐제례의 수장역을 이원에게 일임한다. 자세한 것은 이원 문서로. [17] 다만 이원도 본인의 재단 홈페이지에 자신을 황태자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황태자비와 황자로 소개해 놓은 부분이 있다. 물론 이는 그저 작위 요구자 정도의 수준이고 직접 정치적으로 주장하진 않으니 의미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작위 요구자란 관용적 표현으로 본인이 작위를 실제로 요구하지 않아도 구 왕가의 대표자로서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18] 참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했고,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 재미한인, 재일동포들 역시 산업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 다 필요없이 일제강점기 치하 독립투사들이 만주나 중국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했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3대 의사들인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벌인 장소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당시 러시아령) 하얼빈과 중국(당시 만주국) 상하이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재미교포들이 독립단체에 약간의 기부라도 행했던걸 고려하면 이들의 국내에 못들어와 기여를 못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20] 본문에서 지적하듯 《선구》는 우파 성향 잡지였고 우파 관련 인물 지지도가 실제보다 훨씬 높게 잡혔을 거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근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승만은 조선 왕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걸 알 수있다. [21] 당장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책봉된 후계자였지만) 프랑코가 죽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민주화 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프랑코 체제로 역행하려는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막아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한 스페인 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있다. 스페인 민주화의 공헌 덕에 프랑코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는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스페인 내 공산주의 세력들마저 이 사건 이후에는 왕정을 지지했고, 2007년에는 여론조사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민주화에 공헌한 이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감안하면 전주 이씨도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을 경우 그나마 왕정복고에 대한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었을 것이다. [22] 당장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에서 후대에게 선대의 덕을 너무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23] 나라 망할 때 왕가였으니 왕실 후손 취급 받는 거지, 혈통 문제로 넘어가면, 고종과 그 자손도 200여년간 독점해온 효종 계열의 남성 후손이 거의 남지 않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계열에서 영입(?)해와서 접붙이기 방계 황족이다. 순종이 황제에 즉위한 시점 이후에는 순종 직계만 빼고는 모든 전주 이씨가 다 방계 황족이 되는 셈인데 순종은 슬하에 자식이 없이 사망했다. 즉, 현재 구 대한제국의 직계 황족은 한 명도 없다. [24] 현재 거의 일뽕 뉴라이트로 비판받을 정도의 과장된 조선 비판론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을 매우 극적으로 긍정평가하여 국뽕으로 불릴 정도의 민족주의 역사 매니아들도 딱히 왕실복원에 관심이 있지는 않다. [25] 개정하거나 폐지. [26] 위헌적인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개폐금지 불가 조항에도 불구하고 유신 개헌과 제5공화국 헌법 당시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이 개정된 적이 있다. [27] 조작질을 위해 고의적으로 투표일시/위치를 널리 공표하지 않거나, 어디 구석탱이에 투표소(함)를 은닉/빼돌리기하는 경우 등. 실제로 1950~1960년대의 경우, 다짜고짜 투표장의 도란스를 내려버린 실사례가 있었던지라. [28]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후략)"- 대한민국 헌법 서문 中 [29] 이해경은 " 공주(적녀)와 옹주(서녀)는 어디까지나 왕(제후)의 딸을 가리키는 호칭인데, 나에게 이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거북하다"는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30] Paper Nation,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국가. 페이퍼 컴퍼니의 국가 버전이다. [31] 각 국 대사관은 그 나라에 빌려 준 땅이고, 해당 국가 국내 영토와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32]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 권한은 없는데 가문의 체면과 남의 이목 때문에 성실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신분상의 구속이 따라오는 역차별이 생긴다. 만약 이 신분 아닌 신분에 불만을 품은 해당 왕가 인물이 헌법소원을 걸어버리면 왕가 특별법은 바로 폐지된다. [33] 1930년대에 명문화된 사후 양자 조항은 의외로 늦은 1991년에야 민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개정 이전에 얻은 양자 자격은 유지된다. [34] 민법은 원래 친족관계와 같은 내밀한 영역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다.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는 법언도 있다. 단, 그 영역을 벗어난 법률관계의 영역( 입양이나 상속 등)에는 예외이다. [35] 천주교와 정교회에게 이들은 각각 교황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동급의 자리를 참칭하는 이들이고 개신교는 아예 이런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만인사제설). [36] 특히 이해원 옹주가 찍은 사진에서 나온 의자가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종류라서 오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37] 원래 조선에서는 왕족의 일부 계보가 끊기면 아들이 많은 왕족의 아들 중 하나를 대가 끊어진 왕족의 사후 양자로 삼는 형태로 계보를 이어가게 했다. 남연군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가 된 것도 이런 예 중 하나.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사후 입양을 인정하지 않는다. [38]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여왕을 옹립한 신라조차 '남성 계승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고, 현대 유럽의 왕실을 봐도 여성 군주는 그렇게 많지 않다. [39] 하지만 이승만과 조선왕가의 관계는 태종 이방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라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가 인물들이랑은 최소 50촌 이상이었다. 조선 당시 기준이었으면 이승만은 어디서 왕족 소리는 꺼내지도 못할 정도로 먼 친척이다. [40] 전제군주정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이건 더 현실성이 없다. [41] 말이 좋아 공화국이었지, 실상은 크롬웰의 1인 독재 체제였다. 게다가 권력세습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올리버 크롬웰이 민중들에게 엄격한 법안으로 자유를 통제하여서 왕실을 그리워하게 된 잉글랜드 국민들의 영향도 무시 할 수 없었다. [42]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시 섭정을 자처했으므로 스페인은 왕 없는 군주국이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당시 계승자의 지위에 있었다. 블랑코가 살아 있었다면 블랑코가 정권을 이어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자차를 타고 우주로 떠나버린지라 프랑코 입장에서도 유일한 선택지긴 했다 [43] 다만 라마 9세는 군부에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비판을 받고 있다. [44] 다만 레이와 천황 본인과 부인 마사코 황후, 딸 아이코 공주 등 그의 일가족들은 꽤나 모범적인 사람이다. 문제는 그 동생 후미히토로 젊을 때부터 형보다 못한 망나니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당장 마코 공주도 망나니 이미지가 있는 후미히토의 친딸이다. 그러나 친딸 마코하고 아버지인 후미히토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고 유명한데 그 이유로는 후미히토의 야심수단 중 하나인 히사히토 친왕을 향한 부모의 편애와 방관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사이가 매우 안좋아 어머니인 키코 비와의 대화도 카코 공주를 통해 할 정도다. [45] 그리스는 경제, 역사, 정치적인 이유로 발칸 반도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남유럽 국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46] 그나마 이 곳의 경우엔 차라리 한국보다 왕실 복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실제로 불가리아에서는 전 국왕이 총리가 되기도 했고 루마니아의 경우엔 미하이 1세가 귀국하자 엄청난 환영을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시 국외로 추방하는 웃픈 사건도 있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는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 이러니 이들은 논의도 안 되고 있고 지지율도 없으며 정치경험도 없는 대한제국 황실보다는 양호하다. [47] 다만 이쪽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가 된 이란보다 팔라비 2세 전 국왕이 지배하던 팔라비 왕조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현 이란의 폭정이 심해도 팔라비 2세의 폭정과 실정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극소수만 지지하는 정도다. [48] 아예 왕정복고를 포기하는 대가로 팔라비 가문의 귀국이나 혹은 일시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이란 정부에게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팔라비 가문 사람들이 모국으로 귀국하여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 거기다가 실제로도 이란 혁명 직후 국외로 망명/도주한 팔라비 왕가에게 선고됐던 궐석재판의 사형판결이 이란 국내에서 존치되고 있다. [49] 이 세 나라에서는 제대로 국가조차 통제 못하고 테러, 내전으로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생지옥 같은 상황이라, 무능한 공화정이 계속 굴러갈 바엔 차라리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예전 왕국 시절로 왕정복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이라크는 2010년대 이후 최근 정국 사정이 비교적 호전되면서 자국내에서의 왕정복고론이 이전보다는 약해진 상태다. [50] 내가 히틀러라니!의 경우, 히틀러의 몸에 빙의한 주인공 덕분에 나치 독일의 도움으로 독립한 한국의 경우에 이우가 '국왕'은 아니지만 폭압정치를 일삼는 독재자로 그려지고, 그 가문이 국가원수직을 세습하고 있다는 설정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판적으로, 나쁜 경우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것마저도 명목상 체제는 공화정이다. [51] 엄밀히 말해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군주제 국가였으므로, 광복 후 군주제를 채택하는 것은 원래 채택했던 국가 체제를 복원하는 것이지 공화국이 갑자기 군주를 두는 것과는 다르다. 비교하자면 노르웨이 왕국은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에게 점령 당해 왕실이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왕실이 본국으로 귀환해 현재까지 입헌군주국으로 유지된 것과 같다. [52] 노비공주X주인님의 경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애국심결핍에 신물난 국민들이 왕정복고를 주장하여 유일한 왕족인 이수공주의 남편을 국왕으로 세워 입헌군주정이 세워진다 설정인데 터무니없는 내용이라며 비판하는 댓글이 베스트를 차지했다. [53] 당장 스페인 왕국은 2019~2020년에 현 국왕과 왕실의 큰 비리가 걸려서, 공화파가 "이럴거면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제로 바꾸자!"고 말하며 스페인 제3공화국을 만들자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54] 대표적으로 임오군란이나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조선 땅에서 벌인 사례 같은 게 있다. [55] 게다가 여흥 민씨 집안의 세도정치 안동 김씨의 실정을 훨씬 능가하는 패악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그나마 실력이 없으면 자리를 주지라도 않았지, 이 작자들은 능력과는 무관하게 왕비의 친정이라는 이유로 한 자리 주야장천 차지하고 있었다. 당장 임오군란의 원흉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명성황후의 오빠 민겸호다. 게다가 고종은 민겸호를 처벌하지도 않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 제공을 했다. [56]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0206010_001 [57]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1308009_001 [58]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1712028_003 [59]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110013_001 [60]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2111009_001 [61]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sa_001r_0030_0080_0150 [62]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905006_002 [63]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4101030_001 [64] 을미의병 명성황후의 시해가 아닌 단발령이 직접적 계기로 작용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65] 다만 임시정부 활동초기에 복벽주의 세력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임시헌장에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규정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복벽주의 세력이 빠르게 소멸한 이유도 대부분의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죽거나 저항력을 잃어버린 당시 상황과, 러시아 혁명과 중국의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공화정에 대한 열망이 커졌기 때문이지 3.1 운동이 끝나자마자 황실 이미지가 급락해서가 아니다. [66] 대표적으로 이광수. 시간이 지나며 문학계에서 사실상 복권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광수라는 개인의 일생을 언급할 땐 친일 행적은 반드시 언급할 정도로 취급은 좋지 않다. [67] 이는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군주국 대 군주국의 관점에서는 적국에게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한 사례는 너무 많다. 동아시아에서 요나라는 금나라에게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부를 정도였으나, 요나라 황족은 금나라 황족으로 대우해 줬다. 황족 정도 되면 최소한의 대우는 하기 마련이라는 거다. 물론 마지막까지 저항하면 일짤 없었다. 예컨대 명나라 황족. 유럽에서 전쟁이나 반란으로 인한 상황이 아니면 왕족이나 황족을 홀대하는 일은 절대 없다. [68] 물론 그렇게 산 망국의 황족이 다시 일어난 경우도 없었고 또, 백성들이 그런 황족을 호의의 눈길로 처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황족이 잘 먹고 잘 산 경우는 서로 피가 섞인 유럽이거나 아니면 같은 한족 국가가 왕조만 바뀐 경우였고 이 때도 욕은 안 먹었지만 대신 왕조가 되살아나는 일도 없었다. [69] 참고로 이렇게 군복무를 하는 왕가 일원들은 꽤 험하게 굴려지는데, 불만이라도 제기했다간 징징거린다는 인상으로 비춰지다 보니 정말 힘들어서 죽겠는 상황 아니면 크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고. [70] 앤드루 왕자는 영국 해군의 SH-3 헬리콥터를 조종했고 해리 왕자는 영국 육군의 AH-64 헬리콥터를 조종했다. [71] 특히 해리 왕자는 "실전에 배치되지 않는다면 훈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프가니스탄 참전 의사를 명백하게 밝힌 적이 있고 # 참전 중 탈레반을 25명 사살했다고 한다. # [72] 이 사건을 가지고 1920년 5월 8일자 독립신문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배신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영친왕은 무부무군의 금수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영친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고 500년동안 죄악을 저지른 조선 왕조는 앞으로 영원히 단죄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노를 쏟아냈다. # [73] 이런 한심한 꼴은 유림들의 저항의지를 감소시키거나 황실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가 1919년 고종의 사망 때 유림들간에 벌어진 복제 논쟁인데 논쟁에서 유림들은 고종에 대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복제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고종을 황제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였다. 반대측들은 망국의 군주면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죽어야 하는데 죽지않고 살아서 호사를 누렸다. 그런 군주를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하냐 우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유림이지 언제 일본 이태왕의 유림이었나? 등의 논리로 반대했다가 고종 독살설이 돌자 '고종 독살설=고종은 일본에 반대했다=고종은 반일'라는 결과가 도출되어 유림들은 고종을 위해 절하기로 합의했다. 유림은 그래도 구시대에 대한 수호 의지가 강력하고 고종은 한때 자신들의 군주였음에도 독살설이 돌고서야 고종을 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할 정도로 인식이 나빴으니 황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74] 대표적으로 여흥 민씨 집안. 단 이쪽은 친일파도 많았지만 독립운동가도 많았다는 게 특징. 그나마 이것도 민씨 집안만 그랬고, 하다못해 김가진처럼 처음에는 친일파였을지 몰라도(그것도 그냥 친일파가 아닌 조선귀족이었다.) 나중에는 독립운동가로 전향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면... [75] 2010년 12월에 황실 친족 친일매국 이해승의 재산을 되찾겠다는 후손의 소송이 승소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76] 2006년 9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우의 조부 이재면과 부친 이준용의 행적을 친일행위로 규정해 발표하자, 이우의 아들 이청은 2006년 11월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 등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2007년 1월 18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헌법소원은 2009년 10월 5일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되었다. 하지만 이는 억울할만 한 게, 이우의 친부는 독립운동가였던 의친왕이었으며, 이우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부정적인 입장의 인물이었다. 다른 황실 일원들과 비교하면 목소리 낼 자격은 있던 셈. [77] 웃긴 게,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구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의 기록을 근거로 들이내밀었다는 사실이다. # [78] 의친왕이 상하이 임시 정부 망명에 실패하고 나서 8년 후인 1927년에 영친왕이 유럽 여행을 다니고 있을 때 어떤 독립운동가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전하께서 유럽 여행을 다니시며 각국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시는 것은 칭찬드려야겠지만 유럽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전하가 신문 기자들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라 조선의 황태자라고 시원하게 말해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하를 일제의 감시에서 빼내어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셔드릴 계획까지 있는데 전하께서 일본 군인을 앞에 세우고 다니며 유럽 여행만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사옵니까. 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출처:마지막 황태자, 송우혜, 푸른역사 물론 의친왕 같은 사례를 겪은 일본 입장에선 영친왕이 독립운동의 독자라도 입에 담았다간 게거품을 물테니 소신있게 나서긴 힘들 판이긴 했다. [79] 반대로 이런 셀라시에에게 깜둥이 드립치며 모욕했던 이탈리아 대표는 현장에서 루마니아 대사에게 야만인 소리를 들으며 스위스 경찰에게는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갔다. 물론 다음날 석방되기는 했지만... [80] 이미 복벽주의 독립운동가는 1910년대 이후 전멸에 가깝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이들이 할 수 있던건 독립 이후 황실에 대한 특별대우를 보장해 줄 것 뿐이었지 황실복원은 아니었다. [81] 만일 김구나 당시 정치적 스탠스를 고려해도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김규식과 같은 인물이 대통령 중심제 하의 대통령이나 의원내각제 하의 국무총리가 되었어도 옛 황실 일족에 대한 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떠받들어야 할 상전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돈을 받고 호의호식한 자들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의 경우도 그렇지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인물들은 중국 대륙에서 고생이라는 고생을 하고, 김규식처럼 교수라는 부업까지 해도 녹록치 않았다. 하와이 북미에 있던 한인들도 허드렛일을 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중앙아시아 러시아 고려인들은 제노사이드의 피해까지 입게 되었다. [82] 흔히 의친왕이 망명시도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억류 이전까지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단체와, 신한혁명당, 군무도독부 같은 독립운동 단체와 활발히 교류하고,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오고 있었다. 또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으며, 3.1운동의 구상이 시작된 봉황각의 부지를 매입한것도 의친왕과 손병희였다. 당시 일제도 의친왕이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의친왕의 거처인 사동궁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이정도면 감시당하고 있는 왕공족의 입장에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편이었다. [83] 의친왕의 임시정부 망명을 주선한 대동단원들을 비롯한 복벽주의자들 역시 조선 왕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일부 불순분자들이 대통령이니 공화정치니 하면서 제멋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정부호소단체를 만들어 조선 왕실의 복벽만을 기다리는 민심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왕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 3⋅1운동 전후의 왕정복고운동을 중심으로,박현모 [84] 1920년대에 죽은 순종의 경우엔 애초부터 허수아비 황제에다가 모자란 사람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를 적통으로 생각하던 독립의군부를 제외하면 그를 구심점으로 삼는 사람은 전무했다. [85] 위에 나온 성태제의 아들 [86] 사실 폐위 안 되고 끝날 수 있었는데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되기 싫다며 폐위를 택했다. [87] 여기에는 베트민의 암살이라는 설이 돈다. [88] 여기에 넣지 않았지만 계정제 역시도 소극적으로나마 프랑스에 저항했다. [89] 건국 후 100년도 안 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데다가, 건국 시초부터 베트남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응우옌반후에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고, 창건자인 응우옌푹아인은 이걸 위해서 시암, 청나라, 프랑스 등에 손을 내밀기도 했으며, 특히 프랑스와 협력한 것이 뒷날 식민지배의 단초를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통치도 시원찮아서 베트남인들에게는 없는 사람 취급이다. [90] 정확히는 연호. 그가 재위했을 때 연호가 주이떤이고 이름은 푹호앙, 즉 응우옌푹호앙이다. [91] 이것조차도 고종의 의도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92] 사실 의친왕도 황제가 아닌 일개 친왕에 불과해서 영향력이 약했고, 일제에 저항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93] 게다가 이 대우도 사실은 더 좋아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 정부는 해외에 있던 황실 일가의 한국 귀국을 금지했고, 한국 내에 있던 황실 일원들에게는 재산까지 몰수했다. 황실 일가가 한국에 귀국할 수 있게 된 건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다. 이탈리아가 사보이아 왕가 일원을 쫓아내고 50년이나 지나서야 왕위 요구를 하지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귀국을 허가해준걸 감안하면 자비로운 처분. [94] 이 추모사와 조의금 10만원을 들고 토쿄 히비야 공원에 갔던 박제빈과 민병석 등 조문 사절단은 분노한 현지 일본인들의 협박에 시달리다 장례식 후 도망가듯이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95] 원래는 완친왕을 비롯해 더 많긴 했지만 앞의 세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단명하였다. [96]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이건의 자손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는다 쳐도 적임자가 없다. 이건의 아들이 3명인데, 장남 이충(李沖)은 친자가 아니라고 밝혀졌고 차남 이기(李沂)는 새어머니 마에다 요시코의 남동생으로 입적했다. 3남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는 아예 가문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서도 "나하고는 관계없다"며 선을 그은 상태다. [97] 다만 이우는 일본인과 결혼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고, 비록 친일파 집안이긴 해도 일단은 같은 한국 사람이었던지라 아버지 의친왕 역시 크게 반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우의 결혼을 위해 박영효도 직접 나서서 일제 당국을 달랬기에 당시 정황을 본다면 역설적으로 사돈 쪽이 친일파였기에 일본인과 안 맺어질 수 있었다. 오히려 이우도 처럼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면 정통성이 완전히 떨어져서 그냥 나가리가 되었을 것이다. [98] 조선의 왕위계승 법도에 따르면 당연히 적장자가 서열이 가장 높다. 인조 효종을 왕으로 세우는데 반대한 이들은 " 태자가 죽으면 태손이 있는 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즉, 적장자가 죽으면 차남이 아니라 그의 적장자인 적장손이 왕위를 잇는다. 이런 적장손이 없거나, 또는 그 정통성을 부정할 때에만 다른 방계 후손을 찾는 것이다. [99] 물론 현재의 정치인들과 타협하는 방안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권한을 사실상 총리에게 이양하여 황제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리가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현직 대통령을 총리로 하여 현 정권에 단지 황실만 끼얹은 형태로 바꾸며 기존의 국회도 인정해주면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하다. 이러면 국회의원들도 지위를 잃을 걱정을 덜어도 되고 대통령 대신 총리직을 노리면 된다. 문제는 개헌인데, 국회에서 어찌저찌 개헌안이 통과되더라도 국민투표에서 '민주적으로' 전체 투표자의 과반이 찬성해야 정식으로 개헌이 가능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없다. 정말로 구 황실과 여당, 제1 야당이 합심하여 왕정복고를 국회 의결까지 끌고 가도 국민투표에서 막혀버리면 더는 방법이 없다. [100] 물론 국군이 민주정 이후 쿠데타 시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연줄이 있는 정권과 야합한 결과다. 그나마도 모두 미수로 그치고 전국민에게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했는데 정권은 지지율이라도 있지 지지율도 없는 구황실과 야합해 쿠데타 시도하려고 해봤자 얻을 건 없다. [101] 마네킹처럼 살기가 힘들다고 멋대로 자유로운 연애를 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찰스 3세, 코무로 마코 등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102] 찰스 3세 다이애나 왕세자비 부부의 이혼 원인은 일반적으로 찰스의 불륜으로 알려져 있고 이게 가장 큰 것도 맞으나, 다이애나가 왕실에서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다이애나의 친정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는데도 말이다. [103] 영국 왕실처럼 쭉 존속된 경우에는 자체적인 재산이 많을 수 있고, 그래서 찰스 3세가 다소 부적절한 처신을 했어도 잘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의회가 돈 안 준다고 해도 왕실 재산만으로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으니까. 반면 대한제국 황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돈은 국가에서 거두는 세금에서 받아먹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내탕금을 돌려받자니, 그게 어떻게 쌓였는가 생각해 보면 차라리 말을 안 꺼내는 게 속 편하다. [104] 물론 이 경우는 일본 황실이 특수한 사례다. 아무리 입헌군주제 국가라도 사유 재산을 가질 권리조차 없고 사생활을 하나하나 허가받아야 하는 왕실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다만 왕실의 일원인 이상 태어날 무렵부터 언론에 노출되기 때문에 항상 대중의 눈치를 보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105] 정치인과 기업인은 병역여부, 학위, 탈세 등등이 심심찮게 논쟁거리가 되며, 연예인과 운동선수는 그나마 덜 따지긴 하지만, 유승준 같이 작정하고 털리면 아예 영구 입국금지까지 뜰 수도 있다. [106] 허나 연산군에 대해선 상관없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왕 자격을 잃고 쫓겨났으니, 오히려 중종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도 이상으로 까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광해군도 마찬가지. [107] 특히 이순신을 대하는 모습. 다른 모습들도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을 대하는 모습은 그 절정급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현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므로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108] 이건 지금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한 시각을 불경하게 여기든 불쾌해하든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서 그렇지. 무엇보다 저 부정적 묘사들이 학계에서 정설이 아니라던지 아니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사실 현행법상으로는 이 부정적 묘사가 사실과 다르면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가 가능하긴 하다. 물론 이 법 자체는 논란이 많긴 하지만. [109] 이건 단순한 억까일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언론자유가 보장된 나라 5개국을 뽑으라면,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군주국이다. [110] 다만 이건 명백히 배설의 후손들에게 명분이 있었다. 배설에 대한 묘사가 사실 그대로라면 고소할 명분이 적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조용히 탈영한 사람을 이순신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고 나오니 사실이 나와서 욕먹는 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이 나와서 욕먹을 수 있는 판이라 명분은 있다. [111] 미국은 단지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전재산 몰수, 실권 영구박탈을 조건으로 전범으로 몰지 않았을 뿐이고, 그런 미국에서도 쇼와 덴노가 죄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미국의 추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쇼와 덴노가 퇴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112] 이들은 현재 일본에서 보수방류로 불리며 강경파로 분류되고 있다. 그만큼 일본 제국의 기득권층이 막 나갔던 것을 뜻한다. [113] 물론 황실이 복원될 정도라면 황실에 대한 지지 세력도 많다는 의미인 만큼 "그래도 황실에게 너무 무려한 것 아니냐?" 수준의 목소리는 나올 수 있다. 애초에 대놓고 전국민적으로 욕먹는 왕실은 유지조차 간당간당할 것이다. [114] 아버지 라마 9세는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와 마찬가지로 태국 민주화에 큰 기여할 정도로 태국 현대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다. 하나 그도 군부와 손을 잡는 등 비판점이 없지는 않다. 당장에 2006년 쿠데타는 국왕의 승인을 받아 성공했다. [115] 실제로 국민들이 황실을 용서해줬다고 생각하는 것을, 복원해도 된다고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116] 물론 지역주의, 성적 지향 등에 대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고, 재벌을 비롯해서 경제적인 계층화가 상당히 고착화된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태생적 신분에 의한 차별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양반 따지고 노비 따지는 건 그냥 농담거리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117] 이 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움베르토 2세였는데, 즉위 후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로 인해 왕 노릇을 겨우 한 달밖에 못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5월의 왕'(Re di Maggio). [118] 정확히 이에 해당하는 사례가 일본 황실이다. 일왕가 인물들이 쫄쫄 굶고 헐벗고 살지는 않지만, 그 돈은 모두 국가 예산으로 '국가가 주는 돈'이기 때문이다. [119] 물론 이 때문에 옛 재산을 돌려주면 가능하기는 한데, 문제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규모로 주자니 여기에는 일제에 빌붙은 대가로 받은 돈이 있기에 당연히 안 된다. 그럼 고종 시절의 규모는 어떻냐면 여기에는 고종이 이런저런 편법으로 백성들에게 걷은 돈이 많아서 이것도 안 된다. 결국 철종 시기의 규모 정도가 되어야 그나마 논해볼만 한데 문제는 애초에 왕실 자산인 내탕금 비자금의 성격을 띄고 있어서 도대체 그 규모가 얼마인지 정확히 측정하기도 힘들다. 고종 초 경복궁 중건 당시 조대비가 10만 냥을 내놨다는 대목에서 '10만 냥 이상'이라는 것만 확실할 뿐이다. 더구나 현금성 재산이 이 정도이고, 각종 부동산은 그 규모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심지어 철종 때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부동산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심증이 가능하다. [120] 물론 "입헌군주국을 유지하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3세 대신 손자 웨일스 공 윌리엄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는 왕위계승의 법칙에 어긋난다. [121] 영국 국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도 사실상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왕실' 사람이기 때문에 개인 가정사는 물론이고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공개된다. 태생부터 왕족으로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어릴 때부터 이런 관심이 익숙하다고 쳐도, 외부인으로 살다가 왕실의 며느리가 된 다이애나는 자식들인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가 아니었으면 버티기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다이애나는 찰스 3세와 이혼 후 바하마로 사적인 휴가를 가는 와중에도 사진이 찍히는 등 왕실을 떠나 일반인이 된 후에도 파파라치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122] 재벌들도 사람인지라 입맛은 다양한게 당연하며 이재용은 젊은 시절에 친구 자취방에서 라면도 많이 끓여먹었다고 하며,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치킨부터 시켰고 최태원은 국밥, 치킨, 분식류 같은 서민음식도 잘 즐겨먹는다. 워렌 버핏 역시 매일 아침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도널드 트럼프 역시 치킨을 즐겨먹는다. [123] 배경이 전근대라 전제군주제이긴 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가 다른 나라의 왕자와 결혼시키려는 술탄에게 "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친구도 하나 없고요."라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대사가 나온다. [124] 에드워드 8세가 이거 하겠답시고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에게 넘겼다. 결혼 상대인 윌리스 심슨이 미국인인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생활이 괜찮았다면 왕위 포기까진 안 갔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이혼을 두 번이나 했고 에드워드 8세랑 사귈 때도 이미 유부녀였기 때문에 왕비가 되기에는 부적절했던 인물었이던 터라 결국 왕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125] 컴퓨터, 모바일 모두 해당한다. [126] 물론 왕족은 선거권도 없는 입헌군주국도 있다. [127]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죽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안을 없애야 자신에게 반강제로나마 충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128] 심지어 이들은 총살 직전에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억울하다고만 했다. [129] 본인이 금수저 재벌 집안 출신이고 대학교를 명문대를 졸업해서 군대를 장교로 제대해서 5급 공무원/대기업 직원/전문직(판사, 의사 등)에 종사하는 최상위권 남자라면 본인이 가만히 있어도 모든 여자들이 본인에게 마구 달라붙기 때문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자들과 얼마든지 연애를 할 수 있지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해당 최상위권 남자라고 해도 한 번 실수하면 존경은커녕 평생 비난 받는다. [130] 당장 엘리자베스 2세만 하더라도 왕족이라서 병으로 복무하지 못해 운전병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직 이름은 '보급수송장교', 계급은 대위였다. 왕족이 신참병으로 입대할 경우 고참병들의 구타 가혹행위가 훨씬 심해지므로 왕족은 기본적으로 병으로 입대하는 게 불가능하다. [131] 이걸 떠나서 실제로도 대한민국의 경우 모든 금수저 재벌 자녀들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이 정상이지만, 만약 재수없게 병역면제를 받지 못했을 경우 거의 99% 장교로 입대하는 경우가 2023년 기준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2020년대 이후 병의 대우가 상당히 좋아지고 장교&부사관의 대우가 상당히 나빠진 작금의 현실에서 1990년대 후반생 이후 금수저 남자들은 병으로도 입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지만, 여전히 장교로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금수저가 신참병으로 입대할 경우 고참병들의 구타 가혹행위가 훨씬 심해지므로 금수저 부모들은 병역면제 아니면 장교로 군대를 보내는 것이다. [132] 실제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후궁에 불과한 자신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왕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하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아버지 영조의 시해를 운운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실의 기강을 무너뜨리다 못해 국가전복에 해당하는 짓이다. 결국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를 왕위계승자로 둘 수 없었던 영조는 냉정하게 사도세자를 죽여버린다. [133] 서양에서는 그 당시 공화국이 몇 있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정이 당연했었다. [134] 황실을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면서 영국 왕실의 입헌군주제를 본받자고 하는 모순적인 발언이다. [135] 고종의 손자, 의친왕의 아들. 상기 '6.4. 구 조선・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정서적 반감' 문단의 영상에 나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136] 복벽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장하는 대통령과 공화제는 찬성하는 사람이 적지만 조선왕실의 부활은 찬성하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다. [137] 원래 조지 6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말더듬이 심하긴 했지만 이미지가 좋았다. 차남이라 본인 스스로 왕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여긴 탓에 결혼 이후에 궁을 나와서 아파트에서 살았던 적도 있고 공장지대도 자주 돌아다녀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친서민적인 행보를 보인 왕족이었다. 그런데 조지 5세가 사망한 이후 즉위한 형이 영국에서 논란이 많은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겠다고 퇴위하는 바람에 원하지 않았던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138] 그 스페인도 왕실의 지지가 떨어지면 왕실을 폐지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영국도 혁명으로 왕 모가지가 날라가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적도 있고. [139] 일본서기 신대(神代) 2편 [140] 이렇다 보니 아예 권위까지 바닥으로 떨어졌던 적도 있었는데 바로 센고쿠 시대가 그랬다. 나라 자체가 혼란의 연속이었고 다이묘 등 무장들의 힘이 강한 시대의 천황이었던 고나라 덴노는 일본 역사상 가장 빈곤했던 천황으로 알려져 있으며 얼마나 신세가 처량했냐면 동네 아이들한테도 무시당하고 돌까지 맞았다고 한다. [141] 물론 협력자&경쟁자가 많은 것도 한 몫은 했지만, 그럴 경우 영국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142] 심지어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 맞섰던 쩐 왕조와 후 레 왕조는 정작 말기에는 중국과 손잡고 왕조를 존속시키려 한 바 있다. [143] 애초에 왕가의 경우 존속하는 내내 1순위는 자기 대에서 나라 망하게 하지 않고 무사히 다음 대에 넘기는 것이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어지면 얼마든지 남의 나라와 손을 잡아서라도 유지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왕실들끼리 혼맥을 통해 얽혀있어서 자기 나라 국민보다는 타국 군주들과 더 동질감이 강했던 옛날 유럽은 더했다. 오죽하면 민족주의가 강했던 20세기 초만 해도 의외로 각국의 군주들은 1차대전을 원하지 않았다. 만일 1차대전이 벌어지면 누가 이기든 지는 쪽은 패망하게 되는데 그 말은 그 나라의 왕실도 끝장난다는 소리다. 때문에 한다리 혹은 두다리만 건너가도 그 나라 왕실과 혈연이 얽혀있었던 각국의 군주들은 1차대전은 내키지 않아했지만 개입 안 하면 자기가 국민들에게 엎어질 판이라 개입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은 경우는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처럼 극초반에 1차대전으로 커질 줄 모르고 개입한 경우다. [144] 만일 일부 왕실복고론자의 주장처럼 유교 국교로 지정된다면,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반발도 예상될 수 있다. 다만 천주교는 서기 1939년에 교황 비오 12세가 일부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는 전제 하에 제사를 허용한 바 있다. 천주교가 이전에 조선왕조가 한 박해를 다시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왕실복고를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다만 천주교 측에서 왕실복고에 어떤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은 바는 아직 없다. [145] 현존하는 군주제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국교 또는 그에 준하는 정도의 지배적인 종교가 있고, 국왕은 그 종교의 신자일 것으로 정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속국가인 일본에서조차 천황이 국비를 들여 신토 의식을 거행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반발은 있지만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천황의 임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동안 국왕이 특정 종교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전통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지, 어느날 갑자기 법으로 정한다고 국민들이 전통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146] 당장 제사상부터가 이런 것이 나이 든 분들은 홍동백서를 지키려고 하지만, 그건 1970년대에 정해진 규칙에 불과하다. 진짜배기 전통은 오히려 조상이 생전 좋아했던 음식이면 아무렇게나 놓아도 된다에 더 가깝다. [147] 제정신 박힌 사람 중 이런 걸 진지하게 복원하자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48] 전체 회원국이 50개국이 넘는다. [149]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는데, 2017년 국빈방한한 우즈베키스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이영애의 팬이고,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인기가 많기 때문에 환영 만찬에 이영애를 초청한 바 있다. 관련기사 [150] 특히 왕과 가까운 혈연관계일수록 심지어 왕이 될 수도 있다. [151] 예외로 군주의 임기가 있는 선거군주제가 있지만 왕은 물론 차기 왕 후보자들마저 테러의 타겟이 된다면 역시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한 선거군주도 엄연히 왕인데 대통령이나 총리처럼 권한대행 제도를 하면 군주의 체면만 구길뿐이다. [152] 걸핏하면 대권 잠룡 및 총리 후보군들이 나오고 있고 예비내각이든 대선 등 선거로 교체하면 되므로 대개는 군주제 시절의 인사들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역시 군주제 국가라도 입헌군주제에서는 그래도 낫긴 하다. 이쪽은 주기적으로 정권교체는 일어나니까. [153] 반군, 외국 등 [154] 가령 대통령이나 총리가 잡혔고 장관급 인사들이 무사하다면 부총리 - 그 외 장관 - 정무차관- 사무차관 순으로 권력을 이양하면 된다. 이미 법률로 정해져있어 논란거리가 없다. [155] 영국 왕실의 경우, 군복무를 못할 정도의 장애인이 아닌 이상 여자도 예외없이 죄다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엘리자베스 2세도 보급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156] 왕족은 아니지만 민족지도자 중 한 명인 백범 김구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병역을 공군 장교로 이행하고 있다. [157] 심지어 그 하후무조차 자신은 육도삼략에 능하다는 등 '스스로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했다. [158] 이승만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황실 직계과는 수백년 전에 벌어진 상태였다. 유비는 죽자사자 끊임없이 한 황실 복원에 나섰으니 고작 중산정왕의 후손이라는 별 볼것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황제인 헌제로부터 황숙 소리 들었지 이승만은 같은 태종 후손이면서도 고종에게 체포당해 고문도 당했다. 특히 당시 황실이 쩌리가 된 것도 아니었고 이러니 이승만은 자기가 황실과 가깝네 어쩌네 해도 먹힐 턱도 없었다. [159] 나라 망하고 한 말이 "나라가 망한건 슬프지만 양반, 상투, 황실이 없어진 것은 좋다"고 말한 사람이다. [160] 물론 본인은 외국에서는 자신이 프린스라고 소개했고(물론 당시엔 이 정도 지위쯤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은 동양인을 제대로 대해주지도 않던 시대였다. 그리고 영어에서 프린스는 왕자와 약간 다른 개념이라 저렇게 얘기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3인칭 사용 등 은근히 왕처럼 굴기도 했지만 후자는 조지 워싱턴도 약간 비슷했다. [161] 북부 네덜란드계 플랑드르 지역+부유층, 중산층과 남부 프랑스계 왈롱 지역과 서민층 간의 대립이 워낙 거세서 총선을 해도 연립정부 밖엔 나오질 않는다. [162] 단 이 평가의 기준은 현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 사학계 일부 학자의 주장대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전제군주국이면 이런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냥 그거 다 황실의 정당한 재산이다. [163] 대표적으로 신라 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 밀양 박씨, 고려 황제의 후손인 개성 왕씨 등이 있다. [164] 옛날에는 귀족들끼리 서로 통혼하느라 고인물이 되었으므로 족보를 잘 뒤져서 찾아 보면 의외로 여러 왕조의 피를 한꺼번에 이어 받은 인물이 발굴될 수도 있다. 물론 국민들이 이런 인물을 군주로 추대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 없는 일이지만. [165] 고려 왕실이나 조선 왕실(대한제국 황실)도 처음에는 이런 방법으로 옹립되었다. 다만 '국민들'의 추대라기보다는 '신하들'의 추대로 옹립되기는 했다. [166] 예를 들어 웨일스 공 윌리엄에 밀려서 영국 군주가 될 가능성이 낮은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 같은 경우. 실제로 영연방 국가로 영국 군주를 모시는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해리 왕자를 자국의 군주로 모시자는 여론이 있기는 하다. [167] 당장 영국 왕실만 해도 엘리자베스 2세가 본인 사후에도 윈저 왕조를 유지하려고 했던 일종의 유언 때문에 현재 찰스 3세 일가가 윈저 왕조로 유지되는 것일 뿐이지, 찰스 3세의 부친이 필립 마운트배튼이었기 때문에 왕가가 사실상 마운트배튼으로 바뀐 셈이며, 필립 마운트배튼 또한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씨가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생긴 성씨이고 본가는 글뤽스부르크이기 때문에 현재 영국 왕가는 사실상 글뤽스부르크로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 "글뤽스부르크"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왕가는 독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168] 전근대 유교문화권에서는 왕조 국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으므로 왕조가 바뀌면 국체도 자연스럽게 변화한다고 여겨 국호를 바꾸었다. 다만 이것은 '전근대' 시절에 그랬다는 것이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왕조와 국체를 동일시하는 인식이 많이 옅어졌고, 전근대 유교문화권에서도 대월의 예시처럼 왕조가 바뀌어도 국호는 그대로 이어받았던 경우도 존재하기에 이런 논의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169] 통일신라의 경우 이견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통일국가로 인정받는다. [170] 북한은 군주제 자체를 반대하므로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군주제를 하고 있는 건 비밀 남한이 어떤 군주를 추대하든 반발할 가능성이 크기는 하다. [171] 이는 중세 말에 정립된 계약법과 계승법 때문으로, 왕위에 오르려면 왕의 후손이어야 하며, 티끌만큼이라도 전대 왕의 피를 이어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예외가 있다면 '사위' 정도...가 되겠다.). 이 때문에 주로 프랑스와 독일이 왕가를 많이 수출했고, 현재도 어지간한 유럽의 전현직 왕조들을 보면 이 두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장 근현대 영국의 왕조 모두 독일에 뿌리를 두고 있고(하노버, 작센코부르크고타, 글뤽스부르크), 스페인(부르봉)과 스웨덴(베르나도트) 왕가는 이름부터 프랑스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폐위된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왕조도 이름 "사보이아"가 프랑스의 지명 중 하나인 "사부아"에서 따오는 등 프랑스계 왕조였고, 루마니아의 왕가도 독일계인 호헨촐레른 왕가였다(다만 2011년 "루마니아 왕가"로 개명했다). 핀란드도 스웨덴에서 독립하면서 독일 왕족을 수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72] 당장 왕족까지는 아니고 평범한 정치인만 해도 유럽과 한국의 정서가 판이하게 다르다. 전술했듯이 유럽에서는 귀화인이 국회의원에 당대표에 오르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헝가리계 2세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사례까지 있다. 하다 못해 순혈주의자로 악명을 떨쳤던 아돌프 히틀러조차 그가 주장했던 "아리아인"은 "금발에 벽안"을 기준으로 해서, "독일 민족"이 아니더라도 이 기준을 충족한 스칸디나비아계 백인도 아리아인에 포함될 수 있는 등, 단순한 1인종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가? 끽해봤자 필리핀 출신의 이자스민이 국회의원, 그것도 민의의 영향을 덜 받는 비례대표로 입성한 게 사실상 전부임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국민적인 시각이 어땠을까? 각종 인종차별적 악플에 시달렸던 게 한둘이 아니다. 겨우 비례대표 국회의원 한 번 한 이자스민도 이럴 지경인데, 아예 대통령이나 왕이 된다면? [173] 일례로 국민 코미디언 이주일이 국회의원을 1선만 하고 자발적으로 물러나면서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정치판에 큰 회의를 느꼈을 정도였다. [174] 이렇게 공화정의 수반에서 왕이 된 사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 아흐메트 조구(조구 1세), 장 베델 보카사(보카사 1세)가 있다. 다만 이들도 국민투표가 아닌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점에서 비교가 어렵다. [175] 현재 (주)남이섬의 업종. [176] 우주피스 공화국이 바로 그예시인데 빈민층을 위한 예술행위이다. [177] 물론 이석도 이방향으로 의도를 한건 아니지만 사실상 이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178] 윗 문단들에서 보듯 이승만이 단순히 공화주의자라서 그런 입장이 아니었고, 조선 왕조에 의한 피해자였기에 직접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 [179] 간혹 대한민국 정치를 군주제에 비유하는 것은 현재도 존재하지만 드립으로만 그칠 뿐이지 진지하게 공화제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180] 행정관리금이나 황실에 지급될 품위유지비, 황족 경호, 관저 경비 등 그간 없던 비용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 [181] 물론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국왕과 왕실 인사들의 경호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해리 왕자가 캐나다에 간 것은 왕실 공무 때문이 아니라 사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간 것이며, 해리 본인도 왕실에서 독립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캐나다 정부가 경호 비용을 지불할 책임이 없다. [182] 종묘제례나 사직제례 등에서는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인 초헌례(初獻禮)가 있는데 그 절차를 실행하는 사람을 초헌관이라 한다. [183] 이구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총재였으며, 이구 사후에는 양자 이원황사손(皇嗣孫)으로서 총재직을 이어받았다. [184] 황사손 이원은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민주주의 틀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본인의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해당 인물의 황실에 대한 시각이다. [185] 살아있는 궁을 만들자는 기치 아래 본인이 창덕궁 낙선재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186] 조선에 대한 비난을 떠나 영국, 일본 등 모든 입헌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있다.